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고성군을 대표하는 절로는 금태산(金太山 해발 341m) 계승사(桂承寺)와 연화산(蓮花山 해발 528m) 옥천사(玉泉寺)가 있다. 계승사는 고성군 영현면 대법리, 연화산 줄기 서남쪽 금태산 자락 절벽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다. 신라 문무왕 15년(675년)에 의상대사(義湘 625~702)가 금태암을 창건했지만 사라졌다가 1963년 그 자리에 계승사를 신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이 절의 기반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수천 수만겹 퇴적 구조의 절벽이다. 절 마당 높은 축대도 가파른 계단도 퇴적암 판석들을 쌓아 올린 것이다. 시루떡처럼 쌓인 바위 속에 든 아득한 세월이 묻혀 있다.대웅전 요사채 앞 너럭바위에는 물결무늬의 화석이 존재하는데 1억년 전에는 이 곳이 거대한 호수의 얕은 물가였음을 말해준다. 흙바닥에 섬세한 물결무늬가 당시의 살랑거리는 물결을 연상케 한다. 계승사 보타전 앞의 홍매는 해마다 3월말에 요염하게 핀다.이 절의 지질층과 화석들은 1963년 옛 금태암을 이어받아 계승사를 창건하기까지 흙과 바위 더미에 묻혀 있었다. 절을 지으며 이런 소중한 유산들을 마구잡이로 파괴했다고 한다. 이 절의 약사전에 오르면 아득하게 펼쳐진 첩첩 산줄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경남 사천 쪽 와룡산(799m) 봉우리까지 한눈에 잡히는 명당 자리로 알려져 있다.계승사 기암괴석의 절벽 사이에 흘러 나오는 석간수(石間水)는 약수로 유명하다. 옛날에 석간수 자리에는 매일 부처님의 공양미(供養米)가 3되 2홉이 솟아 나왔는데 시봉행자(侍奉行者)가 욕심을 부려 공양미가 많이 나오도록 구멍을 키웠더니 그만 그날부터 공양미는 나오지 않고 석간수만 솟아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가 고려말에 산남도(山南道)로 내려왔다가 이 절에서 조선창업(朝鮮創業)의 꿈을 꾸고 잠시 수도하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금태산(金太山)이란 이름도 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명명이라고 전해진다. 다만 보타전 곁에 ‘모셔 둔’, 뒷산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커다란 바윗돌 ‘하심석’ 옆에, 절터에서 발굴했다는 반질반질하게 닳아빠진 오래된 맷돌들이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옥천사는 신라의 화엄종찰, 임진·정유왜란에는 호국사찰 계승사의 북동쪽,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건너 편에 연화산 옥천사(개천면 북평리)가 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이 창건하였다. 대웅전 뒤에 맑은 샘물이 나와 옥천사로 불린다. 연화사는 말 그대로 연꽃 같은 평안한 지형임을 말한다. 지금은 하동 쌍계사의 말사(末寺)이지만 문무왕 당시에는 화엄종찰로 지정된 화엄 10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임진·정유왜란 때는 구국 승병의 군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호국사찰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그 때문에 일본군에 의해 불타는 운명을 맞기도 하였다. 옥천사는 1700년대에는 이전에 비해 훨씬 큰 규모로 중창됐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건물인 옥천사 자방루는 중보에 그려진 비천상과 비룡상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듯 생동감 있다.대웅전으로 오르는 돌층계 옆에는 탐스러운 불두화가 봄을 기다린다. 전각들 중에서 한 명이 겨우 들어가 좌정할 수 있는 크기의 독성각, 산령각이 이채롭다. 불편함을 통해 제행무상을 깨닫게 하려는 수도자의 정신이 담겨 있다. 옥천각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유물 전시관인 보장각으로 간다. 보장각에는 옥천사로 입산한 근래의 뛰어난 선승인 청담 스님의 영정이 안치돼 있다. 1911년 일본 총독부는 사찰령을 제정해 왜색불교를 침투시켰다. 해방이 됐어도 왜색불교가 대세를 이뤘다. 1954년부터 청담 스님은 이를 바로잡고자 동산·효봉·금오 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을 시작했다.청담 스님은 “성불을 한 생 늦추더라도 불교 유신을 달성하겠다”며 정화불교운동을 선도했다. 1971년 11월 15일 서울 도선사에서 입적했다. 법정 스님은 그의 수제자로 애도문을 남겼다.공룡 발자국 화석은 고성 상족암뿐만 아니라 연화산 도립공원 안 옥천사 들머리 주차장 옆 물길에서도 만날 수 있다.산벚꽃 지고 열흘 후면 녹차 수확 … 2만명 녹차밭 비밀정원 ‘만화방초’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벽방산(碧芳山, 해발 650m) 중턱에는 만화방초(萬花芳草)라는 개인 정원이 있다. 주인장인 정종조 씨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밤 따고 젖소 키우던 곳에 녹차밭을 조성해 ‘비밀의 화원’처럼 조성한 곳이다. 부산에서 무역업을 크게 하다가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스트레스를 잊으려 고향 땅의 아까시 나무를 캐내고 녹차밭을 일궜다. 산중수도한 덕에 사업은 다시 풀려나갔고 돈을 버는 족족 농장에 털어넣었다.동백나무는 충청도에서, 단풍나무는 전라도에서, 들꽃은 산과 들에서 얻어왔다. 외환위기 후 10년간 일주일의 반은 부산에서, 나머지 반은 농장에서 보내며 정원을 가꾸다가 2007년에야 일반인에 만화방초를 공개했다.만화방초의 차밭은 약 2만 평에 달하지만 소량만 수확한다. 비료나 농약을 안 쓰는 100% 자연산이기 때문에 품질은 최고를 자랑한다. 3년에 한번만 거름을 줘 야생녹차의 원기가 살아 있다.정사장은 녹차밭에 산벚나무를 심었다. 화사하기로 따지면 왕벚꽃이 낫지만 자연미는 산벚꽃을 못 따라간다. 향도 산벚꽃이 더 짙고 깊다. 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고 꽃이 차 수확 시기를 알려준다. 만화방초의 첫 차 따는 시기는 매년 벚꽃 지고 10일 후다. 밭고랑 사이에는 꽃을 심었다. 벚꽃이 지면 영산홍, 그 다음에는 금낭화, 가을에는 상사화가 피어난다. 꽃이 한창일 때는 푸른 차나무 한 고랑, 붉은 꽃 한 고랑이 교대로 산비탈을 물들인다. 이 곳의 수국 꽃밭, 나리 꽃밭, 수련 연못, 편백나무 숲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웬만한 식물원을 방불케 한다. 특이한 색깔의 산수국이나 수련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명물들이다.
2023-01-19 20:40:23
언제부턴가 경남 고성하면 ‘공룡의 고장’으로 각인됐다.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바닷가에는 푸른 남해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몽돌해변과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기암절벽과 계곡이 어우러진 극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펼쳐진다. 고성 상족암(床足岩)은 바위의 모양이 마치 밥상 다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해면의 넓은 암반과 기암절벽들이 계곡을 형성한 자연경관이 그야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인간의 상상력의 범위를 넘어선 자연과 시간이 빚은 창작품이다. 1982년 상족암 부근 해안에서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발자국 화석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덕명리(중심지, 서쪽)에서 상족암-촛대바위-군립공원-제전마을(덕명리의 동쪽)까지 6km에 걸쳐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들의 2000여 족적이 선명하다. 파도가 야금야금 깎아 먹은 해식애(海蝕崖)가 시루떡을 켜켜이 쌓은 듯하다.고성 공룡화석지는 두 발로 걷는 공룡과 네 발로 걷는 공룡 등 수 백 개에 달하는 여러 종류의 공룡 화석이 한 장소에서 발견돼 캐나다, 브라질과 더불어 세계 3대 공룡 유적지로 꼽힌다. 혹자는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와 더불어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지라고도 칭한다. 상족암군립공원은 1999년 천연기념물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1억5000만 년 전에 호숫가 늪지대였던 상족암 일대는 공룡들이 집단으로 서식해 발자국을 남겼다. 그 위로 퇴적층이 쌓이면서 암석이 되고, 그 뒤 지층이 솟아오르며 퇴적층이 파도에 씻겨 나가면서 공룡의 발자국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해안가를 따라 길게 놓인 데크길을 따라 공룡발자국 화석을 찾아 나서 보자.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한 남해 바다에서는 차가운 겨울바람마저도 상쾌하게 느껴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병풍바위를 벗 삼아 데크길을 걸으면 중간중간 ‘공룡발자국화석지’ 안내판이 나온다. 암반 위에 주먹만 하게 움푹 팬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동그란 모양도 있고 깨진 별 모양도 보인다. 신기하게도 패인 자국들은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실체는 없지만 바로 내 눈앞에서 거대한 생물체가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듯하다. 공룡들이 살고 있던 시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력을 1억 년 전으로 돌려놓아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공룡이 들려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무 데크가 끊기는가 싶더니 거대한 코끼리 다리 모양의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 유명한 ‘상족암’이다. 거대한 바위 사이로 비밀의 문처럼 좁은 틈이 있다. 한번 그 틈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다. 바위 아래서는 바닷물이 먹잇감을 노리는 뱀의 혀처럼 쉼 없이 날름거린다. 이곳은 ‘핫플’로 등극한 ‘인스타그램’ 성지다. 동굴 안쪽에서 바다를 향해 셔터를 누르면 환상적인 인생 숏을 얻을 수 있다.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에 맞춰 상족암에 가야 이 모든 것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공룡에 관심이 많다면 인근 고성공룡박물관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박물관에 가면 공룡의 탄생부터 멸종까지 모든 역사가 한눈에 펼쳐진다. 국내 최초의 공룡전문박물관으로서 공룡 진품화석 7점을 비롯해 복제화석과 모형공룡 등을 통해 공룡의 생태를 보다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 박물관 외관은 고성 상족암 일대에 많이 서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구아나돈의 몸체와 크고 작은 공룡 알을 겹쳐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광장에는 세계 최대 높이(24m)의 공룡탑과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시실에 마련된 다양한 종류의 공룡 골격들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또 공룡퍼즐, 공룡과 달리기코스, 3D 영상실 등 어린이들이 공룡과 친숙해질 수 있는 공간이 체험학습장소로 인기다. 고성의 진짜 아이콘은 공룡 이전에 ‘오광대 탈춤’ 고성의 진정한 아이콘은 공룡이 아닌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라 할 것이다. 고성읍의 군립 고성탈박물관에는 입구에 수십 개의 장승이 서 있다. 오광대 탈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탈이 전시돼 있다. 고성오광대 놀이는 문둥이춤 · 오광대춤 · 중춤 · 비비춤 · 제밀주춤 5마당으로 이뤄져 있다. 양반 계층의 위선과 형식에 치우친 윤리를 익살과 해학을 통해 조롱함과 동시에 서민 생활의 고달픔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민중극이다. 경남 합천이 발원지이며 1900~1920년에 통영오광대·창원오광대의 영향을 받았다. 고성 읍내의 북촌파와 남촌파라는 풍류 모임이 있었는데 각각 부유한 선비층과 서민층이 주도했다. 농악 위주의 남촌파가 시와 고전악기를 즐기던 북촌파의 분위기를 흡수하면서 1920년대부터 지금 전래되는 모습으로 굳어졌다고 전한다. 탈춤에는 해학적이지만 민중의 서러운 정서가 어디에나 담겨 있다. 초록빛 자연을 체험하는 참다래마을고성읍에서 서남쪽으로 22.5km 떨어진 하일면 송천리의 참다래마을에 가면 전국 최고 품질의 참다래를 맛볼 수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참다래는 자연에서 채취한 산약초와 천혜녹즙, 미네랄이 풍부한 해초류, 한방영양제 등 40여가지의 천연비료로 재배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고성 참다래는 당도가 19.5 브릭스로 일반 참다래(17 브릭스)보다 높다. 참다래는 한마디로 중국 원산의 다래과 식물의 일종이다. 키위는 뉴질랜드 식물학자가 중국 원산 참다래를 개량해 만든 품종으로, 생김새가 뉴질랜드의 국조라는 키위새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7년 국내에 뉴질랜드산 참다래 묘목이 도입된 이래 경남 고성을 비롯한 전남과 제주 일대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다. 1990년대에 수입산 키위와 구별하기 위해 ‘참다래’란 이름이 처음 붙여졌다. 뉴질랜드산 키위가 널리 알려진 탓에 아직도 참다래를 수입과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국산 과일이다. 참다래와 한국 토종다래는 엄연히 다르다. 토종 다래는 더 작고 당도가 떨어지고 과육이 모자라며 본래 야생이다. 참다래는 1~2월 가지치기를 시작해 5월말~6월초 개화, 9~11월 수확한다. 바나나와 마찬가지로 수확 후 숙성 과정을 거쳐 먹는 후숙 과일이다. 충분히 숙성된 11월에서 3월에 가장 달콤하고 판매가 집중된다. 고성의 참다래마을 농민들은 “고성 참다래는 충분한 일조량과 바닷바람, 따뜻한 기온 등 천혜의 자연조건과 친환경 농업기술로 재배돼 전국 최고의 품질과 맛을 자랑한다”고 말한다. 남해안 청정수역에서 잡히는 도다리는 고성의 대표 먹거리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다리는 3~5월 봄이 제철인 생선이다. 도다리가 봄에 맛있는 것은 생선이 담백하기 때문이다.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인 볼락(우럭을 조피볼락이라 함)과 신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최고의 별미다. 쑥을 듬뿍 넣어 끓인 도다리쑥국은 겨우내 잃어버린 식욕을 되찾아준다.
2023-01-18 18:43:19
한국에는 같은 지명을 가진 지역이 4곳 있다. 경기도 광주(廣州)와 전라도에서 갈라져 나온 광주(光州)광역시, 강원도 고성(高城)과 경상남도 고성(固城)이다. 강원도 동해 최북단에 있는 고성은 높은 성을 뜻하는 반면 경남 남해 최남단의 고성은 견고한 성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두 지역은 역사 및 문화 면에서 전혀 다르다.경남 고성군은 북동쪽으로는 창녕군과 창원시, 서쪽으로는 사천시, 남쪽으로는 통영시, 북서쪽으로는 진주시와 접해 있다. 이 중 통영군과 가장 교류가 많으며 국회의원 선거구 역시 통영과 묶여 있다.모든 도시들은 저마다 고유한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더러는 소멸하고, 더러는 살아남아 ‘국가’를 이루며 발전해 왔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그런 방식으로 ‘헤쳐 모여’를 반복하였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에는 그 지난한 ‘탄생과 소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혀 있다. 운이 좋으면 공기 중으로 끌어 올려져 빛을 보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리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저 깊은 땅속에는 짐작할 수도 없는 ‘오래된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는 주로 ‘삼국’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경남 고성, 김해, 함안, 경북 고령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대 가야 고분군과 마주하게 되면 일종의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들 고분군은 ‘천년 신라’에도 ‘백제’에도 속하지 않는 ‘가야국’의 유산이기 때문이다.가야국에 대한 연구는 2017년 대통령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이 포함되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우선등재 대상으로 선정된 가야고분군은 정부가 정식 세계유산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는 문화유산이다. 경남 고성군은 삼한시대에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자국)의 본토였으며 고성읍은 소가야의 도읍지였다. 1세기 무렵 낙동강 서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가진 소국들이 등장했다. 후에 이들이 발전해 여러 가야국이 됐다. 3세기 경 지금의 고성에 둥지를 튼 고자국은 고사포국, 고차국 등으로 불리며 남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에 해상 세력으로 등장했다. 5세기 고자국은 인근 해상 세력을 규합해 ‘소가야국’을 세우고 교역 및 운송의 중심 역할을 하며 번영했다.그러나 가야국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고 신라에 흡수됐다. 가야국의 고유한 문화나 삶의 방식은 어떠했을까. 가야국은 언제쯤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가야국의 멸망 이후 가야국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았을까. 100% 신라인들에게 동화됐을까. 정리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질문을 머릿속에 구겨 넣고 송학동 고분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어떤 실마리가 찾아질지도 모른다.김수로왕의 막내 김말로가 세운 소가야, 송학동 고분군고성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6형제 중 막내인 김말로(金末露)가 세운 소가야의 옛땅이다. 말로왕 때부터 이형왕에 이르기까지 아홉 임금이 461년 동안 다스린 부족국가가 있었던 곳이다.고성읍 송학동(송학리) 고분군(사적 제119호)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구릉지대에 부드럽게 솟아 있다. 외견상 다른 고대국가들의 고분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주의 오름이나 경주 대능원을 축소해 옮겨온 듯도 하다. 소가야국의 왕과 지배계층들의 무덤인 송학동 고분군은 모두 3개의 구릉에 나뉘어 조성되어 있다. 총 7기의 무덤 중 구릉 정상부에 있는 무덤이 1호 분이다. 무덤군 중 가장 이른 5세기 후반에 축조됐고, 규모도 가장 크다. 돌무덤방을 만든 뒤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이다. 나머지 무덤들은 1호 무덤을 보호하는 딸린무덤이다. 옆으로 6세기 전반에 축조된 2, 3호가 위치해 있으며, 좌우 능선에 보토문 8기가 있다.고분군 앞쪽으로는 도로가 지나고 뒤편으로는 구도심 거리가 펼쳐진다. 고분 사이로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 주민들은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왁자지껄 고분군을 지난다. 송학동 고분군에는 마치 산 자들의 공간과 죽은 자들의 공간 사이에 어떠한 경계도 없어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산책로 꼭대기에 이르면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짧은 겨울 해는 봉분 사이로 몇 번의 자맥질을 하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안내문에는 이들 ‘고분군이 봉분을 먼저 쌓고, 쌓은 봉분을 다시 파내어 석곽이나 석실을 축조하는 분구묘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당시 백제나 일본에서 유행하던 무덤 축조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며 ‘고분들에서 발견된 일본과 백제의 토기 그리고 신라의 청동 그릇과 마구 등을 통해 소가야가 백제와 일본의 중간에서 해상 교역의 창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송학동 고분군이 축조된 방식이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더 궁금하다면 고분군 아래쪽에 건립된 ‘고성박물관’을 방문하면 된다. 고성박물관은 고성 송학동 고분군 사적 발굴 및 보존을 위해 2012년 5월 17일 개관했으며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고성박물관의 외관이 매우 이색적이다. 향로 모양 같기도 하고, 모자처럼도 보인다. 앙증맞기도 하고 고풍스럽기도 한 외관이 딱 향토박물관에 어울린다.박물관 내부도 무척이나 꼼꼼하고 알차게 구성돼 있다. 1층은 안내창구와 문화해설사 대기실과 북카페, 체험학습실,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본 전시실은 2층에 있다. 1층에 대형 스크린을 통해 고성의 가볼 만한 곳들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어 처음 방문한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전시물은 고성이 3세기경부터 ‘변진고자미동국’, ‘고자국’ 등으로 불리다 신라 경덕왕 16년부터 한자음화된 ‘고성’으로 굳어졌다고 소개한다. ‘단단한 성곽의 도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듯 고성 남산과 만림산에는 20여 개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2층 로비에는 송학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철갑옷과 투구를 재현해 실물 크기로 재현한 소가야국의 기마무사상이 서 있다. 말위에 올라탄 기사를 통해 가야국 무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고분을 조성하는 과정이 미니어처로 재현돼 가야국의 분묘 문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 다양한 형태의 토기와 검 등 유물들이 다량 전시돼 있다. 발굴 과정을 기록한 아카이빙관도 흥미롭다. 고성과 가야국에 대한 자료가 총망라돼 한 번쯤 방문할 만한 곳이다. 2023년 5월 31일까지 ‘고성박물관 10년의 기억전’이 열린다.한려수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문수암고성군 상리면 무선리에 위치한 무이산(武夷山 해발 546m)은 삼국시대부터 해동의 명승지로 유명하며, 국선 화랑들이 무예를 연마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무이산 정상 아래에 신라 성덕왕 5년(706) 의상조사가 창건한 문수암(文殊庵)이 자리하고 있다.문수암의 창건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남해 금산의 보광사로 기도하러 가던 의상대사는 고성 무선리의 한 촌락에 머물게 됐다. 그날 밤 의상대사의 꿈속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내일 아침 걸인을 따라서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 찾아가 보라’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날이 밝으니 노승의 말처럼 걸인이 나타났다. 의상대사는 걸인을 따라 무이산에 올랐다. 무이산 중턱에 다다라 주변을 둘러보니 아래로는 바다와 수많은 섬들이 떠 있고,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는 다섯 개의 바위가 오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마치 오대산처럼 보였다.이때 걸인이 오대를 가리키며 ‘여기가 내 침소다’라고 말을 하자 갑자기 또 한 명의 걸인이 나타나더니 둘이 손을 잡고 바위 틈새로 사라졌다. 의상대사가 걸인들이 사라진 틈새를 살피니 걸인들은 이미 보이지 않고 석벽 사이에 문수보살상이 보였다. 의상조사는 꿈속의 노승이 관세음보살이고 두 걸인이 문수와 보현보살임을 깨닫고는 문수암을 지었다.전국이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탓인가. 문수암 가는 길은 적막했다. 한파의 영향이 우리나라 최남단 고성의 무이산까지 영향을 미쳤나 보다. 기온은 분명 영상인데도 무이산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살이 아플 정도로 살 속 깊이 파고들었다. 겨울철 계곡의 바람이 바다의 습기를 만나면 이렇게 독해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다행히 문수암 코앞까지 포장도로가 나 있었다. 그때의 그 안도감이란.그렇게 찾아간 문수암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고즈넉한 암자들에 울려 퍼지는 망치 소리는 아무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한창 작업 중인 기사에게 물으니 주차장을 짓는 중이란다. 속세를 벗어난 깊은 산속의 수행처에서까지 편리함을 고집하는 행태에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느껴지지만, 그만큼 문수암을 찾는 이가 많다는 방증이리라.주차장 공사 현장을 지나 암자로 오르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순간 이 세상의 풍경이라고 믿기 어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끝이 없이 아늑해 보이는 남해 바다와 바닷속에 보석처럼 송송 박혀 있는 섬들… 어째서 의상대사가 이곳에 지체 없이 문수암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라도 이 선경을 보았다면 무심코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고 했던가. 그림 같은 한려수도의 풍광에 홀려 문수암은 뒷전이다.겨우 눈길을 거두고 문수암을 바라보니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전각이 까마득하게 올려 보인다. 문수암에서 처음 대면하는 전각은 천불전이다. 시멘트로 지어진 건물에서는 특별한 감동을 느낄 수 없다.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대웅전(문수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2022년 12월 31일까지 증축 불사가 진행 중이라는 안내문에 막혀 법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대신 임시 법당이 운영 중이다. 대웅전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관음전과 독성각이 있지만 역시 공사 중이라 출입할 수 없다. 허무함이란 분명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의상대사를 문수암으로 이끈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사라진 석벽을 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니 문수암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하다.천불전 맞은편에는 사리탑과 전망대가 있다. 1973년 이곳에서 수도한 이청담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 또한 절경이다. 산봉우리들이 물결처럼 펼쳐지는가 싶으면 물결 사이로 섬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산인지, 바다인지, 산봉우리인지, 섬인지 좀처럼 구분할 수 없다. 순간 무념무상 상태가 된다. 원래 이 세상은 형체도 이름도 없이 그저 존재할 뿐임을, 모든 집착과 망상은 분별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멀리 봉우리 정상에 거대한 불상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보현사 약사전의 약사여래상이다. 문수암과 보현사가 거의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보현사 약사전은 문수암에서 차로 3~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보현사 약사전은 높이 13m에 달하며 동양 최대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보현사에서 마주 보이는 문수암이 또한 절경이다.문수암에서 머물렀던 짧은 시간은 마치 산과 바다 위로 펼쳐지는 불국정토에 잠시 머물렀다 온 듯하다. 문수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무이산과 고성 하일면 자란만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특히 문수암은 새해 첫날 해맞이 행사가 열릴 정도로 일출 모습이 빼어난 곳이다. 새해 첫날의 일출을 놓쳤다면 설날 일출은 문수암에서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고성군의 바다풍경 구경은 고성읍 동쪽의 거류면 당동만도 빼놓을 수 없다. 거류산 정상, 그게 어렵다면 중턱 전망대까지만 올라가도 활짝 트인 당동만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은 가을 풍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누런 벼와 파란 바다의 어우러짐이 시(詩) 같다고. 거류산(巨流山 해발 570m) 전망대에 오르려면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장의사(藏義寺)를 지나야 한다. 고성읍내 남산공원에서도 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다. 3월말이나 4월초면 백목련이 흐드러진다. 하이면 바닷가의 높이 120m의 화력발전소 전망대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주말에 단체로 예약하면 일부 시설을 견학할 수 있다. 고성 앞바다의 사량도와 남해군 창선도, 서쪽의 삼천포대교가 두루 한눈에 잡힌다.시루떡 같은 판석으로 쌓은 돌담이 아름다운 학동마을 고성읍의 송학리(송학동)와 다른 서쪽 하일면의 학림리(학동)이 있다. 350년 전 형성된 전주 최씨 안렴사공파의 집성촌이다. 임진왜란의 여파가 잠잠해지기 시작한 1600년경 처음 들어섰다. 한 때 150여세대가 모여 살 정도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50여세대 100여명의 주민들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백학포란지형’으로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이 학이 마을을 감싸 안은 듯한 마을이다. 마을의 볼거리는 아늑한 고택들과 이를 굽이치듯 보호하고 있는 돌담길이다. 2006년 6월 국가등록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된 학동마을의 돌 담장은 마을 뒤 수태산에서 채취한 두께 2~5cm의 납작돌과 황토를 결합해 바른 층 쌓기로 만들어졌다.돌담은 모두 얇은 판석들로 쌓아져 있다. 기와를 전혀 쓰지 않고 덮개돌(개석)까지도 판석으로 덮은 돌담은 전국에서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출토되는 황토에는 골재 성분이 많이 포함돼있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사리 무너지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담장의 맨 아랫 부분엔 판석만을 평평하게 쌓고, 그 위로는 황토를 섞어 쌓고 중간중간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을 강담이라 하는데, 바람을 통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바닥이 판석인 것은 비가 와도 물에 젖지 않게 위함이다.돌담을 따라가면 전주 최씨 11대 종가인 최씨 고가(지방문화재 제178호)가 나온다. 현 소유자인 최영덕씨의 5대조인 최태순 선생이 고종 6년(1869년)에 지은 한옥이다. 안채, 익랑채, 곳간채, 대문간채, 사랑채 등 5채의 건물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예스러운 양반가옥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최영덕 고가(매사고택) 뒤뜰 텃밭에는 우물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두꺼운 덮개돌을 덮어놨는데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장수·부귀·자손번성을 바라는 뜻이면서, 천·지·인의 뜻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구멍을 통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렸는데, 지금은 펌프로 물을 끌어올린다. 사랑채 옆 250년 된 토종 동백나무는 3월이면 붉은 꽃을 활짝 피운다. 선비들의 정신을 맑게 해준다는 회화나무, 두 나무의 가지를 서로 이어놓은 연리지 모과나무도 있다.학동마을 들머리는 봄이면 살구나무와 목련 덕분에 환하다. 100년쯤 된 살구나무는 분홍빛 꽃송이들을 뭉게뭉게 피워 올린다.
2023-01-17 17:41:19
삼천포 시내의 주요 관광지를 걸어서 둘러봤다면 이젠 하늘 위에서 사천 바다를 감상하는 것도 각별한 재미다. 사천바다케이블카는 사천시 동서동의 작은 섬인 초양도(草養島)와 대방동 각산(角山, 삼천포항을 서남방향으로 둘러싼 산)을 오간다. 산-바다-섬을 잇는 2.43km 길이의 짧지만 다채로운 코스다. 대방정류장에서 출발한 케이블카는 보따리를 풀어 놓듯 삼천포대교와 실안해안도로와 초양도와 늑도(勒島) 등 푸른 다도해 풍경을 선물처럼 눈앞에 펼쳐 놓는다. 눈동자가 케이블카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이 케이블카가 초양도 정류장에 닿는다. 초양도에는 아라마루 아쿠아리움, 배 전망대, 동물원, 카페, 편의점 등 볼거리와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아라마루 아쿠아리움’에서는 인어로 불리는 매너티와 공룡의 후예 슈발, 초대형 하마 등 400여 종의 희귀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 설치된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대왕고래 뼈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통합 승차권을 구매해 아쿠아리움과 동물원 등을 돌아볼 것을 권한다. 배 전망대에 서면 삼천포 대교와 인근의 섬으로 오가는 유람선과 고깃배들이 지나가는 평화로운 다도해 풍경을 지척에서 감상할 수 있다. 초양도 탐방을 마쳤다면 이번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각산으로 향한다. 해발 408m의 각산 정상에는 각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고려 때 설치된 봉수대는 남해 창선도 대방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서 용현면 안점산 봉수대와 공양면 우산 봉수대로 연결했다고 한다. 봉수대 옆 군영 막사가 복원돼 있다. 각산 전망대에 올라서면 사천만 맞은편에 별주부전의 무대가 되는 ‘비토섬’(비토도, 飛兎島, 서포면 비토리)이 보인다. 서포면에서 연륙교(비토교)로 이어져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으며 별주부전테마파크, 비토국민여가캠핑장, 비토섬콘도미니엄 등이 조성돼 최근 핫한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5개섬을 징검다리로 연결한 ‘창선·삼천포대교’ 창선·삼천포대교는 2003년에 4월에 개통됐다. 남해군 창선면과 사천시 삼천포(대방동) 사이의 5개섬을 징검다리처럼 연결한 총 3.4km의 다리다. 창선면을 기점으로 남해도(본도), 무인도, 늑도, 초양도, 모개도가 연달아 이어져 있다. 낮에는 한려수도의 쪽빛바다를 볼 수 있다. 밤에는 교량에 설치된 오색의 조명과 어선의 불빛이 겨울바다 풍경을 빚어낸다. 1973년 남해군 설천면의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연결하는 남해대교가 국내 최초의 현수교로 수학여행 관광지가 됐다. 미국의 금문교를 축소한 모양이라고 칭찬받았다. 지금은 삼천포대교를 비롯해 인천대교, 이순신대교, 광안대교, 영종대교, 서해대교 등 큰 다리가 즐비하다. 그럼에도 삼천포다리의 범선 같기도 하고 옹기종기 이야기하는 모습의 다리는 정겹다.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 봉명산 다솔사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鳳鳴山) 자락에는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다솔사(多率寺)가 있다. 이름만 들으면 ‘소나무가 많아서’ 절 이름이 다솔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는 좋은 인재(또는 군사)를 거느린다는 의미다. 봉명산도 봉황이 노래한다는 뜻이니 좋은 기운이 모인 자리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만해 한용운이 이끌던 불교 독립운동 단체 ‘만당’이 이 절을 근거지로 삼았고, 소설가 김동리는 이곳에서 ‘등신불’을 썼다. 이 절은 503년(신라 지증왕 4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해 ‘영악사(靈嶽寺)’라 하였다. 636년(선덕여왕 5년)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했다. 676년(문무왕 16년) 의상(義湘)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솔사로 다시 불렀다.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 나옹(懶翁)이 중수했고, 조선 초기에 영일·효익 등이 중수했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된 것을 1686년(숙종 12년) 복원했다. 1748년(영조 24년)대부분이 소실됐으나, 1758년 명부전·사왕문·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화려한 과거와 달리 절은 규모가 작아 적멸보궁, 대양루, 응진전, 극락전 등 10여 동이 전부다. 일주문과 천왕문은 없다. 다솔사는 봉명산 군립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절을 출발점으로 삼아 산 구석구석으로 이어지는 흙길은 선명하고 푹신하다. 다솔사에서 보안암으로 이어지는 약 2㎞ 숲길은 적멸보궁 뒤 넓은 차 밭에서 시작된다. 이정표를 따라 걸으면 약 1시간 후에 산 동쪽 기슭 보안암(普安庵)에 닿게 된다. 숲은 굴참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생강나무 등 봄여름에는 무성했을 활엽수들이 낙엽진 채 근육질을 드러내고 겨울을 버티고 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소나무들이 잔향을 남긴다. 고려 말 승려들이 만들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보안암 석굴 안에선 커다란 돌부처가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기교미가 없는 모습이지만 오히려 넉넉한 이웃아저씨 같아 정감이 간다. 다솔사-보안암 산사길은 경북 문경 김룡사-대성암 숲길, 경남 고성 옥천사 숲길, 경북 김천 직지사 암자길, 경기 안성 청룡사 숲길, 강원 영월 법흥사 숲길과 더불어 가을에 둘러보고 싶은 산사로 가는 길로 꼽힌다. 이밖에 사천시에는 사천읍성(사천읍 선인리), 남일대 코끼리바위(향촌동), 진널전망대(향촌동), 다래와인갤러리(곤명면 신흥리), 항공우주박물관(사남면 유천리) 등 볼거리가 넘친다. 아무래도 사천시 여행은 최소 2박 이상의 여유를 가지고 찾는 게 좋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기온에도 영상의 날씨를 유지한다. 겨울철 여행지로 더없이 좋다.
2022-12-22 16:17:07
경남 사천시(泗川市)는 삼국시대 가야의 사물국과 군미국으로서 일찌감치 역사에 등장했다. 북쪽으로는 진주시, 서쪽으로는 하동군, 동쪽으로는 고성군, 남쪽으로는 남해군과 맞닿아 있다. 1995년 5월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돼 지금의 사천시가 됐다. 사천 동남쪽의 동(洞)으로 명명된 지역이 옛날 번성했던 삼천포시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있다. 장사꾼이 진주로 가야 돈을 버는데 엉뚱하게 장사가 안 되는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같은 뜻은 아니지만 사천 여행자의 대부분은 삼천포로 빠진다. 그만큼 사천의 여행지의 대부분이 삼천포 일대에 몰려 있고, 삼천포로 가야 재미가 있다.노을이 아름다운 사천만 해안도로‘실안의 낙조를 보지 않고는 낙조를 논하지 말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낙조는 어디라 할 것 없이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실안마을에서 보는 낙조가 가장 아름답다 하여 사천 8경으로 꼽는다.사천시 대방동(大芳洞)에서 실안동(實安洞) 사이 사천만을 끼고 이어지는 약 6km에 달하는 실안해안도로는 남해안의 해안 풍경과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바닷가에 대나무발 벽을 세워 고기를 잡는 전통 어업방식인 죽방렴이 펼쳐져 더욱 특별한 풍광이 연출된다. 대한민국 바다에서 물살이 센 곳은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과 사천시와 남해군 사이의 사천 앞바다다. 이런 지형의 특성 때문에 죽방렴 어업을 할 수 있다. 조류에 대발로 밀려들어온 물고기들이 빠져나가지 못해 잡히는 것이다.그런가 하면 이순신바닷길 2코스가 지나는 해안도로 역시 낙조 명소로 손색이 없다. 2코스는 선진리성에서 각산(角山) 모충사(慕忠寺)에 이르는 12km의 둘레길이다. 걸어서 대략 3시간이 걸린다. 최초로 거북선이 출항했던 ‘거북선마을’을 둘러보며 낙조 감상을 해도 좋겠다. 선진리성(船津里城)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에 있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쌓은 왜성이다. 선진항의 북방에 있다. 삼면이 바다에 면하고 동쪽만 육지에 닿는 반도 지형에 성이 세워졌다. 바다와 가까워 이미 고려시대부터 조창을 설치했고 그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봄이 되면 벚꽃 1000여 그루가 장관을 이룬다. 이순신 장군은 선진리 앞바다에 거북선을 처음으로 등장시키며 왜선 13척을 침몰시키니 그게 바로 사천해전이다. 모충사는 바위와 선홍빛 진달래가 아름다운 곳으로 사천만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조계종의 사찰이지 이순신 장군 사당은 아니다. 그 옆 송포동 월천포(月川浦)의 모충공원(慕忠公園)은 1592년 7월 8일 사천해전이 벌어졌던 모자랑포(毛自郞浦)와 가깝고, 노량해전이 벌어진 노량목(露梁牧)이 멀리 바라보인다. 모충공원은 1953년 충무공 탄신일에 맞춰 지어진 기념공원이다. 모자랑포보다 약간 북방의 대포항이 있는 서포면 대포마을은 매년 7~8월 전어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거기서 조금 더 북으로 올라가면 사천대교가 나온다. 사천만의 서포면 자혜리(서편)와 용현면 주문리(동편)를 가로 지르는 다리로 2006년 12월에 개통됐다. 참고로 대포동(남양동 관할)은 대포마을에서 동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시 지역에 속한다. 붉게 물들어가는 남해안 갯벌은 고요함만이 가득하다. 시간이 갈수록 검붉은 색을 띠다 급기야는 까만 암흑으로 빛나는 낙조는 너무 아름다워 숨이 막힐 정도다. 혹여 크게 내쉬는 숨소리가 장엄한 자연의 의식에 누가 될까 숨죽여 바라볼 뿐이다. 바다와 바다 건너 섬들, 끝없이 펼쳐지는 광대한 갯벌, 갯벌 위에 솟은 부채꼴 모양의 죽방렴 …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형체들이 하나둘씩 어둠 속에 잠긴다. 온 세상의 모든 형체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편하게 큰 숨을 내쉰다. 먼 길을 달려온 나그네에게 이보다 따스한 위로가 있을까.동백과 바다 & 문학이 어우러진 곳 ‘노산공원’전국을 꽁꽁 얼어붙는 강추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사천에는 동백꽃이 한창이다. 삼천포 바다 끝, 삼천포항 동편에 위치한 노산공원에는 한창 동백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바닥은 떨어진 꽃잎으로 분홍색 융단이 깔린 듯하다. 다른 편에서는 새 꽃잎을 틔우기 위해 막바지 진통을 하고 있다. 노산공원은 구항과 신항의 경계 지점인 삼천포 팔포항 바닷가에 봉긋 솟아 있는 자그마한 언덕(노산, 魯山)에 있다. 바다를 향해 돌출한 그 끝에 오르면 삼천포 앞바다와 다도해, 삼천포대교, 멀리 청널공원까지 조망할 수 있다.넓은 암반 위에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디선가 구슬픈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이어폰을 잊어버린 노신사가 틀어 놓은 노랫소리인가 싶었지만 분명 공원 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이다.갯바위에 세워진 자그마한 여인상을 발견하는 순간 노래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 이 여인상은 1965년 발표돼 대중의 사랑을 받은 은방울 자매의 노래 ‘삼천포 아가씨’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당시 부산, 마산, 통영, 여수 등지를 오가던 연안여객선을 타고 오갔던 청춘 남녀의 애절한 사랑과 이별,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삼천포 아가씨’는 남해의 작은 항구 도시 삼천포항을 단숨에 전국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오늘도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삼천포 아가씨가 구슬퍼 보이기만 하다.‘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 / 어린 나를 울려 놓고 떠나가는 내 님이여 / 이제 가면 오실 날짜 일 년이요 이 년이요 / 돌아와요 네 돌아와요 네 삼천포 내 고향으로 <중략> 꽃 한 송이 꺾어들고 선창가에 나와 서서 / 님을 싣고 떠난 배를 날마다 기다려요./‘삼천포 아가씨’ 여인상과 물고기상을 지나면 데크길은 노산으로 이어지고 곧이어 ‘노산정’이 나온다. ‘노산정’에 오르면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삼천포 앞바다와 삼천포대교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청널공원의 랜드마크인 푸른 지붕의 풍차 모습도 멀리서나마 조망해 볼 수 있다.넋을 잃고 한려수도의 바다 풍경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꽃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꽃 향의 진원지는 노산공원을 뒤덮고 있는 ‘동백꽃’. 12월 노산공원은 그야말로 동백꽃이 지천이다. 노산공원이 아니라 차라리 동백동산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하다. 11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12월에 절정을 맞이하는 사천의 동백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노산공원의 길목마다 활짝 핀 동백꽃이 화사하게 방문객을 반긴다. 분홍빛이 도는 사천의 동백이 여심을 붙들어 매는 터에 좀처럼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운이 좋으면 인적이 드문 노산공원의 동백 숲을 혼자서 독차지할 수도 있다.삼천포의 대표적 향토 서정 시인, 박재삼 노산공원에서 동백꽃 놀이를 충분히 즐겼다면 이제 ‘박재삼문학관’으로 발길을 돌려 보자. 박재삼(朴在森 1933~1997)은 삼천포를 대표하는 서정 시인이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여생을 지낸 시인은 가난과 억울함 등을 우리의 전통적 가락에 잘 실어 담았다고 평가받는다. 주요 작품으로 시집 <춘향이 마음>, <천년의 바람>, <뜨거운 달> 등이 있다.고향의 바닷가 햇빛 곱게 드는 언덕, 동백 숲에 자리한 시인의 집이 참으로 부럽다. 동백 숲에 그의 대표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문학관 입구에서 벤치에 편안하게 앉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반긴다. 문학관에는 시인의 흉상과 시인의 서재 등이 꾸며져 있고 그의 대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문학관 옆에 호연재(浩然齋)라는 잘 지어진 한옥 건물 한 채가 보인다. 호연재는 조선 영조 46년(1770년)에 건립된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학당으로 지역 유림들의 학문을 논하고 시문을 짓던 곳이다. 1901년 ‘보흥의숙’으로 전환돼 교육기관으로 출범하였고, 1905년에는 ‘광명의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사립학교로 정규교육을 시작하였다. ‘광명의숙’을 모태로 삼천포공립보통학교(현 삼천포초등학교)가 출범했다. 1906년 호연재를 출입하는 문객들이 일본의 침략 행위에 울분을 토하는 시문집을 발간하자 일본 경찰은 호연재를 강제 철거했다. 이후에도 호연재는 주경야독하는 초당 서재로 재건립돼 운영되면서 후에 3.1만세 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현재의 호연재 건물은 지역 시민들이 뜻을 모아 2008년 복원, 재건립했다.조선의 비밀 수군기지 ‘대방진굴항’ 신항에도 등대가 있지만 더 유명한 것은 구항의 옆에 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항구인 대방진굴항(大芳鎭掘港)의 작은 등대다. 방파제 끝에 서 있는 하얀 등대는 파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방진굴항은 빈번해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 25대 충렬왕 28년(1302)에 인공으로 조성된 병영지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을 수군기지로 삼아 거북선을 숨겨 두고 병선에 굴이 달라붙지 않도록 민물을 채웠다는 얘기가 전한다.사실상 폐쇄돼 쇠퇴한 것을 조선 순조(1801~1834) 때 인공항구(굴항)로 복원했다. 남해 창선도와 군사 연락,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대방선진을 설치가 주목적이다. 활 모양으로 둑을 쌓아 만을 만들고 굴항을 설치한 게 현재의 모습이다. 진주목 관하 73개면에서 수천명이 동원돼 1820년에 완공됐다. 이후 300여명의 상비군과 전함 2척이 상주했다고 한다. 굴항 북편에는 수군장과 병사들의 거처가 늘어선 수군촌, 곡식 2만섬을 저장할 수 있는 선진창이 있었다고 한다.‘굴항’이란 해안선으로부터 육지 쪽으로 땅을 파서 만들거나 해안선에서 바다 쪽으로 돌담을 쳐서 만든 군항 시설로 바깥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름대로 비밀 수군기지인 셈이다. 실제로도 바깥쪽에서는 기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더러 축대에 올라서도 사방으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듯한 나뭇가지 때문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굴항 중간 쯤에 ‘고려 충렬왕 때 조성된 인공 병영지이며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왜구를 섬멸하여 사천대승을 거둔 해전사에 길이 남을 수군 요새’로 ‘충무공의 호국정신이 깃든 유적지’라는 내용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복원된 대방진굴항에는 주민들이 사용하는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200년이 넘은 팽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사천 바다를 향해 세워져 있다. 대방진굴항 바깥쪽에는 삼천포대교와 삼천포항이 지척이며 안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돼 있다.팔포음식특화거리 & 삼천포용궁수산시장노산공원 바로 아래에 팔포(八浦) 매립지에는 ‘팔포음식특화거리’가 길게 늘어서 있다. 맞은편 2012년 어항구로 지정된 팔포항은 낚싯배, 수산물, 운반선 등 화물선이 이용하는 무역항으로 사량도, 수도도 등 인근 섬으로 출발하는 여객선이 출발한다. 팔포란 와룡산(臥龍山) 주봉의 급류인 선내천(한내)이 삼천포 선상지(삼각주)를 형성하면서 바다로 유입되면서 물줄기가 ‘여덟 팔’자로 벌어졌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팔포음식특화거리에는 횟집, 숙박시설, 별미 식당 등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싱싱한 자연산 생선회와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으며 숙박도 가능하다. 매해 가을이면 사천의 대표축제인 ‘사천시 삼천포항 자연산 전어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다리를 건너면 10년이 젊어진다는 ‘팔포십년다리’도 조성돼 있다. 이웃한 고성화력발전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와 어우러진 바다 풍경이 색다른 정서를 자극한다.노산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천포용궁수산시장’(옛 삼천포어시장)이 있다. 삼천포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삼천포 대표 수산시장이다. 약 270여 개의 점포가 자리 잡고 있다. 각종 활어와 수산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만날 수 있다. 지금은 방어가 제철이다. 혼자 온 여행객에게 방어 반 마리를 두말없이 회를 떠 주는 친절함에 눈물겹도록 고맙다. 매년 3월에는 도다리 세꼬시와 도다리쑥국을 즐길 수 있다. 삼천포용궁수산시장과 팔포음식특화거리에는 남해군에서 잡힌 선어들이 창선대교를 넘어 집결한다. 지금은 통영에 주도권을 뺏긴 느낌이지만 삼천포가 한참 잘 나가던 1970~1980년대에는 오히려 통영을 제쳤다. 진주 사람들도 당연히 삼천포에서 장을 보러 온다.
2022-12-21 09:19:12
경남 하동은 섬진강이 흐르고 형제봉(성제봉)이 든든하게 받쳐주며 강과 산 사이에 악양(岳陽)이라는 좁은 벌판이 자리잡고 쌍계사가 은덕을 베풀어주는 곳이 관광 포인트다.하동읍은 예부터 남원 구례 광양 남해 진주를 포인트로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하동의 역사는 이른 바 하동포구(河東浦口)로 불리는 섬진강 물길따라 80리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동포구는 화개, 악양, 하동(하동읍), 하저구, 갈사 등지를 거쳐 바다에 이르는 하동의 섬진강 물길을 통칭하는 말로 경남과 전남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번 국도를 따라 섬진강의 최북부와 화개천과 만나는 화개장터가 하동포구의 시작이다. 이 곳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벚꽃 십리길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이 길을 함께 걷기만 해도 연분홍 사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듯 사랑스럽다. 속절없이 짧은 봄날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길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이 아름다운 길을 천천히 하염없이 걷는 것이다. 화개천 투명한 물빛을 따라 이어지는 눈부신 벚꽃터널과 연둣빛 찻잎 물결은 말 그대로 천상의 화원이다. 이제 매화는 광양, 벚꽃은 하동으로 명성이 굳혀진 듯하다. 바람결 따라 공중에서 부유하는 매화꽃잎이 서럽다고 느껴질 때 광양에서 섬진강 건너 하동 벚꽃십리길은 릴레이 주자처럼 분홍색 벚꽃을 터뜨린다. 화개천을 따라 벚꽃 터널을 걷다 보면 쌍계사(雙磎寺)가 나온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3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스님이 창건한 절이다. 삼법스님이 ‘눈이 녹지 않으면서 꽃이 피는 땅’을 찾아 한라산, 금강산을 헤매다 마침내 지리산 자락에서 발견한 터에 지은 절이 바로 쌍계사이다. 봄비 내린 날 지리산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비 안개와 막 피어오른 새 생명들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쌍계사 뒤켠에는 고개가 뚝뚝 꺾인 동백이 처연하게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보물 제500호로 지정된 쌍계사 대웅전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전각들도 찬찬히 둘러보자. 봄부터 겨울까지, 해가 뜰 때부터 해질녘까지 아름다운 게 쌍계사의 풍광이다. 1시간 반을 걸어올라 불일폭포로 트레킹을 해도 좋다. 여름에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는풍경도 아름답다. 쌍계사 팔영루(八泳樓)는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배우고 돌아온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가 문성왕 2년(840년)에 중창한 것이다. 당시에는 절 이름이 옥천사(玉泉寺)였다. 혜소는 이 곳에 후배들에게 불교음악을 가르쳐 사실상 우리나라 불교음악의 발상지다.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 어산(魚山, 절에서 재(齋)를 지낼 때 부르는 불교음악)을 작곡했다 해서 팔영루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쌍계사에 가려면 화개장터를 꼭 들러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시장이었다. 남해안의 수산물과 소금, 호남의 곡물, 지리산 산나물들과 목기 등의 집산지로 수로를 통해 전국으로 유통됐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배경이기도 한 화개장터는 2014년 발생한 화재 이후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이한다. 화개장터를 널리 알린 공으로 세웠다는 가수 조영남의 동상은 그의 친일발언과 그림모사 파동으로 어쩐지 뜬금없어 보인다. 쌍계사 인근 화개면 운수리 차(茶) 시배지가 있다. 해마다 5월 중순이면 차시배지와 진교면 백련리 샘골마을 찻사발 도요지 일대에서 야생차문화축제가 열린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김대령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쌍계사 주변에 처음 심었다고 쓰여 있다. 쌍계사 일주문에 조금 못 미친 자리에 차시배 기념비(追遠碑)가 세워져 있다. 화개차는 대밭의 아침이슬을 머금고 자란 싱그러운 차나무의 잎으로 덖어 죽로차(竹露茶)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전남 보성의 차밭이 여성의 모습이라면 화개의 야생차밭은 거친 ‘경상도 머스마’에 비유할 수 있다. 보성이나 제주의 차밭이 구릉이나 평지에 줄을 세워 가지런하다면 화개의 야생차밭은 산비탈에 무질서하게 조성돼 있다. 스스로 햇볕을 받아 더 깊게 뿌리를 내린다. 생명력과 약성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세계 3대 야생차밭의 하나로 이 곳이 꼽힐 만큼 유명하다. 향을 가미하는 중국차나 맛을 조미하는 일본차와 달리 자연 그래도 향과 맛을 살리는 제다(製茶) 방법도 죽로차만의 차별화된 포인트다. 품종도 다르다. 전남 보성과 제주의 차가 주로 일본 품종(야부키타, Yabukita)이라면 화개의 차는 중국 계통 소엽종 차나무다. 화개장터에서 7km정도 떨어진 곳에는 박경리 소설 ‘토지’의 주 무대가 되었던 악양면 평사리(平沙里)의 들녘이 펼쳐진다. 경치가 좋아 중국의 상상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의 하나인 평사낙안(平沙落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하동군이 30억원을 들여 재현해 놓은 최참판댁과 마을 모습은 새삼 박경리 소설의 힘과 서사의 웅장함에 빠지게 한다. 초여름에는 자운영꽃과 청보리가 들판을 넘실댄다. 1894년 동학혁명에서 1905년까지 10여 년간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내는 사랑과 증오, 용서라는 진한 삶의 서사가 평사리 들녘 봄날의 아지랑이에도 그대로 묻어있는 듯하다.악양은 지리산 자락 형제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속이 다 들여다 보이도록 맑은 섬진강이 흐르고 벚꽃길, 배꽃길, 죽림, 차밭길이 어우러진 곳이다. 들머리에 있는 미점리 개치마을, 대봉감의 시배지인 대축리(큰둔이마을),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청학동(청암면 묵계리)보다 더 청학동(유토피아)스럽다는 매화꽃이 아름다운 매계마을(악양면 매계리), 정월 초하루 당산제로 유명한 동매리 등이 악양에 있다. 악양 형제봉 중턱에는 고소산성(해발 300m)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가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높이 3.5~4.5m, 둘레 560m로 축조한 성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군이 섬진강을 통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쌓았다고 전해진다. 날이 맑으면 강 건너 전남 광양시의 백운산도 가까이 보인다. 형제봉과 백운산을 섬진강을 가장 리얼하게 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곳이다. 섬진강이 키우는 맛의 대명사로 재첩과 은어를 들 수 있다. 재첩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지역 중 염분이 적고 물이 아주 맑은 곳에서 자란다. 시원한 국물이 약주한 다음날 속풀이로 최고다. 단백질과 무기질, 비타민 B1이 풍부하다. 은어(銀魚)는 ‘민물고기의 귀족’이다. 오죽하면 영남의 한 선비가 “은어를 더 이상 먹지 못하는 죽는 것은 괜찮으나 상놈 입에 들어갈까 슬프다”는 유언까지 남겼을까. 은어는 초가을 섬진강 상류 맑은 물에서 태어나 강물이 차가워지는 늦가을이면 바다로 나간다. 그러다 4월이면 회귀본능으로 태어난 모천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한여름을 보내 영양분이 넘친다. 6~8월이 수박향 나는 은어를 먹기에 제철이다. 혀끝을 감도는 특이한 향에 반해 주로 회로 먹는다. 은어는 주로 이끼를 먹고 자란다. 하지만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마음에 다른 은어가 쳐들어오면 밀어내기 공격을 한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세발갈고리바늘을 써서 산 은어를 미끼로 다른 은어를 잡는 ‘놀림낚시’를 하기도 한다. 하동에는 섬진강과 쌍계사와 악양만 있는 게 아니다. 바다도 있다. 진교면과 금남면에 걸쳐 있는 금오산(金鰲山)은 해발이 849m로 남해안과 근접한 산 중에서 가장 높다. 다행히 차로 갈 수 있다. 800m를 오르는 데 7㎞를 달려야 한다. 그만큼 길이 구불구불하다. 2017년 금오산에는 총연장 3.186㎞로 아시아 최장을 자랑하는 짚와이어(짚라인)이 개통됐다. 성인 요금은 4만원인데 한려해상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하강하는 기분이 짜릿하다. 금오산의 북쪽에는 지리산 연봉이 물결 치고 남쪽에는 여수, 광양, 남해, 사천의 낮게 엎드린 섬들이 박혀 있다. 하동군 금남면에서 남해군 설천면으로 건너가는 남해대교는 1973년에 완공된 국내 최초의 현수교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후 이보다 길고 웅장한 현수교가 수없이 세워져 지금은 무색하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의 바다가 바로 이 일대다.
2021-03-18 00:25:59
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는 물론 국내 여행도 예사롭지 않은 요즘, 지난 7월 중순 소강 상태를 보이는 장마전선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경남 함양군과 산청군에 다녀왔다. 함양군은 지리산과 이름 모를 높은 산을 끼고 서로는 전북 장수군 및 남원시와 맞닿고 북으로는 거창군, 동으로는 산청군, 남으로는 하동군에 이른다. 함양은 예전에는 88고속도로(광주-대구 고속도로) 예외는 길이 불편했으나 지금은 대전-통영고속도로,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익산-장수 구간) 등 새 길이 나면서 접근이 용이해졌다. 함양 IC를 빠져나오면 멀지 않은 함양읍 운림리에 유서 깊은 상림(上林, 천연기념물 154호)이 있다. 1100년도 넘은 통일신라 말기 진성여왕(재임 887~896년) 때 대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조성한 유서 깊은 인공림이다. 천령군(天嶺郡, 함양군의 옛 이름) 태수로 부임한 최치원은 병곡면에서 함양읍으로 가로지르는 위천(渭川)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강물의 흐름을 돌리는 둑을 쌓고 지리산과 백운산의 활엽수를 옮겨 심어 호안림(護岸林)을 조성했는데 이게 상림의 유래다. 대관림(大館林)으로 불리며 길이만 3㎞에 달하던 웅장한 숲은 대홍수로 인해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다. 그마저 일제시대에 하림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길이 1.6㎞, 폭 80~200m의 상림만 남아 천년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어설프게 다시 조성된 하림에는 갓지은 정자, 드문드문 심겨진 나무, 연꽃과 수련이 자라는 미니 인공정원이 들어서 있다. 상림은 팽나무, 단풍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개서어나무, 가막살나무, 작살나무, 사람주나무, 은행나무, 정자나무, 때죽나무, 이팝나무 등 120여종 2만그루의 활엽수가 햇빛 한점 스며들지 못하게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봄엔 이팝나무꽃, 가을엔 꽃무릇(석산)의 만개한 풍경이 아릅답다고 한다. 금낭화도 상림이 자랑하는 꽃이다. 상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400년된 느티나무 정도이다. 거목은 없으나 조금 굵직하거나 새로 자라는 나무들이 경쟁하며 세월의 무쌍함을 증거한다. 상림은 4계절이 아름답다지만 만추일 때가 으뜸으로 꼽힌다. 위천에서 갈라져 나온 실개천이 상림의 중심을 흐르며 젖줄 역할을 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변하지 않는다. 상림에는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던 함화루(咸化樓), 흥선대원군에 세운 척화비, 최치원을 기리는 문창후(文昌候, 고려 현종이 추증한 시호) 신도비와 사운정(思雲亭), 역대 위정관들의 송덕비를 만날 수 있다. 최치원은 경주최씨의 시조로 1923년 문중에서 그의 신도비를 이곳에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최치원은 금으로 만든 호미로 단 하루 만에 숲을 조성한 후 금호미를 나뭇가지에 걸어뒀다고 한다. 숲속 실개천에 금호미다리로 불리는 무지개 다리가 있는 것으로 봐 근처 어딘가에 호미를 걸어놨던 모양이다. 상림에 멀지 않은 함양군 한 복판에는 학사루(學士樓)란 2층 팔작지붕 누각이 있다. 최치원이 천령 태수로 있을 때 창건해 자주 올랐다고 한다. 동쪽에는 제운루(齊雲樓), 서쪽에는 청상루(淸商樓), 남쪽에는 망악루(望嶽樓)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망악루는 지리산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함화루의 전신이며 나중에 북서쪽인 상림으로 옮긴 것이다. 1380년(고려 우왕 6년) 왜구의 노략질로 불탔다가 1692년(숙종 18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경부터 함양국민학교 교사로 쓰이다가 1978년 겨울 현재 위치로 옮겼다. 학사루 길(고운로) 건너 편에 함양초등학교와 함양군청이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군수 재임 시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의 시를 철거한 게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됐다는 말도 전해진다. 함양은 정자와 물레방아의 고장으로 불린다. 화림동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金川)이 팔담팔정(八潭八亭)을 이루어 예부터 정자 문화의 보고라 불렸다. 금천은 남강의 상류로 수동면에서 위천과 합류해 진주 남강으로 흐른다. 화림동 계곡을 따라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 이상 서하면), 농월정(弄月亭 안의면)이 줄지어 있다. 거연정은 정선전씨(旌善全氏)가 조선시대 인조 때(1640년경) 세운 서산서원에 부속된 정자다. 굴곡이 심한 자연 바위 위에 정자를 올려 주변의 물과 소나무를 조화시킨 건축기법이 뛰어나다. 1872년 정선전씨 후손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세웠는데 화림교를 건너 바위섬 위의 거연정과 만나게 된다. 초록빛 계곡물이 담겨 있는 못(潭)을 굽어보는 느낌이 좋다. 군자정은 거연정으로부터 하류 쪽(동쪽)으로 150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정선전씨 입향조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의 5대손인 전세걸, 세택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기리기 위해 1802년 이곳에 정자를 짓고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으로 칭했다. 나무결이 살아 있는 소박한 정자에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거연정과 군자정이 있는 서하면 봉전리는 정여창 선생의 처가이기도 하다. 동호정 앞의 차일암(遮日癌)은 500여명이 앉을 만큼 넓은 너럭바위로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의주 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東湖)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해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돼 1895년 건립했다. 옥녀담(玉女潭)에 인접하고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단청이 화려하다. 달과 함께 논다는 의미를 담은 농월정은 2003년 10월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소실됐다가 2015년 9월에 복원됐다. 예조참판과 도승지를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가 병자호란 때 굴욕적인 강화가 맺어지자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다. 농월정 앞 너럭바위의 이름은 월연암(月淵癌), 달이 비친 모습이 서정적이고 거대한 바위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굽이치는 경관이 웅장하다는 의미다. 인근엔 오토캠핑장이 들어서 있고 제법 큰 주차장과 식당들이 있다. 이들 4개 정자를 잇는 계곡 옆길은 나무다리로 이어져 6.5㎞의 산책로를 조성했다. 일명 ‘선비문화탐방로’로 2006년 말에 완공됐다. 이밖에 함양에는 용추계곡 입구 매표소 바로 우측을 흐르는 지우천 계곡의 제1담소인 청심담의 거북바위 위에 건립된 심원정(尋源亭)이 있다. 그보다 남쪽의 안의항교에 근처엔 금호강변의 광풍루(光風樓)도 있다. 기타 경모정, 람천정, 영귀정 등의 정자가 있다. 용추계곡 입구와 심원정 사이에는 연암물레방아공원이 있다.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792년(정조 16년) 12월부터 3년 남짓 안의현감(함양군 안의면 일대)으로 지내면서 실학정신을 구현하는 차원에서 물레방아를 이 곳에 실현했다. 기백산과 황석산 사이 용추폭포에서 내려오는 물을 이용해 방앗간(정미소)를 차린 것이다. 과거에도 수차가 있었지만 이는 주로 사람이 인력으로 물을 뿜어나르기 위해 이용한 것이었다. 정미 작업은 여인들이 디딜방아나, 소들이 연자방아를 활용하는 게 전부였다. 박지원은 1780년 청나라를 둘러보고 열하일기를 써 개혁이 전혀 없는 당대를 비판했다. 홍국영과의 불화로 과거 보기를 포기했고, 중앙 요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천거로 조그만 고을의 수장인 안의현감을 맡아 이 곳에서나마 자기가 꿈꾸던 실학의 이상을 펼쳐보려 했다. 이후 면천(沔川, 충남 당진)군수와 양양부사를 지냈다. 참고로 연암은 1777년(정조 1)에는 벽파(僻派)로 몰리면서 정치적 위협을 느껴 은거한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 지명에서 따온 호다. 연암의 반남박씨로 반남(潘南)은 전남 나주의 한 고을이다. 지리산 산골마을에 무슨 서원과 향교, 누각이 그리 많을까 싶을 정도로 함양은 뜻밖에도 유교 사적이 즐비하다. 대표적인 게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내 8개 서원 중 하나인 남계서원(灆溪書院)이다. 이 서원은 1552년(명종 7년)에 일두(일두)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어졌다. 영주 소수서원(백운동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1566년에 임금이 사액(賜額)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12년(광해군 4년)에 재건했다. 정여창 외에도 숙종 이후엔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을 추가로 제향하고 있다. 남계서원에 붙어 있는 청계서원(靑溪書院)은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기리는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조의제문 사건에 연루돼 무오사화로 희생됐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다가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친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으로 불렀다. 필자는 함양 송호서원(松湖書院) 등 이렇게 서원 세 곳을 둘러봤는데 이밖에도 함양에는 당주서원(溏洲書院 이하 유허비만 존재), 백연서원(栢淵書院), 도곡서원(道谷書院), 구천서원(龜川書院), 서산서원(西山書院), 정산서원(井山書院) 등이 있었다. 함양향교, 안의향교도 현존한다. 해질 무렵엔 일두고택과 그 일대의 지곡면 개평한옥마을에 들렀다. 안타깝게도 개별 고택에는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수 없었다. 마을 북쪽에서 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가진 지곡천(池谷川)이, 서쪽에서 동쪽으로는 인가와 이웃한 평촌천(坪村川)이 흐르는데, 둘은 마을 초입에서 만나 함께 남강으로 향한다. 두 물길 사이에 낀 평탄한 땅이라 하여 개평(介坪)이다. 이 곳은 영남의 대표 사림이자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칭송되는 정여창의 고향이자 함양을 대표하는 양반가의 세거지다. 처음에는 김해김씨들이 살았다. 14세기에 정여창의 증조부가 함양으로 오면서 하동정씨가 세거하게 됐고, 이후 15세기에 풍천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세조 때의 청백리로 예조참판, 전라도도사 등를 지낸 송재(松齋) 노숙동(盧叔仝 1403~1463)이 개평마을에 입향조로 들어왔다. 노숙동은 정여창의 고모댁 사위로 이곳에 정착했으며 고증을 거쳐 1824년(조선 순조 24년) 처음 깃들인 터에 풍천노씨 대종가를 지었다. 개평마을 주민은 현재 풍천노씨와 하동정씨가 대부분이다. 마을의 100여 가구 중 60여 채가 전통 한옥으로 보존돼 있다. 1880년에 지어진 하동정씨 고가는 안채만 남아 있다. 풍천노씨 대종가 안채는 마을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한다. 일두고택은 개평마을의 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전형적인 남도 양반가의 가옥이다.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가 하동군 평사리이다보니 TV 드라마 ‘토지’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정여창이 타개한 뒤 1570년 그의 생가 자리에 지어졌고 이후 여러 번 중건됐다. 솟을대문 위에 정려가 5개나 걸려 있다. 효자와 충신이 5명이 나와 국가 표창장을 받았다는 얘기다. 이 집에서는 현감, 군수, 관찰사도 배출됐다.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탁청재(濯淸齋)’란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 누마루 앞에는 석가산(石假山)이란 인공 정원이 조성돼 있다. 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넓게 펼쳐 뒤편의 안사랑채를 가리고 있다. 안사랑채는 며느리에게 안채를 물려준 윗대 안방마님이 머물던 곳이다. ‘한 마리 좀벌레’란 뜻의 일두는 정여창이 스스로 지은 호다. 탁청재와 일두에서 청렴을 지향하고 경(敬)으로 몸과 맘을 다스리는 선비정신이 묻어난다. 정여창은 연산군에 의해 무오사화 때 함경도로 유배돼 거기서 세상을 떴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 그는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성종의 총애를 받아 동궁의 스승이 됐다. 그 동궁이 연산군이니 서로 악연이었나보다. 일두고택 앞에 ‘솔송주문화관’이 있다. 솔송주(松荀酒)는 정여창 집안의 가양주로 성종에게 진상한 전통 명주라 전해진다. 봄날의 연초록 소나무 순과 솔잎, 찹쌀, 지리산 암반수로 술을 빚는다. 대대로 이 집안 며느리들이 솔송주를 빚다 현재는 정씨가문의 16대 손부인 박흥선씨가 경남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돼 있다. 솔송주 문화관과 일두고택 사이로 마을 한 가운데를 향하는 고샅길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일두고택의 돌담과 바닥에 깔린 울퉁불퉁한 박석을 밟으며 옛적을 회상해본다. 오담고택(梧潭古宅)은 정여창의 12세 후손인 정환필의 집으로 종가에서 분가해 1840년에 지은 것이라 한다. 개평마을에 도곡서원 옛터도 있다. 지금도 개평마을의 드넓고 아늑한 분위기가 머릿 속에 남아 있다. 함양은 지리산 등반에서 아주 유용한 포인트를 갖고 있다. 함양의 옛 지명은 천령으로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높은 고산지대에 위치한다는 의미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오르려면 백무동 계곡을 타는 게 최단 코스이다. 함양 사람들이 지리산 장터목을 넘기 위해 봇짐을 메고 오르던 고개가 지안재와 오도재다. 구절양장처럼 구불구불 올라가는 지안재는 모 타이어업체의 TV 광고에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안재에서 이어지는 오도재는 변강쇠와 옹녀가 지리산으로 올라가던 전설의 길로 맑은 날이면 하봉·중봉·천왕봉·백소령·반야봉 등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 포인트가 좋다. 계곡으로는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한신계곡(이상 지리산 자락 마천면), 화림계곡(서하면), 용추계곡(안의면)이 꼽힌다. 사찰로는 벽송사, 서암정사, 용추사(장수사지), 보림사 등이 유명하다. 마천면의 벽송사와 서암정사에 가보려면 휴천면의 지안재와 오도재를 거쳐야 한다. 벽송사(碧松寺)는 신라말에 창건됐다가 화재를 입어 1520년(중종 15년)에 중건됐다. 절 규모는 작지만 휴정 서산대사 이전에 조선 선맥을 이어온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환성 지안, 서룡 상민 등 조사 8인이 수도정진한 도량이다. 현재 해인사의 말사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본거지로 사용돼 국군에 의해 전소됐다가 다시 지어졌다. 이 곳 템플 스테이는 주위 칠선계곡과 더불어 인기가 높다. 벽송사에서 600m 떨어진 부속 암자인 서암정사(瑞庵精寺)는 벽송(壁松) 지엄(智嚴) 대사(1464∼1534)가 중창했다가 비교적 근대에 다시 지어진 사찰이다. 바위굴에 모셔 놓은 석불은 ‘제2의 석굴암’이란 애칭을 얻었으며 오밀조밀한 기암괴석, 아름다운 정원 덕분에 벽송사보다 더 유명해졌다. 이은리 석불은 원래 함양읍 이은리 망가사(望迦寺) 절터 냇가에 있던 불상을 현재의 함양읍 상리에 옮겨 놓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세련되지는 않다. 입상에서 하부와 대좌는 사라지고 상체만 남아 있다. 함양은 산양산삼의 재배지로 유명하다. 지리산과 덕유산을 끼고 있는 청정 산간지역이라 국내 산삼 생산량의 약 80%를 담당하고 있다. 덕유산 깃대봉이 바라다보이는 서상면 금당리 함양군 산삼영농법인에 들르면 재배 현장도 구경하고 조금 저렴한 비용에 산삼을 구입할 수 있다. 또 함양은 경북 상주시, 전북 완주군(동상면), 경남 산청군 등과 함께 손꼽히는 곶감 주산지다. 함양 서하면 봉전리 오현(梧峴)마을은 유명 산지로 접(100개) 당 가격이 10만원을 웃돈다. 고유 음식으로는 민물고기를 갈아 육수로 삼은 어탕국수, 연잎밥, 쇠고기국밥, 갈비찜 등이 호평을 받는다. 어탕국수는 쉬리, 꺾지 등 민물고기를 푹 고아서 뼈를 추려낸 다음 얼큰한 국물에 면을 말아준다. 함양군이 뽑은 함양 8경 1. 상림사계 : 상림의 4계절 중 만추가 가장 아름답다. 2. 용추비경 : 용추폭포, 용추사, 연암물레방아공원 3. 칠선시류 : 국내 3대 계곡으로 꼽히는 칠선계곡과 폭포 4. 덕유운해 : 서상면에서 남덕유산을 바라볼 때 피어오르는 구름 5. 금대지리 : 금대산·백운산·금대암 등에서 지리산 풍광을 조망 6. 화림풍류 : 화림동계곡 8담8정에서 느끼는 안분지족의 선비 풍류 7. 서암석불 : 벽송사 옆 서암정사에 조성한 석불과 정원의 조형미 8. 대봉철쭉 : 해발 1252m 대봉산 계관봉 일대의 광대한 철쭉 군락지
2020-09-07 09:52:07
경상남도 산청군은 함양에서 뻗쳐나온 지리산 줄기가 산청 서부를 남북으로 가른다. 황매산·부암산은 합천과, 소룡산은 거창과 경계를 이룬다. 남부의 우방산과 주산은 하동과 맞닿아 있다. 산청 한 가운데는 경호강이 굽이쳐 좁다란 평원의 젓줄이 된다. 경호강은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에서 진주의 진양호까지 80여리(약 32km)의 물길이다. 상류와 중류의 마디가 되는 곳에 산청읍이, 중류와 하류의 경계쯤에 단성면이 있다. 이 둘은 산청에서 가장 큰 읍면이자 생활중심이다. 산청읍 서쪽에 왕산과 팔봉산이, 정중앙 쯤 되는 곳에 웅석봉(군립공원)이 경호강 서쪽에, 웅석봉의 대칭점이라 할 경호강 동쪽에 둔철산·대성산이 자리한다. 산이 맑다는 산청은 이처럼 산 투성이다. 전체 면적 794.6㎢ 중 임야가 623㎢이다. 금서면 특리의 봉화산 활공장과 신안면 외송리 둔철산 자락의 정취암에서 산청의 전경을 각각 서쪽과 동쪽의 포인트에서 볼 수 있다. 함양군에서 산청군 생초면으로 넘어오면서 가장 먼저 들를 만한 곳은 동의보감촌·산청한의학박물관과 구형왕릉·덕양전이다. 동의보감촌은 금서면 특리(特里) 1300번지 필봉산 및 왕산(王山) 자락에 118만1000㎡(35만7252평) 규모로 조성해 2007년 5월 4일 개장했다. 수백억도 아닌 수천억원이 투입됐다. 2013년 산청세계전통의약엑스포가 이 곳 한의학박물관과 엑스포주제관을 중심으로 열려 216만명이 방문, 80억원의 수익을 창출한 바 있으며 10년 후인 2023년에 2차 엑스포가 열린다. 이 곳에는 약초관, 약초테마공원, 한방기체험장, 한방자연휴양림, 한방가족호텔, 본디올한의원, 동의폭포, 한방 약선과 관련된 찻집과 음식점이 조성돼 한방의 향기를 울려준다. 야영장, 한방 스테이, 한방 스파, 생태 체험도 가능하다. 이름 그대로 특리와 왕산에 조성됐으니 기가 센 곳으로 쳐준다. 그래서 거북이를 닮은 귀감석(龜鑑石)과 봉황이 새겨진 석경(石鏡), 복석정(福石鼎)을 만들어놨다. 11t에 달하는 귀감석은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만지고 안아보려 애를 쓴다. 복석정은 화를 복으로 바꿔준다는 솥단지 모양의 바위다. 진주시와 함안군 사이의 물에 잠겨진 바위를 2013년 엑스포 개최에 맞춰 이 곳에 옮겨놨다고 한다. 한방 기체험장에 3개의 기(氣) 바위를 모아놨다. 동의보감촌 인근에는 국새전각전이 있다. 현재 정부가 사용 중인 제4대 국새를 새긴 곳이 여기다. 풍수지리적으로 왕산과 팔봉산이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는 듯한 기가 강한 터인데다, 국새를 만드는 거푸집의 원료인 고령토의 25%가 산청에서 나오고 그 주된 채굴지가 왕산 일대이기 때문이다. 건물 자체로도 한옥 지붕과 처마의 휘어진 각도, 그 위에 올려진 청기와의 색깔이 아름답다. 이 곳에 동의보감촌이 조성된 것은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의 스승인 류의태(柳義泰)가 경남 산음(지금의 산청군 생초면)에서 한의학을 전수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류의태는 1990년 소설가 이은성(1988년 작고, 사후 발간)이 발간한 ‘소설 동의보감’과 같은 해 방영한 드라마 ‘허준’을 통해 등장했다. 고증이 부족한 상황에서 류의태라는 허구의 인물이 만들어졌다. 동의보감촌에 있는 류의태 제단(가상 묘) 표석에 따르면 허준의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고 할머니는 진주류씨이다. 진주류씨인 류의태는 정태마을(현 신안면 문대리 상정), 허준은 여기서 3㎞ 떨어진 신안면 외고리 양지마을(龜潭)에 살아 먼 친척으로 사제 관계를 이룬 것으로 묘사돼 있다. 류의태는 조선 명종 때 명의로 소설에 기술돼 있으나 사실 역사기록엔 없다. 실제 존재하는 명의는 숙종 때의 산청 출신 유이태 선생(劉以泰 1652~1715)이다. 그가 저술한 마진(홍역) 전문치료서 ‘마진방’은 유명하다. 류의태는 진주유씨이나 유이태는 거창유씨이다. 실존 유이태와 가상의 인물 류의태가 뒤섞이면서 드라마와 소설에서 허준의 가치는 더욱 높게 평가됐고 이를 바탕으로 동의보감촌이 만들어졌으니 사실 실소할 일이다. 거창유씨는 지금도 진주류씨 류의태를 거창유씨 유이태로 바꿔줄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산청군은 난처하다는 입장만 표명할 뿐 외면하고 있다. 허준은 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조선시대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에서 아버지 허론, 소실인 영광김씨의 서자로 태어났다. 양천현감을 지낸 겸재 정선과 의성인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9~1615)은 교유하며 잘 지냈다. 허준은 선조·광해군 때 사람이고 유이태는 숙종 때 사람이니 시대가 다르다. 그래서 대한한의사협회, 허준박물관, 허준근린공원(구암공원)가 서울시 강서구에 있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류의태란 가상인물을 바탕으로 엄청난 관광단지가 형성됐다니 허탈하다. 수천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만큼 동의보감촌의 스케일과 디테일은 훌륭했다. 동의폭포 앞에서 여섯살바기 아들 놈은 신나게 물장난을 쳤다. 거기 어린이 놀이터에서 부산하게 잘 놀아 아름다운 추억이 됐다. 다만 코로나19 여파로 관광객은 드물어 거액의 예산이 투입된 동의보감촌이 헛바퀴를 돌고 있는 게 안타까웠다. 동의보감촌 다음 목적지는 인근의 구형왕릉(仇衡王陵)이다. 가락국(금관가야)은 김해김씨(金海金氏) 시조인 김수로왕이 김해 벌판에 나라를 세운 지 500여년 만인 10대 구형왕 11년(532년)에 나라를 신라 법흥왕에 넘기고 만다. 구형왕릉은 돌무덤이다. 그 앞에 1793년(정조 17년) 김해김씨문중에서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란 석비를 세웠다. 비록 그의 증손자인 김유신이 삼국통일로 가락국의 영광을 재현했다고 하나 나라를 넘긴 양왕(讓王)으로서 죄인의 심정으로 흙이 아닌 돌로 자기 무덤을 덮었을 것이다. 그는 왕산 자락에 스며들어 수정궁을 짓고 살다가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수정궁 터가 지금의 왕산사지(王山寺址, 금서면 화계리)로 구형릉의 서쪽이다. 구형왕릉 남쪽의 덕양전은 구형왕릉의 재실이다. 1793년 종전에 왕산사(王山寺)에서 전해내려온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봉안했다. 경남도문화재로서 건물을 보강해 근사하게 가꿔놨는데 망국의 흔적을 보니 돌무덤의 쓸쓸한 이미지만 더할 뿐이다. 왕산사지에서 상수리나무 숲을 따라 20분을 올라가면 ‘류의태 약수터’가 나오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김유신이 어릴 때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활터가 있다. 사실 구형왕릉이나 활터나 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나오는 것이라 역사적으로 철저하게 고증된 것은 아님을 밝힌다. 능을 보고 산청읍과 금서면의 경계를 이루는 구불구불한 길을 아주 힘들게 차로 올라 밤머리재를 넘어 대원사 계곡으로 향했다. 지리산 자락의 대원사는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 도량으로 금강송 소나무숲과 다층석탑(보물 1112호)가 수려하다. 청정한 물길이 사시사철 여기를 감돌아 계림정숲, 송정숲, 내원사 계곡, 덕천서원 및 남명 조식 유적지로 흘러나간다. 대원사 남쪽의 내원사 계곡은 아기자기한 활엽수가 조화된 숲이 봄이면 다양한 초록과 연두로 농담(濃淡)의 수를 놓는다. 산청의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는 지리산과 가까운 산청 남서쪽 중산관광지가 추천된다. 시천면 중산리 일대로 중산리계곡, 거림계곡이 폭도 넓고 평탄하고 물도 맑아 일품이다. 중산리계곡에서 래프팅을 즐길 수 있다. 근처엔 빨치산토벌전시관, 지리산 성모상(삼신할머니상)도 있다. 중산리 버스정류소(탐방지원센터)에서 천왕봉까지의 거리가 6.5㎞이다. 정류소에서 로타리대피소(정류장)까지 가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로타리대피소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국내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해발 1450m 고도에 법계사가 있다. 법계사(法界寺)는 신라 진흥왕 5년(544)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가 진신사리를 모시고 창건했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한다고 하여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에게 패한 왜군(아지발도)에 의해 불탔고, 1405년(태종 5년) 벽계 정심(正心) 선사가 중창했다. 임진왜란과 한일합방(1910년)에 다시 일본군에 의해 불탔다. 1938년 복원됐다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또다시 불타 초가집 형태로 남아 있다가 1981년 법당과 산신각, 칠성각 등이 재건되면서 겨우 절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 산신각 앞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고려 초기의 삼층석탑이 눈길을 끈다. 높이 3.6m의 커다란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삼고 높이 2.5m 되는 삼층석탑이 올라선 게 특이하다. 대원사 계곡으로 둘러본 곳이 남명 조식 유적지다. 인근의 한국선비문화연구원과 덕천서원은 시간 관계상 견학하지 못했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년)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년)과 동시대를 살았다. 퇴계는 경상좌도(慶尙左道) 예안현(안동) 온계리에서, 남명은 경상우도(慶尙右道) 삼가현(합천) 토동에서 태어났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였다. 둘 다 영남학파에 동인으로 분류됐지만 훗날 이황의 제자는 남인(퇴계학파), 조식의 제자는 북인(남명학파)이 됐다. 북인은 쉽게 말해 광해군을 적극 옹립했던 세력이다. 남명은 경(敬)으로서 나를 밝히고 의(義)로서 나를 던진다는 선비정신을 강조했다. 늘 경으로써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애달파했으며 달 밝은 밤이면 홀로 앉아 슬피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의를 중시한 까닭에 임진왜란 의병장의 절반이 남명의 제자였다는 얘기가 나온다. 남명의 수제자였던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은 강직했고 1592년 5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북인의 영수였다. 조식은 중종, 명종, 선조 때 세 번에 걸쳐 벼슬을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 그는 벼슬이 없고 깨달음의 경지가 높은 처사(處士)로서 일생을 마감했다. 의리와 실천, 애민을 강조했던 그의 깊이와 넓이는 컸으나 퇴계에 비해 저평가돼 있는 게 사실이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정인홍의 몰락과 이를 전후로 한 북인의 분열과 소멸에 따른 것이다. 조식 유적지의 산천재(山天齋)는 61세 때인 1561년 진주 덕산(지금의 산청군 시천면 운리)의 사륜동(絲綸洞)으로 거처를 옮겨와 죽을 때까지 강학한 곳이다. 산천재 뒤편 산기슭에는 남명 탄생 500주년을 맞은 2001년 설립을 추진해 2004년 8월에 문을 연 남명기념관이 있다. 그 앞뜰에 지리산을 등지고 하얀 옥돌로 조각한 남명 선생의 석상이 있다. 선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상소문도 돌에 새겨져 있다. 이 곳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이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기술했다. 여재실은 창녕 조씨 문중에서 남명에게 제사를 드리는 가묘가 있는 곳이다. 조식 묘도 여기에 있다. 조식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시천면 원리에는 덕천사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 9년) 남명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최영경(崔永慶, 1529~1590), 하항(河沆, 1538~1590) 등 그의 제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옆에 지리산에서 발원해 산청군, 진주시, 하동군, 사천시, 하동군 등지를 흐르는 덕천강이 흐른다. 산청삼매(三梅)라 불리는 고매(古梅)가 있다. 산천재의 남명매(南冥梅), 단속사지의 정당매(政堂梅), 남사마을의 원정매(元正梅) 등이다. 남명매는 산천재 앞에 남명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500년이 훨씬 넘은 매화다. 지리산 청왕봉을 바라보며 산천재 뜰을 지키는 기품이 고즈넉하다. 봄을 기다리듯 태평성태를 기원했으나 현실은 이와 다르고, 가장 먼저 흩어지는 낙화의 안타까움을 해마다 바라보며 세월의 덧없음과 권력무상도 함께 느꼈으리라. 단성면 운리 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은 단속사지의 정당매는 고려말~조선초 정당문학(政堂文學)이란 벼슬을 지낸 진주강씨 강회백(姜淮伯, 1357~1402)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이 절에서 과거시험 공부를 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600년을 훌쩍 넘긴 고매다. 단속사(斷俗寺)는 통일신라시대 제35대 경덕왕 7년(748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보물 제72호인 단속사지동삼층석탑과 보물 제73호인 단속사지서삼층석탑이 원위치에 있다. 제법 웅장한 탑이었다. 당간지주, 금당지(대웅전터),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 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금당지에 민가가 파고 들어 옛 자취가 희미하다. 웅장한 석탑도 그저 이 마을의 자연처럼 어우러져 있다. 단속사란 이름은 속세와 연을 끊는다는 의미다. 763년 신충이 두 친구와 벼슬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왕이 두 번이나 불러도 나오지 않고, 승려가 돼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왕의 복을 빌겠다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남명 조식과 휴정 서산대사, 유정 사명대사 등은 단속사에서 서로 유생과 불사로서 교류했다. 휴정은 여기서 삼가귀감이란 불저를 남겼다. 그러나 성여신(成汝信 1546~1632) 등 당시 혈기방장한 약관의 유생들이 단속사의 삼가귀감 목판본을 태웠고 이를 계기로 서산대사는 다시는 북녘으로 홀연히 떠나 다시는 남쪽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젊은 유생들은 삼가귀감이 유가귀감보다 뒤에 놓였다는 이유로 분기탱천해 이런 일을 자행했는데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남명은 “공자의 광간(狂簡)을 취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단성면 남사마을 하씨 고가의 원정매는 고려시대 말기의 문신 원정공(元正公) 하즙(元正公 河輯, 1303~1380)이 심은 나무이다. 정확히 몇 년에 심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즙이 37세(1340년)에 심었다고 가정하면 이 매화나무의 수령은 680년에 달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로 꼽힌다. 그러나 이 나무는 너무 늙어 2006년부터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나고 죽는 생명의 법칙은 엄혹한 겨울을 이겨내고 혼신의 힘을 다해 꽃망울을 틔워내려는 매화의 억척스러움마저 봐주는 법이 없다. 남명 유적지에서 동쪽으로 수 ㎞를 달리다보면 백운동계곡이 나온다. 조금 더 동쪽으로 수 ㎞를 가면 남사예담촌이다. 백운동 계곡은 웅석봉이 남으로 흘러내리는 산자락에 있다. 목욕을 하면 아는 것이 절로 많아진다는 다지소(多知沼)와 백운(白雲)폭포, 다섯곳의 폭포와 담이 있는 오담(五潭)폭포, 계류의 물보라가 세 물살이 하늘로 오른다는 등천대(登天臺)가 아기자기한 절경이다. 남명의 글씨가 암석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이밖에 산청의 이름난 계곡으로는 고운동·오봉·자막·선유동 계곡이 있다. 남사리 고택촌은 옛 담장이 아름답다 하여 예담촌이란 별칭을 붙였다. 마을의 문화재로는 ‘최씨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117호)’, ‘이씨고가’(제118호)’, ‘면우곽종석유적’(제196호)’, ‘사양정사(제453호)’가 있다. 마을의 토담과 돌담(길이 약 3200m)은 ‘산청 남사마을 옛 담장’이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돼 있다. 이 마을의 상징수는 이씨고가 입구의 ‘부부 회화나무’다.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며 회화나무(槐花 또는 홰나무, 괴화인데 회화로 읽음)는 중국 주(周)나라 때 삼공(三公, 삼정승)이 이 나무 아래서 정사를 논의했다고 해 학식, 입신양명, 선비정신, 악귀 퇴치의 상징이 됐다. 그래서 고가나 궁궐, 서원, 항교 등에 많이 심어져 있다. 수령이 310년쯤 되는 이 곳 부부회화나무는 ‘×’자 형태로 서로 마주보며 다가가고 한 나무가 조금 더 커서 부부가 서로 의지하듯 금슬 좋게 보인다. 이씨고가는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에 세워졌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정감어린다. 남북으로 긴 대지 위에 사랑채, 안채, 곳간채, 외양간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돼 있다. 곳간채가 떨어져 한 곳 더 있고, 사당이 바로 붙어 있다. 사당은 보통 집 뒤 높은 지형이나 집 멀리 떨어져 있는데 곁에 두고 담을 두르고 문으로 드나들게 돼 있다. . 이 마을엔 예부터 성주이씨(星州李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진주하씨(晉州河氏), 경주최씨(慶州崔氏) 등이 모여 살았다. 최씨고가는 높은 담장이 위압적이다. 기역자로 꺾어 들어가면 사랑채와 안채가 나온다. 필자가 방문할 당시에는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양정사(泗陽精舍)응 구한말의 유학자 정제용(鄭濟鎔, 1865~1907)를 기리는 정사(사당)다. 대문채와 본채가 각 7칸으로 솟을대문이 높고 옆면은 2칸이면 팔작지붕이다. 그의 아들 정덕영(鄭德永)과 장손 정정화(鄭鍾和)가 1920년에 만들었다. 건립 후 자식들을 교육하거나 손님들을 맞이하는 장소로 쓰다가 지금은 한옥 스테이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천장이 높고 부재가 튼실하다. 다락이나 벽장 등 수납공간이 넓고 유리를 사용해 근대 한옥의 변화상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이밖에 예담촌에는 영모재(永慕齋) 사효재(思孝齋) 등의 옛집과 이제개국공신교서 등이 있다. 성주이씨인 이제(李濟 ?~1398)는 1392년(태조 1) 개국일등공신으로 공신녹훈교서(功臣錄勳敎書)를 받았다. 개국공신녹권은 국보 제232호인 이화개국공신녹권(李和開國功臣錄券)을 비롯해 몇 점이 남아 있지만, 교서는 이것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사례여서 국보 제324호로 지정됐다. 진본은 국립 진주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이를 새긴 비가 마을 한켠에 있다. 조선 초기에는 정공신(正功臣)에게는 교서와 녹권(錄券)을 주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게는 녹권만 주었다. 교서는 국왕이 직접 내리는 문서인 반면 녹권은 공신도감(功臣都監)이 국왕의 명령에 의거해 발급해 주는 증서였다. 고려말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우 이인립(李仁立)의 아들인 이제는 음서로 벼슬길에 올랐다. 전법판서로 있으면서 정몽주(鄭夢周)의 제거와 태조의 즉위에 크게 공헌했다. 이제는 성주이씨로 이 동네에서 세거했다. 태조의 세번째 사위로 차비(次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 소생인 경순궁주(慶順宮主)의 남편이었다.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으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일파로 몰려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살해되었다. 후사가 없어 조카 이윤(李潤)이 뒤를 이었고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이밖에 산청군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은 대성산 신등면 양전리 대성산 기슭의 정취암(淨趣庵)이다. 대성산의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그 풍경이 소금강에 비유될 정도다. 신라시대 686년(신문왕 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했다. 바위 끝에 서서 산 아래를 바라보면 온갖 번뇌를 잊고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 든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면 문익점이 목화를 처음 들여와 재배한 목면시배유지, 문익점 묘, 문익점 신도비, 도천서원신안사재(道川書院新安思齋, 문익점 사당, 신안면 신안리)를 둘러볼 만하다. 산청은 문익점의 연고지다. 서원으로는 목면시배유지 옆의 배산서원(培山書院 단성면 사월리), 신계서원(新溪書源 신안면 문태리), 대포서원(大浦書院, 생초면 대포리) 등이 있다. 항교는 산청향교(산청읍)과 단성향교(단성면) 등 두 곳이다. 산청은 한우, 흑돼지, 산채정식, 다슬기 수제비 등이 먹을 만하다. 산청한우는 약초를 먹여 키워 육질이 최상급이라하며 흑돼지는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높아 졸깃졸깃하고 담백하되 깊은 여운을 남긴다. 산청약초축제는 과거에는 봄에 열렸으나 최근에는 매년 9월말이나 10월초에 개최되고 있다. 산청군이 뽑은 산청 8경 1. 지리산 천왕봉 :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 경계에 솟은 지리산 최고봉. 해발 1915m로 남한에서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다. 2. 황매산 철쭉 : 합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황매산(해발 1103m) 아래 고원(800m) 지대 60만㎡ 규모의 철쭉 군락지. 해마다 5월초에 축제가 열린다. 3. 대원사 계곡 : 집채만한 너럭바위와 넓고 깊은 계곡이 지리산에서 발원한다. 유평계곡까지 12㎞를 달린다. 봄엔 벚꽃, 초여름엔 활엽수의 향연도 볼 만하다. 4. 구형왕릉 : 가락국 마지막 왕의 쓸쓸한 옛무덤. 양식과 느낌이 독특하다. 5. 경호강 비경 : 여름철 래프팅하며 주변의 비경을 보기에 좋다. 6. 남사예담촌 : 고택과 옛 담장이 아늑하고 운치 있다. 7. 남명 조식 유적지 : 북인을 태동한 남명학파의 거두를 음미해본다. 8. 대성산 정취암 : 산청의 소금강이라 할 만큼 대성산의 기암절벽과 옛 암자의 조화가 속세를 잊게 한다.
2020-08-14 06:39:00
통영(統營)은 이름 그 자체로 알 수 있듯 유서 깊은 군사도시다. 조선시대 충청·전라·경상의 삼도수군을 통할했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줄임말이다. 통제영이 설치되기 전에는 두룡포라고 불렸다. 1955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정신을 고양하고자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됐다가 1995년 다시 통영군과 합쳐져 통영시가 됐다. 통영을 들른 것은 이번이 세번째다. 1990년대 후반 한산도에 들렀고, 4년 전 여름엔 세병관을 둘러봤고 올 여름엔 드디어 충렬사를 참배했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3대 포인트를 한번에 다 가기란 이렇듯 힘들었다. 시간도 쫓기지만 동행자들이 하나만 보면 됐지 뭘 그렇게 훑고 다니냐는 핀잔을 준 탓이기도 하다. 한산도는 한산대첩의 학익진이 펼쳐진 곳이다. 한산도의 충무사(忠武祠)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이다. 제승당(制勝堂)은 이순신 장군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의 모태라고 볼 수 있다. 1976년 10월 중건한 것으로 충무공의 전적을 그린 다섯 폭의 벽화가 있다. 수루(戍樓)는 적의 동정을 관측하는 망루로 충무공이 ‘어디서 일성호 가는 소리가 남의 애를 끓나니…’ 라고 읊조린 ‘진중시’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진중시’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한산정은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곳이며 표적과의 거리는 145m이다. 이순신 장관은 왜란을 맞아 장계를 올려 이 곳에서 무과시험을 치러 100여명이 급제하게 했다. 평민과 노비 출신이 있어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으나 충무공은 극구 이를 관철시켰다. 삼도수군통제영(현재의 해군본부)은 임진왜란으로 왜구가 전 국토를 유린했던 1593년(선조 26년) 지금의 한산도에 세워졌다. 초대 통제사는 이순신 장군이었다. 통영시 관내인 지금의 위치에 통제영을 이동시킨 것은 1603년(선조 36년)이다. 병참 조달이나 병력 동원에는 여수(전라좌수영)가 통영(경상우수영)보다 적격이었지만 정여립의 난으로 호남인을 불신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을 통영에 뒀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일본에 더 가까운 통영이 적지여서 낙점됐을 거라고 믿고 싶다. 6대 통제사였던 이경준이 터를 닦고 2년 뒤인 1605년(선조 38년)에 세병관(洗兵館) 등 건물을 세웠다. 통제영 본영의 중심건물은 세병관이다. 국보 305호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물 중 바닥 면적(175평, 약 578㎡)이 가장 넓다. 세병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은하수를 길어다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평화를 기원하고 동시에 전쟁에 대비한다는 의미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 구조로 단층 팔작집이다. 건물 네 면이 개방돼 있고 우물마루에 연등천정과 단청이 어우러져 있다. 50개의 민흘림 기둥이 건물을 받치고 있다. 과거 지방관아 건물 중 최고 위치를 차지했다. 세병관은 여수의 진남관(鎭南館), 서울의 경회루(慶會樓)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대형 목조건물로 꼽힌다. 통제영에 설치된 공방에서는 관급 장인들이 각종 군장비와 진상품을 제작했다. 공방 운영이 가장 활발했던 18세기 후반에는 한양을 제외한 지방 공방 중 장인수가 가장 많았다. 생산되는 제품의 품질도 최상급이어서 갓, 자개, 소반, 부채 등 각종 공예품은 전국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혔다. 공방은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될 때까지 운영됐다. 충렬사(忠烈祠)는 1606년(선조 39년)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세웠으며, 1663년(현종 4년) 사액(賜額)됐다. 그 후에는 역대의 수군 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충무공 생전에 장군을 의심하고 경계했던 선조였지만 그를 기리는 민심이나 군심은 거스를 수 없었던지, 또는 애증이 교차하되 진정 애국충절에 감사했는지 통영에 국가공인 사당을 세웠다. 현지 가이드는 “전국에 20개가 넘는 충무공 사당이 존재한다”며 “국가 지정 사당으로 가장 정통성을 갖는 게 충렬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일제시대에 일본 관헌들이 전국의 충무공 사당을 훼철하였으나 충무공을 마음 속으로 경외하는 일본 해군 수뇌부들이 일본 경찰이나 행정관이 충렬사를 훼손하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막아내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충무공을 애국애족의 표상으로 숭모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통영의 충렬사가 가장 정통성을 지녔다고 인식하면서도 1년에 한두번 참배하기엔 서울에서 이동거리가 너무 길고 당시 교통망이 미숙한 데다가 헬리콥터마저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아 부득이 지금의 아산 현충사를 주된 사당으로 삼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기자가 알기로는 3대 사당은 충렬사, 현충사 외에 여수의 충민사(忠愍祠)가 있다. 충민사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3년 뒤인 1601년(선조 34년) 왕명으로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이 현지를 시찰하고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의 주관 아래 건립됐다. 충렬사보다 먼저 사액(賜額)된 충무공 관련 사액사당 제1호다. 여기엔 전라좌수사 의민공(毅愍公) 이억기(李億祺)가 배향됐다. 1870년(고종 7년)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었다가 1873년 중수됐다. 다시 일제강점기에 다시 철폐됐다가 1947년 지방유림이 원위치에 재건했다. 아산 현충사(顯忠祠)는 이순신 장군이 8세부터 무과에 급제하던 32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순신 후손이 살던 종가도 이곳에 있다. 1704년(숙종 30년)에 고장 유생들이 사당의 건립을 위한 상소를 올려 1706년(숙종 32년) 조정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세워졌다. 이듬해인 1707년(숙종 33년)에 숙종이 친필액자를 하사했다. 그 뒤 흥선대원군과 일제에 의해 훼철됐다가 1932년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 중심으로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다시 세웠다. 1966년 이후 대대적인 성역화사업으로 부지는 160배나 넓혀졌고 후손들의 종가까지 포함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 가문의 사당인데 국가가 관리해주는 성격이 짙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활약한 통영과 전라좌수사로서 수군의 수장이 되고 첫 인연을 맺은 여수는 서로 자기들이 충무공의 혼이 담긴 본류라고 주장한다. 여수시는 이순신 장군이 작전 계획을 세우고 군령을 내린 진남관 앞에 2012년 여수엑스포를 앞두고 2011년에 이순신광장을 조성했다. 하지만 웅천지구의 택지개발 사업을 통해 기부채납 형태로 만든 웅천공원을 2018년 이순신공원으로 바꿔부르기로 한 것은 솔직히 뜬금 없다. 역사성이 없기 때문이다. 통영시는 정량동에 소재한 이순신공원은 2007년까지 한산대첩공원으로 부르다가 2008년께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참고로 여수시 묘도와 광양시 금호동을 잇는 이순신 대교는 2013년에 완공됐다. 여수 돌산도와 구도심을 잇는 거북선대교는 2012년 6월 여수엑스포를 앞두고 만들어졌다. 기존 돌산대교를 대체하는 효과가 있었다. 기사를 보니 창원시는 진해 대발령 정상부에 높이 100m에 달하는 초대형 이순신장군 동상을 세워 해양 랜드마크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지난 7월말 발표했다. 일명 이순신타워를 200억원을 들여 2021년까지 조성한다는 방안이다. 이에 질세라 통영시는 지난 10일 동호동 남망산조각공원 상부에 사업비 300억원을 들여 2022년까지 이순신타워를 2022년까지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역사성도 없는 과시용 사업에 거액의 세원을 낭비하다니 한심할 일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활용하려는 마케팅이 점입가경이다. 역사성 결여에 실효성마저 없다면 즉각 접어두길 바랄 뿐이다. 통영 주변에는 약 150여개의 섬이 있다. 이 중 소매물도는 모든 여행객이 꼽는 1순위다. 매물도의 부속섬인 소매물도는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엔 아까운 섬이다. 소매물도의 새끼섬인 등대섬까지 가려면 1박2일로 여유롭게 여행일정을 짜는 게 좋다. 등대섬은 과거 모 제과회사의 광고 촬영지로 알려지며 일명 ‘쿠크다스섬’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사도와 함께 행정구역상 통영에 속하지만 거제도 저구항에서 가는 게 가장 가깝다. 저구항에서 출발해 장사도 가왕도 어유도를 지나 매물도(대매물도)의 당금항에 기착한다. 내리는 사람은 없고 어느 낚싯배에서 내린 사람이 유람선으로 갈아탄다. 다시 몇 분 항해하니 매물도 본항인데 들르지도 않고 곧장 소매물도로 향한다. 편도 뱃길 여행시간은 약 40분. 소매물도는 면적 0.5㎢, 해안선 총연장이 3.8㎞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섬 정상인 망태봉의 해발고도는 157m에 불과하다. 하지만 발길 닿는 어디나 절경이 아닌 곳이 없다. 과거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여명을 이끌고 온 서불(서북으로도 불림)이 섬의 아름다움에 반해 ‘서불과차(徐市過此, 서불이 여기에 다녀감, 市를 저자시가 아닌 슬갑불이라 읽음)’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을 정도다. 섬 정상에는 매물도관세역사관이 있다. 1987년 폐쇄한 감시초소 자리에 만든 기념관으로 당시 장비와 관련 기록, 사무실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이 곳을 지나 경사지대로 내려오면 등대섬에 이르는 열목개길에 도착한다. 하루 두 차례 간조 때만 길을 건널 수 있다. 이를 모르고 무작정 소매물도 가는 배에 올라탔으니 준비성 없는 내가 한심하다. 어쩐지 성수기인데 관광객이 드물더라니…. 소매물도에서는 낚시를 즐기기에 그만이다. 통영에서 외식을 두 번 했다. 첫날 늦은 점심에 들른 서호시장에선 해물라면과 충무김밥을 먹었다. 여러집이 다 잘하겠지만 일번지할매김밥을 찾아갔다. 1만5000원에 3인의 점심이 가성비 높게 해결됐다. 해물라면에는 라면스프는 안 들어가고 된장을 풀어 해물을 우려낸 육수와 건더기가 냄비를 꽉 채운다. 짭조름한 오징어무침, 새콤한 섞박지, 밋밋한 손가락김밥이 허기를 달래준다. 관광객 몇팀이 좁은 식당 안을 점령하니 현지인은 포장해서 가져간다. 운이 좋아 빈 시간에 식사할 수 있었다. 중앙시장이 통영항 내항에 인접해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시장이라면 서호시장은 새벽장이 열리는 부지런한 시장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서호만 바다를 매립해서 조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정시장이라 불렸고, 새터라는 지명을 따라 새터시장으로도 불렸다. 귀경하기 아쉬워 돌아오는 날 저녁에 찾은 중앙시장 물회집은 엉망이었다. 통영해물가란 물회집은 인터넷 홍보내용만 믿고 찾아갔더니 반찬만 이것저것 많았지 짜고 느끼해 결정적인 한방이 없어 실망이었다. 중앙시장 횟집은 회만 떠가면 상차림비 4000~5000원에 푸짐하게 차려준다. 하지만 여기서 약간만 벗어나도 양이 줄고 가격은 비싸 가성비가 떨어지니 다 같을 거라고 기대하면 만족도가 저하되기 마련이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은 명멸해가는 나라를 구한 구름속의 찬란한 빛줄기였다. 선조의 치졸한 의심과 충무공의 장렬한 죽음은 마냥 통영 바다가 아름답게만 보이진 않는다. 통영은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의 무대이기도 하고 친북 음악가 윤이상의 고향이기도 하다. 거제도와 남해도가 거대한 방파제처럼 보호하는 잔잔한 바다에 동백꽃 유자꽃은 곱게 피어 나그네에게 손짓한다. 생선과 해물 등 물산은 풍요하다. 거기에 얽혀진 김약국과 윤이상의 비운이 대조적이어서 통영의 풍광이 비장미 있게 느껴진다. 이순신 장군의 기상이 어려 있고 풍광이 아름다워 몇 번은 더 가고 싶은 곳, 그곳이 통영이다.
2019-09-16 16:31:27
통영은 ‘남해안의 나폴리’로 불린다. 많은 바닷가 여행지를 돌아다봤으나 완도 속초처럼 여느 관광도시보다 수산물이 풍부하고 싼 편에 속한다. 부산과 여수를 오가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남해도와 거제도가 큰 파고를 막아주므로 고요하고 아늑한 물빛이다. 그 앞에 목포나 여수처럼 둥둥 떠 있는 아름다운 다도해들이 보석꽃처럼 피어 있다.가장 먼저 도착한 여행지는 이순신공원(옛 한산대첩기념공원)이었다. 1592년 8월 14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하고 해상주도권을 장악해 일본군의 식량보급로를 차단한 한산대첩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오른쪽에 칼집이 있어 장군이 왼손잡이냐는 논란이 있는 것과 달리 왼손에 칼을 차고 늠름한 모습으로 통영 앞바다를 내려본다. 동상 옆으로는 왕복 30분 정도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오르막 산책로를 따라 가면 남해 바다를 더 멀리 구경할 수 있다. 이어진 내리막 산책로를 이용하면 남해 바닷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다. 수도권은 갑자기 맹추위가 찾아왔다지만 이 곳은 계절을 잊은 듯 따뜻해 두꺼운 외투를 벗고 가벼운 복장으로 산책하는 관광객이 다수였다. 이순신공원에서 15분 가량 차로 이동하면 동피랑마을에 도착한다. 이순신이 설치했던 옛 통제영의 동포루(망루)가 설치된 곳으로 언덕 끝에 동쪽 벼랑이 있어 이같은 이름을 얻게 됐다. 동피랑마을이 관광객에게 알려진 이유는 집 담벼락마다 그려진 벽화 덕분이다. 2007년 10월 한 시민단체가 ‘동피랑 색칠하기 벽화공모전’을 열었고, 전국 미대 재학생과 개인 18개 팀이 참가해 벽화를 그렸다. 당시 옛마을은 철거 대상이었지만 벽화로 인해 관광객들이 몰려 들면서 마을 보존 여론이 형성돼 지금은 마을 꼭대기 3채만 헐고 나머지는 놔두는 것으로 결정됐다. 동피랑마을을 내려오면 통영중앙시장이 있다. 통영중앙시장은 입구부터 해산물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활어시장 근처 2층에 있는 식당으로 횟감을 가져가면 1인당 5000원의 상차림비를 받고 상을 차려준다. 여객선터미널 앞에 자리해 통영 인근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이 푸짐하게 먹고 갈 수 있는 자리다. 평소 다소 비싼 가격으로 서울에서 맛보기 힘들었던 도미회를 떠서 숙소로 돌아왔다. 펜션에 도착하니 을미년의 몇날 남지 않은 해가 바다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 생선회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중앙시장 앞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김밥집에 들르면 된다. 원조로 소문난 뚱보할매김밥을 비롯해 한일김밥, 풍화김밥 등 어느 집에 가도 짭조름한 오징어무침, 새콤한 섞박지, 손가락김밥을 맛볼 수 있다. 통영 전체를 내려보고 싶다면 미륵산(461m)에 올라가는 것을 추천한다. 미륵산은 통영항 남쪽의 미륵도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다. 정상에 오르면 한려수도와 통영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미륵산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미륵산 8부 능선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케이블카는 통영항 맞은편 도남관광지 부근에서 탈 수 있다. 케이블 길이는 1975m로 국내 일반관광객용 케이블카 중에서는 가장 길다. 그럼에도 바다와 너무 멀리 떨어져 스펙타클한 맛은 없는 게 사실이다. 왕복요금은 성인 1인당 1만4000원이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운행하지 않아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미륵산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용화사, 고려 태조 시절 도솔선사가 창건한 도솔암 등이 있다. 청명한 날엔 전망대에서 일본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장사도는 이름 그대로 섬 모양이 긴 뱀처럼 생겼다하여 장사도로 불린다. 수백년 된 10만 그루의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구실잣밤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많다. 겨울에도 숲이 울창하고 푸릇푸릇하다. 과거엔 14채의 민가에 8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장사도 분교와 교회도 있었다. 2011년 12월에 외도처럼 해상공원으로 꾸며놨다. 장사도에 가려면 통영항 여객터미널이나 거제도의 가배항(장사도유람선), 대포항(대포크루즈), 저구항(남부유람선), 근포항(장사도팡팡유람선), 통영 여객터미널 등 5곳에서 장사도 가는 배편이 있는데 대포항 저구항에서 가장 가깝고 뱃삯이 저렴하다. 장사도가 통영시에 속하지만 통영여객터미널이 뱃길로는 거리는 가장 멀다. 다만 통영에서 주로 지낼 예정이라면 한산도 추봉도를 거치며 한려해상공원의 여러섬을 볼 수 있는 통영항 유람선 탑승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저구항에서 장사도까지 평균 20분이 소요되면 탐방시간엔 1시간반이 걸린다. 왕복 성인 비수기 요금은 1만5000원선이다. 장사도 선착장에 내려 올라가면 먼저 폐교된 죽도국민학교 분교와 중앙광장을 만날 수 있다. 주변에는 분재원이 조성돼 있다. 광장을 중심으로 오른쪽 길로 걸어가면 무지개다리와 달팽이전망대에 다다른다. 더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보고 싶다면 더 걸어 승리전망대와 다도전망대로 이동하면 된다. 중앙광장에서 왼쪽길로 가면 온실, 섬아기집 등이 나온다. 각종 간식과 음식을 파는 누비하우스 밑으로는 대표적인 장사도 관광지인 동백터널길이 나온다. 2014년 종영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배경이 돼 유명세를 치렀다.이 기사는 일부 불분명한 사실이 재편집됐으며 현지 물가 시세는 2019년 7월 기준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2016-01-19 11:33:52
지난해 크리스마스, 경남 거제도와 통영시에 가기 위해 KTX를 탔다. 통영에는 기차역이 없어 KTX를 타고 3시간 뒤 마산역에 도착해 렌터카를 모니 점심 쯤 통영에 도착했다. 통영은 이름 그 자체로 알 수 있듯 유서 깊은 군사도시다. 평소에는 교통량이 적어 별 문제가 없지만 휴가철이나 연휴에는 도로가 차량으로 꽉 찬다. 이날도 5㎞ 정도 이동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가장 먼저 도착한 여행지는 이순신공원(옛 한산대첩기념공원)이었다. 1592년 8월 14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하고 해상주도권을 장악해 일본군의 식량보급로를 차단한 한산대첩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서울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오른쪽에 칼집이 있어 장군이 왼손잡이냐는 논란이 있는 것과 달리 왼손에 칼을 차고 늠름한 모습으로 통영 앞바다를 내려본다. 동상 옆으로는 왕복 30분 정도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오르막 산책로를 따라 가면 남해 바다를 더 멀리 구경할 수 있다. 이어진 내리막 산책로를 이용하면 남해 바닷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다. 수도권은 갑자기 맹추위가 찾아왔다지만 이 곳은 계절을 잊은 듯 따뜻해 두꺼운 외투를 벗고 가벼운 복장으로 산책하는 관광객이 다수였다. 통영을 대표하는 유적지는 뭐니뭐니 해도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다. 1604년(선조 37년) 설치돼 1895년 폐영될 때까지 292년간 경상·전라·충청의 삼도수군의 본영(현재의 해군본부)이었다. 초대 통제사는 이순신 장군이다. 통제영의 본영의 중심건물은 세병관(洗兵館)이다. 국보 305호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물 중 바닥 면적이 가장 넓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 구조로 단층 팔작집이다. 과거 지방관아 건물 중 최고 위치를 차지했다. 통영 전체를 내려보고 싶다면 미륵산(461m)을 올라가는 것을 추천한다. 미륵산은 통영항 남쪽의 미륵도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다. 정상에 오르면 한려수도와 통영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미륵산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미륵산 8부 능선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미륵산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용화사, 고려 태조 시절 도솔선사가 창건한 도솔암 등이 있다. 청명한 날엔 전망대에서 일본 대마도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순신공원에서 15분 가량 차로 이동하면 동피랑마을에 도착한다. 이순신이 설치했던 옛 통제영의 동포루(망루)가 설치된 곳으로 언덕 끝에 동쪽 벼랑이 있어 이같은 이름을 얻게 됐다. 동피랑마을이 관광객에게 알려진 이유는 집 담벼락마다 그려진 벽화 덕분이다. 2007년 10월 한 시민단체가 ‘동피랑 색칠하기 벽화공모전’을 열었고, 전국 미대 재학생과 개인 18개 팀이 참가해 벽화를 그렸다. 당시 옛마을은 철거 대상이었지만 벽화로 인해 관광객들이 몰려 들면서 마을 보존 여론이 형성돼 지금은 마을 꼭대기 3채만 헐고 나머지는 놔두는 것으로 결정됐다. 동피랑마을을 내려오면 통영중앙시장이 있다. 통영중앙시장은 입구부터 해산물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소 다소 비싼 가격으로 서울에서 맛보기 힘들었던 도미회를 떠서 숙소로 돌아왔다. 펜션에 도착하니 을미년의 몇날 남지 않은 해가 바다 밑으로 떨어지고 있다. 다음날 거제도로 이동하기 위해 서둘렀다. 미세먼지로 인해 시야가 약간 흐렸지만 여행하기 좋은 날씨였다. 예년보다 따뜻한 겨울 날씨에 도로 옆엔 개나리도 피었다. 약 1시간 남짓 달리니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인 거제도(巨濟島)다. 거제는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12개 국가 중 독로국(瀆盧國)에 속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이르서야 지금의 이름을 명칭을 얻게 됐다. 고려시대 983년(성종2년)에 기성현(岐城縣)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부터 거제로 명칭이 굳혀졌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왜구의 침입에 자주 시달렸다. 고려말에는 왜구를 피하기 위해 거제도를 비워두기도 했다. 1414년(태종 14년) 경남 거창군으로 피난한 거제현과 거창군이 합쳐져 제창현(濟昌縣)으로 통합됐다. 1419년(세종1년)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정벌로 1422년(세종 4년) 왜구의 침입이 종식됨에 따라 1423년(세종 5년)에는 거제현(巨濟縣)으로 복귀했다. 1423년 축성된 거제읍성은 조정으로부터 고현성이란 이름을 받았고 과거 읍성 역할을 하던 사등성은 지위를 잃었다. 1489년(성종 20년)에 거제부(巨濟府)로 잠시 승격했다가 곧 현으로 환원됐다. 1664년(현종 5년) 고현성이 폐지되고 거제현아가 읍내면(지금의 거제면)으로 옮겨졌으며, 1711년(숙종 37년) 도호부로 승격됐다. 1895년(고종32년) 동래부 거제군(巨濟群)으로 개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1592년(선조 25년) 5월 이순신 함대가 거제 옥포 앞바다에서 적의 함대를 포위, 섬멸하는 첫 개가를 올렸다. 반면 고현성이 함락됐고 원균의 오판으로 조선 수군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 1597년의 칠천량해전의 비극도 이 곳에서 빚어졌다. 거제의 첫 행선지는 ‘바람의 언덕’이었다. 이 곳은 KBS 인기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이 다녀가면서 유명세를 치렀다. 이름에 걸맞게 바람이 많이 분다. 탁트인 남해를 감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바람의 언덕 맞은편에는 신선대(神仙臺)가 있다. 과거 신선들이 놀던 자리라고 불릴 만큼 경치가 뛰어나다. 갓처럼 생겨 갓바위로도 불리며 벼슬을 원하는 사람이 여기서 득관(得官)의 제를 올리면 소원을 이룬다는 속설이 있다. 신선대 옆으로 50m 길이의 몽돌해변이 있다. 근처 와현모래숲해변 옆에 와현유람선터미널이 있다. 해금강과 외도로 향하는 배를 탔다. 2시간에 한 번씩 운행하고 오후 4시면 마감한다. 소형 유람선이라 날씨가 조금만 좋지 않아도 배가 뜨지 않는다. 해금강은 바다의 금강산을 뜻하는 말로 두 개의 섬이 맞닿아 있다. 1971년 명승 제2호로 지정됐으며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지형이 칡뿌리가 뻗어내린 형상이어서 갈도(갈곶도)로도 불린다. 해금강 최고의 비경은 십자동굴이다. 섬 안에 들어가 십자모양의 하늘이 보인다. 이밖에 사자바위, 부처바위, 촛대바위 등 기이한 암석이 늘어서 있다. 해금강에 이르는 유람선은 이 곳 외에도 도장포, 학동, 구조라, 해금강 등의 터미널에서 탈 수 있다. 해금강을 들른 유람선은 외도로 향했다. 거제도와 4㎞ 정도 떨어져 있는 섬으로 동도와 서도로 나눠져 있다. 서도에는 약 1만여평의 식물원과 편의시설이 조성돼 있으며, 동도는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서도는 유럽 지중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국적인 모습이다. 섬 내 수량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난해 난대 및 열대성 식물이 잘 자란다. 주변에 해금강 등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엔 홍도(거제), 대마도까지 관망할 수 있다. 과거 외도는 바위만 무성한 황폐한 무인도에 가까웠다. 1950년 광복 직후 8가구만 살고 있었으며 전기시설과 통신시설이 없었다. 변변한 정박시설도 없어 큰 배가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1969년 평안남도 순천 출신의 이창호 씨가 우연히 외도 주변에 낚시를 왔다가 태풍을 만나 우연히 외도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것이 인연이 돼 1973년까지 3년에 걸쳐 섬 전체를 구입했다. 이 씨는 외도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평생 외도 가꾸기에 전념했다. 외도는 1970년대 초반부터 개발됐다. 이 씨는 고구마가 심어진 밭에 감귤나무 3000여 그루와 편백 방품림 8000여 그루를 심고 농장을 조성했다. 이후 여러 실패를 겪고 농장 대신 식물원으로 변신시켰다. 이색적인 풍광이 서서히 알려지다가 2002년 종영된 KBS 드라마 ‘겨울연가’의 마지막회 배경 장소가 되면서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방문하는 관광코스로 유명해졌다. 2003년 3월 1일 외도의 주인인 이창호 씨가 사망했으며, 2008년 1월 16일 방문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거제도 동쪽의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면 나타나는 구조라도 명소로 꼽힌다. 조라는 자라의 목처럼 생긴 지형을 말한다. 조라목, 조랏개, 조라포, 목섬, 목리, 항리로도 불린다. 1470년 성종 원년 거제칠진(옥포진, 조라진, 율포진, 영등진, 거배량진, 지세포진, 장목진)의 하나로 조라진을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후 1604년(선조 37년)에 옥포진에 통합됐다가 1651년 효종 2년에 다시 돌아오자 구조라진으로 명명됐다. 구조라엔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곳에 집들이 모여 있다. 마을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는 해수욕장과 항구가 위치한다. 동피랑처럼 벽화가 골목 구석마다 그려져 있다. 대나무 숲길 옆으로 샛바람 소리가 나 관광객에게 신비감을 제공한다. 구조라해수욕장은 한국전쟁 후 포로수용소가 거제에 설치되면서 미군들이 이용했던 곳으로 1970년대 이후 알려지기 시작했다. 백사장은 길이 1.1㎞, 폭 30m로 거제의 여느 해수욕장과 달리 호수같이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동쪽으로 망산,서쪽으로 수정봉,앞바다에 안섬이 자리잡아 경치가 수려하다. 인근의 학동 흑진주몽돌해변도 해수욕장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검은 몽돌로 이뤄져 있고 한려수도의 풍광을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거제도 공곶이엔 다랭이농장이 조성돼 수선화, 동백나무, 종려나무, 조팝나무, 팔손이 등 50여 종이 심어져 있다.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수선화가 만발한다. 공곶이는 1869년 병인박해(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가톨릭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를 피해 숨은 윤사우 씨 일가의 은신처였다. 공곶이마을에서 예구마을 반대편 남쪽 방향으로 깊은 숲길을 걸으면 서이말(鼠耳末) 등대에 도착한다. 거제도 동쪽 끝단 쥐의 귀를 닮은 듯한 곳에 1944년 1월 설치됐다. 3명의 등대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20초마다 한 번씩 20마일(37㎞) 밖으로 빛을 비춰 주변 지역을 항해하는 선박에 항로를 알려주고 있다. 백색 원형의 콘크리트구조물로 15m 크기이며 장승포항에서 해금강으로 향하는 유람선 경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거제도는 크게 동부권, 서부권, 남부권, 북부권, 중부권 등으로 나뉜다. 북부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가와 기록전시관이 위치해 있으며, 거가대교(거제도+가덕도)가 부산으로 연결된다. 중부권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거제박물관, 계룡산이 있다. 서부권에는 동계 전지훈련장으로 쓰이는 거제스포츠파크, 청마 유치환 생가, 산방산과 산방산비원 등이 있다. 남부권에는 해금강·바람의 언덕·신선대·외도와 함께 명사·덕원 해수욕장, 여차·홍포 전망대, 손대도(병대도) 등이 위치한다. 동부권에는 동백숲길이 아름다운 지심도, 공곶이, 능포양지암조각공원, 내도, 옥포대첩기념공원 등이 있다. 거제시는 이 중 외도·내도 비경, 여차·홍포 해안 비경, 계룡산, 해금강, 공곶이, 지심도, 학동흑진주 몽돌해변,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 등을 거제 8경으로 추천하고 있다.
2016-01-11 09:3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