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군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해 공주시와 붙어 있는 목면(木面) 송암리에는 구한말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모덕사(慕德祠)가 있다. 면암 최익현은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의 태두로서, 최고령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가채리에서 태어난 면암은 동향 출신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년~1868년)의 제자로 문학과 유학을 익혔다. 그는 송시열과 송준길-권상하-한원진, 이간-이항로를 잇는 노론의 정통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남곤, 정인홍, 한효순,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여러 번 결사 반대해 좌절시켰다.면암은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올라 숭문원,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주로 언관으로 지냈다. 언관의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반대하다가 눈밖에 났다. 1864년에는 흥선대원의 집권(1864~1873)과 개혁정책을 적극 지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북인을 등용하자 서인의 입장에서 비판적 시간을 갖게 됐다. 1868년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서원철폐령에 반대하며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관직을 삭탈당했다.명성황후와 여흥민씨 세력은 최익현과 손을 잡으려 애썼다.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됐고 반(反) 흥선대원군 세력과 제휴해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 등의 부실한 일처리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과격한 상소 내용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면암을 호조참판에 제수했다. 이어 그 해 10월 돈녕부 도정(왕의 친족이나 외척에 대한 계보나 보첩을 관장하는 정3푼 벼슬)에 올라 고종이 성년이 됐으므로 대원군이 섭정할 필요가 없으며 서원철폐령은 철회돼야 한다는 계유상소를 올려 대원군 10년 집권을 무너뜨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 측으로부터 왕의 아버지인 군부를 논박했다는 공격을 받고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됐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그 해 12월 도끼를 메고 개항을 해서는 안 되는 5가지 이유를 적은 이른바 도끼상소(持斧伏闕斥和議疏, 개항오불가 병자척화소)를 올렸다. 여러 척화소 중에서도 가장 논리정연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신의 머리를 도끼로 쳐내야 개항이 가능하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지만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4년간 흑산도로 위리안치됐다가 1879년에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갔다.면암은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 친일 집권세력의 갑오개혁(갑오경장)에 반발했다.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척사 운동에 앞장섰다. 유림 거두들이 단발령에 집단 반발하자 조정은 그 배후로 면암을 지목했고 내부대신 유길준이 체포를 위한 순검 1개 부대를 경기도 포천에 보내 투옥시켰다. 유길준은 직접 가위를 들고 최익현의 머리를 자르려했으나 완강하게 몸부림치자 끝내 삭발 기도에 실패하고 만다.면암은 1898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혹세무민하는 민당(民黨)이라 지적하며 제거(해산)할 것을 고종에 건의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 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과 함께 전북 태인(정읍)에서 의병을 모집해 일본군에 대항하다 전북 순창에서 체포돼 대마도로 이송다. 대마도로 이송된 면암은 일본군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단식 투쟁을 하다 1907년 1월 1일 순국했다. 면암 최익현이 청양 모덕사에 모셔진 이유는 그가 비록 포천에서 태어났으나 1900년 충남 정산(현 청양군 목면)으로 이주해 모덕사 내 ‘중화당’고택에서 기거했기 때문이다. 고택은 면암이 1900년부터 1906년 의병 봉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유물 전시관인 ‘대의관’에는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피혁류, 필기구 등 총 9종 128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서책과 서간문 등은 ‘춘추각’에 보관돼 있다.모덕사는 1914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건립했다. 고종이 내린 글 가운데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라는 구절에서 모자와 덕자를 취해 ‘모덕사’라 이름지었다. 매년 9월 16일 유림 주관으로 제향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다.해방 이후 백범 김구와 해공 신익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모덕사를 찾아 고유제를 지냈다. 1946년에는 김구가 환국고유제를 올렸다. 1953년 3월 13일에는 해공 신익희 선생이 6.25전쟁 중 북한군으로부터 수도 서울을 수복한 기념으로 환도고유제를 지내고 잣나무를 심었다. 당시 심은 잣나무가 지금도 모덕사 담장 너머 시원하게 자라고 있다.모덕사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성된 영당에는 ‘성충대의’라는 현판과 함께 면암 선생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영정은 면암이 73세 되던 해인 1905년 정산 현감으로 있던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현재 봉안돼 있는 영정은 서울대 이종상 교수가 모사한 작품이다. 매년 4월 13일 의병을 일으킨 날을 기념해 제향을 봉행한다.면암을 기리는 사당은 전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모덕사를 비롯해 경기도 포천의 채산사, 가평의 삼충단, 전북 군산의 현충단, 진안의 이산묘, 진안 마령의 영곡사, 순창의 지산사, 정읍의 시산사, 정읍칠보의 무성서원, 고창 도동사, 광주광역시 광산의 대산사, 전남 함평의 월악사, 곡성의 오강사, 구례 봉산사, 보성 모충사, 무안 평산사, 화순 춘산사, 유배지였던 제주도와 흑산도 등에 선생의 영장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에 순국에 일본의 이등박문과 중국의 원세개도 만사를 보내왔다고 하니 선비의 절개와 우국충정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할 것이다. 청양읍의 숨은 보석, 고운식물원 … 11만평 규모, 8600종 식물청양읍의 고운식물원은 1990년에 조성되기 시작해 2003년에 정식 개원한 친환경 자연생태식물원이다. 일반인에게는 자연휴식공간, 학생들에게는 생태학습장, 조경인에게는 실습장이 됐다. 11만3000평 규모로 사계정원, 튤립원, 단풍나무원 등 주제별 정원 33개이 꾸려졌으며 금낭화 하늘매발톱 땅나리 백작약 무릇 병꽃나무 생강나무 등 8600여종의 꽃과 나무, 희귀식물과 열대식물이 식재돼 있다. 2010년에는 환경부로부터 멸종위기 식물 서식지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돼 1급 보호지정 식물인 광릉요강꽃을 비롯한 진노랑상사화, 노랑붓꽃, 독미나리 등 50여종에 달하는 국내 희귀식물과 식물 유전자원을 보전관리 하고 있다. 희귀야생멸종위기 식물로 지정된 신안새우난초를 비롯한 국내 자생새우난초와 중국, 대만, 일본에서 수집된 희귀한 새우난초 120여종을 보유하고 있다. 숲 속 꽃과 수목들을 따라 각기 다른 분위기와 스토리가 있는 11가지의 환상적인 트레킹 코스와 산책로도 조성돼 있다. 아기들에게 인기 많은 습지원과 반딧불이 관찰장, 식물원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팔각정 전망대 등이 있다. 자갈길, 흙길, 잔디밭길을 맨발로 걸을수 있다. 숙박시설인 방갈로와 자체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 원예학을 전공한 청양 출신의 이주호 원장이 평생 모은 200억원의 사재를 털어 야산을 일구고, 세계 91개국을 다니며 식물원 운영 노하우 및 희귀식물을 수렴해 만들었다.입장료는 성인 8000원, 학생과 노인은 5000원이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고, 11월부터 3월까지는 오후 5시까지로 1시간 단축된다. 매년 8월말~9월초엔 청양 고추·구기자 축제청양은 청양고추와 구기자, 산나물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칠갑산을 중심으로 계곡과 분지 형태를 이루는 경작지는 부식질이 많고 배수가 잘 되는 토양과 일교차가 큰 기후 조건을 갖춰 고추와 구기자 재배에 최적의 조건이 된다. 매해 8월 말에서 9월 초에 청양 고추·구기자 축제가 열린다. 청양고추는 1983년 중앙종묘의 유일웅 박사가 경북 청송과 영양의 고추 재배 농가를 대상으로 3년간 연구 및 시험재배한 끝에 개발됐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청양군은 “1968년 중앙종묘가 청양에서 고추가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듣고, 청양군 농촌지도소 소장에게 품종을 골라줄 것을 부탁하고 좋은 종자가 선정되면 그 고추에 청양고추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며 기원이 청양임을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청양고추는 매운 맛을 나타내는 스코빌지수(Scoville scale, 캡사이신의 농도를 계량화)가 4000~1만2000에 달한다. 신라면의 스코빌 지수가 약 1300정도이니 3배 이상 맵다. 청양고추는 보통 잘게 썰어 음식에 매운맛을 더하거나 육수에 칼칼함을 추가하기 위해 사용한다.전국 구기자 생산량의 67%가 청양에서 생산된다. 구기자는 예로부터 복분자, 오미자, 사상자, 토사자와 함께 5자로 불리는 약재다. 진시황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면역증강, 뇌세포 활성화, 간기능 개선, 성인병 예방, 노화 방지, 피부 미용 등에 유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2-10-19 09:15:48
금강의 부여 구간을 흔히 백마강이라 한다. 백마강 서쪽에 위치한 충남 청양은 남쪽은 부여시, 동쪽으로는 공주시, 서쪽으로는 보령시, 북쪽은 홍성군과 예산군과 맞닿아 있다. 청양은 칠갑산, 우산(기룡산), 백월산(비봉산), 구봉산, 두타산, 관비산, 사자산 등 크고 작은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조선 후기 각지에서 발행된 읍지를 모아 편찬한 ‘여지도서’에 청양은 ‘세 방면이 높고 가파른 고개이며 서쪽이 조금 평평하며 지역이 외지며 토지는 메마르다’고 기술돼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권진(權縉 1572~1624)은 “낯위에 스치는 바람은 멀리서 불어오고, 마루 앞에 마주 뜬 달이 한없이 맑구나. 두 가지 맑은 천고의 이 땅, 취하여 쓴들 그 누가 다투리오.”라고 노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청양은 “본래 백제의 ‘고량부리현’이었는데 신라 때에 청무로 고쳐 임성군의 속현으로 만들고, 고려 초기에 ‘청양현’이라 고쳐, 고려 현종 9년에는 천안부로 불렀다가 홍주로 이속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청양은 6.25전쟁 때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부여에서도 청양은 오지로 통했다. 그 덕에 무분별한 개발과 도시화에서 거리를 두고 발전한 청양은 오늘날에는 환경오염이나 자연 훼손이 거의 없는 청정 지역의 대명사가 됐다. 칠갑산은 제천행사 올리던 신성한 땅 … 내포 지역과 전북 북부까지 조망청양의 칠갑산(七甲山 561m)은 해발이 낮아 험하지는 않지만 깊고 웅장한 산세, 울창한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비경을 자랑한다. 계절마다 색다른 자태를 뽐낸다. 봄에는 산철쭉과 벚꽃이 우아하게 단장한다. 여름엔 천연림과 시원한 계곡이 심신을 안정시켜준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지고, 겨울에는 천상 세계에 들어간 듯한 설경을 연출한다. 이 때문에 ‘청양 여행 1번지’ ‘충남의 알프스’로 불린다.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칠갑산은 백제의 도읍이 부여로 옮겨진 이후 국가 제천행사를 지내는 곳으로 신성시됐다. 북두(北斗)의 일곱 성인인 칠원성군(七元聖君), 또는 칠성(七星)을 뜻하는 칠(七)과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십간 중 으뜸인 갑(甲)에서 한하다. 천지만물 생성의 근원을 의미하는 칠과 천지시운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의 으뜸이 결합한 의미다. 칠갑산 고스락(정상부)은 꽤 넓은 평지이며 거기에 산제를 지낼 수 있는 상석이 있다. 사방이 훤히 트여있어 조망하기에 으뜸이다. 충남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어 내포(바다와 인접한 충남 서북부: 홍성 예산을 중심으로 서산 당진 태안 청양 보령 서천 아산 등을 아우름)의 산들을 비롯한 충남의 모든 산들은 물론 전북 북부의 산들도 볼 수 있다.지천(하류)과 잉화달천(중류) 등이 칠갑산의 깊은 계곡에 7곳의 명당을 만들었다 하여 칠갑산이라 부른다고도 한다.칠갑산은 차령산맥의 여맥으로 청양군 대치면, 정산면, 장평면에 걸쳐져 있다. 이들 3개면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정산 지역과 청양읍을 중심으로 북서부 청양 지역으로 생활권이 나뉜다. 정상을 중심으로 아흔아홉계곡과 까치내, 냉천계곡, 천장호, 장곡사 등이 우산살처럼 퍼져 있다. 여러 갈래 등산 코스 중 한치고개 산장휴게소를 경유에 정상으로 올랐다가 장곡사 쪽으로 하산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다. 약 3시간이 걸린다. 캠핑하기 좋은 아흔아홉계곡과 한때 국내 최장이었던 천장호 출렁다리칠갑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어을하천, 작전, 지천, 금강천 순으로 흘러내린다. 대치면 개곡리와 장천리, 장평면 지천리 등 3개 마을을 경유한다.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혀 굽어지는 물의 모양이 갈지(之)자 닮아 ‘지천’, 아홉 번 굽어진다고 해서 ‘구곡’이라 한다. 지천구곡은 개곡리에서 지천리까지 약 5km를 달린다.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계곡을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른다. 여름에는 휘어지는 곳마다 넓은 자갈밭과 모래밭이 펼쳐져 캠핑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까치내와 물레방앗간 유원지는 수심이 얕고 유속이 느려 물놀이하기에 좋다. 칠갑산의 존재를 알린 데에는 무엇보다도 1989년 발표된 가수 주병선의 ‘칠갑산’ 노래의 공이 크다.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느냐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애절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청양과 공주를 잇는 36번 국도를 따라 칠갑산 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갑자기 산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커다란 저수지와 그 위에 길게 늘어진 출렁다리가 보인다. 청양 여행에서 가장 핫한 칠갑산 ‘천장호 출렁다리’이다.2009년 완공 당시 길이가 207m로 국내 최장이자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긴 다리로 화제를 모았다. 출렁다리 주탑은 청양을 상징하는 붉은색 고추 3개를 모아놓은 형태다. 세계에서 제일 큰 고추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지자체가 하루가 멀다 하고 기록을 갈아 치우며 전국의 호수와 산골짜기에 길고 높은 출렁다리를 놓는 바람에 이제 천장호 출렁다리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칠갑산 천장호로 향하는 발길이 이어지는 이유는 칠갑산 아흔아홉계곡의 비경을 감상하기 위함일 것이다. 주차장에서 청양 칠갑산 천장호 출렁다리까지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향로정이라는 정자와 ‘콩밭 매는 아낙네’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하트 모양과 고추 모양으로 꾸며 놓은 포토존을 만날 수 있다. 호수 둘레를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고 등산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출렁다리를 건너오면 천장호 ‘황룡과 호랑이’ 전설을 만나게 된다. 천장호 인근에 살던 살던 아이가 몸이 아파 의원을 찾아가야 하는데 물이 불어 갈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천장호에서 승천을 기다리던 황룡이 승천을 포기하고 자신의 몸으로 다리를 만들어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본 호랑이가 감명을 받아 영물이 되어 천장호 인근의 주민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천장호를 건너 칠갑산에 오르면 악을 다스리고 복을 받아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해서도 많이 찾는다. 충남 삼곡사 중 한 곳, 가장 아름다운 길의 끝 ‘장곡사’ 칠갑산 골짜기에 위치한 청양의 장곡사(長谷寺)는 예로부터 공주의 마곡사(麻谷寺), 예산의 안곡사(安谷寺)와 함께 삼곡사로 불렸다. 긴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깊숙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절집들이다. 여기에 청양 운곡면 사자산(獅子山)의 운곡사(雲谷寺)까지 더해 사곡사로 칭하기도 한다. 장곡사 삼거리부터 장곡사까지 5.7km 구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봄이 되면 빼곡하게 심어진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팝콘처럼 터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벚꽃 터널 길은 싱그럽기 그지없다.장곡사는 벚꽃길이 끝나고도 한참을 더 달려야 한다. 아직 식사 전이라면 장곡사 가는 길에 포진해 있는 산채요리 전문점에서의 식사를 권한다. 마침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손두부 원조집이 눈에 띈다. 점심 장사를 끝내고 식당 마루에 길게 누워 휴식을 취하던 주인이 필자가 들어서자 귀찮은 기색 없이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이한다. 식당 주인의 달콤한 휴식을 깬 데 대한 미안함에 산채비빔밥에 손두부까지 주문한다. 직접 재배한 콩을 갈아 매일 아침 만들어내는 손두부는 시중 마트에서 판매하는 대기업표 두부들과 달리 단단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거칠지만 부드러운 두부 맛이 투박한 겉모습과 달리 속정이 깊고 부드러운 산마을 사람들과 꼭 닮았다. 산채비빔밥과 손두부로 주린 배를 채우고 나니 산마루 너머로 기울어가는 해를 보고도 마음이 느긋하다.장곡사는 ‘긴 골짜기’라는 뜻이다. 골짜기가 얼마나 길면 절 이름이 장곡사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장곡사는 칠갑산의 깊은 골짜기를 차로 한참 달려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잘 정비된 도로 덕분에 깊은 산속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장곡사는 신라 문성왕 때인 850년 보조선사 체징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을 뿐 그 이상의 내력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전각들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오후 2시가 넘은 시간 장곡사는 깊은 정적에 파묻혀 있다. 돌 축대 위에 운학루가 먼저 반긴다. 돌 틈에서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가 부지런한 절 사람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15년 전 눈 내리는 겨울날 찾은 장곡사는 고즈넉함을 넘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고요함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장곡사는 시골 촌부처럼 아무 일 없이 늙어갈 일만 남은 절 같았다. 그러나 2022년 다시 찾은 장곡사는 예상과 달리 공사가 한창이었다.세월의 깊이를 머금고 있던 설선당에서는 새 단장을 마친 여인네의 분내가 났다. 부뚜막에 조왕신을 모셨던 공양간도 몰라보게 말끔해졌다.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절도 사람 사는 곳이라 절 사람들에게 무작정 ‘세월의 깊이’를 강변하며 불편함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공양간을 기웃거리고 있자니 멀리서 대뜸 “들어가면 안 돼요”라며 고함을 질렀다. 어디선가 필자를 지켜보고 있던 처사가 질러대는 소리였는데 순식간에 불청객이 되어 버린 듯하여 씁쓸했다. 오래된 친구처럼 가슴에 품고 있던 장곡사에 대한 호감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다.장곡사는 보기와 달리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를 다수 보유한 알부자 같은 절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하대웅전과 상대웅전 등 두 개의 대웅전이 있다. 시기적으로 상대웅전(보물 162호)은 14세기에, 하대웅전(보물 181호)은 16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절의 최상급 건물이다.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과 대웅전을 같이 둔 사찰은 여럿 있지만 대웅전만 두 개를 보유한 절은 장곡사가 유일하다. ‘기도의 효험’이 뛰어나 장곡산을 찾는 사람이 늘자 하나 더 만든 것으로 보인다. 증개축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사찰로 통합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상·하 대웅전은 일직선이 아니라 서로 엇갈리게 배치돼 있다. 상대웅전은 동남향, 하대웅전은 서남향이다. 상대웅전이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상대웅전은 비로자나부처가 주불로 모셔져 있으며 협시불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하대웅전은 약사여래가 주불이며 비로자나불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다. 두 대웅전 모두 석가모니불은 모시지 않았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축대 아래 하대웅전이 다소곳하게 서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을 한 하대웅전은 조선 중기 건물이다. 쇠붙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은 목조 건물로 새삼스레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든다. 하대웅전에는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 모셔져 있다. 갸름한 타원형 얼굴과 반달 모양의 눈썹, 가늘면서도 눈 오똑한 코 등 당대 불상들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약사여래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문을 통해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조성된 불상임이 밝혀졌다.하대웅전에서 비스듬한 경사면을 따라 위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면 상대웅전과 응진전이 나오고 조금 더 위쪽 오른 편에는 삼성각이 자리 잡고 있으며 등산로로 연결된다.상대웅전 앞마당에 서면 멀리 칠갑산에 둘러싸인 장곡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힘겹게 산을 깎아내고 겨우 마련한 비좁은 터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상대웅전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왼편부터 철조아미타불좌상, 중심불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및 석조대좌(보물 제174호)와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 등 불상 3좌가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과 약사여래좌상은 원래는 철조 불상이었으나 현재는 금동불사를 하고 약사여래의 상징인 약함도 새로 만들었다.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은 신라 말이나 고려 시대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재로 석조대좌와 광배 역시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니 눈여겨봐야 한다. 이 석조대좌는 넓은 사각형 모양의 화강암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상대를 쌓아 탑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하대석에는 겹잎 복련 무늬가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귀꽃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 위로 5단의 받침을 세우고 앞뒤로 2개씩, 좌우로 1개씩 안상을 새겼다. 상대석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돌아가며 새겨 화려함을 더했다. 철조약사여래좌상 뒤편에 세워진 나무 광배에는 연꽃과 불꽃 모양을 새겨 화려함과 장엄함을 더하고 있다. 나무광배는 애초 석조광배였으나 후에 나무 광배로 대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곡사 철조약사좌상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영험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이와 함께 장곡사 미륵불괘불탱이 국보 300호로 지정돼 있다. 이처럼 장곡사에는 국보 2점과 보물 4점을 갖추고 있다. 장곡사 설선당은 충남도 유형문화제 151호로 지정돼 있다. 장곡사 초입에는 전국 각처의 장승 300여기를 재현한 장승공원이 있다. 장곡사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은행나무 가로수가 길을 이어 가을의 정취를 깊게 한다.
2022-10-18 17:12:44
성정이 부드럽고 너그러운 사람을 닮은 예산에는 천하의 명당자리가 많고 다수의 역사적 인물들이 배출됐다. 야심에 불타는 흥선대원군이 당대의 최고의 지관인 정만인에게 부탁해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기슭의 명당 터를 점지받았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가야사 자리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 곳 명당자리로 이장했다. 실제로 대원군 집안에서 고종과 순종 2대에 걸친 왕이 배출됐다. 그러나 명당의 효험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대한제국은 소멸됐다. 조승우 배우가 열연한 영화 ‘명당’은 흥선대원군과 명당에 얽힌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예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고,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겸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은 예산 신양면 신양리에서 출생했다. 역시 해박한 공산주의 이론가로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서기장을 지낸 이강국(李康國 1906~1956)도 경기도 양주 출생이긴 하지만 유년 시절을 예산에서 보냈다. 조선왕조실록 추사 評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했으나 비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5~1856)다. 추사는 조선 후기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예술가였다. 많은 이들이 추사 김정희를 추사체를 완성한 서예가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뛰어난 학자였다. 특히 금석학과 고증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기억해야 한다. 경학과 불교학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이해와 기여도 역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베이징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교서적 400여권과 불상을 구해 들여와 공주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를 ‘해동의 유마거사’라고 칭하는 이유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卒記)에는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 사망하면 사관이 당시의 세간의 평과 자신의 평가를 곁들여 고인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실록에도 실렸을 정도면 위대성이 입증됐다고 할 수 있다. 졸기에는 높은 벼슬을 지낸 대부(大夫)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들도 실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매우 박해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 정도만이 칭송의 글이 남아 있을 정도다.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김정희는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철종 7년 10월 10일 갑오시(음력), 전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해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다.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으며 그의 작은 아우 김명희(金命喜 1788~1857)가 더불어 울연(蔚然)히 당세의 대가가 됐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아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에선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 추사의 굴곡진 삶 … 백부의 양자, 윤상도 옥사, 제주 귀양추사의 생은 한 마디로 굴곡진 삶이었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년) 충남 예산에서 명문가인 경주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조부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노론의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이었다. 증조부는 김흥경의 넷째아들로서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남편, 다시 말해 영조의 사위(부마)가 된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었다. 김한신의 6촌인 김한구(金漢耉, 1723~1769)의 딸이 훗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됐다. 추사 집안은 영조 왕가와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추사는 김한신의 손자인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4살 때 후사가 없는 백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월성위(月城尉, 김한신) 가문의 봉사손(奉祀孫, 제사를 받드는 맏이)이 됐다. 추사는 14세 때 혼례를 올린 한산이씨와 사별하고 예산이씨와 두 번째 혼례를 올린다. 24살 되던 1809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819년에 대과에 합격해 순조의 아들이 효명세자의 스승이 됐고, 규장각 대교 자리에 오른다. 지금으로 치면 학예관이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과 병조참판을 역임했으나 그는 ‘규장각 대교’를 가장 명예롭게 여겼던 듯하다. 개심사 앞에 있는 그의 먼 친척 할머니의 묘비에 ‘11대 ‘규장각 대교’ 추사 김정희가 쓰다.’라는 서명이 이를 방증한다 하겠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강진 아버지가 강진현 고금도(지금은 완도군)로 유배를 가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 귀양살이를 뒷바라지하기 함께 유배길에 오른다. 임금이 지나갈 때 ‘아버지가 억울하다’며 두 번씩이나 격쟁을 한 일은 유명하다. 격쟁은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로 주로 서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단이었다. 추사 이전에 사대부에서 격쟁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추사의 생이 꼬인 것은 일찍 요절한 효명세자의 스승이었던 점과 그가 암행어사로서 안동김씨 집안 출신의 김우명을 비인현감(지금의 서천군 서부의 비인면 일대) 자리에서 파직시킨 게 원인이 됐다. 이로써 그와 생부가 함께 유배를 가게 됐다. 윤상도 옥사는 1830년 8월 28일 윤상도, 윤한모 부자가 호조판서 호조판서 박종훈(朴宗薰), 종2품인 유수(留守)를 지낸 신위(申緯), 어영대장 류상양(柳相亮) 등의 탐관오리를 탄핵했다가 안동김씨 등 노론시파의 역공을 당해 능지처참을 당한 사건이다.추사는 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이듬해 1836년(헌종 2년) 성균관 대사성과 병조참판을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지만 잠시였다.1840년(헌종 6년) 이번에는 본인이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제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의 나이 55세, 동지사부사로 내정돼 북경으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이 무렵 안동김씨가 다시 집권한 게 발단이 됐다. 추사는 제주도 남서쪽 끝인 대정의 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혀 9년간 유배생활을 하고 1848년에야 풀려났다. 제주로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를 만나 써 준 대흥사 대웅보전, 무량수각 등의 현판이 남아 있다. ‘괴이함의 자기화’ 추사체 … 채제공, 어린 추사 글씨 보고 “인생 고달플 것” 예감 추사가 7세 때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추사의 집 앞을 지나다 대문에 써 붙인 ‘입춘대길’이라는 글씨가 어린 추사가 쓴 글씨라는 말을 듣고 ‘이 아이가 글씨로 이름을 날리겠지만 일생이 고달플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예언은 놀랍게도 꼭 들어맞았다. 이듬해에는 실학의 대가이자 노론 북학파인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가 추사 고택을 방문해 추사가 쓴 ‘입춘대길’ 글씨를 보고 ‘이 아이를 키워서 가르치고 싶다’라며 추사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박제가와 추사는 평생의 사제지간이 됐다. 추사체에 대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사람들은 추사체라고 쉽게 말하지만 추사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설사 안다 해도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했다.추사 김정희 동시대 문인이자 추사의 후배 유최진(柳最鎭 1791~1869)은 저서 ‘초산집저’에서 추사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추사의 예서나 해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해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해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해 이치를 따져본다는 게 불가하다.”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추사체의 본질을 ‘괴이함’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 괴이함은 법도를 지키면서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즉 내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게 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은 추사체에 대해 함부로 따라 하지 말라고 했다. 박규수의 <추사체 변천론>에 보면 그의 글씨에 대해 만년의 제주도 귀양살이 이후에는 드디어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됐고 여러 대가의 정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됐으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 그래서 내 후생 소년들에게 추사체를 함부로 흉내 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추사의 연구가들은 한결같이 ‘추사체의 본질은 마지막으로 이루어 놓은 괴이함을 쫓지 말고 그분처럼 고전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것으로 나오는 창작 자세를 배우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음을 되새겨 볼 일이다. 북경에서 청나라 옹방강 만나 ‘금석학’ 눈 떠 … 북한산, 황초령 순수비 해석 24살이 되던 해 추사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으로 가는 이조참판인 생부(김노경)의 수행원 자격으로 북경 땅을 밟게 된다. 북경은 추사의 삶에서 키워드 중의 하나이다. 추사는 그곳에서 자신의 위대한 스승들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게 된다. 옹방강과 완원은 당시 청나라 제일의 학자로 두 대학자와의 학문적, 인간적 교류는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추사의 나이는 24세였고 옹방강의 나이는 78세였으니 실로 나이와 국적을 뛰어넘는 교류었다. 옹방강은 추사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며 극찬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하고 인간적 정을 통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교통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두 사람의 이런 교류는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 세 통이 남아 있다. 추사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한 이들 편지에는 추사의 학문적 질의에 노학자가 답을 하는 형식이며 편지글 말미에 추사가 보내 준 개성 인삼 덕분에 불면증을 면하고 있다며 치하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추사의 기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추사는 청나라에 머무는 동안 많은 탁본을 접하면서 새로운 학문세계를 경험한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직접 ‘답사길’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청에서 배운 새 학문을 발전시켜 조선의 금석학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추사의 위대함이고 추사의 정신이다.추사는 1816년 직접 북한산 비봉에 올라 그동안 도선국사의 비로 알려진 석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냈다. 경북 경주시 암곡동 무장산에 위치했던 통일신라시대의 고찰 무장사(鍪藏寺)를 답사해 무장사비의 파편을 탁본해 무장사비임을 밝혀냈다. 또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순수비도 고석했다. 유홍준 전 청장은 “여태껏 이런 학문적 자세를 갖춘 학자는 없었으며, 그를 두고 사대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일본 학자가 먼저 알아본 추사의 가치와 ‘세한도’ 추사에 대한 연구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학자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동경제국대학 중국 철학과를 졸업한 이래 47살 때인 1926년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조선에 부임하기 전 그는 북경에 1년 동안 체류하면서 중국철학 자료를 수집했다. 그런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추사의 학문세계를 높이 사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17년간 추사 연구에 몰두하게 됐다. 국보 180호인 세한도(歲寒圖)를 처음 소장한 이도 후지스카 지카시였다. 세한도가 다시 고국의 품에 안긴 사연도 기가 막힌다. 세한도는 1840년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가 자신을 위해 두 차례나 북경에 가서 귀한 책을 구해다가 제주도로 갖고 온 제자이자 역관인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푸르른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해 그려 준 것이다.이 그림은 이상적 가문에서 떠나 130년을 떠돌다가 후지스카 지카시 손에 들어갔다. 후지스카가 세한도를 갖고 1943년 일본으로 귀국하자, 이듬해 거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가 서예가이자 동양화가인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다. 그는 후지스카의 집과 그가 입원한 병원으로 100일간 문안하며 그림을 넘겨달라고 간청했다. 감복한 후지스카는 “결국 내가 졌다”며 돈도 받지 않고 세한도를 건넸다. 석 달 뒤 후지스카 집은 폭격을 맞아 그가 소장한 상당수 책과 자료가 불타버렸다. 극적으로 세한도가 살아남은 것이다. 1958년 소전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자금이 필요하자 경매에 내놨고, 이를 개성 출신의 갑부인 손세기 씨가 사들였다. 2021년 8월 20일 손세기의 장남인 사업가 손창근 씨가 10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후지스카는 저서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간의 긴밀한 학문적 교류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추사 김정희라는 영특한 천재를 만나게 됐으며, 청조학 연구 제 1인자는 김정희’라고 밝히고 있다. 추사는 이미 사대가 아닌 당당하고 독자적인 경지의 학자이자 문장가 서예가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북경에서나 제주도 유배에서도 늘 그리웠던 고향의 추사고택추사는 북경에 갔을 때도 말년에 제주로 유배를 떠나 있을 때도 늘 ‘이곳’을 그리워하며 마음을 추스렸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고향마을 예산의 추사고택이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마을에 추사 김정희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 추사기념관과 체험관 등이 들어서 있다. 고택을 방문하기 전에 기념관에 먼저 들러 추사의 일생을 만나보면 좋다. 전시관을 차분히 둘러볼 시간이 없다면 10분 정도 길이의 영상을 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기념관에는 추사의 생애를 정리한 패널과 추사의 글씨들을 감상할 수 있다. 비록 진품은 아니어도 우리나라 4대 명필가로 꼽히는 추사의 글씨를 차분히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고증학과 금석학 대가의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 기념관과 고택 사이의 둥그런 언덕 위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이곳은 추사와 첫째 부인 한산이씨와 둘째 부인 예안이씨와의 3인 합장묘로 조성돼 있다. 추사는 1851년(철종 2년)에 헌종의 묘천 문제로 다리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추사의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김정희를 돌봐줬는데 헌종묘천 문제로 실수를 하게 돼 친구와 함께 엮인 것이다. 그는 1852년 68살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 벼슬을 하지 않고 경기도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이런 연유로 과천에는 후시스카 지카시와 그의 아들인 후지스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21~2006) 부자가 기증한 추사 친필 글씨 26점, 추사와 관련된 서화류 70여 점, 한국 영화자료 등 1만여 점을 보관하고 있는 추사박물관이 있다. 추사 묘소에서 100m가량 떨어져 있는 추사고택은 증조부인 월송 김한신이 영조로부터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에 건립한 집이다. 종택은 사랑채와 너른 마당 그리고 안채로 구성돼 있다. 마당에는 추사가 해시계의 받침 용도로 사용한 돌기둥이 남아 있다. 기둥에 새겨져 있는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아들이 추사체로 쓴 글씨이다.추사고택에서 눈여겨볼 것은 각 기둥에 적혀 있는 주련 글씨이다. 주련 글씨는 쌍을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인데 모두 한글로 해설이 달려 있어 천천히 음미해 보면 좋다. 사랑채를 지나면 ㅁ자형 안채 건물이 나온다. 마당이 있고 양쪽에 아궁이가 있고 문간방이 딸려 있다. 2칸의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대청마루가 연결돼 있는 구조다. 나무 기둥이며 댓돌, 채색되지 않은 목조건물이 예스러움을 잃지 않고 서 있다. 안채에서 나오면 분홍빛 상사화들이 활짝 피어 있다. 추사는 제주 유배 시절 특별히 노란색 수선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봄을 알리는 수선화를 보면서 자신의 유배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뒤켠의 가장 높은 곳에는 추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추사고택에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용궁리 백송’과 ‘화순옹주홍문’이 있다. 용궁리 백송은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백송의 종자를 가져와 고조부 묘 앞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화순옹주 홍문은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은 화순옹주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으로 터만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 고택에서 수덕사로 가는 길은 내내 곡식이 익어가는 풍요로운 평야지대와 사과 과수원 길이 이어진다.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린 예산사과가 발걸음을 잡아당기지만 해가 이미 서산에 걸터앉은지라 눈 호강으로 만족했다.
2021-09-26 16:12:49
예부터 충남 가야산(伽倻山)의 주변에 있는 고을을 내포(內浦)라 하였다. 내포는 ‘내륙 깊숙이 들어 있는 포구’라는 의미로 서산, 예산 말고도 오늘날에는 그 언저리인 태안, 당진, 홍성, 아산 등을 아우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가리켜 땅은 기름지고 평평하면서 넓다. 또 소금과 생선이 풍부해 사대부와 알부자가 많다. 산천의 수려한 맛은 떨어지나 야트막한 산과 높고 마른 땅과 낮고 습한 땅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였다. 가야산하면 경남 합천의 가야산을 먼저 떠올리지만 충남 서산시 운산면과 해미면, 예산군 덕산면 경계에 있는 가야산은 해발 678m로 서산은 물론 충남 서부 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꼽힌다. 가야산 동쪽에 위치한 예산은 백제시대엔 오산현(烏山縣)이었다가 신라시대에 들어와 고산현(孤山縣)으로 불리다가 고려 태조 때부터 예산(禮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예산의 동쪽에는 도고산, 덕봉산, 봉수산이 서쪽으로는 수덕사와 서원산, 가야산이 봉긋 솟아 있다. 그 사이로 드넓은 예당평야, 삽교평야가 포근한 이부자리처럼 펼쳐진다. 추석을 즈음해 황금빛 물결로 일렁이는 일대의 평야지대를 지나노라면 ‘풍요로움’이 무엇인지를 오감으로 느끼게 된다.근현대 명불허전 선사들의 수행지 ‘내포의 도량들’내포에는 대자유인 경허선사(鏡虛禪師 1849~1912)와 그의 세 제자인 수월(水月·1855∼1928) 선사, 혜월(慧月·1861∼1937) 선사, 만공월면(滿空·1871∼1946) 선사가 수도했던 여러 절들이 있다. 수월은 백두산 올라가는 고갯마루에 허름한 암자를 짓고 배고픈 길손에게 밥을 지어주고 짚신을 삼으며 보시를 했다. 혜월은 평생 괭이질로 황무지를 논밭으로 일구며 수도했다. 만공은 아주 쉬운 설법으로 대중을 교화했으며 만해 한용운(1879~1944), 김좌진 장군(1889~1930)과 허물없이 지냈다. 그는 세계일화(世界一花)를 강조하며 미물도, 왜놈도 부처로 봐야 이 세상이 모두 편안할 것이라고 설파했다. 이 곳 선사만행길은 예산 덕숭산(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慧寺), 서산 연암산(燕岩山) 천장사(天藏寺, 또는 천장암), 서산 상왕산(象王山) 남쪽의 일락사(日樂寺), 상왕산 북쪽의 개심사(開心寺).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서산마애여래삼존상, 옛 가야사터(남연군 묘)로 구성돼 있다.보원사지와 서산마애불은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가깝다. 보원사지에는 장대한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승려가 한때 1000명이 넘었던 절터로 쓸쓸함이 묻어 난다. 보원사지에서 개심사 가는 코스는 조붓한 오솔길이다. 개심사에선 서산 해미읍성이 한눈에 보이고 그 너머엔 바다가 있다. 개심사 심검당의 ‘구불기둥’이 오래됐고 정겹다. 경허가 어미니를 모시고 있던 천장사엔 스님이 용맹 정진했던 쪽방(1.3m×2.3m)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서산 도비산(島飛山) 부석사(浮石寺) 심검당(尋劒堂) 현판은 경허가, 큰방에 걸려 있는 부석사 현판은 만공이 썼다. 서산 간월암(看月庵) 현판글씨도 만공 것이다. 부석사엔 만공이 수행하던 토굴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이 절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 묘 이장한 옛 가야사터 서산, 예산, 홍성에 걸쳐 있는 가야산엔 수많은 절과 탑들이 있었다. 현재 확인된 옛 절터만도 얼추 100개가 넘는다. 그만큼 내포 가야산은 천하명당이다. 수정봉(453m)-옥양봉(621m)-석문봉(653m)-가야봉(678m)-원효봉(677m)이 연꽃잎처럼 빙 둘러 있다. 연꽃 한가운데 꽃심이 바로 옛 가야사터이다. 가야사는 1846년 흥선대원군이 일부러 불태웠다.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이구) 묘를 이장하기 위해서다.남연군 시신은 가야사 금탑자리에 묻혔다.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혈처이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황제(재위 1863∼1907), 손자인 순종황제(재위 1907∼1910)가 배출됐으니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다만 망국의 길을 가게 된 게 원통할 일이다.이 곳은 풍수지리상으로 ‘석중지토혈(石中之土穴)의 명당’이라고 한다. ‘사방이 돌로 쌓여 있는데 시신이 묻힌 자리만 흙’이라는 것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무덤 주위에 돌이 워낙 많은 데다 관의 회벽이 두껍고 단단했기 때문이다.가야산을 중심으로 북쪽엔 상왕산(307m), 남쪽엔 덕숭산(495m)이 있다. 상왕산엔 개심사와 일락사, 덕숭산엔 수덕사와 정혜사가 자리잡고 있다.수덕도령이 덕숭낭자 흠모하다 끝내 못 이룬 사랑에 ‘수덕사’ 됐다는 전설’ 덕숭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의 수덕사는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와 관련된 아름다운 전설이 전한다. 홍주(지금의 홍성) 마을에 수덕이란 도령이 살았다.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인 수덕 도령은 사냥을 나갔다가 먼발치에서 본 낭자를 흠모하게 된다. 수소문한 끝에 그 여인이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라는 것을 알고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했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에 마침내 덕숭낭자는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주는 조건으로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절이 완성되는 순간 수덕도령의 정염으로 가득찬 탐욕 때문에 불이 나서 절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마음을 가다듬고 절을 짓기 시작했으나 여인에 대한 정념이 일어 또다시 불이 나고 말았다. 세 번째에야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혼인했으나 낭자가 수덕도령에게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자 강제로 안으려 했다. 이 때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도령의 손에는 낭자가 신고 있던 버선 한쪽만이 쥐어져 있었다. 낭자가 있던 자리는 바위로 변했고 바위 옆에는 버선 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나 있었다. 이후 꽃은 버선꽃, 도령이 지은 절은 수덕사, 산은 덕숭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덕숭산 수덕사에 얽힌 애절하고 안타까운 전설이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립된 수덕사 대웅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국보 49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의 맞배지붕은 단청이 벗겨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수덕사는 대한제국 말 우리나라 선승의 계보를 잇는 경허스님과 그의 제자 만공스님이 도를 닦고 크게 일으켜 세운 곳으로 불교계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수덕사는 근현대사에서 숱한 화제를 낳은 문화계 인사들과의 인연이 깊으며 다양한 문학작품과 대중가요의 소재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렀고 최인호 작가는 1989년작 소설 ‘길 없는 길’에서 수덕사 방장 경허 스님의 일대기를 다뤘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로 시작되는 <수덕사의 여승>이란 대중가요 때문에 많은 이들이 수덕사를 비구니 사찰로 알고 있지만 수덕사는 비구 사찰이다. 1930년 수덕사 부속 암자인 견성암(見性庵, 일명 여승당)에서 많은 여승들이 수도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불교 전문 수덕사 선미술관 … 이응노 화가의 흔적 남은 수덕여관 일대, 나혜석도 머물러수덕사 일주문을 지나 해탈문을 지나면 ‘수덕사 선(禪)미술관’이 나온다. 2010년 7월 26일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전문 미술관으로 수덕사 대웅전의 맞배지붕을 본 떠 만든 건물이 돋보인다.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응노 선생의 사적지가 있고 냇가의 거대한 바위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화가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가로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해강 김규진을 사사하고 일본 가와바타 화(畵)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1958년 파리로 가서 정착해 창작활동을 했다. 1963년에는 19세기 프랑스 예술을 선도하던 기관이자 예술인단체인 살롱 도통(Salon d'Automne)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동백림 사건은 조작된 간첩사건으로 다수의 시인과 화가 등 문화계 인사들이 화를 당했다. 천상병 시인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고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생을 마감했다. 이응노 선생은 프랑스 정부의 탄원으로 1969년 사면을 받았고 1983년엔 아예 프랑스 국적을 획득하고 파리에 머물렀다. 1989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회고전 첫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응노 화가가 1969년 3월 석방돼 작품 활동을 하던 수덕여관과 우물, 그가 여관 앞마당 너럭바위에 남긴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수덕여관은 화가가 1944년 매입하여 6.25전쟁 당시 피난처로 사용하며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15년간 머물던 곳이다. 화가는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특히 개울 물가에 있는 암각화는 문자적 추상화로 화가가 동백림 사건에서 사면된 뒤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이곳에 머물면서 남긴 작품이다. 화가는 이 작품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답했다.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인 나혜석이 불교에 심취해 수덕여관에 5년간 머물렀으며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인 수필가 김일엽도 승려가 되기 전 이곳에 머물렀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가의 첫째 부인 박귀희(朴貴嬉, 1909~ 2001) 여사가 2001년까지 운영하다 세상을 뜨고 폐허가 된 것을 2007년에 복원했다.
2021-09-25 00:52:53
충남 공주는 금강과 계룡산의 본거지다. 일찍이 ‘춘마곡 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있었다. 봄 경치는 마곡사가, 가을 단풍은 갑사가 으뜸이라는 의미다. 마곡사는 공주 도심의 북서쪽인 사곡면 운암리, 갑사는 도심의 남동쪽인 계룡면 중장리에 있다. 이보다 규모가 작으나 공주의 3대 사찰로 꼽히는 동학사는 계룡면보다도 더 동쪽 코너인 반포면 학봉리에 있다. 과거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나기 전에는 호남고속도로에서 접근하기 쉬운 갑사나 동학사로 많은 탐방객이 몰렸으나 지금은 마곡사로 더 쏠리는 경향이 있다.마곡사는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화를 간직한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그러나 거대 관광사찰들처럼 번잡하거나 요란스럽지 않다. 공주의 봄은 계룡산 갑사에서 시작해 태화산 마곡사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초봄에 마곡사의 벚꽃과 백목련이 꽃비와 함께 떨어지면 붉은 철쭉꽃이 이어서 봄의 후반부를 장식한다. 태화산에서 흘러나온 맑고 차가운 마곡천(태화천 또는 희지천으로도 불림)을 따라 S자형 갓길로 몇 구비 돌다보면 마곡사의 입구인 해탈문에 이르게 된다.겨울을 지나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신록이 우거지는 마곡의 봄에 홀리지 않을 재간이 없으니 ‘춘마곡’이란 말이 생겨났다. 마곡사란 절 이름은 보조국사 지눌이 고려 명종 2년에 절을 재건하고 설법할 때 법문을 들으러 오거나 경치를 구경하려 오는 사람들로 골짜기가 가득 차니 마치 삼(麻)이 서 있는 것과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는 삼을 재배하던 골짜기에 지은 절이라 마곡사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매표소와 일주문을 지나면 마곡천을 따라 조성된 포장도로와 나무데크길이 절 입구까지 이어진다. 길지 중 길지에 자리잡은 마곡사 … 세조 ‘만세불망지지’라 찬탄 마곡사는 뒤로는 국사봉(392m), 서쪽으로는 옥녀봉(361m), 동쪽으로는 태화산(613m)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모양새다. 국사봉에서 발원한 마곡천은 절집을 관통하여 만곡을 이루며 흐른다. 마곡사 터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청계수가 흐르는 이른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자리다.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형태다. 절 터를 두고 도선대사는 ‘천만년 오래도록 절이 들어앉아 있을 큰 터이며 삼재가 들지 못하는 곳’이며 ‘유구(維鳩)와 마곡 두 냇가 사이는 천 사람의 목숨을 살릴만한 곳’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명종 재위 당시 천문학자 격암 남사고는 ‘유구마곡 양수지간은 만인의 생명을 살릴만한 곳이다’라며 기근이나 병란의 염려가 없는 십승지로 꼽았다. 피부병 치료 차 온양온천 행차길에 마곡사에 들른 세조는 매봉 아래 작은 봉우리에 올라 ‘만세 동안 없어지지 않을 땅’이라고 감탄하여 영산전 현판을 직접 써서 내리고, 잡역의 부담을 면하게 하는 수패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9세기 체징이 창건, 왕실의 태실, 충남 조계종의 본산마곡사는 9세기 신라 후기시대의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이 창건했다. 1172년 고려 명종 때 지눌 이후 범일, 도선, 각순 대사 등이 수차례 중수했다. 1851년(철종 2년)에 작성된 <사적입안>에는 마곡사가 640년(백제 무왕 41년, 선덕여왕 9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가 없다. 오히려 남아 있는 자료에 근거했을 때 웅진(공주) 사람이었던 체징이 창건했다는 게 더 타당하다. 1782년 대화재로 대법당을 비롯한 전각이 모두 소실된 이후 1788년(정조 12년) 제봉체주(霽峰體珠, 1780~1788 활동) 스님에 의해 대광보전 개건 등 의미 있는 중창이 이뤄졌고 왕실의 태실로 봉해지는 등 마곡사의 사세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조계종 제6교구 본사로 충남의 모든 사찰을 관할하고 있다. 남원에서 수행하고 극락교 건너 북원에선 대중 교화 마곡사는 사찰을 관통하는 개울을 경계로 수행공간인 남원과 교화공간인 북원으로 나뉘는 독특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원에는 중심 전각인 영산전 외에 홍성루, 선방인 수선사, 요사채인 매화당, 명부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1650년 경 중수)이다. 400년 세월을 감당하기가 버거운지 영산전 마룻바닥은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린다. 휘어진 나무기둥과 서까래, 빛바랜 단청, 우물 정자 모양의 천장에도 세월의 더께가 고스란히 앉아 있다. 불단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보처불 등 칠불이 모셔져 있다. 7불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마곡사를 목불의 보고라고도 부른다. 칠불 주변에는 소형 불상들이 가득해 천불전이라고도 불린다.사바세계를 벗어난다는 의미의 해탈문과 풍채가 당당한 사천왕이 지키는 천왕문을 지나 잉어때가 노니는 계곡물 위의 극락교를 건너면 북원으로 향한다. 북원은 교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주불전인 대광보전, 대웅보전 등을 비롯해 응진전, 관음전, 범종루, 심검당, 대향각 및 요사 등이 자리잡고 있다.주불전인 정면 5칸의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은 수직과 수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종축선상에 서 있다. 마곡사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기법이다. 두 건물은 규모와 건축미도 뛰어나지만 아름드리 싸리나무 기둥으로 지어져 더 유명하다. 화엄사상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보전은 닫집과 용머리 문양의 공포 그리고 수많은 벽화들로 장식돼 화려하고 장엄하다.대광보전 앞마당에 조성된 5층 석탑(보물 제799호)은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상륜부가 청동제 ‘풍마동’(風磨銅)으로 장식돼 있다. 풍마동은 바람을 받으면 마치 불이 난 것처럼 이글거리며 반짝인다는 구리를 말한다. 이런 양식의 석탑은 국내에서는 마곡사 석탑이 유일하다. 탑 왼편 응진전 앞에는 멋들어진 향나무 하나가 자라고 있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심은 것이다.남방화소의 화승의 맥을 잇는 마곡사 마곡사는 화승(畵僧)의 맥을 이어온 화소사찰(畵所寺刹)로 북방화소(금강산 유점사), 경산화소(수락산 흥국사)와 더불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남방화소의 본거지이다. 이곳에서 형성된 마곡사 화맥은 19세기 금호당 약효, 보응당 문성, 금용당 일섭 스님을 거쳐 불화의 거장인 순천 송광사의 석정스님으로 이어진다. 조선 말 마곡사에 상주한 스님이 300여 명에 달하고 그중 80여 명이 화승이었다고 하며 백련암 가는 길에는 국내 사찰 중 유일하게 근현대 불모(佛母, 불화를 그리거나 단청을 시공하는 사람) 6명의 업적을 기린 ‘불모비림’이 조성돼 있다.다양한 불화와 인물화 및 산수화들로 장식된 마곡사 불전들은 불모들의 '불화 갤러리'이다. 대광보전, 대웅보전, 영산전, 지장전 등에 그려진 영산회상도, 삼장보살도(동국대 박물관 보관), 칠성불화, 수월백의관음보살도, 나한도, 신중화, 금강역사도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대광보전 후면 벽에 그려진 수월백의관음보살도는 압권이다. 대광보전과 영산전의 신중화는 마곡사 화맥의 계보를 잇는 금호당 약효의 작품이다. 이 정도 규모의 불화가 조성되어 있는 사찰은 구례 화엄사, 양산 통도사, 순천 선암사 등 손에 꼽는다. 또 영산전 현판은 세조의 친필이다.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러 왔던 세조가 헛되이 돌아가며 남긴 글씨로 알려지고 있다. 대광보전과 현판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의 글씨다. 심검당 현판은 송하 조윤형, 심검당 측면에 걸린 마곡사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마곡사에서는 이처럼 덤으로 묵향도 느낄 수 있다.만공과 백범의 자취가 서린 곳 일제강점기 마곡사와 만공 스님과 백범 김구 선생의 인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만공은 마곡사 주지를 지냈고, 백범은 은거 생활을 했다. 두 사람 모두 독립운동가이다. 만공이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만공이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와 병합하려는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 1874~1955)와 친일 주지들에게 호통을 치며 단호하게 반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31본산 주지 중에서 만공만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 독립운동가로서의 만공의 삶을 재조명하고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백범은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군 중좌를 처단한 뒤 인천형무소에서 사형수로 복역 중 탈옥해 마곡사에서 은거 생활을 하던 중 원성 스님이란 법명으로 출가하였다. 응진전 옆에 백범기념관(백범당)과 해방 후 다시 찾아와 승려 시절을 기념해 심은 향나무가 멋들어지게 자라고 있다. 백범이 삭발식을 치른 삭발바위와 군왕대 및 백련암을 연결한 ‘백범 명상길’이 조성돼 있다.마곡사가 일제강점기에 만공, 백범과 같은 ‘위험 인물’들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호국불교의 성격을 띤 화엄도량이었기에 가능했을 듯 싶다. 마곡사는 춘마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을 단풍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태화산 자락의 적송이 잘 보존돼 5km 등산로가 명상과 걷기에 좋다. ‘솔바람길’ 또는 ‘솔잎융단길’로 불린다. 은적암 또는 백련암 입구에서 출발해 마곡사에서 관리하는 송림욕장을 거쳐 활인봉(423m)과 나발봉(417m) 등 태화산 능선을 타고 다시 마곡사 경내의 성보박물관(전통불교문화원)로 돌아오는 코스다. 중간에 세조가 만세불망지지(萬世不亡之地)라며 감탄했던 군왕대도 있다. 올 추석 들를 말한 명소, 올 가을 단풍 여행지로 마곡사를 추천한다. 단풍과 폭포가 아름다운 으뜸 사찰 ‘갑사’ 계룡산 서쪽 자락의 갑사는 고승 아도화상이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 창건했다. 대웅전 등 30여개의 전각이 조밀하게 들어선 가운데 천년고찰답게 산신불 괘불탱화, 월인석보판목, 동종 등 문화재가 많다. 당대 최고의 사찰이어서 갑사(甲寺)로 쭉 불리어왔다. 절을 창건할 당시 짐을 나르던 소가 냇물가에서 기절해 죽자 소의 공을 치하해 세웠다는 공우탑(功牛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높이 15m의 철당간 및 지주도 볼거리다.계룡저수지를 지나 동쪽의 갑사 입구로 이어지는 국도변은 은행나무가 즐비하다. 갑사탐방지원센터에서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약 2㎞(5리) 정도의 길에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울창한 오리숲이 조성돼 있다. 일주문 앞 1600년 된 느티나무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괴목대신제가 매년 열린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으로 향하는 길은 하늘을 가리는 거목들로 갑자기 산중으로 접어든 느낌이 든다. 갑사는 가을철 단풍 등산코스로 붐빈다. 갑사에서 동편 계곡길로 600여m를 올라가면 난데없는 물소리가 들리니 바로 용문폭포다. 10m쯤 되는 높이에서 물이 힘차게 떨어진다. 이곳에서 600여m를 더 오르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천진보탑과 신흥암이 나온다. 조금 더 등산하면 금잔디고개에 이른다. 여기서 동편으로 삼불봉고개, 남매탑, 신선봉, 장군봉을 거쳐 병사골(갑사의 정동쪽)로 내려가는 코스가 있다. 또는 금잔디고개→큰골삼거리→상신탐방지원센터(갑사의 북동쪽)로 내려갈 수도 있다.심불봉고개에서 남매탑을 거쳐 문수암, 동학사(갑사의 동남쪽)로 내려오는 짧은 거리의 코스도 있다. 동학사에서 다시 서쪽으로 돌아 관음봉→연천봉고개→갑사로 돌아올 수도 있다. 연천봉에서 신원사(갑사의 남쪽)로 내려가는 코스도 있다. 동학사는 비구니스님이 수행, 거처하는 절로 매년 4월 초순 벚꽃이 만개할 시기의 2km 꽃길이 아름답다.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연천봉 중턱 상원암 근처 남매탑(청량사지5층석탑, 쌍탑)은 아름다운 전설로 발길을 끈다. 한 때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갑사로 가는 길’이란 수필 때문에 왠지 50대 이전 세대에게는 막연히 가보고 싶은 그리움이 남는 곳이 남매탑이다.
2021-09-16 05:38:06
충청남도 동부 정중앙에 위치한 공주시는 동으로는 세종특별자치시와 대전광역시, 서쪽으로는 예산군과 청양군, 남으로는 계룡시·논산시·부여군, 북쪽으로는 아산시 및 천안시와 접하고 있다. 공주라는 지명은 읍 북쪽에 작은 산의 모양이 공(公)자와 같은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충북과 경기도의 경계를 따라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차령산맥의 일부가 공주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으며 무성산(613.6m), 국사봉(590.6m), 금계산(574.8m), 갈미봉(515.2m)등을 이루고 있다. 남쪽에는 국립공원 계룡산이 있다. 금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유구천, 정안천, 대교천, 용선천 등의 지류가 흐른다. 금강변에는 독락정, 한림정, 금벽정, 벽허정, 사송정, 쌍수정, 안무정, 원산정 등 8개 정자가 있을 정도로 금강은 아름답다. 조선의 문장가 서거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강의 남쪽과 북쪽에 자리 잡은 공주는 예부터 차령산맥 이남에 산천의 맑은 기운이 쌓여 큰 고을을 이룬 곳으로 여겼다. 충남을 둘로 가르는 차령산맥의 영향으로 장백산의 큰 줄기가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달려 계림에 이르러 원적산이 되고, 서쪽으로 꺾여 웅진을 만나 큰 산악을 이룬 것이 계룡산이라 하였다. 또 한반도에서 한강, 낙동강에 이어 3번째로 큰 금강은 장수 신무산 계곡에서 발원해 진안 용담을 거쳐 무주, 금산, 영동, 옥천, 청주 다섯 고을을 지나 공주에 이르러 금강이 되고, 사비강(부여군에 속하는 금강의 일부)이 되어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공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으며, 백제가 남하한 고구려 장수왕에 쫓기자 위례성(한성)에서 웅진성으로 천도한 475년(문주왕 원년)이후 538년(성왕 16년)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63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 패망 이후 당나라에 의해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고, 고려 때에 와서야 비로소 공주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조선 세조 때에는 진관이 설치되었고 선조 때에는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되는 등 충청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공산성, 4개 문루와 백제 궁궐터 간직 … 인조 피신, 조선 승병 합숙소한적한 교육도시 공주에 온 나라를 들썩거리게 할 뉴스가 전해졌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이어 2018년에는 공주 마곡사가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된 <한국의 산지승원> 7개 사찰에 포함되는 경사를 맞았다. 웅진(熊津)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로 64년간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공산성은 도읍지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으로 현재 사적 제12호로 지정돼 있다. 공산성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어 쉽게 쳐들어 올 수 없는 지형이다. 공산성(公山城)의 축성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백제 24대 왕인 동성왕(재위 479년~511년,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 축성했다고도 하며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를 하면서 궁궐과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또 이전부터 이미 성책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축성 당시에는 웅진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렸다.금강변 해발 110m의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쌓은 공산성은 애초 토성으로 축조됐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성으로 개축됐다. 공산성의 둘레는 약 2660m에 달하며, 성벽의 폭은 약 3m이다. 성 모습은 장방형의 산성으로 원래 있던 네 개의 문이 모두 복원됐다. 진남루와 공북루는 그런대로 원형이 살아 있었고 영동루와 금서루는 1993년에 복원한 것이다. 서문에 해당하는 금서루가 현재 정문처럼 사용되고 있으며 매표소와 관광안내소가 있다. 금서루에 오르면 성 밖으로 멀리 송산과 송산에 포근하게 안긴 듯한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숲이 우거진 성벽길을 따라 진남루(남문) 방향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추정 왕궁지를 만나게 된다. 백제 왕조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넓은 터에는 연지, 쌍수정, 쌍수정 사적비 등이 있다. 이곳에서 나무로 만든 지하 저장시설인 목곽고 등이 발굴됐다. 연지에서는 다량의 백제시대의 토기와 기왓장이 발견됐다. 공산성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1623~1649)와도 연관이 깊은 장소다. 1624년 (인조 2년)에 이괄의 난이 발생했다. 표면적으로는 이괄, 한명령 등 인조반정의 논공행상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세력이 일으킨 난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정확하게는 권력을 둘러싼 암투의 결과이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선봉에 섰음에도 이괄 세력에 부담을 느낀 서인들은 그를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켰다. 이에도 불안했던 서인은 이괄을 역모죄로 몰려고 계책을 쓰다가 분노한 이괄 세력이 1만명의 병사를 모아 남진한 게 이괄의 난이다.당시 인조는 반란 세력을 피해 공산성에서 8일간 머무르는 동안 두 그루의 나무 아래서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간절히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진압되자 인조는 이 나무들(현재 어떤 나무인지 모름)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로 공산성은 쌍수산성 (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 하나 인조가 공산성 피신 당시 임씨 성을 가진 농부가 인조에게 떡을 빚어 바쳤는데 그 맛이 하도 좋아 절미(絶味)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런 유래로 ‘임절미’라고 했다가 이후 ‘인절미’로 바뀌었다. 영조 10년(1734)에는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李壽沆)이 관찰사로 부임해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지어 지금의 쌍수정이 됐다. 쌍수정 사적비에는 당시의 상황들이 기록되어 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금서루에서 성벽을 따라 걸으면 진남루(남문)와 영동루(동문)을 거치면 광복루(光復樓)에 이르게 된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로 지정된 광북루는 원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다. 공산성에 주둔한 군대를 총지휘하던 누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용심각이라 불렀다. 광복 이후 보수되었으며 1946년 김구와 이시영 선생 등이 이 누각을 둘러본 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광복루’라 고쳐 불렀다. 백제시대 당시 신하들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던 임류각을 지나면 금강변(북측)에 면해 있는 만하루(挽河樓)와 연지(蓮池), 그 맞은편의 영은사가 나온다. 견고한 내벽이 둘러져 있는 연지의 깊이는 9m에 이른다. 평소에는 물을 저장했다가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 세조 4년(458)에 건립된 영은사(靈隱寺)는 세조 때에는 묘은사(妙隱寺)였다가 이후 영은사로 개칭됐고 이괄의 난 당시 공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隱寂寺)라 부르다가 영은사로 다시 고쳐 불렀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서 훈련받은 승병들이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했다고 전한다. 공산성에서 마지막 구간인 공북루를 지나 공산정에 닿는다. 공북루에서 내려다보는 창벽(蒼璧)의 기암절벽을 소동파의 적벽강에 비유할 정도로 절경으로 꼽는 이도 있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와 시가지가 어우러진 풍경이 마냥 평화롭게만 보인다. 공산성의 야경은 어느 계절에 와도 운치가 있어 데이트 코스로 제격이다. 금강보 설치로 인해 녹조가 창궐하고 공산성 일부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우울한 뉴스들도 백제의 고도 공주시와 금강이 빚어내는 풍광을 감상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누가 이곳에 서서 삼국시대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죽어 스러져 간 병사의 울음소리를 기억하겠는가. 그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로운 삶이 금강처럼 오래도록 흐르기를 바랄 뿐이다. 송산리 고분군 … 고고학 최대의 발굴, 무령왕릉은 한국판 ‘투탕카멘’ 공산성에서 1km가량 떨어진 웅진동에는 송산리 고분군이 있다. 무령왕릉을 비롯해 백제 시대의 고분 30여 기가 분포되어 있으며 이중 7기가 복원되어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한성시대에서 사비시대로 넘어가는 웅진시대의 매장 문화를 비롯한 백제 문화를 잘 보여준다. 1971년 해방 이후 한국 고고학 최대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송산리 고분군 중 벽돌 무덤 6호기에 물이 새 들어와 배수로 공사를 하는 중에 또 다른 고대 무덤이 발견된 게 무령왕릉이다. 이 무덤은 도굴의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고 발굴 결과 무덤의 주인공은 백제 25대왕 무령왕과 왕비로 밝혀졌다.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복동생이다. 백제 시대의 무덤 중 주인이 명확하게 밝혀진 최초이자 유일한 왕릉이다. 완벽하게 원형이 보존된 백제 무령왕릉의 발견은 한국판 ‘투탕카멘’에 비유되기도 했다. 연꽃무늬의 벽돌로 쌓은 아치형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해 금은 장신구, 석수, 동자상, 거울, 도자기, 지석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묘비석에 적힌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라는 글자는 전 국민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 고고학 역사상 최악의 발굴로도 꼽힌다. 당시 전문적인 고고학자와 발굴 인력 및 경험 등이 전무했던 탓에 현장 보존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수년에 걸쳐 진행될 발굴을 17시간 만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문화재를 자루에 쓸어 담았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니 발굴 현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잘못된 발굴과 보존으로 고분 내부에 금이 가고 물이 새는 등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최근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부여 능산리고분군은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문화재 격에 맞는 명칭도 중요하지만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등 백제유적지구로 등재된 만큼 원형 보존과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의 지양 등 각별한 관리가 요구된다 하겠다. 공주의 석장리 유적지는 연천의 전곡리 유적지와 함께 대표적인 국내 구석기시대 유적지다. 구석기시대 중 더 오래된 전기 구석기다. 2006년에 석장리박물관이 개장됐다. 1964년 남한 최초로 발굴된 유적지의 여러 출토물을 관람할 수 있다. 공주는 구석기시대부터 삼한시대, 삼국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적 타임머신을 간직하고 있다.
2021-09-15 01:57:04
보령에는 바다와 산만 있는 게 아니다. 역사와 관련된 유적도 꽤 있다. 대천 해수욕장에서 6km 떨어진 남포면 월전리에는 통일신라시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의 유적지가 있다. 이 곳은 1995년 남포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백도 혹은 보리섬으로 불리는 작은 섬이었다. 주변에는 간척으로 일군 논들이 바다를 대신해 펼쳐진다. 6두품 한계에 서럽게 살다간 고운이 바위에 새긴 글씨통일신라 말 대학자인 고운은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왔으나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6두품이라는 신분상의 제약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전국을 유람했다. 이곳 역시 그가 유람했던 장소로 병풍처럼 펼쳐진 암벽에 고운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섬의 모양이 보리쌀과 같다고 해서 맥도 유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는 마모가 심해 알아볼 수 없다. 섬 둘레 관람로 풍경과 멋진 한옥이 어우러진 죽도 상화원 최치원 유적지에서 서쪽 1.5㎞ 지점에는 죽도 상화원이 있다. 대나무가 많아서 죽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대천해수욕장(북쪽)과 용두해수욕장(남쪽) 사이에 있던 작은 섬이었으나 남포방조제가 건설됨으로써 육지와 연결됐다. 죽도 전체가 한국식 전통 정원인 상화원(尙和園)으로 꾸며졌다. 입구에서 6000원의 입장료를 받는 개인 수목원이자 정원이다. 비싼 입장료에 대한 거부감은 상화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진다. 또 입장권으로 음료수와 떡을 교환할 수 있으니 입장료에 대한 불만은 접어두자. 상화원은 한 마디로 대단한 곳이다. 개인이 꾸민 정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섬 둘레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관람 동선은 때로는 섬을 가로지르는가 하면 때로는 해안가 기암절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기도 하다. 울창한 숲의 싱그러움과 파도소리와 망망한 바다까지 변화무쌍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 전통 한옥을 충실하게 이건·복원한 한옥마을, 죽림과 해송 숲에 둘러싸인 빌라단지, 섬 전체를 빙 둘러가며 연결된 회랑과 석양정원, 각국의 신들을 모아 놓은 신의 정원, 파도소리 울려 퍼지는 명상센터 등이 한데 어우러져 한국적 미를 발산하고 있다. 장담컨대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잠수해서 건져올리는 키조개로 유명한 오천항, 충청수영성 자리 과거 보령 북부 지역의 중심부였던 오천항(鰲川港)은 서해안 천수만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천혜의 항구다. 북부 보령권은 모두 오천으로 통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영화를 누렸다. 화려했던 과거는 사라졌지만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1일과 6일의 오천장에서는 갖가지 신선한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잠수어업으로 채취한 오천 키조개는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오천의 특산물이다. 과거 오천항에는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이 있었다. 서해안 쪽으로 침략해 오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만든 석성이다. 조선 중종 중종 4년(1509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장생(李長生)이 축성했고 고종 33년(1896년)에 폐성됐다. 축성 당시에는 사방에 진남문(鎭南門)·만경문(萬頃門)·망화문(望華門)·한사문(漢舍門) 4대문과 소서문이 있었다. 동헌을 포함해 영보정·대섭루·관덕정·능허각 등의 건물은 모두 허물어져 사라졌고 서문인 망화문과 진휼청(賑恤廳 빈민구체 관청), 장교청(將校廳 객사), 공해관(控海館 충청수사의 집무실)의 내삼문(內三門, 출입문) 정도만 남아 있다. 내삼문은 과거에 오천초등학교의 교문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오천면 소성리 586번지 자리로 객사와 함께 옮겨왔다. 선착장 앞에 있는 경찰서 옆쪽 오솔길을 따라 아치형의 돌문인 망화문으로 들어서면 고목들이 서 있는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성벽으로 올라서면 안쪽으로는 성 안이 훤히 보이고 바깥쪽으로는 오천항과 호수처럼 잔잔한 서해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오천항은 깊은 내항이라 물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물 위에 떠있는 고기잡이배들, 가끔씩 항구 주변을 왔다 갔다하는 사람들, 인적 없는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나지막한 집들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진휼청 건물이 나온다.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촬영 장소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서해의 붉은 노을로 물든 천주교 순교성지 ‘갈매못성지’ 충청수영성에 나와 오천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갈매못 천주교 성지가 나온다. 예전에는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충청도 일대에는 유난히 천주교 순교성지가 많다. 한양과 수도권의 천주교 신도들이 박해를 피해 충청도 쪽으로 많이 숨어 들어오기도 했고 한양 밖에서 처형을 집행한 이유도 있었다. 서해 보령의 작고 잔잔한 바닷가에서도 5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잔인하게 처형당했는데 오천항 갈매못성지는 한국 천주교 역사의 3대 박해 중 마지막 박해에 해당하는 병인박해(1866년) 당시 최대 순교지이다. 수 백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10명뿐이다. 그 중 5명이 성인품에 올랐다.‘갈매못’이란 명칭은 순교지인 오천면 영보리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도 같아 갈마연(渴馬硯)이라 불렸던 것에서 유래한다. 갈매못성지는 한국에서 유일한 바닷가 순교지로 갈매못이 처형장으로 선택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당시 오천항은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충청수영이 설치되어 있었고 군함 1000척 및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던 군사 요지였다. 1846년 프랑스 함대 3척이 1839년 기해박해 때 희생된 프랑스 신부들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보령 앞바다 외연도(外煙島)에 정박해 있다가 항의의 서신을 두고 떠났다. 조선은 이를 영해 침입으로 간주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김대건 신부의 처형일을 앞당겼으며 1866년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를 내친다는 의미에서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항을 처형장으로 선택했다. 두 번째 이유는 고종의 국혼을 한 달 앞두고 한양에서 피를 보는 것은 좋지 않다는 무당들의 말을 듣고 한양에서 250리 떨어진 이곳 오천 모래사장을 처형장으로 택한 것이다.갈매못성지가 발견된 것은 1924년 충남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성당(金寺里聖堂)의 주임신부였던 정기량 신부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정 신부는 여러 사람들의 증인과 자료를 확인한 끝에 장깃대가 세워졌던 모래사장과 신부들을 묻은 구덩이를 확인하고 1926년 해당 부지 20평을 사들여 등기를 마친 후 1929년 한국천주교재단법인에 기증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부지 매입과 기념관 건립 등을 시작으로 성지 조성이 시작됐고 2006년 10월 31일 마침내 ‘승리의 성모성당’을 봉헌하게 된다.순교 성지에 들어서면 먼저 바닷가를 등지고 기도 14처와 예수성심상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그 옆에 순교 성인비가 서 있다. 승리의 성모성당과 성모상을 지나면 순교의 역사를 증명하는 자료들을 모아놓은 기념전시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작은 예배당이 있어 일요일이면 주민들이 이곳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승리의 성모성당 제대 뒤에는 전면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돼 있다. 이 스테인드글라스가 양옆으로 열리면 서해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갈매못성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성물이다. 갈매못성지 묵주에는 오천 해변가에서 채취한 모래가 담겨 있다고 한다. 갈매못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인 순교지로 천주교인들의 성지순례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이밖에 보령 섬여행을 추천한다. 보령 대천항에서 배를 타면 호도와 녹도를 거쳐 한두 시간이면 외연도에 들어갈 수 있다. 효자도, 원산도, 고대도, 장고도, 삽시도 등은 대천항에서 더욱 가깝다.
2021-07-31 03:37:44
충남 보령(保寧)은 일찍이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충청도의 산천 중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했던 고장이다. 보령은 서해안의 아름다운 해안산과 보령호라는 호수, 자연휴양림으로도 유명한 오서산과 성주산까지 산과 호수와 바다까지 두루 갖춘 전망이 탁 트인 명승지이다. 조선 연산군 때의 시인이자 학자 박은(朴誾 1479~1504)은 보령을 일컬어 ‘땅의 형세는 탁탁 치며 곧 날려는 날개와 같고 누정(樓亭)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돛대와도 같다’고 했다.보령군의 백제시대 이름은 신촌현(新村縣)이었다가 통일신라시대에는 결성군(結城郡, 홍성군 결성면을 중심으로 홍성군 남부에 있던 군)의 속현인 신읍현(新邑縣)이 됐다. 고려시대부터 보령이라 불렸다. 조선시대에 주로 보령현으로 불리었다가 1895년 홍주부 소속의 보령군이 됐다. 이어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당시 오천군, 남포군, 보령군이 합해져 보령군이 되었다. 보령군의 동북쪽에는 충남 서해안에서 가장 높은 오서산(烏棲山 789m)이 자리잡고 있다. 오서산은 보령, 청양, 홍성의 경계에 놓여 있다. 그 맥이 아래로 내려와 성주산이 됐다. 성주산 남쪽 기슭에는 9산선문 중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도량이었던 성주사(聖住寺)의 옛 터가 남아 있다. 성주사지, 옛 영화는 어디 가고 개망초만 무성할까폐사지 여행에서는 늘 ‘시간’ ‘영속성’ ‘덧없음’ ‘실존’이라는 단어들을 두서없이 떠올리게 된다. 작은 절들은 흔적도 없이 스러져가서 터조차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성주사지처럼 당당하게 존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에 진행된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기와 조각을 통해서 이 절터가 성주사터이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법왕 때 창건된 오합사(烏合寺)가 바로 성주사임이 밝혀졌다. 뜨거운 햇살 아래 성주사지로 들어서니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하얀 개망초들이 아우성이다. 간간히 찾아오는 사람들이 반가워 그리도 아우성인가 싶다. 망초 사이를 걸어 들어가면 광활한 터에 미끈하게 빠진 4기의 탑이 반긴다. 성주사지는 완전 폐사지라기보다는 막 완성된 절처럼 말끔히 정리돼 있다. 절터에는 금당터가 복원되고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4기의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낙네의 고운 미소처럼 푸근한 성주산(聖住山, 680m, 미산면과 성주면의 경계)을 비롯해 멀리 오서산이 켜켜이 둘러싼 모습이다. 참으로 다정다감해 보이는 산천이다. 짙은 구름 속에 가려진 오후의 저무는 해는 금방이라도 반대편 산등성으로 똑 떨어져 버릴 것만 같은데 넓디넓은 성주사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으니 문득 쓸쓸함과 슬픔이 밀려온다. 과거의 그 영화는 다 어디로 사라지고 이렇듯 뜨거운 여름 햇살과 풀만 무성한 것일까. 하얀 개망초가 마치 시간의 강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백제시대의 오합사는 전쟁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절이다.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이고 낮이고 절 주변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견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백제의 패망과 함께 폐허가 된 오합사를 다시 중창한 것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라의 무염대사(無染大師)였다. 무염대사가 오합사터에 머물며 절을 크게 일으켜 세우니 신라 문성왕이 ‘성주사’란 이름을 내렸다고 전한다. 성주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성주산문의 중심 도량이었으니 그 규모와 위세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승암산 성주사 사적’에는 성주사가 불전 80칸에 행랑채 800여 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의 규모라고 기록돼 있다. 또 많게는 25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으며 쌀뜨물이 성주천을 따라 10리를 흘렀다고 한다. 성주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 17세기 이후 폐사됐다.성주사지에는 석등과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과 대불좌 및 3층석탑 3기가 남아 있다. 중앙삼층석탑은 보물 제20호, 서삼층석탑은 보물 제49호, 동삼층석탑은 충남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들은 화려하지 않으며 반듯한 균형미와 간결한 세련미가 돋보인다. 위쪽의 상륜부가 떨어져 나간 흔적이 남아 있지만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밖에 석불입상 등의 유적이 있다. 금당터로 오르는 계단 양쪽 소맷돌에는 원래 사자상이 있었으나 1986년 도난당했다. 지금은 모형 사자상이 만들어져 있다. 문화재 보존에 경각심을 울리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전문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당해 누군가의 정원석으로 사용되거나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으니 당국의 안이한 문화재 관리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탑에서 조금 떨어진 전각 안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가 세워져 있다. 신라 진성왕 4년에 세워진 ‘낭혜화상보광탑비’는 높이가 4.5m에 달하며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 조선 시대 탑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귀부에 약간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낭혜화상탑의 비문은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동생 최인곤이 휘호했다. 낭혜화상의 행적과 업적을 적은 비문의 글자수가 5000자가 넘는다. 낭혜화상비문은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부도비,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부도비와 함께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일컬어진다. 낭혜화상탑비는 보령 남포오석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최고의 비석 재료로 인정받는 화강암 재료다. 파고다공원의 3.1독립선언비도 남포오석으로 제작됐다. 낭혜화상탑비가 이토록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남포오석을 쓴 덕분이라고 한다. 매달 두번 바닷길 열리는 무창포 … 백사장 길이 3.5km, 수심 얕고 평평한 대천해수욕장보령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하다. 수심이 얕고 고운 모래로 유명한 보령의 해변에는 머드 축제로 유명한 대천해수욕장과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무창포해수욕장을 비롯해 용두해변, 삽시도거멀너머해수욕장, 삽시도진너머해수욕장, 독산해수욕장, 호도해수욕장, 원산도해수욕장, 장안해수욕장, 오봉도해수욕장 등 크고 작은 해수욕장이 10개도 넘는다. 무창포해수욕장 입구에는 방역 요원들이 일일이 차문을 열고 방문객들의 열을 체크하고 손에 스티커를 부착해 주고 있다. 열이 나는 경우 부착된 스티커의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해변 풍속도이다. 손등에 스티커를 부착하고 바로 해변으로 향한다. 탁 트인 해변을 보는 것만으로도 코로나로 쌓인 묵은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듯하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기 전인 무창포 해수욕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아직도 물속에서 물놀이를 하는 사람, 물놀이를 마치고 나와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앉아 낙조를 기다리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숙소에는 들려오는 즐거운 말소리들 … . 아주 오랜만에 마주하는 삶의 풍경이다. 비록 마스크는 벗을 수 없었지만 실로 오랫만에 보는 일상의 모습에 뭉클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어느새 바다 위 구름 사이로 서서히 붉은 기운이 퍼져 나가고 있다. 붉은 노을은 순식간에 천지를 붉게 물들여 놓는다. 해지는 풍경은 왜 이토록 아름다운지 모를 일이다. 1928년 개장한 무창포해수욕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으로 백사장 길이 1.5km 폭은 50m에 달한다. 수심도 1~2m로 얕고 수온도 평균 섭씨 20도 안팎이어서 최고의 물놀이 장소로 꼽힌다. 그런가 하면 매월 보름과 그믐을 전후해 하루 2번씩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열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닷길이 열리면 바로 앞바다에 떠 있는 석대도까지 걸어서 다녀올 수 있고 갈라진 바다 속 땅에서 조개며 게도 잡을 수 있다. 무창포해수욕장에서 10여 분 거리에는 보령의 최대 해수욕장인 대천해수욕장이 있다. 백사장의 길이가 3.5km에 달하는 대천해수욕장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다. 백사장의 폭 역시 무창포의 두 배에 달한다. ‘대천바다도 짚어보고 건너라’라는 말이 있듯 바닷물이 얕고 바다 밑이 고르고 수온도 적당하여 국내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꼽힌다. 대천해수욕장의 모래질은 동양에서 유일한 패각분으로 조개껍질이 잘게 부서지면서 모래로 변모한 것으로 밀가루처럼 부드럽다. 세계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는 보령 해안가의 진흙을 이용한 보령머드축제는 이미 국제적인 축제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올해는 축제가 7월 23일부터 8월 1일까지 열린다. 인근에는 머드박물관까지 있다.
2021-07-30 11:32:48
부여 남쪽의 임천면 군사리(林川面 軍司里) 성흥산(聖興山, 해발 260m)에는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과 대조사(大鳥寺)가 있다. 임천면과 그 일대는 백제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가림군, 가림현으로 불리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천군으로서 군사와 농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흥산 중턱에 위치한 대조사는 백제 성왕 때 겸익(謙益)이 5년에 걸쳐 건립한 사찰로 ‘부여읍지’에 기록되어 있다. 겸익이 꿈에 관세음보살이 새로 변해 날아가는 것을 쫓아갔더니 성흥산 중턱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계시로 여겨 절을 짓고 석불을 세운 것이 대조사와 미륵석불이다. 대조사는 원통보전과 명부전, 산신각, 요사채로 이루어진 소박한 모습이다. 대웅전 앞쪽으로 작은 산봉우리들이 물결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진다. 대웅전 앞마당에 고려 초기에 세워진 삼층석불이 세워져 있다. 분홍색 백일홍이 활짝 피어 있는 배롱나무 옆 계단을 오르면 높이 10m의 거대한 미륵석불이 세워져 있다.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서 있는 미륵석불은 투박하면서도 온화한 자태다. 박아 넣은 듯한 눈동자가 바람 따라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곧잘 논산 관촉사의 은진 미륵(고려시대 최대 미륵보살 석조입상, 국보 323호)과도 비교되는 대조사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보물 제217로 지정돼 있다. 드라마마다 나오는 가림성 사랑나무 … 성벽 남쪽의 22m 독립수 대조사에서 차로 800m정도 산 정상 쪽으로 오르면 가람성터다.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만 넘어가면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풍광이 펼쳐진다. 사비 땅의 생김새가 한눈에 들어온다. 과거 백제의 땅,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다면 두말없이 이곳에 오를 일이다. 멀리 금강이 흐르고 논산의 강경 포구와 익산 미륵산(금마면, 삼기면, 낭산면에 걸쳐 있는 해발 430m의 산, 옛 용화산), 서천군까지 조망된다. 이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했다. 산성 초입의 400년을 산 느티나무 한 그루는 신비함 그 자체다. 드라마 ‘서동요’에서 무왕과 선화공주가 사랑을 약속하는 장면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이름값을 얻었다. 하트 모양을 거꾸로 세운 듯 넓은 원뿔 모양의 아름다운 수형 때문에 ‘사랑나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하트를 찾을 수 없으니 하트는 사랑꾼들에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해가 다 저문 시간에도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젊은 연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붉게 타오르는 석양빛 속에 서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는 그 자체가 역사다. 부디 느티나무 아래 사진을 찍는 여인들의 젊은 연인들의 사랑도 느티나무처럼 역사가 되길. 사랑나무는 지난 6월 2일자로 문화재청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지정예고 됐다. 수고는 22m, 둘레 5.4m, 수폭은 동서로 20.2m, 남북으로 23.5m다. 판근(板根, buttress root)이 발달돼 생육 상태가 양호하고 역사성, 경관성, 심미성이 뛰어난 나무로서 자연유산으로서의 지정가치가 높다는 게 지정의 배경이다.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20호로 지정된 뒤(1982년 11월 9일) 부여군에서는 거의 40년 만에 추가 등재됐다.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축조된 가림성(사적 제4호, 둘레 811m, 높이 3~4m) 남문지(해발 220m)의 옛 성벽 바로 앞에 위치한 느티나무는 백제를 위해 싸웠던 군사들의 희생과 산성을 쌓기 위해 부역 나온 민초들의 아픔이 서려있는 나무이다.가림성은 백제가 사비(성왕 16년, 538년)로 천도하기 전인 동성왕 때에 사비성과 웅진성을 방어하기 위해 사비성 남쪽에 축조됐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나당연합군에 패망한 백제인들의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매년 4월에 백제군의 충혼을 기리는 향토 제례행사인 ‘임천 충혼제’가 열린다. 부여군은 사랑나무의 천연기념물 지정을 계기로 아직 정비가 완료되지 않은 가림성 복원을 촉진하고 대조사 석조미륵입상과 함께 탐방코스로 개발할 계획이다.
2021-07-26 16:57:40
부여 여행에서 낙화암과 부소산성 일대가 제1의 포인트라면 정림사지, 궁남지, 능산리고분군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명소들이다. 망국의 한이 조금은 덜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광활한 대지 위에 우뚝 선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제9호이자 세계 유네스코문화유산인 부여읍 동남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 석탑은 목탑의 섬세함과 유려함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완벽한 구조미를 확립한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시원으로 평가받는다. 백제 시대의 탑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탑이기도 하다.입구를 들어서면 굳이 설명문을 읽지 않아도 정림사지 석탑의 완벽한 구조미와 세련된 형식미에 압도당하게 된다. 광활한 대지 위에 우뚝 선 정림사지 5층석탑은 홀로 왜소해 보일 법도 한데 당당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부여읍 군수리 정림사지 5층석탑 주변에는 금당터와 중문지, 강당지, 동편 건물지, 서편 건물지 등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석탑 뒤편의 전각에는 커다란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석불은 온존하지 못한 거대한 몸통과 제짝이 아닌 듯한 잘려나간 팔다리들을 모아 놓은 듯 괴이하다. 일그러진 입술 또한 자비로운 부처님 상하고는 거리가 멀게 보인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정림사는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궁,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의 한 가운데에 지은 왕실 사찰이다. 북위(北魏)가 낙양성(洛陽城)에 황궁과 영녕사(永寧寺)를 조성한 것과 유사하다. 당시의 절 이름은 지금 알 수 없고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됐다. 이후 정림사지라 부르고 있다.그러나 정림사지 5층석탑에는 아픈 백제 역사의 상처도 남아 있다. 1층 탑신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정립사탑의 탑신마다 치욕적인 글귀를 새겨 놓은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공을 기념하는 ‘대당평백제국비명’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과거엔 ‘평제탑’(平濟塔)으로 부르기도 했다.1층 1면에 24행, 2면에 29행, 3면에 28행, 4면에 36행 등 총 117행의 비문에는 ‘당 고종이 신라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31대 의자왕, 왕자 융, 효 등 13인과 대좌평 사타천복, 국변성 이하 7백여 명을 중국에 압송했고 당나라는 백제 멸망 후에 5도독과 37주 250현을 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옆의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탁본과 한역본을 볼 수 있다.이밖에 박물관에는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특히 사비백제 창건기의 삼존불입상과 소조불, 도용 등 불교 유물을 만나 볼 수 있다. 첨단 IT기술과 영상기술을 접목해 제작한 VCR 영상자료 역시 훌륭한 볼거리이다.궁남지, 최고(最古)의 인공 연못 정원부여읍 동남리 궁남지(宮南池)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성된 인공연못과 정원이다.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고 부른다.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왕 35년(634년)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리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 오고 못 언덕에는 수양버들을 심고 못 가운데는 방장선산(方丈仙山, 도교의 신선이 산다는 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 는 글귀가 나온다. 바로 궁남지를 이른 글이다.무왕은 일명 ‘서동왕자’로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무왕은 41년의 재위 기간 왕권을 안정시키고 신라 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말년에는 궁남지 등을 찾아다니며 풍류를 즐겼고 이는 백제 멸망의 단초가 됐다. 그의 아들이 바로 백제의 마지막 31대왕, 의자왕이다.궁남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정원문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멀리서 물을 끌여 인공연못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 경주 안압지 조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제를 점령한 신라왕자 김법민은 신라로 돌아가 궁남지를 떠올리면 월지라는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안압지다. 궁남지는 또 일본 조경문화의 시원이 되기도 했다. 다소 인공적인 일본 정원문화가 백제에 원형을 두고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궁남지는 이제 국내 최대 연꽃 서식지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백제시대에도 연밭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무왕이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남아 있다. 궁남지는 정비하기 전에는 수만평의 늪지대였다가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진행된 정비사업을 통해 지금의 1만3772평 규모의 우리나라 대표 연못으로 자리잡았다. 지금의 다리와 누각(抱龍亭)은 1971년에 세운 것이다.해마다 7~8월이면 연꽃들이 피어 올라 장관을 이루고 연꽃 축제가 열린다. 2001년 지금은 퇴직한 이계영 전 부여군 고도문화사업소 팀장이 홍수련 300촉을 심은 것을 시작으로 홍련, 백련, 황금련, 수련, 빅토리아연꽃(여왕꽃) 등 50가지가 넘은 연이 1000만송이 넘게 심어져 있다. 이제 궁남지는 백제역사 유적이라기보다는 연꽃 관광지로 더 이름을 얻고 있다. 2000년 이후 궁남지 일대의 논이 연못으로 편입되면서 지금은 11만6000평의 거대한 연못으로 변해 있다. 무왕이 서동인 까닭에 그 주변을 서동공원이라 부른다. 백제 왕릉원과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부소산성에서 10여분 떨어진 부여읍 능산리에는 백제 왕들의 무덤군인 능산리 고분군과 능산리사지 및 나성이 있다.능산리 고분군은 해발 121m의 능산리산 남쪽 경사면 중턱에 위치한 7기의 백제시대 무덤이다. 백제 무덤들 가운데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위치와 규모로 보아 왕이나 왕족 혹은 상류층의 분묘로 보인다. 7기 고분 중 가장 아래 동쪽에 있어 동하총이라고 불리는 1호분의 벽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고분군에는 안전철책이 둘러쳐 있어 출입이 불가하다.고분군에서 산책로를 따라 옆으로 가면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의 가묘가 나온다. 그 옆 능산리사지에서는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 287호)와 부여능산리 사지석조사리감(국보 제 288호)가 출토됐다. 능산리사지를 따라 나성(羅城)이 복원됐다. 사비성의 방어를 위해 쌓은 나성은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했다. 사비성으로 천도한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부소산성 동문으로 시작해 사비성 전체 약 8km를 감쌌다. 흙과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낮게는 1m, 높게는 3~5m에 이른다.백제나성은 평양나성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 중 하나다. 부여나성은 청산성, 청마산성과 함께 백제의 수도 보호를 위한 외곽 방어시설로 중요했다.어느 시기부터는 왕릉도 나성 밖에 조성했는데 능산리 고분이 그것이다. 이밖에 1호분을 모방한 고분과 가상 증강현실 기술을 접목해 꾸며 놓은 역사체험 공간 ‘아트뮤지엄’이 조성돼 있다.
2021-07-23 11:42:46
백제는 위례성(서울 송파구, 강동구 일대 추정)과 웅진성(충남 공주)에 이어 세 번째로 사비성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지금의 부여땅이다.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는 천도한 538년부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배할 때까지 약 123년간에 걸쳐 찬란한 백제 문화를 꽃피웠다. 찬란한 제2의 전성기를 보내다 의자왕의 과도한 전쟁 수행과 개인적 일탈로 망국의 길에 빠져들었다최근 부여가 과거의 낙후되고 쇠락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백제의 왕도로서의 영광을 되찾아가고 있다. 2015년 유네스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는 백제의 옛 수도인 공주, 부여와 백제의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익산 지역의 주요 유적지 8곳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부여에서는 관북리 유적지와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 등 모두 4개의 유적지가 등재됐다. 오랫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백제 문화가 기지개를 켜면서 땅 위로 솟아오르는 듯한 전율이 느껴지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최근 다시 찾은 부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전과 후로 나뉘어도 무방할 정도로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다. 도시는 아름답게 단장됐고 오랜 고증과 긴 공사 기간을 통해 백제 왕국의 왕궁이 복원돼 옛 왕국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이제 패망한 왕조라는 수식어는 잊어버리고 찬란한 고대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시간으로 여행을 떠나보자.사비시대의 전성기를 미니어처로 재현한 백제문화단지 부여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무조건 백제문화단지부터 둘러 볼 것을 권한다. 일반적인 백제 역사여행 코스는 백제문화단지-낙화암-관북리 유적지-정림사지-궁남지로 이어진다.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에 조성된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의 궁궐 사비궁과 백제의 사찰, 고분, 위례성, 마을 등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대규모 미니어처다. 예컨대 왕실 사찰인 능사가 능산리사지를 원형으로 삼아 그대로 재현됐다.비록 재현이긴 하나 말과 글로만 접했던 백제인들의 섬세한 건축 양식과 예술성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문화충격의 시간이 될 것이다. ‘왕들이 술먹고 흥청거리다 망한’ 유약하고 타락한 백제라는 인식 또한 일시에 불식될 것이다. 백제 옛 왕궁지인 관북리 유적지와 부소산성부여의 진산(鎭山) 부소산(扶蘇山)은 해발 106m 높이의 나지막한 산으로 한쪽은 완만해 앞쪽으로는 넓은 시가지가 펼쳐지는 반면 다른 쪽은 가파른 절벽을 이뤄 아래로 백마강이 흐른다. 금강의 부여 구간을 부여 사람들은 백마강(白馬江)이라고 한다. 여기서 백마는 흰말이 아니라 백제에서 가장 크다는 의미다. 마가 크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백마강은 부소산을 동쪽에 놓고 남쪽을 향해 달리다가 다시 동쪽으로 흘러 논산 강경을 거쳐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백마강 서편과 남쪽에 평야지대가 있다. 한 마디로 부여는 천혜의 요새를 갖춘 기름진 땅이다. 다만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작고 좁아서 평양이나 경주보다는 훨씬 못하다’라고 논하고 있다(신정일의 신택리지 인용).부소산 정상부에는 백제가 적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부소산성이 남아 있다. 산 정상부에는 둥그렇게 띠를 두른 듯한 테뫼식 성을 쌓는 한편, 능선을 따라서는 2.5km에 달하는 긴 포곡식 성(包谷式 城, 골짜기를 끼고 정상부와 능선을 이루며 축조한 성)을 쌓았다. 사비성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나성과 동서 방향으로 연결돼 있다.이렇게 2중 3중으로 방어벽을 쌓아 적의 침략에 대비했음에도 660년 밀려드는 나당연합군에 패배하고 말았으니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는 듯 싶다.부여(扶餘)라는 지명은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의미를 담았다. ‘새벽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 패망한 왕국의 수도로 각인돼 있을 뿐이다.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부소산성에는 삼천 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을 비롯해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천년고찰 고란사, 백제 군대의 곡식창고였던 군창대(군창지), 수복사지, 삼충사, 사자루, 영일루 등 백제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모두 부여읍 쌍북리에 있다.관북리 유적지는 쌍북리보다 남쪽에 위치해 부여 도심에 더 가깝다. 왕궁터, 대형건물, 공방, 저장시설, 연못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다.삼충사(三忠祠)는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등 백제의 세 충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성충은 의자왕에게 국운이 위태로움을 간언하다가 투옥됐다. 흥수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신라 육군이 탄현(炭峴 충북 옥천군 식장산 주변)을 넘지 못하게 하고 백마강 기벌포(伎伐浦 충남 서천군 장항읍 금강하구)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면 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진언했으나 의자왕과 간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백은 논산시 황산벌(연산면 일대)에서 김유신 장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일제 강점기 말엽에 조선총독부는 삼충사 터에 도쿄 신궁에 버금가는 부여 신궁을 지으려 했다. 백제에 뿌리를 둔 일본 왕가가 참배하기 위한 장소로 무려 6만5000평 규모였다. 조선인의 황민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신궁 공사는 초기에 중단됐다. 1957년 이 터에 새로 지은 게 지금의 삼충사다.삼충사 동쪽의 영일루(迎日樓)는 왕이 계룡산의 연천봉(連天峰 공주시 계룡면 738m)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나랏일을 구상했던 누각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연천봉에 올라 왕도가 바로 서길 천지신명께 기도했다고 한다. 다만 지금의 누각은 조선 고종 때 관아의 문으로 세운 집홍정을 현재의 영일루 자리에 이축한 것이다.영일루와 가까운 군창대는 군량미를 비축해 둔 창고터이다. 부소산성의 중심에 가깝다. 그러나 지금은 소나무가 우거지고 잡목에 묻혀 찾기 힘들다. 이들 유적은 모두 구비구비 이어지는 숲길에 자리 잡고 있으니 부소산성 여행은 숲길 따라 걷는 역사 여행이라고 해도 좋다.영일루의 정반대편(서쪽)에 반월루(半月樓)가 있다. 백마강과 구드래나루터, 구드래들판, 부여읍내를 두루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다. 생명의 근원인 일출을 보는 영일루에 비해 낙조가 더 어울리는 자리다. 백제에 대한 애수 탓에 왠지 달빛이 더 슬퍼 보일 수 있다.사자루(泗泚樓)는 1823년 임천군수(부여군수) 심노승이 부여 임천면 관아의 정문에 세운 누각을 1919년 부소산성의 정상부인 송월대(送月臺, 달을 보던 포인트) 자리로 이축한 것이다. 원래 이름인 개산루(皆山樓)였는데 의친왕 이강이 쓴 친필 현액에 따라 사자루로 개명했다.아름다운 부소산성 소나무숲 … 고란사에서 구드래까지 나룻배 유람부소산성 숲은 2002년 산림청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한 명품 숲이다. 부소산성 길은 전혀 고생스럽지 않다.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산책하듯 쉬엄쉬엄 걸을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실제로 편안한 차림의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눈에 많이 띈다.부소산성의 숲길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어느 길로 갈지는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늘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어느 길을 택하든 아쉬움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길에서는 깊고도 그윽한 숲의 기운이 느껴진다. 반면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길은 활기가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다.‘태자골 숲길’은 부소산성의 여러 숲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이 길은 이름 그대로 백제의 태자들이 거닐던 길이었다. 숲길을 따라 주변에는 태자들이 마셨다는 태자천과 궁녀사, 창포 군락지, 삼나무 시험 재배지 등이 있다.부소산성 숲의 특별한 가치는 우리 토종 소나무숲에서 찾을 수 있다. 부소산의 백제 당시 이름이 ‘솔뫼’였던 것으로 볼 때 소나무의 역사가 깊다. 이리저리 휘면서도 끝내 살아남아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들은 언제나 감동스럽다. 살아남기 위한 소나무의 치열한 생존법을 아는 순간 그 감동은 이내 안쓰러움으로 바뀐다. 소나무는 햇빛을 받아야만 자라는 나무다. 때문에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다른 나무들보다 더 높이 자라거나 다른 나무들이 웃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한다. 소나무는 특유의 성분을 품어내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이런 소나무의 천적이 있으니 바로 참나무이다. 참나무는 웬만한 환경에서는 다 잘 자라기 때문에 숲을 평정해 버린다. 이른바 천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 숲에서 60%가 넘었던 소나무 숲의 비율은 2010년대에는 23% 정도까지 떨어졌다. 자연적인 천이 외에도 재선충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소나무 숲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잘 보존되고 있는 부소산성의 우리 토종 소나무 숲이 더 귀한 이유이다.다만 지금의 소나무는 백제 당시의 소나무가 아니다. 신라가 부여에 불을 질러 7일 동안 화염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건국 이후 조림사업으로 새로 심은 것들이다. 그 중 일본 리기다소나무도 일부 포함돼 있다.한참 우리 토종 소나무숲에 머물렀던 발걸음이 이내 낙화암(落花巖)에 이른다. 낙화암은 백마강가에 서 있는 높이 40m의 절벽이다. 패망한 백제 왕조의 삼천궁녀가 이곳에서 몸을 던져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의 장소이다. 지금은 백제의 아낙들이 적군에 쫓기다 사로 잡혀 욕을 당하는 게 실어 투신했을 것이라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의자왕은 방탕한 생활로 백제의 멸망을 자초했다는 비난을 받지만 집권 초기에는 능숙한 외교와 부국강병으로 민심을 얻었고 효심과 형제애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패망한 역사에 대한 변명은 비겁할 뿐이다.낙화암 정상에는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를 1929년에 세웠다. 그 옆에는 ‘천년송’ 한 그루가 호위무사처럼 서 있다.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꽃처럼 몸을 날려 자신을 지키야 했던 그 절박한 목숨들을 기억하는지 백마강은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삼천궁녀의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아득하게만 보이는 백마강을 한참 동안 내려다 본 후 오른편(동편)으로 난 길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면 백제의 천년고찰 고란사(皐蘭寺)와 고란사 선착장이 나온다. 부소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고란사 역시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위태롭게 천년 넘는 세월을 견디어 오고 있다. 고란사에서 내려다본 백마강은 아찔하기만 하다.고란사 뒤편의 약수는 백제 왕들의 어용수로 유명하다. 백제왕들에게 고란사 약수를 증명하기 위해 고란사 주변의 기암괴석 사이에서 자라는 고란초를 물에 띄워 바쳤다고 한다. 고란사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고란사에는 고란정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를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얘기에 관광객들이 줄지어 두세 번 약수를 음미한다.고란사 바로 아래에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황포 돛배에 몸을 싣고 백마강을 유유자적한다. 부소산성의 빽빽한 숲 사이로 고란사와 낙화암이 보인다. 내려다봐도 아득하고, 올려다봐도 아득하다. 유람선은 서쪽의 구드래나루터까지 운행한다.백제시대부터 외국 사신들이 드나들던 구드래나루터에는 햇살받은 나룻배와 유람선들이 정박해 있다. 나루터 제방길을 따라 구드래조각공원, 관광단지 등이 조성돼 있다.
2021-07-22 14:52:30
기대 없이 찾았던 곳이 생각보다 훨씬 멋지다면 그 기쁨은 배가 된다. 아산시 송악면 봉수산 기슭에 자리한 봉곡사가 그런 곳이다. 외암민속마을에서 남서쪽으로 차를 몰고 2km를 달리면 광덕산(廣德山 해발 699.3m) 자락 강당골(강당계곡) 주차장에 도착한다. 여기서 봉곡사로 올라가는 700m 남짓한 소나무 숲길은 우리나라 ‘천년의 숲길’에 뽑힌 아름다운 길이다. 봉곡사 소나무들에는 일제 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1940년대 초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일제의 강제 수탈도 절정에 달하는데 산림자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봉국사 소나무들에는 휘발유나 항공유를 조달하려 일제가 소나무 송진 채취를 위해 V자로 파 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흉하게 남아 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하얀 뼈가 드러난 것처럼 처참한 광경이다. 그럼에도 건재하게 숲을 지켜내고 있으니 강인한 나무의 생명력에 저절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아픈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손을 덜 탄 봉곡사 소나무 숲에는 원시적인 신비감이 감돈다. 6월이면 숲에서 진동하는 밤꽃 냄새에 취하고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하얀 나비들의 날개짓 구경에 발걸음은 한없이 더디다. 수령이 최소 100년이 넘는 소나무들이 열병하는 아산 ‘천년의 숲길’은 봉곡사를 지나 갈매봉, 오형제 고개를 지나 강장리, 동화리, 궁평리로 이어진 총연장 26.5 km의 길로 천년비손길을 비롯해 모두 4개의 코스로 나뉘어 있다. 봉곡사(鳳谷寺)는 신라 진성여왕 원년(887)에 도선국사가 지은 천년고찰로 처음에는 석암사(石庵寺)로 불리다가, 1794년(정조 18년)에 중수 이후 봉곡사로 개칭했다. 고종 7년 서봉화상이 법당 및 요사를 중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봉곡사에는 대웅전과 고방, 삼성각 등이 남아 있다. 1795년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봉곡사에서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강학회를 열었다. 당시 금정찰방으로 재직하던 다산은 예산에 이익의 증손자인 목재 이삼환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강학회를 제안한 것이다. 강학회는 열흘 정도 열렸는데 당시 쓴 <서암강학기>에 낮이면 봉곡사 일대의 풍경을 즐기고, 밤이면 벗들과 함께 학문을 강하고 도를 논하는 강학회의 즐거움이 잘 드러나 있다.그런가 하면 만공선사는 1895년 7월 이곳에서 법계성(法界性)을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기념하는 만공선사탑이 봉곡사 아래 임도에서 조금 벗어난 숲 속에 세워져 있다. 세계일화라는 선사의 친필이 탑에 새겨져 있다. 이런 이유로 봉곡사는 불교신자의 성지로 꼽힌다. 절 뒤 산길로 2km쯤 오르면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는 봉수산(해발 534m)에 이른다. 봉곡사 아래엔 봉수산에서 흘러내린 유곡천 물이 담긴 송악저수지가 있다. 씨알 굵은 붕어, 잉어, 향어를 낚으려는 낚시꾼들이 모여든다. 아산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저수지 제방을 따라 3.3km 길을 드라이브 코스로 즐길 수 있다. 강당골 양화담과 강당사, 이간이 강학한 관선재 강당골 입구의 나무다리를 건너면 시원스레 쏟아지는 옥류계곡이 이어진다. 강당골의 양화담(陽華潭)은 용추(龍湫)라고도 불리는데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고목이 우거진 수려한 계곡과 넓은 암반 위로 흐르는 차가운 계류로 피서하기에 좋은 장소다. 인근에는 강당사(講堂寺)와 관선재(觀善齋)가 있다. 관선재는 호서학맥을 이어온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이 숙종 때 강론하던 곳이다. 외암문집도 여기에 보관돼 있다. 강당골을 따라 등산하면 심산유곡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호남과 호서를 가르는 차령산맥의 크고 작은 봉우리와 송악저수지 등이 그림처럼 펼쳐진다.봉곡사와 강당사보다 더 남쪽에는 공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광덕사가 있다. 산세가 크고 넉넉하다는 광덕사에는 잣나무숲과 장군바위 등이 볼거리다. 바닷가 접한 공세리 성당의 아름다움아산시 북측 인주면의 영인산(영인산 해발 363.5m)의 북쪽 바닷가에는 공세리(貢稅里)가 있다. 이 곳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의 하나로 꼽히는 공세리성당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아홉 번째, 충청도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다. 공세리성당은 조선시대 공세관창이 있었던 곳이다. 공세창은 충청도 서남 지역 (서산, 공주, 보령, 청양, 해미(서산), 천안, 덕산, 서천, 부여, 남포(보령), 예산, 당진, 평택, 온양, 청주, 회덕, 옥천 등)의 세곡을 거두어 수납했다가 조운해 서울로 올려 보내던 관청을 말한다. 공세리란 명칭도 공세창에서 유래했다.공세리성당은 1895년 구 양촌성당(구 합덕성당 전신)에서 분리돼 당시 이곳에 부임한 프랑스인 신부 에밀 드비즈(한국명 성 일론)가 처음 본당을 지었다. 설립 당시엔 10평 정도의 기와집을 개조한 건물이었으나 1922년엔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지휘해 오늘날과 같은 아름다운 서양 고딕 양식의 성당 건축물을 완성했다. 공세리성당에는 병인박해 때 목숨으로 신앙을 지킨 32명의 순교자가 모셔져 있다. 충청남도 지정문화재인 구 사제관 건물을 개보수해 건립한 성지 박물관에는 대전교구 최초의 감실을 비롯, 1500여 점의 천주교 유물이 소장돼 있다. 온양온천, 도고온천, 세계꽃식물원아산에는 온양온천, 도고온천, 아산온천 등이 있다. 도고온천은 세계 4대 유황온천으로 꼽히며 이곳 파라다이스호텔의 온천수영장은 3000평 규모로 으리으리하다. 유황온천은 신진대사를 촉진해 신경통, 관절염, 피부미용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도고온천에서 서쪽(예산군)으로 몇 분 달리면 세계꽃식물원이 나온다. 8000여평의 유리온실엔 전세계 1000여종의 꽃이 관람객들의 눈을 호강시킨다. 여름이면 연꽃, 백합과 태국꽃인 쿠르크마 등이 만발한다. 아산의 먹거리삽교방조제와 아산만방조제 사이의 인주면 일대는 장어구이촌으로 유명하다. 싱싱한 회를 먹고 싶다면 아산만 일대의 횟집을 찾으면 된다. 외암민속마을에서 담은 연잎주, 탕정포도로 담은 토종 와인도 일품이다. 염치읍 방현리의 한정식집 ‘방수마을’과 송악면 강장리 오형제고개의 ‘향토길추어탕’이 맛집으로 알려져 있다.
2021-06-26 14:50:21
현충사와 온양온천으로 기억되는 충남 아산은 이제 고속철도 개통으로 30분이면 도착하고 전자산업단지가 들어선 도시가 돼버렸다. 아산은 진산(鎭山)인 영인산과 설화산, 망경산, 배방산, 광덕산 등 수많은 봉우리에 둘러 싸여 있고 삽교천에서 갈라진 무한천과 곡교천이 좌우로 흐르고 그 중간에 탕정(湯井)평야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해발 699.3m의 남쪽 광덕산(廣德山)은 아산시와 천안시 두 도시에 걸쳐 있다. 정상은 아산시에, 그 아래는 천안시에 속해 있다. 장존동에 솟은 해발 447m의 설화산(雪華山)은 붓꽃 같은 봉우리가 솟아 예부터 기세가 대단했다. 이 산이 비치는 곳에서 영특하고 큰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산군은 동쪽으로 천안군 경계까지 40리이며, 남쪽으로는 신창현 경계까지 16리, 온양군 경계까지 18리이며, 서쪽으로는 임천군(지금은 부여) 경계까지 32리이며, 북쪽으로는 평택현 경계까지 4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24리’라고 적혀 있다. 이 때 아산군은 지금 아산시의 동북부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아산시는 백제 때에는 아술현(牙述縣), 신라 때에는 음봉(陰峯)이라 불렸다. 그후 조선 태종 13년에 지금의 아산(牙山)으로 고치고 현감을 내려보냈다. 세조 5년에 현을 줄여서 온양, 평택, 신창 등 세 고을에 나누어 붙였다가 11년에 복구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아산에 대한 기록을 보면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기후가 차다’라고 기록돼 있다. 1914년 행정개편으로 인해 아산군, 온양군, 신창군이 합해져 아산군이 됐다. 1986년 온양읍이 온양시로 승격돼 아산군에서 분리됐다가 1995년 다시 온양시와 아산군을 통합해 도농복합의 아산시가 됐다. 지금도 아산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온양의 옛사람들은 온양이 아산에 흡수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현충사 아산시 온양온천동 북쪽에 인접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현충사가 조성돼 있다. 아산은 충무공의 외가이다.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난 충무공은 할아버지 대에서 가세가 기울며 외가인 아산으로 이사 와서 벼슬길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다. 아산 현충사 말고도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은 통영 충렬사를 비롯해 전국에 34곳이나 되는데, 건립 시기로는 충렬사가 가장 먼저다. 아산 현충사는 충무공 순국 후 108년 후인 1706년 숙종 32년에 세워졌고 1707년 숙종이 현충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그러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절됐다. 그 후 1932년 일제 강점기 때 성금을 거두고 다시 사당을 세워 명맥을 이어왔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가 여전한 6월 중순 평일 낮 현충사는 한산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평일에도 수 천명의 방문객이 찾는 곳이다. 현충사 입구인 충무문으로 들어서니 신작로처럼 넓은 길이 쭉 뻗어 있다. 방문할 때마다 충무공을 참배하러 가는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이 든다. 사당 가는 길 왼편에 거대한 왕릉처럼 생긴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에는 이순신 장군의 칼을 비롯한 유품들과 이순신 장군에게 내려진 각종 교지와 난중일기, 거북선을 비롯한 각종 총포와 전쟁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을 나와 신작로를 걷다보면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반송(盤松)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식수한 나무인데 원산지가 일본이라 해서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린 바 있다. 반송을 지나 양 옆으로 사열하듯 서 있는 울창한 소나무들 사이를 걸으면 이내 충무공의 사당을 알리는 홍살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높은 계단을 올라 입구인 ‘충의문’을 지나면 비로소 사당에 닿는다. 사당에는 마침 관리인이 피워 놓은 향 냄새가 가득했다. 짧은 묵념을 올리고 주변을 살피니 앞쪽으로 설화산과 정감어린 옛 마을과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가 어색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지금의 현충사가 조성되기 전 이곳은 작은 마을이었다. 충의문을 나서면 바로 첫 번째 집이 있었다고 한다. 조상대대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던 주민들은 현충사 건립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집을 빼앗기고 다른 지역으로 강제이주 당해야만 했다. 현충사 건립에 숨겨진 이야기이다. 현충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6~1974년 사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진행한 성역화 이후다. 군사 독재정권 시절 많은 문화재와 유적지가 복원되거나 재정비됐는데 전문가들의 세밀한 연구와 고증에 의한 복원이 아닌 군사 정권식의 안목으로 진행된 사업이 많다. 광화문, 석굴암, 불국사, 천마총 등의 복원이 대표적인 예로 그 폐해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현충사 성역화 사업도 그 중 하나다. 현충사는 18만평이라는 어마어마한 부지에 영정을 모신 사당과 이순신기념관 외에도 충무공 집안의 네 명의 충신과 한 명의 효자를 표창한 정려, 옛 사당, 고택, 연지 등이 들어서 있다. 충무공 고택은 충무공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던 집으로 종손이 대대로 살았으며 개보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집 뒤편에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가묘가 있어 해마다 기일(11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원래 이 집은 상주 방씨가 살던 집인데 사위인 충무공에게 물려준 것이다. 충무공 가묘 옆에는 활터가 있다. 현충사는 2012년부터 전면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현충사를 나와 동남쪽 배방읍으로 차로 5분 정도 이동하면 곡교천(曲橋川)이 나온다. 곡교천을 따라 1.5km정도 이어지는 둑방길은 ‘곡교천 은행나무길’로 유명하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갈 즈음 수많은 인파가 몰리고 은행나무 축제가 열린다. 둑방 아래쪽 천변에는 코스모스 밭이 화사함을 더해 준다. 500년전 전통마을 간직한 외암 … 20채의 양반가 기와고택과 60채의 초가집아산시의 최남단 송악면에는 시간이 멈추어진 듯 수백 년 전의 마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있다. 마을 뒤쪽에 진산인 설화산이 든든히 받쳐주고 그 옆으로 월라산, 면잠산, 봉수산이 감싸고 있다. 마을 앞쪽으로 외암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일찍이 마을이 형성될 조건을 갖춘 이 곳은 500년 전에 형성돼 처음에는 강씨와 목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이정 일가가 낙향해 정착하면서 충남 지역에서 제법 권세를 누린 예안(禮安, 지금의 안동) 이씨의 집성촌이 됐다. 이후 이정의 6세손이자 학자인 이간이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외암(外巖)이라 호를 짓고 마을 이름도 외암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 이곳엔 일정 거리마마 역마가 대기하는 역말이 자리잡았고 ‘외양간’을 뜻하는 ‘오양골’, ‘오야골’을 거쳐 ‘외암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외암민속마을은 전통적인 한국의 마을 모습이 잘 보존돼 2000년 1월 중요민속문화자료 제236호로 지정됐다. 아산시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2021년 1월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한국 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동서로 긴 타원형의 외암마을에는 영암군수를 지낸 군수댁, 성균관 교수를 지낸 교수댁, 외암 종가댁, 송화댁, 참판댁, 병사댁, 감찰댁, 참봉댁, 신창댁, 영암댁, 교수댁 등 규모가 제법 큰 20여채의 반가와 60여채의 작은 기와집이나 초가집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13명이나 배출돼 벼슬이름이나 벼슬을 지낸 곳을 따서 택호를 붙인 게 특징이다. 지금도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현재 외암마을에는 60여 가구 16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10여 년 전보다 몇 가구가 줄고 20여명이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2013년 처음 방문한 이후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은 외암마을은 거의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외암천과 그 위에 놓인 섶다리도 여전했다. 섶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니 한쪽에서는 튼실한 벼가 자라고, 새로 조성된 것인지 전에는 보지 못했던 연밭에서 커다란 연잎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예전에 어린 조카들에게 태워주었던 나무 그네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떠나왔던 고향을 다시 찾은 느낌이다. 외암마을은 그런 곳이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마침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을 주민이 있어 말을 걸었다. 귀찮을 법도 한데 내치지 않고 묻는 말에 일일이 응대를 해 주고 시원한 ‘배즙’까지 내민다. 외암마을 사람들은 옛 조상들처럼 넉넉한 마음 씀씀이까지 그대로 이어받은 모양이다. 배즙을 마시니 더위도 어느 정도 가라 앉는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나와 본격적인 마을 산책에 나섰다. 수백 년은 족히 되는 아름드리 고목들 사이로 햇살과 바람을 벗 삼아 구불구불 나지막한 돌담길을 걷자니 마치 비밀스러운 시간 여행을 떠나온 것만 같다. 정겨움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비슷한 돌담길이 이어지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돌담 너머로 장독대도 훔쳐 보고 담벼락 아래 가지런히 핀 달맞이꽃 구경도 하며 걷다 보면 참판댁에 이어 건재고택이 나온다. 건재고택(영암댁)은 영암군수를 지낸 건재(建齋) 이상익(李相翼, 1848∼1897)이 고종 때 지금의 모습으로 지었다. 호서학맥을 이어온 외암(巍巖) 이간(李柬)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5세손이 이상익이다. 회화나무와 수석이 어우러진 정원이 아름답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이 보존돼 있다. 참판댁은 조선시대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退湖) 이정렬(李貞烈)이 고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집이다. 고택들은 설화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계곡물을 집들 사이로 끌어들였다. 물길과 정원이 어우러져 민가의 정원으로는 한층 멋스럽다. 건재고택, 송화댁, 교수댁 등의 정원이 그러하다. 특히 건재고택은 물길을 따라 소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졌다. 국내 민가의 정원으로는 최고라는 극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영화 ‘취화선’에서 오언 장승업(최민식 분)이 건재고택 기와 위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는 장면이 촬영되기도 했다. 외암마을에는 방문객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린다. 부채 만들기, 한지 만들기, 전통 거울 만들기, 떡방아 찧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몇몇 집에서는 카페 겸 민박을 운영하고 있으며 집에서 직접 만든 식혜나 수정과를 맛볼 수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예전처럼 체험 행사 등이 열리지 않아 마을에는 적막감이 감돈다. 맹사성 고택과 맹씨행단 … 청렴과 절의의 상징 외암마을에서 멀지 않은 배방읍 중리 마을은 신창 맹씨가 주로 살아가는 마을로 조선시대 맹희도와 그의 아들 맹사성이 살았던 고택이 남아 있다. 맹희도(孟希道)는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합격하고 우의정까지 올랐다. 고려가 망하자 어지러운 정계를 개탄하고 관직을 버렸다. 온양 오봉산(五峯山)에서 은거하면서 조선의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문정(文貞) 맹사성(孟思誠)은 고려 우왕 때에 과거에 합격하고 세종 13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평생 재물을 탐하지 않고 청백으로 절조를 지켰던 인물로 유명하다. 맹사성 고택은 원래 최영 장군의 집이었으나 손녀사위인 맹희도에게 물려줌으로써 맹씨 고택이 되었다. 고택 마당에는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주위에 단을 쌓고 공부를 했다는 행단(杏壇)이 아련하다.
2021-06-24 03:47:50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 산과 들녘의 모양새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아늑한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영락없이 충청도에 들어선 것이다. 야트막한 구릉이 물결치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모습은 온화한 할아버지의 미소처럼 푸근하다. 어디선가 ‘어셔 오셔유. 오시느라 고생했시유.’ 하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다. 충청도 사람들이 대체로 모난 구석이 없고 성을 내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는 게 이런 산과 들을 닮아서인 듯도 하다. 기분 좋게 살기에도 짧은 세상 굳이 각을 세우고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터득했을까.간혹 충청도 사람들에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속이 음흉하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다’는 박한 평가를 내리는데 이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충청도의 자연에서 비롯된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서산에는 역사문화 유적지나 문화재 등 볼거리가 없는 듯한데 알고 보면 또 너무 많아서 놀라움을 선사한다. 특히 백제시대 해로를 통해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던 문화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유적지 및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고대 중국-한국-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불교문화 교류의 증거이자 한국 고대미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보원사는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이나 승려들이 머물면서 수행을 하던 곳으로 이 역시 백제-중국 간 문화교류의 단면을 보여준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백제의 미소’ 충청도 지방에서 발견되는 사찰이나 불상들이 하나같이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풍기는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상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애불이 바로 ‘서산 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이다. 서산 운산면 용현리 상왕산 용현계곡에서 처음 서산 마애삼존불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풍저수지를 지나 시작되는 용현계곡 또는 강댕이골 계곡 깊숙이 들어가 제법 긴 계단을 올라서면 일명 ‘서산 마애삼존불’이 환하게 웃으며 방문객을 반긴다. 세 분의 부처님들이 일제히 충청도 특유의 느린 말투로 ‘어서 와유, 오느라 힘들었지유?’ 하고 환하게 웃어주는 듯 하다. 서산마애삼존불에는 근엄함이나 엄격함 대신 자비로움과 인간미가 가득하다. 장터에 나가 손주들 군것질거리를 사들고 들어오는 할아버지의 얼굴처럼 환하고 인자하다. 오른쪽 한 손에 보주를 들고 서 있는 보살이나 왼편의 한쪽 다리를 다른 쪽에 올리고 앉아 있는 보살의 표정이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다. 돌에 새겼다고 믿기 힘든 살아 있는 듯한 생생한 얼굴 표정과 부드럽게 늘어지는 옷자락 등 섬세한 솜씨에 ‘말문이 막힌다’라는 표현 외에 달리 어떤 표현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하게 동짓날 해뜨는 방향을 향해 서 있는 서산마애불의 미소는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아침의 미소는 평화롭고, 저녁에는 자비로운 미소를 띤다. 혹자는 ‘가을해가 서산을 넘어간 어둔 녘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가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하는가하면 혹자는 첫 새벽의 미소를 최고로 친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이 아름다운 미소는 어딘지 충청도 사람들의 미소를 닮아 있다. 봄이 오는 문턱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유난히 길고 힘든 겨울을 난 중생들에게 서산 마애불이 어떤 미소로 맞이해 줄 지 한번 가 볼 일이다. 서산시는 지난 해 서산마애삼존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첫 사업으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태안군과 예산시와의 긴밀한 협조 하에 태안마애삼존불(국보 제 307호), 예산사면석불(보물 제 794호) 등을 묶어 함께 등재를 추진할 방침이다. 조만간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이 탄생할 날을 기대해본다. 서산마애삼존불에서 용현계곡으로 2km정도 더 올라가면 탁 트인 분지에 옛 보원사 절터가 나온다. 보원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돼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융성했던 사찰로 옛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5층 석탑, 부도와 부도탑비, 석조 등이 남아 있다. 보물 제 102호로 지정된 보원사지 석조(石槽)는 길이 3.48m, 너비 1.75m, 높이 0.65m로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용기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보원사 5층 석탑(보물 104호)은 고려시대 석탑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기단부와 5층 몸돌 사이에 넓적한 굄돌이 하나 더 올라가져 있는데, 보령 성주사터 삼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이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백제계 석탑의 특징으로 눈여겨 볼 만하다. 상왕산 개심사 – 마음이 열리는 절 보원사지에서 20여 분 떨어진 상왕산(象王山) 기슭에는 마음을 여는 절 ‘개심사’(開心寺)가 다소곳하게 들어 서 있다. 서산 8경 중 4경으로 꼽히는 개심사는 654년(의자왕 14)에 혜감국사가 창건하고 개원사(開元寺)라 했으며, 1350년(고려 충정왕 2)에 처능이 중창하면서 개심사로 바꿔 불렀다. 현재의 전각들은 1955년 이후 전면 보수를 거쳤으며 대웅전은 보물 제 143호, 명부전과 심검당은 충남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있다. ‘지혜의 칼을 찾는 곳’인 심검당(尋劍堂)의 휘어지고 갈라진 기둥은 자연스럽게 나이들어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가만가만 절 마당과 연못 주변을 거닐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 하다. 개심사는 무엇보다도 봄날의 나뭇가지가 처질 정도로 활짝 피어나는 주먹만한 왕벚꽃과 여름날 100일 동안 선홍빛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가 유명하다. 다른 곳의 벚꽃이 다 지는 4월말이 되면 개심사는 왕벚꽃이 가득한 꽃대궐로 변한다. 특히 개심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청벚꽃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발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든다.해미읍성, 서산 제1경 – 230년간 충청병마절도사영 건재개심사에서 1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미읍성은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서산 해미읍성은 1418(태종 18년)~1421(세종 3년)년에 서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성이다. 해발 130m의 낮은 구릉지에 높이 4.9m, 총길이 1800m로 쌓은 성 안에는 동헌을 비롯해 아사 및 작청 등 관청 건물과 민가가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성 둘레에는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 탱자성이라고도 불렸다. 해미읍성 성벽에는 청주, 공주 등 고을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 고을별로 정해진 구간을 맡아 성을 쌓게 하고 만약 성벽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을 지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해미읍성은 1652년 (효종 3년)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내포(內浦, 예산·당진·홍성·서산 일대)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다. 1970년 이후 동문과 서문이, 1980년 이후 동헌과 객사 등이 복원됐다. 동서남북으로 모두 4개의 성문이 있으며 주 출입구는 남쪽의 진남문(鎭南門)이다. 현재 진남문 우측의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데다가 코로나19 방역으로 출입이 어수선하다. 성문에서부터 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길을 따라 가면 병마절도사(호서좌영장, 충남북서부 관할)와 해미현감을 겸하는 장의 집무실로 사용되던 동헌과 살림집이었던 내아 및 객사가 복원돼 있다. 길 양편에는 조선 시대의 다양한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최대 순교성지로 천주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약 100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해미읍성에서 처형당했다. 성 곳곳에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특히 성문과 동헌의 중간 쯤에 서 있는 300년 넘은 회화나무에는 신도들의 머리채를 매달아 놓았던 철사줄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처참함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호야나무는 회화나무의 충청도 사투리인데, 해미읍성의 순교성지를 일컫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된다. 2014년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해미읍성을 찾은 것도 이곳이 천주교 신도들의 순교성지였기 때문이다. 해미읍성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해미순교성지에는 기념관, 무명순교자의 묘, 순교탑 등과 교황 방문 기록 등이 보관돼 있다. 한국 천주교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인근의 보령 갈매못성지와 베론성지 등의 천주교 성지를 함께 방문해도 좋다. 동헌의 뒤편 언덕 위에는 울창한 소나무숲과 대나무 숲이 조성돼 있고, 1491년(성종 22년)에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세운 정자 청간정(淸澗亭)이 복원돼 있다. 1494년 해미읍성을 방문한 충청감사 조위가 시를 남겼고 권오복의 문집 ‘수헌집’에도 청허정을 방문한 사람들이 지은 시들이 전한다. 청허정은 1872년 ‘해미현지도’에 이미 옛터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청허정 터에는 일제의 신사 건물이 있었으나 광복 후 철거됐다. 청허정은 1976년 복원되고 2011년에 재정비돼 현재에 이른다. 간월암 - 달을 품은 절바다 한가운데서 울리는 풍경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조선 태조의 왕사 무학대사는 서해안 간월도에 배꼽처럼 붙은 작은 섬에 암자를 짓고 검푸른 바다 위에 뜬 하얀 달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간월암(看月庵)은 삼국시대에는 피안도 피안사(彼岸島 彼岸寺)라 불렸으며 원효대사가 수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물이 가득찼을 때는 한 송이 연꽃이 피어 있는 듯도 하고, 한 척의 배가 떠 있는 듯도 하여 연화대 혹은 낙가산 원통대라 불렸다. 간월암은 하루 두 차례 썰물 때에 바닷길이 열려야 들어갈 수 있다. 예전에는 정원 25명의 나룻배가 쉴 새 없이 관광객들을 실어 날랐지만 지금은 공사 때문인지 나룻배는 운행하지 않는다. 간월암에 도착하니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갯벌 위로 공사 차량이 서둘러 빠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갯벌을 건너 간월암으로 올라서니 마치 배 갑판에 승선한 느낌이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 위에 배 몇 척이 떠 있지 않았다면 바다인지 땅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바다는 잔잔하다.5년 만에 다시 찾은 간월암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암자의 보호난간에는 알록달록한 소원 종이들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관음전과 산신각, 용신각은 단청을 새로 칠해 말끔해졌고 종각도 새로 조성됐다. 이제 작은 암자가 아니라 어엿한 사찰의 모습을 갖췄다. 1941년 만공스님은 폐사 상태의 간월암을 중건하고 조국해방을 기원하는 천일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나고 3일 후 기적처럼 해방이 되었다고 한다. 간월암에서 생산되는 어리굴젓은 무학대사가 태조에게 진상했을 정도로 맛나다. 이후 간월암 어리굴젓은 궁중의 진상품이 됐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만조 시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에서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열린다. 3~4월은 주꾸미와 새조개가 제철이다. 간월암에 오면 어리굴젓과 살오른 새조개와 주꾸미를 맛보는 것도 잊지 말자. 서산 부석사, 보석같은 절 간월암에서 약 10km 거리에 있는 서산 부석사(浮石寺)는 서산의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곳으로 이곳에도 만공선사의 일화가 전한다. 도비산 자락의 이 절은 677년(문무왕17)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있다.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한다. 서산 부석사 안양루(安養樓)에 서면 멀리 천수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천수만의 풍경이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산자락에 펼쳐져 있는 거석들과 휘어진 고목들도 매력적이다. 경북 영주 부석사의 안양루도 이름이 같고 소백산 석양을 서정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다.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89년(숙종15년)에 경종의 탄생을 기념해 조성한 것으로 원래 용봉사라는 절에 있던 것을 1905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산신각 뒤편으로 올라가면 만공선사가 수행하던 토굴이 있다. 영주 부석사와 동일한 ‘선묘낭자’ 창건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며 선묘각에 선묘낭자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경내에 ‘부석사’라고 적힌 바위가 있다. 돌 석자 ‘石’의 가운데에 점이 하나 찍혀 있는데, 이는 공중에 떠 있는 돌이 날아가지 못하게 붙들어 놓기 위해서라고 한다. 부석사 현판은 만공스님이 70세에 쓰셨고, 요사채로 사용하는 심검당 현판은 경허스님의 글씨다.
2021-03-08 19:13:28
충북 제천은 예부터 청풍명월의 고장으로 불릴 만큼 깨끗한 물과 아름다운 산세를 자랑한다. 벚꽃 만발한 청풍호의 봄빛, 마음마저 평안해지는 의림지, 옥순봉의 기암괴석 등이 발길을 끈다. 제천은 월악산의 약 3분의 1 가량을 차지한다. 월악산은 충북 제천시, 단양군, 충주시, 경북도 문경시에 걸쳐 있다. 월악산 자락의 물이 담긴 게 청풍호다. 제천의 중앙을 가로지는 게 충추호의 한 구간인 청풍호이고 청풍호를 향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반도처럼 튀어나온 게 비봉산이다. 이를 아우르는 청풍면은 제천의 가운데 토막을 차지한다. 청풍호반에는 물태리에서 비봉산 정상까지 운행하는 길이 2.3km의 케이블카가 있다. 비봉산은 청풍호 중앙에 위치한 해발 513m의 아담한 산이다. 여기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청풍호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산줄기와 짙고 푸른 청풍호의 물빛이 어우러져 황홀감을 준다. 요즘엔 카약, 번지점프를 즐기는 레포츠 천국으로도 탈바꿈했다. 여름엔 무려 162m 높이로 쏘아올리는 수경분수가 장관을 연출한다. 청풍호와 어우러지는 장관으로 또하나가 더 있다. 옥순봉(玉筍峰)과 구담봉(龜潭峰)이다. 둘 다 제천시 수산면에 속해 있다. 구담봉은 기암절벽의 암형이 거북을 닮았고 물속의 바위에 거북무늬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옥순봉은 희고 푸른 아름다운 바위들이 힘차게 솟아 마치 대나무 싹과 같다는 뜻이다. 옥순봉은 조선 초 청풍군(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해 있었는데 단양 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단양 태생 기녀 두향이 1548년 퇴계에게 옥순봉을 단양군에 속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청풍군수를 이를 거절했고 퇴계가 옥순봉이란 이름을 붙이고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 새겼다고 한다. 비록 제천 땅이지만 단양으로 가는 관문이니 위로를 삼으라는 얘기다. 옥순봉이 단양팔경으로 더 알려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기 두향은 풍기군수로 전임한 퇴계 이황을 그리면서 옥순봉 옆 강선대(降仙臺) 아래에 초막을 짓고 살다가 죽으면서 이곳에 묻어 달라 했다. 사후 관기들이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제주 한 잔을 그의 무덤에 올렸다 하며, 충주댐 수몰로 지금은 강선대 위 양지바른 산에 이장하여 매년 넋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다. 정조 때 1792년 12월부터 1795년 1월까지 연풍현(지금의 괴산군 연풍면)의 현감으로 지내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는 파직된 이듬해인 병진년 봄에 그린 병진년(1796년) 화첩 20폭 중 첫째 그림으로 ‘옥순봉도’(보물 782호)를 남겼다. 그림 오른쪽 아래 구석에 조각배에 앉은 두 선비를 그렸는데 하나는 바로 자신일 것이다. 단원은 단양팔경인 도담삼봉, 사인암도 이 무렵에 그렸다. 옥순봉 그림은 병진년 화첩 말고도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옥순봉도’에도 남아있다. 제천 청풍호는 크게 보면 결국 충주호의 동쪽 부분이다. 옥순봉을 제대로 보내면 청풍 문화재단지의 청풍나루나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소재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야 한다. 구담봉과 옥순봉 등을 돌아보고 원대 복귀하는 코스다. 약 1시간 간격이고 손님이 많으면 더 자주 출발한다. 충주댐이 생기면서 해발 286m의 옥순봉의 높이는 댐 수위 기준으로 130m t수준으로 낮아졌다. 과거 김홍도가 그림을 그릴 때에는 금강산의 미니어처(소금강이란 별칭도 있었음)처럼 뾰족해 단원은 고개가 아프도록 옥순봉을 치올려봤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를 상상할 수가 없다. 퇴계가 남긴 단구동문 휘호도 물속에 잠겨 이제 볼 수 없다. 옥순봉을 보려면 옥순대교 건너 옥순봉 쉼터로 가면 된다. 직접 등산하려면 단양과 제천 경계인 계란재 지킴터에서 시작한다. 왼쪽(서쪽)은 옥순봉, 오른쪽(동쪽)은 구담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계란재에서 옥순봉까지는 2.3km 구간으로 구담봉을 경유하면 총 거리가 5.8km로 늘어난다. 겨울산행으로 많이 선호된다. 그러나 길이는 짧지만 가파른 길이라 숨이 헉헉 차오른다. 안전사고도 우려되므로 조심해야 하다. 이 때문에 요즘 많이 찾는 편한 관광코스가 청풍문화재단지이다. 1978년 6월에 시작돼 1985년 10월에 준공된 충주댐 때문에 수몰될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만6000평의 부지 위에 원형대로 옮겨 놓은 곳이다. 청풍문화재단지에는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 문화재 9점(팔영루(八詠樓), 금남루(錦南樓), 금병헌(錦屛軒 청풍 관아), 응청각(凝淸閣 관아의 누각), 청풍향교, 고가 4채), 지석묘·문인석·비석 등을 포함해 총 43점의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제천의 상징은 뭐니뭐니 해도 의림지(義林池)이다. 고대 수리시설의 하나로 당시 부족했던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김제 벽골제(碧骨堤), 밀양 수산제(守山堤)와 함께 3대 고대 수리시설로 꼽힌다. 하지만 이 중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의림지 하나 뿐이다. 저수지 가장 자리를 걷는 즐거움과 가운데 섬이 주는 노스탤지어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두 번째 천주교 신부 최양업 ‘배론 순교성지’ … 금수산과 청풍호의 조화 ‘정방사’ 제천에는 한국 천주교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가며 봉양읍 구학리로 숨어 들어와 신앙을 키워나갔다. 험준한 계곡 사이에 끼인 마을로 마을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신자가 아닌 사람도 한번쯤 들르게 되는 숨겨진 명소로 자리잡았다. 제천의 대표적인 사찰은 금수산(錦繡山) 자락의 정방사(淨芳寺, 수산면 능강리)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법주사의 말사이다. 정방사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청풍호와 이를 둘러싼 산하가 환하다. 고즈넉하면서도 확 트인 조망을 즐길 멋진 포인트다. 금수산의 본래 이름은 백운산이었으나 퇴계 이황이 아름다운 경치가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다고 하여 금수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가을 경치가 빼어난 바위산으로 크게 보면 월악산의 가장 북단에 속한다. 제천시 수산면 상천리와 금성면 성내리, 단양군 적성면 상리에 걸쳐 있다.
2020-12-15 20:1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