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이탈리아 여행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는 데가 로마, 베네치아에 이어 피사라고 한다. 문화의 중심지인 피렌체나 경제 중심지인 밀라노보다 피사가 앞서는 것은 ‘피사의 사탑’이 유명해서일까. 또 로마에서 꼭 가봐야 할 포인트로는 콜로세움, 트레비분수와 함께 바티칸시티가 들어간다.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기행문으로 바티칸시티와 피사를 소개한다. 무솔리니와의 라테란조약으로 바티칸시국 획정바티칸시티 관광은 크게 바티칸박물관, 시스티나예배당(바티칸박물관의 일부로 보기도 함), 성베드로성당 및 성베드로광장 등으로 삼분할 수 있다. 이밖에 로마교황이 거주하는 바티칸궁전(Apostolic Palace), 녹지공간인 올드가든, 산카를로궁전(Palazzo San Carlo), 비오4세 별관(Casina Pio IV), 교황청과학학술원(Pontificia Accademia delle Scienze), 교황청시국 정부청사(Palazzo del Governatorato dello 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 등은 일반인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바티칸시티 관광코스는 사시사철 관광객이 밀려들기 때문에 당일 티케팅하면 최소 2~3시간은 날려보낸다고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인터넷 예매 등으로 미리 표를 확보해야 대기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다. 종교분쟁이 심화되면서 인명과 유물 보존을 위한 검색과 경계는 입구부터 삼엄하다. 엄연히 독립된 또 하나의 나라에 입국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권을 보여주고 소지품을 스크린받아야 한다.바티칸시국(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 Vatican City)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로 가톨릭 교황이 다스린다. 면적은 0.44㎢로 경복궁의 1.3배 정도가 된다. 인구는 1000명 안팎이며 스위스 출신의 수비대가 100명 정도 주둔한다.원래 가톨릭 교황은 1870년까지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교황령으로 삼아 넓게 지배했으나 이탈리아 통일왕국이 들어서면서 강제 합병됐다.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1929년 라테란(Laterano)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 주변지역에 대한 주권을 이양받아 현재의 영역으로 축소됐다. 당시 전체주의 파시즘이 기세등등하고 로마 교황의 권위가 실추됐으나 이탈리아인의 절대 다수가 가톨릭 신자임을 감안해 이탈리아 정부와 로마 교황청은 이같이 타협했다. 라테란 협약의 골자는 교황청이 이탈리아 국가를 정식 승인하고 로마를 수도로 인정한 것이다. 이에 이탈리아 정부는 바티칸시티에 대한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공포했다. 이는 로마 교황청이 파시즘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악영향을 끼쳤다. 라테란협정은 1984년 새로운 협약으로 대체돼 현재 가톨릭교는 이탈리아 국교의 지위에서 물러났으며 공립학교의 종교교육도 중단됐다. 교회의 면세 범위도 크게 줄어 이탈리아는 보통 국가를 지향하는 쪽으로 변해가고 있다.바티칸시국이란 국명은 그리스도교 발생 이전부터 전해져온 오래된 말로 테베레강(fiume Tevere, Tiber Riner) 옆에 위치한 ‘바티칸언덕’을 뜻하는 라틴어 ‘몬스 바티카누스(Mons Vaticanus)’에서 유래했다. 바티칸은 안도라(스페인과 프랑스의 경계), 산마리노(이탈리아 반도 중북부), 모나코공국(외교권은 프랑스가 행사)과 함께 세계 최소의 독립국이다. 바티칸시티는 독자적인 인쇄국, 방송국, 우체국, 은행을 갖고 있다. 인쇄국은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를 인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율리우스2세, 라오콘像 발견 계기로 세계 최고 바티칸미술관 시동바티칸박물관(Musei Vaticani, 바티칸미술관)은 교황 율리우스2세(Julius Ⅱ, 1443~1513, 재위 1503~1513)가 16세기 초반에 지은 미술관이다. 1506년 1월 라오콘 군상이 로마의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Basilica Papale di Santa Maria Maggiore) 인근의 포도밭에서 발견되자 교황은 바로 구입하고 이를 계기로 대중에게 보여주고자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관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이 박물관은 7만개의 유물 또는 작품이 소장하고 있지만 전시돼 있는 것은 2만개 수준이다. 박물관에 종사하는 인력만도 600명이 넘는다. 2015년 기준 600만명이 이 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당대에 가장 유명한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가 설계하고 직접 조각과 회화를 남겼고, 역대 교황들이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가장 클래식한 작품을 끌어모았다. 미술관 정문 위쪽엔 열쇠 2개가 조각돼 있는데 왼쪽엔 미켈란젤로, 오른쪽에 라파엘로의 대리석상이 놓여 있다. 입구검색을 통과하면 아름다운 나선형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1932년 교황 비오11세(Pius XI, 1857~1939, 재위 1922~1939)의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미술관은 세부적으로 바티칸회화관(Pinacoteca Vaticana, 미켈란젤로·라파엘로·프라 안젤리코 등), 현대종교미술전시관(카를로 카라, 조르조 데 키리코 등), 조각미술관(비오-클레멘스미술관, 키아라몬티미술관, 에트루리아미술관, 이집트미술관) 등으로 나뉜다. 관광객들은 이중 극히 일부를 시간상 또는 개방조건에 따라 보고 간다. 나선형 계단을 걸어 지상으로 올라오면 솔방울정원(Cortile della Pigna)이다. 벨베데레의 뜰(벨베데레정원, Cortile del Belvedere)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1세기에 만들어진 솔방울 청동조각은 원래 판테온 부근의 4m 높이의 로마 분수대에서 가져왔고, 옆 한 쌍의 공작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 76~138) 무덤을 장식했던 공작새를 카피한 모조품이다. 원본은 신관(Musei Vaticani Braccio Nuovo)에 따로 보관돼 있다. 로마에서 소나무는 영광, 승리, 영원성을 상징한다.광장 가운데의 깨어진 지구본 모양의 ‘지구 속의 지구’(Sphere Within Sphere)는 아르날도 포모도로(Arnaldo Pomodoro, 1926~)가 1960년 로마 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조각으로 오염과 전쟁으로 멸망해가는 지구를 형상화한 것이다. 1990년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피오클레멘티노박물관, 지금도 흉내 못낼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이어 발길을 여러 조각전시관을 잇는 허브인 벨베데레정원으로 돌린다. 정원을 둘러싼 건축물은 베드로성당의 재건을 맡은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가 설계해 1504~1590년에 걸쳐 서서히 완공됐다. 브라만테가 15세기말 교황 이노센트 8세를 위해 만든 별장의 중심 부분이자 현 바티칸 궁전의 전신인 이곳은 19세기 비오7세(Pius VII, 1742~1823, 재위 1800~1823)에 의해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위에서 보면 사각형에 각 면의 중심마다 반원의 돌기가 나왔기 때문에 ‘팔각정원’이라고 부른다. 정원의 핵심은 피오클레멘티노박물관(Museo Pio Clementino)이다. 클레멘스14세(Clement XIV, 1705~1774, 재위 1769~1774)와 비오6세 교황(Pius VI, 1717~1799, 재위 1775~1799)이 박물관의 전시품 마련과 완공을 가져왔기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클레멘스14세는 이노센트8세(인노첸시오8세, Innocentius VIII, 1432~1492, 재위 1484~1492)가 벨베데레별장에 새로운 박물관을 추진하겠다는 아이디어를 계승해 재정비 작업에 들어가 1771년에 이를 마쳤다. 르네상스와 고대 작품을 포함했다. 그의 후임인 비오6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조각상을 보완해 대장정에 종지부를 찍었다.피오클레멘티노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라오콘 군상’ 이다. 라오콘은 그리스군이 선물한 목마를 트로이 안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던 트로이의 사제다. 이에 분노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바다의 뱀 두 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꽁꽁 감아 죽인다. 라오콘 군상에는 질식할 듯한 고통이 일그러진 표정,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과 핏줄로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뱀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쓰는 라오콘의 몸짓에서 공포감마저 느껴진다. 다른 부위에 비해 커진 손과 다리, 지나치게 왜소하게 묘사된 두 아들이 전체적인 비례를 깨뜨리는 느낌을 주지만 강렬한 감정 표현을 막지는 못한다. 당시 교황의 명으로 발굴 현장에 파견된 미켈란젤로는 ‘예술의 기적’이라고 했으며 그의 작품인 베드로성당의 ‘피에타’도 라오콘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라오콘 군상은 네로황제의 황금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그리스 로도스섬에서 가져온 작품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00년에 이 섬의 조각가 아게산드로스, 아테노도로스, 폴리도로스 등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1906년 고고학자인 루드비히 폴라크(Ludwig Pollak)는 로마 건축가의 마당에서 부러진 라오콘상의 오른쪽 팔을 발견했다. 미켈란젤로는 발굴 당시 부러진 팔이 하늘을 향해 꺾여져 있을 것이라 예견했는데 그 예상은 적중했다. 1540~1957년엔 라오콘상의 가짜 팔이 하늘을 향해 쭉 뻗은 형태로 임시 복구된 채 전시됐었다.라오콘상에 이어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청동상을 로마에서 복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벨베데레의 아폴로>를 만났다. 안티오(Antium)의 네로 황제 별장에서 발견됐다. 활을 쏜 후 날아가는 화살을 응시하는 아폴로가 아름답게 묘사했다. 근육질은 별로 없고 균형감과 고전적인 남성미를 가장 ‘그리스적’으로 표현했다. 기원전 작품인데도 아폴로의 어깨와 팔에 걸쳐진 망토의 주름과 발에 신겨진 샌들이 사실감이 대단하다. 붉은색 벽면에 거대한 조각상들을 전시한 ‘원형의 방(Sala Rotonda)’에는 로마의 분수대였다가 네로 황제의 욕조로 쓰였다는 큰 접시 모양의 대리석이 놓여 있다. 로마 시내 판테온의 축소판처럼 돔 모양이며 천장 가운데 구멍이 뚫려 하늘이 보여 자연채광이 이뤄진다. 이 방의 지름은 21.6m이다. 오트리콜리(Otricoli)의 목욕장 유적에서 발견된 큰 모자이크가 전시실 바닥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뮤즈 여신들의 전시실(Sala delle Muse)’에는 학예, 음악, 시를 관장하는 그리스의 아홉 여신의 상들이 전시돼 있다. 머리와 팔, 종아리가 없는 흉상으로 유명한 ‘벨베데레의 토르소’가 가운데에 놓여 있다. 몸통과 허벅지의 근육만 봐도 강렬한 남성미가 전해온다. 이 작품은 트로이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인 그리스의 아이아스(아약스) 장군이 율리시스(오디세우스)와의 언쟁에서 져 자괴감에 빠져 자결하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아이아스가 아닌 헤라클레스의 조각상이라고 추정하는 설도 여전하다. 이 작품을 좋아했던 미켈란젤로는 작품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오자 ‘이것만으로도 완벽한 인체의 표현’이라 극찬하며 거절했다고 한다.‘동물들의 전시실(Sala degli Animali)’은 여러 시대의 개, 멧돼지, 황소 등 동물 모형 대리석상을 감상할 수 있다.‘십자가의 방(Sala a Croce Greca, Greek Cross Gallery)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세인트 헬레나(Saint Helen)와 그의 딸인 콘스탄자(Constance)의 자주색 관이 전시돼 있다. 1887년에 만들어졌으며 천장은 상하 좌우 길이가 같은 ‘그리스 십자가’ 모양이다. 바닥의 모자이크 장식은 대리석이 아니라 유리에 무기물을 넣어 색을 입힌 것이다. ‘지도의 방’과 ‘라파엘로의 방’에서 예술 탐욕을 보다이어 100m가 넘는 둥근 황금빛 천장의 ‘지도의 방(Galleria delle Carte Geografiche, Le Galleria della Mappe)’에 들어선다. 좌우 벽에는 세계 각국의 그림지도가 형형색색으로 방위와 산세 등을 알기 쉽게 묘사하고 있다. 천장엔 그 하나하나가 명화의 반열에 오를 만한 그림이 물결 치듯 이어진다. 지도방의 방을 나오면 ‘시스티나예배당’과 함께 바티칸박물관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라파엘로의 방(Stanza di Raffaello)’이다. 그 중 가장 먼저 조성되고 유명한 게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 1508~11)’이고 이 방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등장하는 명화 중의 명화다. 교황 율리우스2세는 자신의 집무실을 장식할 작가를 찾던 중 브라만테의 소개로 라파엘로를 만나 ‘라파엘로의 방’ 시리즈를 엮어나갔다.서명의 방 다음으로 엘리오도르의 방(Stanza di Eliodoro 1512~14), 보르고의 화재의 방(Stanza dell’incendio del Borgo 1514~17), 콘스탄티누스의 방(Sala di Costantino, 1517~24)이 조성됐다. 라파엘로는 이들 방을 만드는 데 10년 넘게 작업에 매달렸고 결국 마지막 방을 장식하던 중 1520년 3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시스티나 예배당라파엘로의 방을 나오면 시스티나예배당(Cappella Sistina)이다. 교황 유고 시 후임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가 진행되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조반니 데 도르티(Giovanni de Dolci)의 교황 식스토 4세(Sixtus IV, 1414~1484, 재위 1471~1484)의 명을 받아 설계에 들어가 1473년에 착공, 1481년에 완성됐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원하는 건축물이다. 식스토 4세는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페루지노(Pietro Perugino), 핀트리코(Pinturicchio),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로셀리(Cosimo Roselli) 등에게 모세와 예수의 생애 등을 그리라고 명했다. 1508년 율리우스2세는 미켈란젤로에 천장화를 그리라는 대역사의 명령을 내렸다. 이 그림이 그 유명한 ‘천지창조’다. 창세기 9장면을 그렸다. 입구에서부터 출구쪽으로 △술에 취한 노아, 대홍수,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장면 등 노아의 홍수 관련 3장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 쫓겨남, 이브의 창조, 아담의 창조 등 3장면 △하늘과 물의 분리, 달과 해의 창조, 빛과 어둠의 창조 등 3장면이다.제단 위 한쪽 벽면에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단테의 신곡에서 영향을 받아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인도되는 아비규환과 의연하고 담담한 천국의 모습이 대비된다. 율리우스2세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희생시켜 자신의 예술욕, 과시욕, 권력욕을 충족시키려 했다. 그 탓에 라파엘로는 요절했고, 미켈란젤로는 천장화를 그리느라 눈과 목이 병들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 메시지를 전한다는 교황의 탐욕이 두 대가를 고통에 빠지게 했고, 덕분에 현 인류는 지금 그리라고 해도 엄두내지 못할 대작을 감상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가장 큰 성당시스티나예배당을 나오니 베드로성당(St Peter’s Basilica)이다. 베드로성당의 지하에는 성 베드로 및 초기 로마교회 순교자의 지하무덤(catacombes)과 역대 교황들의 묘소가 있다. 베드로는 67년(추정)에 네로황제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했다. 그 순교가 헛되지 않아 많은 추종자들이 생겼고 콘스탄티누스황제는 313년 밀라노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난립하던 6명의 황제 가운데 가장 막강한 라이벌인 막센시우스를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밀비오다리 전투에서 제압해 유일한 권력이 된다. 이 때 콘스탄티누스는 신탁을 받고 십자가를 앞세워 기독교 천사의 영적인 도움을 받아 승리하게 됐다고 믿고 베드로성당을 봉헌하기로 했다.밀비오다리 전투 승리를 기념해 세운 것이 콜로세움 옆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원조 개선문)과 베드로대성당이다. 대성당은 319~333년에 베드로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장소 위에 지어졌다. 당시엔 순례자들의 랜드마크이자 숙소로 애용됐다. 이민족의 침입과 아비뇽 유수 등으로 황폐해진 옛 베드로성당은 교황 율리우스2세의 명에 의해 헐리고 그 자리에서 1506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1626년 지금 모습의 뼈대를 갖춘 성당이 완공됐다. 베드로성당은 대성당 가운데 제일의 지위를 인정받은 것도 아니지만 로마 교황이 거주하고 미사와 집무를 보는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자리잡았다.실제로 로마 주교좌성당은 산조반니 인 라테라노 교회(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이다. 이 곳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개종을 기념해 기증했다. 화재로 파괴됐다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59~1667)가 1646년에 마지막으로 바로크양식으로 복구한 뒤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처음 교회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와 함께 산타마리아마조레성당(Santa Maria Maggiore, 성모마리아대성당)과 산 파올라 푸오리 레무라 성당(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성밖의 성바오로대성당) 등이 로마의 4대 대성전으로 꼽힌다.1626년에 완성된 베드로성당은 돔의 지름이 41.47m로 1436년에 완공된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42m)나 고대 로마 판테온(43.3m)보다 조금 작다. 길이 220m, 폭 150m, 높이 136.6m로 6만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높이에선 지금도 세계 최고의 돔이다. 2012년까지는 로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현재는 155m의 유로스카이타워(Torre Eurosky)가 가장 높다. 그만큼 역사와 문화의 도시, 로마에서는 고층빌딩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단 로마뿐만 아니라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이 그러하다. 베드로성당은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의 영향력이 반영돼 설계가 차츰 수정돼 최종적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시안이 굳혀졌다. 성당 안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Pieta,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은 수많은 조각 중 그의 서명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돔의 완성자도 미켈란젤로이다. 베드로성당의 피에타와 모세상, 피렌체두오모성당의 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으로 꼽힌다. 성베드로광장(St. Peter’s Piazza)은 30만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가 1656년에 착공해 1667년에 완성했다. 광장 한 가운데의 높이 25m 짜리 오벨리스크는 칼리귤라(Caligula) 황제가 40년 고대 이집트에서 가져와 원형경기장에 놓은 것을 1586년 경기장에서 순교한 이들을 위해 현 위치로 옮겨왔다. 타원형인 광장 좌우에는 4열의 그리스 도리스양식 원주 284개와 각주 88개가 회랑 위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테라스 위에는 140명의 대리석 성인상이 조각돼 있다.
2017-11-02 18:31:07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로마는 그 위에 지어졌다. 혀가 있는 자는(말 잘하는 자는) 로마에 가도 좋다 등 로마와 관련된 격언이나 명구는 많다.모두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과 유구한 역사를 상징하는 말들이다. 실제로 로마제국 시절엔 모든 길이 로마를 향하도록 닦였고 각 도시와 제후국들을 연결하는 곁길은 없었다. 모든 정보와 물자가 로마에 집중됐고, 주변국들이 모반을 일삼는 것을 억눌렀다. 모든 해외여행의 종착지도 로마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고대 로마제국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지금까지 쌓아온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유산에 여행객들은 탄식하게 된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로맨틱한 공간에서 묘한 상상력을 갖게 하는 게 로마의 매력이다.로마는 사실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다. S자로 흐르는 테베레강을 중심으로 동쪽 구시가지에 유명한 유적지가 모여 있고, 강 서편엔 바티칸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주요 명소 대부분이 판테온 반경 1.5㎞ 이내에 위치해 도보로 다녀도 된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계획없이 그냥 가깝고 발길 닿는대로 들러보면 된다.‘분수의 도시’에 흐르는 로만시티즘과 예술가의 비사 하지만 가이드의 권고로 시간절약을 위해 택시를 이용한 시내 투어에 나섰다. 1인당 60유로이니 다리가 성하고 시간이 충분하면 이용할 필요가 없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이 트레비분수(Fontana di Trevi)이다. 분수의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중 가장 유명하다. 폴리 대공의 궁전(Palazzo Poli) 앞에 설치된 이 분수는 로마의 거장 건축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원안을 따라 니콜라 살비(Nicola Salvi 1697~1751)가 설계했다.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명을 받아 1732년 건축에 들어가 그의 사후인 1762년에 완성됐다.로마에 현존하는 분수 중 가장 큰 규모여서 높이는 25.9m, 너비는 19.8m이다. 바로크양식으로 예술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마는 바로크양식의 중심지다. 뒤로 돌아서 등 너머로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뤄진다거나, 언젠가 다시 로마에 오게 된다고 믿음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동전을 던지고 간다. 국내외 주요 관광지 분수마다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홍보해 인기를 얻고 있지만 실은 다 트레비분수의 패러디요 짝퉁이다. 매일 3000유로 정도가 트레비 분수대 바닥에 쌓이는데 로마시는 매일 밤 동전을 수거해 문화재 복원과 보호에 사용한다. 동전을 훔치는 것은 불법이다.흰 대리석에 개선문을 본 딴 벽면을 배경으로 분수 가운데 우뚝 선 동상이 대양(大洋)의 신 오케아노스(Oceanus, 포세이돈이 등장하기 전 바다를 지배, 그리스신화의 포세이돈이 로마신화의 넵투누스 또는 넵튠과 동격)가 거대한 조개전차 위에 서 있다. 그 밑 좌우에 반인반수 해신인 트리톤(Triton, 포세이돈의 아들)이 소라껍질 나팔을 불며 오케아노스의 전차를 이끄는 날개달린 해마를 길들이고 있다. 왼쪽은 격동의 바다를, 오른쪽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한다.트레비분수는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지친 로마 병사들에게 물을 제공해준 처녀 설화가 존재하는 ‘처녀의 샘(아쿠아 베르지네, Acqua Vergine)’을 수원으로 하고 있다. 오케아노스 상 뒤편 벽면 상부 좌우에는 목이 타는 로마 병사에게 샘이 있는 곳을 알려준 설화를 새긴 조각(일명 ‘여자의 샘’), 뒤편 벽면 하부 좌우엔 각각 풍요와 건강을 상징하는 여신상이 있다.트레비분수는 우리말로 ‘삼거리 분수’ 또는 ‘세갈래길 분수’ 정도가 된다. 기원전 19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자 아그리파장군이 판테온 부근에 만든 공동 목욕탕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20㎞나 떨어진 ‘아쿠아 베르지네’로부터 수로로 물을 끌어들여 트레비분수와 스페인광장과 나보나광장의 분수에 사용됐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이 트레비광장에 세 곳으로 통하는 길이 나 이렇게 불리었다는 설도 있다. 이탈리아 작곡가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1879~1936)는 그의 출세작 교향시 <로마의 분수>에서 ‘새벽의 줄리아골짜기의 분수’(La fontana di Valle Giulia all’alba, 로마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너편 돌계단 위 피르두시 레페나광장의 샴페인잔 모양 분수, 1악장), ‘아침의 트레토네 분수’(La fontana del Tritone al mattino, 로마 바르베리니광장·Piazza Barberini의 트레토네분수, 2악장), ‘한낮의 트레비분수’(La fontana di Trevi al merrigio, 3악장), ‘해질녘의 메디치빌라(궁전)의 분수’(La fontana di Villa Medici al tramonto, 4악장) 등을 묘사했다. 이와 함께 나보나광장(Piazza Navona)의 피우미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i), 스페인광장(Piazza di Spagna) 인근 트리니타 데이몬티교회(Chiesa della Trinita dei Monti) 앞 바르카차분수(Fontana della Barcaccia)가 유명하다. 포폴로광장(Piazza del Popolo)에선 검은색 오벨리스크를 볼 수 있다. 나보나광장엔 바로크풍의 분수가 셋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광장 가운데, 산타그네제 인 아고네성당(Chiesa di Sant‘Agnese in Agone) 바로 앞에 자리잡은 일명 ‘4대강 분수’인 피우미분수다. 오벨리스크형 분수를 4개 대륙을 대표하는 나일강(이집트), 갠지스강(아시아), 다뉴브강(유럽), 라플라타강(아메리카)의 신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둘러싸고 있다.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59~1667)는 당대의 라이벌 건축가였다. 40대 초반까지 출세가도를 달리던 베르니니는 성베드로사원의 종탑 건설에 실수를 저질러 일시에 교황의 신망을 잃고 예술가로서의 명예가 실추됐다. 하중을 무시하고 거대한 종탑을 건설하다 건물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보로미니는 한 때 베르니니의 조수로 지내기도 했지만 1634년에 독립해서 산카를로 알레콰트로 폰타네 성당(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 1638~1641), 산 필립포 네리 승원(Oratory of Saint Phillip Neri, 1637~1650), 산티보 성당(Sant’Ivo alla Sapienza 1642~1650), 산타그네제 인 아고네성당(1652~1657), 프로파간다 피데(The Re Magi Chapel of the Propaganda Fide, 1648~1665), 팔라초 파르코니에리 파사드(Facade of Palazzo Falconieri) 증축(1638~1641) 등에서 독창적 건축을 창조했다. 탁월한 설계와 정밀한 시공, 특히 파사드의 요철(凹凸) 공법 도입은 오스트리아·남독일·브라질 등의 후기 바로크 건축에 큰 영향을 줬다.절치부심하던 베르니니는 피우미분수를 성공적으로 완성해 교황의 신임을 되찾았다. 밋밋하던 나보나광장에 멋지게 분수로 포인트를 준 것이다. 그러자 보로미니는 산타그네제 인 아고네성당의 파사드를 분수에 어울리게 단장해 베르니니에게 아름다운 복수를 했다. 30대에 두 건축 천재는 성베드로성당 건축에서 자웅을 겨뤘다. 로마의 많은 건축유산에 이 두 거장의 손길이 닿아 있다. 다만 정치적이었던 베르니니에 비해 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타인에게 강압적이고 신경질적이었던 보로미니는 베르니니의 명성에 눌리고 실의에 빠져 1667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 베르니니는 당대 최고의 미인과 결혼해 11명의 자녀를 얻었고 82세까지 장수했다.바르카차분수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명으로 1627년에 조각가 피에트로 베르니니(Pietro Bernini 1562~1629)와 그의 아들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가 제작했다. 바르카치아는 ‘쓸모없는 오래된 배’라는 뜻이다. 이 분수는 배가 반쯤 좌초돼 뱃머리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형태다. 테베레강이 자주 범람해 스페인광장이 1m가량 잠겼는데 물이 빠진 후 낡은 와인 운반선이 광장에 남아있는 모습을 보고 이를 분수로 표현했다고 한다. 17세기에 스페인대사관이 있었던 자리의 앞마당에 해당하는 스페인광장과 여기서 트리니타 데이몬티교회로 올라가는 일명 ‘스폐인계단’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쪼그려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장소로 로마 최고 명소가 됐다. 많은 여성 관광객들이 자기가 헵번이라도 되고 싶은 듯 바로 그 장소에서 기념 컷을 남기기 위해 줄을 선다.로마의 역사를 지켜본 판테온·콜로세움·포로로마노·개선문다음으로 발걸음을 옮긴 곳이 판테온(Pantheon)이다.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란 뜻이다. 고대 로마의 신들을 위해 기원전 27년에 처음 지어졌고 서기 125년경에 재건됐다. 모든 고대 로마 건축물 가운데, 전세계를 통틀어 당대 건물 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 전면에 8개 돌기둥, 후면 좌우에 두개씩 두줄의 돌기둥 등 총 16개의 코린트양식(Corinthian order) 돌기둥이 건물의 현관을 떠받친다. 돔 가운데는 지름 9.1m의 구멍이 뻥 뚫려 있는데 돔의 지름이나 돔의 높이가 43.3m로 동일해 공 모양이나 다름없다. 돌기둥이 단 하나의 화강암 돌로 이뤄졌고, 돔은 4535t의 하중을 견딘다. 누가 설계했고 그 어마어마한 무게의 돌을 당시에 어떤 공법으로 세우고 올렸는지 감탄할 따름이다. 구멍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돔 천장에는 움푹 패인 소란반자가 박혀 있어 하중을 지탱해주고 음향을 모으는 효과가 있다. 1436년에 완공된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지름이 42m인 것을 감안하면 과연 인류의 역작이다. 판테온에는 역대 교황, 이탈리아왕, 예술가의 무덤이 조성돼 있고 7세기 이후 가톨릭 성당으로 쓰이고 있다.다음으로 간 곳이 조국의 제단(Altare della Patria)이 보이는 베네치아광장(Piazza Venezia)이다. ‘로마의 배꼽’이라 불리는 곳에 광장이 있고 남쪽에 국군묘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동상 및 기념관(Vittorio Emanuele II Monument), 조국의 제단 등이 층층이 조성돼 있다. 제단 뒤편으로는 누오보궁전과 캄피돌리오 광장,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 등이 이어진다.베네치아광장은 1871년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16세기 베네치아공국의 로마대사관 역할을 하던 베네치아궁전이 자리잡고 있어 이런 광장 이름이 붙었다. 베네치아궁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재자 무솔리니가 집무실로 사용한 곳으로 유명하다. 무솔리니는 궁전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여든 군중에게 연설하거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선포를 하기도 했다. 현재 르네상스 예술품을 모아놓은 국립베네치아궁전박물관(Museo Nazionale del Palazzo di Venezia)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장 중앙에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념상이 서 있다. 통일박물관 또는 승리박물관으로 명명되기도 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동상 및 기념관(Vittorio Emanuele II Monument)과 조국의 제단은 ‘영원한 도시’인 로마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게 서둘러 짓는 바람에 로마에서 가장 흉한 유적지 건물로 낙인찍혀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은 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설을 시작해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 집권 시절인 80년에 완공됐다. 직경이 긴 쪽이 188m, 짧은 쪽이 156m이며 둘레가 약 527m인 타원형의 원형경기장이다. 검투사 경기를 보러 몰려드는 5만가량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게 지어졌다. 잔혹한 살육의 무대였다가 중세엔 교회로 쓰였다. 세월의 풍파와 지진, 자동차 배기가스 등으로 피해를 입어 많이 파괴됐다고 하나 지금도 꼭대기 전망대를 오르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서는 것으로 봐 건재함이 느껴진다.콜로세움 옆엔 개선문의 원조가 있다.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외곽에서 벌어진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312)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해 건축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o di Constantino)이다. 이 승리로 황제는 서로마 제국의 단일한 지배자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력이 성장하는 기점이 마련됐다. 높이 21m, 너비 25.7m, 두께 7.4m이다. 로마엔 이 개선문과 더불어 티투스 개선문(Arco di Tito)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 등 3대 고대 개선문이 있다.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살아남았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파리로 떼어가고 싶었으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보다 엄청나게 큰 세계 최대의 개선문을 파리에 지었다. 파리 개선문은 높이가 50m, 폭이 약 45m에 달한다.이들 개선문은 모두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로마공회장, 로마포럼, 로마광장)의 관문에 있다. 기원전 753년 팔라티노언덕(Palatino hill)에 조성된 로마공회장엔 신전, 바실리카(공회당), 기념비 등이 들어섰다.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1000년 동안 로마제국의 심장 역할을 했다. 283년 화재로 파괴된 후 복구되긴 했으나 중세 이후로는 이 공회장의 건물들을 헐어 건축자재로 쓰기도 했다. 지금은 개선문과 신전 정도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폐허지만 옛 흔적을 더듬어 로마의 영광을 상상해볼 수 있다.포로 로마노 전경을 맞은 편에서 볼 수 있는 포인트로 옮겼다. 필라티노언덕 아래 남측엔 건조한 하상(河床)엔 로마시대의 전차경기창(치르코 마시모, Circo Massimo)이 보인다. 로마시는 6년 여의 작업 끝에 파묻혀 있던 전차경기장의 원형을 복원해 공개했다. 당시 평민들은 사실 검투사시합보다 전차경기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길이 600m, 너비 140m의 이 공간은 황량한 공터로 전락해 복원 이전에는 가끔 대형 콘서트가 열리거나 시민들이 산책 또는 조깅하는 용도로 쓰였다. 밸런타인과 헵번의 사랑이 빚은 향기는 영원하다이어 찾아간 곳이 인근의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이다.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Cosmedin)의 입구의 벽면에 있는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새긴 대리석 가면이다. 지름은 1.5m 정도. 기원전 4세기전에 만들어졌으며 원래 가축시장의 하수구 뚜껑으로 쓰였다는 설이 있다. 중세 때부터 심문을 받는 사람의 손을 이 가면의 입 안에 넣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잘릴 것을 서약하게 했다. 진실을 말하더라도 심문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이 잘리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미국 기자 그레고리 펙이 시키는 대로 ‘진실의 입’에 손을 넣었다가 펙이 헵번의 손을 덥석 잡자 헵번이 마치 손이 잘리는 줄 알고 깜짝 놀라며 펙의 가슴팍에 안기는 실감나는 장면이 이곳을 뭇 관광객을 이끄는 명소로 만들었다.코스메딘 성당은 밸런타인데이의 유래가 된 성 밸런타인 주교의 유골이 안장돼 있어서도 유명하다. 발렌티노 성인은 남자들을 더 많이 입대시키기 위해 결혼을 금지하던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의 명령을 어기고 군인들의 혼인성사를 집전했다. 그가 순교한 날인 2월 14일을 기념하는 축일이 밸런타인데이가 됐다.성당 성구보관실(sacristy)은 8세기에 만들어진 옛 베드로성당의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또 18세기에 복원된 십자가 예배당과 세례당을 지금도 온전하게 볼 수 있다.로마의 종교·정치적 구심점 캄피돌리오광장 다음으로 향한 게 언덕 위의 캄피돌리오광장(Piazza del Campidoglio)이다. 캄피돌리오언덕은 고대 로마 발상지로 전해지는 7개 언덕 중 하나다. 팔라티노언덕이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가 건국할 당시의 가장 역사 깊은 장소라면, 캄피돌리오언덕은 규모는 작아도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로 신성시된다. 캄피돌리오광장은 거장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1547년 완공됐다. 광장은 중앙에 로마 시청사(Roma Capitale, 옛 원로원 청사), 그 오른편으로 카피톨리노박물관(Musei Capitolini), 왼편으로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dei Conservatori del Campidoglio, 누오보궁전 Palazzo Nuovo과 연결돼 있음) 등 3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광장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원래 산지오반니 인 라테라노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에 있던 기마상을 광장을 조성하며 이곳으로 옮겨놨다. ‘명상록’의 저자인 이 황제는 학자적 품성의 ‘현제(賢帝)’로 게르만의 민족 대이동을 막아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기마상을 중심으로 꽃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면 12각형의 별인 듯 꽃인 듯한 흑백의 모자이크 보도블럭이 아름답게 깔려 있다.시청 왼편에는 암 이리(암 늑대)상이 있다. 로마의 시조인 로물루스·레무스 형제가 늑대 젖을 먹으며 자랐다는 신화에 따른 것이다. 시청사 앞면 좌우에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제우스 조각상이 있다. 왼쪽은 제우스신이 스핑크스를 누르고 있고, 오른쪽은 제우스가 뱀의 머리를 잡고 그의 쌍둥이 아들(카스트로와 풀록스)과 휴식하는 모습이다. 미켈란젤로는 광장이 협소해보이는 것을 커버하기 위해 올라가는 계단 앞쪽과 광장 앞쪽을 계단 위쪽과 광장 뒤쪽보다 상대적으로 적게 한 역사다리꼴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원근감을 없애 착시현상으로 광장이 넓어보기게 한 것이다. 이 코르도나타(cordonata)계단은 미켈란젤로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로마 입성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계단 끝 광장 입구에는 우람한 말을 이끄는 기사상이 있다. ‘카스토레’와 ‘폴루체’ 형제의 동상이다. 이 쌍둥이 형제는 로마가 라틴족과 싸워 이긴 것을 가장 먼저 전한 공로가 있다고 한다. 이 동상도 일부러 머리를 크게 만들어 광장이 넓어보이게 했다니 감탄스럽다. 이탈리아가 라틴족으로 알고 있으나 여기서 라틴족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살다가 남하해 기원전 1000년경에 로마 북쪽의 라티움(Latium) 지역에 정착한 부족을 의미한다.여기서 보는 동상이나 건출물에 대부분 SPQR이 새겨져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로마의 원로원 시민’이다. 이탈리아어로 Senatus PopulusQue Romanus, 영어로 The Senate and People of Rome의 약어다. 왕이나 황제 같은 절대권력자가 다스리는 게 아니라 원로원(국회)와 시민이 참여하던 고대 공화정(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을 말한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수였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총리로 재임하던 1922~1943년에 SPQR을 수많은 공공 건축물은 물론 심지어 하수구 맨홀 뚜껑에도 새겼다. 새로운 로마제국을 지배하는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였다.
2017-10-23 12:11:07
이탈리아 패키지 여행엔 나·폼·소 3종 세트가 필수로 들어간다. 그만큼 지중해 문화의 진수를 대변한다는 의미다. 이번 여행은 폼페이 유적지를 둘러보고 기차를 타고 반도처럼 돌출한 소렌토에 내려 배를 타고 앞바다의 카프리섬에 기착해 섬 관광을 마치고 나폴리로 북상하는 코스다. 폼페이(Pompeii)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주 나폴리현 폼페이 코무네에 속한다.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 떨어진 베수비오산(Monte Vesuvius 1281m) 근처에 있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산에서 화산이 분출하면서 두께 4~7m의 화산재와 분석에 묻혀 파괴됐다. 1748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이 이뤄져 광장, 목욕탕, 수로와 마차도로, 원형극장, 약국, 주점 등의 유적지가 발견됐다. 현재 5분의 4 정도가 발굴됐다. 2010년 11월 6일에 폭우로 ‘검투사의 집’이 붕괴돼 아쉬움을 남겼다. 원래 항구를 낀 농업·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다. 지금은 내륙이 됐지만 당시엔 바다에서 잡아온 생선을 저장하고 비싸게 유통해 부를 축적한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기후와 토질이 좋아 농업도 발전했다.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묘사됐듯이 1세기의 폼페이는 로마에 완전히 동화돼 번영을 누렸으며 향락과 방종의 소굴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에 대한 심판으로 폼페이에 화산이 터졌다는 것인데 이미 시민 다수가 알코올중독, 납중독(식기·술잔에 납 사용)으로 폼페이는 오래 가지 못할 한계에 다다랐다는 가설도 있다. 유적을 살펴보니 고기잡이로 만선한 선장이 공중목욕탕에서 피로를 풀고 미녀와 밤새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했을 시대상이 떠오른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이탈리아어로 에르콜라노 Ercolano)도 폼페이와 함께 동시에 화산재에 파묻힌 유명한 고대 유적지다. 폼페이가 베수비오산에서 남쪽으로 수 ㎞ 떨어져 있다면 헤르쿨라네움은 베수비오산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나폴리와도 훨씬 가깝고 바다에서 멀지 않다. 발굴 전까지 화산쇄설암에 거의 진공상태로 유적이 보존됐기 때문에 목재는 물론 지붕, 침대, 창호, 음식 등이 유기질 상태로 남아 있다. 해안가에선 300개의 해골도 발견됐다. 헤르쿨라네움은 고급 가옥이 밀집한 것으로 봐 폼페이보다 훨씬 부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폼페이의 화산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2만명 추정) 중 2000~5000명이 즉사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도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순탄하게 재건됐다. 그러다 16년 뒤 화산 분출로 소멸되고 말았다.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평평한 언덕 위에 건설됐다. 주위의 농경지와 와이너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폼페이는 로마시대부터 와인 산지로 유명했다. 인구 2만의 도시에 와인바만 200개가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폼페이 농경지는 화산쇄설암으로 구성된 약 30㎝ 두께의 토양으로 이뤄져 통기성이 뛰어나고 각종 무기질이 풍부하다. 유기물도 토양 사이에 잘 스며들어 거름을 저장·소통하기에 좋다. 이런 테루아(토양)와 강렬한 햇빛 덕분에 폼페이는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와 피에몬테 지역에 빠지지 않는 와인 산지가 됐다. 이탈리아 특유의 와인 품질을 자랑하기 때문에 전문 투어도 활발하다. 폼페이역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 가까이 남서해안을 따라 달리니 소렌토(Sorrento)다. 불량 승객 탓에 기차 출발이 지연된 탓에 더 늦어졌다. 소렌토는 캄파니아주 나폴리현 소렌토 코무네에 속하는 소도시이다. 나폴리에서 남쪽으로 약 50㎞ 떨어져 있다. 치안이 불안하고 무질서하다고 소문난 나폴리보다 깨끗하고 정돈된 분위기다. 호텔도 많고 교통편도 비교적 잘 구축된 작은 소도시다. 소렌토는 나폴리만을 바라보고 해안가 뒤로 조그마한 마을이 얹혀 있는 형태다. 고대 로마제국 시대부터 인기 휴양지로 사랑받았다.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이탈리아 가곡의 배경과 국내 자동차 브랜드로 한국인에게 친숙하다.이 곳은 레몬, 올리브, 와인의 주산지다. 특히 세계 최고급 레몬 산지로 꼽힌다. 여기 레몬은 1세기부터 재배됐으며 개당 무게가 80g 이상이어야 소렌토산으로 인증되며, 지정된 지역에서만 재배가 허용된다. 레몬은 젤라토, 리큐어(limoncello), 사탕, 소르베(sorbet 과즙에 설탕을 넣어 얼린 빙과) 등에 들어간다. 웬만하면 특산품을 구매하지 않는 필자도 모처럼 레몬 리큐어와 사탕을 샀다. 소렌토는 자체에서 여행을 즐기는 관광객은 상대적으로 드물고 대개는 경유하거나 베이스기지로 이용되는 것 같다. 주로 카프리섬(Isola Di Capri) 또는 이스키아섬(Isola Di Ischia)을 가거나, 포시타노(Positano)·아말피(Amalfi)·라벨로(Rabello)를 거쳐 살레르노(Salerno)로 향할 때 쉬어가는 곳이다. 요즘 새로 뜨는 코스가 소렌토에서 살레르노에 이르는 아말피 해안도로 드라이브(또는 해안 페리투어) 및 미식여행이다. 해안 절벽의 지질학적 풍광과 그 공간에 지어진 오래된 집은 그림 같이 환상적이다. 소렌토 절벽 내리막을 따라 선착장으로 내려가니 카프리 행 여객선이 대기 중이다. 카프리섬은 사실 이름만 들어도 왠지 환상적이다. 맥주 브랜드, 카페나 바의 상호 등에 쓰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 세이렌(Seiren, 영어로 Siren)의 무대가 소렌토 앞바다의 이 섬이다. 세이렌은 반은 여자, 반은 새로 카프리섬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어부들은 배를 타고 가다 세이렌의 달콤한 노래에 넋을 잃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경찰차나 응급차에서 울리는 사이렌도 세이렌에서 유래한 것이다. 카프리섬에 여객선이 다가서니 급경사의 절벽에 층층이 낭만적인 저택들과 상업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과 중앙을 그냥 카프리, 서쪽을 아나카프리(AnaCapri)라고 한다. 카프리에는 해발 260m 안팎, 아나카프리에는 해발 500m안팎의 산봉우리가 몇 개 있다. 면적은 10.4㎢ 정도인데 봉우리가 높으니 전반적인 경사가 가파르다. 카프리항에서 내리자마자 여행가이드들끼리 출발 순서를 정하는 추첨에 들어갔고 우리 일행은 운이 좋아 두번째로 카프리섬 최고봉인 솔라로산(Monte Solaro, 589m) 케이블을 탈 수 있는 중형버스에 탑승했다. 버스는 좁은 지그재그 산길을 마주 내려오는 차량을 피해 잘도 올라간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미니 소방서와 돌덩이 하나로 표석을 세운 세계에서 가장 작다고 하는 로터리가 보였다. 내려가는 차량과 올라오는 차량이 30도에 불과한 턴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로터리를 돌아야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이 섬은 온난한 기후와 아름다운 풍경으로 로마시대부터 휴양지로 사랑받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계승자인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지가 남아 있다. 섬 전체는 용암 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시대부터 유명한 ‘푸른 동굴(Grotta Azzurra)’은 길이 53m, 너비 30m, 높이 15m의 해식동굴로 햇빛이 들어와 동굴 안을 푸른빛으로 채운다. 산 미켈레 저택(Villa San Michele)은 꼭 둘러봐야 할 건축물로 꼽힌다. 스웨덴 태생으로 부를 축적한 의사 악셀 문테(1857~1949)가 아나카프리 좁은 골목의 다 쓰러져 가는 옛 돌집 몇 채를 구입해 환상적인 환상적인 빌라로 탈바꿈한 것으로 로마, 스칸디나비아, 무어 양식을 과감하게 혼용해 재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폴리만을 향해 돌출한 바위 위에 여러 층으로 지어졌다. 문테는 죽기 전 이 저택을 스웨덴 정부에 기증했다.약 15분간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푸니쿨라레(스키장 리프트와 유사)를 타고 정상에 도착하니 일망무제의 탁 트인 바다와 섬의 정경이 펼쳐져 있다. 오르고 내리는 기분도 상쾌해 고소공포증을 느끼지 못했다. 뜨거운 날씨에 레몬 소르베를 한잔 들이키니 오장이 다 시원하다. 내려오는 길에 이탈리아 현지 여행가이드는 전라도 사투리조로 ‘돌아오라 소렌토’와 ‘오 솔레미오’를 이탈리아어와 한국어로 섞어 부른다. 일행들의 팁이 후하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카프리섬에서 1박이나 2박을 한다는데 패키지 여행이라 다시 나폴리로 향했다. 나폴리항에 다가가는데 아무리봐도 이른 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항, 호주 시드니항과 함께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힌다는 나폴리항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는다. 가이드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선원들이 오랜 항해를 마치고 나폴리항(지금은 신항, 과거엔 주로 산타루치아항구 이용)에 도착하면 바로 가까이에 델보로성(Castel dell’Ovo), 플레비시토 광장(Piazza del Plebiscito), 산카를로극장(Teatro di San Carlo), 누오보성(Castel Nuovo) 등이 지친 선원을 맞이하는 모양새라 미항으로 여겨졌던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나폴리는 인프라가 낙후되고 경제적으로 후퇴하는 우범지역이라 관광객이 내리면 불상사가 발생한다며 요즘엔 패키지 여행에서 나폴리를 경유하는 프로그램이 거의 사라졌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폴리민요 ‘오 솔레미오’와 ‘산타루치아’의 무대이자, 한 때 지중해를 장악한 찬란한 역사를 감안하면 이 곳을 경시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산타루치아는 나폴리 수호신이자 해안의 지명이자 가곡명이기도 하다. 나폴리는 여전히 이탈리아 3대 오페라극장(로마, 밀라노, 나폴리)이 있을 만큼 성악으로 건재하고, 해산물과 신선한 채소와 풍미깊은 치즈로 만든 마르게리따 피자의 원조로 꼽히는 까닭에 용감한 관광객들은 나폴리를 필수코스로 들른다. 그 첫째인 델로보성은 일명 ‘달걀성’으로 불리는 해안 요새다. 나폴리를 3대 미항으로 만들어준 산타루치아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섬(Borgo Marinaro) 위에 세워졌으며 다리로 연결돼 있다. 달걀성의 유래는 감옥이 달걀 모양이라는 설과 이 성을 지을 때 비르질리오(Virgilio)라는 사람이 기초 부분에 달걀을 담은 항아리를 묻고 달걀이 깨지만 성뿐만 아니라 나폴리도 위기에 놓일 것이라고 말했다는 설이 양립한다.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Museo Archeologico Nazionale)엔 폼페이·에르콜라노 발굴 유물과 고대 그리스·로마·이집트 유물이 전시돼 있다. 파르네제와 메디치 가문의 컬렉션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섬세한 대리석 조각과 정교한 모자이크화가 일품이다. 국립카포티몬테 미술관(Museo Nazionale di Capodimonte)에서는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티치아노 베셀리오(Tiziano Vecellio),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등의 성화와 17~18세기 나폴리 회화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다. 나폴리·시칠리를 지배한 스페인왕 카를로7세(1716~1788, 재위 1734~1759)가 어머니 엘리자베스 파르네제(Elisabeth Farnese)로부터 물려받은 미술품 콜렉션을 전시하기 위해서 건설한 궁전으로 바로크·로코코 양식이 혼재돼 있다. 고고학박물관과 카포티몬테미술관은 이탈리아 양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만큼 미술 마니아들이 놓쳐서는 안 될 코스다.
2017-10-18 11:07:46
패키지여행의 특성 상 베네치아 관광을 마치고 오전 11시까지 마치고 당일 오후 2시께 베로나(Verona)에 도착했다. 스위스에 가까운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중간 쯤에 위치한 곳이다. 거리엔 여유와 낭만이 느껴진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였다는 선입견도 작용하겠지만 베로나는 이탈리아 동북부에 위치한 베네토주(Veneto Region)에서 베네치아 다음으로 크고,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버스를 내려 아디제강(Fiume Adige)의 이름 모를 다리를 건너 카스텔 베키오(Castel vecchio) 성벽을 따라 20여 분 걷다보니 베로나에서 가장 튀는 로마시대 원형경기장 ‘아레나’가 눈앞에 서 있다. 서기 30년경에 세워졌고 로마의 콜로세움과 나폴리 원형경기장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한다. 로마시대에는 검투사들이 싸우는 경기장이었고, 중세에는 법원으로 사용됐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마상경기장으로, 18세기에는 코미디 공연 극장으로 쓰였다.19세기 이후 지금까지 오페라 공연장으로서 해마다 6월이면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린다. 가면무도회(베르디), 투란도트(푸치니), 카르멘(비제), 세빌리아의 이발사(로시니) 등 스케일 큰 거장의 오페라 작품이 공연된다. 아레나 동편으로 구시가지 진입로가 나 있다. 몇 분 걸어올라가다가 왼쪽에 보이는 곳이 에르베광장이다. 우측으로 꺾으면 카펠로 거리의 ‘줄리엣의 집’이다. 에르베광장(Piazza delle Erbe)은 베로나의 중심이다. 에르베(라틴어 herba, 약초, 전초)라는 명칭은 옛날 베로나의 약초시장에서 유래했다. 에르베 광장은 중앙의 분수대와 람베르티탑(Torre dei Lamberti)이 상징한다. 좌우에 고풍스런 건물이 늘어서 있다. 14~16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은 유서 깊고 동화처럼 아기자기하면서도 호화스러운 면이 겹친다. 베로나 시가 곳곳엔 분홍빛이 도는 베로나 석회암(로소, Rosso)로 지어진 건물이 많아 화사한 느낌이 든다.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에 카푸레티(Capuleti) 가문의 줄리엣이 실제 살았다는 증거가 없다. 그저 15세기풍 이탈리아 귀족의 저택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뜰에는 로미오가 세레나데를 불렀다는 테라스도 그럴 싸하게 만들어져 있고 자그마한 마당에는 줄리엣의 동상도 서 있다. 동상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속설 때문에 많은 남성 관광객들이 사진을 남기려 한다. 그 탓에 오른쪽 가슴만 반질반질하다. 동상 옆 나무에는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채워져 있고, 집 입구에는 영원한 사랑을 염원하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빼곡히 붙어 있다. 그러고보면 세익스피어는 베네치아에서 ‘베니스의 상인’, 베로나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로마에서 ‘줄리어스 시저’ 같은 자신의 대표 희곡을 착안했다. 이탈리아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을까.패키지 여행의 특성상 필자가 베로나에서 본 것은 여기까지다. 베로나 두오모성당, 산타 아나스타시아성당, 시뇨리광장은 에르베광장 지척에 있는 데도 미처 둘러보지 못했다. 아레나 옆 브라광장 분수도 놓쳤다. 촉박한 일정을 핑계로 시간에 맞추기 위해 필수코스를 생략하는 여행사의 관성이 원망스럽다. 차라리 다음날 일정인 친 퀘테레(5개 해안마을)를 생략하고 베로나 일정을 충분히 늘렸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친 퀘테레는 지중해라면 흔한 풍경의 하나일 뿐이란 생각이다.베로나 구도심지를 감아 흐르는 아디제강엔 7개의 다리가 있다. 그 중 로마극장 및 산 피에트로성(Teatro Romano & Castel san Pietro)과 구도심지를 잇는 피에트라다리(Ponte Pietra), 그 남쪽의 줄리엣의 집과 가까운 누오보다리(Ponte Nuovo)가 아름답다고 한다. 산 피에트로성에선 강 너머로 베로나 시내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붉은 벽돌과 지붕으로 지어진 오래된 가옥과 건물이 따듯한 인상을 준다.카스텔 베키오(Castel vecchio)는 베로나 대공인 칸그란데 Ⅱ 델라 스칼라의 요새 궁전으로 1356년에 지어졌다. 붉은 벽돌을 사용한 고딕양식이다. 구도심의 서쪽, 아디제강이 굽어지는 포인트에 위치한다. 강은 이곳을 기점으로 구도심을 감싸며 동쪽으로 흐르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간다. 칸그란데는 베로나를 지배하는 요충지에 머물면서 변란이 일어나면 스칼리게로다리(Ponte Scaligero)를 통해 안전하게 대피하려 했다. 그러나 칸그란데는 시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려 부를 쌓고는 이 돈을 모두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은행으로 빼돌렸다가 시민들의 증오를 사고 결국 동생의 손에 살해당하고 만다. 카스텔 베키오도 꼭 감상해야 할 위대한 건축물로 선정돼 놓치지 말아야 할 명소다.베로나 일정을 마치고 석양 무렵에 밀라노에서 내렸다. 밀라노(Milano)는 서로마제국의 수도였고 지금은 롬바르디아주(Lombardia Region)의 주도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곳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태동해 밀라노에서 만개했다고 개념짓기도 한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파리와 함께 패션의 산업화, 세계화를 추동하는 엔진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예술과 자본이 동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밀라노 관광은 스칼라극장(스칼라좌, Teatro alla Scala)이 있는 스칼라광장까지 걸어가는 것으로 시작됐다. 스칼라극장은 베르디와 푸치니가 오페라를 초연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176년 화재, 1943년 2차 세계대전 공습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이내 다시 복원됐다. 내부에는 3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있다. 스칼라광장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상이 있다. 다빈치 동상 하부엔 4명의 제자가 그를 떠받들고 있다. 스칼라광장에서 밀라노 두오모대성당을 연결하는 아케이드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Galleria Vittorio Emanuele Ⅱ)다. 하늘을 덮은 거대한 유리지붕 아래 루이뷔통, 프라다, 베르사체 같은 명품점이 몰려 있다. 건축가 주세페 멘고니(Giuseppe Mengoni 1829~1877)는 이 아케이드가 완공되기 1년 전 공사감독을 하던 중 천장에서 추락해 사망하기도 했다. 이 거대한 쇼핑몰은 당시로는 유리와 철골만을 사용해 지어진 최초의 건물로 인식되고 있다. 밀라노가 오스트리아 지배에서 벗어나 신생독립국가인 이탈리아의 산업과 상업의 선두 도시임을 건축물로 웅변하려는 기세가 엿보인다.이 갤러리는 통일 이탈리아왕국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395년 동로마 서로마로 분리된 이후 재통일된 1861년까지 근 1500년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이슬람 등의 각축장이 됐다.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샤르데니아의 제2대 국왕(재위 1843~1861)으로 재위하다 통일 후 제1대 국왕(1861~1878)이 됐다. 일찍이 입헌군주제 체제로 행정·재정의 근대화를 추진했고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20~1878)의 남 이탈리아 원정을 지원해 오스트리아로부터 롬바르디아를 수복하고 시칠리아까지 통합하는 업적을 이뤘다. 이 때문에 그를 국부(國父), 성실왕(誠實王)으로 부른다. 에마누엘레 갤러리는 워낙 화려한 공간이라 ‘밀라노의 거실’이란 별칭이 붙었다. 십자로(200m, 100m의 회랑이 수직으로 교차)의 천장은 팔각형의 유리 돔으로 웅대하다. 그 아래 루넷(lunettte 둥근 지붕이 벽과 만나는 지점에 생기는 반원형의 공간)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는 여상주(女像柱)를 올린 발코니가 이어져 19세기 근대건축의 최상 면모를 과시하고 한다. 갤러리의 바닥은 타일로 장식돼 있다. 그 정중앙의 팔각형 모자이크엔 피렌체의 백합, 로마의 늑대, 밀라로의 십자가, 토리노의 황소 등 주요 4개 도시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는 샤르데니아 왕국의 일원인 사보이(Savoie) 가문을 상징한다. 두오모대성당은 로마시대의 도시구조인 메디올라눔(Mediolanum)에서 한 가운데를 점하고 있다. 모든 밀라노의 도로가 결국 이 지점에 모이고 여기서 방사된다. 첫번재 성당(basilica nuova)은 작은 규모로 355년경에 테클라 성인(St Thecla)에 봉헌됐다. 그 옆에 또다른 바실리카가 836년에 추가로 지어졌다. 화재로 이 두 건물은 1075년에 소실됐다. 다만 오래된 팔각형의 세례당(the Battistero Paleocristiano, 335년 건축 추정)은 지금도 남아 순례객을 맞고 있다.지금의 대성당은 1386년 안토니오 다 살루초(Antonio da Saluzzo) 대주교가 이탈리아보다는 프랑스에서 보편적이었던 후기 고딕 양식인 라요낭(rayonnant)양식으로 건축을 시작했다. 대주교의 사촌인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Gian Galeazzo Visconti)가 밀라노에서 권력을 잡은 시기와 맞물렸다. 피렌체를 지배한 게 메디치 가문이라면 밀라노는 비스콘티 가문이 쥐고 흔들었다. 비스콘티 가문의 전임자였던 바르나보 비스콘티(Barnabo Visconti)의 폭정에 대한 귀족과 노동자의 원망과 불만을 간파한 갈레아초는 공사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대주교의 궁전, 오르디나리 궁전, 봄의 성 스테파노 세례당 등 세 개의 주요 건물이 철거하는 동시에 옛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석재를 가져와 썼다. 시민들에게 훌륭한 새 건축물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갈레아초와 대주교가 힘을 모아 기부금을 모았다. 작업은 빠르게 진행돼 갈레아초가 1402년 사망할 무렵에는 대성당의 거의 절반이 완공됐다.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과 설계 수정으로 밀라노 두오모를 완성하는 데 거의 500년이 걸렸다. 밀라노 대주교였던 샤를 보로메오(Charles Borromeo 1538~1584)와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펠레그리노 티발디(Pellegrino Tibaldi(1527~1596)는 대성당에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외관을 추가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딕양식은 이탈리아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페데리코 보로메오(Federico Borromeo, 1564~1631)는 프란체스코 마리아 리치니(Francesco Maria Richini 1584~1658)와 파비오 만고네(Fabio Mangone 1587~1629)에게 대성당의 새로운 외관을 기초하도록 지시했다. 다섯개의 입구와 두개의 중앙 창문을 건설하는 작업은 1638년까지 계속됐다. 잠시 고딕양식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기도 했다.1762년 대성당의 주요 포인트인 108.5m의 마돈니나 첨탑(Madonnina’s spire) 첨탑이 세워졌다. 밀라노의 유명한 습기차고 흐린 기후 탓에 먼거리에서도 이 첨탑이 잘 보이면 밀라노 사람들은 날씨가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1805년 5월 20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 나폴레옹 1세)는 이탈리아왕에 즉위할 무렵 건물의 외관을 완성하도록 지시했다. 의욕에 넘쳐 프랑스의 회계 담당자가 건축 공방에 모든 비용 부담을 보장토록 지시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나폴레옹 조각상이 한 첨탑의 꼭대기에 설치됐다. 1829년~1858년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새 것으로 교체돼 미적 가치가 떨어지기도 했으나 20세기에 접어들어 세부 장식이 완성됐다. 가장 마지막으로 완성된 출입구는 1965년 1월 6일에 열렸다.밀라노 두오모대성당은 135개의 첨탑(최고 높이 157m)과 3000개가 넘는 조각상으로 장식돼 있다. 아직도 조각이 끝나지 않은 돌 덩어리가 무수히 많다. 대성당의 주 정면은 2003년부터 2009년 2월까지 공사가 진행돼 칸돌리아 대리석(Candoglia marble, 붉고 검고 회색빛 줄이 층층이 섞여 있음)의 색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10만 유로 이상을 기부하면 첨탑의 외관에 기부자의 이름을 새길 수 있다.밀라노 두오모는 화려함, 도시적 세련미, 웅장함에서 단연 돋보였다. 너무 호사스러운 나머지 신에 대한 엄숙한 경배가 오히려 뒷전일 정도다.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가 인접해 있어 이런 측면이 더 부각돼 보이는지도 모른다.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는 짜증이 날 정도로 비둘기가 많다. 관광객을 상대로 새 모이를 비싸게 팔거나, 행운을 주는 실 팔찌를 채워놓고는 돈을 내놓으라 트집잡는 협잡꾼도 많다. 시빗거리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경써야 한다.
2017-10-16 14:49:11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 ‘수상도시’로 불린다. 필자는 막연히 해변을 중심으로 몇 개의 섬들이 이어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베네치아만(灣) 안쪽의 석호(潟湖, Lagoon)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섬이라는 게 실은 우리나라 다도해처럼 띄엄띄엄 놓인 게 아니라 다닥다닥 붙어 있되 격리된 사주(砂洲, 모래톱)가 무리지어 있는 것이었다. 좁게는 수 m, 넓게는 수십 m, 아주 넓게는 100여 m 간격을 두고 놓여진 섬을 돌로 된 무지개다리가 잇고 있었다. 모래톱 위에 도시가 형성됐으니 지반이 약하고 염도가 높은 지하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거대한 섬 군락 위에 험란한 공정을 거쳐 휘황찬란한 건축물을 일궈냈으니 가히 섬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일 만하다. 베네치아(Venezia)는 이탈리아 동북부에 위치한 베네토주(Veneto Region)의 주도로 영어 이름은 베니스(Venice)다. 본래 뻘밭이었으나 567년 이민족(훈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석호 안 모래톱 위에 도시를 건설했다. 뻘밭에 나무기둥을 박고 돌·벽돌·흙으로 축대를 쌓아 올린 기반 위에 도시를 조성했다. 이른 바 배적임수(背敵臨水)의 입지다.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강화도로 옮겨 저항한 고려인의 절박감이 느껴진다. 6세기 말에 이미 리알토섬을 중심으로 12개 섬에 취락이 형성됐다. 리알토는 이후 베네치아 산업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 아라비아 숫자 ‘2’처럼 중심을 관통하는 대운하만이 그나마 베네치아가 섬의 군락임을 재인식시켜줄 뿐이다.패키지관광에선 대체로 뭍과 베네치아 섬 군락을 연결하는 길이 3850m의 유일한 연륙교인 자유교(Ponte della Lieberta)를 건너 여객선터미널에 내려 배를 타고 베네치아 서쪽에서 남쪽으로 C자 모양으로 감아돌아 산마르코성당, 산마르코광장, 두칼레궁전, 탄식의 다리 등이 있는 곳(약칭 본섬)을 둘러보고 수상택시를 타고 대운하를 남에서 북으로 거슬러 올라 여객선터미널로 돌아오는 루트를 택한다. 시간과 비용의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라면 도보로 하루이틀 베네치아의 여러 섬들을 잇는 다리를 건너며 몽환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지난 여름 베네치아에선 과도하게 몰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이 곳 시민들이 이탈리아 정부에 여행객 제한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를 감안하면 베네치아 곳곳을 둘러보는 것은 “나에겐 ‘로망스’일지언정 그들에겐 ‘불청의 민폐’”가 될 것이다. 베네치아는 근래에 지구 온난화에 의한 지반침하와 주민·관광객들에 의한 석호 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낮에는 화사하지만 밤에는 음울한 분위기가 풍겨나온다고도 한다. 주민의 삶의 터전이라기보다는 관광객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어지는 곳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하지만 관광수입 감소를 우려하는 이탈리아 정부가 베네치아 여행객을 급격하게 제한할 것 같지는 않다.본섬을 향하는 여객선 선상에서 보니 양안에 오래된 유서 깊은 건물이 즐비하다. 재력가나 유명인의 별장, 미술관이 상당수인데 개별 선착장을 갖춰놨다. 오래된 성당과 궁전, 관공서도 즐비하다. 본섬 남측 맞은 편에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성당(동쪽부터 서쪽으로), 페기구겐하임미술관, 아카데미아미술관이 도열해 있다. 이보다 남쪽으로 더 떨어진 산조르지오섬엔 산조르지오마조레성당이 보인다.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성당은 안성기 씨가 커피광고를 찍을 때 배경으로 나온 곳이다. 1630년 페스트가 돌았을 때 베네치아 시민의 약 20%인 4만7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 살아남은 사람이 성모 마리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56년에 걸쳐 지은 게 이 성당이다. 팔각형 기단 위에 세운 하늘색 돔이 아름답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커다란 돔이라고 한다.페기구겐하임미술관에선 샤갈, 달리, 칸딘스키 등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아카데미아미술관은 베네치아 화파의 대표적 작품을 모아놓은 곳이다. 폭풍우 치는 날 들판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와 이를 지켜보는 남자를 그린 조르지오네의 대표작 ‘폭풍’을 비롯해 틴토레토, 카르파치오, 만테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욕심을 낸다면 레이스장식을 특산품으로 내세우는 부라노섬(본섬 동북쪽), 유리세공업으로 유명한 무라노섬(본섬 북쪽), 국제영화제 개최지·해수욕장·카지노 등이 들어선 리도섬(본섬 동남쪽) 등을 둘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본섬에서 벗어나 여행하려면 수상택시를 타야 한다.본섬에 내리니 두칼레궁전이 첫 눈에 들어온다. 두칼레궁전은 베네치아 총독이 사용하던 관저이다. 이곳에서 판결을 받은 죄수들이 교도소로 넘어가던 ‘탄식의 다리’도 보인다. 탄식하기엔 너무 어여쁜 다리다. 산마르코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과 광장은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다. 수십 명의 유명 화가들이 이 명소를 자기만의 화풍으로 그려냈다. 마르코는 우리말로 성경을 정리한 ‘마가’ 수호성인이다. 마가의 상징동물은 ‘사자’여서 이 성당 곳곳에는 사자와 관련된 조형물이 눈에 띈다. 9세기 초에 말마로코의 부오노(선량한 이)와 토르첼로의 루스티코(시골뜨기)라는 이름의 두 상인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마가의 유해를 훔쳐 회교도인 이집트인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 밑에 숨겨 밀반입했다. 이를 안치하기 위해 829~832년에 지은 납골당이 성당의 근간이 됐다. 그러나 976년 반란이 일어나 화재로 교회(납골당)가 불타 버렸다. 1063년부터 소실된 교회 자리에 베네치아의 절정기였던 당시의 경제력을 쏟아부어 약 10년 간에 걸쳐 재건했다. 베네치아는 10세기 말 동부 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도시공화제) 중에서 가장 부강한 곳으로 성장했다. 이 때부터 대운하 출구 쪽에 지금의 산마르코광장과 대성당, 교회·궁전 등의 기초를 조성했다. 대성당은 동방의 영향을 받은 비잔틴 양식의 전형으로 화려하기 그지 없다. 4개 원형 돔은 비잔틴풍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베네치아 시민은 동방을 침략할 때마다 대성당을 장식할 조상(彫像)·부조(浮彫) 등을 조달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엔 십자군이 성지(이스라엘)는 가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를 함락해 막대한 재화와 보물들을 약탈했고, 이 중 일부가 베네치아로 흘러들어왔다. 청동으로 된 4마리의 청동 말 조각상(Quadriga, 콰드리가, 로마의 전차경주용 4두마차)이 대표적이다. 대성당 내부의 대리석 판석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 깔린 것을 뜯어왔다고 한다. 산마르코광장은 베네치아의 정치·종교·문화의 중심지로 대성당과 16세기에 지어진 정부 청사 건물로 싸여 있다. 아치형의 정부 청사는 지금 아케이드 상가로 쓰인다. 광장 주변은 이탈리아·아랍·비잔틴·고딕·르네상스·바로크 양식 등 각양각색의 건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이 곳에서 융합되는 느낌이다. 광장은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찬사를 보냈을 정도로 아름답다. 비에 젖은 야경은 더욱 인상깊다고 한다. 광장 북면(대성당 전면의 우측)에 1499년에 완공된 시계탑(Torre dell Orologio)이 보인다. 베니스 상인들이 아라비아와 무역하면서 익힌 아라비아 숫자로 시계를 만들었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시계탑 아래로는 아치형의 통로가 리알토 지구의 상점으로 연결되는데 이 길을 메르체리아(Merceria)라고 부른다. 시계탑의 대각선 방향으로는 1720년에 개업한 유럽 최초의 카페 플로리안(Florian)이 아직 영업 중이다. 나폴레옹, 괴테, 바이런, 카사노바 등이 단골이었다고 한다. 커피 한 잔 값이 식사 한 끼에 버금갈 정도로 비싸다.광장 한 켠의 산마르코종탑(Campanile di San Marco)에 오르면 도시 전경을 관람할 수 있다. 높이는 98.6m이고, 붉은 벽돌로 쌓은 단순한 구조다. 첨탑 꼭대기에 있는 황금 동상은 대천사 가브리엘을 본뜬 것이다. 종탑은 1514년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됐다가 1902년에 붕괴했다. 지반이 약한 데다가 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종탑은 1912년에 재건됐다. 베네치아 여행의 꽃이라는 곤돌라와 수상택시를 연이어 탔다. 곤돌라를 타면 울렁거린다고 하는데 그런 느낌은 별로 없다. 혹자는 뱃사공이 이탈리아민요를 불러주며 운치를 돋운다는데 그런 일도 없었다. 사공은 숙련된 솜씨로 안정하게 노를 저을 뿐이다. 운하 양측의 가옥들은 바닷물에 침식돼 언제라도 붕괴될 것처럼 불안하다. 곤돌라로 좁은 수로를 지나다보니 마리아 스칼라란 문패가 보였다. 짐작대로 사공은 과거 ‘천의 목소리’로 불린 그리스계 이탈리아 소프라노 가수인 마리아 칼라스(1923~1977)의 별장이었던 곳이라고 확인해줬다. 마릴린 먼로(1926~1962)의 별장도 베네치아에 있었다. 수변에 아름다운 정원이 있어 더욱 고급스럽다고 한다.매우 빠른 속도로 달리는 대운하 관통 수상택시에선 베네치아 제일의 국립대학인 ‘카포스카리대’(Universita Ca Foscari)와 상권 중심지의 상징이자 가장 유명하고 큰 ‘리알토다리(Ponte di Rialto)’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카메라에 못 담아서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흔히 한국인은 베네치아를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무대이자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배우 강수연이 ‘씨받이’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으로 기억한다. 베니스의 상인은 15~16세기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베네치아의 시대상과 그 그 성공모델인 유태인에 대한 반감을 반영한 스토리다. 강수연을 시작으로 전도연(칸, 2007년 밀양), 김민희(베를린, 2017년, 밤의 해변에서 혼자) 등 한국 영화배우가 이른 바 3대 영화제의 본상을 모두 수상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로마·피렌체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3대 관광지이다. 제노바(제노아), 나폴리에 이은 3대 상업항구다. 20세기에 접어들어 베네치아 섬 군락에 마주보는 육지쪽(對岸)에 마르게라·메스트레 등 화학·기계 공업지대가 들어섰다. 구시가지는 면적이 좁고, 현대적인 편리한 환경 조성에 한계가 있어 대안부의 도시화가 현저히 진행되고 있다. 베네치아에서 숙박은 쉽지 않다. 비싸기도 하고 유럽 여행객이 몰리는 성수기에는 숙소를 구하지 못해 노숙해야 한다. 숙박할 곳을 오래 전에 예약하거나 베로나, 파도바 등 인근 대도시에 숙소를 구하는 게 현명하다. 몽환의 수상도시를 여유 있게 보면 좋을 텐데 이를 갈망하는 세계인이 너무 많으니 다시 가볼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난다.
2017-09-13 15:52:03
지난 8월 초 이탈리아 여행 이틀째, 로마에서 버스로 두어 시간 달려 북상하니 피렌체다. 여느 패키지여행이나 배낭여행에서 로마를 거쳐 피렌체·피사를 들르는 것은 당연지사의 코스다. 패키지여행에선 시간이 촉박한 만큼 이것저것 다 둘러볼 수도, 음미할 겨를도 없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북적대는 관광객 인파도 잠시의 사색이나 여운을 허락하지 않는다.피렌체(Firenze)는 토스카나주의 주도로 필자에겐 ‘남성 양복 브랜드’로만 각인될 정도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피렌체가 양복 브랜드로 쓰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348년 흑사병 이전 피렌체 인구는 9만4000명으로 추측되는데 이 중 2만5000명이 양모산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또하나, 필자의 얄팍한 지식으로 피렌체의 영어지명이 플로렌스이고, 백의의 천사이자 간호사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위인의 풀네임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이라는 것. 연유를 살펴보니 영국 부호 출신의 부모가 피렌체 여행 중 나이팅게일을 낳아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하지만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고 한 때 글로벌 상업·금융도시로 명성을 떨쳤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메디치 가문,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단테, 보카치오, 페트라르카가 활동했던 주무대였다는 역사를 접하니 필자의 무지부박함에 스스로 머리를 긁적이게 된다. 피렌체는 인구 40만명 안팎인 소도시이지만 사통팔달한 교통의 요지에 있다.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총 약 150만명에 달한다. 아르노강(Fiume Arno)을 끼고 동북쪽으로 면한 지역이 구도심이다. 기원전 5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베테랑 병사(전역군인)를 위한 정착지로서 건설했고 본래 플루엔티아(Fluentia)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이곳을 아르노강과 세 개의 작은 강이 끼고 흐른다 하여 나중에 플로렌티아(Florentia, 흐름)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것이 플로렌스의 어원이다.아르노강은 아펜니노산맥에서 발원해 피렌체와 피사를 거쳐 리구리아해(이탈리아 서쪽 북부 바다)로 흐른다. 산지미냐노(San Gimignano), 키안티(Chianti), 몬탈치노(Montalcino) 등 이탈리아 레드와인의 유명산지가 다 피렌체가 속한 토스카나주에 있다. 피렌체는 1865년에서 1870년까지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지금도 로마가 이탈리아의 정치적 수도라면, 피렌체는 문화예술의 수도다. 피렌체는 1982년에 구도심 대부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될 정도로 거리 곳곳이 볼거리다. 단테, 메디치, 마키아벨리가 이뤄놓은 문화예술적 아름다움과 지적 자산들이 도시에 넘쳐흘러 관광객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킨다. 보석세공품이나 가죽공방 등도 피렌체다운 면모를 보인다. 피렌체는 가톨릭, 미술, 문학, 산업과 관련한 다수의 영역에서 앞서나갔고 독특하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적’인 것을 뛰어넘어 ‘피렌체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금년도 7월 기준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1073점으로 이 중 문화유산이 832점, 자연유산 206점, 복합유산이 35점이다. 지난 7월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일대에 걸쳐 있는 베네치아 요새가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이탈리아는 총 53개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갖게 됐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이고 다음으로 중국, 스페인이 뒤를 잇고 있다.이런 명성에 부합하게 피렌체에도 웅장하고 훌륭한 건축물이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다. 패키지여행의 한계로 겨우 피렌체 두오모성당과 시뇨리아광장, 우피치미술관 밖에 보지 못했지만(그것도 안은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들러볼 곳이 많다. 하루는 묵어야 그나마 피렌체의 껍데기라도 어루만져 볼 것이다. 산타마리아 노벨라교회(약국), 미켈란젤로광장, 산타크로체성당(광장), 산로렌초성당, 바르젤로미술관, 아카데미아미술관, 메디치 리카르디궁전, 베키오궁전(현재 시청사), 베키오다리(ponte Vecchio), 산타트리니티다리 등은 꼭 들러봐야 하는 명소다. 산타크로체성당엔 단테의 가묘를 비롯해 미켈란젤로와 갈릴레이, 마키아벨리와 로시니 등의 무덤이 있다. 피렌체 두오모성당은 2003년 개봉한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연인들의 성지’로 묘사돼 제법 한국인에게 유명해졌다. 이 성당은 웅대하고 붉은 돔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그저 상투적인 100% 순정 멜로물이라고 보는 필자의 외눈박이 시각으로는 영화의 아름다운 배경으로 성당이 활용됐고, 이탈리아를 흠모하는 일본인의 지적·감정적 허영이 각별하다고 밖에는 느껴지기만 한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인 준세이는 절절이 사모하는 여자 주인공 아오이를 10년 만(2000년)에 피렌체 두오모성당 큐폴라(cupola, 반구형의 돔)를 오르는 464개의 좁은 계단에서 만난다. 시대를 한참 앞서 ‘신곡’의 저자 단테는 10살에 혼자 흠모한 연인 베아트리체를 아르노강의 가장 오래된 베키오다리에서 처음 만났고 9년만에 같은 장소에서 재회한다. 이런 이유로 피렌체를, 또는 두오모성당을 연인들의 성지로 부르는가 보다.두오모성당에서 두오모란 라틴어인 도무스(domus)에서 왔다. 고대 로마에서 도무스는 건물 가운데가 뻥뚫린 가옥구조를 의미했고, 건축용어로 독어·영어로 돔(dome)이며 반구형의 지붕을 뜻한다. 가정, 지배라는 의미도 있다. 영어로 내국인을 의미하는 도메스틱(domestic)도 도무스에서 왔다. 두오모란 자체가 대성당(주교좌성당, 교구장이 본거하는 성당)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 바실리카(basilica)는 교황으로부터 특권을 받아 일반 성당보다 격이 높은 성당을 말하는데 교회 역사 초기에는 그리스도 정신을 고양할 만한 모범이 되는 건물이 없어서 고대 로마의 법정 건물을 전형으로 삼아 교회(성당)을 지었다. 전체 모양은 직사각형이고 중앙에 본당, 측면 복도에 반원형 또는 아치형의 감실이 늘어서 있는 형태다. 카테드랄(cathedral)이 대성당으로 번역되는 것으로 보면 대형 카테드랄은 기실 외관이나 규모면에서 바실리카와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이탈리아엔 10여 개의 두오모성당이 있는데 대표적인 게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이고 피렌체 두오모성당(산타마리아 델피오레 성당,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베네치아 두오모성당(산마르코성당, basilica de san marcos de venecia), 오르비에토 두오모성당(산타마리아 아순타 대성당, Cattedrale di Santa Maria Assunta), 밀라노 두오모성당(Duomo di Milano), 피사 두오모성당(Duomo di Pisa), 토리노 두오모성당(Duomo di Torino) 등을 꼽을 수 있다. 성당마다 별칭이 있고, 추앙하는 주된 성인이 다르다. 로마 베드로대성당은 베드로, 산마르코성당은 마가를, 토리노 두오모성당은 요한 성인을 각별히 각별히 모신다고 보면 될까. 또 피사 두오모성당은 피사의 사탑(종탑), 토리노 두오모성당은 예수 수의로 유명하듯 각기 특색이 있다. 기독교 성인을 건축물의 조각이나 미술작품을 동물로 형상화하는데 마가(마크, 마르코)는 사자, 누가(루크, 루카, 루가)는 황소, 요한(존, 지오반니)은 독수리다. 마태(매튜, 마테오)는 사람 또는 천사를 의미한다. 신약 성경을 집필하고 전파한 이들 4명을 복음사가(福音史家)라고 한다. 그래서 산마르코성당에는 사자 관련 조형물이 유난히 많다.감히 짧은 유럽여행 경력으로 논하자면 프랑스의 성당은 푸근했고, 독일의 성당은 엄숙했으며, 포르투갈의 성당은 고졸했다. 스페인의 성당은 현대적이면서도 밝은 기운이 묻어났다. 이탈리아 성당은 휘황찬란하고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예술로 승화하려는 온갖 지극정성이 배어나온다. 그래서 유럽여행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서 이탈리아에서 피크를 찍는다고 했을까. 피렌체를 ‘꽃(Fiore)의 도시’라고 한다. 피렌체 두오모대성당을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순백의 대리석과 성당의 붉은 지붕, 대리석 사이에 숨은 녹색·적색 문양 등이 수천 송이 꽃과 같아서 이런 찬사를 듣는다고 한다. 이탈리아 삼색 국기도 백·녹·적 삼원색을 담고 있다. 왼쪽의 녹색은 아름다운 국토, 가운데 백색은 알프스의 눈과 정의·평화, 오른쪽의 적색은 애국 열혈을 상징한다고 한다. 녹색·백색·적색의 삼색은 자유·평등·박애도 의미한다. 과연 ‘피오레(꽃)’란 말을 들어도 넘치지 않는 피렌체 두오모성당이었다.피렌체 두오모성당에 붙어 있는 종탑을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가 설계했다 하여 ‘조토의 종탑(Campanile di Giotto, 또는 지옷토의 종탑)’으로 부른다. 높이가 85m로 414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화가이자 건축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였던 조토가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피렌체 양식을 구현했다. 한편 피렌체 두오모성당의 돔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가 설계해 1420년에 작업이 개시돼 1434년에 끝났다. 그것도 돔위의 뾰쪽탑(정탑)은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 그러니 이 성당이 200년 넘게 걸쳐 뼈대를 갖췄다는 게 결코 허언이 아니다. 조토나 브루넬레스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은 모두 시대를 앞서간 천재성이 빛나는 삐딱한 거인이었다. 이들을 모셔다 찬란한 문화유산을 창조해낸 것은 피렌체의 그릇이 컸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피렌체를 오랜 세월 지배하며 문화적 토양을 조성해온 메디치 가문 덕분이었다. 오늘날 재력가의 문화예술지원을 메세나 활동이라고 하는데 메디치 가문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피렌체인들은 메디치 가문을 수차례 배반하고 권력에서 물러나게 했다가 다시 옹립하는 변덕을 부렸다. 메디치 가문은 문화예술의 진흥, 산업발전, 르네상스 개화를 위해 노력했다. 군림하는 자로서의 미덕과 위엄, 정치적 수완을 완성도 높게 발휘하기도 했다. 두오모 성당 정문 바로 앞엔 산조반니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가 있다. 4세기 경에 건조된 소성당을 1059년에 재건하기 시작해 1128년에 완공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백색과 녹색 대리석을 이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 피오렌티나(피렌체) 양식을 접목했으며 작은 바실리카로 분류된다.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세례 요한(이탈리아어로 산조반니)에게 바쳐졌다. 팔각형의 비잔틴 양식 돔 내부 천장엔 황금색 빛깔의 모자이크 성화가 아름답다. 세례당은 동문, 북문, 남문 등 3개의 문도 유명하다. 동문과 북문은 르네상스시대 천재 부조작가였던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가 만들었다. 동문은 1425년부터 1452년까지 27년간 작업한 끝에 만든 역작으로 높이 7m에 무게만 8t에 달한다. 훗날 미켈란젤로가 동문을 보고서 ‘천국의 문’으로 불릴 만하다고 평하면서 이런 별칭을 얻었다. 동문은 구약성경 10개 에피소드를 조각한 것이다. 동문의 청동판 부조는 1966년 피렌체 대홍수로 10개 중 6개가 강물에 휩쓸려 부식돼 27년에 걸쳐 복원됐다. 현재 부착된 전시물은 전부 복원한 것이고 원본은 두오모성당 박물관(Museo dell‘Opera del Duomo)에 보관돼 있다. 북문은 기베르티가 21년에 걸쳐 만들었다. 신약성경 20개 에피소드와 8인의 성인을 부조로 만들었다. 기베르티는 이들 두 개 문을 만드는 데 77년의 생애 중 48년을 바쳤다. 남문은 조토의 권유로 안드레아 피사노(Andrea Pisano, 1290~1348)가 1329~1336년에 걸쳐 28개의 부조로 만들었다. 초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간소한 느낌이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근처엔 단테의 생가가 있다. 이탈리아 방언을 이용해 지금의 이탈리아 표준어 기초를 만들고, 모국어로 된 문학을 꽃피우게 한 단테도 피렌체 출신이다. 영국에 세익스피어가 있다면, 이탈리아는 단연코 단테다. 하지만 피렌체인들이 단테를 높게 평가하고 기린 것은 한참 후였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독일), 교황청, 스페인의 공세에 쇠락해가는 메디치 가문의 부흥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위정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담아 ‘군주론’이란 명저를 남겼다. 두오모성당이 신의 영역이라면 근처의 시뇨리아광장은 인간의 공간이다. 이 광장엔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그 유명한 다비드상이 있다. 피렌체에는 세 개의 다비드상이 있는데 막상 이 광장의 다비드상은 모조품이고, 아카데미아미술관에 있는 작품이 원본이며, 또다른 모조품은 피렌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미켈란젤로광장에 있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조각상,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 일족이 사비니족의 여인들을 약탈해가는 조각상 등이 생동감 있다. 다만 너무 많은 인파와 조각상 위에 분뇨를 배설하는 비둘기가 감흥에 젖으려는 분위기를 깰 뿐이다. 시뇨리아광장에 인접한 피렌체의 또다른 문화적 중심은 우피치미술관이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라파엘로의 ‘방울새와 성물’, 우첼로의 ‘산로마노 전투’, 필리포 리피의 ‘성모와 두 천사’ 등 메디치 가문이 사들이고 후원해 모은 르네상스 황금기의 예술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문제는 두오모성당 내부나 우피치미술관 등에 입장하려면 운이 좋으면 짧게는 1시간, 그렇지 않으면 4시간도 더 걸리니 미리 인터넷 등으로 예약해야 한다. 비단 이런 곳만 아니라 이탈리아 모든 관광명소가 다 그렇다. # 피렌체에 가기 전 잠시 들른 오르비에토오르비에토(Orvieto)는 움브리아주에 있는 도시로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96㎞ 떨어진 팔리아강과 키아나강의 합류점에 있다. 해발 고도 195m의 바위산 위에 위치하며, 푸니쿨라로 오르내린다. 이런 얕은 산(언덕이라고 봐야 하나)에 위치한 미니 산정도시는 이탈리아 어느 곳에나 산재해 있다.1290년에 착공된 오르비에토 두오모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고딕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1600년경에 이르러 300년에 걸쳐 완공됐다. 간결하면서도 선이 굵고 웅장하다. 하지만 이탈리아다운 화려함도 간직하고 있다. 가장 나중에 고딕 양식의 첨탑이 얹혀졌다. 에밀리오 그레코가 제작한 청동 출입문과 좌우 벽면의 섬세한 조각(최후의 심판), 성당 내부의 벽기둥에 있는 부조(浮彫), 성당 정문의 장미창 등이 유명하다. 산브리치오 예배당 내부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와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i, 1450~1523)가 각각 그린 프레스코화 ‘심판자 그리스도’(천정), ‘최후의 심판’(벽면) 등이 그려져 있다. 이밖에 산안드레아 교회(11∼12세기)와 산도메니코 교회(1233∼1264), 공원으로 쓰이는 옛 요새(1364), 산패트리티우스 샘 등 유적지가 있다. 오르비에토 두오모성당은 인근의 호수마을인 ‘볼세냐’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1263년 보헤미아(체코)의 프라하에서 사목을 하는 독일인 베드로 신부는 볼세냐의 산크리스티나 성당에서 크리스티나에게 봉헌하는 성체성사 미사 중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는 예수의 한 마디로 정말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였는지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순간 ‘성체’(여기서는 성례에 쓰이는 빵·과자·떡)에서 피가 흘러나와 성체포 위로 흐르며 25개의 점을 남긴 것을 목격했다. 이에 베드로 신부는 당시 오르비에토에 머무는 우르노바 4세 교황에게 보고했고, 교황은 피에 적셔진 성체포를 확인하고 오르비에토에 두오모성당을 짓게 했다. 지금도 이 성당에는 피로 물든 성체포가 보관돼 있다. 이 곳 지하도시(sotterranea)는 고대 로마의 토착 세력인 에트루리아인이 만든 것이다. 구덩이에 홈을 파서 만든 계단, 비둘기를 식용으로 기르는 장소, 우물, 지하무덤 등이 남아 있다. 현재는 일부만 와인 저장고로 사용된다.
2017-09-07 11:09:46
그동안 부모님과 국내여행은 숱하게 같이 다녔고 중국·동남아·홍콩도 보내줬으나 아직 미국이나 유럽을 다녀온 적은 없어 팔순 노모를 위해 이달초 O여행사의 이탈리아 6박8일 패키지여행을 신청해 다녀왔다. 패지키여행은 저렴한 비용으로 단기간에 많은 명소를 볼 수 있는 게 장점이나 무리한 일정, 바가지 쇼핑 코스 유도, 옵션 여행의 강제화 등이 문제라는 점을 기사와 풍문으로 익히 들어 당초 큰 기대는 안했다. 준비기간이 촉박하고, 신경쓸 겨를도 없고, 비용도 빠듯해 부득이 패키지여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백번 고쳐 생각해도 이번 여행에서 느낀 씁쓸함과 우울감은 오래도록 잊혀질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객을 인간적인 객체라기보다는 돈을 벌어주는 수단쯤으로만 여기는 것 같아 유감스러웠다. 혹자는 필자더러 ‘브랜드 없는 여행사를 택해서 홀대를 당했다’, ‘100만원 정도 더 비싼 럭셔리 패키지여행을 택하면 대접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패키지여행의 본질이 그런 것인데 수원수구해서 뭣하느냐’고 질책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가 유럽 패키지여행을 구입한 원죄가 있고, 이를 통해 겪은 수모스러움을 알리는 게 너무 사적이거나 창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하는 다른 여행소비자가 적잖을 듯하여 진상을 적어본다.우선 먹는 게 너무 박했다. 세계 3대 미식(美食) 국가하면 프랑스 중국에 이어 이탈리아(혹자는 일본)를 꼽는데 이탈리아 현지 정찬이라고는 구경도 못했다. 가이드는 마지막날 예정된 이탈리아 석식마저도 숙소에서 거리가 멀고 내일 한국으로 출국하므로 가까운 한국 식당에서 해결하자고 했다. “만찬이라 해도 그동안 낮에 먹은 이탈리아 점심 수준(밋밋한 파스타나 미트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니 한국식이 낫다”고 설득했고 여행객들은 가이들의 말에 순치된 듯 동조해줬다. 여행 내내 기대할 게 없었으므로 항의할 의지조차 상실한 모습이었다. 가이드는 조식을 빵과 주스가 든 종이봉다리를 아침 도시락이라고 제공하면서 “원래 이탈리아 사람들은 빵 몇 조각으로 아침을 때운다. 한국 사람처럼 거나하게 먹지 않는다”고 둘러댔다. 또 피자에 곁들여나온 샐러드는 말라 비틀어진 채소에 불과했는데 가이드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피자를 먹을 때 소스를 친 샐러드를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피자 그 자체만의 맛을 즐긴다”고 말했다.현지식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자 일부 여행객은 내 돈으로 먹을 테니 여행비 중 식사비만이라도 돌려주거나 괜찮은 식당을 안내해달라고 했으나 가이드는 인원 통솔이 안되고 규정상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여행 코스가 로마·피렌체·밀라노를 들른다고 하지만 숙소는 한결 같이 도심에서 차로 1시간가량(40㎞이상)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첫날 로마나 셋째날 밀라노의 숙소는 인근에 식당가가 전혀 없는 음산한 지역이어서 귀양살이를 온 것 같은 고립감마저 들었다. 마지막 3일간 묵은 로마 교외의 숙소는 식당가를 안고 있으나 이탈리아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없는 그저 인스턴트푸드 수준의 바(Bar)이거나 호텔에 부속된 너무 비싸거나 품질을 검증할 자신이 없는 레스토랑들이었다. 그렇게 최저가 수준의 졸박한 음식을 제공하면서도 가이드는 총 310유로에 달하는 선택관광 5종 세트를 끈질기게도 강권했다. 그 중 오르비에또 시티투어나 베니스 곤돌라 탑승 같은 것은 굳이 해야 할 매력을 느끼진 못했다.다리가 불편한 노모를 위해 가이드가 폼페이유적과 바티칸교황청박물관 관람을 극구 말렸지만 자신이 편하려고 그랬는지, 비싼 입장료를 절감하려 했는지 저의가 의심스럽다. 가이드는 피렌체에서 이름도 생소한 중저가 브랜드를 소개하며 쇼핑을 권유했으나 우리 일행들이 그런 걸 구입할 정도로 수준이 낮지 않았다. 이후엔 쇼핑에 낭비하는 시간이 줄어 다행이었다. 다만 살 만한 물건이 많은 브랜드 아울렛에선 귀국 직전 고작 70분 남짓한 시간을 배정해 벼락구매를 해야 했다.여행에서 먹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려고 애썼던 필자는 이번 여행에서 먹는 것도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게 됐다. 효도한답시고 어머니를 미식의 나라인 이탈리아로 모셨으나 정작 어머니는 졸박한 식사에 불평도 못하고 꾹 참은 듯하다. 나이들수록 오히려 미식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다고 한다. 노모도 인간일진대 그런 면을 헤아리지 못한 게 서글프다. 노모를 잘못 모신 죄스러움이 갔다온 지 1주일이 넘어감에도 사그러들지 않는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이탈리아 와인 한잔 마시려던 필자의 소망은 여기에 더해 뭐하겠는가.
2017-08-22 14:00:10
포르투갈 여행 7일차, 당초 예정지였던 에보라 대신 리스본 시내 관광에 나섰다. 월요일엔 대부분의 문화유적지가 휴일인 것을 감안해 유적도시인 에보라를 돌아보려면 화요일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다. 여행을 가면 유독 부지런해지는 필자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HF페닉스뮤직(HF FENIX MUSIC)호텔은 유독 마음에 든다. 아마 이번 리스본 여행을 가장 즐겁게 한 게 이 호텔이 아닌가 한다. 리스본과 포르투에 9개 지점을 가진 호텔 체인 브랜드 HF가 가장 최근 리스본에 오픈한 게 필자가 묵은 곳이다. 위치도 폼발역에서 가까워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좋고, 무엇보다도 호텔 자체가 유니크하다. 인테리어도 그렇고, 호텔리어들도 복장이 자유롭다. 나이가 있는 관광객들은 형광색의 조명, 음악 페스티벌에 온 듯 한 프론트와 호텔 전체 인테리어에 적응하기 쉽지 않겠지만 방에서 보이는 폼발 광장과 교차로 전경, 최신식 방 내부 시설에 색다른 기분 좋음을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 3일내내 아침을 즐겁게 했던 것은 조식이었다. 매일 조금씩 바뀌는 조식 메뉴는 정말 가격 대비 최고 효율인 듯 하다. 오렌지·베리류를 갈은 생과일 주스, 셀프로 만들 수 있는 야채주스, 라이트한 샴페인도 있다. 통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식당 밖 정원에서는 저녁에 가끔 음악공연도 하는 듯 하다. 정원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아침을 먹는데 밖을 보니 비가 주룩주룩 온다. 충분하게 아침식사를 즐기고, 리스본 관광을 위해 호텔 밖으로 나섰다. 포르투갈의 서부에 위치한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인 리스본은 포르투갈어로 리스보아(Lisboa)라고 한다. 테주강(타호강) 하류에 있는 포도 재배 지대이자, 대서양에 면한 항구도시로, 인구는 56만4477명(2007년)이다. 도시 이름은 기원전 1200년경 페니키아인이 세운 안전한 항구를 뜻하는 알리스 웁보(Allis Ubbo)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이 있다. 일찍이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이 정착해 로마의 자치시가 됐으며, 서고트족의 지배를 거쳐, 716년부터 무어인의 지배 아래 있었다. 1143년 카스티야왕국에서 독립한 포르투갈의 국왕 아폰수1세(AfonsoⅠ)가 북방 십자군의 지원을 얻어 1147년 10월 24일 리스본을 독립시켰다. 1249년 아폰수3세(Afonso Ⅲ)가 알가르베(Algarve, 파루주에 있던 옛 지명)를 정복하고 포르투갈의 레콘키스타(이슬람 세력으로부터의 국토 회복)가 완료되자 남부의 중요성이 높아져 13세기 중반부터 리스본은 코임브라 대신 포르투갈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리스본은 지중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계지로 발전했고, 1498년 대항해시대부터 16세기말 스페인 점령 때까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 항로 개척 등 식민지 개척을 통해 유럽 굴지의 상업항구로 번영을 누렸다. 1755년 11월 1일 대지진으로 시가지 대부분이 폐허화돼 5만명 이상의 인명을 잃었고, 그 후 폼발(Pombal) 후작이 시가지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하는 도시계획을 통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리스본하면 가장 떠오르는 것이 7개의 언덕으로 이뤄진 도시라는 점이다. 어딜 가든 언덕이 있어서 전망이 좋다. 해안가인 서쪽의 벨렝( Belem, 베들레헴이란 뜻)을 제외하면 중심지인 바이샤와 호시우 지역, 동쪽의 알파마와 그라사 지역, 바이루 알투와 시아두 지역 등이 언덕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언덕을 오르내리는 트램, 푸니쿨라 등 특유의 교통수단이 발달해있다. 오전에 대항해시대 영광의 흔적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벨렝 지역으로 가기 위해 코메르시우광장으로 향했다. 리스본의 모든 길은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에는 언덕을 오르내리는 트램, 테주강 위를 다니는 페리가 가까이 있다. 코메르시우는 옛 무역상들이 강가에 배를 대고 돌계단을 올라 광장에 들어섰으며, 이때 ‘무역’부두라 불리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넓은 사각형의 광장 중앙에는 폼발 후작과 도시를 재정비한 호세 1세의 기마상이 위치해 있고, 동상 뒤로 ‘승리의 아치’로 불리는 백색 대리석의 커다란 아치인 아르코 다 루아 아우구스타(Arco da Rua Augusta)가 서 있다. 코메르시우 광장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광장에서 보면 마리아 1세가 바스쿠 다 가마와 폼발 후작에게 월계관을 씌우는 조각, 아우구스타 거리 쪽에서 보이는 정교한 시계탑이 시선을 압도한다. 광장 주변에 ㄷ자형으로 배열된 노란색 노천카페, 관광안내소 등이 위치해있다. 이른 아침인데도 교통의 중심지라서 관광객과 출근을 하는 포르투갈 사람들로 붐빈다. 비가 와서 트램이 시간보다 20분 늦게 와서 줄도 길고, 벨렝지구로 가는 15번 트램 안은 만원이다. 참고로 리스본의 교통수단은 메트로, 트램, 버스 등 전부 이용할 수 있는 충전식 교통카드 비바 비아젱 카드(VIVA Viagem Card : 보증금 0.5유로+금액 충전), 24시간 동안 메트로와 트램을 무제한 탑승 가능한 24시간 패스(24 Hour Pass : 6유로), 교통카드를 겸하면서 리스본과 신트라 주요 관광지를 무료 또는 할인 입장할 수 있는 리스보아카드(Lisboa Card : 24시간, 18.5유로) 등 다양하다. 트램을 타고 20분 정도를 가서 벨렝 지구에 도착했다. 내리는 관광객들과 함께 포르투갈 대표적인 마뉴엘 건축양식의 제로니무스수도원으로 향했다. 마누엘 1세는 1496년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에서 귀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테주강 강변에 수도원을 지으라고 명했다. 동양에서 수입한 향료에 세금 5%를 부과해 1501년부터 약 100년에 걸쳐 지었다. 1755년 대지진에도 크게 피해를 입지 않고,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완공 후에 벨렝의 산타마리아(성모)에게 헌정됐고, 탐험가들은 승선하기 전에 여기서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큰 규모뿐만 아니라 300m가 넘는 하얀색의 섬세하고 화려한 정면 조각과 건출물은 보는 이들이 절로 감탄하게 만든다. 유난히 입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입구를 찾는 동안 이 곳 역시 월요일에는 휴관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허탈해진다. 긴 회랑을 따라 위치한 12개 문의 ‘고해의 방’,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 마누엘1세의 관 등 수도원 내부와 수도원 바로 옆에 위치한 산타마리아성당(greja Santa Maria de Belem)의 성인 제로니무스의 일생을 표현한 14점의 유화 등을 보지 못해 아쉽다. 2013년 9월 리스본을 첫 방문했을 때에도 저녁이라서 보지 못한 바로 그곳들이다. 인근 테주강과 바다가 만나는 자리에 있는 벨렝탑(Torre de Belem) 내부도 휴무라 외부만 관람했다. 드레스를 입고 강가에 서 있는 여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테주강의 귀부인’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은 원래 요새였는데 밀물 썰물의 차이로 물에 잠기곤 했던 1층은 감옥, 2층은 포대, 3층은 왕의 거실이자 망루로 쓰였다. 1515년부터 7년간 마누엘 양식을 집약해서 지었는데, 198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깔을 닮은 장식, 동글동글한 포탑, 섬세한 성모 마리아상이 관람 포인트라고 하니, 시간이 되면 내부도 관람해보면 좋을 듯하다. 1960년 항해왕 엔리케 사후 500주년을 기념해 세운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imentos)는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해를 떠난 바로 그 자리에 그가 탄 카라벨선을 본 따 세웠다. 이 기념비는 뱃머리에 항해왕 엔리케가 서 있고, 그 뒤에 바스쿠 다 마가(인도 항로 개척),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브라질 발견), 페르난드 마젤란(마젤란 해협 발견), 바르톨로뮤 디아스(희망봉 발견) 등의 탐험가와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 지도 제작자 페드루 누네스 등을 순서로 조각했다. 유일한 여성 승선원이자 동엔리케와 동페드루의 모친인 필리파 렝카스트 여왕도 있다. 마치 지금이라도 항해를 떠날 것 같은 모습이 위용 있고, 활기차 보이며, 대항해시대가 포르투갈의 전성기였음을 되새겨준다. 관광을 마치고 버스정류장 근처의 에그타르트(1개, 1.05유로)로 유명한 파스테이스 지 벨렝(Pasteis de Belem)에 들렸다. 역시 이름값 만큼 문전성시다. 1837년 수녀의 비밀 레시피를 전수받아 시작됐는데 하루 평균 1만5000개의 타르트를 굽는다. 겉은 얇고 페이스트리처럼 바삭한데 안에 들어있는 커스타드크림은 달콤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타르트에 에스프레소나 핫초코와 시나몬가루, 슈가파우더를 더해 함께 먹으면 그만이다. 내부 규모도 대단히 넓어 수백명이 앉을 수 있다. 상당수는 자리를 잡아 앉아서 먹고 가지만, 그저 선물용으로 테이크아웃하려는 줄도 결코 짧지 않다. 6개 들이 타르트를 먹으면서 다시 코메르시우광장으로 돌아왔다. 언덕이 많은 포르투갈에서 흔하게 운영되는 트램 중에서 리스본의 28번 트램은 포르타 두 솔 전망대, 리스보아대성당 등 유명한 관광지를 지나가기 때문에 탔다 내렸며 관광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28번 트램을 타고 바이샤/시아두 역 인근에 있는 카르무수도원으로 갔다. 이곳은 유명 레스토랑과 옷가게 등이 몰려있는 리스본의 중심지다. 카르무수도원(Convento e Museu Arqueologico do Carmo)은 리스본에서 가장 큰 예배당이었으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신랑(神廊, 본당)과 뼈대만 남게 되었다. 지진 후에도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더 손상을 입어 현재는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수도원 입구 맞은편 구 제단은 건축박물관으로 개조돼 페르디난드 1세의 관 등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 비석에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곳을 찾는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에게 천국으로 가기 전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 중 40일을 차감해준다는 내용이 새겨져있다. 수도원 밖 광장에 나무와 그늘이 있고, 주변에 레스토랑과 휴식공간이 있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시 문디얼호텔(Mundial Hotel) 앞 마르팅모니즈(Martim Moniz, 아폰수1세의 명에 따라 레콩키스타에 참여해 공을 세운 귀족 출신의 기사)역에서 상조르제성(Castelo de Sao Jorge), 리스보아대성당으로 가기 위해 트램을 탔다. 상조르제성(입장료 6.5유로)은 언덕 위에서 성벽을 따라 리스본 시내와 바다를 굽어 볼 수 있는 곳으로 풍경이 끝내준다. 성벽을 따라 한바퀴 돌면 알파마의 골목길,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다가오는 페리, 바이샤의 거리와 광장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기원전 7세기 로마인들이 성안에 터전을 잡았고, 11세기에는 포르투갈을 정복한 무어인들이 성을 지었다. 1137년 엔리케왕이 무어인들로부터 리스본을 탈환하며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이후 스페인 통치를 거치며 포르투갈의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이 성의 이름은 1371년 포르투갈 캐서린 공주와 영국 찰스 왕세자가 결혼하면서 양국간 우호협정을 맺을 때, 영국의 수호성인 세인트 조지에게 성을 헌정하면서 붙여졌다. 성벽 사이로 보이는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아주 멋지게 나오니 꼭 들려보길 권한다. 성을 나와서 언덕 아래를 걷다보면 세뇨라 두 몽테 전망대(Miradouro da Senhora do Monte), 그라사 전망대(Miradouro da Graca), 포르타 두 솔 전망대(Miradouro das Portas do Sol)가 차례로 나온다. 상조르제성, 그라사 전망대 노천카페에 앉아서 차나 맥주 한 잔 즐기거나, 리스본 주변 경치를 감상하면서 잠깐 쉬는 것도 좋다. 이곳에서 리스본대성당(Se de Lisboa)까지 트램을 타도 되지만, 그리 멀지 않아 걸어 내려가도 괜찮다. 성당은 두 개의 탑에 종이 걸려 있어 위엄과 견고함이 느껴진다.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무어인 모스크로 포르투갈을 건국한 엔리케왕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가톨릭 성당으로 재건립했다. 1755년 리스본 건축물의 85%가 파괴되는 대지진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았다. 대성당 관람은 무료이고, 회랑과 보물전시관은 유료(각 2.5유로)이다. 성당 내부에는 수호성인 안토니우의 탄생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녀 아나의 성소 등이 안치돼 있다. 성당 우측의 좁은 골목에는 노천 카페가 많아 시간을 보내기에 그만이다. 다시 코메르시우광장으로 오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호시우에서 알파마 가는 길에 있는 성도미니크성당(Igreja de Sao Domingos, 이그레자상도밍고)에 들렀다. 역시 1755년 대지진과 1959년 화재를 견뎌냈지만, 잊지 않게 위해 일부러 무너지고 타버린 모습을 남겨놓고 있다. 항해왕 엔리케의 아버지인 주앙1세의 기마 청동상이 있는 피케이라광장(Praca da Fiqueira)으로 향했다. 광장 근처에는 노천카페가 즐비하고 야시장이 자주 열린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도 천막을 친 마켓이 열렸다. 지역 주민들이 파는 치즈, 빵, 소시지, 맥주 등을 구매할 수 있고 천막 안 테이블에서 간단히 요기하기에 좋다. 다시 바이샤/시아두 지역에 있는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Elevador de Santa Justa)로 향했다. 역시 줄이 길다. 1927년 7월 10일 첫 운행을 시작한 이후로 15층 높이의 수직 엘리베이터가 있는 철골 형태의 전망대는 이곳의 명소가 되었다. 이곳은 에펠탑을 지은 구스타브 에펠의 제자, 리울 메스니에르 드 퐁사르가 건축해서인지 에펠탑과 닮아있다. 리스보아 카드 소지자는 무료이지만 오래 줄서서 기다릴 각오가 서 있어야 한다. 발길을 돌려 호시우광장(동페드로4세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 중앙엔 브라질 최초의 황제가 된 동페드로4세의 동상이 서 있다. 그 뒤에는 고상한 에스타우스 오페라극장이 있다. 동상 앞에는 바로크풍 분수가 시원스레 물을 뿜어낸다. 버스가 많이 정차하다 보니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한다. 조금만 더 위쪽으로 걸어가면 절대 기차역 같지 않은 네오 마누엘 양식과 낭만주의 양식이 어우러진 호시우(Rossio) 기차역이 나온다. 스페인 통치 기간 독립운동에 앞장선 투사들을 기리는 ‘부흥자’라는 뜻의 헤스타우라도레스광장(Praca dos Restauradores)도 보인다. 호시우광장 중앙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가 있다. 광장 옆쪽으로 관광안내소와 맛집들이 즐비하고 바이루 알투를 오가는 아센소르 다 글로리아(Ascensor da Gloria 급경사를 오르는 케이블카의 일종으로 트램과 유사)를 타는 곳도 가깝다. 이미 어둑한데 상 페드로 알칸타라 전망대(Miradouro de Sao Pedro de Alcantara)로 가기 위해 아센소르 다 글로리아를 타러 갔다. 1885년부터 헤스타우라도레스광장에서부터 바이루 알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케이블카는 주행거리가 265m로 짧지만 경사가 심한 곳에 필수적이다. 간혹 케이블카와 경주해보겠다고 옆에서 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천천히 오른 전망대는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에 불빛이 반짝거리는 시내 조명이 어우러져 낭만적이다. 1, 2층으로 구성된 정원은 석상과 꽃, 전망대가 운치 있게 조성돼 있다. 전망대 뒤로는 작은 카페, 레스토랑, 저렴한 숙소가 위치해 있다. 카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e)와 리베르다드 대로(Avenida da Liberdade)와 폼발광장으로 가는 버스가 다닌다. 늦은 시간에 경제성을 감안해 리스본 첫날 맛있게 먹었던 카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e)의 타임아웃마켓(Time out market)을 다시 찾았다. 이곳의 유명한 음식인 크림소스의 스테이크와 타이음식을 와인과 곁들어 먹으니 어느덧 밤 10시가 넘었다. 황영기 여행칼럼니스트 zerotwo76@naver.com
2016-09-02 10:09:59
포르투갈 여행 8일차, 다음날이면 귀국하니 실질적으로 마지막 투어다. 에보라(Evora)라는 이름이 예쁘고 주로 서부 도시들만 돌았기에 남중부 알렌테주(Alentejo) 지방 도시로 가보기로 했다. 에보라는 리스본에서 남동쪽으로 약 110㎞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약 5만70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이 도시는 과거 로마시대부터 리베랄리타스율리아(Liberalitas Julia)라는 중요한 군사기지로 위상을 가졌다. 이로 인해 로마신전(디아나신전) 등 고대 로마시대 유물이 남아있고, 8~12세기 무어인의 지배시에는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의 거점지였다. 에보라는 15세기 포르투갈 왕들이 거주하면서 황금기를 맞이했는데, 16~18세기의 건축물은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 건축에 영향을 줬다. 16세기에는 가톨릭의 대교구가 됐다. 15세기~18세기인 대항해시대에는 내륙지역인 탓으로 인구감소 등 활기를 잃었으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에 리스본이 파괴된 이후로는 포르투갈의 전성시대를 반영한 풍부한 문화유산으로 인해 반사이익을 봤다. 1986년에 에보라 역사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여유롭게 조식을 즐기고 에보라로 가기 위해 자르딩 주로지쿠(Jardim zoologico) 전철역에 있는 셋트 히우스(Sete rios)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리스본에서 에보라에 갈 때 기차나 버스 모두 이용 가능하지만 기차는 하루 3~4번(편도 12.20유로), 버스는 1시간에 1대(편도 11.3유로)씩 운행하기 때문에 버스가 더 편리하다. 아침 9시반에 차를 타고 약 90분을 달리자 에보라에 도착했다. 아마도 리스본 관광객들이 에보라에는 그리 많이 가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가 본 관광객은 일본인 모녀가 전부였고, 내국인도 대부분 종착역 전에 내렸다. 에보라 버스터미널에 내려서 에보라 공동묘지(Cemiterio de Evora)를 지나면 역사지구를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성벽이 나온다. 성벽을 경계로 마치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기분이 든다. 아무도 살 것 같지 않은 고요한 성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지랄두광장 바로 옆에 위치한 시계박물관(Museu do Relogio)인데, 안토니우 타바레스 달메이다(Antonio Tavares dAlmeida)가 1972년부터 구상해 1995년 400여개의 개인 시계 컬렉션으로 개관했다. 현재는 1630년대에 만들어진 시계부터 최신시계까지 약 2300여개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시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들러볼 만하다. 지랄두광장(Praca do Giraldo)은 12세기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 당시 자국 병사의 희생 없이 1165년에 무어인을 몰아내고 에보라를 해방시킨 에보라의 영웅 지랄두 센파부르(Giraldo Sempavor)의 이름을 땄다. 에보라 관광의 중심지로 관광안내소와 노천카페 등이 있는데, 겨울 비수기라서 한적하다. 광장 중앙에는 16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분수가 있다. 에보라 수도교에서 물이 공급되는 지점으로, 분수 상단의 청동 장식은 광장으로 이어지는 8개의 거리를 상징한다. 분수 뒤에는 16세기 아름다운 건축미를 뽐내는 산투안타웅성당(Igreja de Santo Antao)이 서 있다. 광장 주변에는 고딕 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오래된 건축물이 많은데 무어 양식의 아치형 야외 회랑과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이어져 예전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 이름부터 오싹한 기분이 드는 상프란시스쿠성당(Igreja de Sao Francisco)과 뼈예배당(Capela dos Ossos, 입장료 2유로)으로 향했다. 1475년부터 1550년에 걸쳐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두 곳은 바로 붙어 있는데, 먼저 입장한 성당은 나무에 새긴 조각, 성경 구절을 그려 넣은 아줄레주, 플레미시(Flemish) 프레스코화로 꾸며져 있다. 성당 옆 뼈예배당은 길이 18.7m, 너비 11m로 3개의 작은 창문과 8개의 기둥으로 구성돼 있다. 이를 제외한 모든 벽면이 시멘트와 사람뼈와 두개골을 섞어 다닥다닥 붙여놓은 것으로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섬뜩하다.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인생의 덧없음을 되새기고자 뼈예배당을 지었다고 한다. 약 5000구 시신의 유골이며, 역병이나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것이라는데 확실치 않다. 벽면에 건조돼 매달려 있는 시신은 원래 2개라는데 1개만 관찰할 수 있었다. 조금 오싹한 느낌에 사진을 그리 많이 찍지 않고 나왔는데, 출구쪽 천장 흰벽돌에는 죽음과 관련된 그림과 함께 ‘우리 뼈들은 이곳에서 그대의 뼈를 기다리고 있다.(Nos ossos que aqui estamos pelos vossos esperamos)’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현세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결국 죽으면 뼈만 남게 된다는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철학적인 교훈이 아닐까? 이곳을 나와 근처의 에보라대성당(Se Catedral de Evora)으로 향했다. 아뿔싸, 점심시간(12~14시)은 입장 불가란다. 뼈예배당과 대성당은 점심시간에 휴관이니 때를 잘 맞춰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뼈예배당 앞에서 포르투갈 전통 엿과 과자를 사서 인근 공원(Jardim Publico de Evora)으로 향했다. 여느 공원과 다름없이 녹음이 우거진 숲에 호수에는 한가로이 거위 떼가 노닐고 있었다. 공원 입구의 동마뉴엘궁(Palacio de Dom Manuel)은 파괴된 곳이 많아 표지판이 없었다면 왕궁이었는지 몰랐을 것 같다. 예전 모습을 간직한 성벽에는 무어 양식과 마뉴엘 양식이 혼재돼 있다. 아마도 이 공공 공원은 예전에는 왕궁 정원이었나보다. 공원 안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14시 오픈 시간에 맞춰 에보라대성당 입구(입장료 3.5유로)로 향했다. 1186년에 지어졌으며 예수의 12사도들로 섬세하게 석상을 장식한 로마네스크 양식와 고딕 양식이 어우러진 성당 입구는 웅장하다. 리스본대성당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내부도 화려하다. 2개의 통로가 있는 신랑과 18세기 제단, 16세기에 더해진 2개의 높은 탑은 위엄이 있다. 에보라대성당이 유명한 이유는 포르투갈에서 유일하게 아이를 밴 마리아상이 있기 때문이다. 15세기에 만들어진 이 성모상을 보러 임신과 순산을 기원하는 부부들이 오래 전부터 성지 순례하듯이 대성당을 찾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미 지난해 6월 순산한 터라 직접 임신한 성모상을 보니 신성한 마음이 든다. 종탑에 오르기 위해 성당 안에 있는 별도의 입구로 들어갔다. 꼬불꼬불한 계단을 따라 시계탑을 오르니 성당 회랑과 시내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이곳에서 내려와 로마시대 유적지인 디아나신전(Templo Romano de Evora, Templo de Diana)을 보기 위해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에보라가 군대의 요충지로 전성을 누리고 있던 2세기말 로마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달, 사냥, 순결을 상징하는 고대 로마여신 디아나에게 헌정돼 디아나신전으로도 부른다.14개의 코린시안 양식의 기둥이 잘 보존되어 있어 포르투갈에 남아 있는 로마시대 건축물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콜로네이드(돌기둥)만 남아 있는데 몸통은 화강암, 기둥 받침은 대리석이다. 이후 처형장, 도살장으로 쓰였다고 추정된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서 에보라대성당을 포함하여 웬만한 시내 전경이 내려다 보인다. 특히 주변으로 신전과 유사하게 생긴 건물들이 몇 개 있는데, 로마 신전 앞 레스토랑(Restaurante da pousada de Evora)을 포함해 에보라 역사만큼 유명한 식당이 많다고 하니 여유를 갖고 호사를 누려볼 만하다. 포르투갈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에보라대학교(Universidade de Evora)으로 향했다. 이곳은 역사지구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가는 길에 에스피리토산토성당(Igreja do Espirito Santo)을 지나쳤다. 에보라대학교는 플라톤이 제자를 가르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대왕을 가르치는 모습 등을 표현한 아줄레주로 꾸며진 교실이 인상적이다. 1559년 당시 추기경의 명으로 설립된 학교로 같은 해 교황 바오로 4세로부터 대학 칭호를 받았다. 이곳은 스페인 신학자 루이스 몰리나, 브리토(Brito, 기마랑이스의 작은 도시)의 성 주앙 등이 수학하며 포르투갈 최고의 대학으로 인정받으며 한때 코임브라대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예수회가 대학 교육을 맡고 있던 탓에 18세기 폼발 장군의 예수회 박해로 핍박을 받았고, 이후 대학교와 함께 에보라가 동반 쇠퇴하게 됐다. 1759년 예수회 박해로 에보라대 교수들은 사형 또는 추방당했고, 200여년이 지난 1973년 다시 문을 열었다. 성당과 대학교는 방학인 데다 연말 공연 준비로 잠겨 있었다. 열려있는 대학교 후문으로 들어가려다가 제재를 당해 대학교 내부를 직접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정(中庭)이 아름다운데 끝내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를 타러 성벽을 따라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표를 할인받으러 왕복으로 끊었는데, 대학교가 있던 성곽에서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상당히 먼 거리였다. 게다가 방향을 잘못 들어서 에스피리토산토종합병원(Hospital Espirito Santo E.P.E)까지 가는 바람에 버스터미널까지 약 25분을 뛰어야 했다. 겨우 3분 앞두고 버스를 타긴 했지만, 하마터면 1시간이나 기다려서 다음 버스를 타야 하는 고초를 겪을 뻔했다. 에보라에서 리스본으로 들어오는 길에 건너는 바스쿠 다 가마 다리(Ponte Vasco da Gama) 주변 풍경이 멋진 노을에 비쳐져 아름답다. 리스본 동쪽 타구스강을 횡단하는 이 다리는 17.2㎞로 유럽에서 가장 길다. 그 다음으로 긴 유럽의 다리가 덴마크(코펜하겐)와 스웨덴(말뫼)을 잇는 외레순다리(7845m)로 1, 2위 격차가 엄청나다. 1998년 3월 열린 리스본엑스포와 같은 시기에 완성된 이 다리는 지도의 곡률을 고려해 설계했으며 10억달러라는 막대한 자금과 수많은 엔지니어들이 투입됐다. 리스본 시내로 돌아와 포르투갈의 마지막 밤을 즐기기로 했다. 에보라에서 버스를 놓칠까봐 조바심친 탓에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이대로 숙소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레스토랑을 돌아보며 쫀쫀하게 가고 싶은 곳을 낙점했다. 리스본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레스토랑은 평일엔 오후 7시에 오픈하니 일찍 가봐야 기다리기 십상이다. 선택한 식당은 상카를로스국립극장(National Theatre of Sao Carlos)의 오른쪽에 위치한 포르투갈 대표 셰프 주제 아비에즈가 운영하는 칸티뇨 두 아비에즈(Cantinho do Avillez)였다. 아비에즈는 최연소 미슐랭 셰프로 리스본 시아두에 4곳의 식당을 갖고 있다. 인근에 있는 아비에즈의 최고급 레스토랑인 벨칸토(Belcanto)보다 훨씬 저렴하고, 정통 포르투갈 요리가 먹고 싶어 이곳을 선택했는데 탁월한 판단이었다. 현지인들도 미리 예약해서 오는지 오픈한 지 30분이 지나자 만석이다.우리는 별도 예약 없이 자리에 앉았으니 운이 좋은 셈이다. 이곳의 대표 메뉴라는 빵가루를 뿌려 구운 대구요리(17.25유로)와 양고기를 웨이터 추천 와인과 시켰는데 대구요리가 훨씬 맛있었다. 식사량의 개인차는 있겠지만 포르투갈 요리의 양은 가격만큼 많지 않으니, 부족할 듯 싶으면 쿠베르트(Cuvert, 빵, 올리브 등이 나오는 에피타이저) 등과 곁들여 먹는 게 좋다. 저녁을 즐겁게 먹고 숙소로 향하는 버스를 타니 포르투갈의 마지막 밤이 진한 아쉬움 속에 깊어만 간다. 황영기 여행칼럼니스트 zerotwo76@naver.com
2016-08-26 12:13:49
포르투갈 여행 7일차, 당초 예정지였던 에보라 대신 리스본 시내 관광에 나섰다. 월요일엔 대부분의 문화유적지가 휴일인 것을 감안해 유적도시인 에보라를 돌아보려면 화요일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다. 여행을 가면 유독 부지런해지는 필자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HF페닉스뮤직(HF FENIX MUSIC)호텔은 유독 마음에 든다. 아마 이번 리스본 여행을 가장 즐겁게 한 게 이 호텔이 아닌가 한다. 리스본과 포르투에 9개 지점을 가진 호텔 체인 브랜드 HF가 가장 최근 리스본에 오픈한 게 필자가 묵은 곳이다. 위치도 폼발역에서 가까워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좋고, 무엇보다도 호텔 자체가 유니크하다. 인테리어도 그렇고, 호텔리어들도 복장이 자유롭다. 나이가 있는 관광객들은 형광색의 조명, 음악 페스티벌에 온 듯 한 프론트와 호텔 전체 인테리어에 적응하기 쉽지 않겠지만 방에서 보이는 폼발 광장과 교차로 전경, 최신식 방 내부 시설에 색다른 기분 좋음을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 3일내내 아침을 즐겁게 했던 것은 조식이었다. 매일 조금씩 바뀌는 조식 메뉴는 정말 가격 대비 최고 효율인 듯 하다. 오렌지·베리류를 갈은 생과일 주스, 셀프로 만들 수 있는 야채주스, 라이트한 샴페인도 있다. 통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식당 밖 정원에서는 저녁에 가끔 음악공연도 하는 듯 하다. 정원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아침을 먹는데 밖을 보니 비가 주룩주룩 온다. 충분하게 아침식사를 즐기고, 리스본 관광을 위해 호텔 밖으로 나섰다. 포르투갈의 서부에 위치한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인 리스본은 포르투갈어로 리스보아(Lisboa)라고 한다. 테주강(타호강) 하류에 있는 포도 재배 지대이자, 대서양에 면한 항구도시로, 인구는 56만4477명(2007년)이다. 도시 이름은 기원전 1200년경 페니키아인이 세운 안전한 항구를 뜻하는 알리스 웁보(Allis Ubbo)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이 있다.일찍이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이 정착해 로마의 자치시가 됐으며, 서고트족의 지배를 거쳐, 716년부터 무어인의 지배 아래 있었다. 1143년 카스티야왕국에서 독립한 포르투갈의 국왕 아폰수1세(AfonsoⅠ)가 북방 십자군의 지원을 얻어 1147년 10월 24일 리스본을 독립시켰다. 1249년 아폰수3세(Afonso Ⅲ)가 알가르베(Algarve, 파루주에 있던 옛 지명)를 정복하고 포르투갈의 레콘키스타(이슬람 세력으로부터의 국토 회복)가 완료되자 남부의 중요성이 높아져 13세기 중반부터 리스본은 코임브라 대신 포르투갈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리스본은 지중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계지로 발전했고, 1498년 대항해시대부터 16세기말 스페인 점령 때까지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 항로 개척 등 식민지 개척을 통해 유럽 굴지의 상업항구로 번영을 누렸다. 1755년 11월 1일 대지진으로 시가지 대부분이 폐허화돼 5만명 이상의 인명을 잃었고, 그 후 폼발(Pombal) 후작이 시가지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하는 도시계획을 통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리스본하면 가장 떠오르는 것이 7개의 언덕으로 이뤄진 도시라는 점이다. 어딜 가든 언덕이 있어서 전망이 좋다. 해안가인 서쪽의 벨렝( Belem, 베들레헴이란 뜻)을 제외하면 중심지인 바이샤와 호시우 지역, 동쪽의 알파마와 그라사 지역, 바이루 알투와 시아두 지역 등이 언덕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언덕을 오르내리는 트램, 푸니쿨라 등 특유의 교통수단이 발달해있다. 오전에 대항해시대 영광의 흔적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벨렝 지역으로 가기 위해 코메르시우광장으로 향했다. 리스본의 모든 길은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에는 언덕을 오르내리는 트램, 테주강 위를 다니는 페리가 가까이 있다. 코메르시우는 옛 무역상들이 강가에 배를 대고 돌계단을 올라 광장에 들어섰으며, 이때 ‘무역’부두라 불리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넓은 사각형의 광장 중앙에는 폼발 후작과 도시를 재정비한 호세 1세의 기마상이 위치해 있고, 동상 뒤로 ‘승리의 아치’로 불리는 백색 대리석의 커다란 아치인 아르코 다 루아 아우구스타(Arco da Rua Augusta)가 서 있다. 코메르시우 광장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광장에서 보면 마리아 1세가 바스쿠 다 가마와 폼발 후작에게 월계관을 씌우는 조각, 아우구스타 거리 쪽에서 보이는 정교한 시계탑이 시선을 압도한다. 광장 주변에 ㄷ자형으로 배열된 노란색 노천카페, 관광안내소 등이 위치해있다. 이른 아침인데도 교통의 중심지라서 관광객과 출근을 하는 포르투갈 사람들로 붐빈다. 비가 와서 트램이 시간보다 20분 늦게 와서 줄도 길고, 벨렝지구로 가는 15번 트램 안은 만원이다. 참고로 리스본의 교통수단은 메트로, 트램, 버스 등 전부 이용할 수 있는 충전식 교통카드 비바 비아젱 카드(VIVA Viagem Card : 보증금 0.5유로+금액 충전), 24시간 동안 메트로와 트램을 무제한 탑승 가능한 24시간 패스(24 Hour Pass : 6유로), 교통카드를 겸하면서 리스본과 신트라 주요 관광지를 무료 또는 할인 입장할 수 있는 리스보아카드(Lisboa Card : 24시간, 18.5유로) 등 다양하다. 트램을 타고 20분 정도를 가서 벨렝 지구에 도착했다. 내리는 관광객들과 함께 포르투갈 대표적인 마뉴엘 건축양식의 제로니무스수도원으로 향했다. 마누엘 1세는 1496년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에서 귀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테주강 강변에 수도원을 지으라고 명했다. 동양에서 수입한 향료에 세금 5%를 부과해 1501년부터 약 100년에 걸쳐 지었다. 1755년 대지진에도 크게 피해를 입지 않고,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완공 후에 벨렝의 산타마리아(성모)에게 헌정됐고, 탐험가들은 승선하기 전에 여기서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큰 규모뿐만 아니라 300m가 넘는 하얀색의 섬세하고 화려한 정면 조각과 건출물은 보는 이들이 절로 감탄하게 만든다.유난히 입구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입구를 찾는 동안 이 곳 역시 월요일에는 휴관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허탈해진다. 긴 회랑을 따라 위치한 12개 문의 ‘고해의 방’,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 마누엘1세의 관 등 수도원 내부와 수도원 바로 옆에 위치한 산타마리아성당(greja Santa Maria de Belem)의 성인 제로니무스의 일생을 표현한 14점의 유화 등을 보지 못해 아쉽다. 2013년 9월 리스본을 첫 방문했을 때에도 저녁이라서 보지 못한 바로 그곳들이다. 인근 테주강과 바다가 만나는 자리에 있는 벨렝탑(Torre de Belem) 내부도 휴무라 외부만 관람했다. 드레스를 입고 강가에 서 있는 여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테주강의 귀부인’이라고도 불린다. 이 곳은 원래 요새였는데 밀물 썰물의 차이로 물에 잠기곤 했던 1층은 감옥, 2층은 포대, 3층은 왕의 거실이자 망루로 쓰였다. 1515년부터 7년간 마누엘 양식을 집약해서 지었는데, 198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깔을 닮은 장식, 동글동글한 포탑, 섬세한 성모 마리아상이 관람 포인트라고 하니, 시간이 되면 내부도 관람해보면 좋을 듯하다. 1960년 항해왕 엔리케 사후 500주년을 기념해 세운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imentos)는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항해를 떠난 바로 그 자리에 그가 탄 카라벨선을 본 따 세웠다. 이 기념비는 뱃머리에 항해왕 엔리케가 서 있고, 그 뒤에 바스쿠 다 마가(인도 항로 개척),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브라질 발견), 페르난드 마젤란(마젤란 해협 발견), 바르톨로뮤 디아스(희망봉 발견) 등의 탐험가와 시인 루이스 카몽이스, 지도 제작자 페드루 누네스 등을 순서로 조각했다. 유일한 여성 승선원이자 동엔리케와 동페드루의 모친인 필리파 렝카스트 여왕도 있다. 마치 지금이라도 항해를 떠날 것 같은 모습이 위용 있고, 활기차 보이며, 대항해시대가 포르투갈의 전성기였음을 되새겨준다.관광을 마치고 버스정류장 근처의 에그타르트(1개, 1.05유로)로 유명한 파스테이스 지 벨렝(Pasteis de Belem)에 들렸다. 역시 이름값 만큼 문전성시다. 1837년 수녀의 비밀 레시피를 전수받아 시작됐는데 하루 평균 1만5000개의 타르트를 굽는다. 겉은 얇고 페이스트리처럼 바삭한데 안에 들어있는 커스타드크림은 달콤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타르트에 에스프레소나 핫초코와 시나몬가루, 슈가파우더를 더해 함께 먹으면 그만이다. 내부 규모도 대단히 넓어 수백명이 앉을 수 있다. 상당수는 자리를 잡아 앉아서 먹고 가지만, 그저 선물용으로 테이크아웃하려는 줄도 결코 짧지 않다. 6개 들이 타르트를 먹으면서 다시 코메르시우광장으로 돌아왔다. 언덕이 많은 포르투갈에서 흔하게 운영되는 트램 중에서 리스본의 28번 트램은 포르타 두 솔 전망대, 리스보아대성당 등 유명한 관광지를 지나가기 때문에 탔다 내렸며 관광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28번 트램을 타고 바이샤/시아두 역 인근에 있는 카르무수도원으로 갔다. 이곳은 유명 레스토랑과 옷가게 등이 몰려있는 리스본의 중심지다. 카르무수도원(Convento e Museu Arqueologico do Carmo)은 리스본에서 가장 큰 예배당이었으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신랑(神廊, 본당)과 뼈대만 남게 되었다. 지진 후에도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더 손상을 입어 현재는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수도원 입구 맞은편 구 제단은 건축박물관으로 개조돼 페르디난드 1세의 관 등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 비석에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곳을 찾는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에게 천국으로 가기 전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 중 40일을 차감해준다는 내용이 새겨져있다. 수도원 밖 광장에 나무와 그늘이 있고, 주변에 레스토랑과 휴식공간이 있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시 문디얼호텔(Mundial Hotel) 앞 마르팅모니즈(Martim Moniz, 아폰수1세의 명에 따라 레콩키스타에 참여해 공을 세운 귀족 출신의 기사)역에서 상조르제성(Castelo de Sao Jorge), 리스보아대성당으로 가기 위해 트램을 탔다. 상조르제성(입장료 6.5유로)은 언덕 위에서 성벽을 따라 리스본 시내와 바다를 굽어 볼 수 있는 곳으로 풍경이 끝내준다. 성벽을 따라 한바퀴 돌면 알파마의 골목길,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다가오는 페리, 바이샤의 거리와 광장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기원전 7세기 로마인들이 성안에 터전을 잡았고, 11세기에는 포르투갈을 정복한 무어인들이 성을 지었다. 1137년 엔리케왕이 무어인들로부터 리스본을 탈환하며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이후 스페인 통치를 거치며 포르투갈의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이 성의 이름은 1371년 포르투갈 캐서린 공주와 영국 찰스 왕세자가 결혼하면서 양국간 우호협정을 맺을 때, 영국의 수호성인 세인트 조지에게 성을 헌정하면서 붙여졌다. 성벽 사이로 보이는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아주 멋지게 나오니 꼭 들려보길 권한다. 성을 나와서 언덕 아래를 걷다보면 세뇨라 두 몽테 전망대(Miradouro da Senhora do Monte), 그라사 전망대(Miradouro da Graca), 포르타 두 솔 전망대(Miradouro das Portas do Sol)가 차례로 나온다. 상조르제성, 그라사 전망대 노천카페에 앉아서 차나 맥주 한 잔 즐기거나, 리스본 주변 경치를 감상하면서 잠깐 쉬는 것도 좋다. 이곳에서 리스본대성당(Se de Lisboa)까지 트램을 타도 되지만, 그리 멀지 않아 걸어 내려가도 괜찮다. 성당은 두 개의 탑에 종이 걸려 있어 위엄과 견고함이 느껴진다.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무어인 모스크로 포르투갈을 건국한 엔리케왕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가톨릭 성당으로 재건립했다. 1755년 리스본 건축물의 85%가 파괴되는 대지진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았다. 대성당 관람은 무료이고, 회랑과 보물전시관은 유료(각 2.5유로)이다. 성당 내부에는 수호성인 안토니우의 탄생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녀 아나의 성소 등이 안치돼 있다. 성당 우측의 좁은 골목에는 노천 카페가 많아 시간을 보내기에 그만이다. 다시 코메르시우광장으로 오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호시우에서 알파마 가는 길에 있는 성도미니크성당(Igreja de Sao Domingos, 이그레자상도밍고)에 들렀다. 역시 1755년 대지진과 1959년 화재를 견뎌냈지만, 잊지 않게 위해 일부러 무너지고 타버린 모습을 남겨놓고 있다. 항해왕 엔리케의 아버지인 주앙1세의 기마 청동상이 있는 피케이라광장(Praca da Fiqueira)으로 향했다. 광장 근처에는 노천카페가 즐비하고 야시장이 자주 열린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에도 천막을 친 마켓이 열렸다. 지역 주민들이 파는 치즈, 빵, 소시지, 맥주 등을 구매할 수 있고 천막 안 테이블에서 간단히 요기하기에 좋다. 다시 바이샤/시아두 지역에 있는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Elevador de Santa Justa)로 향했다. 역시 줄이 길다. 1927년 7월 10일 첫 운행을 시작한 이후로 15층 높이의 수직 엘리베이터가 있는 철골 형태의 전망대는 이곳의 명소가 되었다. 이곳은 에펠탑을 지은 구스타브 에펠의 제자, 리울 메스니에르 드 퐁사르가 건축해서인지 에펠탑과 닮아있다. 리스보아 카드 소지자는 무료이지만 오래 줄서서 기다릴 각오가 서 있어야 한다. 발길을 돌려 호시우광장(동페드로4세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 중앙엔 브라질 최초의 황제가 된 동페드로4세의 동상이 서 있다. 그 뒤에는 고상한 에스타우스 오페라극장이 있다. 동상 앞에는 바로크풍 분수가 시원스레 물을 뿜어낸다. 버스가 많이 정차하다 보니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한다. 조금만 더 위쪽으로 걸어가면 절대 기차역 같지 않은 네오 마누엘 양식과 낭만주의 양식이 어우러진 호시우(Rossio) 기차역이 나온다. 스페인 통치 기간 독립운동에 앞장선 투사들을 기리는 ‘부흥자’라는 뜻의 헤스타우라도레스광장(Praca dos Restauradores)도 보인다. 호시우광장 중앙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가 있다. 광장 옆쪽으로 관광안내소와 맛집들이 즐비하고 바이루 알투를 오가는 아센소르 다 글로리아(Ascensor da Gloria 급경사를 오르는 케이블카의 일종으로 트램과 유사)를 타는 곳도 가깝다.이미 어둑한데 상 페드로 알칸타라 전망대(Miradouro de Sao Pedro de Alcantara)로 가기 위해 아센소르 다 글로리아를 타러 갔다. 1885년부터 헤스타우라도레스광장에서부터 바이루 알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케이블카는 주행거리가 265m로 짧지만 경사가 심한 곳에 필수적이다. 간혹 케이블카와 경주해보겠다고 옆에서 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천천히 오른 전망대는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에 불빛이 반짝거리는 시내 조명이 어우러져 낭만적이다. 1, 2층으로 구성된 정원은 석상과 꽃, 전망대가 운치 있게 조성돼 있다. 전망대 뒤로는 작은 카페, 레스토랑, 저렴한 숙소가 위치해 있다. 카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e)와 리베르다드 대로(Avenida da Liberdade)와 폼발광장으로 가는 버스가 다닌다. 늦은 시간에 경제성을 감안해 리스본 첫날 맛있게 먹었던 카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e)의 타임아웃마켓(Time out market)을 다시 찾았다. 이곳의 유명한 음식인 크림소스의 스테이크와 타이음식을 와인과 곁들어 먹으니 어느덧 밤 10시가 넘었다. 황영기 여행칼럼니스트 zerotwo76@naver.com
2016-08-23 13:31:06
포르투갈 여행 6일차, 신트라(Sintra)의 아침이 밝았다. 높은 산중의 신트라는 마치 내가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포르투갈 방문은 2013년 9월에 이어 두번째이지만 신트라와 리스본은 다시 한번 들르기로 했다. 그만큼 전에 방문했을 때 신트라에 대한 느낌이 아주 좋았다. 전날 알쿠바사에서 신트라로 왔지만 통상적으로는 수도 리스본의 호시우(Rossio)역에서 국철(CP : Caminhos de Ferro Portugueses)로 매시 1분에 출발하는 직행은 40분 걸리는 신트라에 도착해 인근의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 카스카이스(Cascais)를 걸치는 당일여행을 한다. 리스보아카드나 신트라 1일권을 사면 왕복기차비(4.3유로)가 무료이고, 신트라 1일권(15.5유로)은 신트라 내 버스와 신트라에서 카보 다 호카와 카스카이스 가는 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고심 끝에 이번 여행은 온전하게 하루를 신트라에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포르투갈 초심자라면 카보 다 호카와 카스카이스를 들러보길 추천한다. 볼거리와 감흥이 남다른 곳이다. 신트라는 리스보아현의 특별자치단체로 수도 리스본에서 북서쪽으로 24km 지점에 위치한 소도시(316㎢, 약 37.8만명, 2011년 기준)다. 신트라-카스카이스 자연공원 안에 위치해 있다. 3000여종이 넘는 나무가 꽉 들어차 한여름 기온이 리스본보다 3~4도 낮아 포르투갈 왕족과 귀족들의 여름 별궁과 별장으로 쓰여졌다. 1800년대에 무어성부터 신트라왕궁, 몬세라트정원 등 다양한 양식의 건물과 정원이 건축돼 유럽 로맨티시즘의 초점을 형성했다. 도시 자체뿐만 아니라 나또한 마법에 걸린 듯 신비한 느낌을 준다. 영국시인 바이런은 프랜시스 호지슨에게 쓴 편지(1809년 7월 16일)에서 “신트라의 마을은… 아마도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일 터이네. 나는 이곳에 와서 매우 기쁘다네”라고 전하며 ‘찬란한 에덴’으로 예찬했다고 한다. 이심전심이던가! 유네스코는 1995년 그 다양성과 이색적인 모습을 인정해 ‘신트라 문화경관’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동네 한 바퀴를 돌고, 8시쯤 문을 연 피리퀴타(Piriquita) 2호점으로 향했다. 전에도 왔었는데 그 사이에 2호점이 생겼나보다. ‘베개’라는 뜻의 길쭉한 모양의 바삭한 페이스트리 트라베세이루(Travesseiro, 1.3유로), 치즈 타르트처럼 달걀크림이 들어간 퀘이자다(Queijada, 0.9유로)와 에스프레소 커피(우유 추가 1.4유로)를 시켰다. 속이 느끼한걸 보니 아무리 맛있어도 설탕까지 뿌려진 디저트를 아침에 먹는 건 좀 무리였나보다. 간단히 요기하고 헤갈레이라의 별장(Quinta da Regaleira)으로 향했다. 첫번째 여행에선 방문하지 않았는데, 워낙 다녀온 사람들이 추천하는 터라 내심 기대가 컸다. 이곳은 19세기 브라질과의 무역으로 큰 돈을 번 카르발료 몬테이루(Carvalho Monteiro)가 지은 카르발료 가문의 여름별장이다. 카르발료는 브라질에서 태어나 코임브라대 법대를 졸업하고, 브라질과 교역해서 백만장자가 됐다. 과학, 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은 그는 별장을 짓기 위해 돈과 정성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당대 최고의 포르투갈 건축가와 조각가 6명을 섭외하고, 이탈리아의 무대 디자이너·화가·건축가인 루이지 마니니(Luigi Manini)에게 정원을 의뢰했다. 의뢰를 받는 예술가들은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네오마뉴엘 양식의 별장과 동굴탐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한 정원 등을 창조적이고 신비롭게 탄생시켰다. 숲이 우거진 오르막길을 따라 도착하니 개장(오전 10시) 30분 전에 갔는데도 주말이라서 매표소 입구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상당히 비싼 입장료(현금만 가능, 1인당 6유로, 리스보아카드 할인)에도 불구하고 표를 끊고 입장하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입구에서 지도를 챙겨서 안내하는 대로 오른쪽 건물로 들어갔다. 울창한 숲과 다채로운 나무, 꼬불꼬불한 길, 특이한 조각 등이 한눈에 펼쳐져서 아침안개와 함께 신비롭다. 예전에 소유주가 썼던 방, 거실, 서재 등과 다양한 전시물을 관람하고 밖으로 나오니 꼬불꼬불한 계단의 3층 테라스, 화려한 문양의 성벽, 특이한 모양의 조각 등 가는 길마다 이어져 테마파크에 놀러온 듯 신기하고 지루하지 않다. 가장 압권은 역시 동굴, 이곳에서 숨바꼭질을 했다는데, 정말 술래가 되면 하루 종일 못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동굴입구는 여러 곳이고 다양한 형태다. 어떤 곳은 벽처럼 생긴 돌문을 밀면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고, 어떤 곳은 동굴의 수직타워와 통하고 높이가 아찔하다. 또 어떤 동굴 입구는 연못 위에 돌다리가 놓였고 폭포가 조성돼 있는 등 마치 밀림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상상력과 구성이 기발하다. 신트라왕궁으로 이동하기 위해 서둘러 둘러봤는데도 적잖은 시간을 소요했다. 당초 생각보다 규모도 크고 볼 것도 많은 탓이리라. 신트라왕궁(Placio de Nacional de Sintra)은 멀리서도 보이는 큰 하얀색의 돔이 인상적인 포르투갈 유일의 중세 왕궁으로, 신트라 관광중심지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입장료(1인당 8.5유로, 리스보아카드 할인)를 내고 들어갔다. 첫 여행에선 시간도 없고 입장료도 비싸 궁 안에 들어가지 않고, 외부에서 사진만 찍고 지나갔었다. 원래 이 궁은 무어인들이 지은 성인데 무어인들이 물러난 후 포르투갈 왕가에서 12세기부터 궁으로 삼았다. 중세에는 사냥을 위한 여름별장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화려하기보다 오히려 밋밋하지만 아랍풍과 마뉴엘 양식이 섞여있는 내부는 볼 만하다. 왕들의 좌상을 조각한 방을 지나니 백조의 방(Sala dos Cines)이다. 왕실 무도회가 열렸던 홀로 아멜리아 여왕이 27살에 시집간 딸이 그리워 천장에 표정이 다른 27마리 백조를 그리도록 했다고 한다. 까치의 방(Sala das Pegas)은 천장에 176개의 까치가 그려져 있다. 이는 주앙1세가 하녀와 키스를 하다 필리파 여왕에게 걸리자 ‘짐은 선을 행한 것’이라는 결백을 주장하며 왕궁의 하녀 수만큼 까치를 천장에 그리게 했다. 까치 부리에는 ‘존경하는’ 이라는 글귀를, 발에는 필리파 여왕을 상징하는 장미를 그려 넣어 왕비의 화를 달랬다고 한다. 무어인 특유의 건축양식인 하얀색 주방 굴뚝의 엄청난 지름과 높이는 당시 식재료 양이 어떠했는지 가늠케 한다. 주방만 둘러봐도 무어양식과 포르투갈의 마뉴엘양식이 혼재했던 찬란한 시기를 단편적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에 들어간 문장의 방(Sala dos Brasoes)은 돔에 74개의 금빛 귀족 문양이 새겨져 있다. 벽은 말을 타고 외출하거나 사냥하는 왕족을 그린 푸른 아줄레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화려한 만큼이나 포르투갈 황금기와 당시 왕의 권력을 느낄 수 있다. 호텔 앞에 주차한 렌트카를 몰아 페나성(Palacio Nacional da Pena)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꼬불꼬불 올라가는 언덕길에 차가 많다. 페나성 입구 매표소는 여러 곳인데 페나성 정원 옆에 주차하고 정원을 들러본 후 성에 들어갔다. 만약 페나성만 볼 예정이거나, 신트라 기차역에서 버스(434번)를 탔다면 페나성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정원 매표소에도 인파가 몰려 있다. 당초 카보 다 호카를 갈 예정이어서 촉박한 일정상 페나 정원은 건너뛰고 싶었으나, 입구 경비원이 정원도 볼만하다고 추천하고, 몬세라트 정원을 가진 못한 아쉬움을 대체하기 위해 통합입장권(페나성&페나정원&무어성, 1인당 17.11유로)을 사서 정원 입구로 들어갔다. 과거 사냥터였던 정원의 입구는 2개의 연못과 녹음이 어우러져서 마음의 여유를 준다. 천천히 오르막을 걸으면서 아기자기한 조경을 관람하면 어느새 언덕 끝 페나성에 이른다. 페나성은 원래 1511년 마누엘 1세(ManuelⅠ)의 지시로 신트라 언덕 위에 지어졌던 수도원이었다. 1885년에 폐허가 된 수도원을 개축해 19세기 낭만주의 건축물로 다시 태어났다. 독일 노이슈반슈타인 성(Neuschwanstein Castle)을 만든 루트비히 2세(Ludwig Ⅱ)와 사촌이었던 페르난두 2세(Ferdinand II)가 그의 아내 마리아 2세를 위해 지은 성이다. 이후로도 왕실가족의 여름궁전으로 사용되었다. 빨간색, 노란색 등 원색의 벽, 둥근 첨탑 등은 동화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외관이다. 1910년 공화국을 선포한 아밀리아 여왕의 방, 터키인의 살롱, 아랍방 등 내부도 화려해서 포르투갈 전성기를 대변하고 있다. 이렇듯 페나성은 이슬람, 르네상스, 고딕 양식 등이 묘하게 조화돼 또 하나의 포르투갈 문화를 웅변한다. 페르난두 2세는 사촌보다 더 멋진 성을 만들기 위해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만든 건축가 루트비히 폰 에슈테게를 초빙했다. 나만의 느낌인지 몰라도 같은 건축가가 만들었지만, 두 건축물의 분위기는 완연히 다르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차갑고 세련된 느낌이, 페나성은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페나성 뒤편의 등산로와 전망대 관람은 시간상 포기했다. 대신 신트라왕궁 내부를 관람을 했다. 주말이라 입구부터 단체관광객으로 가득차서, 긴 줄을 서서 인내심을 지녀야 했다. 성수기나 주말에 방문할 예정이면 이런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짜증 속에 내부를 둘러보고 건물 옥상의 카페테리아에서 샌드위치와 청량음료(10.9유로)를 사서 테이블에 앉았다. 탁 트인 성 밖 풍경 사이로, 울창한 숲이 가슴을 편안하게 내려놓게 한다. 때우는 점심이지만 여유만은 호사스럽다. 이어 차를 입구 가까운 곳에 주차하고 무어성(Castelo dos Mouros)에 들어갔다. 이곳은 페나성과 아주 가까이 위치해 있지만 왠지 더 공기가 싸늘하다. 8~9세기경 무어인들이 리스본 외곽을 지키기 위한 사령탑으로 지었으며, 봉화대에 불을 피우면 아래 카스카이스에서 보인다고 한다. 입구에는 무어인들의 옛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묘지, 집터 등을 그대로 뒀고, 이런 생활상을 전시한 전시실도 있다.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산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성벽을 짓고, 이것을 쌓아올린 돌도 크고 둔탁해보여 마치 요새 같다. 성벽을 따라 입구 오른쪽으로 오르면 더 높은 곳에 있는 페나성이 작게 보이고, 입구 왼쪽 높은 곳에 오르면 신트라왕궁과 시내가 보인다. 크게 볼 유적은 없으나 신트라의 주요 건물과 경치를 관람하는 데는 이만한 포인트도 없다. 무어성을 관람하고 나니 벌써 오후 4시가 넘었다. 겨울이고, 주말이어서 도로에 차가 많을 것으로 예상돼 서둘러 리스본으로 향했다. 리스본의 렌트카 반납 장소를 찾아가는 길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돼 신트라에서 약 28km(40분 소요) 정도 떨어져 있는 유럽 대륙 최서단인 카보 다 호카(Cabo da Roca)와 항구이자 아름다운 여름휴양지인 카스카이스(cascais)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 국내 고속도로처럼 카스카이스에서부터 리스본으로 향하는 차량 행렬이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리스본에서 묵을 호텔은 HF페닉스뮤직(HF FENIX MUSIC)이다. 리스본 관광중심지인 호시우역(Rossio)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고급 호텔들이 몰려있는 리스본의 신 다운타운이다. 렌트카 반납 장소 인근의 호텔을 물색하던 중에 부킹닷컴 평이 좋은 이 곳을 찜해 할인도 많고 만족할 만한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하는 이 곳을 예약했다. 지하철과 버스정류장도 걸어서 5분 이내에 위치해 있어서 리스본 시내로 이동하는 데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단 이 호텔은 주차공간이 10대 미만으로 협소해 주변의 HF계열 호텔에 파킹해야 하는 게 단점이다. 시내중심부라 차가 많아서 막히긴 했지만, 큰 대로변에 위치하고, 빤짝거리는 간판 때문에 찾기 쉬웠다. 화려한 외관과 현대식 젊은 취향의 내부시설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중심가에서 먹고 놀다가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면 단언컨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는 가격 대비 최고 숙소인 듯하다. 일단 체크인하고 차를 반납하러 나왔는데 주유탱크를 ‘만땅’으로 채우려 주유소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차량을 반납받는 직원은 주유 탱크를 풀로 채우지 않아도 그 차이만큼 유류비용을 지불하면 된다고 일러줘 주유소 찾느라 헤맨 시간이 아까웠다. 체크인과 렌트카 차량 반납을 마치고 홀가분해져 리스본의 첫날밤을 바다와 가까운 테주강 하구에서 지내기로 했다. 19세기부터 리스본 최대 규모의 생선·과채시장으로 알려진 히베이라시장(Mercado da Ribeira)에 위치한 타임아웃(Time out market)은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서민적인 곳이 아니라 세련된 스타일의 푸드코트였다. 이곳에는 입맛대로 골라 시켜먹을 수 있다. 리스본에서 가성비가 높거나 맛이 괜찮은 최고 수준의 식당·카페·식료품점 등 약 35개 점포가 운영 중이다. 히베이라시장은 카스카이스와 에스투릴 등 대서양 연안의 서쪽으로 갈 때 이용하는 카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e)기차역에서 가깝다. 역시 주말이라 오후 9시가 다 되었는데도 그 넓은 곳에 사람이 꽉 차 있다. 각 식당이나 카페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원하는 음식을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시장기가 발동해 피쉬앤칩(Fish&chips, 12유로), 와인1병(11유로), 굴 여섯 피스(11.7유로), 닭튀김&감자칩&치킨누들(18.6유로) 등을 시켜놓고 배를 채웠다. 와인 기운에 다 먹자마자 갑자기 피곤이 밀려든다.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휘청거리지만 욕심껏 많이 들러본 하루가 아깝지는 않다. 황영기 여행칼럼니스트 zerotwo76@naver.com
2016-07-08 19:24:10
포르투갈 여행 4일차, 포르투갈의 첫 정(情)인 포르투를 떠나서 유서 깊은 코임브라대가 있는 코임브라로 향했다. 오전 9시 10분 포르투 상벤투에서 기차(16.7유로/1인 편도 기준)를 타고 약 1시간 35분 걸려 코임브라B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국철로 갈아타고 숙소로 잡은 시내 코임브라A역에 내렸다. 코임브라A역은 간이역 수준으로 철길과 나란히 몬데구강(Rio Mondego)이 눈앞에 펼쳐졌다. 포르투갈을 여행지로 선택하는 데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는 ‘공부는 코임브라에서, 돈은 리스본에서 벌고, 말년은 포르투에서 즐기자’를 떠올리며 대학도시의 냄새를 맡아갔다. 코임브라(Coimbra)는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과 제2도시 포르투 사이에 있는 포르투갈 중부 코임브라주(州)의 주도(州都)로서 몬데구강 구릉에 위치한 농업지역의 중심지이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아에미니움(Aeminium)’이라고 하였으며, 고대 로마 멸망 이후에는 무어인의 본거지가 되어 878년 레온 왕국의 알폰소 3세가 탈환한 후 북쪽 갈리시아인들을 이곳에 이주시켰고, 이후 13㎞ 남서쪽에 있는 코님브리가(Conimbriga)의 주교구를 이곳에 옮기면서 코임브라가 됐다. 9세기 말부터 이슬람교도에게 다시 정복되었고, 1064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가 이곳을 점령한 뒤 약 1세기 동안 카스티야-레온 왕국 연합과 이슬람 세력 간의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포르투갈이 독립한 1139년부터 리스본으로 수도를 옮긴 1260년까지 코임브라는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였다. 코임브라는 쌀·곡류·올리브·과일 등 농업과 어업을 주요 산업으로 한다. 지리적 이점과 철도 및 고속도로 네트워크의 중심지로 농산물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도자기·직물·종이·가죽·포도주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며, 19세기에 출판사가 설립됐다. 코임브라 숙소는 역 앞에서 2분 거리인 비토리아호텔(Hotel Vitoria)이다. 하루 숙박에 42유로(조식 포함)이니 저렴하다. 포르투갈은 유스호스텔부터 호텔까지 숙소가 다양하고 정결해 여행객의 선택 폭이 넓다. 다만 실내나 화장실에 슬리퍼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체크인을 마치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돼지 등뼈(Ossos)찜으로 유명한 제마넬도스오소스 레스토랑(Restaurante Ze Manel Dos Ossos)은 근처 작은 골목에 박혀 있었다. 간판이 작다보니 지척에 있는데도 몇사람한테 물어 겨우 찾았다. 오후 12시30분부터 영업하니 이따가 오란다. 인근에 산타클라라 다리(Ponte de Santa Clara)와 포르타젱 광장(Largo da Portagem)이 있다. 광장 입구, 코임브라라고 쓰인 문구 위에 19세기 포르투갈 코임브라 출신의 정치인이자 세 번이나 수상을 역임했던 후아큄 안토니오 드 아궤르(Joaquim Antonio de Aguiar(1792~1884) 동상이 있다. 광장 저편에 포르타젱광장 관광안내소(Turismo Largo da Portagem)가 보이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몬테구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문민정부(Governo civil)’이라고 적힌 간판이 붙은 레스토랑 겸 호스텔이 위치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는 곳에 위치해 전망이 좋다. 과거 관공서였는데 지금은 연회장으로 쓰인다고 웨이터는 설명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별의 철갑(Couraca da Estrela)’으로 불리는 방어벽이 있다. 벽에 적힌 ‘Belcouce gate and tower’라는 표식처럼 예전엔 이 곳이 주요 전략적 방어지역으로 방벽과 문, 오각형 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다 점차 시내로 흡수되면서 이 문은 1778년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시간에 맞춰 돼지등뼈 식당으로 돌아갔다. 10평 남짓한 조그만 공간에 예닐곱 개 되는 테이블이 놓여 있다. 벽면에 방문객의 낙서지 메모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돼지머리 박제도 벽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오픈 키친 형태다. 영어로 된 메뉴판이 따로 없고, 단 한 개의 메뉴판을 돌려가며 본다. 지배인에게 물어 어렵게 돼지등뼈(Ossos) 버섯찜, 꼬막찜, 하우스와인을 시켰다. 한국인의 입맛에도 딱 맞고 가격(18.7유로) 대비 맛이 좋았다. 대학도시라서 그런지, 농업·어업·교통의 중심이라 그런지 몰라도 포르투갈 내에서도 물가가 싸게 느껴졌다. 배불리 먹고 나와서 포르타젱 광장부터 이어진 상점과 카페 등이 즐비한 페레이라 보르게스 거리(Rua Ferreira Borges)를 따라 5월 8일 광장(Praca 8 de Maio)에 위치한 산타 크루즈 수도원(Mosteiro de Santa Cruz, Igreja de Santa Cruz)에 이르렀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포르투갈 건국왕인 아폰수 엔리케왕 등 초대 2명의 왕이 묻혀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두 개의 탑, 화려한 아치형 입구에 새겨진 조각으로 인상적인 이곳은 포르투갈을 건국한 아폰수 엔리케 왕이 세우고, 16세기 마누엘 1세가 개축을 했다. 12세기 유럽에 성행했던 로마네스크 양식과 마누엘 1세(재위 1495~1521) 통치기에 유행한 마누엘 양식이 혼합돼 있다. 특히 내부 천장과 아줄레주 장식의 벽은 마누엘 양식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침묵의 회랑, 성물실이 수도원 옆으로 이어져있다. 수도원 건물에 붙어있는 산타 크루즈 카페(Santa Cruz Cafe)는 수도원 건물 일부를 카페로 개조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코임브라대학교로 올라가는 길에 작지만 눈에 띄는 작은 망가정원(Jardim da Manga)이 있다. 마누엘 1세 아들인 포르투갈 15대 국왕 주앙 3세의 봉긋한 소매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정원을 보면서 식사할 수 있는 레스토랑도 옆에 있다. 주앙 3세는 1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재위 중 아시아, 아프리카로 영토를 확장했고, 리스보아에 있는 대학을 코임브라로 옮겨왔다. 언덕을 굽이굽이 올라서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코임브라대학교(Universidade de Coimbra)에 도착했다. 설마 이렇게 높은 곳에 위치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올라가는 길이 가파랐다. 오르막길 중간중간에 오래된 대학건물, 검은색 망토를 거칠고 내려오는 코임브라대 교복패션은 1930년대 영화 장면을 방불케 한다. 원래 코임브라대는 1290년 리스본에 세워진 포르투갈 최초의 대학이자, 가장 큰 고등교육 기관이기도한 국립대학(public university)이었다. 1537년 주앙 3세가 코임브라궁전을 대학으로 개조할 것을 명해 국립대학이 코임브라로 이전했다. 16세기까지 포르투갈 유일의 고등교육기관으로 포르투갈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임브라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와 함께 전통이 오래된 40개 대학이 참여한 유럽 기술연구대학의 선도적 모임인 코임브라 그룹(Coimbra group)의 설립회원이며, 현재 학생 수만 2만명이 넘는다. 코임브라 인구가 약 13만명(2007년 기준)이라고 하니 대학도시로 불릴 만하다. 이런 오랜 역사만큼 포르투갈 국민시인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Luis Vaz de Camoes), 포르투갈인으로는 유일하게 1949년에 노벨의학생리학상을 받은 에가스 모니스(Egas Moniz) 등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하였다. 대학 캠퍼스는 구대학과 신대학으로 나뉜다. 구대학으로 들어가려면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는데, 우리 일행은 티켓 없이 도서관, 법대, 시계탑 등 ㄷ자형 대학 건물이 있는 파티우 다스 에스콜라(Patio das Escola)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계탑은 ‘염소’라는 별명을 가졌다. 시계에서 수업의 끝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면 1학년생들이 상급생의 괴롭힘을 피해 염소처럼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유래가 참 재미있다. 방학 때문인지, 이날 저녁 도서관 내 연말콘서트 때문인지 조아니나 도서관(bibiloteca joanina)은 들어갈 수 없었다. 멀리 타국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교내 행사로 ‘오늘은 관광금지’라는 말에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나마 관계자와 대화할 때 문틈으로 도서관 내부를 살짝 엿본 데 만족해야 했다. 조아니나 도서관은 18세기 초 주앙 5세 때 지어졌는데 평소에는 관광객의 줄이 길게 늘어선다. 정교한 프레스코 천장화, 금으로 중국풍 그림을 그려 넣은 흑단 책장을 가득 채운 약 3만권 정도의 라틴어 고서들이 압권이라고 한다. 도서관을 지은 18세기에 브라질에서 대량으로 금이 들어왔기에 이런 게 가능했다고 한다. 도서 보호상 내부 촬영은 금지돼 있다. 도서관 지하 1층은 책을 유지·보수하는 곳, 지하 2층은 옛 학생감옥이 있다고 하니 코임브라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려보길 권한다. 예전에는 책이 귀하고 값이 비싸서 책 도둑이 많았는데 책을 훔친 학생이나 규율을 위반한 학생은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유럽에서는 흔했다. 도서관과 예배당은 1인당 9유로를 내야 입장이 가능하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대학 설립자인 디니스왕(Dinis)과 주앙 3세의 동상이 있다. 광장 끝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지 풍경이 멋지다. 이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유명한 구 대성당(Se Velha)로 발길을 돌렸다. 이 곳은 원래 무어인들의 요새였으나 포르투갈 초대왕 아폰수 엔리케 왕이 12세기에 성당으로 재건했다. 총을 쏘기 위해 성벽에 뚫은 꼭대기 부분의 총안은 포르투갈이 이슬람 세력에 대항해 국토 회복 운동을 벌였던 레콩키스타(Reconquista) 시대에 요새로 사용했다. 무어인들이 사용했던 건물이어서인지 입구에 아랍풍의 문양들이 새겨져있다. 내부의 반원통형 천장, 한가운데는 높고 주변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아치형 곡면구조인 궁륭에는 로마네스크풍 장식들이 아름답게 장식돼 있다. 교황이 묻혀있는 고딕 양식의 무덤, 그 주변을 장식한 밝고 화사한 스페인 안달루시아 스타일 타일도 볼거리다. 구성당 바로 앞 식당 겸 매점 옆에는 퀘브라 코스타스 계단(Rua Quebra Costas)이 있다. 딱 보기만 해도 이쪽으로 올라오지 않길 잘했단 생각이 들 정도로 가파른 계단으로 된 언덕이다. 코임브라 대학생 사이에서는 ‘등 브레이커(Back Breaker)’로 유명하다. 코스타스(Costas)는 등, 퀘브라(Quebra)는 브레이커라는 뜻으로 술 마시고 내려오는 대학생들이 발을 헛디디는 순간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아이고, 허리야’라고 비명을 질렀다는 데서 유래됐다. 이 계단은 아랍식 성문인 알메디나 문(Arco de Almedina)을 지나 구 대성당 앞까지 오르막으로 이어져 있다. 이어 의과대학부(Faculdade de Medicina) 등 코임브라 대학 건물들을 지나 국립 마사두 드 카스트루 미술관(Museu Nacional de Machado de Castro)으로 갔다. 이곳은 11세기 교황이 살던 궁을 코임브라 출신 천재 조각가 마사두 드 카스트루의 이름을 딴 미술관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조각·회화 등 다양한 전시물도 유명하지만, 코임브라가 ‘아에미니움’으로 불렸던 고대 로마 시절에 도시의 포럼이 지어질수 있도록 인공적인 플랫폼을 창조하기 위해 지었던 로마의 건축 양식인 크립토포르티토(Cryptoportico)가 남아 있는 게 인상적이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지쳤던 몸과 마음을 쉬게 해준 미술관 내 로기아(Logia) 카페테리아도 인상에 남는다. 현대식 장식으로 점심뷔페(7유로)뿐만 아니라 샌드위치, 커피(에스프레소 1유로) 등도 저렴하게 판매한다. 테라스에 앉아 바라보는 주변 경관이 아늑하고 맑고 시원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온다. 신대성당(Se Nova)은 오르막에 있다. 구대성당을 대신하기 위해 1598년부터 100년 동안 지어졌다. 가톨릭 예수회가 리스본 알파마지구에 있는 상 비센트 데 포라 성당을 벤치마킹해 지었다. 금세공 장식의 제단, 신고전주의 양식의 파이프 오르간 한 쌍이 구 대성당과 비교해 화려하다. 성당 정면에는 4인의 예수회 성인이 조각돼 있다. 대학출판사 앞 디니스왕 광장(Largo)의 석상을 뒤로하고, 코임브라대 정문 쪽으로 걸어 내려오니 로마시대 수로로 추정되는 상 세바스티안 수도교가 있다.그 옆으로 코임브라대학식물원(Jardim Botanico da Universidade de Coimbra)이 있다. 1772년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기부한 4만평의 대지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울창한 나무로 이뤄진 산책로, 바로크 양식의 분수, 온실, 포르투갈 식물학자 로테로(Avelar Brotero) 동상 등이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단으로 구성된 공원 안에 크고 작은 다양한 기후대의 나무, 공원 중앙의 분수, 벤치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안 안식처가 되기에 충분했다. 코임브라대학 알타(Alta) 구역과 소피아(Sofia) 구역을 중심으로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구(舊)대성당, 산타 크루즈 수도원(Monastery of Santa Cruz), 알사코바궁전, 16~17세기에 세운 여러 대학(colleges) 건물, 성 미구엘교회(Sao Miguel Chapel), 바로크 양식의 주도서관, 18세기에 세운 식물원과 대학출판사, 화학실과 실험실 등은 ‘코임브라대학-알타와 소피아’라는 명칭으로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상 세바스티안 수도교가 이어진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니 비사야 바레토(코임브라대 의대 교수 1886~1974)박물관(CASA MUSEU BISSAYA BARRETO), 군사시설(QUARTEL GENERAL), 코임브라 종교재판소 감옥(CADEIA PENITENCIARIA DE COIMBRA) 이라고 써 있는 건물 등이 있다. 신 산타클라라 수도원(Convento de Santa Clara-a-Nova)을 가기 위해 다시 코임브라대 구대학 정문을 거쳐 포르타젱광장 관광안내소로 가는 언덕으로 내려갔다. 언덕에서 보는 해질녘의 몬데구강, 산타 클라라 다리를 끼고 있는 도시풍경이 낮과는 사뭇 다르게 운치 있다. 다리를 건너면 1314년 디니스왕 왕비이자 코임브라의 수호성녀인 이사벨 여왕의 지시로 세워졌고, 여왕은 죽은 뒤 묻힌 구 산타클라라 수도원(Monastery of Santa Clara-a-Velha)이 있다. 이 곳은 몬데구강의 수면보다 낮은 저지대에 세워진 탓에 홍수로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겪었다. 1647년 주앙 4세 왕의 명령으로 가까운 언덕에 이전되기 전까지 사용된 수도원의 잘 보존된 고딕 유물은 300년 동안 방치됐다가 20세기 후반에 발굴되었다. 한참 언덕으로 올라가니 잦은 홍수해를 피하기 위해 새로 지은 신 산타 클라라 수도원(Convento de Santa-a-Nova)이 있다. 이사벨 왕비를 기리는 수도원으로 왕비의 관도 이곳으로 이전했다. 수도원 정문을 통과하면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앞마당에는 왕비의 하얀 석상이 있다. 외벽에는 그녀의 일화를 그린 벽화가 있다. 예배당에는 14세기에 만들어져 구 수도원의 홍수 때 물에 잠겼던 석관, 17세기에 신 수도원으로 이전 후에 만든 은관이 있다. 전설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사벨 왕비는 스페인 아라곤의 왕 페드루 3세의 딸로 자애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줬던 왕비였다. 죽고 나서 성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일화에 의하면 디니스왕비는 왕 몰래 불우한 백성들을 보살폈는데, 어느 날 왕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금화를 들고 나서는 왕비를 불러 손에 무엇이 있는지 물었는데 왕비는 당황해 장미라고 둘러댔고, 왕은 억지로 그녀의 손을 펼치게 했는데 금화가 장미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녀의 묘에 오직 장미만을 바친다고 한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니 벌써 칠흑같은 밤이다. 다시 포르타젱광장으로 돌아가니 파스텔라리아 아코 이리스(Pastelaria Arco Iris) 앞에 먹음직스러운 빵을 사러온 사람들이 북적인다. 하얀 설탕이 코팅된 코임브라 전통빵, 과자 등을 몇 개 샀다. 빠삭한 빵 위에 코팅된 설탕 맛이 당이 떨어진 우리 일행에게 괜찮게 느껴졌다. 저녁을 먹으러 숙소 인근에 있는 산타다마리아 레스토랑(Restaurant Santa da maria)로 갔다. 날씨도 생각보다 덥고 언덕도 오르락내리락 해서 힘든 하루였는데, 메뉴 추천을 받아 나온 염소, 돼지고기가 잘못된 선택이었다. 역시 확신이 서지 않을 때에는 쇠고기 스테이크 등 평범한 음식이나 메뉴판 맨 위에 적힌 음식을 주문해야 하나 보다. 요리 2개에 와인 1병까지 포함된 가격이 저렴(29.2유로)해 그나마 위안이 됐다.
2016-07-08 19:10:51
지난해 12월초, 오전에 브라가를 둘러본 후 포르투갈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기마랑이스(Guimaraes)로 향했다. 기마랑이스는 바다를 향해 곧게 뻗은 비옥한 평야지대에 있다. 이곳은 몬사우(Moncao), 브라가(Braga), 비제우(Viseu), 카미냐(Caminha) 사이를 잇는 중세시대 가장 중요한 교역로였다. 기마랑이스는 포르투에서 국철을 타고 약 1시간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으나, 먼저 브라가를 경유했기에 브라가에선 버스를 타고 기마랑이스로 갔다. 브라가 버스정류장엔 인근 도시로 가는 여러 회사의 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기마랑이스 행은 트랜뎁(Trandev)에서 운행한다. 하루에 2대(편도 3.2유로)가 배차돼 가는 데 약 50분쯤 걸린다. 가는 도중 여러 곳에 정차해서 시골버스 느낌이 났다. 드디어 포르투갈의 발상지 기마랑이스에 도착했다. 기마랑이스 버스터미널에서 10분 정도 걸어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기마랑이스 역사지구(Centro Historico de Guimaraes)에 도착했다. 12세기 포르투갈의 국가 정체성 확립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15~19세기, 즉 중세도시에서 현대도시로 발달하는 시기의 다양한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시 당국은 20세기부터 기마랑이스의 구시가지의 현대화에 필요성을 느끼고, 1980년대부터 복원과 재건에 힘쏟았다. 가장 먼저 접한 곳이 투랄광장(Largo do Toural). 17세기 조성될 당시에는 가축행사와 투우경기가 열렸고 기마랑이스 시 경계 바깥 쪽에 위치했었다. 1878년 공원으로 지정됐고 기마랑이스를 오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가는 가장 번화한 광장이다. 주위엔 식당, 카페, 상점이 입주해 있다. 면적이 넓고 벤치도 많아서 여유롭다. 2011년 보수공사를 통해 1583년 이전되었던 르네상스 분수를 복원하고, 18세기 포르투갈 건축 양식인 폼발린(Pombaline)풍의 파사드도 더해졌다. 가장 보고 싶었던 게 ‘여기에서 포르투갈이 탄생했다(AQUI NASCEU PORTUGAL)’라고 적힌 성벽이었다. 이 건국도시 성벽은 포르투갈 건국 역사를 품고 있다. 8세기에는 국토 대부분이 이슬람 세력(무어족, Moore, Moros)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전신인 포르투갈공국이 그리스도교도 중심의 북부 여러 왕국을 모아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Reconquista)을 시작했다. 11세기 후반 프랑스 부르고뉴(Burgundy) 기사이자 프랑스 로버트2세왕의 손자인 엔리케(Henry, Count of Portugal, Henry of Portugal)는 에스파냐 모험 중 무어족과 싸우고 있는 갈리시아왕국(Kingdom of Galicia, 레온왕국 Kingdom of Leon이라고도 함)의 아폰수 6세와 함께 힘을 합쳤다. 1095년 아폰수 6세는 그에게 포르투갈 영지를 주고 포르투갈 백작으로 봉했다. 아폰수 6세는 그의 딸인 테레사(Theresa, Tarasia)를 엔리케 백작의 아내로 줬다. 하지만 포르투갈공국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스페인 북서부를 점유하고 있는 레온왕국의 영지에 불과했다. 1112년 엔리케가 죽자 아들 아폰수 엔리케(Dom Afonso Henriques, Afonso I of Portugal, 포르투갈 아폰수 1세)는 4살이었고, 이에 어머니인 테레사 포르투갈 백작 부인이 섭정했다. 그러나 테레사는 고위 성직자, 백성과 갈등을 일으켰다. 레온왕국(아폰수 6세 사후 테레사의 언니인 우라카 여왕이 지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열망도 강했다. 1116년 포르투갈공국이 갈리시아의 두 도시(Tui, Ourense)를 점령하자 화난 우라카 여왕은 포르투갈을 공격했다. 그러나 테레사여왕을 위해 봉사하는 갈리시아왕국의 귀족의 친구인 겔메레스 주교(Bishop Gelmeres)가 우라카 여왕 진영의 반란을 획책하자 두 자매 여왕은 화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26년 우라카(Uracca)여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아폰수 7세는 테레사에게 가신이 되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절하자 1127년 봄 아폰수 7세는 포르투갈을 공격하게 된다. 이로 인해 테레사 여왕은 레옹 왕국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아들인 아폰스 엔리케가 포르투갈 백작으로 봉해졌다. 이에 테레사 여왕은 아들과 적이 됐고, 그의 연인인 페르나옹 페레스 트라바 백작(Fernao Peres de Trava)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했다. 이에 아폰수 엔리케는 1128년 6월 24일 기마랑이스 근교에서 포르투갈 공국을 완전히 접수하기 위해 엄마와 그의 연인인 페르나옹 백작과 싸웠다. 이것이 사웅마메드전투(Battle of Sao Mamede)로 포르투갈왕국 건국의 씨앗이 됐다. 아폰수 엔리케는 1129년 레콩키스타를 지속하기 위한 필요성 때문에 수도를 코임브라로 옮겼다. 1139년엔 테주강 북쪽을 평정하고 스페인 카스티야왕국로부터 독립하고 1143년 포르투갈 최초의 왕인 아폰수 엔리케 1세로 즉위했다. 이를 기념해 성벽에 새긴 문구가 포르투갈의 탯줄처럼 숭고하게 여겨진다. 기마랑이스는 아폰수 엔리케 1세가 태어난 도시로 정신적인 수도나 다름 없다. 포르투갈 사람은 그래서 기마랑이스를 ‘요람의 도시’(시다드 베르수 Cidade-berco)로 애칭하고 있다. 이어 언덕 위에서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기마랑이스성(Castelo de Guimaraes)으로 향했다. 아폰수 엔리케 1세가 탄생한 곳으로 10세기 후반 세워진 산타마리아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ia)을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하는 수많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포르투갈 공국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요새이다. 고성 입구에 현대식 출입구 시스템을 개보수하는 것을 보니 입장을 유료화할 셈인가 보다. 거칠고 투박한 성벽 돌 위로 뾰족하게 솟은 돌탑은 보는 것만으로도 음산하다. 성벽의 탑에 설치된 총안(銃眼)은 적을 방어하려는 긴장감마저 느끼게 한다. 리스본 근교 신트라의 무어성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데 위엄이 있다. 10세기말 무마도나(Mumadona Dias) 공작부인이 성 건축을 명해 완공된 후 13세기 말에 리모델링됐다. 이후 기마랑이스에 거주한 귀족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여러 차례 수리했다. 20세기에 마지막으로 복원된 후 1910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2015년에 재승인을 받았다. 성을 내려오는데 작은 창고처럼 생긴 입구가 좁은 곳이 있다. 안내판을 보니 아폰수 엔리케 1세가 세례를 받은 성 미구엘 성당이다. 성 앞에는 아폰수 엔리케 1세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옆으로 늘씬한 나무들이 심어진 장방형의 카르무정원(Jardim do Carmo)이 있다. 그 옆으로 보이는 곳이 포르투갈의 흥망성쇠를 잘 간직한 브라간사 공작 저택(Paco Dos Duques De Braganca)이다. 대통령의 여름궁전으로 쓰이기도 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15세기 초반 아폰수 엔리케 1세가 자신의 가문인 브라간사의 자부심을 나타내기 위해 건축한 대형 석조건물이다.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성인 1인 5유로)와 내부수리 중인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현재 17~18세기의 미술품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표소 입구 사이로 직사각형의 회랑, 벽에 걸린 직물을 살짝 볼 수 있었다.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내부관람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성과 브라간사 저택에서 내려가는 길은 약간 내리막길인데 양쪽으로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 늦은 오후라 나무 사이로 붉은 석양이 비치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연출돼 사진 찍기에 그만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있던 사웅프란시스쿠성당(lgreja de Sao Francisco)은 본래 사웅프란시스쿠수도원의 일부였는데, 디니왕(King Dinis of Portugal)의 명령으로 1325년 파손됐다가 주앙 1세(Joao I)가 1400년 재건하였다. 오픈 시간이 지나서 성당 내부에 들어가진 못했다. 1740년대에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거쳐 오늘날 모습을 갖추었다. 이 성당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성단소(Chancel)을 장식하는 아줄레주로 성인 안토니우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으며, 주 예배당의 고딕 양식의 돔과 잘 어울린다고 한다. 성당 내 신랑(성당 중앙 회중석)을 장식하는 인상적인 판화 ‘트롱프 뢰유(trompe l’oeil, 사람들이 실물인 줄 착각하도록 만든 그림), 회화의 훌륭한 예로 꼽히는 목조 천장, 성단소와 고딕 양식의 가로 회랑을 구분하는 아치형 금장 목조 장식, 2층으로 된 예배당이다. 성당 내에는 이 지역의 최초 프란시스코파 전도자인 성 구알테르(Sao Gualter)의 유해가 보관돼 있다. 하단에 아치형의 통로가 있는 건물을 지나면 나오는 올리베이라광장(Largo da Oliveira)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지고 있다. 과거 기마랑이스의 중심부 역할을 했던 곳임을 증명이나 하듯 주요 명소, 유명 식당들이 즐비하다. 광장 한쪽에는 올리베이라성모성당(lgreja de Nossa Senhora da Oliviera)이 있다. 성모를 최고로 모시며 포르투갈 고딕 건축 양식의 압축판이자 최고봉으로 여겨진다. 바탈라 수도원 건축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342년 리스보아(리스본)의 한 상인이 성당 앞에 올리브나무를 가져와 이곳에 심어놓았는데 말라 죽었다가 3일 뒤 기적적으로 푸른 잎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일이 빚어지자 올리브나무의 생명력을 기념하기 위해 광장과 성당의 이름을 ‘올리베이라’라고 새로 지었다. 이 나무는 1870년까지 자리를 지키다 옮겨졌으며, 현재 그 자리에 있는 올리브나무는 1985년 새로 심어놓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나무 밑 석판에는 1342, 1870, 1985라는 숫자를 새겼다. 이 성당은 종교적 전시품으로 가득한 알베르토삼파이오박물관(Museu de Alberto Sampaio)과 이어지고, 맞은 편에는 현재 현대미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시청 관저(Antiqos Pacos do Concelho)가 있다. 역사지구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나면 은은한 조명, 분수대, 기하학적인 모양의 대형 꽃밭으로 조성된 브라질헤푸블리카광장정원(Jardim do Largo da Republica do Brasil, Jardim do Campo da Feira)이 길게 뻗어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세계 몇 대 아름다운 공공 정원으로 손꼽히기도 하는데 브라질 독립 기념과 관련된 듯하다. 포르투갈로서는 브라질 독립을 축하할 일이 아닐 듯한데 포르투갈어를 모르는 데다가 구글, 위키피디아에도 내용이 나오지 않으니 그 연유를 알 길 없다. 겨울이라 드라이한 풍경이었지만 봄, 여름에는 형형색색의 화초로 볼 만하다. 광장 양 옆 도로를 두고 카페, 상점들이 즐비한다. 광장 끝에 우뚝 선 사웅구알테르성당(Igreja de Sao Gualter)은 16세기 성모에게 헌정된 작은 예배당을 1785년에 새로 건축한 것이다. 뾰족하게 솟은 두 개의 첨탑을 가진 외관 덕에 멀리서도 잘 보인다. 저녁 6시경에 도착했더니 문을 닫으려고 해서 겨우 수분간 성당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이 지역 최초의 프란시스코파 전도자인 19세기 성인 구알테르를 기리는 축제인 ‘페스타스 구알테리아나스(Festas Gualterianas)’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사웅구알테르성당이라고 부른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성모의 비탄을 위로한다’는 뜻을 담아 ‘노사 세뇨라 다 콘솔라상 에 산투스 파소스 성당’(Igreja de Nossa Senhora da Consolacao e Santos Passos)이라고도 부른다. 기마랑이스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의 과정을 나타내는 예배당이 7개 세워졌는데, 이 성당은 현재 남아 있는 5개 중에서 가장 첫 번째 것이다. 포르투갈 건축가 안드레 소아레스(Andre Soares)가 설계한 바로크풍 건축물로, 완성된 후 1세기가 지나 2개의 탑과 계단, 난간이 추가로 건축됐다. 이 성당을 보고 기마랑이스를 떠나는 게 아쉬워 다시 투랄광장으로 갔다. 고색창연한 사웅페드로성당(Igreja de Sao Pedro)과 대조적으로 성탄절이 임박한 지라 현대식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인다. 기마랑이스에서 포르투로 가는 기차(약 1시간에 1대 운행)를 타기 위해 서둘러야 한다. 늦은 저녁이라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 오후 7시 16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3분 앞두고 도착할 수 있었다. 소도시의 역이라 역무원은 벌써 퇴근하고 없고 자동발매기에서 표(1인당 3.1유로)를 겨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승무원은 “2인 탑승 티켓이 아니라 1인 왕복티켓”이라며 “검표 완료 후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혹여 발권이 잘못돼 과중한 벌금을 낼까봐 전전긍긍하는데 다시 온 승무원은 친절하게도 “다음부턴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한숨을 돌리게 됐다. 1시간 20여분만에 포르투에 도착하니 오후 8시 35분이 되었다. 아침 일찍 서둘렀는 데도 하루에 브라가, 기마랑이스를 섭렵하려니 어느 새 저녁 9시다. 촉박한 일정 때문에 긴장한 채 바쁘게 쏘다녔더니 시장기가 몰려든다. 포르투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 다시 히베리아지구로 갔다. 도우루강을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레스토랑 중에서 도우루강과 동 루이스 1세 다리가 잘 보이는 분위기 좋은 파롤 레스토랑(FAROL DA BOA NOVA)에 들어갔다. 지배인의 추천을 받아 그린화이트와인(MURALHAS DE MONACAO) 한병과 한 솥 가득 나오는 해물밥인 ‘아로즈 드 마리스쿠’, 그동안 못먹어서 아쉬웠던 포르투갈 전통 샌드위치인 ‘프란세지냐’를 주문했다. 음식 맛은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포르투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그린화이트와인은 있지 못할 정도로 풍미가 훌륭했다. 이렇게 포르투의 마지막 밤은 지나고 있었다.
2016-07-08 19:06:35
지난해 12월초, 포르투갈 여행 3일차는 포르투갈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브라가(Braga), 기랑마이스(Guimaraes)를 한꺼번에 도는 일정이다. 동트길 기다려 호텔 밖으로 나오니 겨울 오전 7시반경이지만 출근하는 사람들이 제법 붐빈다. 시간에 여유가 좀 있는지라 포르투의 명소인 마제스틱카페 앞 빵집에서 커피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볼량시장에 들러서 간식거리로 과일을 샀다. 포르투에서 브라가로 가는 기차는 30분에 1대꼴로 배차된다(포르투갈 철도 예약 홈페이지, http://www.cp.pt/passageiros/pt). 숙소가 포르투 상벤투역에서 가깝고 기차편도 많은 편이어서 굳이 예약할 필요가 없었다. 브라가행 8시15분 기차를 타니 1시간만에 종착역이 브라가에 도착했다. 브라가는 미뉴(Minho)지역의 중심지로 리스본, 포르투에 이어 포르투갈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미뉴지역은 포르투갈의 북서부 23개 관할지를 묶은 곳으로 자동차·기계·전자 등 공업이 상대적으로 발전한 곳이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고 경제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미뉴지역은 브라가·기마랑이스 등을 아우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남쪽으로는 포트와인 산지로 유명한 도우루(Douro)지역과 붙어 있다. 미뉴지역은 포르투갈에서는 가장 서늘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신선하고 깔끔한 맛의 화이트와인으로 잘 알려진 ‘비뉴베르드(Vinho Verde, Green Wine)’를 대량 생산한다. 어린 포도송이로 만든 젊은 와인(푸른 와인)은 청량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레드와인을 포함, 전체 포르투갈 와인의 4분의 1이 미뉴지역에서 재배된다. 미뉴지역의 주도인 브라가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고, 기원전(BC) 20년 로마제국시대에 브라카라아우구스타(Bracara Augusta)라는 이름으로 도시가 세워질 정도로 유서가 깊다. 기원후(AD) 3세기경에는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먼저 가톨릭이 전해지기도 해서 ‘포르투갈의 로마’로 불리기도 한다. 브라가는 2012년 유럽 청소년 수도로 선정됐다. 학생이 많이 거주하여 인구층이 젊은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포르투갈 축구명문팀인 FC브라가가 제법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더 유명한 것은 FC브라가의 홈구장인 시립 축구경기장이다. 축구팬뿐만 아니라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장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브라가 여행 중 가장 아쉬웠던 게 일정상 FC브라가 홈구장을 가보지 못한 것이다. 약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축구는 골대 뒤에서 보는 게 아니라는 건축가 에두아르두 수투 데 무랴(Eduardo Souto de Moura)의 신념에 의해 지어졌다. 골대 뒤에는 자리가 없고 길게 뻗은 롱 사이드자리만 갖추고 있다. 축구장은 브라가 시내에서 북쪽으로 시내버스 5번을 타고 외곽으로 한참을 가야 한다. 브라가 대부분의 관광지는 시내와 남동부에 밀집에 했다. 브라가가 젊은 도시인 이유 중 하나는 1973년에 설립된 국립 미뉴대학교(University of Minho)가 있어서다. 1만9000명의 학생, 1300명의 교수, 600명의 교직원이 다니는 포르투갈에서 가장 큰 대학 중 하나다. 2013년 타임스고등교육(Times Higher Education)에서 선정한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신생 명문대학 Top100에 오르기도 했다. 2014년 7월 전북대와 줄기세포와 생명공학 연구를 위한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브라가행 기차 안 마주 앉은 여대생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의학서적을 보고 있다. 미뉴대 학생인데 전공시험이 있나보다. 브라가역(ESTACAO DE BRAGA)은 상벤투역과는 달리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이다. 역 정문 좌측 버스정류장(Avenida da Liberdade)에서 브라가에서 가장 보고 싶은 ‘봉 제수스 두 몽테(Bom Jesus do Monte)’에 가기 위해 2번 버스(편도 1.65유로)를 기다렸다. 이 버스는 1시간에 두 대 정도 운행된다. 브라가 중심에서 20분을 타고 달리면 5㎞ 외곽에 위치한 봉 제수스 두 몽테 버스 종점역에 이르게 된다. 봉 제수스 두 몽테는 ‘산에 계신 우리의 좋은 예수님’이라는 뜻이다. 몽테(Monte)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산 정상에 언덕을 만들어 조성한 성당이다. 입구에 도착하니 푸니쿨라가 있다. 건장하고 시간이 많다면 걸어 올라가도 충분하지만 1882년에 첫 운행됐다는 유서 깊은 푸니쿨라(편도 1.2유로, 왕복 2유로)를 타보기로 했다. 1시간에 약 2회 왕복한다. 짧지만 45도에 가까운 급경사다. 10여분만에 산정의 성당에 도착했다. 드디어 봉 제수스 두 몽테의 위세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문에서 아래로 보이는 브라가 전경이 살짝 드리운 안개 너머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이 성당은 십자가를 위해 지은 예배당 하나로 시작되어 15~16세기 재건되었고, 17세기에는 예수에게 바치는 6개의 예배당과 순례자 예배당이 추가로 지어졌다.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18세기로 당시 브라가의 추기경이었던 로드리고 데 무아 테예스(Rodrigo de Moura Telles)의 지시로 유명 건축가 카를로스 아마렌테(Carlos Amarante)가 신고전주의적으로 완성했다. 봉 제수스 정문에는 테예스 문양이 걸려있다. 성당 내부를 둘러보고 성당 왼편의 아줄레주, 분수정원을 거닐었다. 전망대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며 여유롭게 브라가 시내를 보는 것도 낭만적이다. 사실 이 곳은 성당 자체보다는 사람의 오감을 형상화한 5개의 분수가 산 정상에서 아래 방향으로 정렬한 ‘봉 제수스 계단(Escadaria do Bom Jesus)’과 성당으로 들어가는 신념·희망·박애의 ‘삼덕의 계단(Escadaria das Tres Virtudes)’이 유명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층층이 쌓인 계단과 그 위에 언덕에 자리잡은 성당이 특이하면서도 멋스럽다. 여행객에게는 이곳이 오래된 유적지이지만, 현지인들에겐 푸근한 동네 뒷산인가보다. 운동복으로 조깅하는 사람과 자전거로 하이킹하는 사람이 숱하게 보인다. 겨울철이라 관광객이 별로 없었지만, 부활절 주간에는 봉 제수스의 계단을 손으로 짚고 오르는 의식을 갖는 전 세계 각지의 순례자들로 붐빈다고 한다. 봉 제수스를 뒤로 하고 2번 버스를 타고 브라가시청, 관광안내소 등이 있는 헤푸블라카 광장(Plaza da Republica)으로 향했다. 버스 기사에게 물어 하차하니 왼쪽에 시청건물이 보이고 광장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콘그레가도스수도원(Convento dos Congregados)은 성 안토니에게 공헌된 예배당 자리에 17세기말에 지어졌다. 겉표면은 바로크 영향을 받았지만, 20세기 후반에 조르쥬 골라코(Jorge Golaco)에 의해 장식되었다. 저 멀리 오래된 브라가성과 탑들을 보수하는 기중기가 쉬지 않고 왔다갔다 한다. 브라가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업이 한창이다. 브라가의 다양한 역사를 간직한 광장 중앙엔 비아나(Vianna)분수가 있어 이를 ‘비아나광장’이라고 부른다. 분수와 같은 이름의 카페는 브라가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1858년에 개점했다. 광장과 이어져 있는 긴 정원이 아베니다센트럴정원(Jardim da Avenida Central)이다. 광장 끝에 관광안내소가 위치해 있다. 산타바바라정원(Jardim de Santa Barbara)은 대주교궁으로 사용하던 건물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아담하고 소박하다. 17세기에 처음 조성된 이래 1955년의 조경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정원 중앙엔 수호신인 성인 바바라의 석상이 있는 분수가 자리잡고 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이후 손대지 않은 것이다. 정원 바로 앞에 위치한 주스티누 크루즈 거리와 프란시스쿠 산체스 거리는 종종 거리공연이 펼쳐진다. 브라가는 인구 20만명이 안 되는 작은 도시지만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먼저 가톨릭이 전파된 만큼 30여개의 성당과 수도원이 들어서 있다. 그 중에서도 브라가대성당(Se de Braga)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무어식 모스크로 사용되던 오래된 로마네스크 건물을 헐고, 포르투갈 최초의 왕인 아폰소 1세의 아버지 엔리케 데 보르고냐(Henrique de Borgonha)공작이 11세기에 개축했다. 이 성당 안에는 보르고냐 공작과 그의 부인 테레사의 묘가 있다. 2개의 바로크 종탑과 로마네스크 파사드가 특징적이며, 아줄레주도 볼 수 있다. 성당 북쪽 출입구 부근에 알차게 꾸려진 작은 성물박물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10세기에 상아로 만든 관, 16세기 탐험가 페드로 아바레즈 카브랄이 브라질 발견 후 첫 미사를 기념하는 데 사용했던 쇠로 만든 십자가 등이 전시돼 있다. 15세기에 제작된 성가대 의자와 바로크풍 더블 오르간도 유명하다. 바쁘게 둘러보다 보니 시장기가 느껴진다. 리스본 시아두 지구에 있는 ‘아 브라질레이라(A Brasileira)’ 카페 주인이 1907년 브라가에도 동명의 지점을 냈다. 30년 동안 운영해오며 커피콩 1kg을 구입하는 손님들에게 에스프레소 한 잔씩을 무료로 건네던 것이 현재 브라가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로 자리잡은 시작이 됐다. 번화가 입구에 위치, 포근하고 환한 실내가 따뜻한 분위기를 만든다. 창가 쪽은 브라가성이 보여서인지 인기가 좋은데 우리 일행은 운 좋게 창가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마시는 에스프레소와 참치·치킨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현금결제만 가능하다. 요기를 하고 나니 다시 기운이 난다. 걷다보니 대주교의 고성이 보인다. 이 건물은 1746년으로 거슬러서 대주교 돔 요세 브라간사(Dom Jose de Braganca)가 주춧돌을 놓았다. 안드레 소아레스(Andre Soares)가 설계했고, 장식은 바로크시대에 바탕을 뒀지만 로코코 스타일과 연계돼 있다. 1866년에 큰 화재로 일부 소실됐다가 1930년에 복원돼 현재 브라가 공공도서관으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로 대접받고 있다. 성프란시스코 제3회 수도회 성당(Church of the Third Order of St. Francis)은 프란체스코파 수도회에 의해 1672년에 브라가에 지어졌다. 1685년에 건축이 시작되었고, 1730년에 완성됐다. 마뉴엘 페르난데스 다 실바(Manuel Fernandes da Silva)가 초기 양식주의(매너리즘)과 바로크양식을 조화시켜 지었다. 가톨릭 용어로 남자 수도회를 제1회, 여자 수도회를 제2회, 세속에 살면서 수도 정신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을 재속 제3회라 한다. 제3회원인 남자 수사(신부)나 수녀들은 의료·교육·사목 여러 형태의 자선사업에 봉사한다. 프란치스코회를 시작으로 도미니코회, 가르멜회, 성모의 종 수도회(Servites회), 아우구스티노회에서도 제3회 제도를 도입했다.
2016-07-08 19:02:18
2014년 봄에 방영된 ‘꽃보다 할배’에서 스페인이 중점 소개되면서 새삼 부각됐지만 그 옆의 조용한 나라 ‘포르투갈’은 여전히 생소한 나라다. 2002년 한일월드컵 조별 리그에서 박지성의 인상적인 골이 포르투갈 전에서 나왔고, 루이스 피구의 망연자실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 게 웬만한 한국인들이 포르투갈을 기억하는 전부다. 하지만 최근 포르투갈이 번잡한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색다른 여행지로 부상하고 있다. 포르투갈(Portugal, 정식명칭은 Republic of Portugal)은 15세기 바다를 누비며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이를 통해 브라질, 마카오 등을 식민지화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 조총을 팔고 사용법을 가르쳐줬던 장본인이 포르투갈 상인이기도 하다. 포트와인과 그린와인(그린화이트와인)이 특색이고 제로니무스수도원 등 15개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유럽 남서부의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돌출한 이베리아반도(Iberia Peninsula)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5분의 2에 수준이고 인구도 1050만명에 그쳐 대항해시대의 번영기와는 사뭇 위축된 느낌이다. 공용어로 포르투갈어를 쓰며, 국민의 80% 남짓이 가톨릭 신자다. 포르투갈은 지중해성 기후로 유럽 국가 중에서도 연중 가장 온화한 편이다. 포르투갈 본토의 연 평균 온도는 13~18도, 겨울철이라고 해봐야 평균 8.9~14.8도다. 겨울철 월평균 강수일수는 14일로 비가 자주 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12월초 여행에선 이렇다할 비를 맞지 않고 무난한 날씨 속에서 망중한을 즐길 수 있었다. 포르투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13년도 여름, 회사에서 장기근속휴가를 받아 스페인을 11박 13일로 다녀왔을 때 포르투갈에서 2박을 했다. 대다수 대한민국 여행객이 나처럼 포르투갈은 스페인 갈 때 ‘잠깐 들르는 나라’ 정도로 생각한다. 3년전에 좋았던 느낌으로 2년만에 다시 찾으니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바로 접경하고 있음에도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됐다. 색깔로 비교해보면 스페인은 강렬하고 선명한 유채색, 포르투갈은 은은한 무채색 같다. 여행하다 만나는 양국인은 모두 친절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고 화려하며 열정이 넘친다면, 포르투갈 사람들은 조용하고, 시골스럽다. 국내서 포르투갈까지 가는 직행편이 없는 관계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 파리를 경유해 16시간 40여분만에 리스본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에는 리스본, 포르투, 파루, 마데이라 등에 국제공항이 있다. 우리의 첫 여행지는 포르투다. 만약 다른 유럽국가를 경유해 포르투에 가고 싶다면 저가항공사 비행편을 이용하는 게 비용이나 시간 면에서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촉박한 여행 준비기간에 파리에서 포르투로 직항하는 비행기편을 알아보기도 힘들었거니와 포르투공항에서 포르투 도심으로 이동하는 데 45분 이상 소요된다는 정보에 포기하고 리스본에서 비행기를 내려 버스나 기차를 이용해 포르투로 이동하기로 했다. 리스본공항역에서 출발하는 메트로(지하철)를 타고 오리엔테역(약 10분 소요)으로 가면 기차나 버스(Renex)를 이용할 수 있다. 버스는 1인당 20유로로 기차(2등석 24.3유로)보다 저렴하다. 기차는 포르투 캄파냐(Campanha)역에서 내려 환승해 메트로로 포르투의 중심지인 상벤투(sao bento)역에 내려야 한다. 버스는 환승이 필요 없는 대신 약 3시간 30분이 소요돼 기차보다 30~60분이 더 걸리고 정거장이 상벤투보다 도심으로부터 도보로 20분 가량 먼 거리에 있는 게 단점이다. 드디어 버스를 타고 늦은 밤 포르투에 도착했다. 포르투는 포트와인으로 유명한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이며, 역사적으로 포르투갈이라는 국가명이 탄생했던 배경이 되는 곳이다. 포르투의 상벤투역, 빌라 노바 드 가이아(Vila Nova de Gaia) 지역이 포함된 도우루(Douro)강 어귀의 포르투 역사지구(Centro Historico do Porto)는 기원전 8세기부터 사람들이 정착, 2000년 넘는 시간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유럽도시의 발달사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인정받아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역사지구에 위치한 건물들은 오랜 역사만큼 신고전주의,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시대별 건축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 건물이 비교적 높낮이가 심한 구릉지대의 지형과 어우러져 미학적,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포르투 역사지구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어떻게 보면 도시 대부분이 포함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포르투의 빌라 노바 드 가이아의 일부인 칼레(라틴어, Cale)는 이미 타키투스시대(55∼120경)에 바이크셀강 하류에 정주하던 동(東)게르만계 부족인 고트족에게 ‘포르투칼레’(라틴어, Portucale)로 알려졌다. 포르투에 정박해 정착한 그리스에서 온 우두머리 고이델 글라스가 명명한 ‘포르토가텔루’(Portogatelo)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포르투가 포르투갈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포르투는 성탄절이 코앞이라서인지 거리마다 성탄절을 알리는 루미나리에가 도시를 환하게 밝히면서 우리를 환영했다. 포르투갈 북부에 위치한 포르투의 밤공기는 싸늘했지만, 도시 풍경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포르투에서 잡은 숙소는 상벤투역에서 도보로 약 5분 정도 소요되는 무브호텔(Moov hotel porto centre)이다. 1박 42유로하고 여인숙(Inn)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줄기차게 돌아다닐 목적의 관광객으로서야 잠자리야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었다. 다만 포르투는 길이 경사지고 우툴투둘한 포석이 깔려 있어 버스에 내려 캐리어를 끌고 숙소까지 이동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12월 1일은 서울의 집에서 포르투의 호텔로 이동하는 데 다 보내고 다음날 드디오 밝은 낮에 포르투와 대면하는 일정이 시작됐다. 장시간의 이동에 따른 피로와 시차로 잠을 푹 자지 못한 탓에 새벽 6시에야 눈이 떠졌다. 아침 8시에 느지막하게 해가 뜨자 아침을 해결하고자 숙소를 나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볼량시장(Mercado do Bolhao)으로 향했다. 19세기에 처음 문을 연 이래로 쉬지 않고 장사해왔다는데, 이른 아침부터 상인과 현지인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시장이 위치한 2층짜리 신고전주의 건물은 물건을 실어나르는 상인이 아니라면 시장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 역사만큼 멋스럽다. 1층에는 신선한 해산물, 치즈, 육류, 빵, 과일 가게가 있고, 2층에는 꽃가게가 주로 위치한다. 1층 초입에 위치한 과일가게에서 신선한 오렌지, 포도, 딸기 등을 9.85유로에 구입했다. ㎏이나 낱개로도 구매가 가능하다.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대형마트 탓에 전통시장은 예전만큼 규모가 크거나 활기차지는 않지만, 저렴한 가격에 신선한 식재료를 사려는 현지인들에게 여전히 으뜸은 전통시장이다. 이 시장은 월~토 매일 오전 7시에 문을 열고, 오후 5시에 닫는다. 단 토요일엔 오후 1시에 마감한다. 시장 입구 맞은 편에 위치한 오래된 빵집은 저렴하고 맛이 풍부해 아침부터 손님이들끓었다. 시내 중심지의 빵집이 단순히 달고 기름진 데 비해 은근한 맛이 깊다. 볼량역 앞 포르투 최대 번화가인 산타 카타리나 대로(Rua de Santa Catarina)에 위치한 ‘영혼들을 위한 예배당’이라는 이름의 예배당(Capela das Almas de Santa Catarina)이 있다. 멀리서도 보일 만큼 푸른 타일로 덮인 대형 벽면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18세기 초에 완공돼 1801년에 확장됐고, 타일 세공사 에두아르두 레이테(Eduardo Leite)가 1929년에 18세기에 유행하던 아줄레주(Azulejo, 주석 유약으로 그림을 그려 구운 포르투갈 특유의 푸른 빛 타일) 스타일을 모방해 작업함으로써 예배당 외관이 현재 모습을 갖게 됐다. 아줄레주는 아시시의 성프란시스쿠와 성녀 카테리나의 생애를 묘사하고 있다. 성녀 카타리나에게 헌정된 성당이기에 산타 카타리나 성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19세기에 완성된 아만디우 실바(Amandio Silva)의 파사드스테인드글라스도 유명하다. 내부 제단은 신고전주의 스타일이다. 이어 아침 9시반에 산타 카타리나 대로의 유명한 마제스틱 카페(Majestic Cafe)에 첫 번째 손님으로 들어섰다. 이 대로는 18세기 후반 보수작업을 마친 이후 대형 쇼핑센터인 비아 카타리나 쇼핑(Via Catarina Shopping)과 마제스틱 카페 등 수많은 상점과 맛집이 들어섰다. 약 1.5㎞로 상당히 길다. 카페 외관은 평범하지만 들어선 순간 역사를 거스르는 듯한 내부 모습이 시선을 압도한다. 유려한 곡선의 고풍스러운 몰딩, 초콜릿색 가죽의자, 커다란 거울이 로맨틱한 하모니를 연출한다. 이 카페는 포루투에서 제일 아름다운 카페로 꼽힌다. 트래블 웹진인 유시티가이즈(ucityguides)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 톱10 중 6위를 차지했다. 카페 마제스틱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1921년 오픈한 이래 예술과 문화가 번창했던 19세기말의 ‘벨 에포크(belle epoque)’를 추구하며 많은 예술가들과 역사를 함께 했던 카페라서 더 가치가 있다. 포르투 출신과 결혼했던 작가 조앤 롤링(J.K. Rowling)도 여기서 ‘해리 포터’의 첫 시리즈를 집필했다. 아침 일찍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잔 즐기려는 커플 관광객들이 눈에 띈다. 커피와 함께 이곳의 대표 메뉴 중 하나인 포르투갈식 프렌치토스트 하바나다스를 시켰다. 계란을 입힌 빵에 포트와인을 넣어 졸인 커스터드 시럽을 뿌리고, 호두와 아몬드 등 견과류를 얹어 나오는 디저트다. 한 입 물면 달콤한 커스터드크림이 반숙으로 익힌 계란 노른자처럼 터져 나와 달달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반데이라극장(Teatro sa da bandeira), 테아트로(Teatro)호텔을 거쳐 1920~1940년대 건물들이 즐비한 포르투의 중심지 리베르다드 광장(Praca da Loberdade)에 도착했다. 광장 중앙에는 페드로 4세 동상(Dom Pedro Ⅳ)이 있고, 은행·여행사·관광안내소 등이 배치돼 있다. 광장 맨 위쪽에는 포르투 시청이 위치한다. 이 광장에 유럽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맥도날드가 있는데,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 은은한 조명의 샹들리에와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고풍스럽다. 16세기 성 베네딕토 수도원 자리였던 상벤투역은 화재로 폐허가 된 것을 1900년 카를로스 1세가 당대 최고 건축가 마르케스 다 실바(Marques da Silba)와 화가 조르제 콜라스(Jorge Colaco)를 투입해 기차역으로 변모시켰다. 이 기차역은 이후 교통의 허브로 아줄레주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이에 담긴 역사적 내용으로 유명하다. 아줄레주 벽화는 1905년부터 1916년까지 11년간 무려 2만장의 타일이 들어갔다. 그 위에는 1140년 레온 왕국와의 독립전쟁, 포르투갈의 시조인 아퐁수 1세(D. Afonso I), 주앙 1세와 그의 왕비인 필리파, 전투에서 승리한 항해왕 엔리케 왕자 등 포르투갈의 역사적 사건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포르투 대성당(Igreja de Santa Clara, Se do Porto)은 포르투의 제1성당으로 상벤투역에서 대각선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 위치한 엔리케 왕자의 청동 기마상을 지나면 건물 정면에 고딕 양식의 탑 두 개가 있는 성당이 있다. 12세기 로마네스크풍으로 건축되었으나, 개축되면서 성당 곳곳은 여러 풍이 혼재됐다. 파사드의 고딕 장미 창문은 초기 건축 이후 변형되지 않은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성당의 탑은 13세기 당시 건축된 고딕 양식을 간직하고 있고, 회랑은 14세기에 지어졌으며 18세기 아줄레주로 장식해 아름답다. 주 예배당과 은으로 된 제단은 18세기에 확장됐다. 성구 보관실의 니콜라우 니소니(Nicolau Nasoni)의 바로크 프레스코화는 화려하다. 성당 앞 광장에 세워져 있는 정교한 기둥 페로우리뇨(Pelourinho)는 죄인과 노예를 묶어 놓고 매질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뒤쪽 배경으로 도우루 강변(Cais da Ribeira 히베리아)이 나온다. 성당을 나와 렐루서점으로 향하는 길에 포르투를 대표하는 76m 높이의 바로크 양식의 클레리구스 성당과 종탑(Igreja e Torre dos Clerigo & Tower)이 보인다. 18세기 초반 한 성직자(클레리구스, 영어로 Clergy) 형제가 의뢰해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니콜라우 나소니가 설계했다. 성당은 1732년에 시작돼 1749년에 완공됐다. 탑은 1763년에 지어졌다. 성당은 도금된 목재 조각으로 장식된 타원형 신도석으로 유명하며, 4가지 색의 대리석으로 제작된 로코코풍의 제단 또한 볼거리다. 성당과 탑을 설계한 나소니는 이탈리아 투스카니에서 태어나, 포르투 대성당 주교들의 초청을 받아 포르투에 이주해온 이후로 포르투 대성당의 프레스코화를 시작으로 화가겸 장식가로써 활동하였다. 그는 이 작업에 무보수로 작업에 참여했을 만큼 작업에 애정이 컸다. 죽기 전에 이 성당에 묻히는 게 소원이라고 하여 이곳에 묻혔는데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240개의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오르면 탑에 도달한다. 직접 올라가진 않았지만 포르투 시내 전경이 멋져 매년 12만명이 방문한다고 한다. 렐루서점(Livraria Lello)은 조앤 롤링이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1906년 개업한 이곳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 누보(Art Nouveau)풍으로 건축됐다. 파리 라파예트 백화점에서 영감을 얻어 석회에 페인트칠 한 붉은 계단, 서점의 모토인 ‘노동의 존엄성(Decus in Labore)’이 새겨진 천장 스테인글라스는 이 서점의 상징이다. 방문객이 구매자보다 많다 보니 2015년 8월부터 입장료(1인당 3유로)를 받고 있는데, 책을 구입하면 입장료만큼 깎아준다. 대부분의 책은 포르투갈어로 읽기 어렵거나 영어 원서로 비싼데 아동도서(그림책)은 6~10유로 안팎이라서 기념품 삼아 구입하면 무난하다. 서점을 나오니 근처에 카르무성당(Igreja da Nossa Senhora do Carmo das Carmelitas)이 보인다. 16세기에 조직된 ‘맨발의 카르멜회’ 종파는 다른 종파의 견제로 포르투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포르투 총독의 집에 머물며 열렬한 지지자인 여류 시인 베르나다 데 라세르다(Bernada de Lacerda)의 도움으로 포르투에 뿌리를 내리고 카르무성당을 지을 수 있게 됐다. 성당의 주춧돌은 1619년 5월 5일에 놓여 귀족과 시의회의 지원으로 1622년 완공됐다. 성당 옆면의 아줄레주가 아름답고 내부의 황금빛 장식이 화려하다. 성당 앞에 포르투대학 입구에 해당하는 분수 광장이 있고 인근에 주앙샤가스공원(Jardim de Joao Chagas)도 있다. 잠시 쉴 수 있기에 적당한 명소다. 이어 히베리아 지구로 가기 전에 볼사궁전(Placio da Bolsa)으로 향했다. 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볼사궁전은 원래 성프란시스코 성당에 속한 수도원이었는데 1832년 전쟁 중 화재로 폐허가 됐다. 1841년에 마리(Mary) 2세 여왕은 재정적인 문제로 수도원 대신 상업조합 건물을 짓기로 하고 기부받았다. 한때 주식거래소, 와인거래소, 상공회의소로 사용됐고, 현재는 포르투를 찾는 여러 나라 수장들을 맞이하거나, 결혼식 등 행사장으로 시민에게 대여되고 있다.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오후 관람 일정의 경우 2시부터 5시반까지만 진행된다. 건물 2층으로 가는 계단에는 포르투갈과 무역거래를 하던 나라들을 묘사한 회화 작품과 각 국가문장이 새겨진 국가들의 방(Patio das Nacoes)이 있다. 일본은 있는데 한국은 없다. 천장은 유리와 철로 이뤄진 직사각 돔 형태다. 볼사궁전의 하이라이트는 아랍 방(Arab Room)으로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Alhambra)을 모델로 했다. 18년에 걸쳐 지어졌는데 대부분이 금인 벽 장식과 아랍문양은 화려하다. 목조로서 음향이 은은한 까닭에 지금은 기업이나 상류층을 위한 소규모 클래식 공연의 콘서트홀로 사용된다고 한다. 포르투에서 포르투대성당이 가장 크긴 하지만 볼사궁전 인근의 상프란시스쿠성당(Igreja Monumento de Sao Francisco)은 1910년 국보로 지정된 만큼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1244년에 세워져 1383년 페르디난두 1세의 명령으로 확장됐다. 고딕 양식의 전형이며 실내장식은 18세기에 바로크풍 유행에 따라 크게 바뀌었다. 일정에 쫓기어 목전에 두고도 들어가진 못했다. 포르투는 도시가 아담해 웬만한 곳은 도보로 관광할 수 있다. 볼사궁전 매표소에서 패키지로 궁전 관람에 크루즈를 타거나 와이너리를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살 수 있다. 도우루강변의 히베이라 광장(Praca da Ribeira)은 선착장과 레스토랑이 즐비한 공간에 놓인 완충지대다. 강변을 사이에 도심 쪽은 바이샤&히베이라 지역이라 부르고, 건너편 유명 와이너리가 밀집한 곳은 빌라 노바 드 가이아지역이다. 도우루강변 양쪽에는 수십개의 노천카페와 맛집이 있다. 증축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는 길이 172m의 동루이 1세 다리(Ponte LuisⅠ)는 아치가 아름답다. 1층에는 자동차가, 2층에는 트램이 다닌다. 1, 2층 모두 보행자 도로가 있어서 걸어다니며 보는 풍광이 멋지다. 낮과 밤에 보는 풍경의 느낌이 사뭇 다른 것도 이 다리의 매력이다. 이 다리는 에펠탑으로 유명한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Gustav Eiffel)의 제자 테오필 세이리그(Teophile Seyrig)가 설계했다. 동루이 1세 다리를 건너 도우루와인(포르투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와이너리 투어 지역으로 건너갔다. 비수기인 겨울이라 관광객이 드물다. 볼사궁전에서 구입한 티켓으로 ‘도우루 아줄’(Douro Azul) 유람선에 올랐다. 크루즈 선착장에는 옛날 영국으로 포르투와인을 실어 나르던 운송선을 개조한 ‘라벨로(Rabelo)’ 유람선도 보인다. 다국어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약 50분 동안 유람선을 타고 동쪽으로 갔다가 반환점을 돌아 해가 지는 서쪽 끝(대서양)으로 갔다가 다시 선착장에 내렸다. 좁은 강폭에 양측 강변에 다소 수직으로 늘어선 오래된 건물과 레스토랑, 와이너리를 보니 입체적이면서도 정겨운 느낌이다. 6개 다리(동루이스1세, 마리아 피아, 인판테, 상주앙, 프레이소, 아라비다)도 나름 특색이 있다. 이 강변을 따라 포르투와인을 대서양을 통해 영국 등으로 실어날랐다니 와인이 담긴 오크통을 실어나르던 인부들과 돈버는 재미가 쏠쏠했던 상인들이 떠오른다. 당시 대상(大商)들이 볼샤궁전을 지배하면서 와인 거래를 좌지우지했다. 겨울이라 오후 5시가 되자 해가 지면서 싸늘한 바람이 분다. 크루즈 투어가 끝나고 바로 와이너리를 투어하기 위해 물색하다가 테일러(Taylor) 와이너리로 향했다. 입장료는 1인당 5유로. 이곳엔 이밖에도 샌드맨(Sandman), 그라함(Graham), 카렘(Calem), 오플리(Offley), 크로프트(Croft), 도우(Dow), 라모스 핀토(Ramos Pinto)등 유명한 와이너리가 많다. 테일러 와이너리 투어는 40여분 와이너리 역사, 특징, 재배 및 제조과정, 저장 중인 와인 종류와 특징 등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12월에는 1인당 입장료가 5유로였는데 최근 7유로로 올랐다. 투어를 끝내니 해가 져 캄캄하다. 저녁에 동루이스1세 다리의 2층에서 본 풍경은 오후 풍경과 사뭇 다르다. 아침 꼭두새벽에 점심을 과일과 과자로 때우고 정신없이 돌아다녔더니 시장하다. 도우루강변의 풍경이 놓치기 아까워서 히베리아지구 강변에서도 뷰가 좋은 레스토랑인 쉐라팡(Chez Lapin)으로 향했다. 쌀쌀하지만 운치있게 야외 테라스에서 포크를 잡기로 했다. 포르투갈은 테이블에 앉으면 웨이터가 쿠베르트(Cuvert)라고 불리는 빵, 올리브, 치즈로 구성된 세트를 갖다 놓는다. 에피타이저라 하기는 뭐하고 시장기를 달래는 식전 주전부리 음식이라 할 수 있는데 별도로 요금을 받으니 먹기 싫으면 놔두거나 치워달라고 하면 된다. 쉐라팡은 30년 전 요식업으로 시작한 가족기업 이시모의 대표적 레스토랑 중 하나다. 웨이터 추천을 받아 문어(Polvo), 대구(Bacalhau)로 조리한 포르투갈 대표적인 요리를 시켰다. 따근하고 양 많은 고품질 올리브오일 속에 오븐에 구은 감자와 신선한 해산물이 잘 어우러졌다. 식감이 부드럽고 충만한 풍미가 입가에 감돈다. 배가 고팠으니 한층 맛있게 느껴질 수밖에. 현지의 그린화이트와인(PLANALTO)과 함께 주문했다. 도우루강과 동루이 1세 다리의 풍경, 맛있는 음식에 매료되어 포르투의 하루 일정을 행복하게 끝냈다. 포르투는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푸근함을 간직한 도시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강변길에 ‘바르카스 다리(Ponte das Barcas)의 비극’이 빚어진 장소라는 동판이 보인다. 1809년 3월 29일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의 하중을 다리가 견디지 못해 무너졌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슬픈 얘기다. 아름다운 도시의 비극적인 사연이 그 아름다움을 깊게 한다.
2016-07-08 18:5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