2023-06-27 21:29:48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과 회원들이 지난 3월 29일 ‘소아과 폐과’ 선언을 하면서 울먹이고 있다.(대한의사협회 제공)
필자의 현장 감각이 무뎌졌을까. 최근 몇 년간 의대 정원은 늘려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을 가졌다. 의사가 많이 배출돼도 결국은 돈 되는 피부미용, 프띠성형, 물리재활치료, 비수술을 빙자한 비급여 치료, 또는 비급여를 통해 쉽게 돈 벌 수 있는 치료 아이템으로 의사들이 집중해 늘어난 의사들이 필수의료로 흘러들어가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올 들어 최근 몇 달간 산부인과 개원의, 소아과 개원의, 뇌졸중 치료 전문가, 심지어 돈 벌이가 될 거라는 정형외과 전문의(주로 대학병원)을 만나며 그들의 하소연을 들었다.
소아과는 진료수입밖에 없는데 환자는 줄고, 부모들의 불만과 항의가 쏟아지고 다른 의사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곤궁해 열패감을 느낀다는 하소연이었다. 드디어 지난 3월 29일에 ‘폐과 선언’을 했고 6월 11일에는 ‘소아과 탈출 세미나’를 개최해 보톡스, 하지정맥류 시술을 배운다고 야단을 떨었다. 그러면서 최근엔 소아과마다 환자가 북적거려 보통 20명, 많게는 50명 정도가 아침 일찍부터 대기한다고 한다.
산부인과는 출산 시 의료사고 위험이 상존하는 데 그에 대한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며 국가가 100% 피해구제를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제왕절개수술 비용 수가 원가보전율은 61%, 산과수술의 원가보전율은 64.5% 등으로 치솟는 인건비, 임대료, 생활물가 등을 고려하면 산부인과를 도저히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주로 대학병원 의사에 해당하지만 뇌졸중이나 정형외과 질환에 대해서는 저수가가 지속되고, 고된 업무에 지원할 후배 의사가 적어 필수의료의 존폐 위기를 맞고 주장하고 있다.
그야말로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신건강의학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등 이른바 ‘피안성 정재영’처럼 비급여 진료가 많고 전문의 수가 적어 환자 수요는 많고 위험은 낮은 데 비해 수입은 쏠쏠한 진료과 의사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의사들이 ‘배고파서 못살겠다’ ‘의학수련한 세월과 공력에 비하면 대가가 적어 억울하다’고 아우성이다.
의대생들이 인턴을 마치고 전문의 과정을 밟을 때 어느 진료과를 선택하느냐는 그들의 운명을 가른다. 돈벌이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좋은 과를 가지 못하는 의대생은 좌절하고 울분에 떤다.
최근 필자는 바쁜 일정에 ADHD를 앓고 있는 아들의 진료를 걸렀다. 그랬더니 무려 진료가 20일 뒤로 잡혔다. 의사가 해외 학회를 1주일가량 갔다 와야 하고 귀국 후에도 오전 진료만 한다고 한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환자가 상경해 구름처럼 몰려드니 예약이 꽉 차 도저히 진료일정을 더 앞당길 수 없다는 게 병원의 해명이다. 일정이 바쁘면 진료시간을 늘리고, 대진 의사라도 세워야 하는데 무슨 일정이 그리 바쁜지 환자에 대한 애정이 부족해보인다. 타고 나길 자기절제가 안 되는 아이들을 진료하면서 애틋하게 보살필 마음이 없는 것인가.
상당수 의사들은 휴진하는 날에 골프를 치기도 하고, 가볍게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며, 밀린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일부는 호화찬란하게 요트를 타고 음악·미술에 관한 고급 레슨도 받는다고 한다. 만약 내 주치의가 나를 팽개치고 이런 취미를 즐긴다면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지난 6월 16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고 주석중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 교수는 출퇴근 시간을 줄이려 병원 근처 아파트로 이주했고 식사할 시간이 없어 생라면으로 허기를 채웠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아니면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를 살려낼 자가 없다는 책임감으로 주말은 물론 명절에도 연이은 고난도 대동맥질환 수술을 해왔다고 한다.
아직도 세상에 이런 의사가 계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프리카 오지나 두메산골 어는 곳에서 무료로 의술을 베푸는 적잖은 의사들이 있지만 필자는 오히려 지옥 같은 한국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진료에 매진하는 주석중 교수 같은 의사분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의대 정원은 늘려야 한다. 이는 보건의료 전문가들이나 심지어 지금 수련을 받고 있는 의대생들마저도 상당히 공감하는 내용이다. 지금 한창 돈을 잘 벌고 있는 기성 의사들이 주로 증원에 반대한다. 의사 수를 늘리다보면 당연히 필수의료 분야로 의사가 공급되기 마련이다. 의사들 간에 비교해서 ‘상대적 빈곤’을 느낄 뿐이지 여느 전문직이나 일반 직장인에 비해 의사란 전문직이 ‘못 버는 것’은 아니다.
소아과나 정신과나 필자가 다니는 병원들은 의사나 간호사나 한결같이 냉랭하다. 소아과 의사는 돈 못 벌어서, 정신과 의사는 아쉬울 게 없어서 그랬다고 필자는 본다.
2035년 의사 인력이 1만4631명 부족할 것이라는 게 보건사회연구원의 전망이다. 의사 수를 산정할 때 한의사도 들어가는데 한의사가 양방의학의 보조개념이라고 생각하는 필자로서는 더더욱 의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양한방 의료일원화를 하고, 한의사들에게 소정의 의사교육을 시켜 의사로 전업시키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보사연의 추계는 앞으로 주4일제나 ‘워라벨’ 등 의사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쉬는 상황을 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 수는 더 모자랄 수도 있다. 보사연은 고령화로 의료수요는 급격히 늘어 2050년까지는 의사 수가 절대 부족하고, 이후에는 저출산 등의 여파로 인구가 줄어 다시 의사가 남아돌 것이라는 분석이다.
요즘 의사들은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이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논의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그를 탄핵하겠다는 등 난리다. 의사들은 이미 의사 수가 포화 상태이며 2037년이면 많은 병의원들이 줄도산 할 것이라고 엄살을 떨고 있다. 이들은 의료사고에 대한 과도한 책임에 대한 면책, 응급 및 필수의료에 대한 체계 재정립, 저수가 의료에 대한 보상 확대 등이 의대 정원 확대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협은 얼마 전 정부가 의대 정원 논의를 의정협의체가 아닌 다른 테이블에서 환자단체를 끼워 논의하자는 방침에 반발하면서 더 이상 복지부와 논의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하지만 소아과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 부족난이 촉발한 의대 정원 확대 이슈가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기성세대가 요즘 MZ세대를 ‘고생은 안 하려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자존감은 높고 자기해결능력과 창의력이 부족하다’고 종종 비판한다. 고생하기 싫어하고 자존감이 높다면 그것의 좋은 면을 보고 단순 관리직이나 사무직보다는 전문직을 늘리는 게 맞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반도체, 조선공학, 컴퓨터공학(소프트웨어) 등 인력수요가 많은데도 대학과 교육부는 정원을 늘릴 생각을 하지 않아 국가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
오죽하면 삼성, SK 등 대기업이 대학에 반도체 계약학과를 만들고. 국내 4대 은행이 핀테크에 활용할 금융 소프트웨어 인력을 양성해달라며 5억원씩 갹출해 20억원을 삼성전자에 기부했겠는가. 의사 인력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행정력을 동원해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 변호사 수가 늘면서 변호사의 횡포가 줄어들고 소송 수임료가 낮아졌듯이 의사 수가 늘어 국민에게 그 혜택이 돌아오길 바란다.
당사의 허락 없이 본 글과 사진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