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이란 지명이 고군산도(지금의 선유도)에서 유래했듯이 유인도 16개섬, 무인도 47개섬 등 63개 섬들이 모여 있는 고군산군도는 군산 여행의 한 축이다. 군산시 옥도면에 배속된 고군산군도와 몇 개의 섬들은 다른 서해안 남해안 동해안의 섬들과 달리 다정다감한 느낌을 준다.새만금방조제 축조로 뭍이 된 신시도 … 선유도 4종세트와 연결하는 축고군산군도 중 가장 큰 규모가 큰 게 신시도(新侍島)다. ‘새로 오는 귀인을 모신다’라는 뜻을 지닌 겸손한 기다림의 섬이었다. 어쩌면 신시도는 오랜 세월 육지가 되는 것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신시도는 육지가 됐다. 군산시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져 있는 새만금방조제를 달리면 신시도에 도착한다.신시도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라시대부터다. 김해김씨 성을 가진 자가 신시도 근방에 풍부한 청어를 잡기 위하여 섬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신라시대에는 문창현 심리(深里) 혹은 신치(新峙)로 불렸다. 깊은금에서 유래돼 해풍을 막아주는 아늑한 섬이란 의미를 겸해 주민들이 모여사는 포구를 지금도 지풍금(止風金)이라고 한다. 금이란 평상시에는 주민들이 포구로 사용하는 U자형의 만(灣) 같은 곳으로 외적들이 침입하기도 쉽다. 이 때문에 수군들은 이들 지역에 식량을 자급하면서 경계할 수 있도록 경작지와 초소를 조성했다. 수산물이 많이 잡혀 돈이 몰려서 금(金)자를 쓴다는 얘기도 있다. 신시도 북서쪽 앞바다의 횡경도가 신시도에 이르는 많은 풍랑을 막아준다. 신시도 바로 서쪽이 선유도 4종세트(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대장도)다. 신시도는 무녀도서 선유도로 이어진다. 선유도에서 다시 서쪽으로 장자도, 대장도로 연결된다. 고군산선유도 인근 섬들은 다 연륙교로 이어져 있다. 무녀도가 2016년 7월 5일에 무녀교를 통해 새만금방조제와 연결됐고 2017년 12월 28일에 왕복 2차선의 고군산로가 완전 개통돼 육지와 신시도, 선유도 4종세트가 모두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신시도로 불렸다. 신시도 북서쪽에는 해발 187m의 대각산(大角山)이 있고 남동쪽에 해발 142m의 신치산(新峙山)과 해발 198m 월영봉(月影峰)이 있다. 섬이 크지 않아 한나절 트래킹을 즐기기에 좋다. 신시도 주차장에서 시작해 월영재와 월영봉을 넘고 몽돌해수욕장을 지나 대각산 전망대에 올랐다 다시 신시도 마을로 회귀하는 총 6km의 노을길을 추천한다. 대략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월영봉에는 신라 대학자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월영봉의 자태에 반한 최치원이 월영봉에 돌담을 두르고 책을 읽으며 한동안 머물렀는데 그때 최치원의 책 읽는 소리가 중국에서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비유이기도 하다. 월영재와 월영봉으로 오르는 길은 길은 좁고 가파른 편이다. 월영봉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이고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새만금방조제와 무녀도, 선유도와 장자도로 이어지는 섬들이 바다 위로 봉긋봉긋 솟아 있는 것이 보인다. 물 맑은 바다, 푸른 등대의 꿈 ‘어청도’ … 일제시대 번성, 200명 사는 무인도 같은 유인도 곽재구 시인은 어청도를 ‘푸른 고기떼들이 푸른빛의 꿈을 꾸며 사는 섬’이라고 했다. 서해 영해기선 기점에 위치한 어청도는 중국과 우리나라 서북단 한계선에 있는 섬이다. 군산항에서 뱃길로 72km, 중국 산둥반도와는 300km 떨어져 있으며 뱃길로 2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어청도(於靑島)는 물의 맑기가 거울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한자로는 맑을청(淸)이 아닌 푸른청(靑)을 쓴다. 이런 이유로 곽재구 시인은 어청도를 푸른빛의 꿈을 꾸며 사는 섬이라고 한 것 같다.어청도에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1885년에는 일본 잠수부들이 고래를 잡기 위해 기항했고, 1898년에는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일본촌을 만들기도 했다. 1907년경에는 40가구 약 200명의 일본인들이 정착했다. 일제통감부가 1908년 발행한 ‘한국수산지’에는 당시 어청도의 조선 사람들은 대개 어업에 종사했던 반면 일본인들은 어업뿐만 아니라 교육자, 목욕탕, 약국, 두부제조업 등에 종사했으며 일본 청주를 제조하는 술도가와 일본식 유곽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으로 가는 항로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어청도 등대가 축조됐고 1930년대에는 선착장과 축대가 세워졌다.일본인들이 어청도를 일찌감치 탐낸 이유는 분명하다. 어청도 인근의 풍부한 어장과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어청도는 일본 오사카에서 중국의 다롄(大連)까지 운항하는 정기여객선이 다녔고 오사카(大阪)와 신의주 간 우편선의 기항지였다. 해산물을 비롯한 해상자원의 수탈은 조직적으로 행해졌으며 거대자본과 법적, 인적 자원을 동원한 수탈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1930년대 일본의 정어리 어획고는 세계 1위를 달성했으며, 1940년대 초에는 정어리 씨가 마를 정도로 무자비하게 포획해갔다. 이렇게 포획한 정어리는 일본의 화학공업을 비롯한 군수산업에 사용됐다. 섬에는 현재도 일본식 가옥과 금 채굴을 위해 파놓은 동굴들이 남아 있다. 특히 어청초등학교 앞 해군전용성당 입구 동굴에 금 채굴 흔적이 남아 있다. 한 때 유동인구가 2000명에 달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고작 200명 남짓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어업을 생업으로 하고 선착장 중심으로 몇 개의 식당과 민박집, 슈퍼 등이 늘어서 있다. 군부대가 있어 군인과 군속들도 거주하고 있다.여행객들이 어청도를 찾아오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어청도 등대를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군사적, 수탈적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의도와는 달리 너무 아름답다. 하늘이 맑은 날 푸른 물결을 배경으로 서 있는 하얀색 등대는 마치 동화 속 풍경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등대를 보기 위해서는 시멘트가 깔린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섬 특유의 빨간, 파란색 지붕을 한 집들이 이국적이다. 담장 밑에 핀 보라색 망초와 접시꽃들이 뜨거운 햇살 아래 힘겹게 펴 있을 뿐 인적이 없는 어청도는 흡사 무인도 같다.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이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강변하듯 펄럭인다. 중간에 파출소, 보건소, 어청초등학교를 지난다. 1925년 4월 1일 개교한 어청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적어 지난해 폐교됐다. 서로 엉켜 붙어 있는 향나무들만이 쓸쓸한 교정을 지키고 서 있다. 산 정상 능선에 서 있는 팔각정을 지나니 이내 등대의 모습이 보인다. 새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 몸통 위에 빨간색 지붕이 얹혀 있는 어청도 등대는 작은 집처럼 생겼다. 1층의 현관문과 2층의 창문 그리고 전망대… . 등대 주변에는 반원형의 돌담이 둘러져 있다. 등대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바다다. 유명 관광지 기념엽서에 등장할 법한 풍경이다. 많은 이들이 먼 뱃길을 달려 어청도로 향하는 이유다. 어청도 등대의 불빛은 100년 전에 그랬듯이 오늘 밤에도 어두운 바닷길을 밝힐 것이다. 소슬한 가을 바람이 불고 밤하늘에 별이 총총 빛나는 밤 푸른 어청도를 다시 찾아오고 싶다. 해안가를 따라 해안데크길이 조성되어 있고, 등대에서 보는 낙조가 일품이다. 볼거리로 치동묘, 봉수대, 당산 등이 있다. 치동묘는 중국 제나라 사람 전횡을 모시는 사당으로 치동은 담양전씨(潭陽田氏)의 뿌리라는 설이 전해진다. ‘신선이 노닐던 섬’ 선유도 … 자태 고운 명사십리 해수욕장, 호젓한 옥돌해변선유도(仙遊島)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무녀도(巫女島), 서쪽으로는 장자도(壯子島)와 대장도(大長島)가 있다. 선유도는 신설이 노닐던 섬이란 지명처럼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표현이 알맞은 섬이다. 명사십리 해수욕장, 갯벌, 산(망주봉과 대봉), 염전이 있고 낙조가 아름다우며 생선회의 육질이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맛이 난다. 포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명사십리해수욕장은 십리(4km)가 못 되고 실제로는 1.2km 남짓한 해안사구 해수욕장이다. 백사장 모래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뛰어다녀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곱다. 선유도 본섬에서 명사십리를 건너 북쪽 전월리 남악리 방면으로 올라가면 망주봉(望主峰)이 나온다. 옛날 선유도에 유배된 충신이 임금을 그리며 매일 이곳에 올라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얀 바위산에 매달린 낙락장송이 절개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퍼보인다. 여름철에 큰 비가 내리면 망주봉에서 7~8개의 물줄기가 망주폭포를 연출하기도 한다. 망주봉을 지난 남악리에 닿으면 선유도 최고봉이 대봉(해발 152m)과 마주한다. 등산로에서 정상까지 20분 정도 걸리며 선유도 일대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시인 곽재구는 “섬이 섬에게 편지를 썼나 보다”라고 적었는데 아마도 대봉에서 바라본 명사십리의 풍경일 듯 싶다. 남악리 맨 서편의 몽돌해수욕장은 100m 남짓한 자갈밭이다. 연인들이 몰래 숨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다. 남악리에서 남쪽 전월리로 향하는 길에는 갈대밭, 기도하는 손 모양의 빨간색 기도등대(선유도 북서편 방파제 등대)가 소소한 풍경을 만들어낸다.선유도 본섬 남서쪽의 선유봉(해발 112m)에서 바라보는 동편의 옥돌해변이 숨은 비경이다. 맑은 물이 넘실대는 자태가 곱다. 옥돌해변의 해변데크산책로는 호젓하게 걷기 좋은 길로 추천된다. 선유도 서쪽의 장자대교를 넘으면 장자도다. 장자도는 과거에 멸치잡이가 번성해 고군산군도 16개 유인도 중 가장 풍요로웠다고 전해진다. 장자도 남쪽 끝에 낙조대가 있다.장자도에서 장자교를 건너면 대장도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낙조를 촬영하는 포인트로 유명하다. 대장도 대장봉(142m)에 오르면 고군산군도를 잇는 길과 다리, 섬과 포구가 한눈에 다가선다. 대장봉 8부 능선에는 서울 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이 바위가 됐다는 할매바위가 있다. 선유도 동편의 무녀도는 무녀가 제사상을 차리고 춤을 추는 모습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녀도와 선유도를 잇는 선유대교를 건너면 멸치젓, 까나리액젓 익는 냄새가 자욱하다. 무녀도는 30~40년 전만해도 염전이 섬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넓었지만 지금은 수십평짜리 소금밭만 예닐곱개만 흔적을 남기고 있다. 마른 동풍이 불고 햇볕이 쨍쨍하면 타일 바닥 위에 핀 소금꽃이 예쁘다. 인근 갯벌은 어촌체험하기에 좋은 장소다. 무녀도의 쥐똥섬은 간조 때 길이 열리며 갯벌이 드러난다.
2021-08-13 20:38:40
군산에서 태어난 시인 고은은 이렇게 적었다. ‘내 고향 군산(群山)은 차라리 식민지 시대의 활력을 추억하는 정체된 도시로 상당한 시기를 지탱했다.’ 시인의 말대로 군산은 오래도록 일제 강점기 수탈의 전진기지로서 면모를 유지해왔다. 달리 말해 군산은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도시다. 단순히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의 잔재나 적산가옥(敵産家屋)이 남아 있다는 것을 넘어 군산이 일제강점기 시대를 온전히 넘어서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군산 토박이들이 고향의 ‘정서적 흔적’이 다 사라졌다고 한탄할 만큼 개발이 무자비하게 진행된 것도 사실이다. 무분별한 대규모 택지 개발, 새만금 배후도시로서 글로벌 국제도시가 되기 위한 개발 광풍, 일제 강점기의 흔적 그 어드메애 군산은 놓여 있는 듯하다.고대 작은 갯마을에서 군사도시, 상업도시로 성장 … 새만금 개발 광풍에 정체성 혼란금강 하구 좌안(남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군산은 동쪽으로는 익산시, 북쪽은 금강 건너편의 충남 서천군, 남쪽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접하고 서해 바다와 면해 있다. 군산 출신의 소설가 채만식은 작품 ‘탁류’(1936)에서 군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까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군산은 전라북도 장수군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이 무주, 진안, 금산, 영동, 옥천을 지나고 백제의 옛 도읍인 공주, 부여, 익산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쉬어 가는 곳에 있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금강 하구에 위치한 변방의 작은 포구마을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시산군(현 임피면), 부부리현(현 회현면), 마서량현(현 옥구읍)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옥구현와 임피현에 속했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 물줄기가 한데 모여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군산은 일찍부터 서해 중부지역 해상물류의 중심지였다. 그런가 하면 늘 외적들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백제군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서천군의 기벌포에서 싸웠다. 고려 우왕 6년에는 왜선 500척을 무찌른 진포대첩의 현장이 지금의 군산 내항이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56년에는 항구를 열어 ‘진포’(鎭浦)라 불렀다. 조선 태조 6년(1397년) 이성계는 군산도(群山島)에 수군부대를 배치하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군산도는 지금의 옥도면 선유도(仙遊島)를 말한다. 세종 때 수군부대는 내륙의 옥구군 북면(지금의 옥구읍 북쪽, 현 월명동 장미동 일대) 진포로 옮아갔다. 당시 진포의 군산진은 군산진성을 갖춘 병영으로 중함 4척, 별함 4척의 전함과 군사 461명, 초공 4명이 근무했다. 정 6품인 수군만호가 관리했다. 군산도란 지명을 뭍에 빼앗기면서 옛 군산도는 현재 선유도 또는 고군산도로 불리며 군산시 옥도면(沃島面)에 배속돼 있다. 이에 지금은 선유도를 비롯해 연도(煙島), 무녀도(巫女島), 신시도(新侍島), 야미도(夜味島 소야미도 포함), 장자도(壯子島), 대장도(大長島), 관리도(串理島), 말도(末島, 방축도 및 명도가 부속섬), 비안도(飛雁島), 두리도(斗里島) 등 10여개 섬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라 총칭한다. 횡경도, 소횡경도, 보농도, 십이동파도 등 40여개 무인도도 고군산군도에 속한다. 이 곳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죽도(竹島), 개야도(開也島), 어청도(於靑島)는 옥도면에 배속돼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군산군도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호남 해안의 방어를 중시했는데 여수 순천 해남 진도 등과 함께 군산에도 비중을 뒀다.서해안 중부 해상물류의 중심지 … 조선쌀의 33% 실려나가군산은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객주들도 많았다. 군산창, 군산포, 죽성리포, 경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객주들은 일제 세력에 대항해 영흥사(永興社)란 상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1899년 5월 군산은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일곱 번째로 개항했다. 군산항의 개항은 표면적으로는 군산 앞바다에서의 무단 어획과 논산 강경시장을 상대로 하는 밀무역선을 단속하고 자유무역 촉진과 관세수입을 노린 대한제국의 자주적 결정이었으나 이면에는 우리나라 호남평야, 만경평야 등 곡창 지대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일본의 끈질긴 요구가 있었다. 개항과 더불어 해안 일대에 조계지를 설치되고 개항장을 관리하는 옥구감리서를 비롯해 경무서, 재판소, 세관, 우체사, 은행, 전신사 등이 설치됐다. 군산역 부근에는 정미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지역이 형성됐다. 부잔교(浮棧橋), 대형 창고, 철도, 도로 등 근대적 항만 시설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군산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수탈 구조는 더욱 심화됐다. 호남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은 물론 전국 쌀 소출량 33%가 군산항을 통해 일본 열도로 빠져나갔다. 수출품의 90% 이상이 쌀이었으니 군산항은 그야말로 쌀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군산과 전주를 곧장 잇는 전군도로(1908), 대전에서 시작해 익산과 목포를 잇는 호남선(1912)과 익산과 군산을 잇는 군산선(1912) 등이 쌀을 비롯한 자원 수탈을 위해 설치되었다. 충남 천안과 아산 온양, 서천 장항, 전북 군산을 잇는 장항선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일본인 거주지에는 일본식 집, 일본식 절, 정미소, 술도가 등이 생겨났다. 심지어 항구에는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인을 상대하는 유곽까지 생겨났다. 오늘날 군산 내항 일대에 남아 있는 군산세관, (구)조선은행군산지점, 유곽, 일본식 건물인 일명 ‘히로쓰가옥’, 일본식 사찰 ‘동국사’(東國寺), 군산 원도심과 수산업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기 위해 1926년 개통한 터널인 ‘해망굴’(海望窟) 등이 모두 그 시대의 잔재이자 군산 근대문화를 구성하는 키워드이다. 군산 근대문화유산 – 군산세관과 옛 조선은행군산지점조선 농민들의 피땀이 서린 쌀을 쉴 새 없이 실어 날랐던 군산 내항의 번영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끝났다. 과거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퇴락한 어선 계류지로 전락한 내항에는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내항 갯벌 위에는 어선들이 표류하듯 정박해 있다. 갯벌을 가로질러 부잔교가 남아 있다. 일제는 조수와 만조의 수위 변화와 무관하게 대형 선박을 접안시키기 위해 일명 ‘뜬다리(부잔교)’를 고안했다. 3000t급 기선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설계된 부잔교는 1926~1933년에 모두 6기가 설치됐고 이 중 3기가 남아 있다. 군산여객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해망로에는 붉은색 벽돌의 일본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구군산세관 본관과 구조선은행군산지점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일제의 조선 민중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상징하는 이 건물들은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지붕 위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쇠침봉이 폐부를 찌르는 듯하다.내항의 군산세관은 개항 직후인 1899년 설치됐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08년 6월에 완공됐다. 2018년 국가 지정 사적 제54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호남관세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박물관은 소개의 장, 역사의 장, 공존의 장, 홍보관 및 포토존 등 8개 테마로 구성돼 있다. 약 1450점의 세관 관련 유물과 사료 등이 전시돼 있다. 건물 뒤편 산책로에는 군산세관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운영 시간을 제한하니 확인하고 방문하는 게 좋다. 스마트폰을 사용해 증강현실로도 만나볼 수 있다. 구조선은행군산지점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하면서 금융자본을 동원해 식민지 수탈에 앞장섰던 기관이다. 2008년 보수 복원 공사를 거쳐 ‘군산근대건축관’으로 재탄생했다. 로비와 금고 지점장실, 응접실, 2층 전시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당시 발권 은행이었던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화폐와 동전, 금고 등이 전시돼 있다. 다양한 문헌과 사진 등을 통해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한 수탈의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1km 떨어진 신흥동에는 ‘히로쓰가옥’으로 알려진 일본식 목조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군산 장미동, 신흥동 일대는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조계지로, 신흥동에는 주로 일본인 상류층들이 모여 살았다. 히로쓰가옥은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야시키(屋敷) 형식으로 지어진 2층 목조건물로 군산부 협의회 위원이며 포목상을 경영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1925년에 지었다. 건축 자재를 모두 일본에서 공수해 왔으며 잘 꾸며진 정원 등 일본식 주택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거주인 이름을 붙여 ‘히로쓰가옥’ ‘김혁종가옥’ 등으로 불렀으나 2009년 8월부터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가비’ 등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군산 동국사 … 포교 목적으로 식민지 침탈 앞장선 흔적 간직군산시 금광동(법정동은 삼학동)의 동국사는 1909년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 우치다부칸(內田佛觀 Uchida Bukkan)이 창건한 일본식 사찰이다. 동국사는 일본의 수탈이 주권 및 경제적 수탈에 머무르지 않고 종교까지 장악하여 식민통치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동국사 대문의 기둥에는 ‘조동종 금강사’라는 현판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옆에는 소화연호가 적혀 있었으나 지금은 지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소화 연호는 마치 주홍글씨처럼 우리 문화재 곳곳에 새겨져 있어 시시때때로 치욕의 역사를 소환한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일주문, 천왕문 등을 갖춘 한국식 사찰과는 확연히 다른 동국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 에도시대의 건축양식을 따른 동국사는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느낌을 준다. 목재와 기와 등 건축 자재를 모두 일본에서 공수해 왔다. 대웅전은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 뒷벽에는 일본인들이 유골을 보관한 봉안당이 있었으나 일제 패망 후 유골은 서해 바다에 수장되고 현재는 기단만 남아 있다. 보물 제1718호로 지정된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 유물 373점은 원래는 김제 금산사에 있던 불상이나 해방 후 동국사로 모셔 왔다. 동국사 절 마당에도 일제강점기의 잔재들이 수두룩하다. 1919년 일본 교토에서 제작해 수송해 온 동국사 동종의 몸통에는 일왕을 칭송하는 축원문이 새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군산 시민들의 기부로 제작된 ‘평화의 소녀상’과 2021년 이치노헤 스님(일본 아오모리현 운상사 주지)의 주도하에 일본 자금으로 세워진 일본 조동종 스님들의 반성이 담겨진 참사문비(懺謝文碑)가 세워져 마치 역사의 참회장에 와 있는 듯하다. 참사문비에는 포교활동을 명분으로 식민지 침탈에 앞장선 것을 참회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대웅전 뒤편에 일본산 대숲도 볼 만하다. ‘타짜’ ‘8월의 크리스마스’ 등 촬영한 군산 ‘영화의 거리’군산의 구도심은 근대 문화유산과 적산가옥 등 해방 전후의 독특한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어 영화 촬영지로도 자주 등장한다.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가 대표적이다. 그 뒤를 이어 ‘타짜’, ‘최종병기 활’, ‘남자가 사랑할 때’, ‘변호인’, ‘말죽거리 잔혹사’ 등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쟁쟁한 영화들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됐다. 거리 곳곳에 영화 포스터와 조형물, 현수막, 포토존 등 영화 촬영지임을 알리는 표식들이 붙여져 있다. 90% 이상이 군산에서 촬영된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 무대인 초원사진관은 영화팬들이라면 필수로 들려야 하는 성지이다. ‘타짜’와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인 히로쓰가옥, ‘남자가 사랑할 때’와 ‘타짜’의 촬영지인 중국음식점인 빈해원(瀕海園)과 철길마을 등 영화가 사랑한 풍경과 군산의 옛 모습을 만나 볼 수 있다. 1945년부터 문 연 가장 오래된 빵집 군산 이성당군산 중앙로 1가의 이성당(李盛堂)은 1945년 영업을 시작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75년 넘게 영업 중이다. 군산 사람치고 동국사는 몰라도 이성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성당을 찾아 일부러 군산을 방문하는 사람도 많다. 보통 가게 문 밖으로 20~30m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서울 서초동에 ‘햇쌀마루’란 분점을 낼 정도로 호황이다. 팥 앙금이 가득찬 단팥빵과 야채빵이 인기가 많다. 그러나 유명하면 말도 많은 법. 최근에는 제품의 원산지를 속인 혐의로 행정처분을 받는가 하면 여성 청소 노동자 산재책임 회피 의혹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2021-08-12 22:15:53
깊은 가을, 전북 부안은 이맘때쯤 가면 가장 좋다. 총천연색 자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단풍이 물든 대지는 새색시마냥 곱고 푸르디푸른 바다는 보면 볼수록 정겹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색창연한 문화재는 방문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먼저 읍내 석정문학관(부안읍 선은리)에 들러본다. 부안이 낳은 신석정(辛夕汀 1907~1974)은 한 세기의 절반을 교육자이3 시인으로 살았다. 일찍부터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많이 썼으며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한용운, 이광수, 정지용, 김기림, 서정주, 박목월, 이병기, 조지훈 같은 문인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2층으로 된 문학관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세미나실, 문학교실 등으로 나뉘어 있다. 석정의 소개 자료와 대표시집, 유고시집, 수필집, 전집, 묵서필, 고가구 등 유품들이 상설전시실에 놓여 있다. 석정의 시대별 시와 함께 가족과 지인 사진, 스승과 선후배 동료와의 친필 서한 등은 기획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입장료 무료. 문학관 맞은편에는 석정 선생의 대표작인 ‘촛불’과 ‘슬픈 목가’ 등이 탄생한 옛집(청구원)이 복원돼 있다. 문학관에서 10여 분 거리에 선생의 묘소(행안면 역리)가 있다. 외변산 풍광 수려한 바람모퉁이 … 모세의 기적 ‘하섬’ 읍내에서 부안의 서쪽 방면인 새만금방조제 쪽으로 가다 만난 바람모퉁이. 푸른 서해와 널따란 갯벌이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준다. 바람모퉁이는 바닷물이 드나들 때마다 바람이 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바람모퉁이에서 해안길을 따라 조금 가면 부안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부안댐은 외변산이 둘러싸고 있어 풍광이 수려하다. 전망대에 오르면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외변산과 그 아래로 물이 가득 담긴 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다시 돌아 나와 해안길을 따라 계속 가면 해수욕장이 있는 고사포에 이르게 된다. 고사포 해변 앞에 떠 있는 하섬은 매달 음력 1일과 보름 썰물 때면 2㎞에 걸친 바닷물이 갈라져 모세의 기적을 연출한다. 하섬은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있는 연꽃 같다고 해서 연꽃 ‘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고사포를 지나 만나게 되는 변산면 격포리의 적벽강(赤壁江)은 시인 소동파가 노닐었다는 곳으로 일명 사자바위로 불린다. 붉은 색을 띠는 바위 절벽이 수성당(水城堂)이 있는 용두산을 돌아 2㎞가량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위도와 칠산바다(부안 고창 영광을 아우르는 오목한 연안)는 한 폭의 그림으로 우리 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해넘이 또한 장관이다. 좀 번잡한 채석강에 비해 한결 호젓하게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다. 수성당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파도 철썩이는 바다와 갯바위를 마주하게 되는데, 문득 발에 밟히는 몽글몽글한 갯돌의 감촉이 더없이 좋다. 적벽강 단애 위에 올라앉은 수성당은 부안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칸 기와집 건축물로 절벽 주변에는 동백나무와 시누대가 무성하다. 전설에 의하면 수성당을 지키던 수성할머니(海神)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신당 인근 어부들은 오랜 세월 해신과 그의 딸 8자매신을 정성껏 모시고 있는데 매년 음력 정초에 음식을 차려놓고 궂은 일이 없고 무사안녕하길 기도를 드린다. 부안여행 1번지 채석강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채석강(採石江). 변산 안내지도 한 끄트머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곳이다. 해안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고서적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처럼 생겨 탄성을 자아낸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은 채석강을 더욱 빛나게 한다. 햇살과 노을, 해무(海霧)와 파도가 빚어내는 사중주는 자연의 속살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렇다고 언제나 채석강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때가 안 맞으면 일부만 볼 수 있으니 자연의 심술이라고 해야 할까? 채석강과 붙어 있는 격포항에 들어가 본다. 격포진이 있던 옛 수군의 근거지로 일직선으로 뻗는 방파제와 그 옆으로 닭이봉의 기암절벽이 볼만하다. 수십 척의 어선이 물살에 동동거리는 풍경하며 방파제를 거닐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이어진다. 인근의 30번 해안도로에서 전북학생해양수련원 앞 바다에 위치한 솔섬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일몰 풍경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사진작가들은 이곳의 일몰이 채석강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물이 빠지면 길이 70m 정도의 솔섬에 걸어갔다 오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격포항에서 오른쪽(남쪽) 해안도로를 타면 궁항(弓港·격포리)에 닿게 된다. 궁항 근방에 있는 궁항전라좌수영 세트장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계단식 촬영지로 동헌, 군관청, 수루 등등 총 21동의 건물이 어우러져 있다. 이곳에서 감상하는 낙조도 근사하다.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등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됐다. 요트 동호인들의 요람인 궁항요트장도 인근에 있다. 국가 대표급 선수들도 여기서 훈련하는데 각종 요트대회에서 상위권 성적을 거두고 있다. 여기서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선을 따라 남동쪽 줄포 방면으로 가면 작고 소박한 어촌 마을, 모항(茅項)이 나타난다. 어선 십여 척이 정박해 있는 모항 앞 바다는 천혜의 갯벌지대. 검붉은 개흙이 주황빛 햇살에 반짝이는 저녁 무렵, 모항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 마을 뒷산에는 천연기념물인 호랑가시나무 군락과 100년을 넘긴 팽나무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모항해변은 작고 아담한 해안선에 둘러싸여 있어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모항해변 뒤편 해나루가족호텔 옆으로 난 나무 데크 산책로를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푸른 솔밭과 산책로 너머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 풍경에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청신한 전나무숲길 내소사 … 곰소·줄포 개펄습지 모항에서 다시 해안도로를 타고 서쪽 석포 삼거리에 이르면 내소사 가는 길이 열려 있다. 절 들머리, 껑충한 전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600m의 전나무숲길은 언제 찾아도 청신하다. 시멘트길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에게 흙길이 주는 편안함과 푹신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창건된 진서면 석포리의 작은 절집이다. 쇠못 하나 안 쓰고 지었다는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은 화려하면서도 수수하고, 새가 그리고 날아갔다는 단청과 예쁜 꽃문양 창살은 바라볼수록 은근한 멋을 풍긴다. 절집 뒤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직소폭포를 지나 낙조 포인트인 월명암으로 갈 수 있다. 길은 다시 곰소만을 끼고 왕포(진서면 운호리)를 지나 곰소에 이르고 다시 우동-영전(보안면)을 거쳐 줄포에 닿는다. 한때 번성하던 줄포항이 사라지고 바다를 막아 곰소항을 새로 만들면서 원래 해변과 항구 사이의 공간에 생긴 게 곰소염전이다.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천일염전은 여름엔 여름대로 겨울엔 겨울대로 운치가 있다. 모항에서 곰소 염전까지는 15㎞(변산 마실길 6코스)이다. 국립변산자연휴양림을 출발해 곰소염전까지 걸어가는 쌍계재 아홉구비길은 20km 조금 넘는 거리로 5시간 남짓 소요된다. 곰소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쌍계재는 이 길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줄포는 개펄습지도 잘 보존돼 있다. 람사르 협약 습지로 등재될 만큼 상태가 우수하다. 곰소는 일찍이 젓갈산지로 이름을 날렸던 곳이다. 지금도 마을 왼쪽 편 곰소항 뒤쪽에 젓갈단지가 있다. 가게마다 갈치속젓,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청어알젓, 황석어젓, 개불젓, 토하젓 등 30여 가지의 다양한 젓갈들을 내놓고 판다. 보기만 해도 입맛이 살아난다. 김장철을 앞두고 요즘 외지인의 발길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줄포면 우포리에는 바다와 습지가 만들어 놓은 줄포만갯벌생태공원이 펼쳐져 있다. 염분을 없애고 생태연못을 비롯해 갈대숲길, 야생화단지, 잔디광장을 꾸며놓았다. 아이들을 둔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바닷게와 함초, 해국 등 다양한 염생식물을 볼 수 있다. 줄포에서 가까운 반계서당(보안면 우동리)에도 들러본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비조인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후학들을 가르치며 은거했던 곳이다. 발 아래로 줄포만이 훤히 내려다보여 풍치가 무척 아름답다. 복원된 학당과 선생이 생전에 쓰던 우물이 남아 있다. 인근에 작고 소박한 절집, 개암사(開巖寺· 상서면 감교리)가 있다. 호수를 끼고 들어가는 진입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그윽하다. 능가산 골짜기에 들어선 개암사는 이렇다 할 볼거리는 없지만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절 뒷산의 울금바위는 개암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울금바위까지는 700미터 남짓한 거리에 20분 정도 걸린다. 울금바위 아래에는 신라 고승 원효가 암자를 지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원효굴이 있다. 가을의 끝자락, 푸른 바다와 유서 깊은 문화재, 그리고 총천연색 산이 있는 부안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2019-10-31 13:4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