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부암동엔 2개의 보물이 있다. 석파정(石坡亭)과 환기미술관이다. 기나긴 장마, 코로나블루로 우울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2주에 걸쳐 수요일 점심에 짬을 내어 가깝고도 먼 서울의 유니크한 숨은 명소 두 곳을 다녀왔다. 석파정에 들어서니 자하문 터널로 오가는 차량이 다니는 큰 길가 담벼락 너머 이런 곳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익히 별천지 같다는 명성은 20여년 전부터 들어왔으나 공사 때문에 두 번 허탕을 쳤던 이곳을 끝내 볼 수 있었다. 대로변 1층 입구동에서 표를 끊고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나와 실외로 첫 발을 디딘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탁 트인 공간이 열리더니 부암동 계곡물과 너럭바위, 고택(사랑채)과 노송(천세송)이 한눈에 들어왔다. 1990년 군인 시절 휴가 나와서 창덕궁을 관람한 것에 버금가는 경이로움이었다. ‘살아 있는’ 대원군 흥선이 장동김씨 영의정에게 빼앗은 욕심나는 비밀의 정원 石坡亭 석파정은 조선시대 영조 때 수원부사·한성판윤·형조판서를 지낸 오재(寤齋)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이 처음 만든 별서(別墅·교외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였다. 바위산인 인왕산 북동쪽 끝 기슭에 있다. 현재의 별서는 주로 19세기 중후반 영의정 김흥근(金興根 1796 ~ 1870)과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조성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철종 재위 시 당대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안동) 김씨 김흥근의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 三溪洞山亭)를, 아들을 왕위에 올린 ‘살아 있는’ 대원군 이하응이 1864년 빼앗아 석파산장(石坡山莊)으로 바꿨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에게 삼계동산정을 팔라고 종용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왕이 한번 자고 간 곳은 신성시돼 아무도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에 착안, 아들 고종을 하룻밤 머물게 함으로써 석파정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이는 권력이동의 상징이 됐다. 사랑채 위쪽 거북바위엔 ‘삼계동’이란 각자가 있다. ‘세 시냇물골’이란 뜻으로 부암동의 옛 지명이다. 석파는 ‘돌언덕’이란 뜻으로 석파정이 들어선 위쪽의 거대한 바위언덕을 말한다. 이하응은 바위언덕과 고택과 정자에 매료돼 호를 석파로 바꾸었고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이라 칭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이 한창일 때에는 흉배에 기린을 수놓았는데 실각 후에는 거북으로 바꿨다고 한다. 권력을 놓쳤으니 장수하겠다는 심리의 변화가 흥미롭다. 석파정의 건물들은 대원군 당시 8채였으나 지금은 안채·사랑채·별채·석파정 등 4개만 남아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별채와 여기로 들어가는 협문, 꽃담은 왕족의 권위를 말해준다. 사랑채는 주인이 외부 손님을 맞는 곳으로 이 곳의 중심부다. 사랑채 앞에는 650년의 세월을 이겨냈다는 천세송이 있다. 이 노송은 서울시 지정보호수 60호로 지정돼 있다. 별채는 고종이 방문해 잠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대원군 사후 종종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고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교차했을 것이다. 석파정을 관리하는 석파문화원은 이 곳을 ‘왕이 사랑한 정원’이라고 내걸었는데 사랑보다는 속세의 때를 씻어내고 회한을 달래는 공간이 맞을 것 같다. 흐르는 계곡물 위에 앉은 석파정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청나라 양식이 조화돼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됐다. 정자에 남아 있는 청나라풍의 문살 모양과 지붕, 정자로 건너가는 평석교(平石橋), 마루가 아니라 화강암으로 조성된 바닥 등은 이국적 취향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품어낸다.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로 불리기도 하는데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란 뜻이다. 석파정 들머리의 바위에는 ‘소수운렴암’(巢水雲簾庵)이라고 쓴 초서가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조정만에게 써준 글씨다. ‘물이 깃들고 구름으로 발을 드리운 집’이란 뜻이다. 장마 끝이라 제법 유량이 많았고 마침 백일홍과 수국, 맥문동 꽃도 피어 서울 도심의 뜬금없는 계곡 풍경이 이채로웠다. 들머리 너럭바위에는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이 앉아 있다. 본래 경주의 개인 소유 경작지에 있던 것을 수습해 2012년 이것으로 옮겨놓았다. 완만한 경사와 부드러운 곡선의 정감 있는 탑이다. 석파정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언덕바위는 ‘코끼리바위’, ‘소원바위’로 부른다. 코끼리 모양을 닮았고 사람들이 소망을 기원하는 곳이었다. 인왕산의 웅장함의 끝을 보이는 기가 센 바위다. 대원군 사후 고아원·병원에서 석파문화원(유니온약품) 소유 문화재 및 미술관 돼 … 국보 승격 준비고아원 석파정은 대원군 사후 50여 년간 후손들이 사용했다. 6.25전쟁 직후에는 고아원인 콜롬바어린이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잠시 병원으로 쓰이다가 개인 소유가 됐다. 2004년 12월 개인 소유자가 부채 10억원을 감당하지 못해 감정가 75억4600만원으로 경매에 내놨으나 두차례 유찰돼 감정가의 64%인 48억2900만원까지 떨어졌다. 1종 일반주거지역으로 지정된 1000여평을 제외한 나머지 약 88.9%의 부지가 개발제한구역과 문화재보호구역, 군사시설보호구역 등으로 묶여 있어 낙찰이 쉽지 않았다. 이에 2006년 1월 13일 의약품 유통업체인 유니온약품그룹의 안병광 회장이 익명으로 응찰해 감정가의 83%인 63억1000만원에 낙찰받았다. 안병광은 석파문화원을 설립하고 이 곳에 석파정 서울미술관을 개관했다. 여기에 자신이 평소 수집해온 이중섭의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안 회장은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출발, 자수성가했고 35억6000만원을 들여 이중섭의 ‘황소’를 사들인 것을 비롯해 명작 400여점을 수집한 컬렉터다. 이 미술관은 500평으로 삼성그룹의 리움미술관에 이어 두번째 규모다. 서울시립미술관(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관(소격동) 등은 국공립이지만 이곳은 사립이다. 지난 5월 6일 석파문화원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석파정’을 국가문화재로 승격시키는 절차를 시작했다. 석파랑, 소전 손재형이 일군 구한말 한옥 건축양식의 컬렉션 … 석파정 별당 이축, 지금은 한식당 석파정과 헷갈리기 쉬운 게 석파랑(石坡廊)이다. 석파랑은 본래 석파정의 별당이었다. 김흥근의 삼계동산정 별당 월천정(三溪洞山亭 別堂 月泉亭)이었다가 대원군 이하응의 석파정 석파랑(石坡亭 石坡廊)이 됐다가 허물어진 것을 서예가이자 동양화가인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 수습해 지금의 홍지동 세검정(洗劍亭) 삼거리에 옮겨 놓은 것이다. 개인 소유이며 현재 한식당으로 운영 중이다. 소전은 전남 진도 출신으로 홍익대 미대 교수, 국전 심사위원, 제4대·8대 국회의원을 지낸 거물이다. 소전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연구에 일가를 이뤘던 경성제대 교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1879~1948)가 ‘세한도’(歲寒圖)를 갖고 1943년 일본으로 귀국하자, 이듬해 거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스카의 집으로 100일간 문안하며 그림을 넘겨달라고 간청했다. 감복한 후지스카는 “결국 내가 졌다”며 돈도 받지 않고 세한도를 건넸다. 석 달 뒤 후지스카 집은 폭격을 맞아 그가 소장한 상당수 책과 자료가 불타버렸다. 극적으로 세한도가 살아남은 것이다. 세한도는 1958년 소전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자금이 필요하자 경매에 내놨고, 이를 개성 출신의 갑부인 손세기 씨가 사들였다. 지난 20일 손세기의 장남인 사업가 손창근 씨가 10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귀향 온 자신의 불우한 처지와 절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한도의 배경이 석파랑이란 설이 있다. 추사가 과거에 김흥근의 별서에 놀러갔다가 본 한옥과 정원의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림에 담았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석파랑은 1958년 소전이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본래 부암동에 있던 석파정 별당을 뒤뜰에 이축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앞쪽으로 돌출된 큰 방을 썼다. 난초를 그릴 때에는 대청을,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건넌방을 사용했다. 붉은 벽돌, 원형과 반원형의 창은 청나라풍의 건축 특징을 보여준다. 정면 툇마루의 난간과 고급스런 자재는 조선 후기 상류사회의 대표적인 별장 건축물임을 말해준다. 소전은 자신의 전문적 식견과 지위를 활용해 일제 강점기 김옥균 가옥·박영효 가옥·이완용 별장 등 유명한 한옥이 헐릴 때, 특히 덕수궁 돌담이 철거될 때 자재를 옮겨와 석파랑의 한옥이나 돌담 정원에 사용했다. 석파랑의 만세문(萬歲門)은 고종황제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에 세웠던 기념물이다. 중국의 천자나 황제만이 만세를 쓰고 그 제후국에 해당하는 조선 등은 천세만을 불러야 했으니 만세정은 정정당당한 독립국임을 알리는 상징물이었다. 벽돌 구조에 구름 사이로 불로초를 물고 나는 한 쌍의 학과 박쥐(박쥐 蝠, 복 福자와 동일한 의미를 담음) 문양으로 장식하고 기와지붕을 얹었다. 일제 강점기에 매각한 것을 소전이 사들여 옮겼다. 이 곳 본채(현재 한식당)는 순종황제의 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 씨의 옥인동 생가를 옮겨 중국풍 호벽을 치고 신라와 백제의 와당을 얹었다고 한다. 바로 옆 세검정은 1623년 김류·이귀·심기원·김경징 등이 모여 반정을 모의한 후 칼을 씻으면서 결의를 다진 곳이다. 반정군은 창의문(彰義門)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인조를 옹립했다.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이곳으로 옮겨 도성 방위와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케 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검정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다산 정약용은 청년 시절 세검정에서 비오는 날 폭포 떨어지는 풍경을 즐겼다고 한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리는데 4대문과 4소문 중 북소문(北小門)에 해당한다. 북대문(北大門)이 청와대 뒷산(白岳山)의 숙정문(肅靖門)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아방가르드 김환기 … 면 캔버스 위 유채물감으로 한국의 푸른 靑, 우주의 생동감, 따스한 그리움 표현 석파정 앞에서 남으로 올라가면 북악산과 인왕산의 성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시 왼쪽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른쪽 골목길 아래로 돌아들면 한국적 아방가르드 추상화가 김환기를 기념하는 환기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김환기(金煥基)는 1913년 2월 27일 전남 신안군 안좌도(옛 기좌도)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가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서 수학했다. 1948년부터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술학부를 만든 동양미술사학자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과 교유하면서 우리 고미술과 한국미를 새롭게 발견했다. 그가 표현한 산 중턱에 걸린 달, 길게 날아가는 학, 매화 긴 가지 등은 마치 예서체로 이미지를 간소화한 느낌이 난다. 둥글둥글한 백자항아리, 한국의 강·산·바다·구름, 고가구 등 전통기물 등은 푸근한 한국적 정서를 추상으로 시각화했다. 김환기는 1956년 파리로 떠나 4년간 머물렀다. 여기서 예술의 본질과 한국미의 재발견에 눈을 떴다. 한국의 푸른 빛깔(靑)과 서양의 블루(blue)가 다름을 깨달았고 모든 그림이 점의 파동이라고 규정했다. 1965년 이후엔 미국 뉴욕에서 부인 김향안 여사와 체류하며 그만의 색깔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경성시대, 파리시대, 뉴욕시대 중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진정한 독창성은 뉴욕시대에 재정립됐다고 말하고 있다. 1970년 김환기는 김광섭의 시구를 제목으로 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감동을 담화 전면점화(全面點畵)를 그린다. 필자는 추상화에 문외한이었지만 면 위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수화시학(樹話詩學)의 철학이 담긴 그림을 보면서 우주와 자연에 대한 동경, 고국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등이 빛과 색으로 울려옴을 느꼈다. 유화인데 동양화다운 고즈넉함이 묻어나왔다. 선명한 민족 정취를 세계인이 공감하는 추상화적 기풍에 담아낸 아방가르드가 숱한 그림에서 품어져 나왔다. 김환기의 부인인 김향안(金鄕岸)은 이상의 부인이었다. 오빠의 소개로 1936년 시인 이상(李箱)과 결혼했지만 3개월 만에 남편이 폐결핵으로 도쿄에서 사망하자 과부가 됐다. 7년 후 지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났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이 텄고 재회했을 때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미술관에 전시된 연애편지, 그 중 환기가 그린 삽화가 그려진 편지에 적힌 몇마디 문구가 담백하다. 김향안은 본명이 변동림(卞東琳)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김환기와 결혼하면서 옛 이름을 버리고 환기의 어릴 적 이름인 향안으로 개명했다. 김환기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겠다는 다짐이자 결혼 예물이었다. 내조의 끝판왕이었다는 향안은 문필가이자 미술평론가, 화가로 살았다. 1974년 남편이 작고하자 1978년 환기재단을 설립했고 1992년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열었다.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다. 김환기의 전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썼고 2004년 사랑하는 남편 곁으로 갔다. 부암동의 쌍별인 석파정과 환기미술관, 전통미가 물씬 풍기지만 한국 전통과 이국풍(중국과 서구)이 조화된 두 곳을 보고 코로나블루로 어둑해진 마음이 한층 밝아졌다. 석파정의 산책로에 적힌 짤막한 사랑의 문구와 김환기·김향안의 연예편지도 따스하게 남는 ‘8월의 크리스마스’ 서울기행이었다.
2020-08-21 19:26:55
서울 성북구는 이름 그대로 한양 성곽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종로구에서 삼청터널과 혜화로터리를 통해 성북구로 이어진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한북정맥(漢北正脈)으로 이어지고 의정부 북서부 어드메에서 한줄기는 수락산-불암산-아차산으로 흐르고, 다른 줄기는 도봉산-삼각산(백운봉, 인수봉, 만경봉)-북악산-백악산(청와대 뒷산)에 이른다. 또 후자의 일부는 인왕산-안산-노고산 등 서쪽으로 뻗는다. 성북구는 도봉산-삼각산-백악산의 북동쪽 동네다. 삼각산과 북악산을 잇는 잘록한 고개는 기운이 허해서 옛날 세검정 인근 총융청(摠戎廳)에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특별한 날을 잡아 백성을 동원해 일부러 흙을 퍼다 날라 돋워줬는데 ‘흙을 보충한 고개’라는 뜻으로 보토현(補土峴)이라 불렀다. 그런데 1971년 보토현 아래에 북악터널을 뚫어 강한 기운이 서울 장안에 두루 뻗치는 것을 막았다고 풍수학자들은 안타까워 한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인왕산의 살구꽃, 서대문 밖 서지(西池)의 연꽃, 동대문 밖 동지(東池)의 수양버들, 세검정 근처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 성북동천(城北洞天)의 복숭아꽃(桃花) 구경을 으뜸으로 꼽았다. 총융청의 한 주둔지가 성북동천 상류에 있어 이곳을 북둔(北屯)이라 했는데 일대에 복숭아나무가 많았다. 홍도동, 도화동, 복사동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지금의 성북동 일대다. 성북동천은 자하문 밖에서부터 지금의 성북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성북동천 상류에 자리 잡은 삼청각(三淸閣)과 대원각(大苑閣)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권력자와 기업 총수들이 은밀히 만나 정경유착(政經癒着)과 야합(野合)을 일삼던 요정(料亭)이었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음식점과 예식장으로 바뀌었다. 대원각은 소유주였던 기생 출신 김영한(1916~1999년)이 법정(法頂)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吉祥寺)라는 멋진 도심 속 사찰이 됐다. 김영한은 16살때 조선권번(朝鮮券番)에 들어가 춤과 노래를 배워 기생이 됐다. 월북시인 백석(白石 1912~1995년)과 사랑에 빠져 중국 전설 속 여인의 이름인 자야(子夜)라는 아명(雅名)까지 받았으나 백석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로 끝내 결혼하지 못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가 바로 김영한이었다. 김영한은 1953년에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내 사랑 백석’이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법정의 ‘무소유’에 감화된 김영한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法名)을 받았고 훗날 절 이름이 길상사가 됐다. 한양도성의 좌청룡(동쪽) 산줄기 언덕에는 승려시인이면서 독립지사였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년)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이 있다. 심우(尋牛)란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심우장 현판은 만해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년)이 썼다. 심우장에서 가파른 골목길을 슬슬 걸어올라가면 북정마을이다. 삼선교역에서 북정마을로 올라가는 마을버스도 있다. 지난 6월 1일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 소개된 곳이라 호기심에 가봤다. 한양도성 성곽 바로 아래에 비교적 평평한 고원 같은 마을이다. 방송에 참나무 장작구이 통닭집과 선잠빵이 소개돼 사람들이 북적거린다는데 정작 몇몇 주민들은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데 소란스러워지니 제발 조용히 다니라고 플랭카드를 붙여놨다. 다행히도 북정마을은 개발에 내몰리지 않고 예스러움을 간직한 채 지자체의 지원으로 예전의 정겨운 모습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심우장서 북정마을 올라가는 길에 비둘기공원이 있다. 1968년 11월에 발표된 김광섭 시인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고 읊고 있다. 산이 주택단지로 바뀌면서 다이너마이트, 불도저와 포크레인에 의해 허물어지고 원주민도 쫓겨나는 아픔을 그렸다. 성곽을 따라 쭉 걷고는 싶었으나 길이 끊어진 데가 있고 시간을 짧게 잡은 탓에 성곽 근처까지만 갔다가 하산했다. 청와대 뒷산의 숙정문(북대문)부터 혜화문(동소문)까지 이어져 있다. 심우장에서 큰 대로변 맞은 편에는 고택과 옛 예술인의 집터가 밀집돼 있다. 선잠단지(先蠶壇址)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던 선잠단(先蠶壇)이 있던 곳이다. 왕이 전농동(典農洞)의 선농단(先農壇)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親耕)을 행했다면, 왕비는 성북동 선잠단에서 누에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친잠(親蠶)을 주관했다. 서울 강남의 잠실, 잠원도 다 양잠을 장려했던 흔적이다. 선잠단 사이로 난 골목 안쪽에 있는 성락원(城樂園)은 철종(哲宗)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으로 알려져 있다. 의친왕 이강(李堈)이 별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됐다가 2008년 명승 제35호로 다시 지정됐다. 궁궐을 제외하고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전통정원이다. 전남 담양 소쇄원(瀟灑園), 전남 보길도 부용동(芙蓉洞)과 함께 ‘국내 3대 전통 정원’으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월간조선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사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황윤명(黃允明·1848~?·평해(平海) 황씨·평해는 경북 울진군 평해읍·호는 춘파(春播) 또는 해생(海生), 춘파유고를 남김)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20세에 내관이 되어, 30세에 종일품(從一品) 명례궁(明禮宮·덕수궁의 옛 이름) 대차지(大次知·재정책임자)를 역임했다. 그가 펴낸 ‘난운관법첩’은 추사 김정희 등 한국과 중국의 명필, 명적을 모아 놓은 것으로 고종이 외교사절에 선물하는 책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도 고종으로부터 이 책을 하사받았다.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황윤명이 지은 쌍괴당(쌍괴실, 쌍괴누옥 등으로 당시에 불림·지금의 성락원)으로 피신했고 감명을 받아 ‘일편단충’(一片丹忠)이란 친필을 내렸다. 앞서 MBC·한겨례신문 등의 보도에 따르면 영벽지와 오래된 수목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1950년 이후 새로 지어졌거나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또 소유자가 큰 빚을 지어 경매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시는 예산을 투입해 매입했고, 문화재청은 복원공사에 재정을 썼다. 더욱이 사적이나 명승 지적에 심사위원에 로비가 들어갔고 막후에 정치권력이 개입했다는 추측이 난무하다. 의친왕은 주로 안동별궁에 기거했고 그나마 성락원 내 거처는 1927년 12월 전소돼 문화재적 가치가 퇴색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연적 지형을 잘 이용한 별장으로 북한산 자락에서 흐르는 계곡물 흐름에 따라 앞뜰, 안뜰, 뒤뜰로 구분했다. 우선 상지(上池)와 그 옆의 송석정(松石亭)이 뒤뜰(後苑)이다. 가장 높은 지형(북쪽)에 있다. 남쪽 입구(山門)에 가까운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앞뜰(前苑)이다. 영벽지(影碧池)와 그 앞에 최근 복원된 사랑채 같은 가옥과 여기에 이어진 본재(本齊)가 안뜰(內苑)이다. 영벽지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서 기가 세어나가지 않게 지맥을 비보(裨補)한 게 용두가산이다. 쌍류동천 주위와 용두가산에는 수령이 200~300년이 되는 엄나무를 비롯해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뤄 내원(內苑)과 외부를 차단하고 있다. 영벽지는 북서쪽 암반에 계류가 고인 고요한 소(沼)다. 2008년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서쪽 암반에서 너비 5m의 거대한 너럭바위가 발견됐는데 장빙가(檣氷家·고드름이 매달려 있는 집)란 음각에 새겨져 있었다. 완당(阮堂)이라는 낙관이 달려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지에서 영벽지로 수로를 파고 물길을 모아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성락원은 올해 들어 지난 4월 23일부터 6월 11일까지 일시 개방됐다. 문화재이긴 하지만 개인 소유다. 복원 공사가 80% 정도 진척돼 내년 가을 쯤이나 정식 개방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자가 방문했을 때에는 징소리, 망치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으니 기약이 없다. 성락원은 첫 주인으로 알려진 심상응의 5대손 고 심상준 제남기업 회장이 1950년 4월 매입해 보존해왔다. 그런데 역사책에는 심상응이란 인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또한 의문이다. 1991년 심 회장이 작고하자 그의 며느리 정미숙 씨(鄭美淑· 정일형 의원과 이태영 변호사의 딸, 정대철 전 의원의 여동생)가 관장으로 있는 한국가구박물관이 성락원을 관리해왔다. 복원사업에는 2017년부터 올해까지 모두 27억원이 투입됐다. 한국가구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성락원은 박물관 안에 없으며 1.5km 떨어져 있으며 현재 성락원 관람은 예약받지 않고 가구박물관 관람만을 예약받는다’는 다소 짜증 섞인 듯한 안내문이 달려 있다. 어찌 보면 백성의 고혈을 짜내 지었을지도 모를 성락원인데 그나마 사유지가 돼 구경조차 어렵다는 게 씁쓸하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비밀의 정원’처럼 얼핏 공개된 성락원의 모습은 아름답다. 서울에도 이런 곳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작위적이면 어떠냐 ‘서정성’은 넘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든다. 한 번 직접 보고 싶다는 게 기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조판서가 아닌 내시가 지었으니 오히려 스토리텔링이 되고 희귀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인근에는 국내 국보와 보물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이 있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이 전 재산을 투척하여 건립한 사설 미술관이다. 시가의 몇 배를 주고, 당시의 기와집 수십~수백 채 값을 주고 일본으로 넘어갈 우리 문화재를 사들였다는 전설 같은 얘기는 유명하다. 이 곳에는 국보 70호인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原本)을 비롯한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무엇보다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겸재(謙齋) 정선(鄭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주옥 같은 그림과 글씨 등 5000여 점의 문화재가 살아 숨쉬고 있다. 간송미술관과 가까운 월북 작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고택은 1933년에 지어진 대지 396㎡, 건평 77㎡ 규모의 서남향 개량한옥이다. 별채 없이 사랑채와 안채가 합쳐져 있다. 이태준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당호(堂號)를 짓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하면서 소설과 수필을 쓰던 곳이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1921년 휘문고보(徽文高普)를 졸업하고, 1927년 11월 일본 상지대학(上智大學)을 중퇴하고 귀국해 문단에 등단했다. 1933년 박태윤ㆍ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조직해 동인활동을 계속했다. 문장강화(文章講話)라는 작문 지침서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지금도 필독서로 활용된다. 1946년 6월경 월북해 1953년 임화(林和), 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필의 향기는 간 데 없고 지금은 인기 있는 찻집으로 다향만 넘친다. 서울시가 2007년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한 성북동 9-21 소재 마포 최사영 고택은 여성 의류·뷰티 쇼핑몰 ‘스타일난다’를 세계 최대 프랑스 화장품회사인 로레알그룹에 6000억원에 매각해 화제를 모았던 김소희 전 대표가 지난 5월 96억6800만원에 매입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가옥은 대한제국 시기의 관료이자 광업·금융업·창고업 등에 종사한 재력가로 널리 알려진 최사영이 1906년 마포에 건립한 집의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최사영은 1929년까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성북동으로 이축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성북동천 일대에는 이종석 별장, 김용준·김환기 집터(노시산방), 김환기 집터, 염상섭 집터, 운보 김기창·우향 박래현(부부 화가) 집터, 조지훈 집터, 윤이상 집터, 최순우 옛집, 김광섭 집터, 오원 장승업 집터 등이 있다. 삼선교역에서 삼청터널로 넘어가는 자동차길이 예전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했던 제법 깊은 계곡을 복개한 것이라 한다. 그 남쪽과 북쪽의 마을들은 완연히 다른 생활상을 보여줬다. 한양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대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이었다. 반면 북악스카이웨이에 가깝고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부자와 권력자들의 대저택이 들어섰다. 1970년대 들어 상당수 재벌들이 목멱산(木覓山·남산) 남쪽 기슭인 한남동·이태원동으로 옮겨감에 따라 북쪽 마을 일부에 외국대사관과 대사관저가 들어섰다. 주한 앙골라·호주·네팔 대사관 외에 일본·중국·독일·멕시코·폴란드·카자흐스탄·포르투갈·노르웨이·우크라이나·그리스 등의 주한 대사 관저 등 50여개 공관이 외교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2019-12-16 12:13:19
서울 북촌 두 번째 탐구는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했다. 국군 기무사령부와 서울지구병원 자리였던 이 곳은 2008년 10월 기무사의 과천 이전, 2010년 서울지구병원의 삼청동 이전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분원이 됐다. 현대미술관은 과천관(1986년 개관)이 본관으로 서울관(소격동), 덕수궁관(석조전 서관), 청주관 등의 분원을 두고 있다. 사실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다. 예상대로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추상미술보다 구상미술이, 설치·행위 예술보다 정적·구체적인 예술이 좋은 취향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저 미술관이 주는 평안함, 군 시설이 민간의 문화시설로 변했다는 시대의 변화가 느껴졌다. 이 자리는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의 전신) 부속의원의 외래 진찰소로 쓰이다가 1933년 증축을 통해 철근콘크리트 3층 건물로 올리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이 됐다. 이후 1930년대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경성육군위수병원이 돼 해방 때까지 이르렀다. 해방 후 서울대 의대 제2부속병원이 됐고 1950년 12월 36육군병원, 1951년엔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복귀한 수도육군병원으로 운영 주체가 바뀌었다. 1971년 수도육군병원이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개편되고 서울 등촌동으로 이전하자 국군수도통합병원의 분원이 되었다가 1978년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정식 창설되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이 이 곳으로 실려왔고 당시 병원장이던 김병수 공군 준장이 사망 판정을 내리면서 한국 현대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당시 보안사령부(나중에 기무사령부,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개칭) 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 권력을 잡게 된 것도 다 이런 맥락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분관 조성 의견이 제기돼 2008월 7월 3일자로 서울지구병원은 국방부 직할에서 국군의무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됐고, 2010년 12월 17일 삼청동(구 교원소청심사위원회)으로 이전했다. 2013년 11월 드디어 기무사 터에 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섰다. 옛 서울지구병원 건물은 현재 현대미술관의 로비 및 휴게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지구병원은 국가원수 전용 병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전·현직 국가원수와 가족, 총리 및 장·차관급 정부 주요 공직자, 군 장성 등의 진료를 맡고 있다. 엄연히 군병원이라 서울 지역에서 복무하는 군 장병도 진료받으러 갈 수 있기는 하다. 아무튼 현대미술관 관람은 뒷전이고 자꾸만 10.26 사건의 무대였다는 생각만 자꾸 맴도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소격동은 서울지구병원이 제법 큰 넓이를 차지하는데 본래 조선시대에엔 소격서(昭格署)가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소격서는 도교의 상청(上淸)·태청(太淸)·옥청(玉淸) 등 삼청성진(三淸星辰)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맡은 관청이었다. 정통 성리학자는 소격서를 극렬하게 반대했고 일반 대중은 ‘기도의 신’으로 옹호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소멸됐다. 소격서터는 지금의 삼청파출소 뒤편(소격동 24번지)에 있다. 삼청동이란 동명은 제단인 삼청전(三淸殿)이 위치한 곳이란 의미로 붙여졌다. 삼청이 산과 물, 인심이 맑다 하여 붙여졌다고 하는데 삼청동에 가까운 역대 집권세력은 과연 인심을 맑게 하였는가, 탁하게 하였는가. 소격동 165번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뒤편(동쪽)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호인 종친부(宗親府)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 건물이 있다. 종친부는 종친의 관혼상제를 역대 왕의 계보와 초상을 봉안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옥첩당은 고위 관료의 사무실이었다. 1920년 일제에 의해 정독도서관으로 옮겼다가 2013년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이곳에는 화강암으로 틀이 만들어진 우물이 있는데 1984년 기무사에서 뜰 공사를 하다가 지하 3m에서 발견돼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인근엔 규장각(奎章閣) 자리도 있었다.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정치 혁신을 위하 중추 기구로 설립했으나 차츰 학술·문화의 부흥 동력으로 변모했다. 정조의 명으로 홍문관 대신 왕가의 세보(世譜), 어진(御眞), 어필(御筆), 칙령(勅令), 문서 등을 보관했고 구한말 규장각 및 홍문관이 폐지된 후 조선총독부에서 이들 자료를 관리하다가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 도서관으로 옮겼고 현재도 서울대 규장각에서 관리하고 있다. 시간이 어정쩡해서 11년만에 들러본 창덕궁, 역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궁전이다. 돈화문, 금천교, 궐내각사,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낙선재만을 둘러볼 수 있는 일반 전각관람과 부용지와 주합루까지 볼 수 있는 후원관람으로 나뉜다. 각각 성인 1인당 입장료가 5000원씩이다. 따라서 1만원을 내야 전부 볼 수 있다. 다른 궁궐에 비해 비싸다. 또 봄 가을 1년에 한 차례씩 여는 달빛기행(야간관람)이 무려 3만원이다. 1회에 100명 밖에 모집하지 않는 데다가 30분의 음악공연이 곁들여져서 그렇단다. 요금이 비싸다는 생각도 들지만 외국 여행가서 보니 유서 깊은 멋있는 포인트는 다 그 정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주합루의 화려한 불빛이 부용지에 비친 그 모습은 상상만 해도 대단할 것이다. 물론 사진으로야 봤지만 직접 보는 것은 다르다. 야간 개장의 문호를 더 넓혀 경쟁스트레스에 지친 한국인들이 문화적 에너지를 얻어가길 바랄 뿐이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태조 때 시작해 세종에 이르러 거의 완성됐고 1553년 명종 때 실화로 일부가,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피란가는 선조에 분노한 백성들이 방화해 전부가 소실됐다. 백성이 고의로 방화했는지 여부는 지금도 논란 중이다. 임진왜란 이후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1865년 4월 중건에 들어가 1868년 6월 말에 공사를 마쳤다. 경복궁의 유명무실함이 지속된 273년간 창덕궁이 사실상 정궁 역할을 했다. 확 트인 경복궁 부지와 아늑하게 담긴 창덕궁 경내를 비교하면서 산수와 잘 어우러진 궁궐의 미에 감탄하면서도 여기에 겹쳐진 역사의 한도 보게 된다. 창덕궁의 낙선재(樂善齋)는 이미 조선왕조의 권위가 실추된 헌종(1827~1849, 재위 1834~1849) 13년(1847년)에 왕이 후궁인 경빈김씨를 위해 어렵사리 지은 집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지은 것처럼 헌종은 표면적으로는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자신의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 낙선재를 건립했다. 아마도 꽤 신하들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헌종은 효현왕후(안동김씨)를 정비로 삼았으나 일찍 죽자 효정왕후(남양홍씨)를 계비를 들였다. 그럼에도 과거 3번째 왕비로 간택됐던 경빈김씨(광산김씨)를 끔찍하게 좋아한 나머지 후궁으로 들였고 자신과 경빈의 사랑채로 사용한 곳이 낙선재다. 바로 옆에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쓰게 하였다. 석복은 복을 내린다는 뜻이다. 이를 지켜보는 효정왕후의 심정을 부글부글 끓었을 듯하다. 하지만 경빈과의 사랑도 헌종이 승하하자 600일만에 끝났다. 헌종은 요즘말로 매끄럽게 생긴 훈남이어서 궁궐의 모든 궁녀들이 성은을 입으려 안달했다고 전해진다. 낙선재는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이 집무소로 사용하고,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영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1966년부터 1989년까지 기거했다. 사대부의 집처럼 단청을 하지 않고 단조롭게 지었다. 정감이 있는 집이나 거기에 서린 사연은 쓸쓸하다. 낙선재는 본래 창경궁에 딸린 부속건물인데 관람의 편의상 창덕궁이 관리하고 있다. 석북헌에 이어진 수강재(壽康齋)는 정조 9년(1785년)에 지어졌다.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壽康宮) 자리다. 순조 27년(1827년)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익종 추존)의 별당이었으며, 헌종 14년(1848)에 헌종의 할머니이자 효명세자의 어머니였던 순원왕후의 거처로 중수했다. 고종의 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옹주가 역경의 삶을 삶을 보내다 1962년 귀국해 1989년 7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고, 장례식도 여기서 치러졌다. 순원왕후는 자신이 안동김씨이면서도 헌종과 철종의 비를 안동김씨로 들였으니 왜 안동김씨가 세도가였는지, 그래서 조선이 왜 그리 무력하게 망했는지를 설명해준다.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풍양조씨)는 안동김씨와 대척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고종을 앉힌 인물이다. 형식적으로 고종은 신정왕후의 양자이다.
2019-12-12 14:20:56
서울에 25년 이상 정주하면서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지만 KBS의 인기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를 시청하다보면 의외로 생경한 곳이 많다. 서울시민이라도 자기가 사는 동네와 구를 벗어나면 살짝 이질적인 것을 느낀다. 아마 관심이 부족하든가, 걸어서 다니기보다는 차로 이동해서 그럴 것이다. 각박함과 형식적 인간관계라는 선입견을 갖는 서울에서 ‘아직도 이런 곳’을 발굴하거나, 근대화 이전의 서울 모습을 재발견하면 다시 서울이 좋아지고 동질감을 느낄 포인트를 찾게 된다. 서울의 북촌은 2001년 이후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해 ‘한옥 등록제’란 보존 정책이 시행되면서 한옥 재건축과 고급화 신축이 촉진됐다. 덕분에 빌라촌 난립이 멈춰졌다. 비록 주민들은 몰려드는 관광객의 소음으로 불편을 호소하지만 그나마 옛 서울스러움을 느낄 공간이 한 자락 남아 있으니 다행히 아닐 수 없다. 북촌은 가회동, 원서동, 계동, 재동, 삼청동, 팔판동, 화동, 소격동, 안국동, 송현동, 사간동 등을 일컫는다. 권세가, 명망가들이 종로나 청계천보다 북쪽인 이 곳에 모여 살아 북촌으로 불리었다. 그에 상대되는 개념이 ‘남산 딸깍발이’다. 벼슬길에 오르지 못해 몰락한 양반가들이 남산 기슭에 밀집했는데 여름이면 질척거리는 땅을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북촌의 핵심은 가회동이다. 과거 감사원, 보건복지부를 출입하면서 인근 음식점을 빈번하게 다녔지만 거의 8년이 지나 오랜만에 가보니 카페, 젊은층이 좋아할 디저트 전문점, 단품 음식점들이 럭셔리하게 들어서 있다. 업무 차 왔다갔다 했던 북촌의 일상과 여행객의 시선으로 보는 감흥은 사뭇 달랐다. 먼저 정독도서관에 가본다. 운 좋으면 저렴하게 주차할 수 있다. 이 곳은 옛 경기고가 강남으로 옮겨가면서 남은 학교 부지를 서울시교육청이 도서관으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 1900년 10월 3일 관립중학교로 개교한 게 모태이니 무려 119년의 유서 깊은 자리다. 학교 교정은 시민의 휴식처가 됐는데 중앙의 오래된 분수대와 물레방아, 등나무그늘, 장독대, 수령이 2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정겨움을 준다. 회화나무(괴화나무)는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행운을 부른다고 하여 조상들이 아꼈다. 국내에서 오래된 고목은 대개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왕버들 중 한가지다. 회화나무와 팽나무는 상대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라는 인식이 약하다. 은행나무나 소나무 위주의 가로수에서 벗어나 이들 두 수종을 확산시켰으면 한다. 그러나 주로 고궁, 옛 서원이나 사찰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더욱이 회화나무는 꽃을 많이 피워 벌들에게도 좋으니 밀원으로도 추천할 만하다. 정독도서관을 나와 북촌 한옥 밀집지로 향한다. 한옥은 많아도 막상 개방된 곳은 소수다. 그나마 백인제 가옥은 다른 한옥에 비해 넓기도 하고 우아하며 일본식·서구식 세련됨이 가미돼 힐링의 마음을 준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이라 경북·충남의 고택과 달리 실용적이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한 게 오히려 색달라 안구를 즐겁게 해준다. 창호지창 대신 거의 대부분 유리창으로 된 게 이를 말해준다. 백인제 가옥은 북촌 가회동의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북촌이 내려다보이는 2460㎡의 대지 위에 당당한 사랑채와 넉넉한 안채가 맞닿아 있다. 안채보다는 사랑채가 이 집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보통 사랑채는 안채와 떨어져 있지만 복도로 연결돼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양채가 일체화된 느낌을 준다. 사랑채는 손님 접대가 많았던 집 주인의 일상이 느껴진다. 안채는 평온하고 아늑하다. 장작으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제법 깊다. 연기가 덜 나게 하기 위함이다. 파티하기에 좋은 잔디 정원에는 옥잠화, 나리꽃 등 예쁜 꽃들도 피어 있다. 안채의 부엌에는 특이하게 지하실이 있다. 일제의 세계침략 기간 비행기 폭격에 대비해 지은 방공호 겸 창고다. 서울시에서 백인제 가옥을 시민에서 공개하기 전에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지하실에서 오래된 나무 궤짝이 발견됐다. 오래된 문화재인가 싶어 문화재 전문기관에 의뢰한 결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와인 상자로 판명됐다. 가이드는 “백인제 선생이 의사들과 사교하기 위해 와인을 즐겼고, 경제수준이 높았기에 당시로서는 꽤 고가였을 와인을 수입해다가 드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대문간채(행랑채)와 솟을 대문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위엄을 세운 듯 격조 있게 세워졌다. 별당채는 백인제 가옥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인생을 담담하게 관조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적한 분위기가 들어가보지 않았어도 마음에 휴식을 준다.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건립한 이래 한성은행, 최선익, 백인제, 최경진, 서울시 등으로 소유권이 바뀌었다. 최선익은 개성의 부호로 몽양 여운형을 후원했던 인물이다. 백인제는 인제대 백병원을 세운 창립자로 1940년대 당시 국내 외과 의사의 최고봉이었다. 1950년 6.25 동란에 납북돼 사망 시점은 미상이다. 서울시가 1977년 시 민속문화재 22호로 지정하고 2009년 소유권을 이전받아 2015년부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가이드가 안내하는 15명 안팎의 특별관람에는 비용이 든다. 가회동 한옥 투어로는 11번지, 31번지가 꼽힌다. 그러나 개별 한옥에 들어가지 못할 바에 굳이 다 둘러볼 이유도 없다. 그 압축판인 백인제 가옥을 아름답게 봤으니까 말이다. 북촌의 명소로는 안동별궁터(옛 풍문여고 자리), 윤보선 가옥, 이준구 가옥, 김형태 가옥이 꼽히지만 비개방이다. 북촌마을 관광안내소는 못 내 아쉽다면 북촌한옥청, 북촌전통공예체험관, 북촌문화센터에 가서 문화의 향기를 맡아보라고 추천했다. 안동별궁(安洞別宮)은 안국방(安國坊)의 소안동(小安洞)에 위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국동 별궁 정도가 되겠다. 별궁 자리는 세종이 1449년 아끼던 아들 영응대군을 위해 지어준 저택이 있던 곳이자, 1450년 자신이 세상을 떠난 곳이다. 효성이 지극한 문종은 아버지 세종의 장례를 치르며 여기서 즉위식을 올렸다. 1472년 성종이 그의 형인 월산대군에게 이곳을 하사한 이래로 대대로 대군이나 공주·옹주들의 저택 자리가 됐다. 진짜 안동별궁은 1881년 고종이 왕세자(훗날 순종)의 가례를 위해 지었다. 1882년과 1906년 당시 각기 왕세자와 황태자 자리에 있던 순종의 혼례의식의 일부인 친영례(親迎禮)가 이곳에서 행해졌다. 친영례는 왕비가 될 규수를 민가가 아닌 궁가에서 임시로 여는 결혼식이다. 대한제국 황실 인사 중 항일운동에 참가했던 의친왕이 1955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곳도 여기다. 한일합방 이후 상궁 등 궁녀들의 거쳐로 쓰였다. 1937년에 민영휘(휘문학원 설립자)-민대식(육군참령)-민병훈(감조관)-민덕기(조선맥주 사장)-민경현(풍문여고 교장) 가문의 민덕기가 안궁별궁 부지와 부속건물을 매입해 휘문소학교를 열었다. 1944년 민영휘의 부인인 안유풍의 여성인재를 양성하라는 유지를 받들어 풍문학원(풍문여고)으로 바뀌었다. 민씨 일가의 친일 행적 때문에 풍문학원은 ‘안유풍 독지가’에 의해 세워진 학교라고 얼버무리고 있다 하니 안타까운 사연이다. 1960년대부터 안동별궁의 원형이 차츰 훼손돼다가 2006년에는 충남 부여 국립 한국전통문화대학교(문화재 복원 특수 4년제 대학)로 그나마 남아 있던 경연당, 현광루가 이축됐다. 2017년 8월 문화재청이 안동별궁 옛 건물을 원래 위치로 복원하라는 의견을 냈으나 이행될지 의문이다. 풍문여고는 2017년 3월 서울 강남구 자곡동으로 남녀공학인 풍문고등학교로 개칭해 옮겨갔다. 현재 안동별궁 터에는 공예박물관이 지어지고 있다. 별궁터의 400년된 은행나무는 아직까지 잘 보존되고 있지만 소유자의 편의에 따라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옛 건축물들이 함부로 이전되는 것은 얼마나 한국의 문화의식이 가벼운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오후, 정독도서관 출발 무렵에는 빗방울이 간간히 내리더니 점차 날씨가 개어 백인제 가옥을 나올 무렵에는 화창해졌다. 북촌의 명품 디저트라는 팥 고로케를 아이들에게 사주고, 인근 카페에서 아이스커피와 팥빙수를 빅 사이즈로 시키니 어느덧 석양이 뉘엿뉘엿했다.
2019-12-09 11:5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