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별산대놀이마당(양주시 유양동 262)에서 2km 떨어진 곳에 양주의 진산인 불곡산(佛谷山 해발 468.7m) 자락에 백화암(白華庵)이 자리 잡고 있다. 불곡산은 불국산으로도 불리며, 산은 별로 높지는 않지만 암릉과 경사진 능선이 많아 오르락내리락 산타는 재미가 있어 당일치기 근교 산행지로 인기가 높다. 유양초등학교나 양주시청에서 올라갈 수 있다. 불곡산은 양주를 거쳐 한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고대 교통로가 지났던 곳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봉우리와 능선의 정상부에는 많은 보루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불곡산은 평지인 양주시청에서 능선을 일으킨 뒤 서서히 고도를 더해 가다 백화암 뒤쪽에서 상봉(468.7m, 또는 투구봉)이라는 암봉을 형성한다. 그 뒤 상투봉(403.6m)를 지나며 고도를 낮춘 암릉은 다시 고개를 들어 임꺽정봉(450m)이란 암봉을 만들며 동북쪽에서 달려온 한북정맥을 만난다.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을 지나며 기세를 자랑하던 한북정맥은 도봉산, 북한산이라는 필생의 작품을 빚어내기 위해 몸을 낮추고 불곡산이란 시험작을 만들어낸다. 주말마다 인파가 몰려드는 북한산, 도봉산을 피해 호젓한 등산을 하고 싶다면 불곡산을 택해도 좋다. 정상서 바라보는 도봉산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느껴진다. 다만 바위산이니 미끄러지지 않는 릿지화를 신는 게 권장된다. 유양초등학교를 지나 안내판을 따라 숲길을 따라 오르면 20여 분 만에 백화암에 닿는다. 불곡산 상봉 오른편 남쪽 기슭에 위치한 백화암은 898년(신라 효공왕 2)에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창건 시기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는 없으나 '신라 말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연화사각대좌와 주초석이 전해져 온다. 절의 원래 이름은 불곡사였으나 ‘동국여지승람’ 간행 이후 어느 시기에 백화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한국전쟁 중에 전소된 것을 1956년 성봉화상이 복원했다. 이후에도 꾸준한 불사를 통해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중건됐다. 대웅전 입구를 지키듯 수령 350년의 우람한 느티나무 보호수가 서 있으며 그 옆에는 1841년(헌종 7년)에 세워진 양주목사 서염순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대웅전에서 숲길을 따라 10여 분 정도 오르면 2004년 보인스님이 조성한 마애삼존불이 있다. 양주시의 대표적인 관음도량으로 많은 신도들이 찾아오지만 평소에는 조용하다. 봄이면 벚꽃과 영산홍이 절집을 화려하게 수놓고 가을이면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단풍나무들이 단풍 맵시를 뽐낸다.유양초등학교에서 백화암으로 오르다보면 오른편(동쪽)에 임꺽정 생가터가 있다. 임꺽정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도적이 된 뒤 한때 기세를 올리며 평등을 구현하려는 무리를 통솔했다. 생가터는 의외로 전망 좋고 아늑한 곳이다. 양주목(牧) 관아와 향교가 있던 곳에서 불과 1㎞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모반을 꿈꿨다니 새삼스럽다. 수원백씨 집성촌의 전통문화 자존심 양주매곡리고택(백수현전통가옥)양주시 남면 매곡리에 수원 백씨 집성촌인 맹골마을이 있다. 맹골은 ‘매화’라는 뜻으로 매화나무가 많아 ‘맹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맹골마을에 위치한 25사단 신병교육대 담장에 매화나무가 그려진 것도 이러한 이유다. 남면이라 양주의 남쪽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는 양주의 가장 북쪽에 있다. 마을길을 따라 넓게 논이 펼쳐지고, 산봉우리들은 꽃봉오리처럼 소담스럽다. 꽃술처럼 감악산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듯한 맹골마을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파주시와 양주시에 걸쳐 있는 감악산((紺岳山, 해발 675m)은 검푸른 바위산이란 뜻을 갖고 있다. 산세가 검고 험하며 정상에 오르면 개성시가 보일 정도로 북한과 인접해 있지만 맹골마을에서 보는 감악산은 온순해 보이기만 하다.맹골마을은 2006년부터 접경지역 체험마을로 지정돼 장 담그기, 한지 제작 등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치즈 만들기 등 유가공 체험도 이뤄진다. 마을 주민의 60%가 수원 백씨다. 구성원들 사이에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고 제사 문화가 굳게 이어져 오고 있다.여전히 전통양식의 집들도 많이 눈에 띄는데 그 중 국가민속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된 백수현가옥이 유명하다. 이 가옥은 1870년대 만일의 경우 명성왕후가 피신해 있기 위해 서울의 고택을 옮겨다 지은 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명성왕후가 기거한 적은 없다고 한다.ㅁ자 모양의 가옥으로 사랑채와 안채와 행랑채 및 별당채의 지대석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석재의 크기나 가공 수법, 기둥 등 목재의 크기나 치목 수법 등에서 궁궐 건축의 특징을 엿볼 수 있어 볼 만하다.개명산 자락 물가에 쉬는 호랑이 느낌,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나는 심플하다’, ‘나는 술 먹은 죄밖에 없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이런 말을 남긴 화가 장욱진은 박수근, 이중섭과 더불어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꼽힌다. 1917년 충청도에서 태어났고 1939년 일본의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를 다녔다.평생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동화적이고 간이한 표현과 독창적인 색채를 선보였던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심플’로 표현된다. 그는 평소에도 '심플'을 작품 활동의 모토로 삼았다.그의 모토처럼 그의 작품은 무척이나 간단하고 화폭은 매우 작다. 작은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골마을의 나무와 동물, 까치, 집에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가족이 있는 따스한 삶을 동경하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디 작가뿐이랴. 모든 인간의 동경의 대상이 유년의 동화다. 그러나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어린 시절이기에 장욱진이나 박수근의 그림 앞에 서면 슬퍼지는 것이다.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개명산(開明山 정상 형제봉 546.8m) 기슭에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이 2014년 문을 열었다. 유족들과 장욱진미술재단에서 기증한 장욱진 그림 230여 점이 모태가 됐다. 미술관은 건축물 자체도 작품이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다. 미술관은 입구를 지나 실개천에 놓인 긴 다리를 건너 계단이 놓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한다. 개명산 아담한 산세에 둘러싸인 하얀색 건물과 실개천, 너른 조각공원을 한 프레임에 담으면 퍽이나 근사한 공간이 나온다. 멀리서 보면 마치 개천을 사이에 두고 현실세계와 가상공간으로 나눠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미술관 외관은 마치 컨테이너나 네모난 깡통을 대충 얽어 매 놓은 듯 엉성하고 밋밋해 보인다. 그러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벽마다 시원하게 뚫린 통창을 통해 변화무쌍한 외부 풍경을 미술관으로 끌어들여 다채롭게 빛난다.건축물은 ‘최 페라이라’ 건축에서 설계했다. 2014년 제22회 김수근 건축상을 수상하고 한국건축가 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7’에 들었다. 또 영국 BBC가 선정한 '2014 위대한 8대 신설 미술관에 들었다. 항간에는 장욱진 화가의 호랑이 그림 '호작도'와 집의 개념을 모티브로 지었다는 말이 있지만 짓고 보니 물가에 쉬는 호랑이를 연상시킨다는 말이 와전된 것뿐이란다.마치 그리스 여행 사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하얀색 계단이 지하 1층과 지상 2층을 연결시켜준다. 지하 1층은 수장고로 사용되고 1층과 2층이 주요 전시실이다. 1층에서는 주로 기획 전시가 열리고, 2층에는 장욱진 화가의 상설전시가 열린다. 크기, 모양, 색깔이 모두 다른 전시공간은 작가와 작품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2층에는 관람객들이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체험공간이 마련돼 있다. 오브제 방에는 작가가 생전에 사용했던 개인용품들이 전시돼 있고 작품집과 관련 서적들을 볼 수 있는 아카이브 라운지가 있다. 1층에는 아트숍과 음료를 파는 카페가 있다. 장욱진 화가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기념품 - 머그잔, 플레이트, 노트, 메모장- 등을 구매할 수 있다.
2023-02-18 22:03:32
경기도 ‘양주(楊州)’라는 지명은 고려 현종 임금이 이 지역에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고을이라고 하여 지었다는 말이 전한다. 고구려 때에는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매성군(買省郡), 혹은 창화군(昌化郡),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내소군(來蘇郡)으로 불렸다. 고려 태조 때 내소군은 견주(見州郡)으로, 한양군(漢陽郡: 서울 강북 일대, 구리시, 남양주 상당 부분)은 양주군(楊州郡)으로 바뀌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양주와 견주를 합쳐 양주목으로 승격됐다. 그러나 현종 9년(1018년) 12목이 8목과 여러 도(道)로 개편되면서 견주(오늘날의 양주군과 의정부)는 양광도(楊廣道: 경기도 양주와 광주의 머리글자)에 속하는 견주현으로 격하됐다. 경주와 평양을 오가는 중심지가 양주에서 개경으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고려 문종 21년(1067)년 양주의 중심지를 남경으로 정하니 그 중심지가 지금의 서울시 광진구 일대였다. 남경을 둘러싼 게 양주목이고 양주목은 한양군, 견주군, 풍양현(남양주 진접읍), 행주현(고양시 행주동), 사천현(동두천)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지명이 됐다.요컨대 지금의 양주는 견주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의정부시가 떨어져 나간 형국으로 존재한다.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양주는 교통이 편리하고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고대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의 각 쟁탈전이 치열했던 지역이다.신라와 고구려 군의 최후의 대규모 전투인 이른바 ‘매초성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양주 지역이었다. 당시 매초성의 위치는 양주시의 불곡산, 천보산,칠봉산에 둘러싸여 있는 양주시 회천동, 양주동 일대로 추정된다.조선시대에 이르러 양주군은 양주부-양주도호부를 거쳐 양주목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인 연산군 10년(1504년)에 경기 북부 지역에 국왕의 무예 연마를 위한 수렵장을 조성하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는 금표가 설치되면서 한때 양주목이 소멸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중종 때 다시 양주목이 부활됐고 유양동 일대에 동헌과 향교, 사직단, 객사 등이 건립되면서 유양동을 중심으로 한 양주 시대가 열렸다.애초에 양주 지역은 지금의 양주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지역이었다. 현재의 의정부시, 동두천시, 남양주시, 구리시, 연천군 전곡읍뿐만 아니라 서울시 동북부 일대의 노원구, 도봉구, 중량구, 광진구와 고양시 일대가 모두 양주목에 소속됐었다.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고양군이 떨어져 나가고, 전곡은 연천군으로 넘어갔다. 이어 1963년 서울 대확장 시기에는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일대가 서울로 편입됐고, 의정부읍이 의정부시로 독립했다. 1980년에는 남양주, 구리 지역이 남양주군으로 분리됐다. 1986년 남양주군 구리읍이 구리시로 승격했다. 남양주군과 미금시가 1995년 통합돼 남양주시가 됐다. 1981년 양주군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승격 분리되었다.팔다리를 다 떼어주고 몸통만 남은 꼴이 된 양주시는 도락산 불곡산을 잇는 능선을 중심으로 두 지역으로 크게 나뉜다. 서쪽에는 신천 주변으로 백석읍, 광적면, 남면, 은현면 등이 펼쳐지고 동쪽은 회암천과 청담천이 흐르며 덕정역, 덕계역을 중심으로 양주 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다. 송추계곡과 장흥관광지로 유명한 장흥면이 의정부시 남쪽과 이어져 있다. 양주시는 대부분이 농촌지역인데다 군부대가 많아 발전이 더디다. 최근에는 농촌지역 깊숙이 섬유, 화학 등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중소공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환경오염 문제도 심각하다.그럼에도 양주시 회암동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조선 전기 최대 사찰로 알려진 회암사와 회암사 박물관이 있으며, 유양동에는 양주객사가 복원돼 양주향교와 더불어 과거 양주목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장흥면에는 장흥아트밸리, 남경 수목원, 장욱진미술관 등 볼거리가 넘쳐난다. 그런가 하면 양주 나리공원 일대에서 펼쳐지는 ‘양주나리공원 천일홍축제’는 대표적인 가을 축제로 각광받고 있다.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수 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조선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 승려 3000명, 262칸에 기거 … 문정왕후 때 절정양주시 천보산 남쪽 기슭에는 조선시대 최대 사찰로 알려진 회암사(檜巖寺)의 폐사지인 회암사지가 있다. 회천동(법정동) 낸 회암동 21번지다. 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 왕사로서 조선 초기 전국 최대 규모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폐사지 방문은 역시 해질 무렵이 최적의 시간이다. 뉘엿뉘엿 연갈색으로 사그러져 가는 빛 속에서 폐사지는 쓸쓸함과 외로움, 인생무상의 정서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회암사지 전망대에 오르면 폐사지의 전체적인 모습을 더 잘 조망할 수 있다. 비록 폐사는 되었지만 가람의 형태는 온전하게 보존돼 있음을 알 수 있다.1997년부터 시작된 회암사지 발굴은 2015년까지 무려 10여 년 동안 1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70개소에 달하는 건물지가 확인됐다. 이중 35개소 이상에서 다양한 시설의 구들이 확인됐다. 구들의 구조 및 배치, 처리 기법 등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회암사지의 구들 시설은 우리나라 최대 온돌 유적으로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배수로와 화장지 등이 발견돼 당시의 위생시설 수준을 가늠케 한다.회암사는 창건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2세기 금나라 사신이 들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12세기 중엽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 인도의 고승 지공의 제자 나옹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고 그의 제자 무학대사가 주지로 재임하는 동안 더 크게 번창했다. 태조는 왕위 양위 후 이곳 회암사에서 기거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불도에 전념했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확장했고, 명종 때 문정왕후의 입김을 얻어 조선 전기 전국 최대의 사찰로 번성했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색의 ‘목은집’에는 승려의 수가 3000여 명, 건물은 모두 262칸, 높이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을 모셨다는 기록이 보이인다. ‘건물이 크고 웅장하여 동국 제일이며, 중국에서도 이러한 사찰을 보기 힘들 것’이라고 적혀 있다. 문정왕후 사후 회암사는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1566~1595년 이후 유생들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회암사지에서 건물 터뿐만 아니라 청기와, 용봉 문양 막새, 잡상 등 수많은 유적들이 출토됐다. 이들 유물은 ‘회암사지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부처님 진신사리 추정 회암사지 사리탑(보물 제2130호)천보산 기슭 바로 아래쪽에 ‘회암사지 사리탑’이 홀로 외롭게 서 있다. 사리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 층마다 용과 말, 연당초문(蓮唐草文: 연꽃과 당초의 무늬가 연달아 이어짐) 등의 조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기단부에 남아 있는 용마상은 무척이나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회암사지 사리탑은 탑의 규모와 조각 수법 등이 조선 초기의 양식을 계승한 탑으로 왕실 불교예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어 가치가 매우 높다. 2021년 6월 24일 보물 2130호로 지정됐다.출토 유물 전시하는 회암사지박물관 … 무학대사 승탑 옆 새로 지은 회암사회암사지박물관에는 회암사에서 발굴된 유물들의 대부분이 전시되고 있으며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전돼 보관 중이다.1층에는 상설전시실과 영상 체험실, 방문자 센터와 회암사 대가람실이 있다. 회암사의 창건, 관련 주요 인물 등 회암사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물들로 꾸며져 있다.영상체험실에서는 출토된 유적과 학술자료 등을 통해 고증된 회암사의 모습을 3D 영상으로 구현한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다. 사찰의 구조와 구들 시설, 배수 시스템 등이 영상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현돼 회암사의 과거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회암사는 종교적 공간과 정치적 공간이 혼용돼 있는 게 특징이다. 전면의 보광전, 설법전과 같은 종교적 공간이라면 후면의 정청이나 동서 방장은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됐다. 궁궐의 편전이나 침전의 배치 형식을 고려한 독특한 건물 배치는 회암사가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왕실의 집무공간으로도 사용됐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전시실 중앙에는 태조 이성계가 회암사를 방문하는 어가 행렬이 미니어처로 재현돼 있다.2층 전시실에는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기와, 용두토수(龍頭吐首), 잡상들과 불화 등이 전시돼 있다. 왕실에서만 사용되었던 백자나 분청사기 및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용 문양과 봉황 문양 기와, 청기와, 용두 등을 통해 회암사의 높은 지위를 실감할 수 있다.회암사지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회암사지 그리고 양주” 특별전을 열고 있다. 오는 3월 26일까지이다. 회암사지의 발굴 및 정비의 역사를 도표와 사진, 도면 등으로 만나볼 수 있다. 문정왕후가 남긴 불화 복제본 5점도 전시돼 있다. 특히 회암사가 명문으로 드러난 최초의 유물인 청동 금탁의 진본을 만나볼 수 있다. 그동안 진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회암사지박물관에는 사본이 전시돼 있었다. 회암사지와 박물관까지 둘러보았다면 이번에는 회암사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의 사리탑들을 찾아보자. 회암사지에서 차로 5분 정도 천보산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아담한 절집 회암사가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 지어진 회암사가 아닌 최근에 지어진 절집이다. 대웅전과 관음전, 조사전, 삼성각, 요사채 등의 전각을 갖추고 있으며 천보산과 어우러져 그윽한 절집 향취가 물씬 풍긴다.이 절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조금 오르면 무학대사 승탑(보물 제388호)과 그 앞의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지공선사의 승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49호), 나옹선사 승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50호)이 세워져 있다. 이들 석조 유물들을 통해 당시 회암사에 주석했던 승려들의 면면과 회암사의 위상을 새삼 짐작할 수 있다. 양주향교, 450년된 느티나무 … 흥선대원군 사위 조정구 양주소학교 세워향교는 조선시대 국가가 세운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중·고등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시와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배우는 경학이 주 교육내용이었다. 유교의 성립과 발전에 공을 세운 중국과 한국의 선현들에 대한 제를 올리는 곳이기도 했다.조선시대 양주에도 조선 태종 원년(1401년)에 건립된 향교가 남아 있어 조선시대 교육 및 제사 문화를 살피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제를 지내고 봄가을로 일년에 두 번 유림들이 모여 석전제를 지낸다. 청소년 예절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양주시 유양동에 위치한 양주향교는 양주시청에서 차로 약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인근에 양주 관아와 양주 별산대 공연장이 있어 두루두루 ‘전통’을 체험할 수 있다.향교 앞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우람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전소될 때에도 살아남았다. 그 뒤쪽으로 향교의 출입문인 외삼문이 있다.양주향교는 향교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인 ‘전학후묘’ 양식을 따라 앞쪽에 명륜당이 있고 뒤쪽으로 내삼문 안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다. 내삼문은 ‘동입서출’라 하여 반드시 동문으로 들어가고 서문으로 나와야 한다. 성조(聖朝)라 적힌 중문은 신도(神道)라 하여 제물과 제주만 출입할 수 있다.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중국 5성과 송조 2현(정호, 주희),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 정몽주, 조선 우암 송시열, 김장생, 김진, 조광조, 이황, 이이 등 우리나라 18선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태종 원년인 1401년에 세워진 양주향교는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됐다. 인조 때 재건됐으나 한국전쟁 때 또다시 전소됐다. 지금의 향교는 유림들에 의해 대성전은 1958년에, 명륜당은 1984년에 각각 재건됐다.1896년 9월 양주향교에 근대식 양주공립소학교가 개교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양주군수 조정구가 명륜당 앞마당에 심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조정구(趙鼎九, 1860~1926)는 흥선대원군의 사위이자 고종의 매부로 홍문관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1899~1902년에 양주군수를 맡았다. 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내린 남작 작위를 거부하고 자결을 기도하기도 했다. 7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차남 조남익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해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에서 기거하다 노환으로 별세했다. 아들 조남승과 조남익, 딸 조계진을 두었다. 딸 조계진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 규학과 혼인해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을 낳았다. 순종이 사망 직전 한 유언을 구술 받아서 신한민보에 공개한 사람이다. 양주별산대놀이, 중요 무형문화재 2호 … 밤10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에 끝나 양주향교에서 5분 거리에 양주별산대공연장이 있다. 한양과 인접했던 양주에는 조선시대의 한양권 전통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양주 상여소리와 회다지, 양주별산대놀이가 대표적인 예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2호로 지정됐을 정도로 문화적,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다. 매년 5월 양주별산대놀이 정기 공연이 있다. 공연 중에는 주민들에게 떡도 나눠주고 탈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행사와 먹거리 장터가 열려 주민들의 흥겨운 잔치 마당이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는 통영오광대와 제11-2호로 지정된 평택 농악공연 등이 함께 진행되기도 해 우리나라 전통놀이 공연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대축제의 장이 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의 한 분파로 녹번, 아현, 구파발, 사직골, 송파 등지의 본산대와 구별하여 별산대로 부른다.약 250여 년 전부터 백정, 상두꾼, 건달로 구성된 한양 딱딱이들을 불러 놀게 하였는데 지방 공연 관계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잦아지자 아예 양주골 사람들이 직접 딱딱이패를 본떠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한 게 양주별산대의 시작이다.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한가위에 주로 연희됐다. 기타 대소 명절, 가뭄 때의 기우제에도 공연됐다. 연희는 한번 시작되면 대체로 밤 10시를 넘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놀이는 길놀이로 시작된다. 별산대 깃발과 영기를 앞세우고 연희자들이 풍물을 올리며 마을을 돈다. 낮에는 주로 부잣집에 들러 춤과 덕담을 베풀어 흥을 돋우다가 밤에 탈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탈고사’를 지낸다. 놀이 전 고사에는 삼색 떡과 과일, 소머리, 돼지다리 등이 올라온다. 제물과 제주를 음복해 취기가 돌면서 본격적인 놀이가 시작된다.산대놀이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사당(社堂: 오늘날의 연예인), 무당, 기타 늙고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해 현실 폭로, 풍자, 호색, 웃음과 탄식을 보여주는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서민 탈춤극이다.양주별산대는 모두 8과장 8경으로 구성돼 있고 사미승, 어린 중, 옴중(옴·피부병이 옮은 중), 상좌, 먹중, 팔먹중 등이 등장한다.모두 배역에 맞는 탈을 쓰고 나와 음악 반주에 맞춰 춤과 노래, 재담(대사)을 구사하는 종합예술이다. 각 배역의 재담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절로 흥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노골적인 음담패설에 민망해지기도 한다.등장인물이 쓰고 나오는 탈 모양도 매우 흥미롭다. 옴중은 옴이 옮은 중으로 검은 점을 얼굴 전체에 그려 넣는다. 원숭이, 애사당, 노장, 취발이 등의 모습도 흥미롭다.
2023-02-15 23:37:32
경남 고성군을 대표하는 절로는 금태산(金太山 해발 341m) 계승사(桂承寺)와 연화산(蓮花山 해발 528m) 옥천사(玉泉寺)가 있다. 계승사는 고성군 영현면 대법리, 연화산 줄기 서남쪽 금태산 자락 절벽에 자리잡은 작은 절이다. 신라 문무왕 15년(675년)에 의상대사(義湘 625~702)가 금태암을 창건했지만 사라졌다가 1963년 그 자리에 계승사를 신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이 절의 기반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수천 수만겹 퇴적 구조의 절벽이다. 절 마당 높은 축대도 가파른 계단도 퇴적암 판석들을 쌓아 올린 것이다. 시루떡처럼 쌓인 바위 속에 든 아득한 세월이 묻혀 있다.대웅전 요사채 앞 너럭바위에는 물결무늬의 화석이 존재하는데 1억년 전에는 이 곳이 거대한 호수의 얕은 물가였음을 말해준다. 흙바닥에 섬세한 물결무늬가 당시의 살랑거리는 물결을 연상케 한다. 계승사 보타전 앞의 홍매는 해마다 3월말에 요염하게 핀다.이 절의 지질층과 화석들은 1963년 옛 금태암을 이어받아 계승사를 창건하기까지 흙과 바위 더미에 묻혀 있었다. 절을 지으며 이런 소중한 유산들을 마구잡이로 파괴했다고 한다. 이 절의 약사전에 오르면 아득하게 펼쳐진 첩첩 산줄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경남 사천 쪽 와룡산(799m) 봉우리까지 한눈에 잡히는 명당 자리로 알려져 있다.계승사 기암괴석의 절벽 사이에 흘러 나오는 석간수(石間水)는 약수로 유명하다. 옛날에 석간수 자리에는 매일 부처님의 공양미(供養米)가 3되 2홉이 솟아 나왔는데 시봉행자(侍奉行者)가 욕심을 부려 공양미가 많이 나오도록 구멍을 키웠더니 그만 그날부터 공양미는 나오지 않고 석간수만 솟아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가 고려말에 산남도(山南道)로 내려왔다가 이 절에서 조선창업(朝鮮創業)의 꿈을 꾸고 잠시 수도하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금태산(金太山)이란 이름도 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명명이라고 전해진다. 다만 보타전 곁에 ‘모셔 둔’, 뒷산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커다란 바윗돌 ‘하심석’ 옆에, 절터에서 발굴했다는 반질반질하게 닳아빠진 오래된 맷돌들이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옥천사는 신라의 화엄종찰, 임진·정유왜란에는 호국사찰 계승사의 북동쪽,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건너 편에 연화산 옥천사(개천면 북평리)가 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이 창건하였다. 대웅전 뒤에 맑은 샘물이 나와 옥천사로 불린다. 연화사는 말 그대로 연꽃 같은 평안한 지형임을 말한다. 지금은 하동 쌍계사의 말사(末寺)이지만 문무왕 당시에는 화엄종찰로 지정된 화엄 10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임진·정유왜란 때는 구국 승병의 군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호국사찰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그 때문에 일본군에 의해 불타는 운명을 맞기도 하였다. 옥천사는 1700년대에는 이전에 비해 훨씬 큰 규모로 중창됐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건물인 옥천사 자방루는 중보에 그려진 비천상과 비룡상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듯 생동감 있다.대웅전으로 오르는 돌층계 옆에는 탐스러운 불두화가 봄을 기다린다. 전각들 중에서 한 명이 겨우 들어가 좌정할 수 있는 크기의 독성각, 산령각이 이채롭다. 불편함을 통해 제행무상을 깨닫게 하려는 수도자의 정신이 담겨 있다. 옥천각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유물 전시관인 보장각으로 간다. 보장각에는 옥천사로 입산한 근래의 뛰어난 선승인 청담 스님의 영정이 안치돼 있다. 1911년 일본 총독부는 사찰령을 제정해 왜색불교를 침투시켰다. 해방이 됐어도 왜색불교가 대세를 이뤘다. 1954년부터 청담 스님은 이를 바로잡고자 동산·효봉·금오 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을 시작했다.청담 스님은 “성불을 한 생 늦추더라도 불교 유신을 달성하겠다”며 정화불교운동을 선도했다. 1971년 11월 15일 서울 도선사에서 입적했다. 법정 스님은 그의 수제자로 애도문을 남겼다.공룡 발자국 화석은 고성 상족암뿐만 아니라 연화산 도립공원 안 옥천사 들머리 주차장 옆 물길에서도 만날 수 있다.산벚꽃 지고 열흘 후면 녹차 수확 … 2만명 녹차밭 비밀정원 ‘만화방초’고성군 거류면 은월리 벽방산(碧芳山, 해발 650m) 중턱에는 만화방초(萬花芳草)라는 개인 정원이 있다. 주인장인 정종조 씨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밤 따고 젖소 키우던 곳에 녹차밭을 조성해 ‘비밀의 화원’처럼 조성한 곳이다. 부산에서 무역업을 크게 하다가 IMF 외환위기가 터지자 스트레스를 잊으려 고향 땅의 아까시 나무를 캐내고 녹차밭을 일궜다. 산중수도한 덕에 사업은 다시 풀려나갔고 돈을 버는 족족 농장에 털어넣었다.동백나무는 충청도에서, 단풍나무는 전라도에서, 들꽃은 산과 들에서 얻어왔다. 외환위기 후 10년간 일주일의 반은 부산에서, 나머지 반은 농장에서 보내며 정원을 가꾸다가 2007년에야 일반인에 만화방초를 공개했다.만화방초의 차밭은 약 2만 평에 달하지만 소량만 수확한다. 비료나 농약을 안 쓰는 100% 자연산이기 때문에 품질은 최고를 자랑한다. 3년에 한번만 거름을 줘 야생녹차의 원기가 살아 있다.정사장은 녹차밭에 산벚나무를 심었다. 화사하기로 따지면 왕벚꽃이 낫지만 자연미는 산벚꽃을 못 따라간다. 향도 산벚꽃이 더 짙고 깊다. 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고 꽃이 차 수확 시기를 알려준다. 만화방초의 첫 차 따는 시기는 매년 벚꽃 지고 10일 후다. 밭고랑 사이에는 꽃을 심었다. 벚꽃이 지면 영산홍, 그 다음에는 금낭화, 가을에는 상사화가 피어난다. 꽃이 한창일 때는 푸른 차나무 한 고랑, 붉은 꽃 한 고랑이 교대로 산비탈을 물들인다. 이 곳의 수국 꽃밭, 나리 꽃밭, 수련 연못, 편백나무 숲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웬만한 식물원을 방불케 한다. 특이한 색깔의 산수국이나 수련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명물들이다.
2023-01-19 20:40:23
언제부턴가 경남 고성하면 ‘공룡의 고장’으로 각인됐다.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바닷가에는 푸른 남해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몽돌해변과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기암절벽과 계곡이 어우러진 극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펼쳐진다. 고성 상족암(床足岩)은 바위의 모양이 마치 밥상 다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해면의 넓은 암반과 기암절벽들이 계곡을 형성한 자연경관이 그야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인간의 상상력의 범위를 넘어선 자연과 시간이 빚은 창작품이다. 1982년 상족암 부근 해안에서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발자국 화석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덕명리(중심지, 서쪽)에서 상족암-촛대바위-군립공원-제전마을(덕명리의 동쪽)까지 6km에 걸쳐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들의 2000여 족적이 선명하다. 파도가 야금야금 깎아 먹은 해식애(海蝕崖)가 시루떡을 켜켜이 쌓은 듯하다.고성 공룡화석지는 두 발로 걷는 공룡과 네 발로 걷는 공룡 등 수 백 개에 달하는 여러 종류의 공룡 화석이 한 장소에서 발견돼 캐나다, 브라질과 더불어 세계 3대 공룡 유적지로 꼽힌다. 혹자는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와 더불어 세계 3대 공룡 발자국 화석지라고도 칭한다. 상족암군립공원은 1999년 천연기념물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1억5000만 년 전에 호숫가 늪지대였던 상족암 일대는 공룡들이 집단으로 서식해 발자국을 남겼다. 그 위로 퇴적층이 쌓이면서 암석이 되고, 그 뒤 지층이 솟아오르며 퇴적층이 파도에 씻겨 나가면서 공룡의 발자국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나게 된 것이다.해안가를 따라 길게 놓인 데크길을 따라 공룡발자국 화석을 찾아 나서 보자.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한 남해 바다에서는 차가운 겨울바람마저도 상쾌하게 느껴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병풍바위를 벗 삼아 데크길을 걸으면 중간중간 ‘공룡발자국화석지’ 안내판이 나온다. 암반 위에 주먹만 하게 움푹 팬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동그란 모양도 있고 깨진 별 모양도 보인다. 신기하게도 패인 자국들은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실체는 없지만 바로 내 눈앞에서 거대한 생물체가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 듯하다. 공룡들이 살고 있던 시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력을 1억 년 전으로 돌려놓아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공룡이 들려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무 데크가 끊기는가 싶더니 거대한 코끼리 다리 모양의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 유명한 ‘상족암’이다. 거대한 바위 사이로 비밀의 문처럼 좁은 틈이 있다. 한번 그 틈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다. 바위 아래서는 바닷물이 먹잇감을 노리는 뱀의 혀처럼 쉼 없이 날름거린다. 이곳은 ‘핫플’로 등극한 ‘인스타그램’ 성지다. 동굴 안쪽에서 바다를 향해 셔터를 누르면 환상적인 인생 숏을 얻을 수 있다.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에 맞춰 상족암에 가야 이 모든 것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공룡에 관심이 많다면 인근 고성공룡박물관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박물관에 가면 공룡의 탄생부터 멸종까지 모든 역사가 한눈에 펼쳐진다. 국내 최초의 공룡전문박물관으로서 공룡 진품화석 7점을 비롯해 복제화석과 모형공룡 등을 통해 공룡의 생태를 보다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다. 박물관 외관은 고성 상족암 일대에 많이 서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구아나돈의 몸체와 크고 작은 공룡 알을 겹쳐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광장에는 세계 최대 높이(24m)의 공룡탑과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시실에 마련된 다양한 종류의 공룡 골격들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또 공룡퍼즐, 공룡과 달리기코스, 3D 영상실 등 어린이들이 공룡과 친숙해질 수 있는 공간이 체험학습장소로 인기다. 고성의 진짜 아이콘은 공룡 이전에 ‘오광대 탈춤’ 고성의 진정한 아이콘은 공룡이 아닌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라 할 것이다. 고성읍의 군립 고성탈박물관에는 입구에 수십 개의 장승이 서 있다. 오광대 탈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탈이 전시돼 있다. 고성오광대 놀이는 문둥이춤 · 오광대춤 · 중춤 · 비비춤 · 제밀주춤 5마당으로 이뤄져 있다. 양반 계층의 위선과 형식에 치우친 윤리를 익살과 해학을 통해 조롱함과 동시에 서민 생활의 고달픔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민중극이다. 경남 합천이 발원지이며 1900~1920년에 통영오광대·창원오광대의 영향을 받았다. 고성 읍내의 북촌파와 남촌파라는 풍류 모임이 있었는데 각각 부유한 선비층과 서민층이 주도했다. 농악 위주의 남촌파가 시와 고전악기를 즐기던 북촌파의 분위기를 흡수하면서 1920년대부터 지금 전래되는 모습으로 굳어졌다고 전한다. 탈춤에는 해학적이지만 민중의 서러운 정서가 어디에나 담겨 있다. 초록빛 자연을 체험하는 참다래마을고성읍에서 서남쪽으로 22.5km 떨어진 하일면 송천리의 참다래마을에 가면 전국 최고 품질의 참다래를 맛볼 수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참다래는 자연에서 채취한 산약초와 천혜녹즙, 미네랄이 풍부한 해초류, 한방영양제 등 40여가지의 천연비료로 재배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고성 참다래는 당도가 19.5 브릭스로 일반 참다래(17 브릭스)보다 높다. 참다래는 한마디로 중국 원산의 다래과 식물의 일종이다. 키위는 뉴질랜드 식물학자가 중국 원산 참다래를 개량해 만든 품종으로, 생김새가 뉴질랜드의 국조라는 키위새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7년 국내에 뉴질랜드산 참다래 묘목이 도입된 이래 경남 고성을 비롯한 전남과 제주 일대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다. 1990년대에 수입산 키위와 구별하기 위해 ‘참다래’란 이름이 처음 붙여졌다. 뉴질랜드산 키위가 널리 알려진 탓에 아직도 참다래를 수입과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국산 과일이다. 참다래와 한국 토종다래는 엄연히 다르다. 토종 다래는 더 작고 당도가 떨어지고 과육이 모자라며 본래 야생이다. 참다래는 1~2월 가지치기를 시작해 5월말~6월초 개화, 9~11월 수확한다. 바나나와 마찬가지로 수확 후 숙성 과정을 거쳐 먹는 후숙 과일이다. 충분히 숙성된 11월에서 3월에 가장 달콤하고 판매가 집중된다. 고성의 참다래마을 농민들은 “고성 참다래는 충분한 일조량과 바닷바람, 따뜻한 기온 등 천혜의 자연조건과 친환경 농업기술로 재배돼 전국 최고의 품질과 맛을 자랑한다”고 말한다. 남해안 청정수역에서 잡히는 도다리는 고성의 대표 먹거리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다리는 3~5월 봄이 제철인 생선이다. 도다리가 봄에 맛있는 것은 생선이 담백하기 때문이다.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인 볼락(우럭을 조피볼락이라 함)과 신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 최고의 별미다. 쑥을 듬뿍 넣어 끓인 도다리쑥국은 겨우내 잃어버린 식욕을 되찾아준다.
2023-01-18 18:43:19
한국에는 같은 지명을 가진 지역이 4곳 있다. 경기도 광주(廣州)와 전라도에서 갈라져 나온 광주(光州)광역시, 강원도 고성(高城)과 경상남도 고성(固城)이다. 강원도 동해 최북단에 있는 고성은 높은 성을 뜻하는 반면 경남 남해 최남단의 고성은 견고한 성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두 지역은 역사 및 문화 면에서 전혀 다르다.경남 고성군은 북동쪽으로는 창녕군과 창원시, 서쪽으로는 사천시, 남쪽으로는 통영시, 북서쪽으로는 진주시와 접해 있다. 이 중 통영군과 가장 교류가 많으며 국회의원 선거구 역시 통영과 묶여 있다.모든 도시들은 저마다 고유한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더러는 소멸하고, 더러는 살아남아 ‘국가’를 이루며 발전해 왔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그런 방식으로 ‘헤쳐 모여’를 반복하였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에는 그 지난한 ‘탄생과 소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혀 있다. 운이 좋으면 공기 중으로 끌어 올려져 빛을 보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리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저 깊은 땅속에는 짐작할 수도 없는 ‘오래된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는 주로 ‘삼국’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경남 고성, 김해, 함안, 경북 고령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대 가야 고분군과 마주하게 되면 일종의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들 고분군은 ‘천년 신라’에도 ‘백제’에도 속하지 않는 ‘가야국’의 유산이기 때문이다.가야국에 대한 연구는 2017년 대통령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이 포함되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우선등재 대상으로 선정된 가야고분군은 정부가 정식 세계유산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는 문화유산이다. 경남 고성군은 삼한시대에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자국)의 본토였으며 고성읍은 소가야의 도읍지였다. 1세기 무렵 낙동강 서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가진 소국들이 등장했다. 후에 이들이 발전해 여러 가야국이 됐다. 3세기 경 지금의 고성에 둥지를 튼 고자국은 고사포국, 고차국 등으로 불리며 남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에 해상 세력으로 등장했다. 5세기 고자국은 인근 해상 세력을 규합해 ‘소가야국’을 세우고 교역 및 운송의 중심 역할을 하며 번영했다.그러나 가야국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고 신라에 흡수됐다. 가야국의 고유한 문화나 삶의 방식은 어떠했을까. 가야국은 언제쯤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가야국의 멸망 이후 가야국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았을까. 100% 신라인들에게 동화됐을까. 정리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질문을 머릿속에 구겨 넣고 송학동 고분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어떤 실마리가 찾아질지도 모른다.김수로왕의 막내 김말로가 세운 소가야, 송학동 고분군고성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6형제 중 막내인 김말로(金末露)가 세운 소가야의 옛땅이다. 말로왕 때부터 이형왕에 이르기까지 아홉 임금이 461년 동안 다스린 부족국가가 있었던 곳이다.고성읍 송학동(송학리) 고분군(사적 제119호)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구릉지대에 부드럽게 솟아 있다. 외견상 다른 고대국가들의 고분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주의 오름이나 경주 대능원을 축소해 옮겨온 듯도 하다. 소가야국의 왕과 지배계층들의 무덤인 송학동 고분군은 모두 3개의 구릉에 나뉘어 조성되어 있다. 총 7기의 무덤 중 구릉 정상부에 있는 무덤이 1호 분이다. 무덤군 중 가장 이른 5세기 후반에 축조됐고, 규모도 가장 크다. 돌무덤방을 만든 뒤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이다. 나머지 무덤들은 1호 무덤을 보호하는 딸린무덤이다. 옆으로 6세기 전반에 축조된 2, 3호가 위치해 있으며, 좌우 능선에 보토문 8기가 있다.고분군 앞쪽으로는 도로가 지나고 뒤편으로는 구도심 거리가 펼쳐진다. 고분 사이로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 주민들은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왁자지껄 고분군을 지난다. 송학동 고분군에는 마치 산 자들의 공간과 죽은 자들의 공간 사이에 어떠한 경계도 없어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산책로 꼭대기에 이르면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짧은 겨울 해는 봉분 사이로 몇 번의 자맥질을 하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안내문에는 이들 ‘고분군이 봉분을 먼저 쌓고, 쌓은 봉분을 다시 파내어 석곽이나 석실을 축조하는 분구묘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당시 백제나 일본에서 유행하던 무덤 축조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며 ‘고분들에서 발견된 일본과 백제의 토기 그리고 신라의 청동 그릇과 마구 등을 통해 소가야가 백제와 일본의 중간에서 해상 교역의 창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송학동 고분군이 축조된 방식이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더 궁금하다면 고분군 아래쪽에 건립된 ‘고성박물관’을 방문하면 된다. 고성박물관은 고성 송학동 고분군 사적 발굴 및 보존을 위해 2012년 5월 17일 개관했으며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고성박물관의 외관이 매우 이색적이다. 향로 모양 같기도 하고, 모자처럼도 보인다. 앙증맞기도 하고 고풍스럽기도 한 외관이 딱 향토박물관에 어울린다.박물관 내부도 무척이나 꼼꼼하고 알차게 구성돼 있다. 1층은 안내창구와 문화해설사 대기실과 북카페, 체험학습실,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본 전시실은 2층에 있다. 1층에 대형 스크린을 통해 고성의 가볼 만한 곳들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어 처음 방문한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전시물은 고성이 3세기경부터 ‘변진고자미동국’, ‘고자국’ 등으로 불리다 신라 경덕왕 16년부터 한자음화된 ‘고성’으로 굳어졌다고 소개한다. ‘단단한 성곽의 도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듯 고성 남산과 만림산에는 20여 개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2층 로비에는 송학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철갑옷과 투구를 재현해 실물 크기로 재현한 소가야국의 기마무사상이 서 있다. 말위에 올라탄 기사를 통해 가야국 무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고분을 조성하는 과정이 미니어처로 재현돼 가야국의 분묘 문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 다양한 형태의 토기와 검 등 유물들이 다량 전시돼 있다. 발굴 과정을 기록한 아카이빙관도 흥미롭다. 고성과 가야국에 대한 자료가 총망라돼 한 번쯤 방문할 만한 곳이다. 2023년 5월 31일까지 ‘고성박물관 10년의 기억전’이 열린다.한려수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문수암고성군 상리면 무선리에 위치한 무이산(武夷山 해발 546m)은 삼국시대부터 해동의 명승지로 유명하며, 국선 화랑들이 무예를 연마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무이산 정상 아래에 신라 성덕왕 5년(706) 의상조사가 창건한 문수암(文殊庵)이 자리하고 있다.문수암의 창건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남해 금산의 보광사로 기도하러 가던 의상대사는 고성 무선리의 한 촌락에 머물게 됐다. 그날 밤 의상대사의 꿈속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내일 아침 걸인을 따라서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 찾아가 보라’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날이 밝으니 노승의 말처럼 걸인이 나타났다. 의상대사는 걸인을 따라 무이산에 올랐다. 무이산 중턱에 다다라 주변을 둘러보니 아래로는 바다와 수많은 섬들이 떠 있고,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는 다섯 개의 바위가 오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마치 오대산처럼 보였다.이때 걸인이 오대를 가리키며 ‘여기가 내 침소다’라고 말을 하자 갑자기 또 한 명의 걸인이 나타나더니 둘이 손을 잡고 바위 틈새로 사라졌다. 의상대사가 걸인들이 사라진 틈새를 살피니 걸인들은 이미 보이지 않고 석벽 사이에 문수보살상이 보였다. 의상조사는 꿈속의 노승이 관세음보살이고 두 걸인이 문수와 보현보살임을 깨닫고는 문수암을 지었다.전국이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탓인가. 문수암 가는 길은 적막했다. 한파의 영향이 우리나라 최남단 고성의 무이산까지 영향을 미쳤나 보다. 기온은 분명 영상인데도 무이산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살이 아플 정도로 살 속 깊이 파고들었다. 겨울철 계곡의 바람이 바다의 습기를 만나면 이렇게 독해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다행히 문수암 코앞까지 포장도로가 나 있었다. 그때의 그 안도감이란.그렇게 찾아간 문수암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고즈넉한 암자들에 울려 퍼지는 망치 소리는 아무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한창 작업 중인 기사에게 물으니 주차장을 짓는 중이란다. 속세를 벗어난 깊은 산속의 수행처에서까지 편리함을 고집하는 행태에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느껴지지만, 그만큼 문수암을 찾는 이가 많다는 방증이리라.주차장 공사 현장을 지나 암자로 오르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순간 이 세상의 풍경이라고 믿기 어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끝이 없이 아늑해 보이는 남해 바다와 바닷속에 보석처럼 송송 박혀 있는 섬들… 어째서 의상대사가 이곳에 지체 없이 문수암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라도 이 선경을 보았다면 무심코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고 했던가. 그림 같은 한려수도의 풍광에 홀려 문수암은 뒷전이다.겨우 눈길을 거두고 문수암을 바라보니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전각이 까마득하게 올려 보인다. 문수암에서 처음 대면하는 전각은 천불전이다. 시멘트로 지어진 건물에서는 특별한 감동을 느낄 수 없다.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대웅전(문수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2022년 12월 31일까지 증축 불사가 진행 중이라는 안내문에 막혀 법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대신 임시 법당이 운영 중이다. 대웅전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관음전과 독성각이 있지만 역시 공사 중이라 출입할 수 없다. 허무함이란 분명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의상대사를 문수암으로 이끈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사라진 석벽을 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니 문수암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하다.천불전 맞은편에는 사리탑과 전망대가 있다. 1973년 이곳에서 수도한 이청담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 또한 절경이다. 산봉우리들이 물결처럼 펼쳐지는가 싶으면 물결 사이로 섬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산인지, 바다인지, 산봉우리인지, 섬인지 좀처럼 구분할 수 없다. 순간 무념무상 상태가 된다. 원래 이 세상은 형체도 이름도 없이 그저 존재할 뿐임을, 모든 집착과 망상은 분별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멀리 봉우리 정상에 거대한 불상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보현사 약사전의 약사여래상이다. 문수암과 보현사가 거의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보현사 약사전은 문수암에서 차로 3~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보현사 약사전은 높이 13m에 달하며 동양 최대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보현사에서 마주 보이는 문수암이 또한 절경이다.문수암에서 머물렀던 짧은 시간은 마치 산과 바다 위로 펼쳐지는 불국정토에 잠시 머물렀다 온 듯하다. 문수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무이산과 고성 하일면 자란만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특히 문수암은 새해 첫날 해맞이 행사가 열릴 정도로 일출 모습이 빼어난 곳이다. 새해 첫날의 일출을 놓쳤다면 설날 일출은 문수암에서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고성군의 바다풍경 구경은 고성읍 동쪽의 거류면 당동만도 빼놓을 수 없다. 거류산 정상, 그게 어렵다면 중턱 전망대까지만 올라가도 활짝 트인 당동만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은 가을 풍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누런 벼와 파란 바다의 어우러짐이 시(詩) 같다고. 거류산(巨流山 해발 570m) 전망대에 오르려면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장의사(藏義寺)를 지나야 한다. 고성읍내 남산공원에서도 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다. 3월말이나 4월초면 백목련이 흐드러진다. 하이면 바닷가의 높이 120m의 화력발전소 전망대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주말에 단체로 예약하면 일부 시설을 견학할 수 있다. 고성 앞바다의 사량도와 남해군 창선도, 서쪽의 삼천포대교가 두루 한눈에 잡힌다.시루떡 같은 판석으로 쌓은 돌담이 아름다운 학동마을 고성읍의 송학리(송학동)와 다른 서쪽 하일면의 학림리(학동)이 있다. 350년 전 형성된 전주 최씨 안렴사공파의 집성촌이다. 임진왜란의 여파가 잠잠해지기 시작한 1600년경 처음 들어섰다. 한 때 150여세대가 모여 살 정도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50여세대 100여명의 주민들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백학포란지형’으로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이 학이 마을을 감싸 안은 듯한 마을이다. 마을의 볼거리는 아늑한 고택들과 이를 굽이치듯 보호하고 있는 돌담길이다. 2006년 6월 국가등록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된 학동마을의 돌 담장은 마을 뒤 수태산에서 채취한 두께 2~5cm의 납작돌과 황토를 결합해 바른 층 쌓기로 만들어졌다.돌담은 모두 얇은 판석들로 쌓아져 있다. 기와를 전혀 쓰지 않고 덮개돌(개석)까지도 판석으로 덮은 돌담은 전국에서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출토되는 황토에는 골재 성분이 많이 포함돼있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사리 무너지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담장의 맨 아랫 부분엔 판석만을 평평하게 쌓고, 그 위로는 황토를 섞어 쌓고 중간중간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을 강담이라 하는데, 바람을 통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바닥이 판석인 것은 비가 와도 물에 젖지 않게 위함이다.돌담을 따라가면 전주 최씨 11대 종가인 최씨 고가(지방문화재 제178호)가 나온다. 현 소유자인 최영덕씨의 5대조인 최태순 선생이 고종 6년(1869년)에 지은 한옥이다. 안채, 익랑채, 곳간채, 대문간채, 사랑채 등 5채의 건물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예스러운 양반가옥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최영덕 고가(매사고택) 뒤뜰 텃밭에는 우물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두꺼운 덮개돌을 덮어놨는데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장수·부귀·자손번성을 바라는 뜻이면서, 천·지·인의 뜻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구멍을 통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렸는데, 지금은 펌프로 물을 끌어올린다. 사랑채 옆 250년 된 토종 동백나무는 3월이면 붉은 꽃을 활짝 피운다. 선비들의 정신을 맑게 해준다는 회화나무, 두 나무의 가지를 서로 이어놓은 연리지 모과나무도 있다.학동마을 들머리는 봄이면 살구나무와 목련 덕분에 환하다. 100년쯤 된 살구나무는 분홍빛 꽃송이들을 뭉게뭉게 피워 올린다.
2023-01-17 17:41:19
삼천포 시내의 주요 관광지를 걸어서 둘러봤다면 이젠 하늘 위에서 사천 바다를 감상하는 것도 각별한 재미다. 사천바다케이블카는 사천시 동서동의 작은 섬인 초양도(草養島)와 대방동 각산(角山, 삼천포항을 서남방향으로 둘러싼 산)을 오간다. 산-바다-섬을 잇는 2.43km 길이의 짧지만 다채로운 코스다. 대방정류장에서 출발한 케이블카는 보따리를 풀어 놓듯 삼천포대교와 실안해안도로와 초양도와 늑도(勒島) 등 푸른 다도해 풍경을 선물처럼 눈앞에 펼쳐 놓는다. 눈동자가 케이블카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이 케이블카가 초양도 정류장에 닿는다. 초양도에는 아라마루 아쿠아리움, 배 전망대, 동물원, 카페, 편의점 등 볼거리와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아라마루 아쿠아리움’에서는 인어로 불리는 매너티와 공룡의 후예 슈발, 초대형 하마 등 400여 종의 희귀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 설치된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대왕고래 뼈 조형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통합 승차권을 구매해 아쿠아리움과 동물원 등을 돌아볼 것을 권한다. 배 전망대에 서면 삼천포 대교와 인근의 섬으로 오가는 유람선과 고깃배들이 지나가는 평화로운 다도해 풍경을 지척에서 감상할 수 있다. 초양도 탐방을 마쳤다면 이번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각산으로 향한다. 해발 408m의 각산 정상에는 각산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고려 때 설치된 봉수대는 남해 창선도 대방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서 용현면 안점산 봉수대와 공양면 우산 봉수대로 연결했다고 한다. 봉수대 옆 군영 막사가 복원돼 있다. 각산 전망대에 올라서면 사천만 맞은편에 별주부전의 무대가 되는 ‘비토섬’(비토도, 飛兎島, 서포면 비토리)이 보인다. 서포면에서 연륙교(비토교)로 이어져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으며 별주부전테마파크, 비토국민여가캠핑장, 비토섬콘도미니엄 등이 조성돼 최근 핫한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5개섬을 징검다리로 연결한 ‘창선·삼천포대교’ 창선·삼천포대교는 2003년에 4월에 개통됐다. 남해군 창선면과 사천시 삼천포(대방동) 사이의 5개섬을 징검다리처럼 연결한 총 3.4km의 다리다. 창선면을 기점으로 남해도(본도), 무인도, 늑도, 초양도, 모개도가 연달아 이어져 있다. 낮에는 한려수도의 쪽빛바다를 볼 수 있다. 밤에는 교량에 설치된 오색의 조명과 어선의 불빛이 겨울바다 풍경을 빚어낸다. 1973년 남해군 설천면의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연결하는 남해대교가 국내 최초의 현수교로 수학여행 관광지가 됐다. 미국의 금문교를 축소한 모양이라고 칭찬받았다. 지금은 삼천포대교를 비롯해 인천대교, 이순신대교, 광안대교, 영종대교, 서해대교 등 큰 다리가 즐비하다. 그럼에도 삼천포다리의 범선 같기도 하고 옹기종기 이야기하는 모습의 다리는 정겹다.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 봉명산 다솔사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鳳鳴山) 자락에는 1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다솔사(多率寺)가 있다. 이름만 들으면 ‘소나무가 많아서’ 절 이름이 다솔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는 좋은 인재(또는 군사)를 거느린다는 의미다. 봉명산도 봉황이 노래한다는 뜻이니 좋은 기운이 모인 자리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만해 한용운이 이끌던 불교 독립운동 단체 ‘만당’이 이 절을 근거지로 삼았고, 소설가 김동리는 이곳에서 ‘등신불’을 썼다. 이 절은 503년(신라 지증왕 4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해 ‘영악사(靈嶽寺)’라 하였다. 636년(선덕여왕 5년)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했다. 676년(문무왕 16년) 의상(義湘)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솔사로 다시 불렀다. 1326년(고려 충숙왕 13년) 나옹(懶翁)이 중수했고, 조선 초기에 영일·효익 등이 중수했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된 것을 1686년(숙종 12년) 복원했다. 1748년(영조 24년)대부분이 소실됐으나, 1758년 명부전·사왕문·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화려한 과거와 달리 절은 규모가 작아 적멸보궁, 대양루, 응진전, 극락전 등 10여 동이 전부다. 일주문과 천왕문은 없다. 다솔사는 봉명산 군립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절을 출발점으로 삼아 산 구석구석으로 이어지는 흙길은 선명하고 푹신하다. 다솔사에서 보안암으로 이어지는 약 2㎞ 숲길은 적멸보궁 뒤 넓은 차 밭에서 시작된다. 이정표를 따라 걸으면 약 1시간 후에 산 동쪽 기슭 보안암(普安庵)에 닿게 된다. 숲은 굴참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생강나무 등 봄여름에는 무성했을 활엽수들이 낙엽진 채 근육질을 드러내고 겨울을 버티고 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소나무들이 잔향을 남긴다. 고려 말 승려들이 만들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보안암 석굴 안에선 커다란 돌부처가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기교미가 없는 모습이지만 오히려 넉넉한 이웃아저씨 같아 정감이 간다. 다솔사-보안암 산사길은 경북 문경 김룡사-대성암 숲길, 경남 고성 옥천사 숲길, 경북 김천 직지사 암자길, 경기 안성 청룡사 숲길, 강원 영월 법흥사 숲길과 더불어 가을에 둘러보고 싶은 산사로 가는 길로 꼽힌다. 이밖에 사천시에는 사천읍성(사천읍 선인리), 남일대 코끼리바위(향촌동), 진널전망대(향촌동), 다래와인갤러리(곤명면 신흥리), 항공우주박물관(사남면 유천리) 등 볼거리가 넘친다. 아무래도 사천시 여행은 최소 2박 이상의 여유를 가지고 찾는 게 좋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기온에도 영상의 날씨를 유지한다. 겨울철 여행지로 더없이 좋다.
2022-12-22 16:17:07
경남 사천시(泗川市)는 삼국시대 가야의 사물국과 군미국으로서 일찌감치 역사에 등장했다. 북쪽으로는 진주시, 서쪽으로는 하동군, 동쪽으로는 고성군, 남쪽으로는 남해군과 맞닿아 있다. 1995년 5월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돼 지금의 사천시가 됐다. 사천 동남쪽의 동(洞)으로 명명된 지역이 옛날 번성했던 삼천포시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있다. 장사꾼이 진주로 가야 돈을 버는데 엉뚱하게 장사가 안 되는 삼천포로 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같은 뜻은 아니지만 사천 여행자의 대부분은 삼천포로 빠진다. 그만큼 사천의 여행지의 대부분이 삼천포 일대에 몰려 있고, 삼천포로 가야 재미가 있다.노을이 아름다운 사천만 해안도로‘실안의 낙조를 보지 않고는 낙조를 논하지 말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낙조는 어디라 할 것 없이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실안마을에서 보는 낙조가 가장 아름답다 하여 사천 8경으로 꼽는다.사천시 대방동(大芳洞)에서 실안동(實安洞) 사이 사천만을 끼고 이어지는 약 6km에 달하는 실안해안도로는 남해안의 해안 풍경과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바닷가에 대나무발 벽을 세워 고기를 잡는 전통 어업방식인 죽방렴이 펼쳐져 더욱 특별한 풍광이 연출된다. 대한민국 바다에서 물살이 센 곳은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과 사천시와 남해군 사이의 사천 앞바다다. 이런 지형의 특성 때문에 죽방렴 어업을 할 수 있다. 조류에 대발로 밀려들어온 물고기들이 빠져나가지 못해 잡히는 것이다.그런가 하면 이순신바닷길 2코스가 지나는 해안도로 역시 낙조 명소로 손색이 없다. 2코스는 선진리성에서 각산(角山) 모충사(慕忠寺)에 이르는 12km의 둘레길이다. 걸어서 대략 3시간이 걸린다. 최초로 거북선이 출항했던 ‘거북선마을’을 둘러보며 낙조 감상을 해도 좋겠다. 선진리성(船津里城)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에 있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쌓은 왜성이다. 선진항의 북방에 있다. 삼면이 바다에 면하고 동쪽만 육지에 닿는 반도 지형에 성이 세워졌다. 바다와 가까워 이미 고려시대부터 조창을 설치했고 그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봄이 되면 벚꽃 1000여 그루가 장관을 이룬다. 이순신 장군은 선진리 앞바다에 거북선을 처음으로 등장시키며 왜선 13척을 침몰시키니 그게 바로 사천해전이다. 모충사는 바위와 선홍빛 진달래가 아름다운 곳으로 사천만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조계종의 사찰이지 이순신 장군 사당은 아니다. 그 옆 송포동 월천포(月川浦)의 모충공원(慕忠公園)은 1592년 7월 8일 사천해전이 벌어졌던 모자랑포(毛自郞浦)와 가깝고, 노량해전이 벌어진 노량목(露梁牧)이 멀리 바라보인다. 모충공원은 1953년 충무공 탄신일에 맞춰 지어진 기념공원이다. 모자랑포보다 약간 북방의 대포항이 있는 서포면 대포마을은 매년 7~8월 전어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거기서 조금 더 북으로 올라가면 사천대교가 나온다. 사천만의 서포면 자혜리(서편)와 용현면 주문리(동편)를 가로 지르는 다리로 2006년 12월에 개통됐다. 참고로 대포동(남양동 관할)은 대포마을에서 동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시 지역에 속한다. 붉게 물들어가는 남해안 갯벌은 고요함만이 가득하다. 시간이 갈수록 검붉은 색을 띠다 급기야는 까만 암흑으로 빛나는 낙조는 너무 아름다워 숨이 막힐 정도다. 혹여 크게 내쉬는 숨소리가 장엄한 자연의 의식에 누가 될까 숨죽여 바라볼 뿐이다. 바다와 바다 건너 섬들, 끝없이 펼쳐지는 광대한 갯벌, 갯벌 위에 솟은 부채꼴 모양의 죽방렴 …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형체들이 하나둘씩 어둠 속에 잠긴다. 온 세상의 모든 형체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편하게 큰 숨을 내쉰다. 먼 길을 달려온 나그네에게 이보다 따스한 위로가 있을까.동백과 바다 & 문학이 어우러진 곳 ‘노산공원’전국을 꽁꽁 얼어붙는 강추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사천에는 동백꽃이 한창이다. 삼천포 바다 끝, 삼천포항 동편에 위치한 노산공원에는 한창 동백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바닥은 떨어진 꽃잎으로 분홍색 융단이 깔린 듯하다. 다른 편에서는 새 꽃잎을 틔우기 위해 막바지 진통을 하고 있다. 노산공원은 구항과 신항의 경계 지점인 삼천포 팔포항 바닷가에 봉긋 솟아 있는 자그마한 언덕(노산, 魯山)에 있다. 바다를 향해 돌출한 그 끝에 오르면 삼천포 앞바다와 다도해, 삼천포대교, 멀리 청널공원까지 조망할 수 있다.넓은 암반 위에 설치된 데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디선가 구슬픈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이어폰을 잊어버린 노신사가 틀어 놓은 노랫소리인가 싶었지만 분명 공원 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이다.갯바위에 세워진 자그마한 여인상을 발견하는 순간 노래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다. 이 여인상은 1965년 발표돼 대중의 사랑을 받은 은방울 자매의 노래 ‘삼천포 아가씨’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당시 부산, 마산, 통영, 여수 등지를 오가던 연안여객선을 타고 오갔던 청춘 남녀의 애절한 사랑과 이별,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삼천포 아가씨’는 남해의 작은 항구 도시 삼천포항을 단숨에 전국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오늘도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삼천포 아가씨가 구슬퍼 보이기만 하다.‘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 / 어린 나를 울려 놓고 떠나가는 내 님이여 / 이제 가면 오실 날짜 일 년이요 이 년이요 / 돌아와요 네 돌아와요 네 삼천포 내 고향으로 <중략> 꽃 한 송이 꺾어들고 선창가에 나와 서서 / 님을 싣고 떠난 배를 날마다 기다려요./‘삼천포 아가씨’ 여인상과 물고기상을 지나면 데크길은 노산으로 이어지고 곧이어 ‘노산정’이 나온다. ‘노산정’에 오르면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삼천포 앞바다와 삼천포대교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청널공원의 랜드마크인 푸른 지붕의 풍차 모습도 멀리서나마 조망해 볼 수 있다.넋을 잃고 한려수도의 바다 풍경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향긋한 꽃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꽃 향의 진원지는 노산공원을 뒤덮고 있는 ‘동백꽃’. 12월 노산공원은 그야말로 동백꽃이 지천이다. 노산공원이 아니라 차라리 동백동산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하다. 11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12월에 절정을 맞이하는 사천의 동백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노산공원의 길목마다 활짝 핀 동백꽃이 화사하게 방문객을 반긴다. 분홍빛이 도는 사천의 동백이 여심을 붙들어 매는 터에 좀처럼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운이 좋으면 인적이 드문 노산공원의 동백 숲을 혼자서 독차지할 수도 있다.삼천포의 대표적 향토 서정 시인, 박재삼 노산공원에서 동백꽃 놀이를 충분히 즐겼다면 이제 ‘박재삼문학관’으로 발길을 돌려 보자. 박재삼(朴在森 1933~1997)은 삼천포를 대표하는 서정 시인이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여생을 지낸 시인은 가난과 억울함 등을 우리의 전통적 가락에 잘 실어 담았다고 평가받는다. 주요 작품으로 시집 <춘향이 마음>, <천년의 바람>, <뜨거운 달> 등이 있다.고향의 바닷가 햇빛 곱게 드는 언덕, 동백 숲에 자리한 시인의 집이 참으로 부럽다. 동백 숲에 그의 대표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문학관 입구에서 벤치에 편안하게 앉은 모습으로 방문객을 반긴다. 문학관에는 시인의 흉상과 시인의 서재 등이 꾸며져 있고 그의 대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문학관 옆에 호연재(浩然齋)라는 잘 지어진 한옥 건물 한 채가 보인다. 호연재는 조선 영조 46년(1770년)에 건립된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학당으로 지역 유림들의 학문을 논하고 시문을 짓던 곳이다. 1901년 ‘보흥의숙’으로 전환돼 교육기관으로 출범하였고, 1905년에는 ‘광명의숙’으로 이름을 바꾸어 사립학교로 정규교육을 시작하였다. ‘광명의숙’을 모태로 삼천포공립보통학교(현 삼천포초등학교)가 출범했다. 1906년 호연재를 출입하는 문객들이 일본의 침략 행위에 울분을 토하는 시문집을 발간하자 일본 경찰은 호연재를 강제 철거했다. 이후에도 호연재는 주경야독하는 초당 서재로 재건립돼 운영되면서 후에 3.1만세 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현재의 호연재 건물은 지역 시민들이 뜻을 모아 2008년 복원, 재건립했다.조선의 비밀 수군기지 ‘대방진굴항’ 신항에도 등대가 있지만 더 유명한 것은 구항의 옆에 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항구인 대방진굴항(大芳鎭掘港)의 작은 등대다. 방파제 끝에 서 있는 하얀 등대는 파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방진굴항은 빈번해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 25대 충렬왕 28년(1302)에 인공으로 조성된 병영지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 장군이 이곳을 수군기지로 삼아 거북선을 숨겨 두고 병선에 굴이 달라붙지 않도록 민물을 채웠다는 얘기가 전한다.사실상 폐쇄돼 쇠퇴한 것을 조선 순조(1801~1834) 때 인공항구(굴항)로 복원했다. 남해 창선도와 군사 연락,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대방선진을 설치가 주목적이다. 활 모양으로 둑을 쌓아 만을 만들고 굴항을 설치한 게 현재의 모습이다. 진주목 관하 73개면에서 수천명이 동원돼 1820년에 완공됐다. 이후 300여명의 상비군과 전함 2척이 상주했다고 한다. 굴항 북편에는 수군장과 병사들의 거처가 늘어선 수군촌, 곡식 2만섬을 저장할 수 있는 선진창이 있었다고 한다.‘굴항’이란 해안선으로부터 육지 쪽으로 땅을 파서 만들거나 해안선에서 바다 쪽으로 돌담을 쳐서 만든 군항 시설로 바깥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름대로 비밀 수군기지인 셈이다. 실제로도 바깥쪽에서는 기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더러 축대에 올라서도 사방으로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듯한 나뭇가지 때문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굴항 중간 쯤에 ‘고려 충렬왕 때 조성된 인공 병영지이며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왜구를 섬멸하여 사천대승을 거둔 해전사에 길이 남을 수군 요새’로 ‘충무공의 호국정신이 깃든 유적지’라는 내용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복원된 대방진굴항에는 주민들이 사용하는 작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다. 200년이 넘은 팽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사천 바다를 향해 세워져 있다. 대방진굴항 바깥쪽에는 삼천포대교와 삼천포항이 지척이며 안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돼 있다.팔포음식특화거리 & 삼천포용궁수산시장노산공원 바로 아래에 팔포(八浦) 매립지에는 ‘팔포음식특화거리’가 길게 늘어서 있다. 맞은편 2012년 어항구로 지정된 팔포항은 낚싯배, 수산물, 운반선 등 화물선이 이용하는 무역항으로 사량도, 수도도 등 인근 섬으로 출발하는 여객선이 출발한다. 팔포란 와룡산(臥龍山) 주봉의 급류인 선내천(한내)이 삼천포 선상지(삼각주)를 형성하면서 바다로 유입되면서 물줄기가 ‘여덟 팔’자로 벌어졌다 하여 붙은 지명이다. 팔포음식특화거리에는 횟집, 숙박시설, 별미 식당 등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싱싱한 자연산 생선회와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으며 숙박도 가능하다. 매해 가을이면 사천의 대표축제인 ‘사천시 삼천포항 자연산 전어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다리를 건너면 10년이 젊어진다는 ‘팔포십년다리’도 조성돼 있다. 이웃한 고성화력발전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와 어우러진 바다 풍경이 색다른 정서를 자극한다.노산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천포용궁수산시장’(옛 삼천포어시장)이 있다. 삼천포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삼천포 대표 수산시장이다. 약 270여 개의 점포가 자리 잡고 있다. 각종 활어와 수산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만날 수 있다. 지금은 방어가 제철이다. 혼자 온 여행객에게 방어 반 마리를 두말없이 회를 떠 주는 친절함에 눈물겹도록 고맙다. 매년 3월에는 도다리 세꼬시와 도다리쑥국을 즐길 수 있다. 삼천포용궁수산시장과 팔포음식특화거리에는 남해군에서 잡힌 선어들이 창선대교를 넘어 집결한다. 지금은 통영에 주도권을 뺏긴 느낌이지만 삼천포가 한참 잘 나가던 1970~1980년대에는 오히려 통영을 제쳤다. 진주 사람들도 당연히 삼천포에서 장을 보러 온다.
2022-12-21 09:19:12
2019년 9월에 개통된 목포해상케이블카는 길이 3.23km로 개통 당시 우리나라 최장 케이블카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은 2021년 10월 개통한 강원도 춘천 삼악산의 케이블카(3.6km)가 가장 길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목포 여행지 중 가장 뜨거운 곳 중 하나다. 북항, 유달산, 고하도 등 세 개의 탑승장이 있다. 보통 북항 탑승장에서 왕복권을 구입해 고하도 탑승장에서 하차해 고하도를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 탑승장에서 내려 유달산을 거닐게 된다.북항 탑승장을 출발한 케이블카는 서서히 목포 도심 상공을 가로지른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목포의 도심은 한때 우리나라 3대 도시에 속했던 목포의 화려했던 과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곧이어 유달산을 지나 목포 앞바다로 미끄러지듯 나간다. 북항에서 고하도로 향할 때에는 유달산에서 정차하지 않고, 고하도에서 북항으로 되돌아갈 때에만 유달산에서 하차한다. 관객 쏠림을 막기 위한 장치다.육지 구간은 고도가 낮지만 바다 구간은 해수면 120~150m 위를 달리며 아찔한 뷰를 연출한다. 왕복으로 40분, 편도로 20분이 걸린다. 평일에는 하루 2000명, 주말에는 하루 6000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주말에는 보통 탑승하는 데 30분이 소요된다. 케이블카를 타면 목포대교(죽교동 목포신외항(북항)과 유달동의 고하도를 잇는 다리), 서해의 고하도·외달도·안좌도·장좌도·율도·하의도, 멀리 해남의 화원반도 등 바다 위에 수많은 섬들이 점처럼 박혀 있는 다도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목포대교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 풍경과 목포 해상 케이블카의 야경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대한민국 야경 100선’에 속할 정도로 아름답다.유달산 아래 고하도 … 美 육지면 첫 시험재배 고하도(高下島)는 영산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유달산 아래에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간척으로 허사도(許沙島)와 합쳐졌다. 바라볼 게 없는 허무한 섬이라 하여 허사도라고 했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이후 108일 동안 머물며 전략을 정비했던 섬이다. 충무공 유적지(사당)와 목화체험 전시장, 목화 정원, 고하도 전망대 등이 있다. 목포는 1904년에 처음으로 미국산 육지면(陸地綿)을 도입한 곳이다. 육지면은 문익점이 들여온 재래면은 이불솜이나 의료용 솜, 완충재 등으로 사용되기에는 적합했지만 공업용으로는 미흡했다. 이에 비해 육지면은 수확량이 20~30% 더 많았고 섬유가닥이 길어서 현대적인 면제품을 생산하기에 알맞았다. 일본 영사 약송토삼랑(若松兎三郞)이 고하도에서 육지면 시험재배를 시작했으며 전라남도의 토양과 기후가 육지면 재배에 적합한 것을 확인하고는 전국으로 육지면을 확대 보급했다. 고하도 조선 육지면 발상지비가 목포시 달동 779-2(고하도 선착장)에 세워져 있다. 13척의 판옥선 모형을 격자 형태로 쌓아 올린 한 고하도 전망대에서 보는 다도해 풍광이 압권이다. 해안 산책로(해상데크)를 따라 아름다운 고하도의 해식애를 감상할 수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유달산 탑승장에서 하차해 유달산 탐방에 나설 수 있다. 탑승장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장정 10명도 너끈하게 앉을 수 있는 마당바위(해발 190m)가 나오고 유달산 최고봉인 ‘일등바위’(228.3m)까지 다녀올 수 있다.서산동 시화 골목 … ‘다순구미’의 애환 가득한 곳 유달산 자락을 따라 낡고 허름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고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목포 서산동.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제 몸뚱어리 하나로 살아가야 했던 항구 노동자, 바다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산꼭대기 마을이 ‘서산동 골목’이다.서산동과 이웃한 온금동은 과거 가난하고 핍박받던 목포 사람들의 애환이 묻어나는 곳이다.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둡고 침침한 방, 일어서면 머리에 닿는 낮은 천장, 창문 대신 벽에 뚫린 구멍 하나가 전부인 집들…. 2022년 온금동과 서산동 골목은 여전히 ‘다순구미’, ‘째보선창’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은 목포 어촌의 상징인 서산동, 온금동 사람들의 애환을 기리기 위해 인문도시사업의 일환으로 목포의 시인, 화가, 주민들과 뜻을 모아 2015년부터 3년에 걸쳐 ‘서산동 시화 골목’을 조성했다.시화 골목은 모두 4개의 골목길로 나누어져 있다. 골목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올라가며 널빤지에 새겨 담벼락에, 계단 난간에 걸어 둔 시들을 하나하나씩 읽어 나간다. 싯 구절들이 때로는 따뜻해서, 때로는 서글퍼서 발길을 멈추게 된다.다순구미, 째보선창, 지금은 폐공장이 된 조선내화, 조금쌔끼 등을 주제로 한 시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시구절마다 ‘다순구미’ 사람들의 고달픔과 애환이 짙게 묻어난다. ‘따뜻한 바닷가의 후미진 곳’을 뜻하는 ‘다순구미’는 과거 온금동의 또 다른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온금동 주민들조차 모르는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다순구미 풍경비좁은 골목에 낡은 의자 하나 햇살이 앉았다 갔는지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다<중략> 빨랫줄에 걸린 꽃무늬 몸빼바지 깃발처럼 나부낀다.알겠다. 문패가 없어도 바다에 나간 지아비 기다리며 늙어가는 지어미가 사는 집인 걸.용돈서산동 보리 마당에서 54년을 살면서 / 마늘 작업 / 시금치 작업 / 양파일 / 영감은 목수여서 초등학교, 우체국을 다 지었지 / 큰 아들 상고 / 둘째 아들 문고 / 딸네들은 중학교 밖에 /구래도 매달 주는 / 자식들 / 용돈에 / 이 엄마 행복하다 /고되지만 최선을 다한 삶에 행복해하는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맨 꼭대기 그 옛날 보리타작을 하던 ‘보리마당’에 오르면 고하도와 멀리 영암 땅이 보인다.서산동 시화 골목은 영화 촬영을 위한 ‘오픈 세트장’ 같다.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많은 영화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마을 입구에 영화 〈1987〉에 나온 ‘연희네 슈퍼’(김태리 집)가 자리 잡고 있다. 가게 문앞에 세워진 신문 가판대에는 ‘그날, 1987년 7월 6일자’ 신문이 연희가 꽂아 놓은 채 그대로 있다.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져 친구의 품에서 죽어가는 이한열의 사진이 여행자들을 먹먹하게 만든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화 속 가게가 박제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돼지 저금통, 쫄쫄이 젤리… 가게 달린 작은방 문을 열고 금방이라도 연희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뛰어나올 것만 같고, 연희의 ‘마이마이’(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서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 안갯속에 쌓인 길 /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 무지개와 같은 길 /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 그대여 힘이 돼 주오 / 나에게 주어진 길 / 찾을 수 있도록 / 그대여 길을 터 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유재하, 가리워진 길)입속으로 ‘가리워진 길’을 흥얼거려 보지만 연희도, 이한열(강동원 분)도 없는 서산동 시화 골목에 서 있으면 괜스레 가슴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듯 허전하다. ‘야만’이 휩쓸고 간 뒤안길에 서 있는 듯한 무기력과 황망함 같은 것이다.가수 유재하는 1987년 10월 31일, 25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달리했다. 영화 <1987>의 감독이 1987년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한 천재 음악가의 노래를 OST로 사용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과 유재하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미처 피어나지 못했던 너무도 짧아서 찬란했던 젊음이라는. 엔딩 크레디트에서 김태리와 강동원이 부르는 ‘가리워진 길’이 두고두고 진한 울림을 남긴다. 가리워진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스러져간 수많은 젊음에게 깊은 애도를!이번에는 김래원이 계단을 막 뛰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영화 <롱 리브 더킹 : 목포 영웅>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목포 조폭 조직의 보스인 김래원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개과천선한다는 내용의 ‘롱 리브 더킹’은 스토리의 진부함과 배우들의 낮은 연기력, 개연성 떨어지는 배경 설정으로 평단의 혹독한 평가를 받았지만 목포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목포 갓바위 … 영산강과 바다가 빚은 자연의 조각품영산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입암산(笠巖山, 해발 122m)을 배경으로 갓을 쓴 사람을 닮은 바위 2개가 나란히 서 있다. 일명 ‘갓바위’이다. 갓바위는 8000만 년 전 화산재가 굳어진 용결 응회암으로 천연기념물 500호로 지정돼 있다.해상보행교가 설치돼 가까이서 갓바위를 만나볼 수 있다. 갓바위는 오로지 오랜 시간 파도와 바람, 햇빛이 만들어 낸 위대한 자연의 조각품이다. 파도가 치거나 안개가 낀 날 염분이 포함된 물에 젖었다 마르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잘려나가고 패여 나가 지금의 모습이 됐다.갓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 온다. 아주 먼 옛날, 병든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소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은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부잣집 머슴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못된 주인은 젊은이를 부려 먹기만 하고 품삯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아들이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젊은이는 저승에서나마 편히 쉬시라고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아버지를 묻어 드리려다가 그만 바다에 관을 빠뜨리고 말았다. 젊은이는 자신의 불효를 뉘우치며 햇빛을 보고 살 수 없다면서 갓을 쓰고 아버지 묘를 지키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한참 후에 그곳에서 바위 2개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라 하고 작은 바위는 ‘아들 바위’라고 하였다.또 하나의 전설은 부처님과 아라한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나다 잠시 쉬어 가던 자리에 갓을 벗어놓고 그냥 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 갓이 바위가 됐다 하여 ‘중바위’(스님바위)라고도 한다.갓바위는 목포 야경 명소로도 유명하다. 해상보행교를 따라 경관 조명이 설치돼 밤이면 조명 빛에 반사된 갓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행교 일부 구간은 밀물 때 수면과 함께 1m가량 높아지는 부교로 건설됐다.갓바위 인근 평화광장 앞바다에서는 11월까지 저녁마다 ‘춤추는 바다 분수쇼’ 펼쳐진다. 국내 최대 바다 분수쇼와 K팝, 퓨전국악, 목포의 노래 등으로 스토리텔링한 창작 뮤지컬 공연 등이 선보인다. 공연 일정과 시간은 홈페이지(http://mokpowshow.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된 섬, 삼학도 … 공장지대에서 기념공원으로‘목포는 항구다’에 등장하는 삼학도는 목포 동쪽 앞바다에 나란히 떠 있던 세 개의 섬이다. 그러나 1968~1973년 간척 사업으로 육지가 되었다. 이후 한국냉동, 호남제분 등 공장들과 저장고, 선술집 등이 들어서면서 흉물스럽게 변했다. 최근 목포시가 인공 수로를 만들고 공원을 조성하는 등 복원 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그 옛날 삼학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옛날 유달산에서 한 청년이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청년에게 반한 세 처녀가 상사병으로 죽어 학이 됐다. 이 사실을 모르는 청년은 학을 향해 활을 쏘았다. 세 마리 학은 모두 목포 앞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그 자리에서 세 개의 섬이 솟아 오른 것이 삼학도이다.복원된 삼학도에는 ‘이난영공원’,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목포 어린이바다과학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1917년 목포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목포 공립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조선면화공장에서 여공 생활을 하다 16세에 되던 해에 태양극단에 입단해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등 불후의 명곡을 남기고 1965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이난영은 경기도 파주에 용미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사후 41년 만인 2006년 삼학도로 옮겨져 일명 ‘이난영 나무’인 배롱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다. 수목장 주변으로 ‘이난영공원’이 조성돼 있다.‘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기 위해 2013년도에 설립됐다.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및 한반도 긴장 완화를 통한 국제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대통령의 위대한 삶의 여정을 자료와 영상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기념관에는 노벨평화상 메달, ‘국군의날’ 기념식에 사용했던 의전 차량과 퇴임 후 사용했던 차량, 노벨상 수상 당시 입었던 옷, 대통령 내외의 밀랍인형, 업무용 책상 등이 전시돼 있다. 야외정원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제일 좋아했던 ‘인동초’ 정원도 조성되어 있다.삼학도 맞은편(서쪽) 목포종합수산시장(목포중앙수산시장)에는 목포의 명물 홍어와 먹갈치, 조기 등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목포 고하도의 앞바다(서쪽)에는 달리도가 있고 그 서편에 달린 작고 앙증맞은 외달도(外達島)가 있다. 때묻지 않은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낙조로 가족과 연인들이 즐겨 찾아 ‘사랑의 섬’으로 통한다. 갯벌체험과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백제의 별서정원’ 닉네임 가진 ‘이훈동정원’유달산 남동쪽 자락 유달동엔 ‘이훈동정원’이 있다. 조선내화 회장으로, 목포의 유력 기업인이었던 이훈동의 저택이다. 1960년대에 이미 공업국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혜안을 가진 이 회장은 제철산업의 필요성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역설했고 이후 포항제철이 탄생했다.1930년대 목포 최대 곡물상 우치다니 만베이(內谷萬平)가 목포 최고 명당에 지은 고급 대저택이다. 해방 후 해남 출신의 국회의원 박기배가 소유하였던 것을 1950년대에 이훈동(李勳東 1917~2010)이 사들였다. 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식 정원의 원형이 조선 서원 분위기로 일부 바뀌기는 했으나 일본 정원풍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개인정원으로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입구정원, 안뜰정원, 임천정원, 후원으로 이뤄져 있다. 각종 석탑과 연못, 조경수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백제 별서정원’이란 평가답게 자연 그대로의 경관이 수려하다.웨딩 촬영 장소로 인기를 끌었고 드라마 ‘모래시계’와 ‘야인시대’ 촬영지이기도 하다. 남쪽 정원 가운데 큰 후박나무는 당시 출연 배우의 이름을 따 ‘고현정 나무’라고 부른다. 저택 앞에는 이 회장의 호(聲玉)를 딴 성옥기념관이 있다. 2003년 자녀들이 건립했다. 추사의 예서와 행서, 운보의 채색화조 십곡병, 남농의 금강산 보덕굴 편액 등의 희귀한 서예와 그림, 도자기 등을 소장하고 있다. 근처 유달초등학교에는 우리나라 최후의 호랑이 박제가 눈길을 끈다.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한 농부가 사로잡았는데 연도가 확실하게 기록된 남한 최후의 호랑이다. 체중 180kg에 ‘임금 왕(王)’자가 뚜렷한 전형적인 한국 호랑이다.목포는 주식 시장에서 저평가된 우량주 같다.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도시다.
2022-11-22 08:31:14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보다 목포라는 도시를 더 잘 표현할 수가 있을까. ‘목포는 항구다’는 1942년 ‘목포의 딸’ 가수 이난영(李蘭影, 1916년 6월 6일 ~ 1965년 4월 11일)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대중가요의 제목이다. 목포가 어떻게 태어나 흥망성쇠를 거쳤는지를 말해주는 키워드로 ‘항구’란 말보다 나은 것은 없는 듯하다. 왜 ‘목포’(木浦)라고 불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영산강 하구와 서해 바닷물이 합류하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길목쟁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여 ‘목개’라 부르다가 한자로 ‘목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영산강 푸른 물결의 종착지였던 작은 포구마을에 불과했던 목포는 1789년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 개항장이 되면서 급성장했다. 한때는 우리나라 3대 도시에 속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한 시절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면화와 호남의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전초기지가 되면서 목포 사람들의 애환과 고충은 그 어느 곳보다 심했다.이난영의 대표작인 ‘목포의 눈물(1935)’에는 이러한 목포 사람들의 한과 설움이 그대로 담겨 있다. ‘목포의 눈물’은 단순히 목포의 눈물을 넘은 민족의 눈물이었고, 목포만의 노래가 아니라 나라 잃은 겨레의 노래였다. 특히 2절의 가사 중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란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3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유재란이고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쳤다는 곳이다. 누가 봐도 국권을 침탈한 일제를 향한 원한임을 알 수 있고, 자연스럽게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한 것이다. 님이란 이순신 장군을 가리킨 것이니, ‘목포의 눈물’은 독립을 눈물로 기원했던 노래인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본 경찰을 속이기 위해 ‘삼백연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으로 가사를 바꿔 불렀으니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민족의 노래였다.조선시대 수군 주둔했던 목포진 역사공원조선시대 호남과 경남 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의 중요한 길목으로 목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493년(세종 21년)에 처음으로 목포진 설치가 재가 됐고 1502년(연산군 8)년에 목포진은 성의 모습을 갖췄다.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이었던 목포진(鎭)은 목포영(營), 목포대(臺)로도 불렸으며, 우두머리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대, 만호진, 만호청이라고도 했다. 호남읍지에 따르면 당초 진성의 규모는 석축 둘레 1306척, 높이 7척 34촌이었으며, 성 안에 우물과 못이 각 1개소씩 있었고, 남문과 서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다.목포진은 한반도 서남해의 방어지역으로써 역할을 다 했으나, 1895년(고종 32년) 7월 15일 고종 칙령 제141호에 의해 폐진됐다. 1897년 개항 당시만 해도 진의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유적비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됐다. 2014년 120년 만에 일부가 복원되어 역사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붉은 홍살문과 유적비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객사 담장을 따라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이 그런대로 옛 목포진의 위상을 실감 나게 해 준다. 객사 뒤편 전망대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목포진의 역사를 말없이 증거하고 있다. 목포진에서는 목포 시내와 유달산, 바다 건너 삼학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정자에서 할머니 세 분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삼학도로 변신한 세 처녀가 환생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할머니들은 호남의 정치 1번지인 목포 사람답게 한창 새로 뽑힌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짐짓 ‘새 대통령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우리 같은 촌것들이 뭐 아나?” 하면서도 “근디 새 대통령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라며 뼈 있는 말을 덧붙인다. 서울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반도의 작은 도시에서도 듣는 것은 다 듣는 모양이다. 그래서 민심이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알아야 할 사람들이 민심 무서운 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3월~10월 매월 넷째 주 토요일마다 목포진지 객사 앞마당에서는 수군교대식이 열린다. 수군 무예시범, 진검 베기, 활쏘기, 수군 복장 입어보기 등 다양한 체험도 즐길 수 있다.목포진 맞은편에는 ‘소년김대중공부방’이 있다. 목포는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다. 전남 무안군 하의도라는 작은 섬에서 1923년에 태어난 김대중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36년 가족과 함께 목포로 이사 왔다. ‘공부방’은 목포로 올라온 김대중이 1936~1945년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젊은 김대중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일본영사관으로 쓰였던 목포근대역사관 1관1897년 개항과 동시에 목포에는 대한제국과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가 체결한 ‘목포 각국 공동 조계장정’에 따라 ‘조계지’가 형성됐다. 조계지란 외국인이 자유롭게 살며 경제 활동을 하면서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개항과 함께 목포로 몰려든 일본인들은 유달산 기슭과 남쪽 해안가에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했다. 일본 영사관을 비롯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경찰서와 법원, 학교, 신사, 우편국, 일본인 가옥 등이 들어섰다. 치밀한 계획 하에 구축된 일본인 거류지는 반듯한 포장도로와 가로수 길, 하수도 시설 등을 갖췄다. 상점과 식당, 숙박시설이 들어서면서 도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조선인들은 선창가나 묘지터인 유달산 북쪽 산기슭 등에 자리를 잡았다.목포 해안로 일대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구호남은행 목포지점(등록문화재 29호), 구일본영사관(국가사적 289호), 해안로 일본식 상가와 주택들, 일본인 교회, 목포부립병원과 관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전남 기념물 174호),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로 개조된 적산 가옥 등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관공서 건물이나 일본식 가옥이 다수 남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유달산 남쪽 노적봉 기슭에 위치한 ‘구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289호)’이다.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완공된 구 영사관은 현재 목포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다.시가지보다 높은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일본영사관 건물은 얼핏 보아도 권위적, 위압적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 위세를 실감하게 한다. 역사관 입구에 세워진 ‘목포 평화의 소녀상’이 가련해 보일 정도다. 목포 시민의 성금으로 제작된 ‘목포 소녀상’의 제막식은 2016년 4월 8일, 목포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1919년 4.8만세운동 기념일에 맞춰 거행됐다.돌계단 오른 편으로 난 언덕길을 오르면 영사관 마당과 붉은색 벽돌 건물 입구가 나온다. 영사관 마당에 서니 정면에 반듯하게 도로가 나 있고 주변에 상가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이 도로는 목포항까지 이어진다. 소위 말하는 일본인 ‘거류지’이다.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일본인 거류지는 모두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부지에 세워졌다고 한다.영사관 건물 외관 곳곳에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전범기 문양과 국화 문양이 장식돼 있다. 내부에는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벽난로 등이 남아 있다.구일본영사관 건물은 1905년 이후에는 이사청, 1910년부터는 목포부청으로 사용됐다. 해방 이후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 목포시립도서관, 1990년 1월부터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목포문화원이 이전함에 따라 보수 공수를 마치고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모두 7개 주제로 전시관이 꾸며져 있다. 조선 수군 진영인 ‘목포진’의 설치부터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목포의 역사와 생활상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역사관 뒤쪽 유달산 자락에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당시 적의 공격에 대비해 파 놓은 방공호가 남아 있다. 폭 2m, 길이 80여m의 방공호에는 강제 동원돼 굴을 파고 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앙상한 몸에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곡괭이질을 하는 조선인들은 당시 모든 조선인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전국에 일제가 파 놓은 방공호와 진지동굴이 흉악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고, 희생자들의 서러운 통곡이 멈추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역사관에서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면 ‘노적봉예술공원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목포를 대표하는 전원형 미술관으로 2층 상설전시관에서 목포 미술계의 거장 소화 김암기(蘇話 金岩基, 1932 ~ 2013) 화백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유달산과 그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영사관과 방공호에서 무거워진 마음을 훌훌 털어내고 목포의 예향에 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구 일본영사관에서 조계지였던 거리로 내려오면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있다. 토지를 매수해 높은 소작료를 받고 조선 농민에게 임대해주는 악역을 맡았던 기관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건축된 것으로 전해진다. 부속건물은 모두 철거됐고 장방형의 2층 석조 본건물만 아 있다. 외벽 양각 장식과 출입문의 석조 아치 현관 등이 눈길을 끈다. 지금은 ‘목포 근대역사관 2관’으로 운용되고 있다.충무공의 숨결 어린 유달산과 노적봉해발 고도 228.3m의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목포 유달산(儒達山). 노령산맥이 쉼 없이 달려와 무안반도 남서쪽 끝자락 바닷가에 멈춰 선 것이 목포 유달산이다.목포는 유달산과 노적봉(露積峰)을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되는 곳이다. 목포 어느 곳에 서 있어도 가깝게 혹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길동무처럼.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듯이 목포에는 유달산이 있다. 목포의 설움도 목포의 눈물도 유달산만은 모두 알고 있다.과거 유달산은 서남 해변의 군사 요충지로 해남과 무안의 봉수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영산강의 목을 지키는 요새였다. 유달산 동남쪽에 크게 솟아 있는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바위 위에 짚을 쌓아 올려 군량미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이 많은 수의 병력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라게 해 물리쳤다는 일화가 전한다. 볏가리를 쌓아 놓은 모양이라 하여 ‘노적봉’이라 하였다. 유달산의 정상은 일등바위라고 부르며, 유달산의 중심부에서 약간 남쪽에 있다.유달산에는 유달공원과 조각공원, 일제강점기 때부터 정오를 알리는 신호로 사용했다는 오포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새 천년 시민의 종, 유선각, 달선각 등 정자, 암벽폭포 등 둘러볼 곳이 많다. 유달산 북측면의 조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이다. 국내는 물론 외국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유달산 남서쪽의 낙조대는 서해의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는 명소다. 트레킹 길을 따라 유달산 속살을 만나봐도 좋고, 산행을 해도 좋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목포해상케이블카 위에서 유달산을 감상해도 좋다.
2022-11-21 09:25:26
충남 청양군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해 공주시와 붙어 있는 목면(木面) 송암리에는 구한말 의병장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모덕사(慕德祠)가 있다. 면암 최익현은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의 태두로서, 최고령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가채리에서 태어난 면암은 동향 출신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년~1868년)의 제자로 문학과 유학을 익혔다. 그는 송시열과 송준길-권상하-한원진, 이간-이항로를 잇는 노론의 정통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남곤, 정인홍, 한효순,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여러 번 결사 반대해 좌절시켰다.면암은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며 벼슬길에 올라 숭문원, 성균관, 사헌부, 사간원 등 주로 언관으로 지냈다. 언관의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반대하다가 눈밖에 났다. 1864년에는 흥선대원의 집권(1864~1873)과 개혁정책을 적극 지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북인을 등용하자 서인의 입장에서 비판적 시간을 갖게 됐다. 1868년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서원철폐령에 반대하며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관직을 삭탈당했다.명성황후와 여흥민씨 세력은 최익현과 손을 잡으려 애썼다.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됐고 반(反) 흥선대원군 세력과 제휴해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 등의 부실한 일처리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과격한 상소 내용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면암을 호조참판에 제수했다. 이어 그 해 10월 돈녕부 도정(왕의 친족이나 외척에 대한 계보나 보첩을 관장하는 정3푼 벼슬)에 올라 고종이 성년이 됐으므로 대원군이 섭정할 필요가 없으며 서원철폐령은 철회돼야 한다는 계유상소를 올려 대원군 10년 집권을 무너뜨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 측으로부터 왕의 아버지인 군부를 논박했다는 공격을 받고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됐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1876년 2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그 해 12월 도끼를 메고 개항을 해서는 안 되는 5가지 이유를 적은 이른바 도끼상소(持斧伏闕斥和議疏, 개항오불가 병자척화소)를 올렸다. 여러 척화소 중에서도 가장 논리정연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자신의 머리를 도끼로 쳐내야 개항이 가능하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지만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4년간 흑산도로 위리안치됐다가 1879년에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갔다.면암은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과 친일 집권세력의 갑오개혁(갑오경장)에 반발했다.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척사 운동에 앞장섰다. 유림 거두들이 단발령에 집단 반발하자 조정은 그 배후로 면암을 지목했고 내부대신 유길준이 체포를 위한 순검 1개 부대를 경기도 포천에 보내 투옥시켰다. 유길준은 직접 가위를 들고 최익현의 머리를 자르려했으나 완강하게 몸부림치자 끝내 삭발 기도에 실패하고 만다.면암은 1898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혹세무민하는 민당(民黨)이라 지적하며 제거(해산)할 것을 고종에 건의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 조약에 참여한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과 함께 전북 태인(정읍)에서 의병을 모집해 일본군에 대항하다 전북 순창에서 체포돼 대마도로 이송다. 대마도로 이송된 면암은 일본군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단식 투쟁을 하다 1907년 1월 1일 순국했다. 면암 최익현이 청양 모덕사에 모셔진 이유는 그가 비록 포천에서 태어났으나 1900년 충남 정산(현 청양군 목면)으로 이주해 모덕사 내 ‘중화당’고택에서 기거했기 때문이다. 고택은 면암이 1900년부터 1906년 의병 봉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유물 전시관인 ‘대의관’에는 선생이 생전에 사용하던 피혁류, 필기구 등 총 9종 128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서책과 서간문 등은 ‘춘추각’에 보관돼 있다.모덕사는 1914년 지역 유림들과 후손들이 건립했다. 고종이 내린 글 가운데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라는 구절에서 모자와 덕자를 취해 ‘모덕사’라 이름지었다. 매년 9월 16일 유림 주관으로 제향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다.해방 이후 백범 김구와 해공 신익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모덕사를 찾아 고유제를 지냈다. 1946년에는 김구가 환국고유제를 올렸다. 1953년 3월 13일에는 해공 신익희 선생이 6.25전쟁 중 북한군으로부터 수도 서울을 수복한 기념으로 환도고유제를 지내고 잣나무를 심었다. 당시 심은 잣나무가 지금도 모덕사 담장 너머 시원하게 자라고 있다.모덕사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성된 영당에는 ‘성충대의’라는 현판과 함께 면암 선생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영정은 면암이 73세 되던 해인 1905년 정산 현감으로 있던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현재 봉안돼 있는 영정은 서울대 이종상 교수가 모사한 작품이다. 매년 4월 13일 의병을 일으킨 날을 기념해 제향을 봉행한다.면암을 기리는 사당은 전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모덕사를 비롯해 경기도 포천의 채산사, 가평의 삼충단, 전북 군산의 현충단, 진안의 이산묘, 진안 마령의 영곡사, 순창의 지산사, 정읍의 시산사, 정읍칠보의 무성서원, 고창 도동사, 광주광역시 광산의 대산사, 전남 함평의 월악사, 곡성의 오강사, 구례 봉산사, 보성 모충사, 무안 평산사, 화순 춘산사, 유배지였던 제주도와 흑산도 등에 선생의 영장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에 순국에 일본의 이등박문과 중국의 원세개도 만사를 보내왔다고 하니 선비의 절개와 우국충정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할 것이다. 청양읍의 숨은 보석, 고운식물원 … 11만평 규모, 8600종 식물청양읍의 고운식물원은 1990년에 조성되기 시작해 2003년에 정식 개원한 친환경 자연생태식물원이다. 일반인에게는 자연휴식공간, 학생들에게는 생태학습장, 조경인에게는 실습장이 됐다. 11만3000평 규모로 사계정원, 튤립원, 단풍나무원 등 주제별 정원 33개이 꾸려졌으며 금낭화 하늘매발톱 땅나리 백작약 무릇 병꽃나무 생강나무 등 8600여종의 꽃과 나무, 희귀식물과 열대식물이 식재돼 있다. 2010년에는 환경부로부터 멸종위기 식물 서식지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돼 1급 보호지정 식물인 광릉요강꽃을 비롯한 진노랑상사화, 노랑붓꽃, 독미나리 등 50여종에 달하는 국내 희귀식물과 식물 유전자원을 보전관리 하고 있다. 희귀야생멸종위기 식물로 지정된 신안새우난초를 비롯한 국내 자생새우난초와 중국, 대만, 일본에서 수집된 희귀한 새우난초 120여종을 보유하고 있다. 숲 속 꽃과 수목들을 따라 각기 다른 분위기와 스토리가 있는 11가지의 환상적인 트레킹 코스와 산책로도 조성돼 있다. 아기들에게 인기 많은 습지원과 반딧불이 관찰장, 식물원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팔각정 전망대 등이 있다. 자갈길, 흙길, 잔디밭길을 맨발로 걸을수 있다. 숙박시설인 방갈로와 자체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 원예학을 전공한 청양 출신의 이주호 원장이 평생 모은 200억원의 사재를 털어 야산을 일구고, 세계 91개국을 다니며 식물원 운영 노하우 및 희귀식물을 수렴해 만들었다.입장료는 성인 8000원, 학생과 노인은 5000원이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고, 11월부터 3월까지는 오후 5시까지로 1시간 단축된다. 매년 8월말~9월초엔 청양 고추·구기자 축제청양은 청양고추와 구기자, 산나물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칠갑산을 중심으로 계곡과 분지 형태를 이루는 경작지는 부식질이 많고 배수가 잘 되는 토양과 일교차가 큰 기후 조건을 갖춰 고추와 구기자 재배에 최적의 조건이 된다. 매해 8월 말에서 9월 초에 청양 고추·구기자 축제가 열린다. 청양고추는 1983년 중앙종묘의 유일웅 박사가 경북 청송과 영양의 고추 재배 농가를 대상으로 3년간 연구 및 시험재배한 끝에 개발됐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청양군은 “1968년 중앙종묘가 청양에서 고추가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듣고, 청양군 농촌지도소 소장에게 품종을 골라줄 것을 부탁하고 좋은 종자가 선정되면 그 고추에 청양고추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며 기원이 청양임을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청양고추는 매운 맛을 나타내는 스코빌지수(Scoville scale, 캡사이신의 농도를 계량화)가 4000~1만2000에 달한다. 신라면의 스코빌 지수가 약 1300정도이니 3배 이상 맵다. 청양고추는 보통 잘게 썰어 음식에 매운맛을 더하거나 육수에 칼칼함을 추가하기 위해 사용한다.전국 구기자 생산량의 67%가 청양에서 생산된다. 구기자는 예로부터 복분자, 오미자, 사상자, 토사자와 함께 5자로 불리는 약재다. 진시황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면역증강, 뇌세포 활성화, 간기능 개선, 성인병 예방, 노화 방지, 피부 미용 등에 유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2-10-19 09:15:48
금강의 부여 구간을 흔히 백마강이라 한다. 백마강 서쪽에 위치한 충남 청양은 남쪽은 부여시, 동쪽으로는 공주시, 서쪽으로는 보령시, 북쪽은 홍성군과 예산군과 맞닿아 있다. 청양은 칠갑산, 우산(기룡산), 백월산(비봉산), 구봉산, 두타산, 관비산, 사자산 등 크고 작은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조선 후기 각지에서 발행된 읍지를 모아 편찬한 ‘여지도서’에 청양은 ‘세 방면이 높고 가파른 고개이며 서쪽이 조금 평평하며 지역이 외지며 토지는 메마르다’고 기술돼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권진(權縉 1572~1624)은 “낯위에 스치는 바람은 멀리서 불어오고, 마루 앞에 마주 뜬 달이 한없이 맑구나. 두 가지 맑은 천고의 이 땅, 취하여 쓴들 그 누가 다투리오.”라고 노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청양은 “본래 백제의 ‘고량부리현’이었는데 신라 때에 청무로 고쳐 임성군의 속현으로 만들고, 고려 초기에 ‘청양현’이라 고쳐, 고려 현종 9년에는 천안부로 불렀다가 홍주로 이속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청양은 6.25전쟁 때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부여에서도 청양은 오지로 통했다. 그 덕에 무분별한 개발과 도시화에서 거리를 두고 발전한 청양은 오늘날에는 환경오염이나 자연 훼손이 거의 없는 청정 지역의 대명사가 됐다. 칠갑산은 제천행사 올리던 신성한 땅 … 내포 지역과 전북 북부까지 조망청양의 칠갑산(七甲山 561m)은 해발이 낮아 험하지는 않지만 깊고 웅장한 산세, 울창한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비경을 자랑한다. 계절마다 색다른 자태를 뽐낸다. 봄에는 산철쭉과 벚꽃이 우아하게 단장한다. 여름엔 천연림과 시원한 계곡이 심신을 안정시켜준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지고, 겨울에는 천상 세계에 들어간 듯한 설경을 연출한다. 이 때문에 ‘청양 여행 1번지’ ‘충남의 알프스’로 불린다.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칠갑산은 백제의 도읍이 부여로 옮겨진 이후 국가 제천행사를 지내는 곳으로 신성시됐다. 북두(北斗)의 일곱 성인인 칠원성군(七元聖君), 또는 칠성(七星)을 뜻하는 칠(七)과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십간 중 으뜸인 갑(甲)에서 한하다. 천지만물 생성의 근원을 의미하는 칠과 천지시운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의 으뜸이 결합한 의미다. 칠갑산 고스락(정상부)은 꽤 넓은 평지이며 거기에 산제를 지낼 수 있는 상석이 있다. 사방이 훤히 트여있어 조망하기에 으뜸이다. 충남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어 내포(바다와 인접한 충남 서북부: 홍성 예산을 중심으로 서산 당진 태안 청양 보령 서천 아산 등을 아우름)의 산들을 비롯한 충남의 모든 산들은 물론 전북 북부의 산들도 볼 수 있다.지천(하류)과 잉화달천(중류) 등이 칠갑산의 깊은 계곡에 7곳의 명당을 만들었다 하여 칠갑산이라 부른다고도 한다.칠갑산은 차령산맥의 여맥으로 청양군 대치면, 정산면, 장평면에 걸쳐져 있다. 이들 3개면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정산 지역과 청양읍을 중심으로 북서부 청양 지역으로 생활권이 나뉜다. 정상을 중심으로 아흔아홉계곡과 까치내, 냉천계곡, 천장호, 장곡사 등이 우산살처럼 퍼져 있다. 여러 갈래 등산 코스 중 한치고개 산장휴게소를 경유에 정상으로 올랐다가 장곡사 쪽으로 하산하는 게 가장 일반적이다. 약 3시간이 걸린다. 캠핑하기 좋은 아흔아홉계곡과 한때 국내 최장이었던 천장호 출렁다리칠갑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어을하천, 작전, 지천, 금강천 순으로 흘러내린다. 대치면 개곡리와 장천리, 장평면 지천리 등 3개 마을을 경유한다.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혀 굽어지는 물의 모양이 갈지(之)자 닮아 ‘지천’, 아홉 번 굽어진다고 해서 ‘구곡’이라 한다. 지천구곡은 개곡리에서 지천리까지 약 5km를 달린다.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계곡을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른다. 여름에는 휘어지는 곳마다 넓은 자갈밭과 모래밭이 펼쳐져 캠핑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까치내와 물레방앗간 유원지는 수심이 얕고 유속이 느려 물놀이하기에 좋다. 칠갑산의 존재를 알린 데에는 무엇보다도 1989년 발표된 가수 주병선의 ‘칠갑산’ 노래의 공이 크다.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느냐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울어주던 산새 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애절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청양과 공주를 잇는 36번 국도를 따라 칠갑산 고개를 넘어가다 보면 갑자기 산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커다란 저수지와 그 위에 길게 늘어진 출렁다리가 보인다. 청양 여행에서 가장 핫한 칠갑산 ‘천장호 출렁다리’이다.2009년 완공 당시 길이가 207m로 국내 최장이자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긴 다리로 화제를 모았다. 출렁다리 주탑은 청양을 상징하는 붉은색 고추 3개를 모아놓은 형태다. 세계에서 제일 큰 고추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지자체가 하루가 멀다 하고 기록을 갈아 치우며 전국의 호수와 산골짜기에 길고 높은 출렁다리를 놓는 바람에 이제 천장호 출렁다리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칠갑산 천장호로 향하는 발길이 이어지는 이유는 칠갑산 아흔아홉계곡의 비경을 감상하기 위함일 것이다. 주차장에서 청양 칠갑산 천장호 출렁다리까지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향로정이라는 정자와 ‘콩밭 매는 아낙네’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하트 모양과 고추 모양으로 꾸며 놓은 포토존을 만날 수 있다. 호수 둘레를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고 등산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출렁다리를 건너오면 천장호 ‘황룡과 호랑이’ 전설을 만나게 된다. 천장호 인근에 살던 살던 아이가 몸이 아파 의원을 찾아가야 하는데 물이 불어 갈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천장호에서 승천을 기다리던 황룡이 승천을 포기하고 자신의 몸으로 다리를 만들어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본 호랑이가 감명을 받아 영물이 되어 천장호 인근의 주민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천장호를 건너 칠갑산에 오르면 악을 다스리고 복을 받아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해서도 많이 찾는다. 충남 삼곡사 중 한 곳, 가장 아름다운 길의 끝 ‘장곡사’ 칠갑산 골짜기에 위치한 청양의 장곡사(長谷寺)는 예로부터 공주의 마곡사(麻谷寺), 예산의 안곡사(安谷寺)와 함께 삼곡사로 불렸다. 긴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깊숙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절집들이다. 여기에 청양 운곡면 사자산(獅子山)의 운곡사(雲谷寺)까지 더해 사곡사로 칭하기도 한다. 장곡사 삼거리부터 장곡사까지 5.7km 구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봄이 되면 빼곡하게 심어진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팝콘처럼 터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벚꽃 터널 길은 싱그럽기 그지없다.장곡사는 벚꽃길이 끝나고도 한참을 더 달려야 한다. 아직 식사 전이라면 장곡사 가는 길에 포진해 있는 산채요리 전문점에서의 식사를 권한다. 마침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손두부 원조집이 눈에 띈다. 점심 장사를 끝내고 식당 마루에 길게 누워 휴식을 취하던 주인이 필자가 들어서자 귀찮은 기색 없이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이한다. 식당 주인의 달콤한 휴식을 깬 데 대한 미안함에 산채비빔밥에 손두부까지 주문한다. 직접 재배한 콩을 갈아 매일 아침 만들어내는 손두부는 시중 마트에서 판매하는 대기업표 두부들과 달리 단단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거칠지만 부드러운 두부 맛이 투박한 겉모습과 달리 속정이 깊고 부드러운 산마을 사람들과 꼭 닮았다. 산채비빔밥과 손두부로 주린 배를 채우고 나니 산마루 너머로 기울어가는 해를 보고도 마음이 느긋하다.장곡사는 ‘긴 골짜기’라는 뜻이다. 골짜기가 얼마나 길면 절 이름이 장곡사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장곡사는 칠갑산의 깊은 골짜기를 차로 한참 달려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잘 정비된 도로 덕분에 깊은 산속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장곡사는 신라 문성왕 때인 850년 보조선사 체징이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을 뿐 그 이상의 내력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전각들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오후 2시가 넘은 시간 장곡사는 깊은 정적에 파묻혀 있다. 돌 축대 위에 운학루가 먼저 반긴다. 돌 틈에서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가 부지런한 절 사람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15년 전 눈 내리는 겨울날 찾은 장곡사는 고즈넉함을 넘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고요함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장곡사는 시골 촌부처럼 아무 일 없이 늙어갈 일만 남은 절 같았다. 그러나 2022년 다시 찾은 장곡사는 예상과 달리 공사가 한창이었다.세월의 깊이를 머금고 있던 설선당에서는 새 단장을 마친 여인네의 분내가 났다. 부뚜막에 조왕신을 모셨던 공양간도 몰라보게 말끔해졌다.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절도 사람 사는 곳이라 절 사람들에게 무작정 ‘세월의 깊이’를 강변하며 불편함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공양간을 기웃거리고 있자니 멀리서 대뜸 “들어가면 안 돼요”라며 고함을 질렀다. 어디선가 필자를 지켜보고 있던 처사가 질러대는 소리였는데 순식간에 불청객이 되어 버린 듯하여 씁쓸했다. 오래된 친구처럼 가슴에 품고 있던 장곡사에 대한 호감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다.장곡사는 보기와 달리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를 다수 보유한 알부자 같은 절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하대웅전과 상대웅전 등 두 개의 대웅전이 있다. 시기적으로 상대웅전(보물 162호)은 14세기에, 하대웅전(보물 181호)은 16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절의 최상급 건물이다.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과 대웅전을 같이 둔 사찰은 여럿 있지만 대웅전만 두 개를 보유한 절은 장곡사가 유일하다. ‘기도의 효험’이 뛰어나 장곡산을 찾는 사람이 늘자 하나 더 만든 것으로 보인다. 증개축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사찰로 통합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상·하 대웅전은 일직선이 아니라 서로 엇갈리게 배치돼 있다. 상대웅전은 동남향, 하대웅전은 서남향이다. 상대웅전이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상대웅전은 비로자나부처가 주불로 모셔져 있으며 협시불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하대웅전은 약사여래가 주불이며 비로자나불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다. 두 대웅전 모두 석가모니불은 모시지 않았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축대 아래 하대웅전이 다소곳하게 서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을 한 하대웅전은 조선 중기 건물이다. 쇠붙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은 목조 건물로 새삼스레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든다. 하대웅전에는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이 모셔져 있다. 갸름한 타원형 얼굴과 반달 모양의 눈썹, 가늘면서도 눈 오똑한 코 등 당대 불상들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약사여래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문을 통해 고려 충목왕 2년(1346)에 조성된 불상임이 밝혀졌다.하대웅전에서 비스듬한 경사면을 따라 위쪽으로 50m 정도 올라가면 상대웅전과 응진전이 나오고 조금 더 위쪽 오른 편에는 삼성각이 자리 잡고 있으며 등산로로 연결된다.상대웅전 앞마당에 서면 멀리 칠갑산에 둘러싸인 장곡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힘겹게 산을 깎아내고 겨우 마련한 비좁은 터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애잔하다. 상대웅전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을 하고 있다. 법당 안에는 왼편부터 철조아미타불좌상, 중심불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및 석조대좌(보물 제174호)와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 등 불상 3좌가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과 약사여래좌상은 원래는 철조 불상이었으나 현재는 금동불사를 하고 약사여래의 상징인 약함도 새로 만들었다.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은 신라 말이나 고려 시대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재로 석조대좌와 광배 역시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니 눈여겨봐야 한다. 이 석조대좌는 넓은 사각형 모양의 화강암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상대를 쌓아 탑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하대석에는 겹잎 복련 무늬가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귀꽃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 위로 5단의 받침을 세우고 앞뒤로 2개씩, 좌우로 1개씩 안상을 새겼다. 상대석에는 활짝 핀 연꽃무늬를 돌아가며 새겨 화려함을 더했다. 철조약사여래좌상 뒤편에 세워진 나무 광배에는 연꽃과 불꽃 모양을 새겨 화려함과 장엄함을 더하고 있다. 나무광배는 애초 석조광배였으나 후에 나무 광배로 대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곡사 철조약사좌상은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영험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이와 함께 장곡사 미륵불괘불탱이 국보 300호로 지정돼 있다. 이처럼 장곡사에는 국보 2점과 보물 4점을 갖추고 있다. 장곡사 설선당은 충남도 유형문화제 151호로 지정돼 있다. 장곡사 초입에는 전국 각처의 장승 300여기를 재현한 장승공원이 있다. 장곡사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면 은행나무 가로수가 길을 이어 가을의 정취를 깊게 한다.
2022-10-18 17:12:44
강원도 동해시의 서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삼화동은 남서쪽에 두타산(頭陀山 1357m), 청옥산(靑玉山 1404m)을 품고 있다. 두 산의 계곡을 배경으로 수많은 기암절벽과 폭포 등이 어우러져 천혜의 절경을 이루는 일명 ‘무릉도원 명승지’가 있다. 두타산은 동해시 삼화동,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에 걸쳐 있다. 삼화사(三和寺)와 천은사(天恩寺)라는 천년 고찰이 자리 잡고 있다. 삼척 여행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천은사는 고려 때 이승휴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다. 천은사는 동해시의 경계에 인접한 삼척시 미로면에 있다.두타산의 두타는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를 닦는다는 뜻이다. 두타산은 보통 무릉계곡(관리사무소)을 기점으로 등반한다. 왼쪽길(남서길)은 삼공암, 미륵바위, 베틀바위, 산성터, 12산성폭포, 다래나무 군락지를 거쳐 박달계곡에 이른다. 오른쪽길(북서길)은 가장 대중적인 길로 삼화사, 관음암, 학소대, 옥류동을 거쳐 얼레지쉼터를 지나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에 이른다. 더 가면 박달계곡에서 두 길이 만난다.조선 태종 14년에 산세를 이용해 쌓은 두타산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두타산성 아랫길이 바로 옥류동에서 쌍폭포와 용추폭포으로 향하는 길이다. 박달재(박달계곡)는 옛 사람들이 정선군 임계면(정선의 북동쪽)을 거쳐 서울로 가는 고갯길이었다. 참고로 전통 트롯트의 노래가사에 나오는 천등산 박달재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 사이에 있다.지난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베틀바위와 마천루 협곡 구간이 2020년과 2021년 차례로 개방돼 탐방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두타산에는 눈누난나 힐링 코스, 야경일품산책코스, 베틀바위 산성길, 두타산 오름길 코스 등 다양한 트레킹 길이 조성돼 자신의 체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계곡을 건너면 길은 베틀바위 산성길과 용추폭포길 두 갈래로 나뉜다.A구간 :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1.5 km/편도 1시간 30분)B구간 :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 – 미륵바위(회양목 군락지) - 두타산성 쉼터(2.7km/편도 2시간 30분)C구간: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 – 두타산성 쉼터 - 마천루 협곡(12산성 폭포-다래나무 군락지-수도골 석간수 구간: 최고봉에 마천루 전망대 위치)- 선녀탕-쌍폭포 - 용추폭포(4.7km/편도 3시간)베틀바위 산성길은 줄곧 오르막과 가파른 돌계단길이다. 30분 정도 오르면 서서히 첫 시야가 트이면서 산 아래 리조트와 주차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컴컴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두 눈앞에 커다란 소 엉덩이처럼 푸짐한 산세에 털이 벗겨진 듯한 바위들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 계곡도 보인다. 허연 바위가 드러난 산들은 얼핏 보아도 거칠고 방문객에게 쉽게 곁을 내어 줄 것 같지 않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를 지나고 회양목 군락지도 지난다. 산세는 점점 더 험악해지고 도저히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느껴질 즈음 눈앞에 뾰족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드디어 베틀바위 전망대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수정처럼 날카롭게 깎인 바위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푸른 나무들이 바위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 기이할 정도다.해발 550m에 위치한 이 뾰족바위들은 베틀처럼 생겨서 ‘베틀바위’라고 불린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베틀릿지', '두타산의 소금강'으로도 통한다. 베틀바위에는 하늘나라 선녀가 벌을 받아 인간 세상으로 쫓겨나 비단 세 필을 짜고 개과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베틀바위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마천루 협곡으로 향한다. 베틀바위를 조금 지나면 미륵바위(회양목 군락지)가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약 2km 구간 끝에는 12산성폭포가 기다리고 있다.베틀바위부터 12산성 폭포에 이르는 구간은 가히 ‘한국의 장가계( 張家界)’라고 할 만하다. 중국 후난성 북서부의 장가계의 옛 지명이 무릉이었으니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듯하다.바위산들이 이중삼중으로 주름처럼 겹쳐 있고 짙은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며 피어오르는 모습은 순간 인간계가 아닌 선계에 들어온 듯하다. 주변은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이요, 하늘과 경계를 이룬 듯 서 있는 병풍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갑자기 계곡에서 긴 수염을 기른 신선이 나타나 ‘웬 놈이냐?’라고 호통이라도 칠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바위 끝에 매달린 잔도길을 내려오면 쌍폭포의 끝자락이 보인다. 쌍폭포는 두타산 정상과 박달계곡(두타산과 청옥산의 가운데 정상 지점), 청옥산과 고적대(高積臺) 물이 한곳으로 모여 형성된 폭포이다. 쌍폭포에서 50m 위쪽에 용추폭포가 있다. 신선봉 아래 3단으로 떨어지는 용추폭포는 주변의 반석과 어우러져 천하 절경을 빚어낸다. 한여름에는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용추폭포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쌍폭포에서 삼화사 방향으로 내려오면 이번에는 학소대(鶴巢臺)가 모습을 드러낸다. 청옥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너른 바위를 따라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곳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부른다. 양사언과 김시습의 글이 새겨진 무릉반석 … 토포사에 눌린 백성들의 恨 무릉반석을 지나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을 지나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에 이르는 구간을 두타산 무릉계곡이라 한다. 깨끗하고도 풍부한 물, 폭포, 기암괴석, 아름다운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여름 피서지로 최고이고 가을 단풍관광으로도 그만이다. 이 14km의 계곡길은 너무나 아름다워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경이 됐다.두타산 무릉계곡은 설악산 천불동 계곡, 포항 내연산 보경사 계곡, 오대산 노인봉·청학동계곡·소금강 등과 함께 동해안 4대 명승지로 꼽힌다.약 5000㎡(약 1500평)에 달하는 무릉반석은 그 자체로 절경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반석마다 어떤 생명체들이 꿈틀거리는 듯 수많은 묵객들이 새겨 놓은 글과 이름들이 빼곡하다. 돌에 새긴 글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또렷하고 정갈한 글씨체들이 더욱 감탄을 자아낸다.그 중에는 조선 전기 4대 명필가로 꼽히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초서체로 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글귀가 단연 눈에 띈다. 이 글씨는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 시(1571~1576) 무릉계곡을 방문했을 때 쓴 글씨라고도 하고, 옥호거사 정하언(玉壺居士 鄭夏彦)이 삼척부사 재직하던(1750~1752) 중 1751년(신미년)에 썼다는 설도 있다.무릉반석에는 단종의 폐위 이후 천하를 떠돌던 매월 김시습의 글도 있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이름들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들 속에는 조선시대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이들을 잡으러 나선 토포사들의 이름도 상당수라고 한다. 신해 3년 또는 계미 3년 등 연도와 이름을 함께 새겨 넣었다.토포사(討捕使)는 조선 후기 도적이나 화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특정 수령이나 진영장이 겸했던 특수 관직으로 명종 때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는 남치근이 이 직책에 임시로 임명된 적이 있다. 토포사가 제도화된 것은 인조 16년(1638)년 이후이다. 토포사들의 추적 대상에는 화적이나 도적뿐만이 아니라 탐관오리나 양반들의 폭정을 견딜 수 없어 달아난 선량한 백성들도 포함됐다. 이름들의 정체를 알고 나니 무릉도원은 한순간 으스스한 귀곡산장 같은 느낌으로 다가선다.실제로 두타산 무릉계곡은 임진왜란 때는 수천수만의 화살이 강물에 떠 흘러 ‘화살내’를 이루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고여 ‘피쏘(피로 물든 연못)’가 생겨났던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량학살이 일어나 7개의 커다란 피범벅 구덩이가 있었고 5000명이 한날한시에 총살당했다고 한다.1980년대 초 무릉계곡을 방문한 시인 김지하는 이곳에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의 피비린내 나는 아우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가 들었던 피와 고통의 소리는 시집 ‘검은 산 하얀 방’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중에 ‘너럭바위’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한 노인을 만났는데 가라사대사람은 손을 손으로 저울질할 일이다라고 하더라두타산은 일곱 개의 피복창이 있었다고 하더라오십 개의 우물 터가 있었다고 하더라오천 명이 한날한시에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사멧골 제사는 모두 한날한시라고 하더라피쏘 한복판에 물 못 들어가는 큰 구멍 하나 있다 하더라그 구멍 속에 한 여자가 발 거꾸로 해 지금도 떠있다 하더라돌아오는 길에피쏘 너럭바위 위에아로새겨진토포사! 토포사! 토포사!<김지하 ‘너럭바위’> 번득이는 것이왜 빛뿐일까요번득이는 것이 왜 눈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햇빛뿐일까요 하늘에 가득 찬 총알 총알 총알 그 구리의 빛은 찢어진 왼쪽 다리 끌며 당신 찾는데(......)가물거리는 마지막 생각가물거리는 마지막 눈 그 속에 타고 있는 삼화사 촛불 마지막 들리는 삼화사 독경소리 마지막 보이는 삼화사 쇠 부처님 아 아 물방울. <김지하 ‘피쏘’ 중> 무릉계곡 반석 초입에는 금란정(金蘭亭)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금란정은 1947년 삼척 유림들이 삼척 북평동에 건립한 정자인데 195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삼척 유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삼척향교'를 폐지했다. 이에 유림들은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 후인 1947년 금란정을 건립했다. 정자의 12기둥에는 '양사언이 붓을 휘두른 곳이고 '이승휴가 불경을 열파한 곳이다'와 같은 주련들이 새겨져 있다.금란정 앞쪽에도 초서체로 쓰인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암각 반석이 놓여 있다.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희미해지고 마모되자 1995년에 만든 복제품을 이곳에 두었다.후삼국의 화합 기리는 천년고찰 ‘삼화사’ … ‘고려망국 원혼’ 달래는 수륙재 도량 무릉반석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천년고찰 삼화사가 반긴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두타산과 청옥산의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삼화사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삼화사는 "서쪽 봉우리는 봉황이 춤추고 학이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며 남쪽 기슭은 용이 어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형세"라는 말이 전해온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흥덕왕 4년(829)에 창건됐다는 설도 있다. 삼화사는 경문왕 4년(864)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중창하여 삼공암이라고 하였다. 이후 측연대, 중대사로도 불렸다. 고려 태조 원년에 삼창되면서 세 나라(후삼국)를 하나로 화합한 영험한 절이라는 뜻으로 삼화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삼화사는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다. 또 조선 개국 당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추종세력을 삼척 앞바다에 수장했는데 그 원귀를 달래는 수륙재(水陸齋) 도량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전소돼 효종 때 몇 차례에 걸쳐 중건됐다. 현재 삼화사는 적광전(대웅전)을 비롯해 약사전, 극락전, 삼성각, 비로전, 범종각 등의 전각과 두타선원, 적묵당 등의 당우로 가람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로는 통일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제작된 적광전의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과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이 있다. 삼화사에서는 10월이면 국행 수륙재가 열린다. 수륙재는 정처 없이 떠도는 고혼(孤魂)과 아귀(餓鬼)의 천도(薦度 : 이승의 업을 소멸하고 극락으로 보내는 것)를 위한 의식을 말한다. 삼화사 수륙재는 조선 전기의 국행 수륙재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국가무형문화제 제125호로 지정돼 있다. 숨겨진 백두대간 트레킹로 ‘원방재’ ‘백복령’ 길 … 옛날 소금장사 넘던 고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트레킹 길로는 동해시 신흥동(행정동인 삼화동의 일부) 관촌마을과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로 넘어가는 원방재다. 원방재( 720m)는 백두대간에 걸쳐 있다. 정선군 임계면과 삼척시 하장면을 임도는 길이가 100km에 가까워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선호한다. 원방재에서 정선으로 향하면 부싯돌을 생산하던 ‘부수베리’가 나온다. 원방재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북상하면 백복령에 이른다. 남하하면 상월산, 이기령 구간이다. 백복령을 경유하는 42번 국도는 동으로는 강릉시를 거쳐 동해시에서 끝나고, 서로는 정선 평창 횡성 원주를 지나 여주 이천 용인 수원 안산 시흥 인천에 이른다. 백복령과 원방재는 삼척 강릉으로 소금을 사러 나갔던 소금장수들이 굽이굽이 지게를 메고 넘어다니던 눈물고개다. 백복령(白伏嶺) 일대에는 한 때 군사들이 많이 주둔해 군대(軍垈)로도 불린다. 동해시의 바다는 묵호항 외에 망상해수욕장과 추암촛대바위(추암동, 법정동은 북평동), 경복궁 근정전의 정동쪽에 있다는 대진마을(대진항) 등이 대표적이다. 대진항은 어달동 회타운과 망상해수욕장 사이에 있다. 대진동, 망상동(일부), 어달동은 모두 법정동으로는 묵호동이다. 촛대바위의 일출은 방송에 나오는 애국가 영상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22-09-17 22:21:19
동해시는 1980년 명주군의 묵호읍과 삼척군의 북평읍이 합쳐진 강원도 4번째 도시다. 춘천,원주, 강릉에 이어 인구가 네 번째로 많다. 그 다음 강원도 도시들이 속초, 삼척, 태백 등이다. 영동에서는 강릉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이름은 바로 접한 동해바다에서 따왔다.묵호읍을 동해시에 뺏긴 명주군은 군세가 급격이 약화돼 1995년 지방자치제 본격화에 따라 강릉시에 통합돼 소멸됐다.동해시는 동으로는 푸른 바다와 접하고 서쪽은 태백산맥에 기대고 있다. 바다와 산, 계곡, 천연동굴 등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1936년부터 무연탄을 실어 나르던 작은 항구에 불과했던 묵호항은 1941년 국제 무역항으로 개항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석탄 하역시설과 부두, 방파제 등이 보강됐고 쉼 없이 석탄과 무연탄, 수산물 등을 실어 날랐다. 석탄이 주요한 땔감이었던 시절, 묵호항은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배들과 선원들로 항상 붐비고 활기찼다. 그러나 석탄 산업의 쇠퇴와 함께 묵호항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항만 기능은 노후화되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묵호 출신의 작가 심상대는 ‘묵호를 아는가’에서 묵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전의 목호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판잣집이 이어졌고, 아랫도리를 드러낸 아이들은 오징어 다리를 물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붉은 언덕은 오징어 손수레가 흘린 바닷물로 언제나 질퍽하였다. 그때가 참다운 묵호였다. 가까운 바다에서도 풍성한 어획고를 올렸고 밤이면 오징어배의 불빛으로 묵호의 바다는 유월의 꽃밭처럼 현란하였다. 아낙네들은 오만 가지 사투리로 욕설을 해대며 오징어 가랑이에 겨릅대를 끼웠고 아이들은 수없이 끊어지는 백열전구를 사러 산등성이를 오르내렸다.묵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한 오징어와 조미공장에서 흘러나온 오징어 다리를 빨아야 하였다. 지독하게도 물고기를 먹어대던 시절이었다. 어느 집 빨랫줄에나 한 축이 넘거나 두 축에서 조금 빠지는 오징어가 만국기처럼 널려 있었고, 집집에서 피워 올린 꽁치 비늘 타는 냄새가 묵호의 하늘을 뒤덮었다. 후미진 구석마다 쌓여 있던 생선 내장의 악취, 비 온 다음 날 시뻘겋게 상한 오징어, 건조한 바닥에서 떨고 있던 개, 양동이로 머리를 후려치며 싸우던 공동 수도의 아낙네들, 욕설과 부패, 묵호의 모든 것이 그랬다.”묵호항 뒤편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꼬불꼬불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오르면 작가가 묘사했던 묵호를 만날 수 있다.비린내와 고단함 묻어나던 논골담길 … 이젠 벽화로 새 단장 2014년 겨울 처음 묵호를 찾았던 때 묵호에서는 소설 속 풍경처럼 비린내가 났다. 어쩌면 진짜 비린내가 아닌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비린내였을지도 모르겠다. 묵호(墨湖)의 바다는 심상대의 말처럼 소주처럼 투명한데 해저의 검은 바위가 다 드러나보이고 검은 물새떼들이 모여들어 묵호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검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논골마을의 비좁은 골목들은 막다른 골목인 듯싶다가도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졌다. 골목 끝에는 어김없이 꽁꽁 닫힌 대문이 있다. 절대로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은 대문이지만 놀랍게도 그 문에서 사람이 나왔다. 묵호의 논골담길은 묵호항과 묵호등대를 연결하는 비좁은 골목길이다. 계단마다 절망과 퇴락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했다. 빈곤과 고단함과 비린내가 뒤섞인 삶의 우울한 풍경이었다. 피난민들과 전국에서 몰려온 가난한 사람들이 언덕배기에 하나둘씩 다닥다닥 집을 짓고 살면서부터 만들어진 풍경이었다. 2018년 두 번째 찾은 묵호는 첫 방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여전히 논골담길을 구경삼아 어슬렁거리는 일은 불편했다. 비린내 진동하는 짐 보따리를 들고 힘겹게 오르는 할머니 옆을 카메라를 들고 벽화가 그려진 가난한 집들을 기웃거리며 지나거나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은 생각보다 곤혹스러웠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가끔 묵호가 궁금하고 찾아보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2월의 꽃샘바람이 부는 날, 삶이 뒤엉켜 심하게 외로움이 느껴지는 날, 그런 날들에는 오징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는 묵호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산등성이 논골담길 골목마다 푸근한 삶의 이야기들이 가득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막걸리 한 잔에 녹여내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성실함과 바다에 나간 아버지와 자식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과 내 처지와 너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를 걱정해 주는 공동체의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22년 다시 찾은 묵호에서는 삶의 비린내가 진동하는 과거의 묵호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논골담길의 벽화 속에서 과거의 묵호를 어렴풋이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2010년 동해문화원이 주관한 ‘어르신생활문화전승사업’의 일환인 ‘논골담길’ 프로젝트의 결과, 지역주민들과 예술가들의 손길을 거친 논골마을의 골목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2011년 하반기에는 묵호의 전성기를 표현한 벽화가 논골담길 마을에 그려졌다. 논골 1길에는 묵호를 밝혔던 일하는 사람들과 생업과 관련된 이미지가 풍부하며 논골 3길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화를 표현한 이미지들을 만나볼 수 있다. 논골마을 탐방은 한편으로는 골목마다 진솔하고 푸근한 삶의 스토리를 만나볼 수 있는 최고의 감성여행이 될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의 발전 과정을 만나볼 수 있는 역사탐방이 될 것이다.묵호 등대공원 … 푸른 바다와 늦여름 오징어잡이배 불빛묵호동 산 중턱에 위치한 논골담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길은 묵호등대로 향하게 된다. 묵호 등대에 서면 저 멀리 푸르디푸른 동해 바다와 묵호항 일대와 묵호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 절경 덕분에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를 끈다. 등대를 중심으로 조성된 ‘등대공원’에는 등대의 역할과 역사를 알 수 있는 ‘등대 홍보관’과 휴게시설이 연중 개방돼 관광객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묵호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상설 사진전과 전국의 아름다운 ‘등대 사진전’이 열리기도 한다. 바다가 어스름에 잠기는 여름날 저녁 묵호 등대에 올라 눈을 감고 앉아 있노라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또 저 멀리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불빛들 속에서 옛 묵호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논골마을 아래쪽 해안가에는 루프탑을 갖춘 세련된 카페들과 묵호의 명물 ‘도깨비빵’을 판매하는 소형 빵집, 온갖 도자기 공예품을 갖춘 개성 넘치는 카페 등이 늘어서 있다. 거리는 길지 않지만 느긋하게 걸어볼 만하다. 동해 익스트림 1번지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와 ‘해랑전망대’ 최근 동해 관광에서 가장 핫한 곳은 단연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라고 할 수 있다(도째비는 도깨비의 방언). 2021년 6월에 묵호등대와 월소택지(--宅地, 묵호동의 일부, 해발 50m의 구릉지) 사이 도째비골에 설치된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전망 시설인 ‘하늘산책로’와 스카이 사이클(와이어를 따라 공중을 달리는 자전거), 대형 미끄럼틀(자이언트 슬라이드) 등 각종 익스트림 체험 시설을 갖추고 있어 전 연령층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바다를 향해 난 ‘하늘산책로’는 주요 지점이 메쉬망과 투명 유리로 돼 있어 마치 바다를 향해 허공을 걷는 듯한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다. ‘해랑전망대’는 묵호 앞바다에 설치한 해상 교량 전망대로 동해 바다 위 파도 너울을 발아래서 느껴볼 수 있다. 묵호항의 역사와 묵호 마을의 정취를 가득 느끼고 싶다면 묵호 마을에서 하룻밤 숙박을 권한다. 민박집으로 개조한 묵호 마을 숙소들은 전망 하나만은 최고급 호텔 부럽지 않다.
2022-09-15 08:51:21
강원도 태백에는 201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백산(太白山 해발 1567m) 외에도 많은 험산준령과 휴양림, 야생식물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 한가운데 자리한 연화산(1171m)를 중심으로 함백산(1573m), 매봉산(1303m), 대덕산(1307m), 금대봉(1418m), 은대봉(1442m), 두타산(1353m), 구룡산(1345m), 면산(1245m), 백병산(1259m), 응봉산(998m) 등에 둘러싸여 있다. 태백산은 태백시의 남서쪽에 해당하고 강원도 태백시, 영월군, 정선군, 봉화군의 경계를 이룬다. 태백산에서 약간 북서쪽에 위치한 함백산은 해발이 오히려 태백산보다 더 높다. 함백산은 정선군과 태백시의 경계에 있고 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계방산(홍천군 내면, 1577m)에 이어 6번째로 높다. 태백산에서 함백산으로 향하는 만항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에 위치한 도로로 멋진 드라이브 코스다. 함백산 정상에서 백두대간과 태백 시내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일출은 물론 일몰을 조망하는 장소로도 최고의 자리다.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이 특수훈련을 할 때 다니는 대한체육회 선수촌 태백분촌도 함백산 자락에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추전역도 함백산의 줄기다. 만항재에서 정선군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의 하나인 정암사(淨巖寺, 정선군 고한읍)를 둘러볼 수 있다.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주장자(拄杖子, 지팡이를 꽂은 게 나무로 변함), 적멸궁, 수마노탑을 답사하면서 속세의 때를 벗겨낼 수 있다. 태백시 금대봉은 태백과 정선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동쪽은 매봉산, 남쪽은 함백산, 북쪽은 대덕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금대봉 하부능선 해발고도 920m에 위치한 천연 석회동굴인 용연동굴은 국내 최고 지대에 자리한 석회동굴로 약 3억~1억5000만년 전에 형성됐다고 한다. 여름엔 서늘한 냉기를 느끼고도 남는다. 한강의 오리지널 시원지라는 제당굼샘(제당궁샘)과 명색 상 한강의 시원지라는 검룡소도 다 금대봉에서 유래한다. 금대봉 정상을 꼭지점으로 남쪽으로는 두문동재, 동쪽으로는 매봉산, 북쪽으로는 분주령을 거쳐 대덕산에 닿는다. 두문동재에서 매봉산 정상을 거쳐 분주령에 이르는 능선길은 야생화 꽃구경을 원없이 할 수 있는 길이다. 양지꽃, 개별꽃, 피나물, 미나리아재비, 제비꽃, 산괴불주머니, 홀아비바람꽃, 얼레지 등이 5월이면 능선을 누빈다. 산괴불주머니와 얼레지가 이 중 가장 눈여겨 볼 꽃이다. 분주령에서 검룡소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체력이 달리고 꽃구경을 할 만큼 했다면 검룡소로 내려가는 것도 아쉬울 게 없다. 매봉산 북쪽 경사지에는 광대한 고랭지 채소 재배지가 펼쳐져 있다. 해발 1303m 지대에 이렇게 넓은 경작지가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초대형 풍력발전기들도 이런 풍경을 압도한다. 매봉산의 이런 정경을 ‘바람의 언덕’이라고도 한다. 대덕산은 봄보다는 초여름에 꽃이 장관이다. 범꼬리풀, 하늘나리, 노루오줌, 꿀풀, 여우오줌, 흑쐐기풀, 짚신나물, 선학초, 사상초, 일월비비추, 산꿩의다리, 현호색, 큰산장대꽃 등이 6월말부터 7월초에 능선을 장악한다. 대덕산 야생화 트레킹로는 환경부자 지정한 생태관광보존지역이다. 일년 중 2월 15일~5월 15일, 11월 1일~12월 15일은 트레킹로가 폐쇄된다. 태백고원자생식물원 ‘해바라기 축제’와 태백고원자연휴양림의 계곡 캠핑 태백고원자생식물원은 소 아홉 마리가 배불리 먹고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길지(吉地)인 구와우(九臥牛) 지역에 위치해 있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삼수령(피재) 아래, 해발 800~900m 높이의 분지다. 12만평 넓이의 식물원에 사라져가는 우리꽃 3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이 중 약 5만평이 매년 해바라기 꽃밭으로 조성돼 환하게 빛난다. 8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해바라기축제가 열린다. 식물원이란 명색에 걸맞게 연보랏빛 배초향, 연붉은빛 홑왕원추리, 보랏빛 꽃창포 등 여름꽃들이 화려한 색조와 세련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고지대답게 산비장이, 참취와 같은 가을꽃도 눈에 띈다. 고원자생식물원이 태백 도심에서 약간 북쪽의 황지동에 있다면 자연휴양림은 남동쪽 철암동에 있다. 휴양림은 2005년에 개장했으며 초입에서 끝까지 1.3km의 차갑고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항상 예약이 꽉 차 공실을 잡을 수 없다는 게 흠이다. 휴양림 계곡보다 한적하고 물 맑은 곳으로는 봉화쪽으로 20km를 따라가다 만나는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 계곡, 삼척시 가곡면 청옥산 자락의 가곡자연휴양림(삼척, 태백, 봉화 경계선의 꼭지점에 위치), 가곡면 풍곡리의 덕풍계곡 등을 추천할 수 있다. 삼척의 계곡들은 1급수로 버들치, 꺽지, 산천어, 꾸구리, 퉁사리\, 연준모치, 민물참게 등이 산다.
2022-08-29 09:13:20
태백에는 ‘권춘섭짚압’이라는 버스정류장 이름이 있다.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상사미마을의 버스정류장을 말한다. 버스승강장 인근에는 권상철씨가 사는 집밖에 없어서 과거에는 ‘권상철집앞’ 버스승강장이라고 불렀다. 정류장 인근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은 권상철 밖에 없었다. 처음 권상철집앞 승강장이 만들어진 것은 1999년이었다. 갑자기 암 진단을 받은 아내가 통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버스승강장이 멀어 걸어다녀야 하는 상황이어서 권상철씨가 당국에 지속적인 요청을 한 것.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 권상철씨의 이름을 따서 권상철집앞이라는 버스승강장이 세워졌다. 권상철 옹이 2010년에 사망하자 지금은 집을 물려받은 장남 권춘섭 씨의 이름을 따 ‘권춘섭집앞’이라는 버스승강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곳에서 태백 시내로 가다보면 오른편 산길 끝에 나오는 샘물이 바로 한강의 시원이라는 ‘검룡소’다. 개인의 이름을 따 명명한 정류소 이름은 왠지 훈훈하고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감자바우’의 순박함이 느껴지는 황지자유시장 … 8월엔 감자·옥수수 지천 낙동강의 시원이라는 ‘황지연못’에서 100여 m 거리에는 태백 전통시장인 ‘황지자유시장’이 있다. 1970년 4월에 개장한 이 시장은 해발 902m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시장이다. 특별히 살 것이 없어도 느긋하게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자. ‘감자바우’들의 순박함과 정겨움이 느껴진다, 8월엔 갓 수확한 감자와 옥수수가 지천이다. 할머니들이 새벽부터 일어나 빚어 쪄낸 감자떡과 인절미도 맛볼 수 있다. 시장 안에는 각종 생활용품과 과일, 나물 등을 판매하며 태백 한우를 밤새 우려낸 소머리국밥 등 푸짐한 먹거리 상가가 있다. 고단한 시대의 ‘잿빛 감성’ 태백 철암탄광역사촌 삼척이나 경상도 북쪽 사람들은 구문소 너머에 이상향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게 지금의 태백이고 1960년대 이후 20여년간 탄광촌으로 부와 사람이 몰린 역사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구문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간이 멈추어 버린 철암역과 ‘철암탄광역사촌’이 있다. 옛 광부들의 생활 터전으로 그들의 고된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태백시가 본격적인 탄광 사회가 된 것은 1936년 단일 탄광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장성 탄전의 석탄이 그 동쪽인 ‘철암리’(현 철암동)로 운반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철암이란 지명은 마을 북쪽의 백산과 경계 부근의 철도변에 높이 20m, 너비 30m의 큰 바위가 쇠 성분을 많이 함유해 ‘쇠바위’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옛 마을 이름도 ‘쇠바위마을’이었다. 1940년 새뜨리(새터) 부근에 기차역이 생기면서 본래 쇠바위마을을 웃철암(상철암)으로 부르고, 기차역과 그 부근을 철암, 철암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철암역은 석탄산업과 맥을 같이 한다. 장성에서 생산된 석탄은 철암역을 통해 전국으로 실려 나갔다. 광부의 꿈을 안고 전국에서 몰려들던 사람도 철암역을 거쳤다. 강릉역 역무원이 28명이던 시절 철암역 역무원은 300여 명에 달했을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금은 아주 드물게 석탄을 가득 실은 화물열차가 오갈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철암역은 한 시간이 지나도 이용객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한산하다. 매점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매점 주인은 손님 응대보다는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삶느라 더 분주했다. 2013년부터 운행되기 시작한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철암역의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철암역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철암탄광역사촌’이 있다. 건너편 철암천변에는 낡은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당장 내일 허물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건물들에는 단란주점, 대성사, 현덕건설, 진주성, 대성식당, 제일당, 호남슈퍼 같은 온갖 간판들이 생기를 잃은 채 걸려 있다. 한때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상가에는 이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이방인들이 두리번거리며 분주하게 건물들 사이를 들락날락 할 뿐이다. 이곳은 과거 탄광촌이었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빈 건물만 남았다. 빈 건물을 두고 철거와 보존을 두고 의견들이 엇갈렸지만 결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 두기로 했다. 탄광촌이 역사촌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순대국밥과 소고기국밥을 팔던 경북식당 입구 벤치에는 광부가 혼자 앉아 있다. 갤러리가 된 호남슈퍼에서는 지역 화가의 전시회가 열린다. 자료와 전시품을 통해 애잔한 파독 광부들의 삶도 접할 수 있다. 채굴 작업을 마친 광부들은 기름기 많은 돼지고기와 술로 작업 중 들이 마신 탄가루를 씻어내고 다음날 또다시 수백m 땅속으로 들어가는 고단한 생활을 연속했다. 그 고달픔이 그림과 전시물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당시 종교계에서는 탄광촌을 ‘대낮부터 취한 주정뱅이 도시’라고 꾸짖고 계몽하려 했지만 어디까지나 타인의 뭣 모르는 시선일 뿐이다. 오늘날 저질과 타락의 끝을 ‘막장 드라마’ ‘막장 국회’라고 하는데 막장의 어원이 ‘탄광 갱도의 막다른 끝’이라는 설이 유력하니 광산촌 민초의 실상을 폄훼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 뒤편 철암천변으로 가면 ‘까치발건물’을 볼 수 있다. 까치발건물은 천변 위에 바닥에 목재나 철재 지지대를 덧붙여 주거 공간을 넓힌 주거 형태를 말하는데 지지대 모양이 까치발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철암 탄광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건물 구조이다. 철암천 건너편 산등성이에도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폐광촌 허름한 집들에 지금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탄광촌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전망대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 아흔 살이 넘었다는 할머니를 만났다. 30대에 광부 남편을 만나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단다. 남편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등졌다. 왜 혼자 이곳에 남아 있냐는 필자의 질문에 할머니는 ‘떠나고 싶어도 어디로 가냐?’며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이곳은 60년 동안 뿌리를 내린 삶의 터전이다. 평생 애증이 얽힌 곳이다. 떠나려도 떠날 수 없는. 전망대에 오르니 국가등록문화재 21호인 장성광업소의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太白鐵岩驛頭 選炭施設)이 훤히 보인다. 선탄시설은 탄광에서 채굴한 원탄을 1차, 2차, 3차로 선탄하고 이물질을 분리하고 가공 처리한다. 1935년에 철근 콘크리트와 강재를 이용해 만든 근대적 공법의 구조물이다. 지금도 가동 중이다. 시티투어를 신청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2024년 가동 중단이 예고돼 있다. 장성광업소가 멈추면 태백시 지역경제와 주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질 것이다. 철암천과 맞은편 검은색 선탄시설에 노란색 햇살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근래에 만난 도시 중 가장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잿빛 탄광에 대비되는 총천연색 상장동 벽화마을 상장동 벽화마을은 150여명의 주민 대부분이 광부 출신인 태백선 문곡역 뒤쪽의 마을이다. 상장동은 함태광업소 사택촌이었다. 2011년 잿빛 탄광촌에 하나 둘씩 벽화가 그려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험난했던 기억을 지워버리느니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태백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벽화를 남기게 했다. 고단했으나 행복한 시절 일상이 그림에 담겨 있다. 채탄 작업을 하는 광부, 골목 모퉁이에서 광부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녀, 진폐증을 앓다 하늘로 간 할아버지(고 김병태) 무르팍에 앉은 손자, 광부 청년과 처녀의 사랑, 만원짜리를 입에 문 강아지, 고참 광부들에 골탕을 먹는 신입 광부(일명 햇돼지) 등이 그림에 살아 있다. 죄다 가슴먹먹한 이미지들이다. 똑같은 탄광촌이어도 철암동에는 잿빛의 침울함이 남아 있다면 상장동은 어두운 커튼을 걷도 빛을 맞아들이는 분위기다. 외지인에게는 동일 시간대에 상이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들이다.
2022-08-22 08:4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