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에 개통된 목포해상케이블카는 길이 3.23km로 개통 당시 우리나라 최장 케이블카로 화제를 모았다. 지금은 2021년 10월 개통한 강원도 춘천 삼악산의 케이블카(3.6km)가 가장 길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목포 여행지 중 가장 뜨거운 곳 중 하나다. 북항, 유달산, 고하도 등 세 개의 탑승장이 있다. 보통 북항 탑승장에서 왕복권을 구입해 고하도 탑승장에서 하차해 고하도를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 탑승장에서 내려 유달산을 거닐게 된다.북항 탑승장을 출발한 케이블카는 서서히 목포 도심 상공을 가로지른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목포의 도심은 한때 우리나라 3대 도시에 속했던 목포의 화려했던 과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곧이어 유달산을 지나 목포 앞바다로 미끄러지듯 나간다. 북항에서 고하도로 향할 때에는 유달산에서 정차하지 않고, 고하도에서 북항으로 되돌아갈 때에만 유달산에서 하차한다. 관객 쏠림을 막기 위한 장치다.육지 구간은 고도가 낮지만 바다 구간은 해수면 120~150m 위를 달리며 아찔한 뷰를 연출한다. 왕복으로 40분, 편도로 20분이 걸린다. 평일에는 하루 2000명, 주말에는 하루 6000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주말에는 보통 탑승하는 데 30분이 소요된다. 케이블카를 타면 목포대교(죽교동 목포신외항(북항)과 유달동의 고하도를 잇는 다리), 서해의 고하도·외달도·안좌도·장좌도·율도·하의도, 멀리 해남의 화원반도 등 바다 위에 수많은 섬들이 점처럼 박혀 있는 다도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목포대교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 풍경과 목포 해상 케이블카의 야경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대한민국 야경 100선’에 속할 정도로 아름답다.유달산 아래 고하도 … 美 육지면 첫 시험재배 고하도(高下島)는 영산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유달산 아래에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간척으로 허사도(許沙島)와 합쳐졌다. 바라볼 게 없는 허무한 섬이라 하여 허사도라고 했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이후 108일 동안 머물며 전략을 정비했던 섬이다. 충무공 유적지(사당)와 목화체험 전시장, 목화 정원, 고하도 전망대 등이 있다. 목포는 1904년에 처음으로 미국산 육지면(陸地綿)을 도입한 곳이다. 육지면은 문익점이 들여온 재래면은 이불솜이나 의료용 솜, 완충재 등으로 사용되기에는 적합했지만 공업용으로는 미흡했다. 이에 비해 육지면은 수확량이 20~30% 더 많았고 섬유가닥이 길어서 현대적인 면제품을 생산하기에 알맞았다. 일본 영사 약송토삼랑(若松兎三郞)이 고하도에서 육지면 시험재배를 시작했으며 전라남도의 토양과 기후가 육지면 재배에 적합한 것을 확인하고는 전국으로 육지면을 확대 보급했다. 고하도 조선 육지면 발상지비가 목포시 달동 779-2(고하도 선착장)에 세워져 있다. 13척의 판옥선 모형을 격자 형태로 쌓아 올린 한 고하도 전망대에서 보는 다도해 풍광이 압권이다. 해안 산책로(해상데크)를 따라 아름다운 고하도의 해식애를 감상할 수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유달산 탑승장에서 하차해 유달산 탐방에 나설 수 있다. 탑승장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장정 10명도 너끈하게 앉을 수 있는 마당바위(해발 190m)가 나오고 유달산 최고봉인 ‘일등바위’(228.3m)까지 다녀올 수 있다.서산동 시화 골목 … ‘다순구미’의 애환 가득한 곳 유달산 자락을 따라 낡고 허름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고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목포 서산동.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제 몸뚱어리 하나로 살아가야 했던 항구 노동자, 바다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산꼭대기 마을이 ‘서산동 골목’이다.서산동과 이웃한 온금동은 과거 가난하고 핍박받던 목포 사람들의 애환이 묻어나는 곳이다.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둡고 침침한 방, 일어서면 머리에 닿는 낮은 천장, 창문 대신 벽에 뚫린 구멍 하나가 전부인 집들…. 2022년 온금동과 서산동 골목은 여전히 ‘다순구미’, ‘째보선창’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은 목포 어촌의 상징인 서산동, 온금동 사람들의 애환을 기리기 위해 인문도시사업의 일환으로 목포의 시인, 화가, 주민들과 뜻을 모아 2015년부터 3년에 걸쳐 ‘서산동 시화 골목’을 조성했다.시화 골목은 모두 4개의 골목길로 나누어져 있다. 골목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올라가며 널빤지에 새겨 담벼락에, 계단 난간에 걸어 둔 시들을 하나하나씩 읽어 나간다. 싯 구절들이 때로는 따뜻해서, 때로는 서글퍼서 발길을 멈추게 된다.다순구미, 째보선창, 지금은 폐공장이 된 조선내화, 조금쌔끼 등을 주제로 한 시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시구절마다 ‘다순구미’ 사람들의 고달픔과 애환이 짙게 묻어난다. ‘따뜻한 바닷가의 후미진 곳’을 뜻하는 ‘다순구미’는 과거 온금동의 또 다른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온금동 주민들조차 모르는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다순구미 풍경비좁은 골목에 낡은 의자 하나 햇살이 앉았다 갔는지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다<중략> 빨랫줄에 걸린 꽃무늬 몸빼바지 깃발처럼 나부낀다.알겠다. 문패가 없어도 바다에 나간 지아비 기다리며 늙어가는 지어미가 사는 집인 걸.용돈서산동 보리 마당에서 54년을 살면서 / 마늘 작업 / 시금치 작업 / 양파일 / 영감은 목수여서 초등학교, 우체국을 다 지었지 / 큰 아들 상고 / 둘째 아들 문고 / 딸네들은 중학교 밖에 /구래도 매달 주는 / 자식들 / 용돈에 / 이 엄마 행복하다 /고되지만 최선을 다한 삶에 행복해하는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맨 꼭대기 그 옛날 보리타작을 하던 ‘보리마당’에 오르면 고하도와 멀리 영암 땅이 보인다.서산동 시화 골목은 영화 촬영을 위한 ‘오픈 세트장’ 같다.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많은 영화들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마을 입구에 영화 〈1987〉에 나온 ‘연희네 슈퍼’(김태리 집)가 자리 잡고 있다. 가게 문앞에 세워진 신문 가판대에는 ‘그날, 1987년 7월 6일자’ 신문이 연희가 꽂아 놓은 채 그대로 있다.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져 친구의 품에서 죽어가는 이한열의 사진이 여행자들을 먹먹하게 만든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화 속 가게가 박제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돼지 저금통, 쫄쫄이 젤리… 가게 달린 작은방 문을 열고 금방이라도 연희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뛰어나올 것만 같고, 연희의 ‘마이마이’(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에서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 안갯속에 쌓인 길 /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 무지개와 같은 길 /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 그대여 힘이 돼 주오 / 나에게 주어진 길 / 찾을 수 있도록 / 그대여 길을 터 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유재하, 가리워진 길)입속으로 ‘가리워진 길’을 흥얼거려 보지만 연희도, 이한열(강동원 분)도 없는 서산동 시화 골목에 서 있으면 괜스레 가슴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듯 허전하다. ‘야만’이 휩쓸고 간 뒤안길에 서 있는 듯한 무기력과 황망함 같은 것이다.가수 유재하는 1987년 10월 31일, 25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달리했다. 영화 <1987>의 감독이 1987년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한 천재 음악가의 노래를 OST로 사용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과 유재하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미처 피어나지 못했던 너무도 짧아서 찬란했던 젊음이라는. 엔딩 크레디트에서 김태리와 강동원이 부르는 ‘가리워진 길’이 두고두고 진한 울림을 남긴다. 가리워진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스러져간 수많은 젊음에게 깊은 애도를!이번에는 김래원이 계단을 막 뛰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영화 <롱 리브 더킹 : 목포 영웅>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목포 조폭 조직의 보스인 김래원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개과천선한다는 내용의 ‘롱 리브 더킹’은 스토리의 진부함과 배우들의 낮은 연기력, 개연성 떨어지는 배경 설정으로 평단의 혹독한 평가를 받았지만 목포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목포 갓바위 … 영산강과 바다가 빚은 자연의 조각품영산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입암산(笠巖山, 해발 122m)을 배경으로 갓을 쓴 사람을 닮은 바위 2개가 나란히 서 있다. 일명 ‘갓바위’이다. 갓바위는 8000만 년 전 화산재가 굳어진 용결 응회암으로 천연기념물 500호로 지정돼 있다.해상보행교가 설치돼 가까이서 갓바위를 만나볼 수 있다. 갓바위는 오로지 오랜 시간 파도와 바람, 햇빛이 만들어 낸 위대한 자연의 조각품이다. 파도가 치거나 안개가 낀 날 염분이 포함된 물에 젖었다 마르기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잘려나가고 패여 나가 지금의 모습이 됐다.갓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 온다. 아주 먼 옛날, 병든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소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은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부잣집 머슴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못된 주인은 젊은이를 부려 먹기만 하고 품삯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아들이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젊은이는 저승에서나마 편히 쉬시라고 바닷가 양지바른 곳에 아버지를 묻어 드리려다가 그만 바다에 관을 빠뜨리고 말았다. 젊은이는 자신의 불효를 뉘우치며 햇빛을 보고 살 수 없다면서 갓을 쓰고 아버지 묘를 지키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한참 후에 그곳에서 바위 2개가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큰 바위를 ‘아버지 바위’라 하고 작은 바위는 ‘아들 바위’라고 하였다.또 하나의 전설은 부처님과 아라한이 영산강을 건너 이곳을 지나다 잠시 쉬어 가던 자리에 갓을 벗어놓고 그냥 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 갓이 바위가 됐다 하여 ‘중바위’(스님바위)라고도 한다.갓바위는 목포 야경 명소로도 유명하다. 해상보행교를 따라 경관 조명이 설치돼 밤이면 조명 빛에 반사된 갓바위와 바다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보행교 일부 구간은 밀물 때 수면과 함께 1m가량 높아지는 부교로 건설됐다.갓바위 인근 평화광장 앞바다에서는 11월까지 저녁마다 ‘춤추는 바다 분수쇼’ 펼쳐진다. 국내 최대 바다 분수쇼와 K팝, 퓨전국악, 목포의 노래 등으로 스토리텔링한 창작 뮤지컬 공연 등이 선보인다. 공연 일정과 시간은 홈페이지(http://mokpowshow.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된 섬, 삼학도 … 공장지대에서 기념공원으로‘목포는 항구다’에 등장하는 삼학도는 목포 동쪽 앞바다에 나란히 떠 있던 세 개의 섬이다. 그러나 1968~1973년 간척 사업으로 육지가 되었다. 이후 한국냉동, 호남제분 등 공장들과 저장고, 선술집 등이 들어서면서 흉물스럽게 변했다. 최근 목포시가 인공 수로를 만들고 공원을 조성하는 등 복원 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그 옛날 삼학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옛날 유달산에서 한 청년이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청년에게 반한 세 처녀가 상사병으로 죽어 학이 됐다. 이 사실을 모르는 청년은 학을 향해 활을 쏘았다. 세 마리 학은 모두 목포 앞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그 자리에서 세 개의 섬이 솟아 오른 것이 삼학도이다.복원된 삼학도에는 ‘이난영공원’,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목포 어린이바다과학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1917년 목포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목포 공립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조선면화공장에서 여공 생활을 하다 16세에 되던 해에 태양극단에 입단해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등 불후의 명곡을 남기고 1965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이난영은 경기도 파주에 용미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사후 41년 만인 2006년 삼학도로 옮겨져 일명 ‘이난영 나무’인 배롱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다. 수목장 주변으로 ‘이난영공원’이 조성돼 있다.‘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기 위해 2013년도에 설립됐다.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및 한반도 긴장 완화를 통한 국제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대통령의 위대한 삶의 여정을 자료와 영상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기념관에는 노벨평화상 메달, ‘국군의날’ 기념식에 사용했던 의전 차량과 퇴임 후 사용했던 차량, 노벨상 수상 당시 입었던 옷, 대통령 내외의 밀랍인형, 업무용 책상 등이 전시돼 있다. 야외정원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제일 좋아했던 ‘인동초’ 정원도 조성되어 있다.삼학도 맞은편(서쪽) 목포종합수산시장(목포중앙수산시장)에는 목포의 명물 홍어와 먹갈치, 조기 등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목포 고하도의 앞바다(서쪽)에는 달리도가 있고 그 서편에 달린 작고 앙증맞은 외달도(外達島)가 있다. 때묻지 않은 청정함을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낙조로 가족과 연인들이 즐겨 찾아 ‘사랑의 섬’으로 통한다. 갯벌체험과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백제의 별서정원’ 닉네임 가진 ‘이훈동정원’유달산 남동쪽 자락 유달동엔 ‘이훈동정원’이 있다. 조선내화 회장으로, 목포의 유력 기업인이었던 이훈동의 저택이다. 1960년대에 이미 공업국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혜안을 가진 이 회장은 제철산업의 필요성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역설했고 이후 포항제철이 탄생했다.1930년대 목포 최대 곡물상 우치다니 만베이(內谷萬平)가 목포 최고 명당에 지은 고급 대저택이다. 해방 후 해남 출신의 국회의원 박기배가 소유하였던 것을 1950년대에 이훈동(李勳東 1917~2010)이 사들였다. 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식 정원의 원형이 조선 서원 분위기로 일부 바뀌기는 했으나 일본 정원풍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개인정원으로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입구정원, 안뜰정원, 임천정원, 후원으로 이뤄져 있다. 각종 석탑과 연못, 조경수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 ‘백제 별서정원’이란 평가답게 자연 그대로의 경관이 수려하다.웨딩 촬영 장소로 인기를 끌었고 드라마 ‘모래시계’와 ‘야인시대’ 촬영지이기도 하다. 남쪽 정원 가운데 큰 후박나무는 당시 출연 배우의 이름을 따 ‘고현정 나무’라고 부른다. 저택 앞에는 이 회장의 호(聲玉)를 딴 성옥기념관이 있다. 2003년 자녀들이 건립했다. 추사의 예서와 행서, 운보의 채색화조 십곡병, 남농의 금강산 보덕굴 편액 등의 희귀한 서예와 그림, 도자기 등을 소장하고 있다. 근처 유달초등학교에는 우리나라 최후의 호랑이 박제가 눈길을 끈다.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한 농부가 사로잡았는데 연도가 확실하게 기록된 남한 최후의 호랑이다. 체중 180kg에 ‘임금 왕(王)’자가 뚜렷한 전형적인 한국 호랑이다.목포는 주식 시장에서 저평가된 우량주 같다.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도시다.
2022-11-22 08:31:14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보다 목포라는 도시를 더 잘 표현할 수가 있을까. ‘목포는 항구다’는 1942년 ‘목포의 딸’ 가수 이난영(李蘭影, 1916년 6월 6일 ~ 1965년 4월 11일)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대중가요의 제목이다. 목포가 어떻게 태어나 흥망성쇠를 거쳤는지를 말해주는 키워드로 ‘항구’란 말보다 나은 것은 없는 듯하다. 왜 ‘목포’(木浦)라고 불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영산강 하구와 서해 바닷물이 합류하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길목쟁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여 ‘목개’라 부르다가 한자로 ‘목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영산강 푸른 물결의 종착지였던 작은 포구마을에 불과했던 목포는 1789년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 개항장이 되면서 급성장했다. 한때는 우리나라 3대 도시에 속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한 시절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면화와 호남의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전초기지가 되면서 목포 사람들의 애환과 고충은 그 어느 곳보다 심했다.이난영의 대표작인 ‘목포의 눈물(1935)’에는 이러한 목포 사람들의 한과 설움이 그대로 담겨 있다. ‘목포의 눈물’은 단순히 목포의 눈물을 넘은 민족의 눈물이었고, 목포만의 노래가 아니라 나라 잃은 겨레의 노래였다. 특히 2절의 가사 중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란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3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유재란이고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쳤다는 곳이다. 누가 봐도 국권을 침탈한 일제를 향한 원한임을 알 수 있고, 자연스럽게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한 것이다. 님이란 이순신 장군을 가리킨 것이니, ‘목포의 눈물’은 독립을 눈물로 기원했던 노래인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본 경찰을 속이기 위해 ‘삼백연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으로 가사를 바꿔 불렀으니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민족의 노래였다.조선시대 수군 주둔했던 목포진 역사공원조선시대 호남과 경남 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의 중요한 길목으로 목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493년(세종 21년)에 처음으로 목포진 설치가 재가 됐고 1502년(연산군 8)년에 목포진은 성의 모습을 갖췄다.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이었던 목포진(鎭)은 목포영(營), 목포대(臺)로도 불렸으며, 우두머리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대, 만호진, 만호청이라고도 했다. 호남읍지에 따르면 당초 진성의 규모는 석축 둘레 1306척, 높이 7척 34촌이었으며, 성 안에 우물과 못이 각 1개소씩 있었고, 남문과 서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다.목포진은 한반도 서남해의 방어지역으로써 역할을 다 했으나, 1895년(고종 32년) 7월 15일 고종 칙령 제141호에 의해 폐진됐다. 1897년 개항 당시만 해도 진의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유적비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됐다. 2014년 120년 만에 일부가 복원되어 역사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붉은 홍살문과 유적비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객사 담장을 따라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이 그런대로 옛 목포진의 위상을 실감 나게 해 준다. 객사 뒤편 전망대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목포진의 역사를 말없이 증거하고 있다. 목포진에서는 목포 시내와 유달산, 바다 건너 삼학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정자에서 할머니 세 분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삼학도로 변신한 세 처녀가 환생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할머니들은 호남의 정치 1번지인 목포 사람답게 한창 새로 뽑힌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짐짓 ‘새 대통령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우리 같은 촌것들이 뭐 아나?” 하면서도 “근디 새 대통령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라며 뼈 있는 말을 덧붙인다. 서울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반도의 작은 도시에서도 듣는 것은 다 듣는 모양이다. 그래서 민심이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알아야 할 사람들이 민심 무서운 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3월~10월 매월 넷째 주 토요일마다 목포진지 객사 앞마당에서는 수군교대식이 열린다. 수군 무예시범, 진검 베기, 활쏘기, 수군 복장 입어보기 등 다양한 체험도 즐길 수 있다.목포진 맞은편에는 ‘소년김대중공부방’이 있다. 목포는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다. 전남 무안군 하의도라는 작은 섬에서 1923년에 태어난 김대중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36년 가족과 함께 목포로 이사 왔다. ‘공부방’은 목포로 올라온 김대중이 1936~1945년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젊은 김대중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일본영사관으로 쓰였던 목포근대역사관 1관1897년 개항과 동시에 목포에는 대한제국과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가 체결한 ‘목포 각국 공동 조계장정’에 따라 ‘조계지’가 형성됐다. 조계지란 외국인이 자유롭게 살며 경제 활동을 하면서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개항과 함께 목포로 몰려든 일본인들은 유달산 기슭과 남쪽 해안가에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했다. 일본 영사관을 비롯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경찰서와 법원, 학교, 신사, 우편국, 일본인 가옥 등이 들어섰다. 치밀한 계획 하에 구축된 일본인 거류지는 반듯한 포장도로와 가로수 길, 하수도 시설 등을 갖췄다. 상점과 식당, 숙박시설이 들어서면서 도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조선인들은 선창가나 묘지터인 유달산 북쪽 산기슭 등에 자리를 잡았다.목포 해안로 일대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구호남은행 목포지점(등록문화재 29호), 구일본영사관(국가사적 289호), 해안로 일본식 상가와 주택들, 일본인 교회, 목포부립병원과 관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전남 기념물 174호),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로 개조된 적산 가옥 등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관공서 건물이나 일본식 가옥이 다수 남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유달산 남쪽 노적봉 기슭에 위치한 ‘구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289호)’이다.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완공된 구 영사관은 현재 목포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다.시가지보다 높은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일본영사관 건물은 얼핏 보아도 권위적, 위압적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 위세를 실감하게 한다. 역사관 입구에 세워진 ‘목포 평화의 소녀상’이 가련해 보일 정도다. 목포 시민의 성금으로 제작된 ‘목포 소녀상’의 제막식은 2016년 4월 8일, 목포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1919년 4.8만세운동 기념일에 맞춰 거행됐다.돌계단 오른 편으로 난 언덕길을 오르면 영사관 마당과 붉은색 벽돌 건물 입구가 나온다. 영사관 마당에 서니 정면에 반듯하게 도로가 나 있고 주변에 상가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이 도로는 목포항까지 이어진다. 소위 말하는 일본인 ‘거류지’이다.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일본인 거류지는 모두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부지에 세워졌다고 한다.영사관 건물 외관 곳곳에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전범기 문양과 국화 문양이 장식돼 있다. 내부에는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벽난로 등이 남아 있다.구일본영사관 건물은 1905년 이후에는 이사청, 1910년부터는 목포부청으로 사용됐다. 해방 이후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 목포시립도서관, 1990년 1월부터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목포문화원이 이전함에 따라 보수 공수를 마치고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모두 7개 주제로 전시관이 꾸며져 있다. 조선 수군 진영인 ‘목포진’의 설치부터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목포의 역사와 생활상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역사관 뒤쪽 유달산 자락에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당시 적의 공격에 대비해 파 놓은 방공호가 남아 있다. 폭 2m, 길이 80여m의 방공호에는 강제 동원돼 굴을 파고 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앙상한 몸에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곡괭이질을 하는 조선인들은 당시 모든 조선인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전국에 일제가 파 놓은 방공호와 진지동굴이 흉악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고, 희생자들의 서러운 통곡이 멈추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역사관에서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면 ‘노적봉예술공원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목포를 대표하는 전원형 미술관으로 2층 상설전시관에서 목포 미술계의 거장 소화 김암기(蘇話 金岩基, 1932 ~ 2013) 화백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유달산과 그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영사관과 방공호에서 무거워진 마음을 훌훌 털어내고 목포의 예향에 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구 일본영사관에서 조계지였던 거리로 내려오면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있다. 토지를 매수해 높은 소작료를 받고 조선 농민에게 임대해주는 악역을 맡았던 기관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건축된 것으로 전해진다. 부속건물은 모두 철거됐고 장방형의 2층 석조 본건물만 아 있다. 외벽 양각 장식과 출입문의 석조 아치 현관 등이 눈길을 끈다. 지금은 ‘목포 근대역사관 2관’으로 운용되고 있다.충무공의 숨결 어린 유달산과 노적봉해발 고도 228.3m의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목포 유달산(儒達山). 노령산맥이 쉼 없이 달려와 무안반도 남서쪽 끝자락 바닷가에 멈춰 선 것이 목포 유달산이다.목포는 유달산과 노적봉(露積峰)을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되는 곳이다. 목포 어느 곳에 서 있어도 가깝게 혹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길동무처럼.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듯이 목포에는 유달산이 있다. 목포의 설움도 목포의 눈물도 유달산만은 모두 알고 있다.과거 유달산은 서남 해변의 군사 요충지로 해남과 무안의 봉수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영산강의 목을 지키는 요새였다. 유달산 동남쪽에 크게 솟아 있는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바위 위에 짚을 쌓아 올려 군량미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이 많은 수의 병력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라게 해 물리쳤다는 일화가 전한다. 볏가리를 쌓아 놓은 모양이라 하여 ‘노적봉’이라 하였다. 유달산의 정상은 일등바위라고 부르며, 유달산의 중심부에서 약간 남쪽에 있다.유달산에는 유달공원과 조각공원, 일제강점기 때부터 정오를 알리는 신호로 사용했다는 오포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새 천년 시민의 종, 유선각, 달선각 등 정자, 암벽폭포 등 둘러볼 곳이 많다. 유달산 북측면의 조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이다. 국내는 물론 외국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유달산 남서쪽의 낙조대는 서해의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는 명소다. 트레킹 길을 따라 유달산 속살을 만나봐도 좋고, 산행을 해도 좋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목포해상케이블카 위에서 유달산을 감상해도 좋다.
2022-11-21 09:25:26
전남 강진군은 ‘남도답사의 1번지’로 꼽힌다. 역사학자이자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가 이렇게 부르며 책의 많은 부분을 강진에 할애한 영향이 크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광역시를 거쳐 나주, 영암으로 남하하면 강진이다. 2000년대 초반 선친과 어머니와 진도에 갔다가 해남을 들러 상경하는 길에 강진의 어느 소담한 마을을 스쳤던 기억이 남아 오래도록 가고 싶었으나 거의 20년이 넘어 지난 2월말에 초등학교 입학을 아둔 아들과 다녀왔다.강진에 가려면 영암과 경계에 있는 월출산을 서편에 놓고 남진해야 한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도암면 만덕리의 다산초당(茶山草堂)이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지만 1970년대 초반 보수공사를 하면서 현재의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다시 초가집으로 복원하려 했지만 예산이나 관리 문제 때문에 여전히 기와집으로 남아 있다.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초당에는 샘물인 약천(藥泉), 그 곁에 아로 새긴 정석(丁石), 초당 앞 연못인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차를 끓이던 바윗돌인 다조(茶竈) 등 다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정조 사후인 1801년(순조 1) 신유박해에 연루돼 강진으로 귀양 와 제일 처음 4년 동안 강진읍 동문 밖 주막집에서 살았다. 대역죄인을 받아준 사람은 주막집 노모뿐이었다. 다산은 주막집 한 구석에 ‘사의재(四宜齋)’란 이름을 내걸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를 복원한 사의재 저잣거리는 먹을거리, 한옥숙박, 공방 등을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사의재 이후 다산은 고성사의 보은산방, 학래 이청(정약용의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47세이던 1808년 봄에 해남윤씨 윤규로(尹奎魯 1769~1837)의 산정(山亭)이던 귤동(橘洞)의 이 곳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했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였다. 그 시조인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가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다.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다산은 다시 말해 공재의 외증손자였다. 윤규로는 먼 외가 친척이었던 셈이다.다산은 18년의 강진 유배 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을 저술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학사상의 대표적 산실이니만큼 지식인이라면 한번쯤 가봐야 할 곳이다. 다산은 벗이자 스승인 백련사의 혜장선사(1772~1811)와 남다른 교분을 쌓았다. 다산의 지음(知音)이었던 백련사 주지 혜장을 만나기 위해 오가던 800여m의 산길은 홀로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호젓한 오솔길이다. 둘은 비오는 쓸쓸한 밤이면 불쑥 찾을 정도로 허물없이 지냈으며 다산은 혜장이 찾아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뒀다고 한다. 다산초당의 뒷산은 야생차나무가 많아서 다산(茶山)이라고 불렸다. 정약용의 호이기도 하다. 행여나 동백이 필까 싶어 기대했는데 3월이나 돼야 할 것 같다. 다산의 길고 긴 유배생활에 마음을 달랜 벗은 차였다. 초당 앞마당에는 차 끓이는 부뚜막으로 쓰였던 돌 ‘다조’가 놓여 있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다조를 달궈 찻물을 데웠다고 한다. 다산은 차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말리고, 절구에 빻아 곱게 가루를 내서, 돌샘에서 나는 물로 가루를 반죽한 다음, 작게 떼어 떡으로 굳혀서 ‘떡차’를 만드는 제조법까지 체화할 정도로 다도의 전문가였다. 다산초당의 동쪽인 동암(東庵, 송풍루)에는 다산이 저술을 위해 해남윤씨 가문에서 빌려와 읽은 책 2000여권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동암에서 조금 더 동쪽에는 ‘천일각’(天一閣)이 세워졌다.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임말로, 하늘끝 벼랑에 세워진 정자라는 뜻이다. 해남이 ‘땅끝’(土末)이라면, 강진은 ‘하늘끝’인 셈이다. 임금으로부터 멀고 먼 남쪽 땅에 유배된 이의 심정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천일각은 다산 생전에는 없었다가 1975년에 지어졌는데 발 아래로 강진만이 눈 아래 들어온다. 다산은 강진만 바다를 바라보면서 흑산도로 유배를 간 둘째형 약전(1758~1816)과 고향인 남양주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때로는 세상을 관조했을 것이다.동암의 반대편인 서암(西庵)은 다산이 강진에서 길러낸 18명의 제자들이 묵었던 숙소다. 1818년 다산이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게 됐다. 떠나는 스승을 위해 18명의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했다. 매년 봄에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스승에게 보내겠다는 약속이었다.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은 보행약자인 동행자가 있어 걷지 못하고 차로 이동했다. 해발 408m의 만덕산(萬德山) 품에 편안하게 자리잡은 백련사(白蓮寺)는 통일신라 말기인 839년(문성왕 1년)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최초 이름인 만덕사로 불리다 근래에 다시 백련사라 고쳐불렀다. 고려 명종(1170년) 무신정권 시절에 원묘국사 요세(了世)에 의해 중창됐다.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 원묘국사 3세 스님이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불교정화를 앞장서는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했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백련사 사적비(보물 제1396호)는 대웅전의 북서쪽으로 약 50m 떨어진 빈터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숙종 7년(1681) 5월에 세운 것으로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적과 백련결사에 관한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백련사 입구에서 절에 이르는 100여 m, 7000 그루의 동백나무 숲이 아름다웠다. 늦여름 배롱나무와 석산(꽃무릇)의 붉은 꽃도 장관이라고 한다. 다산초당과 연결된 관광지로 성전면 월하리의 백운동 별서정원을 꼽을 수 있다. 담양의 소쇄원이나 보길도의 부용동정원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정원으로 불린다. 백운동 정원(원림)은 조선 중기 처사인 원주이씨 이담로(李聃老, 1627∼1701)가 조성했다. 원림(園林)은 담을 치지 않은 개방된 공간에 조성된 자연과 더 어우러진 인공미가 덜한 정원을 말한다. 원림은 <백운첩>에 다산 정약용이 <백운동12승사>의 시를 남기고, 초의선사가 <백운동도>를 그려 더욱 유명하다. 초의선사(1786~1866)는 해남 대흥사의 종사로 제주도로 귀양 간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찾아 바다를 건널 정도로 가깝게 지냈으며, 정약용보다는 24살 연하다. 한국의 다성(茶聖)으로서 다도의 정립과 확산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다산의 제자이자 이담로의 6대손인 자이당(自怡堂)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이 원림의 주인이었다. 다산은 1812년 9월 초의선사와 성인 제자 몇 명과 함께 백운동 원림을 방문하고 절경과 정취에 반했다. 그 때 9살 나이로 손님을 맞은 게 이시헌이다. 이시헌은 평생 스승에게 차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다산의 최애제자라 할 이시헌은 원림 내 옥판봉이 잘 보이는 정선대 앞에 소박하게 묻혀 있다.이시헌의 증손인 이한영(1868~1956)은 일제강점기 시절까지 다산 집안에 이 차를 보냈다. 그러나 일제가 강진, 보성의 차를 대량으로 수탈해가서 일본차로 둔갑시키자 이한영은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 ‘월산차(月山茶)’라는 한국 최초의 상업화된 차 브랜드를 만들었다. 지금은 이한영의 고손녀인 이현정 이한영전통차문화원 원장이 다산이 즐겨 마시던 ‘백운옥판차’를 제조하고 있다.이한영이 다산가(家)에 보낸 차의 이름은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 ‘금릉’은 강진의 옛 지명이고, ‘월산’은 월출산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백운옥판차는 백운동, 월출산 옥판봉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옥판봉(玉版峰)은 백운동 원림에서 아주 잘 보이는데 신하가 홀(명패, 玉版)을 치켜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백운동 원림은 월출산을 배경으로 계곡물이 흘러내리며 계단식 화단을 지형을 살려 조성했다. 원내의 연못과 외곽의 대나무숲 등이 경치와 식생을 살렸다. 정약용이 칭송한 12곳의 경치가 지금도 온전히 남아있는 한국 전통원림의 백미로서 부족함이 없다. 사전 정보 없이 찾아간 백운동 원림은 모처럼 만에 건진 마음속의 ‘인생 명소’가 될 것 같다. 백운동 원림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진다원(오설록 월출산 차밭)이 있다. 제주나 전남 보성과는 다른 느낌의 녹색 차나무 물결이 아늑하게 다가온다. 몇 달 있으면 초록잎을 뿜어올리며 올해 첫 우전자(곡우 이전에 수확한 찻잎으로 만든 차)의 간결하고 부드럽고 깊은 차맛을 선사해 줄 것이다.백운동 원림에서 차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월출산 자락의 무위사(無爲寺)가 있다.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보전은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함께 대표적인 조선 전기 건축물로서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다.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식 건물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3호로 지정됐다. 백운동, 강진다원, 무위사를 3종 세트로 감상하고 나오는 길에 ‘월남사지’(月南寺址)를 들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시대에 진각국사(1178∼1234)가 세운 것으로 되어있지만, 경내 삼층석탑의 규모나 양식으로 보면 그 이전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절이 지금까지 폐사지로 남아 있다. 이곳 삼층석탑(보물 298호, 동탑)은 원래 두 개 탑 중 서탑은 사라지고 홀로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 양식이 백제계라기보다는 신라계에 가깝고 두 양식이 혼재된 특징을 보인다. 월출산의 기암들과 어우러져 자리는 좋아보이는데 왜 폐사지로 남아 있는 것일까. 항상 그렇듯이 폐사지의 평온함과 절의 사세(寺勢)는 따로 노는 것 같아 미스터리다. 강진에서 바다구경을 하러 간 곳이 강진만 생태공원과 가우도 출렁다리다. 탐진강과 강진만이 만나는 생태공원은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기수지역으로 1131종의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다. 3km의 생태탐방로와 20만평의 갈대군락지가 마음을 풀어준다. 가우도 출렁다리는 강진만 서편의 도암면과 동편의 대구면을 이어준다. 가우도 정상에 높이 25m로 조성된 고려청자 모양의 청자타워 전망대에서는 바다 위 973m를 1분 만에 주파하는 짚 트랙이 가설돼 있다. 출렁다리는 사람만 다닐 수 있을 뿐 차량 통행은 불가하다. 가우도는 강진군 8개섬 중 유일한 유인도인데 왜 아직도 차량 다닐 교량을 만들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강진만은 남북으로 길고 그 V자 중심에 강진읍이 있다. 동편에서 서편으로 건너가려면 강진읍을 거쳐야 하는데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결국 기자는 천혜의 미항이라는 동편의 가장 남쪽 끝인 마량항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마량포구는 유서 깊은 만호성터가 남아 있고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 있으며 고금도(완도군)와 약산도(완도군)가 든든하게 풍랑을 막아준다. 강진이 바닷가라지만 생선회를 먹으려면 마량에 가야 한다. 다른 동네엔 없거나 회맛이 별로 나지 않는다고 현지 사람들이 일러줬다. 가우도에서 강진읍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도암면 봉황리, 석문리 일대에는 마치 금강산의 축소판 같은 석문공원이 조성돼 있다. 2016년 석문산은 구름다리, 산책로, 물놀이터를 갖춘 야외공원으로 새출발했다.강진하면 영랑 김윤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강진읍의 영랑생가는 인근의 시문학파 기념관, 뒷 언덕의 세계모란공원과 함께 잘 조성돼 있다. 세계모란공원은 4계절 세계 각국의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유리온실이 있다는데 미처 둘러보지 못해 아쉽다. 일본, 중국, 독일 등의 50종 2700여 그루의 모란이 식재돼 있다. 시비에 적힌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다시 읊어봤다. 나이가 드니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란 구절보다는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가 더 가슴을 울린다. 강진읍의 동쪽에 면한 군동면의 남미륵사가 자칭 미륵종의 본산이라 하여 찾아가봤으나 역사가 미천하고 인위적이어서 실망스러웠다. 동양 최대의 황동아미타여래좌상이 있는데 별 감흥을 얻지는 못했다. 화순의 운주사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고 갔는데 후회가 컸다. 다만 수만 그루의 철쭉이 봄철에 장관을 이룬다고 하니 때를 맞춰 가볼 수 있을 것이다. 군동면 금곡사 벚꽃길도 봄마다 수 만명이 찾는 예쁘기로 소문난 명소다. 강진군 서쪽의 남쪽 끝인 신전면 주작산 산책로는 진달래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한다. 군동면 북쪽의 병영면에는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과 하멜기념관이 있다. 병영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설치한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그러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을 맞아 병화로 소실되었고, 1895년 갑오경장에 따른 신제도 도입으로 폐영됐다. 병영성 성곽의 총 길이는 10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만3139㎡로서 현재 사적 397호로 지정돼 있다. 병영성 인근에는 서양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책(하멜표류기, 하멜보고서)으로 소개했던 화란인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이 1656년 강진 병영으로 유배돼 7년 동안 살면서 노역했던 곳이 ‘하멜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이었던 그는 1653년 제주에 표착했지만 한양을 거쳐 13년간의 조선 억류생활 중 7년을 병영에서 지내다 1666년 일본으로 탈출했다. 자고로 병영이 있던 도시는 음식문화가 발달돼 있다. 통영(삼도수군통제영), 여수(전라좌수영), 강진, 해남(전라우수영) 등이다. 이들 지역은 해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한 게 공통점이다. 산과 들, 강과 바다를 모두 갖췄으니 강진은 맛의 고장일 수밖에 없다. 문어와 전복에 한약재를 넣고 끓인 ‘회춘탕’, 연탄불에 구운 ‘병영돼지불고기’, ‘음천 토하젓’, 짱퉁어탕, 바지락회무침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다만 한정식은 강진읍에서만 즐길 수 있고 다른 지역은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으며, 예전과 달리 옛맛이 안 날 수도 있으니 잘 골라서 가야 한다.
2022-03-04 16:33:52
묘도의 남측, 여수 북동쪽으로 난 여수산단도를 따라 5km 정도 달리다 보면 ‘영취산 흥국사’(靈鷲山 興國寺 해발 439m)가 나온다. 화물트럭과 레미콘차량이 무시로 달리는 여천공업단지의 삭막한 분위기에 긴장하다보면 어느새 영취산 자락이다. 여수 영취산은 경남 창녕 화앙산, 거제 대금산(혹자는 창원 천주산 또는 무악산, 강화도 고려산을 꼽음)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진달래 군락지로 꼽힌다. 매년 4월 초가 되면 축구장 140개만 한 면적의 산이 진분홍빛 진달래로 뒤덮인다. 흥국사가 위치한 산은 정확하게는 ‘진례산’(進禮山·510m)이다. 국가지리정보원도 2003년 5월 17일 자로 영취산을 진례산으로 변경 고시한 바 있다. 옛 문헌에도 439m 봉우리는 영취산으로, 510m 봉우리는 진례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관례대로 영취산으로 부르고 있으며 절 현판에도 ‘영취산 흥국사’로 표기돼 있다.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년)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다. 구례 화엄사의 말사다. 우리나라 전역에는 ‘흥국사’라는 이름의 절이 많은데 여기에는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며 호국을 우선으로 하는 사찰이 되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 영취산 흥국사 사적기에 ‘국가의 부흥과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경관이 좋은 택지에 가람을 창설했다.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이 절이 흥할 것이다.’ 등의 글이 적혀 있다. 국가와 절을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했던 ‘호국불교’의 전통을 보여준다. 여수 지역에서 호국불교의 전통을 보여주는 절들은 흥국사 외에도 용문사, 석천사, 한신사, 은적암, 향일암 등을 꼽을 수 있다.흥국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수군 의병의 중심지로 각종 상량문과 비문을 통해 당시 의승군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승병들은 자운과 옥형 두 승장의 지도하에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주로 해전에서 활약했다. 의승군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700여 명까지 늘어났다가 이듬해부터 300여 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1812년까지 해체되지 않고 있다가 구한말에 이르러 점차 소멸됐다.왜구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흥국사는 1624년(인조 2년)에 계특대사가 중건했고 1690년(숙종 16년)에 통일 스님이 중창한 이래 현재에 이른다. 전라남도 호국불교의 성지인 흥국사는 10여 점에 달하는 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한 문화재 사찰이기도 하다.흥국사가 자리한 영취산 계곡은 수량이 많고 편편한 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어 여름철 계곡 물놀이 명소로 꼽힌다.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 ‘남북통일 소원성취’라고 적힌 표지석과 일주문이 나오고 그 옆으로 아름다운 홍교가 고아한 정취를 풍기며 서 있다. 흥국사 홍교는 순천 선암사 승선교와 보성 벌교의 홍교에 버금가는 무지개다리다. 길이 40m, 높이 5.5m, 너비 11.3m로 현존하는 홍교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보물 563호로 지정된 홍교의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1639년(인조 17년) 계특대사가 주지로 있을 때 승군들이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쟁 후 승군의 기를 끊기 위해 관군이 놓았다는 설도 있다. 1981년 폭우로 일부가 무너져 내려 다시 지었고 보행이 통제된다.다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리 한가운데 마룻돌이 튀어나와 있고 그 끝에 용머리가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난간 끝부분에는 도깨비 얼굴 조각이 보인다. 이는 잡귀를 막는 동시에 부처님 나라로 가는 중생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일주문을 지난 왼편의 흥국사 부도전에는 창건주인 보조국사와 중창주인 법수대사 등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불교계를 이끌었던 인물들의 부도 12기가 모여 있다. 1703년(숙종 29년)에 세워진 ‘흥국사중수사적비’에는 흥국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천왕문과 봉황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나온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심검당과 적묵당이 마주 보고 있고 대웅전 뒤편 위쪽으로 팔상전, 응진전 등이 위치해 있다.보물 396호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보물 제396호이다.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축대와 중앙계단 소맷돌에 거북과 용, 꽃게 등이 새겨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불교에서 대웅전을 ‘반야용선’에 비유하는 법화신앙적 표현이다. 대웅전은 중생들을 고통 없는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에 해당하고 축대나 석등은 바다에 해당하므로 이를 용, 거북, 게 등을 새겨 표현한 것이다.대웅전의 화려한 닫집 아래에는 가로 4.75m, 세로 4.06m의 대형 후불탱화(보물 제578호)가 걸려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 아래서 법회 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로 1693년(숙종 19년)에 천신(天信)과 의천(義天)이라는 두 화승이 완성했다. ‘이 공덕으로 누구에게나 두루 비치어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대웅전 뒷벽에도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18세기 최고 화승으로 꼽히는 화승 의겸이 그린 ‘수월관음도’(보물 제1332호)이다. 가로 3.36m, 세로 3.89m 크기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초록색 테두리가 있는 하얀색 긴 옷을 입은 관음보살이 청보랏빛 연꽃 위에 앉아 있고, 한쪽 다리는 분홍빛 연꽃 위에 가볍게 올려놓은 모습이다.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의 상징인 감로병이 있으며 선재동자가 그려져 있다. 머리 뒤편에서는 초록빛 두광이 빛나고 있다. 제작 연대는 불분명하나 1760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된다. 흥국사 원통전은 대웅전에서 떨어져 있어 자칫 놓치기 쉬우니 챙기는 게 좋다. 전각의 외관이 매우 독특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사방에서 활주가 떠받치고 있고 회랑식 퇴칸에 둘러싸여 있다. 앞쪽에 따로 정면 3칸 건물을 덧붙였다. 회랑식 퇴칸은 중앙 법당에 모신 관세음보살을 탑돌이 하듯 돌며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다. 원통전에도 관음보살 탱화인 수월관음도가 있다. 푸른색 천의와 붉은색 치마를 입고 있으며, 귀걸이, 팔찌, 목걸이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어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십육나한도(보물 제1333호)’와 함께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 보관돼 있다.원통전 옆 계곡 건너편 숲에는 (주)대신기공이 조성한 ‘백팔돌탑공원’이 있다. 임진왜란 때 숨진 의승군들의 넋을 위로하고 여수산단 조성으로 숨진 산업역군들의 영혼을 기리고 산업안전 기원을 위해 조성됐다.
2021-12-29 00:43:55
여수의 크고 작은 섬이 무려 365개나 된다고 한다. 여수시가 지난 11월 30일 ‘2026여수세계섬박람회’ 개최 도시 홍보를 위해 365개 여수의 아름다운 10대 섬을 선정했는데 1위가 남면 금오도, 2위가 수정동 오동도, 3위가 삼산면 거문도, 4위가 돌산읍 돌산도, 5위가 화정면 낭도, 6위가 삼산면 백도였다. 나머지 7~10위는 화정면 사도, 화정면 하화도, 운천동 장도, 화정면 여자도 등이다. 금오도는 ‘비렁길’이라는 트레킹하기 좋은 명품 탐방로가 있어 1위를 차지했다. 오동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고, 거문도는 섬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신이 내린 천혜의 비경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노화도 비렁길은 명품 트레킹 선사 … 황장목 키우던 원시섬 돌산도 향일암이 있는 금오산 정상에서 보면 남쪽으로 점점이 흩어져 있는 30여 개의 섬들이 금오열도이고 그중 가장 큰 섬이 금오도(金鰲島)이다. ‘혈의 누’, ‘김복남 살인사건’, ‘인어공주’ 등 제법 알려진 영화들이 이곳에서 촬영됐다.금오도는 오랫동안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섬이었다. 고려 말 ~조선 초 왜구의 침입이 잦자 아예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해 민간인의 거주를 금했다. 큰 섬들은 수군진을 설치해 해안 방어를 했지만 금오도처럼 적은 섬들은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것이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지정되면서 더 엄격하게 출입이 금지됐다. 궁궐이나 임금의 관, 판옥선 등을 만들 때 사용되는 질 좋은 소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하는데 금오도 황장목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사용했을 정도로 최고였다. 봉산은 민간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의미다. 고종은 이 황장봉산(금오도)을 명성황후가 살던 명례궁에 하사했으며, 명례궁은 이를 사슴목장으로 만들었다. 영조 때 잠시 거주가 허용되기도 했으나 황장목 보호와 왜구 침입 방지를 위해 다시 공도정책이 실시됐다. 금오도에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1884년(고종 21년) 공도정책이 해제되면서부터이다. 따라서 금오도가 본격적으로 개척된 것은 130년이 조금 넘는다. 그렇다고 해서 섬에 전혀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생계가 어렵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숨어 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금오도는 최고의 은신처가 됐다. 이 섬은 숲이 울창해 검다는 의미의 ‘거무도’에서 유래해 한자로 ‘거마도(巨磨島)’로 불렸다가 섬 모양이 자라 모양을 닮았다 하여 ‘황금 거북(자라)’라는 의미의 ‘금오도’로 굳혀졌다는 설이 있다. 금오도는 이곳의 명품 트레킹 길인 ‘비렁길’로 인기를 얻고 있다. 연간 30만명이 이 길을 걷기 위해 찾아온다. ‘비렁’은 여수 사투리로 ‘벼랑’을 뜻한다. 비렁길은 마을길과 아찔한 해안절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길로 총 거리가 18.5㎞에 달한다. 모두 5개 코스로 짜여 있으며 전 구간 도보에 2시간 정도 걸린다. 비렁길은 인공조림이 아니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다. 섬에서 만단 노인은 ‘제주 올레길보다 금오도 비렁길이 훨씬 낫다’고 자랑한다.가장 인기 있는 구간은 ‘미역널방길’로 불리는 제1코스다. 함구미 – 미역널방 – 송광사 터 - 신선대 – 두포로 이어진다. 길은 함구미마을 뒷산에서 시작된다. 함구미는 크다는 뜻의 ‘한’과 포구를 뜻하는 ‘구미’가 합해진 이름이다. 길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정도로 좁다. 길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마을 사람들이 용무를 보기 위해 밟고 지나간 흔적이 길이 된 것이다. 숲길로 접어들자마자 사위는 어두워진다.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린다. 이따금 두툼한 동백 나뭇잎을 뚫고 햇빛이 들어찬 숲속은 그야말로 찬란하다. 고사리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생긴 대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큰 행운이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영토싸움을 하다 붙어버린 연리지 나무들, 바람이 부는 대로 속절없이 휜 가지들, 만만한 나무를 골라 휘감고 타고 올라간 덩굴…, 육지의 인공조림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따금 나뭇잎들 사이로 고등어 등처럼 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금오도 숲속에서는 인간 역시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자만할 이유도 실망할 일도 없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오면 사방이 탁 트인 ‘미역널방’이 나온다. 마을 주민들이 바다에서 채취한 미역을 지게에 지고 올라와 널었던 바위라고 해서 ‘미역널방’이라 부른다. 정겨운 이름이다. 하늘과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미역널방은 신을 모시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접신’ 장소였을 것이다. 실제로 무당들은 이곳에서 굿을 했다고 한다. 이 너른 바위에 미역이 널려 있는 풍경을 상상한다. 오로지 햇빛과 바닷바람에 말린 미역 맛은 어떨까. 미역널방 아래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망망대해다. 잠시 서 있었을 뿐인데 뱃멀미하듯 어지럽다. 다시 발길을 옮긴다. 미역널방에서 송광사 터까지가 비렁길 중에서 가장 아찔한 구간이다. 말 그대로 깎아지른 벼랑 위 샛길을 걷는 구간이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다니고, 미역을 지고 올라왔던 길이다. 변변한 길이었을 턱이 없다. 비렁길을 조성한다고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나무데크를 설치했다. 데크 사이에 끼여 있는 나무가 마치 형틀에 갇힌 죄수처럼 가엾다. 건너다보니 하얀색 데크길이 산 허리춤을 옭아맨 오랏줄처럼 보인다. 비경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무와 땅에 몹쓸 짓을 하는 듯하여 마음이 무겁다. 어느 시인은 이 길을 ‘새들이 다니던 길, 바람도 숨차던 길’이었다고 표현했다. 벼랑의 높이가 표고 90m라고 하니 어지간한 강심장도 움찔할 만하다. 먹고살려고 지게에 미역과 나무를 지고 올랐던 길이 이제는 ‘명품 트레킹 길’이 되었으니 세상일 참으로 기이할 뿐이다. 미역널방을 지나면 거친 질감의 바위가 고스란히 드러난 바위산 아래 보조국사 지눌이 지었다는 ‘송광사 터’가 나온다. 지눌은 유자 씨를 물려 새 세 마리를 날려 절터를 정했다고 한다. 첫 번째 씨가 떨어진 곳에 순천 송광사 국사전을, 두 번째 씨가 떨어진 곳에 고흥 금산 송광암을 마지막으로 이곳 금오도에 송광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이른바 ‘삼송광’으로 불린다. 송광사 터를 지나 2km 정도 더 가면 신선이 놀다 갔다는 신선대가 나오고 직포를 지나 두포에서 1코스가 마무리된다.비렁길의 처음과 같은 항상 마을과 맞닿아 있어 섬마을의 삶의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금오도 산비탈 밭에는 방풍나물이 지천이다. 단풍나무 잎처럼 넓어서 단풍나물로도 불리는 방풍나물은 풍을 예방하고 남자의 바람기를 잡는 데도 특효라고 한다. 날씨가 따뜻해서 1년 내내 수확이 가능하여 섬사람들의 주요 소득원이다. ‘비렁길쉼터’에 내걸린 ‘방풍막걸리’, ‘병풍문어초무침’ 간판이 갈 길 바쁜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바닷가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손에 무엇인가 들려 있다. 궁금해서 가만가만 따라가보니 손에 든 해초를 방파제 양지바른 곳에 가지런히 펴서 널어놓는다. 어장이 빈약하고 양식업이 발달하지 않는 금오도 주민들은 바위나 돌에 붙은 파래, 김, 미역, 가사리 등을 뜯어와 말려 반찬거리를 했다. 이런 바다를 섬사람들은 ‘갱번’이라 부른다. 군부, 배말, 해삼, 거북손 같은 해산물도 갱번에서 잡아 올린다. 오랫동안 금오도 사람들의 식량창고가 되어주었던 갱번도 점점 고갈돼 예전만 못하다. 사람들이 섬을 떠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배 시간 때문에 1코스 완주를 포기하고 함구미 마을길로 접어든다. 돌담이 밭과 밭의 경계를 이루고 집과 집 사이를 구분한다. 바람과 태풍을 막기 위해 지붕보다 높이 쌓은 돌담은 요새가 따로 없다. 어디 바람과 태풍만 피하기 위함이었을까. 외부의 적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역할도 컸을 것이다. 겨우 한 사람 정도 빠져나올 만큼의 틈만 두고 모두 돌담으로 에워쌌다. 비탈진 길에 서면 집보다 길이 훨씬 높아 앞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돌담은 끊어질 듯하면서 선착장까지 이어진다. 돌담 사이 유자나무에는 노란색 유자가 주렁주렁 달렸다. 육지 촌사람의 눈에는 신기하기만 하다. 돌담들은 집집마다 모양과 높이가 모두 다르다. 비렁길도 좋지만 정교하게 쌓아 올린 돌담길은 그냥 방치하기엔 너무도 아깝다. 마을 전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여 보존할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실제로 낭도의 부속섬인 추도(鰍島)의 돌담길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빈집들이 많다. 더러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가 하면 돌담 한구석이 무너져 내려앉은 곳도 있다. 문화재 등록이 시급한 이유다. 비렁길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듯 빈집에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 다도해 최남단 거문도, 영국군 점령했던 ‘해밀턴섬’ … 백도는 運 따라야 감상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최남단의 섬이 거문도다.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114.7㎞ 떨어진 거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다도해 최남단이다. 제주도와 여수의 딱 중간에 있다. 섬의 전체 면적은 12㎢. 물길이 험해 예부터 하늘이 도와야 갈 수 있는 섬으로 알려졌다. 옛 이름은 삼도·삼산도·거마도 등이었으나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이 섬은 봄이 조금 일찍 찾아들고 가을이 꽤 더디 오는 천혜의 비경을 자랑한다. 전남 여수에서 쾌속선을 타면 2시간 만에 거문도에 닿는다. 거문도는 동도와 서도, 그 사이에 끼인 고도(古島) 등 3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3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쳐 3.3㎢ 정도의 천연적 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돼 있는 곳을 도내해라고 하는데, 큰 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항구 구실을 한다. 이런 입지 때문에 거문도항은 예부터 빈번히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 1885년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2년 가까이 머물면서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거문도의 3개 섬 가운데 면적이 가장 작은 고도가 통상 거문도의 중심지다. 외지인의 거문도 여행은 대개 이곳 고도리에서 시작한다. 고흥이나 여수에서 출항하는 여객선 모두 고도가 종착지다. 고도는 서도와 삼호교라는 다리로 연결돼 있으며, 거문대교를 이용해 서도에서 동도로 건너갈 수 있다. 서도 덕촌마을의 들머리를 거쳐 서도 정상의 불탄봉(195m)에 오르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고사목과 억새밭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서도, 동도는 물론 날이 밝으면 멀리 동쪽의 백도까지 바라볼 수 있다. 불탄봉에서 능선을 따라 동남방으로 거문도 등대까지는 7㎞, 왕복 4시간가량이 소요된다. 절벽 능선을 따라 쉴 새 없이 펼쳐지는 비경을 보느라 힘들기는커녕 지루할 틈마저 없을 정도다. 백도는 워낙 난바다(먼바다)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 해역의 물길이 거세 외지인이 발길을 들이기 어려운 곳이다. 3대가 덕을 쌓아야만 딱 하루 다녀올 수 있다는 말이 거문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온다. 백도는 우람한 흰 바위와 함께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350종 이상의 아열대 식물을 자랑한다. 섬과 반경 200m 구간이 국가 명승 제7호로 지정돼 섬에 오르는 것은 철저히 금지돼 있고, 유람선을 타고 볼 수만 있다. 백도로 가는 유람선은 고도리 선착장에서 오전·오후에 기상 상황과 인원에 따라 수시로 운행하고 있으며 왕복 소요시간은 2시간30여분이다. 거문도등대 트레킹길은 봄이면 동백, 가을이면 억새가 찬란하다. 늦가을이나 겨울에도 철을 잃은 동백을 제법 볼 수 있다. 동백숲은 어두울 정도로 울창하고 숲이 끊긴 오솔길은 그 나름대로 넓은 대양을 볼 수 있어 좋다. 거문도등대는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은 국내 두 번째의 등대로 1905년부터 점등해 100년이 훌쩍 넘도록 뱃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다. 유인 등대로는 국내 최초다. 초창기 시설은 현재 기능을 다해 전시 중이며 2006년 증축한 새 등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높이 33m의 등대 꼭대기는 방문객 누구라도 오를 수 있는 전망대로 쓰인다. 거문도와 백도를 조망할 수 있으며 날씨가 좋으면 제주 한라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거문도로 가는 쾌속선은 여수 여객선터미널과 고흥 나로도선착장에서 탈 수 있다. 여수 출발 쾌속선은 나로도와 손죽도, 초도(북서쪽의 대동항(또는 초도항), 남동쪽의 의성항 등 두 포구가 존재)를 거쳐 거문도에 도착한다. 통상 오전배는 동도를 경유해 고도(거문항)에 닿고 오후배는 서도를 거쳐 고도에 하선한다. 여수항과 거문도의 중간 ‘초도’ … 상산봉에서 고흥, 완도 앞바다까지 조망여수 삼산면 초도(草島)는 여행 마니아에게도 낯선 섬이다. 억새가 무성해 ‘쌔섬’으로 부르다 한자로 초도로 굳어졌다. 이 섬은 바다 풍광 좋기로 이름난 거문도와 백도를 여행할 때면 으레 경유하게 되지만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해 왔다.초도의 최고봉은 섬산 상산봉(上山峰·339m)이다. 남해 일원의 여러 산 중 최상급에 속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같은 삼산면에 속한 손죽도와 거문도, 백도는 물론 완도군 청산도와 생일도, 뭍과 다리로 연결된 고흥군 거금도와 외나로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 명소다. 초도 진막해안에서 200m쯤 떨어진 안목섬을 잇는 ‘신비의 바닷길’이 한 달에 아홉 차례나 열려 색다른 볼거리와 낙지, 전복, 소라 등 갯것 체험의 기회를 준다. 제주에서 시집 온 초도 해녀들이 바다 깊숙이에서 건져온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도 있다. 바닷가 마을 곳곳에는 돌미역과 돌김이 자라 이를 채취해 널기에 바쁘다. 초도는 작은 섬이지만 여러 개의 섬이 군도를 이루고 있다. 건너섬, 용섬, 중결섬, 술대섬, 구멍성, 취섬, 솔거섬, 밖목섬 등이다. 이밖에 둥글게 생겼다 하여 둥글섬, 길다 해서 진대섬, 섬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다 하여 구멍섬 등 이름들도 정겹다. 초도에는 생달나무, 후박나무 등 아열대식물이 300여 종이 자란다. 상산봉 서쪽 능선 사면이 동백숲을 이루고 있다면 북동 능선은 산딸기나무와 한국의 블루베리라는 정금나무로 무성히 우거져 있다. 바위틈에 여기저기 산재한 진달래도 존재감을 알린다. 초도는 풀의 질이 좋아 소나 말을 키우기에도 최적이라고 전해진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기도처 돌산도 향일암 … 갓김치로 유명여수구항에서 연륙교인 돌산대교나 돌산2대교를 건너면 남해를 바라보는 향일암(向日庵)이 떠 있는 돌산도(突山島)에 이른다. 이 섬의 금오산 자락,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향일암은 양양군 오봉산 낙산사, 강화군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 남해군 금산 보리암과 더불어 전국 4대 관음 기도처 중의 한 곳이다. 향일암은 644년(신라 선덕여왕 13) 원효(元曉)스님이 창건, 처음엔 원통암(圓通庵)이라 했다. 958년(고려 광종9)에 윤필거사가 중창한 뒤 금오암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군의 본거지였다. 1715년(조선 숙종41)에 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개칭했다. 숙종 대에 원통보전, 삼성각, 관음전, 해수관음상을 복원했는데 2009년 12월 20일 화재로 소실돼 2012년 5월6일 원통보전, 종무소, 종각을 새로 낙성했다.향일암은 남해 수평선의 일출 광경이 장관이어서 매년 새해 첫날을 기념해 일출제가 열리고 기도객과 관광객이 넘쳐난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원효대사는 첫 눈에 명당자리임을 알아보고 이 곳에 사찰을 세웠다. 금오산이 거북이(자라)를 쏙 빼 닮았다면 절 자리는 거북이 몸통의 중심부다. 신비롭게도 금오산에는 거북이 등짝 같은 바위가 널려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향일암은 금거북이 경전을 지고 용궁(바다)속으로 들어가는 금구입해형(金龜入海形)의 명당이다. 중심전각인 원통보전 뒤편으로 불경을 쌓아놓은 듯한 경전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향일암은 봄꽃과 연초록의 신록은 물론 겨우내 몰아친 한파에도 동백꽃이 있어 사시사철 아름답다. 향일암으로 들어 가는 길목에는 석문(石門)이 일곱 개나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을 일곱 번 해야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할 수 있다. 한 번에 한 명씩만 지날 수 있는 좁은 문이다. 제법 긴 석문은 낮에도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둡다. 석문이 끝나는 지점에 맞닿아 있는 관음전 입구엔 돌거북 상이 도열하듯 남해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관음전 옆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해수관음 입상이 서 있다. 그 좁고 어두운 문을 지나면 확 트인 남해바다가 펼쳐지는 원통보전이 다가온다.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게 일반적인 원통보전에는 특이하게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2009년 화재로 전소되기 전에는 원통보전이 대웅전이었기 때문이다. 화재 이후 관음도량이란 취지를 계승해 원효스님이 창건할 당시 ‘원통암’ 이름을 계승해 원통보전이라는 현판을 붙였지만 중심전각이다보니 석가모니를 모셨다. 돌산갓김치는 바닷바람을 맞아 육지의 갓보다 톡쏘는 매운 맛과 특유의 향이 강하며 매운맛과 섬유질이 적다. 잎과 줄기가 붉은 뭍의 갓과 달리 잔털이 없으며 연하고 부드러운 연녹색 채소로 이름이 높다. 이따금씩 먹어보지만 늘 감탄하는 갓김치 맛이다. 그러나 최근엔 바닷가 산책로를 만든다며 갯바위에 시멘트를 붓고, 해안 절벽 위에 대규모 리조트를 조성하고, 동백나무를 심는다며 산도를 무자비하게 내서 비난이 일고 있다. 관광진흥, 지역발전을 위해 난개발이 이뤄지면서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아름답던 돌산도 경관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2021-12-27 17:56:54
물빛이 곱다는 여수(麗水)는 전라남도 동쪽 끝으로 삐죽하게 불거져 나온 반도다. 북으로 순천에 붙어 있고, 순천의 동쪽이 광양이다. 서쪽으로는 순천만을 사이에 두고 고흥반도(고흥군)을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광양만을 사이에 두고 경남 남해와 맞닿아 있다. 여수는 본래는 백제 땅으로 원촌현과 돌산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삼국통일 후에는 해읍현, 여산현, 마산현 등의 이름으로 순천에 속했다가 고려시대에 비로소 여수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고려 공민왕 때 유탁과 정지라는 이가 왜구를 크게 물리치는 전과를 올려 수군 방어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479년(성종 10년)에 전라좌수영이 설치되면서 조선 수군의 실질적인 본거지가 됐다. 1896년 순천에서 떨어져 나와 여수시와 여천군으로 독립했고 1998년 4월 여수시로 통합돼 오늘에 이른다.‘살아 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을 주제로 3개월간 개최된 '2012 여수 세계박람회'의 성공적인 개최는 항구도시이자 공업도시인 여수가 세계적인 해양도시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시작된 전주~순천 간 전라선 복선 전철화 공사는 2004년에 완료됐다. 여수 엑스포 개최를 계기로 여수~순천 복선 전철화가 추진돼 2011년 10월 5일 서울서 여수까지 가는 KTX가 운행을 시작했다. 2015년 4월 2일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익산역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변경됐다. 엑스포를 계기로 여수~순천 자동차 전용도로 및 이순신대교 등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이 확충되어 여수는 그야말로 사통팔달의 도시로 급성장했다.이순신대교,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국내 최장 다리여수 여행의 신 명물이 이순신대교다. 여수시 묘도와 광양시 금호동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2012년 여수엑스포를 앞두고 이 해 5월 10일 임시 개통했다가, 엑스포 직후에 폐쇄했다가 2013년 2월 8일 정식 개통했다. ‘하늘과 바다 사이의 평행선’, ‘철로 만든 하프 다리’라는 별칭답게 끝이 없을 것처럼 길게 이어진다. 총 연장 2260m로 주탑과 주탑 사이의 거리는 이순신장군이 태어난 해와 같은 1545m이다. 국내 최장, 세계 4위 규모를 자랑하는 이순신대교는 순수 우리 기술로 시공한 첫 현수교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묘도에는 이순신대교 홍보관이 운영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2014년에 개관한 홍보관은 거북선을 형상화했다. 1층 홍보관에는 건설 당시의 사진과 주요 교량 사진 등이 전시돼 있고 영상이 상영된다. 전망대에 오르면 묘도 인근의 바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묘도 앞바다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이순신장군의 생명을 앗아간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이다.묘도(묘도동)는 다시 여수산업단지 GS칼텍스 공장과 묘도대교로 연결됐다. 이순신대교와 묘도대교 덕분에 여수산단과 광양산단 거리는 60km에서 10km로, 이동시간은 80분에서 10분으로 단축됐다. 참고로 금호도(금호동) 갯벌을 매워 건립한 게 광양제철소로 1987년 가동을 시작했다. 여수여행의 1번지, 오동도여수 여행 1번지는 단연 오동도다. 방파제를 따라 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따스하고 비릿한 바닷바람과 반짝반짝 윤이 나는 탱글탱글한 동백나무 이파리와 붉디붉은 동백꽃, 아찔한 해안절벽 풍경까지 오동도 탐방은 마치 천국의 섬을 거니는 듯하다.섬의 생김새가 오동잎처럼 생기고 옛날엔 오동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오동도라 불렸다. 오동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오동나무는 없고 동백나무만 지천이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은 이곳에 처음으로 수군 연병장을 만들고 시누대를 심어 화살을 만들었다. 이후 대나무가 무성해져서 ‘대섬’이라고도 불렸으며 ‘꽃섬’, ‘숲섬’으로도 불린다.오동도에 전하는 전설이 있다. 오동나무숲에 봉황이 깃들자, 봉황은 새로운 왕이 나타남을 뜻한다고 해서 왕의 명으로 오동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설은 이렇다. 도적떼를 만난 아낙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벼랑 끝에서 바다로 몸을 날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은 오동도 기슭에 아내를 묻어 주었다. 그해 겨울부터 눈이 쌓인 무덤가에서 동백꽃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푸른 정절을 상징하는 시누대가 돋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동백꽃을 ‘여심화’(女心花)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 800여m의 방파제를 따라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여유롭게 동백열차를 타도 좋다. 섬 초입 중앙광장에 거북선과 판옥선의 모형과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란 이순신 장군의 글귀가 적힌 대형 비석이 서 있다.섬을 빙 둘러볼 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하늘도 가릴 만큼 울창한 동백 숲을 지나면 푸른 시누대 터널이 나온다. 후박나무, 팽나무, 소태나무, 참식나무, 은단풍나무, 검팽나무, 머귀나무, 쥐똥나무, 광나무, 돈나무 등 무려 160여 종의 아열대성 희귀 수목이 자라는 오동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아열대식물원이다. 가지 대여섯 개가 붙어 자라는 나무와 거대한 남근목도 있다. 푸르다 못해 검은 숲을 빠져나오면 파란 하늘 아래 시원한 바다와 아찔한 해안 절벽과 갯바위들이 펼쳐진다. 병풍바위, 소라바위, 거북바위, 코끼리바위 등의 이름을 가진 바위들이 오동도 수호대처럼 해안을 지킨다.산 정상에는 하얀색 오동도 등대가 서 있다. 야자수와 하얀색 건물이 이국적이다. 1925년 건립돼 여수항과 광양항을 오가는 선박들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 전망대에 오르면 바다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운영이 잠정 중단돼 방문 전에 확인이 필요하다. 동백꽃 관람 시기는 1~3월이 최적기다.오동도와 돌산도를 잇는 여수해상케이블카의 자산 탑승장(오동도 자산공원 인근) 일출정에 오르면 여수 바다와 오동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오동도는 1968년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야경이 살가운 낭만과 추억의 불빛, 종포해양공원오동도도 좋지만 실상 여수의 대표적 밤바다 풍경을 보여주는 곳은 돌산대교를 사이에 놓고 오동도의 정 반대편(서쪽)인 종포해양공원이다. 동문동 하멜등대에서 중앙동 이순신 광장까지의 1.3km 해변거리다. 공원 앞바다는 수심 15m, 폭 400m 작은 바닷물길이 흘러 조류가 거세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바다를 볼 수 있다. 해양공원 동쪽 돌산2대교(거북선대교)와 해상케이블카에서 발산하는 빛이 밤이면 알록달록하다. 바다는 유람선의 화려한 조명으로 얼룩진다. 가로등 불빛 아래는 사시사철 학꽁치, 노래미 등 잡어를 잡는 낚시꾼들로 북적인다. 포구는 먼바다로 조업을 나가는 어선들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종포해양공원 바닷가는 항구의 추억과 청춘의 낭만이 어우러진다. 공원 인근에는 세련미가 넘치는 커피숍과 횟집, 음식점이 즐비하다. 코로나19 이전엔 무명가수는 물론 유명가수도 종종 참여하는 길거리 공연도 많았다. 밴드그룹 버스커버스커가 부른 노래 ‘여수 밤바다’도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분위기다. 종포해양공원 인도 200m 구역에 운영되는 낭만 포장마차에서는 여수에서 생산되는 제철 해산물을 3만원 이하의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종포해양공원 시작점에 있는 10m 높이의 빨간 하멜등대는 이순신 장군이 1592년 거북선을 진수했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오동도 방향에서 진입하는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쇠사슬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바다 건너편 돌산대교 밑 장군도는 이순신 장군이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수중 석성을 쌓았던 곳이다.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 좁은 바다에는 아직도 수중 석성의 흔적이 남아있다.공원 끝자락인 이순신광장 앞에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가장 실물에 가깝게 복원했다는 목선 한 척이 전시돼 있다. 광장 북쪽 군자동에는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의 객사로 사용하던 국보 304호 진남관(鎭南館)이 있다. 이순신 장군 당시에는 진해루라는 누각이 있었던 자리에 훗날 전라좌수사가 두 번 고쳐 지었다. 국내 최대 단층 목조건물로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해체 복원 공사가 이뤄졌다. 진남관 바로 위 동산동에는 여수의 진산(鎭山)인 종고산(鐘鼓山 199m)이 버티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거두던 날 산에서 북소리, 종소리 같은 소리가 사흘 동안 났다는 이야기에서 따왔다. 종포해양공원의 종포는 종고산 아래 아름답고 평화로운 포구에서 유래됐다. 종고산 밑에 전라좌수영이 둥지를 튼 것은 주변 해상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는 지름길이라는 지리적, 전략적 이점 때문이다. 진남관 옆 고소동 산동네에 오르면 고소대(姑蘇臺)와 오포대(旿砲臺) 공원이 있다. 고소대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작전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지휘소 격인 장대(將臺)다. 고소대에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을 기린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보물 571호)와 이순신 장군 덕을 추모하는 타루비(보물 1288호)가 있다. 통제이공 수군대첩비를 세우게 된 사연을 적은 동령소갈비도 세워져 있다.고소대 인근에 있는 오포대라는 붉은 망루 형태 건물이 이색적이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에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포는 포탄 없이 화약만 넣고 포를 쏘아 소리로 정오를 알리던 것을 말한다. 오포대에는 일제 강점기에 조망등(서치라이트) 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여수는 맛의 도시다. 이순신광장 바로 옆 여수여객터미널 방향 도심 700m 거리에는 좌수영음식특화거리와 수산물 시장이 있다. 여행에 지친 길손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이곳은 서대회, 게장백반, 장어구이, 갯장아 등 ‘여수 십미(十味)’를 맛볼 수 있다.오동도 ‘여순사건 기념관’지난 10월 오동도 ‘2012여수세계박람회유치기념관’에 여순 10.19사건 73주년에 맞춰 ‘여순사건기념관'이 개관했다. 전시실에는 여순사건의 개요와 진행 상황 등이 당시의 자료와 그림 등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돼 있다. 영상관도 있다. ‘여순사건의 기억’이라는 그림과 일명 ‘손가락 총’ 조형물이 여순사건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무고한 민간인들을 객관적 증거도 없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부역 혐의자로 분류해 학살했던 상황을 표현한 ‘손가락총’은 지금도 누군가를 고발하는 듯하여 섬뜩하다. 73년이 지나서야 이제 겨우 4.3 특별법이 통과됐다. 해설사에 따르면 지금도 여수 사람들에게 70년 전 여순사건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이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워 지금도 ‘여순사건’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여전히 ‘손가락 총’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제 겨우 특별법이 마련됐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여수 구도심에서 가까운 경도, 장도, 묘도여수반도에는 오동도 외에 많은 부속섬들이 있다. 멀리 거문도, 백도, 초도부터 여수 도심에서 가까운 경도와 장도, 다리가 놓이면서 조용한 어촌에서 시끌벅적한 관광지로 바뀐 묘도, 갓김치로 유명한 돌산도, 여수 최남단 끝에 꼬리처럼 달려 있는 금오도 등이 있다. 전남 여수시 구도심 국동항에서 보이는 경호동 경도(莖島, 흔히 대경도라 함, 인근 소경도와 구분함)는 전용 왕복선이 운항하는 여수 쪽 대경도 부두에서 500m 떨어져 있다. 그 동쪽은 돌산도다. 양방향 여객선(240t)은 승용차 16대, 승객 95명을 태울 수 있다. 5분이면 벌써 도착해 있다. 경도는 줄기가 있는 풀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갯장어(일본어로 하모 ‘はも’)로 유명하다. 여름철에만 먹을 수 있는 갯장어는 바다뱀장어의 일종으로 양식이 되지 않는다. 갯장어 샤부샤부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곳이 여기라 한다.경도는 가장 높은 구릉이 92m일 정도로 완만하고 여유롭다. 11km 길이 해안을 따라 포구가 조성된 한산한 어촌이다. 섬 중앙의 4km 도로가 깔끔하다. 둘레길 4개 코스가 9km로 연결돼 있다. 경도해양관광단지는 2010년에 착공돼 27홀 골프장과 100실 규모 콘도 등으로 구성된 1단계 조성 사업이 2014년에 끝났다. 리조트는 지중해 연안을 연상케 하는 건축디자인으로 아늑한 분위기다. 경도 끝자락, 바다를 끼고 있는 시사이드(seaside) 골프장은 연평균 기온이 14.6도로 포근하고 바람이 세지 않아 겨울철에도 라운딩하기에 좋다. 3개 골프코스의 이름이 금오도·돌산도·오동도다. 삶의 형태가 노루를 닮았다는 장도(獐島, 노루섬)는 여수시 웅천동에서 2017년에 다리로 연결된 작은 섬이다. GS칼텍스가 지역사회 문화공헌사업의 하나로 지은 웅천동 예울마루와 연계돼 사계절 꽃을 볼 수 있는 다도해정원과 아뜰리에, 산책길(대나무, 해송, 동백)이 조성돼 있다. 섬 모양이 고양이 같다는 묘도(猫島)는 노량해전 전적지, 읍동마을 다랭이논, 명나라 진린 도독이 주둔했다는 도독마을,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고기를 잡는 ‘독살’,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조선수군을 조련했던 창촌 선창개, 봉화산 전망대 등 볼거리가 많다. 묘도 건너편 광양시 구봉산(473m) 전망대에서는 묘도를 비롯해 여수, 광양, 순천, 하동, 남해 일대를 꽤 멀리 조망할 수 있다.
2021-12-24 20:15:27
곡성의 침실습지와 퐁퐁다리가 물을 바라보며 멍때리기에 좋은 ‘물멍’ 명소라면 죽곡면 원달리 동리산(桐裏山) 자락의 태안사(泰安寺)로 향하는 약 2km의 킬로미터의 들머리 길은 ‘숲멍’하기에 좋은 명품 숲길이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단연코 차를 버리고 약 30분 걸려 두 다리로 걸어야 하는 길이다. 요즘 절집마다 탄탄한 시멘트 길을 만들어 놓았지만 태안사 들머리 길은 울툴불퉁 자갈투성이 흙길이다. 차의 덜컹거림이 너무 심해 운전대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태안사 숲은 초록이 무성한 여름날도 좋지만 낙엽이 떨어져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한 늦가을 정취도 그만이다.태안사로 가는 길목에는 경찰충혼탑이 눈길을 끈다. “한국전쟁 당시 약 300명에 달하는 곡성 경찰들은 이곳 태안사에 작전지휘본부를 설치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50년 8월 6일 이곳에서 북한군과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그 결과 곡성 경찰 48명이 사망했다. 이때 전사한 경찰들을 위한 위령시설로 1985년 세워졌다.”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질곡의 현대사 흔적이 우리 땅 곳곳에 새겨져 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런 안내판을 만나면 숙연해지기 마련이다. 역사는 시간이 지났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어딘가에 흔적을 남겨두어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후세에 그 사실을 명징하게 각인시킨다. 역사가 준엄한 이유이다.충의문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계곡에 하늘로 날아갈 듯한 날렵한 누각을 만나게 된다. 깊은 계곡 속 자연암반 위에 지은 태안사 능파각(凌波閣)은 절의 금강문이자 교량 역할을 겸한다. 능파각은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한다.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24년)에 무명의 세 신승(神僧)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통일신라 문성왕 9년(847년) 혜철국사가 개산조로서 태안사에 선문구산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열었다. 경문왕 4년(864년)에 태어나 고려 혜종 2년(945년)에 입적한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는 8세에 출가해 이 곳에서 수도했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고 다시 돌아와 132간의 당우를 지어 대사찰을 이룩했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사세가 컸으나 고려 중기에 순천 송광사가 수선(修禪)의 본사로 독립됨에 따라 위축됐다. 조선시대에 배불정책으로 쇠퇴했고, 한국전쟁 당시 대웅전 등 15채의 전각이 불탔다.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약사전·만세루(萬歲樓)·해회당(海會堂)·선원(禪院)·능파각(凌波閣)·일주문 등이 있다. 이 중 해회당은 네모꼴로 이어진 큰 건물이고, 선원 역시 전국 굴지의 규모이며, 대웅전은 6·25전쟁 때 불탄 것을 곡성군의 보조로 1969년에 재건했다. 능파각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로, 일주문은 제83호로 지정돼 있다.태안사에는 혜철국사의 부도인 보물 제273호 적인선사 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을 비롯해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비(보물 제 275호), 동종(보물 1349호) 등 다수의 보물이 존재한다. 태안사 초입에는 조태일 시문학기념관도 있다.태안사는 찾을 때마다 매번 적막감에 휩싸여 있다. 동리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절 마당에 깊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태안사의 적막감을 새삼 일깨운다.“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하여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경우가 드물어 승려들이 머물기에 고요하다.”라고 적인선사의 부도비에 적혀 있다. 태안사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아득했는지를 새삼 되새긴다. 동리산에 포근하게 안긴 듯한 태안사는 애써 찾아간 수고를 보상받고도 남게 해주는 절이다. 넓은 계곡과 반석이 아름다운 도림사 “날카롭지 않은 산,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연환경, 시골마을이 그대로 곡성의 모습”이라는 곡성 군수의 말대로 곡성의 산세는 부드럽다. 태안사를 둘러싸고 있던 동리산도 그러하고, 도림사가 안겨 있는 동악산의 산봉우리도 그러하다.동악산(動樂山) 줄기인 성출봉 중턱에 자리 잡은 곡성읍 도림사(道林寺)는 신라 무열왕 7년(66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도림사는 사찰보다 계곡이 더 아름답다고 할 정도로 계곡이 멋진 곳이다. 노송에 둘러싸인 너른 계곡과 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너른 반석들이 가히 무릉계곡을 연상케 한다. 수많은 시인과 묵객이 도림사 계곡을 놓칠 리 없다. 반석마다 이름난 묵객들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다.여름철 오토캠핑장 캠핑족들과 물놀이 인파로 북적거렸던 계곡은 가을로 접어들면서는 한적해진다. 계곡이 끝날 즈음 도림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지만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전소됐고 전각들은 모두 현대에 와서 새로 지어졌다. 보광전, 약사전, 응진당, 명부전 등이 있고 일주문에 걸린 ‘도림사’ 현판은 허백련 화백이 썼다. 보물 제1341호로 지정된 괘불이 소장돼 있다. 섬진강변의 수려한 풍광 ‘함허정’ 입면 제월리의 함허정(涵虛亭)도 지나치면 아쉬운 곳이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심광형이 이 지역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로 조선 시대 땐 호남 4대 정자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건축미가 뛰어나다. 남동쪽의 천마봉, 한강의 여의도 같은 제월섬, 정자 밑의 섬진강과 강변의 구릉, 서편의 평야 등 주변 풍광도 수려하다. 함허정에 서면 가까이 제월섬이 한눈에 펼쳐진다. 한때 방치돼 ‘똥섬’이라 불리기도 했다던 제월섬은 숲 놀이터로 변신했다. 평일에 찾는다면 메타세쿼이아 군락지 등 섬 전체를 전세 낸 듯 ‘황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2021-12-17 10:08:51
전남 곡성을 널리 알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누구 뭐래도 2016년 개봉한 영화 ‘곡성’이다. ‘미끼를 물었다’, ‘뭐시 중헌디’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세간에 다양한 화제를 불러왔다.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인 줄 알고 찾았던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은 귀신, 미신 등이 나오는 오싹한 오컬트(occultism)물에 당황했었다. 나 같은 영화의 문외한에게 영화 ‘곡성’은 오싹한 귀신 영화로 기억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한 곡성의 산천은 놀랍도록 수려하고 청정해서 그해 가봐야 할 여행지 1호로 꼽았던 곳이다.“가진 것이라고는 섬진강과 대황강 그리고 깊은 산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시냇물 그리고 후덕한 인심뿐입니다.”라는 곡성 군수의 말대로 곡성이 내세울 만한 것은 섬진강과 대황강 뿐이다. 그러나 섬진강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침실습지에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 삼인봉을 감싸는 운해를 찾아오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강퍅한 도시의 삶에 문득 피곤함이 느껴질 때 투박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곡성에서 따스한 한 자락 위안을 얻어 가기 위해서 말이다.전라남도 동북부에 위치한 곡성은 동쪽으로는 구례군 서쪽으로는 담양군, 북쪽으로는 전라북도 남원시, 순창군과 접한다.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순천시, 화순군과 맞닿아 있다. 남원 및 구례와 함께 지리산 서쪽에 위치해 경상남도의 함양, 산청, 하동과 함께 지리산 문화권으로 분류된다.곡성은 백제 때는 욕내군(欲乃郡)으로 불리다 신라 경덕왕 때 산맥과 하천의 흐름을 따라 곡성(曲城)이라고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시골장을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들이 산과 강에 둘러싸여 다니기 힘들어 지날 때마다 통곡을 한다 하여 곡성(哭聲)이라 불렸다. 그 후 곡식 곡자를 써서 곡성(穀城)으로 불리다가 지명만을 생각하고 조세를 부과한다는 여론에 따라 골짜기 곡을 써서 곡성(谷城)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조세와 군사에 대해 기술한 ‘여지도서’에는 “땅이 비좁고 사람은 많다. 일정한 생업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적혀 있다. 목기·죽기 등의 가내수공업과 삼베를 가늘게 짜는 돌실나이가 유명하다. 1895년(고종 32년) 군으로 승격, 1914년 창평군(지금의 전남 담양군 창평면)의 옥산면 등 8면을 합쳐 곡성군이 되었다. 1979년엔 곡성면이 곡성읍으로 승격됐다.침혈(寢穴)의 명당에서 유래한 침실습지 … 수달, 흰꼬리수리, 삵 등 자생 곡성은 뭐니뭐니해도 섬진강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곡성군 여행에서는 섬진강이 길동무가 되어주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준다. 섬진강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섬진강 침실습지에 가닿는다.곡성군 침실습지(寢室濕地)는 섬진강과 곡성천이 만나면서 생긴 습지로 2016년 11월 11일 22번째 국가보호습지로 지정됐다. 고달면과 오곡면에 걸쳐 203만㎡에 달하는 광대한 규모로 섬진강변에서는 유일한 국가 지정 습지다. 왜 침실이라 명명했는지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누워서 바라보는 풍경이 침실처럼 아늑하다’ ‘곡성 선산류씨의 문절공파의 묫자리가 침혈(寢穴)의 명당이라 여겨 침실(寢室)이라 불러왔다는 침곡(寢谷)이라는 지명의 유래에서 침실이 왔다’는 추정이 있다. 침실습지는 버드나무 군락지와 갈대숲이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멸종 위기 야생동물 1급인 수달을 비롯해 2급인 흰꼬리수리, 삵, 남생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이밖에 650여 종의 생물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계의 보고다.침실습지를 대하면 바이올린 활이 끊어지듯 긴장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확 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에게 안긴 것 같다. 풀어진 마음으로 천천히 습지를 따라 걷다 보면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마냥 걷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 동안 걷다 보면 때로는 털썩 주저앉아 마냥 앉아 있고 싶어진다. 누구는 이런 것을 ‘물멍’이라고 한다. 강물을 차고 오르는 작은 새의 몸짓도 신기하기만 하다.침실습지는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지만 4~6월, 9~11월에 일교차가 큰 계절의 이른 새벽에 찾으면 물안개 피어오르는 신비한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기온이 영하 10도가량으로 내려가면 상고대도 만날 수 있다. 이 특별한 풍경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진가들이 찾아온다.강물이 불그스레하게 변해가는 해질 무렵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왜가리와 원앙이 목격되는 풍경이 마음을 가라앉힌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에는 푸른 식물이 우거진 습지의 모습에서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달(高達)이란 지명은 ‘높은 다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달교는 남쪽 200미터 지점 섬진강 서편 강둑 생태데크가 시작되는 부분과 침실목교 상부를 중심으로 탐방에 나서면 좋다. 침실목교 위 갤러리에서 침실습지에서 사는 생물들과 습지의 사계절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침실목교를 건너면 무성한 갈대숲이 나온다. 가을날 하얗게 부서지는 환상적인 갈대숲을 지나면 이번에는 붉은색 상판의 제법 널찍한 다리가 나온다. 침실습지의 명물인 ‘퐁퐁다리’다. 비가 많이 올 때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철제 다리에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물이 넘칠 때쯤 물이 구멍으로 솟아나는 모습을 보고 ‘퐁퐁다리’로 명명했다. 침실습지와 이어진 자전거도로를 따라 섬진강 둘레길 트레킹에 나서도 좋다. 있는 그대로의 섬진강의 모습과 약간은 어수선해 보이는 침실습지의 모습에서 인공이란 전혀 없는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찾아가는데 조금 애를 먹을 수도 있다. 네비게이션에서 ‘침실습지’로 검색하면 습지 한가운데로 안내하거나 주유소로 안내한다. 주유소 한 쪽에 차를 세우고 둑길을 따라 걸어도 좋지만 퐁퐁다리까지 걷기에는 조금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곡성군 오곡면 기차마을로 150-108을 입력하면 너른 주차장과 흔들다리 근처로 안내한다.섬진강 기차마을서 시속 30km 증기기관차로 ‘레트로’ 여행 침실습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곡성 관광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이 있다. 섬진강 기차마을은 전라선이 1999년에 이설되면서 구 곡성역에 관광용 미니열차를 들인 게 그 시작이다. 이듬해 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 약 10km 구간을 증기기관차가 달리면서 곡성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1960년대 실제 운행됐던 모습 그대로의 증기기관차를 타고 섬진강변을 시속 30km로 느릿느릿 달려 가정역에 닿는다. 왕복 약 45분이 소요된다. 섬진강 레일바이크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즐길 게 많은 레트로(복고) 여행지로서 대관람차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눈이 시릴 정도로 서정적이다. 구곡성역은 1933년부터 1999년까지 익산과 여수를 잇는 전라선 열차가 지나던 노선이었으나 전라선 복선화 사업으로 철로가 현재의 곡성역으로 옮겨지면서 폐역이 되었다. 곡성기차마을은 폐선된 철로와 함께 철거 위기에 놓였던 구곡성역이 증기기관차 운행을 시작하면서 곡성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된 전화위복의 사례다. 인근에는 대규모 장미공원과 놀이공원인 ‘기차마을 드램랜드’가 조성돼 있다. 장미가 피는 계절에는 약 1000여 종의 장미를 보러 오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룬다.곡성천 따라 뚝방마켓서 문화공연 … 3일·8일 전통시장 장도 병존곡성기차마을 바로 옆에는 곡성천을 따라 약 1km거리에 매주 주말마다 뚝방마켓이 열린다. 지역 예술가들이 직접 만든 각종 공예품들과 먹거리 등이 곡성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뚝방마켓은 물건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문화공연이 열리는 문화장터이기도 하다. 주말 뚝방광장에서 열리는 거리 공연은 지역 주민들과 내국인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발걸음마저 잡아끈다. 커다란 배낭을 옆에 두고 공연 관람에 열중하고 있는 외국인의 모습이 유럽 어느 산악마을 소도시를 연상케 한다. 전통 있는 유럽의 산악마을에서 펼쳐지는 마을 공동체의 삶이 이곳 곡성 뚝방에서도 오롯이 느껴진다. 장터 옆 식당의 푸짐한 인심도 놓치면 아깝다. ‘친정엄마’의 넉넉함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푸짐한 육개장 한 그릇에 여행의 피곤함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뚝방마켓 바로 옆에는 3일과 8일마다 장이 열리는 곡성 전통시장이 있다. 그 사이에는 청년몰이 형성돼 제법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카페 등도 만날 수 있다.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도 근사하다.
2021-12-16 01:06:16
월출산의 서쪽 자락에는 형성된 지 2200년이 넘는 영암군 군서면 구림(鳩林)마을이 있다. 12개의 자연부락이 모여 있는 구림마을은 일본에 유학과 백제문화를 전파한 백제시대 왕인박사와 통일신라시대 4대 고승으로 풍수지리와 도교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태어난 곳이다. 처음 구림마을을 방문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직도 이런 마을이 있네!’하고 놀랄 만큼 한국의 전통마을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보수나 재정비를 통해 마을을 꾸몄겠으나 마을에 상점이나 식당이나 카페 등이 전혀 없을 정도로 상업화를 지양하고 옛 모습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보인다.구림교를 건너 마을(동구림리)로 들어서면 구림초등학교가 나오고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을 보호하듯 떠하니 버티고 서 있다. 주지봉에서 발원한 군서천을 따라 고택들과 돌담들이 이어지고 솔숲 우거진 곳에 정자와 누각이 서 있는 풍광은 시간을 거슬러 은밀한 시간 여행을 떠나온 것만 같다. 구림마을은 앞쪽(동남쪽)으로는 시원한 월출산 문필봉이 서 있고 그 뒤쪽으로 주지봉(490.7m)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안쪽으로는 군서천이 태극 문양을 그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월출산의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기운이 마을 전체에 감도는 듯하다. 도선국사와 왕인박사가 태어났으니 명당임은 이미 증명이 된 셈이다. 구림교를 건너면 바로 마을 이름 ‘구림’과 관련된 설화에 등장하는 바위 ‘국사암’(國師巖)과 국암사(國巖祠)가 서구림리 서호정마을에 있다. 국암사는 최지몽 등 낭주최씨 조상 4위를 모신 사당으로 1972년에 지어졌다. 사당 앞 건물에 서책이 보관돼 국암서원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조정에서 편액을 받은 정식 서원은 아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출신 낭주(朗州, 지금의 영암) 최씨의 정원에 열린 외(오이)가 십자나 넘게 자랐다. 모두 기이하게 여기던 차에 최씨 딸이 몰래 그 외를 따먹었다. 그러자 임신이 돼 아들을 낳았다. 최 씨는 이 아이를 집에서 떨어진 대숲 바위 아래에 갖다 버렸다. 2주 후 쯤 딸이 가서 보니 수리와 비둘기가 아이를 감싸 보호하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최 씨는 다시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아이는 자라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이라 했다. 그는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 승려인 일행(一行)선사로부터 지리법을 배워 돌아와 산을 답사하고 물을 보는데 신명스러움이 많았다. 후에 그곳을 구림(구림의 鳩는 비둘기를 의미) 또는 비취(飛鷲, 鷲는 독수리를 말함)라 했다.도선국사의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국사암’이다. 그 이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국사암을 갈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수많은 여인들이 이 바위돌을 갈아 마셨다고 한다. 국사암 표면에 곰보자국처럼 패인 수많은 구멍들이 모두 돌을 갈아먹기 위해 파낸 흔적이라고 한다.국사암을 기점으로 동쪽 마을은 동계(東溪, 동구림리, 학암마을도 크게 보면 동계), 서쪽은 서호정(西胡亭. 서구림리), 남쪽 산 밑은 고산(高山, 동구림리), 북쪽은 북송정(北松亭, 서구림리, 남송정으로 북송정의 남쪽이며 서구림리)으로 부른다. 지금도 구림마을에서는 비둘기를 상서롭게 여겨 군서천 위 남송정교 난간에 마을의 비호물로 비둘기 조형물을 설치해 놓았다.18세기에 간행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구림마을의 열다섯 동네는 쌍취정(雙翠亭), 북송정(北松亭), 남송정(南松亭), 상서호정(上西湖亭), 하서호정(下西湖亭), 학암(鶴岩), 죽정(竹亭), 구림(鳩林), 국사암(國師岩), 동송정(東松亭), 취정(翠亭), 동정자(東亭子), 남정자(南亭子), 동계리(東溪里), 고산리(高山里) 등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영암군 서종면(西終面)의 고산리(高山里)·동계리(東溪里)·학암리(鶴岩里)·쌍와리(雙蛙里)·신근정리(新根亭里)를 병합하여 동구림리를, 율정리(栗亭里)·서호정리(西湖亭里)·남송정리(南松亭里)·북송정리(北松亭里)·국사암리(國師岩里)와 서시면(西始面)의 신흥리(新興里)를 병합해 서구림리를 개설했다. 서종면은 대부분 군서면으로 통합됐고 일부는 영암읍으로 흡수돼 소멸됐다. 참고로 영암의 남서단인 삼호읍은 대불산업단지가 조성돼 현대삼호중공업 본사가 있고, 코리아인터내셔널서킷이 들어서 한 때 포뮬러원 그랑프리가 개최됐다. 과거 삼호면이 삼호읍으로 승격돼 영암군에는 영암읍과 삼호읍 등 2개의 읍이 있다. 시종면, 서호면, 미암면은 간척지가 많고 지대가 낮고 평평해 평야지대로 활용되는 면적이 많다. 삼호읍과 해남군 산이면 사이의 영암호, 영암 삼호방조제 앞바다, 영산강 하구둑인 삼호읍과 목포시 사이의 바다에서는 8~11월에 은빛갈치를 쉽게 잡을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여름에는 개체수가 많다가 가을에 접어들면서 줄어들고 대신 씨알이 굵어진다. 구림마을에는 ‘대동계’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구림대동계는 마을의 질서를 지키고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마을공동체이다. 1565년(조선 명종 20)에 이 마을의 유학자인 함양 박씨 박규정(朴奎精 1498~1580)과 선산 임씨 임호(林浩 1522~1592) 등이 처음 조직했으며 구림동계 혹은 서호동계라고 부른다. 계원 명단, 계원들의 규칙과 합의 사항을 정리한 문서들이 전해오며 지금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과거 대동계에 가입하려면 ‘구림리에서 사방 20리 안에 살면서 가문과 학식을 두루 갖추고 품행이 단정한 토반으로 한학을 공부한 유림’이어야만 했다. 대동계는 정기적으로 열리기도 했지만 사안에 따라 임시로 열리기도 했다. 의사 결정은 과반수 찬성으로 정했으며 바둑알을 자루에 넣는 방식으로 의사 표시를 하게 했다. 마을 안쪽 솔숲에 대동계의 집회 장소였던 ‘회사정’(會社亭)이 서구림리에 남아 있다. 국가 대소사를 논의하고 내빈을 영접하는 장소로도 활용된 대동계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구림마을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름다운 고택과 정자, 누각,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 곳이다. 조선 후기 전형적인 부농의 가옥 형태를 보여주는 창녕 조씨 문중 종가 저택인 ‘조종수가옥’, 함양 박씨의 입향조인 오한(五恨) 박성건(朴成乾 1418~1487)이 지은 간죽정(間竹亭)과 박성건 등 5위를 배향한 죽정사(竹亭祠)와 박성건이 후학을 가르치던 죽정서원(竹亭書院) 등이 서구림리에 있다.함양박씨 박흡(朴洽 ?~1593) 등 6형제(6장군)가 자란 ‘육우당(六友堂)’, 죽림(竹林) 현징(玄徵 1629~1702)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해서 지은 정자로 유배온 영의정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이름을 지어 준 ‘죽림정’(竹林亭) 등도 인근 서구림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박흡은 임진왜란때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장군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 등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운 충절의 장군이다. 죽림정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다. 현재는 많은 고택들이 한옥민박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왕인박사, 상대포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다왕인(王仁)은 백제 근초고왕 때 학자로 논어 등 경전을 공부했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과 한자를 전했으며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태자(菟道稚郞子)의 스승을 지내기도 했다. 구림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문필봉 북동쪽 기슭에는 대규모 왕인 박사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왕인이 탄생한 것으로 알려진 동구림리 성기동 집터와 그가 마셨다고 전해오는 성천(聖泉)이 있다. 탄생지 옆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이밖에 왕인의 사당과 전시관이 조성돼 있으며 매년 4월이면 왕인박사 유적지에서 ‘왕인문화축제’가 열린다. 왕인석상은 월출산 문필봉 북쪽 자락 양사재와 가까운, 박사가 책을 쌓아놓고 공부했다는 자연동굴인 책굴(冊屈)의 옆에 세워져 있다. 양사재와 주지봉 기슭 문산재는 왕인이 일본으로 떠난 후 고향 후학들이 인재를 길러낸 곳으로 매년 3월 3일 추모제를 지냈다고 한다. 서구림리 상대마을 서쪽 옛 상대포(上臺浦) 지역에는 상대포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상대포는 고대 서남권 지방의 국제무역항으로 중국, 일본 등과의 교역 중심지였다. 밀물이 되면 깊이 2m 정도의 바다가 되어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설화에 따르면 왕인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들고 도공, 와공, 야공, 직동 등 많은 기술자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 곳이 바로 이곳 상대포이다. 왕인박사는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아스카(飛鳥) 문화를 꽃피운 비조(鼻祖)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통일신라 말 당대 최고의 학자들인 최치원, 최승우, 김가기 등이 중국 유학을 떠났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산강 간척사업으로 상대포는 사라진 지 오래고, 상대포역사공원에는 누각과 작은 연못 등이 조성돼 있다. 왕인박사가 타고 간 왕인호 모형물만 옛 기억을 찾아보려 애쓰고 있다.40년간 모은 1만점 미술품 중 3600점 전시한 하정웅미술관 하정웅미술관과 영암도기박물관은 그냥 지나치면 후회할 만큼 훌륭한 전시공간이다. 서구림리 국사암과 죽림정 사이에 위치한 하정웅미술관은 구림전통마을과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현대적 건물이지만 의외로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다. 영암군 출신 재일교포 사업가인 동강(東江) 하정웅(河正雄, 1939년 11월 3일생~)의 컬렉션 중 3600여 점을 작품을 기증받으면서 건립됐다. 미술관은 매년 2~3회에 걸쳐 동강 컬렉션 미술품을 공개 전시한다. 하정웅은 자신이 약 40년에 걸쳐 평생 동안 수집한 회화, 판화, 조각, 공예, 사진, 서예 등 미술품 1만여점 전부를 광주시립미술관 등 국내 국공립 박물관, 미술관 등에 기증한 메세나 활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반도 최초의 유약 바른 도자기 내놓은 영암영암읍의 영암도기박물관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도기를 테마로 설립된 박물관이다. 사적 제388호로 지정된 구암 가마터, 고분, 생활유적 등에서 출토된 도자 유물 등이 전시된다. 영암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 최초로 유약을 바른 시유도기(施釉陶器) 발상지이다. 시유도기 발상지인 영암 도기터에서 제작된 도기를 판매하며, 도예체험 등을 할 수 있다.
2021-11-28 16:04:24
“여기 사람들은 ‘도갑사(道岬寺)에서 보는 월출산(月出山)은 밋밋하고 강진 쪽에서 바라보면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답고 영암 읍내에서 보면 웅장하다.’라고 한대요.” 도갑사 템플스테이에서 쪽잠을 자고 이른 아침에 만난 도갑사 종무소 직원이 잘 잤냐는 인사말과 함께 건넨 말이다. 도갑사에서 바라본 월출산이 하도 잘 생기고 웅장하여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느라 벌써 목이 뻣뻣했지만 다시 한번 월출산을 바라보게 된다. 전날 늦은 오후 도갑사를 찾아 영암 땅을 밟으면서 느꼈던 첫 감흥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주 사람들이 한라산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들판에서 일하다 한라산이 잘 있나 한번 쳐다보고 하루를 마감하듯, 전남 영암(靈巖) 사람들도 월출산을 보면서 그리하는 듯하다. 그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리할 수밖에 없다. 영암 어디를 가건 우뚝 솟아 있으니 말이다. ‘영암’이라는 지명이 월출산에서 유래했으니 영암이 월출산이고, 월출산이 영암이 아닐는지.월출산은 서해에 접해 있어 달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데서 유래했다.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월출산이 유달리 인상적인 것은 흙산으로 이루어진 남도의 안온하고 부드러운 산들과 달리 얼핏 보기에도 태반이 암반으로 이루어진 뾰족뾰족한 바위산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일부러 흙을 다 걷어내 버린 것 같이 흙 속의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모습은 강인해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남도의 척박하고 절박한 현실과 닮아서 안쓰럽기도 하다. 그런 감정은 동백보다도 붉은 영암의 흙을 보면서도 드는 감정이다.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렸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리기도 한 월출산은 정상의 천왕봉을 비롯해 구정봉, 향로봉, 장군봉, 매봉, 주지봉, 죽순봉 등 삐죽삐죽한 봉우리들이 하늘로 솟았다. 그 모양새가 하도 기이하고 절묘하여 종종 설악산과 비교되고 일찍부터 작은 금강산이라 불렸다. 고려 명종조의 문인 김극기(金克己)는 월출산에 대해 “서쪽 봉우리 높고 높아 우뚝 솟은 모양인데 사나운 범이 노하여 걸터 앉았고 물소가 달려가는 양하여라. 나그네의 흥이 기이함을 탐내어 험난함을 잊고 뱀 서리듯 몸을 굽히면서도 피로한 줄 모르겠네.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 어찌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라고 적었다.영암이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월출산 구정봉 아래 동석(動石, 흔들바위)이 있다. 이 돌의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된다.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 백인이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뜨릴 것 같으면서도 떨어뜨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영암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1973년 1월 29일에 도립공원, 1988년 6월 1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월출산은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난대와 온대가 공존하는 생태학적으로도 보존가치가 높은 식생을 보유하고 있다. 산림청 선정 한국의 100대 명산이다.월출산은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영암은 북으로는 나주시와 화순군, 서로는 무안반도에서 뻗어나온 무안군과 목포시, 남서쪽으로는 해남군, 남동쪽으로는 강진군 및 장흥군과 인접하고 있다. 영암군은 잠시 나주부에 속하기도 했다. 월출산은 호남정맥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지만 기실 백두대간의 한 맥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독립된 산군을 이루고 있다.월출산은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도 이채로운 흥취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월출산 등산로의 대부분은 상수원 보호구역과 자연휴식년제로 묶여 있어 천황사에서 시루봉을 거쳐 천황봉으로 오르는 루트, 도갑사에서 미왕재-향로봉-천황봉으로 이어지는 코스, 강진에서 금릉경포대계곡을 통해 오르는 길만 산행이 가능하다.가장 일반적인 산행로는 영암읍 개신리 천황사다. 월출산의 명물 구름다리는 시루봉과 매봉 사이에 걸려있다. 매봉에 올라서면 길은 연실봉, 사자봉을 지나 주릉(主綾)에 올라서게 된다. 여기서 기암괴석으로 가득찬 월출산의 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관문인 통천문을 빠져나가면 천황봉이 바로 눈앞이다. 여기서 천황봉까지는 300m에 불과하다. 계곡 코스로는 바람골을 따라 오르면 20분 만에 바람폭포와 만난다. 쇠난간을 붙잡고 바람폭포 위로 조심스럽게 오르면 무인 대피소를 지나 계곡 따라 계속 오르면 천황봉이다.밤새 몰아치던 바람이 잦아든 이른 아침 산사의 풍경은 더없이 맑고 안온하다. 역시 산사의 그윽하고 깊은 정취를 느끼려면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가 제격이다.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월출산 봉우리 턱 밑에 하얀 운해가 연기처럼 아스라이 퍼져 나가는 모습이 ‘전설의 고향’ 속 신선이 머무는 곳 같다. 신선의 장난인지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가 요망스럽기 그지없다. 금방 해가 났다 싶으면 어느새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비를 뿌린다. 빗줄기는 가늘어졌다 거세졌다 하면서 농간을 부린다. 세찬 빗줄기를 피하느라 소동을 벌이는 중에 다시 말간 해가 얼굴을 디민다. 날씨가 이렇게 변덕스러울 수가 있나. 나그네의 발길을 잡아 두려는 월출산의 계략인지도 모르겠다. 그 탓에 도갑사에서 계획했던 시간보다 훨씬 머무르게 되었으니 말이다.‘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군서면 도갑리의 도갑사는 통일 신라시대의 4대 고승으로 추앙받는 영암 출신의 도선국사가 헌강왕 6년(877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그 후 역시 영암 출신으로 도갑사에서 출가한 수미왕사가 조선 세조 2년에 중창했다. 정유재란과 6.25전쟁 통에 대부분이 파괴돼 복원 불사를 하였으나 1977년 한 신도의 불찰로 인한 화재로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버렸다. 현재 전각들은 화재 이후 새로 지었다. 이 때문에 연혁은 오래됐으나 고졸한 멋은 느껴지지 않는다. 월출산 산신령의 가호인지 부처님의 불력인지 다행히 국보 50호로 지정된 해탈문과 보물 1433호인 5층석탑 등이 해를 입지 않았다.도갑사 해탈문은 그야말로 고졸하다. 10년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 반가웠다. 정면에는 ‘월출산일주문’, 후면에는 ‘국중제일선종대찰’이라는 현판이 현판이 걸려 있다. 도갑사 해탈문은 1960년 해체 복원할 때 나온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성종 4년에 다시 세웠다. 중앙칸은 통로가 되고,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안치했다. 배흘림 기둥을 사용하였고 주심포 양식과 다포식 양식이 혼합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건축양식으로 유사한 예로 경북 영주 부석사 조사당을 꼽을 수 있다. 전문적인 건축학적 의미와는 별도로 도갑사 해탈문은 보면 볼수록 단출하고 소박한 멋이 묻어나 오래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해탈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절 마당과 5층석탑을 비롯해 대웅보전, 명부전 등의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압권은 역시나 뒤편에 호위무사처럼 버티고 있는 월출산이다. 10월말~11월초 영암에서는 국화축제가 벌어지는 데 도갑사에도 국화가 가득하다. 탐스러운 국화로 장식된 ‘도갑사 5층석탑’도 여느 때보다 화사하게 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이 탑은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몸체들이 낮아져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석가모니 부처와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신 대웅보전과 도선국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조사전 등이 있다.도갑사의 다른 문화재들은 내키지 않아도 다리품을 팔아야 볼 수 있다. 대웅전을 지나 숲길로 접어들면 홀연 폭포가 나타난다. 폭포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한 수준이지만 용수폭포가 자리한다.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용수폭포에서 미륵전으로 가는 돌다리 근처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은 단풍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단풍 구경에 한 세월 걸려 돌다리를 건너면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미륵전이 나온다. 이곳에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이 모셔져 있다. 살짝 문을 여니 몸체와 광배(光背)가 하나의 돌로 조각된 돌부처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앉아 있다. 열린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부처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응시하는 순간 비좁게 느껴졌던 미륵전 법당이 갑자기 천하가 굽어보이는 사방이 탁 트인 월출산 어느 산마루로 변하는 신기한 느낌에 빠지게 된다.미륵전에서 다시 숲길로 조금 더 올라가면 부도전과 도갑사 도선수미비(보물 1395호)가 나온다. 1635년에 건립된 이 석비는 조성 기간만 18년이나 걸렸다. 높이가 517cm에 달하며 석재를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서 가져왔다. 비의 규모와 표현 양식에서 다른 것들과 차별성을 지닌다. 여의주를 문 거북이 고개를 왼쪽으로 치켜 든 자세가 이채롭다. 비석(4.8m) 윗부분(이수부, 螭首部)의 용 조각이 정교하다. 비석의 하단인 귀부(龜趺)는 귀갑문(龜甲文) 대신 평행 사선문으로 되어 있고, 비신의 좌우 양옆에 조각된 운룡문(雲龍文)은 넘치는 기상과 율동감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대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또 대부분 비들이 한 사람의 공적을 기록한 것에 비해 도선수미비는 명칭처럼 도선과 수미선사를 동시에 다루고 있는 점 역시 매우 특이하다. 비문이 세 개의 독립된 부분으로 구성돼 있고 천자(穿字)와 각자(刻字)를 한 사람도 서로 다른 이유는 건립부터 완성까지 걸린 기간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탑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도선수미비 앞에서는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수 정도로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다. 조사전 옆에 있는 수미왕사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52호)와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도선수미비부터 월출산 생태탐방로가 시작된다. 나무데크를 따라 천천히 월출산의 속살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원시림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2021-11-27 22:25:44
전남 나주는 오랜 역사만큼 고찰도 많다. 불회사, 다보사, 심향사가 많이 알려져 있고 미륵사, 죽림사, 운흥사 등도 천년고찰로 꼽힌다. 대체로 나주 서북쪽의 금성산 또는 남동쪽의 덕룡산에 몰려 있다. 나주의 절들은 조계종으로 치면 정읍 백양사(白羊寺)의 말사(末寺)에 속한다. 다보사(多寶寺)는 나주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금성산(錦城山 해발 451m) 자락의 남측 경현동에 자리잡고 있다. 다보사 가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나주 치유의 숲’에 이르게 도니다. 길지 않은 들머리 길은 애기단풍이 터널을 이룬다. 이제 막 붉게 물들기 시작한 비 맞은 단풍나무들이 한껏 가을 정취를 돋우고 있다. 인적 없는 다보사에서는 쓸쓸함과 적막감이 감돈다. 다보사는 정확한 창건 연대는 전하지 않으며 신라의 승려 원효가 661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금성산에서 수행하던 스님이 큰 탑이 땅속에서 솟아 나오고, 그 탑에서 다보여래가 나타나는 꿈을 꾼 후에 절을 세우고 ‘다보사’라 했다고 한다. 1184년 보조국사 지눌이, 1594년 서산대사 휴정이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현재 건물들은 모두 조선시대 19세기 후반에 지어졌다. 대웅전은 나주 신로사(薪老寺)에 있던 건물로 신로사가 폐사되면서 옮겨왔다. 대웅전 괘불탱(보물 제1348호)을 비롯해 영산전 목조 석가여래 삼존상 및 소조 십육나한 좌상(보물 제1834호),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전남유형문화재 제310호), 대웅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7호)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금성산 자락 나주시 대호동의 심향사(尋香寺)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 현종이 나주로 몽진왔을 때 구국의 기원을 올려 기도해 이를 물리쳤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신왕사(神王寺)로도 불렸으며 미륵원(彌勒院)이라고도 한다. 대웅전의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고려 후기 건칠불상의 중요한 전범으로 손꼽히며 보물 1544호로 지정돼 있다. 심향사는 다보사의 북서쪽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며 나주향교와도 멀지 않다. 불회사(佛會寺)는 나주의 남동쪽인 다도면 마산리에 잇는 절이다. 다도면과 봉황면의 경계인 덕룡산(德龍山)의 동남쪽에 있다. 366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했다는 고찰이다. 절 입구에 세워진 할아버지 할머니 돌장승 한 쌍이 인상적이다. 할아버지 장승은 왕방울만한 눈에 주먹코 수염을 길게 땋은 모습이 심통이 난 듯 보이는 반면 할머니는 마치 외할머니처럼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다. 돌장승을 지나 불회사로 들어가는 숲길에는 편백나무, 비자나무, 전나무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마라난타는 백제 침류왕 1년(384년)에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돼 있는데 창립 추정 연대는 366년, 367년, 384년 등 제각각이다. 백제에 도착하자마자 절을 지었다는 것도 석연찮고, 366년경에 지은 것을 다시 지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1798년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조선 순조 8년(1808년)에 다시 지었다. 1530년에 편찬된 지리지에는 불호사였다가 1808년부터 불회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때 크게 훼손된 것을 1991년부터 25년간 재건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상당수가 근현대에 지어졌는데 보물 1310호인 대웅전이 140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운흥사(雲興寺) 역시 덕룡산 남동쪽 기슭인 다도면 암정리에 있으며 불회사보다 더 산에 가깝다. ‘한국 차의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출가했던 곳으로 야생차 재배지로 유서 깊은 곳이다. 말년에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에서 다도삼매(茶道三昧)에 들었던 초의선사는 운흥사에서 차를 처음 접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운흥사 주변에는 야생차들이 자라고 있다. 이 지역이 다도면(茶道面)이라 이름지어진 것도 이런 역사 때문이다. 운흥사 입구에 세워진 남녀 한 쌍의 돌장승은 1968년 12월 12일 국가민속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 남장승은 높이 270cm, 둘레가 192cm에 달하는 거대한 체구로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코, 송곳니가 삐져나와 있지만 인자한 할아버지의 얼굴이다. 여장승은 웃는 표정으로 소박한 모습이다. 각각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이름이 새겨 있다. 운흥사 돌장승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볼 때 불회사 장승보다 원조인 것으로 짐작된다.다도면의 서쪽에 붙은 봉황면 철천리의 미륵사(彌勒寺)는 덕룡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544년(백제 성왕 22년)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창룡사(蒼龍寺)라 칭했다고 전해지지만 문헌상의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창건 이후의 연혁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한국전쟁 후 거의 폐사돼 민간인과 무속인이 점유하다가 1990년대 후반 원일스님이 불사를 일으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철천리 석불입상과 칠불석상도 유명하다. 나주의 북동쪽을 차지하는 남평읍의 풍림리 중봉산(中峯山) 자락에 있는 죽림사(竹林寺)는 비유왕 14년(449년) 백제의 고승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소담한 절이다. 세존괘불탱(보물 1279호), 건칠아미타여래좌상, 극락전 영산회상도, 극락보전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담양보다 아늑한 산포수목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옆 도래 한옥마을 나주 남평읍 서편의 산포면 산제리의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는 흔히 ‘산포수목원’으로 불린다. 이 곳명물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다. 정문에 들어서면 길이 500m쯤 되는 진입로 양쪽에 하늘을 찌를 듯한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서 있다. 담양 메타세쿼이아길보다 짧지만, 폭이 좁아서 더 아늑한 느낌이 든다.수목원에서 남쪽으로 걸어 약 5분 거리인 다도면 풍산리에는 풍산 홍씨 집성촌인 도래마을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홍기응 가옥과 홍기헌 가옥,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시민유산 제4호로 선정된 도래마을옛집 등 조선시대 양반집이 많아 전통 한옥과 예스런 돌담의 조화가 아름답다. 안채·별당채·대문채로 구성된 도래마을옛집에서는 한옥 숙박체험이 가능하다.영산포구의 옛 추억 실은 황포돛배영산포등대 앞 선착장에는 조선시대에 물산을 나르던 황포돛배의 출항지가 있다. 영산포등대는 1915년 일제가 범람이 잦았던 영산강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했다. 오늘날까지 내륙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다. 지금은 영산강 뱃길이 끊겨 등대로서 기능하지 않지만 밤마다 불을 밝혀 영산포구의 옛 추억을 되살려 주고 있다.영산포에 2008년 30여 년 만에 사라졌던 황포돛배가 다시 등장했다. 1978년 영산강 하굿둑 건설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황포돛배를 비롯한 수십 척의 선박들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옛날 황포돛배는 홍어, 소금, 쌀 등의 농수산물을 실어 날랐다. 황포돛배는 황토로 염색한 돛을 단 전통배다, 호수처럼 잔잔한 영산강의 물길을 가르며 천천히 나아간다. 영산동 영산포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다시면 회진리 천연염색박물관 앞 풍호나루터까지 약 5km 구간을 55분 동안 왕복 운항한다. 영산강 유람을 마쳤다면 인근 드라마 ‘주몽’의 촬영지로 유명한 나주테마영상파크와 천연염색문화관까지 들러볼 수 있다.
2021-11-17 17:08:20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유래했다. 나주는 흔히들 ‘천년 목사(牧使)의 고을’이라고 부른다.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인 목(牧)은 고려시대에 12곳, 조선시대에 20곳이다. 고려 성종 2년에(983년) 전국에 12목을 두었는데 전라도에는 전주와 나주밖에 없었다. 나주목을 다스리던 직책이 나주목사로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와 군수의 중간쯤되는 벼슬이다. 남도 여행은 묘하게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을 감싸고 있는 높고 낮은 산들 대신에 막막하다 싶을 만큼 광대한 들판과 논들이 줄곧 이어지기 때문이다. 광주를 지나 나주로 향하는 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로를 따라 펼쳐지는 나주시의 모습은 영락없는 대평원을 연상시킨다. 마치 꽁꽁 싸매고 있던 보자기가 일순 확 풀어진 것처럼 어디 하나 굴곡도 없는 편평한 땅이 펼쳐지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서 썰렁함이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주평야의 풍요로움을 덮지는 못했다. 이상하게도 텅 빈 논들조차도 황금빛으로 빛나 보이는 곳이 나주땅이다. 나주는 우리나라의 평야지대 중에서도 중심지로 꼽히는 곳이다. 벼농사는 물론이고 과수농업과 원예농업도 함께 발달했다. 호남 제일의 쌀로 친다는 나주쌀과 영산강변의 비옥한 땅과 남도의 풍요로운 햇살, 잔잔한 바람이 기른 나주배를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주는 동쪽으로는 화순군, 서쪽으로는 무안군과 함평군, 남쪽으로는 영암군, 북쪽으로는 광주 광산구와 맞닿아 있다. 과거 호남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다. 나주의 서북쪽에는 나주의 진산이라 불리는 금성산(錦城山)이 위치해 있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른다. 호남정맥 입암산(笠岩山, 641m, 장성과 정읍의 경계)에서 시작해 방장산(고창과 장성의 경계), 금수산을 거쳐 영광 태청산(太淸山, 영광과 장성의 경계)에서 곁가지를 타고 내려오다가 우뚝 솟은 산이 금성산이다. 나주를 관통하는 영산강은 길이 139km, 유역 면적 2798㎢의 강으로 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자락에서 발원해 장성군, 광주직할시, 나주, 함평, 무안, 영암 등을 돌아 서해로 흘러든다. 영산도 사람들이 뭍에 개척한 영산포 따라 강이름도 영산강영산강은 원래는 통일신라 때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錦城)을 따서 ‘금천’ 또는 ‘감강’이라 불렸으며 나루터는 금강진(錦江津) 또는 하항(河港), 남포(南浦) 등으로 불렸다. 그러다 전남 신안군 영산도(永山島, 흑산도의 부속섬)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나주 근처의 포구에 개척한 영산포의 이름을 따서 영산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나주는 백제 때는 발라군(發羅郡) 또는 통의(通義)라 불렸고 신라 때는 금성이라 했다. 원래는 후백제의 땅이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함락한 뒤 지금의 이름인 나주로 고쳤다. 왕건은 나주의 지방 토호였던 오다련(吳多憐, 856~944년, 나주오씨의 시조)의 딸과 정략결혼해 낳은 아들이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이다. 고려 현종 때 목이 됐다. 영산포읍과 나주읍은 합병해 1981년 금성시가 됐다가 1986년 나주시로 환원됐다. 고려 말 학자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기여한 혁명가 정도전은 고려왕조에 반발하다 나주 회진면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정도전은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나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유부로서’에서 나주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 태조(왕건)가 삼한을 평정할 적에 온 나라가 차례차례 평정됐으나 오직 후백제만이 그 지역이 험하고 멀어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은 반역과 순종을 밝히 알아 솔선해서 귀순했다.”태조가 후백제를 취하는 데에 나주 사람의 힘이 컸다 하겠다. 왕건과의 인연으로 1896년 전라남도의 관찰부가 광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900여 년에 걸쳐 나주는 전라남도 일원을 호령했다.정도전은 또 ‘소재동기’에서는 “금성산은 단중하고 기이해 동북에 웅거했으니 나주의 진산”이라며 “사람들이 순박해 다른 생각이 없이 농업에 힘씀을 업으로 한다”고 적었다. 정도전이 유배를 왔던 회진현(會津縣) 소재동(消災洞)은 지금의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권문세가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목도하면서 농민을 향한 애정을 싹틔우고 신왕조 개국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조선 세종~성종 때의 문신 이예(李芮 1419~1480)는 “가게를 벌여 놓고 물건을 사고판다.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하다”라고 적었다. ‘택리지’에는 “나주는 노령 아래 있는 한 도회인데 북쪽에는 금성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영산강에 임했다. 고을 관아의 판세가 한양과 흡사해 예부터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다”고 기록돼 있다. 같은 시대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주는 전라도에서 가장 커서 땅이 넓고 만물이 번성한다. 또한 벼가 많이 나고 바닷가라서 물산이 풍부해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라 상인들이 이곳저곳에서 몰려 든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기름지고 넓은 평야와 영산강을 끼고 있는 나주는 예부터 문평, 함평 등 이웃 고을의 평야와 바다에서 오는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근현대를 거치며 발전 동력을 잃고 낙후된 소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21세기 들어 나주는 혁신도시의 기치를 앞세워 변화와 도약을 모색하는 동시에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고려시대에 축조, 조선시대에 완성한 나주읍성‘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나주’에서 가장 먼저 들러볼 것은 성북동과 교동 일대의 나주읍성과 사대문이다. 필자가 기억하는 나주의 모습은 20년 전 옹색한 시골 백반식당에서 먹었던 나주곰탕이 전부였다. 그 기억 속에는 호남의 중심지이니 역사와 문화니 하는 개념은 일절 없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비로소 나주에 대한 편견을 씻어내고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 읍성 일대에는 사대문과 향교, 금성관 등 과거 나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거나 복원돼 있다. 성곽을 따라 느릿느릿 걷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나주로 시간이동을 한 듯한 착각 속에 빠져 들게 된다. 읍성과 향교 등을 복원한 도시는 많지만 나주만큼 옛 분위기마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은 드물다. 나주읍성은 고려시대부터 축조하기 시작해 조선시대 세조 3년(1457)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란 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둘레가 약 3.7km, 면적은 약 30만평에 달하며 동서남북에 동점문(東漸門), 영금문(暎錦門), 남고문(南顧門), 북망문(北望門) 등 네 개의 성문이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훼철됐으나 2000년대에 들어 복원했다. 읍성의 주 출입구인 남고문이 1993년 가장 먼저 복원됐고 2005년에 추가 보수됐다. 동문인 동점문은 삼봉 정도전의 흔적이 깃든 곳으로 2006년 복원됐다. 임금님이 있는 북쪽을 바라본다는 북망문은 2018년 가장 늦게 회복됐다. 나주향교, 사직단 등이 있는 서쪽으로 나갈 때 사용했던 서성문은 동학농민혁명 때 동학군이 서성벽을 넘지 못하고 전멸했다는 사연을 담고 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했으나 나주와 남원, 운봉 세 곳은 집강소 설치를 반대했다. 곧바로 남원은 김개남 부대가, 운봉은 김봉득이 내려가 점령했지만 나주는 끝내 점령에 실패하고 만다. 1894년 음력 7월 1일 나주 접주 오권선과 30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끈 태인 접주 최경선이 함께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나주성을 손에 넣지 못하고 퇴각했다. 같은 해 음력 8월 13일 전봉준과 소수의 휘하 부하들이 영금문(서성문)으로 찾아와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에게 집강소 설치와 폐정 개혁안 단행을 요구했으나 민종렬이 제안을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됐다. 양반과 부호 세력 및 향리들로 조직된 민보군은 돌아가는 전봉준 일행을 죽이려 했다. 이때 전봉준은 자신과 부하가 입었던 옷을 벗어서 주며 옷의 세탁을 부탁하고 영암을 돌아보고 오겠으니 그때 돌려달라고 한다. 민보군은 그때 죽여도 늦지 않다고 판단해 전봉준 일행을 놓아주었으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동학농민혁명은 진압됐고 전봉준은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避老里)에서 잡혀 운명의 장난처럼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됐다. 영금문 성벽이 복원돼 있어 성벽을 따라 천천히 걸어볼 수 있다. 성벽 끝까지 걸어가면 보호수와 포토존이 설치돼 있어 예쁜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다. 금계동의 나주목사내아(琴鶴軒)은 목사와 가족들이 기거하고 집무를 보던 곳이다. ‘ㄷ’자 구조로 단출하고도 아름답다. 방에 놓인 침구와 가구들은 옛집에 걸맞게 고풍스럽다. 넓은 대청마루는 담소를 나누기에도 좋다. 여기서 하룻밤 묵는 일도 추억에 남을 만하다. 일년에 딱 2번 개방하는 나주향교 외삼문과 내삼문서성문에서 나지막한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 이내 나주향교(금계동)가 나온다. 돌담 너머로 은행나무잎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인 골목길에는 가을 정취가 가득하다. 나주향교의 정문인 외삼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옆쪽에 난 협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다. 향교지기의 말을 따르면 나주향교의 외삼문과 내삼문은 일 년에 딱 2번 봄가을에 지내는 석전대제 때에만 개방된다고 한다. 나주향교는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의 한 자락인 장원봉이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금성산의 기운을 흠뻑 받는 터에 위치하고 있다. 향교 자리에 고려시대에는 큰 절이 있었다고도 하고, 파주 염씨가 살던 집터였다고도 전해진다. 여느 고을과 마찬가지로 서성문 밖 향교 일대는 교동이라 불렸다. 나주향교는 일단 규모면에서 압도적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500년 이상된 비자나무와 은행나무들이 더하는 연륜이 남다르다. 강릉향교, 장수향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향교에 속하는 나주향교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전하지 않으나 고려 성종 6년(987년) 8월에 전국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중수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부분의 향교가 높은 언덕이나 경사진 곳에 전학후묘 양식으로 세워진 것과 달리 나주향교는 평지에 전묘후학 양식으로 지어졌다. 어쨌든 협문을 통해 향교로 들어서면 먼저 명륜당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다른 향교들과 같다. 학문공간은 명륜당 및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돼 있다. 동재 옆으로 세 개의 협문이 있어 교직사(校直舍 또는 庫直舍), 충효관, 서책을 보관하는 보전각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 협문은 향교 밖으로 나 있는데 문밖에는 여러 개의 비석과 사마재(司馬齋) 건물이 있다. 오늘날 향교 출입문으로 이용되는 문이 바로 이 협문이다.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난 협문은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어 향교지기의 허가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대성전은 중국의 4성과 송조4현과 우리나라 18현 등 모두 27위의 위패를 모신 공간이다. 규모가 웅장하고 건축 양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향교 건축을 대표하며 보물 제394호로 지정돼 있다. 대성전의 벽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 전하며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성균관 건물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의 대성전을 참조해 지었다고 한다. 대성전으로 오르는 양쪽의 계단 소맷돌에 새겨진 용머리 문양과 주춧돌에 새겨진 복련(覆蓮 연꽃이 뒤집어진 모양) 무늬 등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륜당 앞마당에는 500년 된 비자나무가, 대성전 앞뜰에는 6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서 있다. 과거 약이 귀했던 시절 구충제 역할을 하는 비자나무 열매는 배앓이를 하는 유생들의 약재로 사용됐고 지금도 석전대제를 지낼 때 제수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한다. 나주향교에 연지(蓮池)가 있는 점도 특이하다. 금성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가두어 연못을 만들고 화재 시에는 소화수로도 사용됐다. 핫플레이스 난파정과 카페 ‘마중 3917’ 향교와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중3917’이라는 복합문화공간 겸 카페가 있다. 적산가옥을 개조해 만든 곳으로 카페, 게스트하우스, 공연장, 야외테라스 등 다양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최근 드라마 ‘알고 있지만’과 항일 음악가 정율성(鄭律成 1914~1976, 중국 및 북한에서 활동하다 1950년 중국에 귀화)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경계인’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아름다운 한옥 건물과 특색 있게 꾸며진 공간으로 최근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곳이다. 나주 특산물인 나주배로 만든 음료와 쿠키도 인기다. 카페 마중에서 언덕 쪽으로 올라가면 ‘난파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조선 중기부터 금성산 장원봉 끝자락 언덕에 위치한 난파정은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을 민종렬과 함께 진압하고 그 공으로 해남군수에 올랐으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나 을미의병을 일으킨 난파 정석진(蘭坡 鄭夕珍 1851~1896)이 자주 사용하던 정자다. 큰아들 정우찬이 1915년 재건축했다. 5.18민주화 운동 중심지이기도 한 나주객사 금성관나주향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옛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錦城館)이 복원돼 있다. 객사는 고려~조선 시대의 일종의 지방 궁실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 또는 궐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를 올리고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유숙하던 곳이다. 1470년 나주목사 이유인(李有仁 ?~1492)이 건립했다. 객관 남쪽에 위치한 금성관의 정문 망화루(望華樓, 外三門에 해당) 앞 광장은 나주인들의 의향(義鄕) 정신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 의병장의 출병식이 있었고, 영조 때에는 나주괘서사건, 구한말 단발령의거, 일제 강점기 항일학생운동 등이 모두 망화루 앞에서 있었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나주군청이 있던 곳으로 전남 지역에서 모여든 시위대의 집결지로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다. 금성관 좌측에는 나주 관아 정문 정수루(正綏樓)가 서 있다. 1603년(선조 36년)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우복룡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망화루 앞 나주 곰탕거리 40년의 역사나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나주배와 나주곰탕이다. 추운 겨울로 접어드는 요즘엔 뜨끈한 나주곰탕 한 그릇이 절로 생각난다. 망화루 앞 나주곰탕거리에는 하얀집, 남평할매집, 노안집 등 원조집이 즐비하다. 삼시 세끼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나주 곰탕이다.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곰탕 맛이 일품이다. 따로 날을 잡아 곰탕 투어를 해도 좋다. 어느 식당이건 특별한 맛이 있으니 선택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나주곰탕의 시작은 약 40년 전인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시장이 성행했던 나주에서 소를 잡을 때 부산물로 나오는 머리고기, 뼈, 내장 등을 넣고 푹 고은 장터국밥이 나주 곰탕의 시작이다. 소뼈를 고아낸 물에 소고기 양지와 내장 등을 넣고 푹 고아낸 맑은 국물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쌀밥이 말아서 나오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모락모락 김이 나는 대형 가마솥 단지만 봐도 벌써 침이 꿀꺽 넘어간다. 나주에 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주곰탕은 먹어 봐야 한다. 식당 앞에는 나주곰탕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대형버스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주의 삼미는 최근 나주곰탕, 홍어, 장어로 바뀌었다. 흑산도에서 건너와 영산포를 개척한 사람들은 홍어를 싣고 나주에 도착했을 땐 홍어가 삭혀져 있었다. 흑산도에서는 회로 홍어를 먹었지만 버리기가 아까워 삭힌 홍어를 먹기 시작했다. 삭혀도 부패하지 않는 생선은 홍어뿐이다. 삭힌 홍어는 암모니아 냄새가 코감기에 걸린 사람의 코를 뚫어줄 정도로 강하다. 이를 즐길 줄 안다면 삭힌 회뿐만 아니라 홍어애나 홍어전, 홍어튀김에도 도전해볼 만하다. 이렇게 삭힌 홍어는 영상포를 상징하는 별미로 자리잡아 ‘홍어의 거리’가 조성됐고 새로운 랜드마크가 됐다. 옛날 영산강 하굿둑이 들어서기 전에는 구진포에 조수와 민물이 섞이면서 장어가 많이 잡혔고 맛있기로 유명했다. 다시면 가운리와 동강면 수문리 일대에는 장어거리가 들어 서 있다. 50년 전 국내서 장어구이를 상품화해서 처음 알린 곳이 여기다. 민물장어를 깨끗이 씻어 뼈와 살을 발라내고, 추려낸 뼈와 머리를 고아낸 물에 갖가지 양념을 넣고 양념국을 만든다. 장어살에 끓여놓은 양념국을 약 10회 반복해 묻혀가면서 약한 숯불에 구워내 얇게 썬 생강채와 곁들여 내면 구진포 장어구이가 완성된다. 1970~80년대 거리 풍경 고스란히 구도심의 정감뱃속이 든든하면 마음도 여유로워진다.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읍성을 거닐어 보자.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옛 읍성의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듯하다. 금성관, 망화루, 향교 등에 은은한 조명이 밝혀지고 거리는 조용해진다. 70~80년대 거리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구시가지 산책도 해 볼만하다.현재 도시재생 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는 옛 나주정미소, 지금은 병원이 된 일제강점기에 수탈 목적으로 만들어진 ‘금남금융협동조합’ 건물 등도 만나볼 수 있다. 나주 정미소는 호남 최초의 정미소로 나주에서 생산된 쌀을 정미하는 대표적인 정미소이자 정부양곡창고였다. 나주 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항일정신이 숨 쉬는 근대산업유산이기도 하다. 현재 읍성 일대는 대대적인 나주목 관아 복원 및 정비 계획에 따라 공사가 진행 중이다. 나주목 동헌, 나주목 향청 등이 복원되고 천년공원 등이 조성될 예정이다. 곰탕집 한 곳도 조만간 인근의 다른 곳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옛 거리의 향취를 느끼고 싶다면 나주 여행을 서둘러야 한다.
2021-11-12 16:27:16
생태도시를 지향하는 순천시의 에코 여행 1번지는 단연 서부의 순천만 습지이다. 순천만은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위치한 항아리 모양의 내만으로 강 하구와 갈대밭, 염습지, 갯벌, 섬 등 다양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세계 5대 연안습지에 속한다. 순천만은 서면 강변수변공원으로 시작된다. 순천 도심을 관통하는 동천(東川)은 이사천은 대대포구에서 만나 순천만으로 흘러들어간다. 동천변 자전거길은 S자 모양의 물길을 따라 순천만 국가정원, 순천문학관, 순천만 습지를 거쳐 화포해변과 별량면 거차·죽전 마을로 이어지며 마침표를 찍는다. 대대포구와 690만평의 광활한 갯벌이 약 160만 평에 달하는 갈대밭과 장관을 이루는 곳이 바로 순천만이다. 이곳엔 11월부터 검은머리갈매기와 검은머리물떼새, 황새, 저어새, 흑두루미, 재두르미, 도요새, 청둥오리 등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 조류 ‘겨울철 손님’이 날아든다. 이 새들의 먹잇감이 되는 수많은 게, 갯지렁이, 곤충, 어류 등이 서식하고 있다.순천만 습지에는 자연생태관, 순천만 천문대, 자연의 소리 체험관, 순천문학관, 흑두루미 소망터널 등이 있다. 문학관에는 순천 출신으로 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정채봉 작가관과 소설 <무진기행>의 김승옥 작가관이 마련돼 있다.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안개 낀 도시 ‘무진’(霧津)의 배경이 순천만이다. 김승옥 작가의 주옥 같은 10편의 단편 중 가장 사랑받는 게 무진기행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해했고 사람들을 둘러싹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이 구절은 시 같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며, 희망을 가까스로 품고 있기도 하다. 영화의 내레이션으로도 귀에 많이 익숙하다. 순천만 갈대숲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용산전망대로 가야 한다. 갈대 사이를 누비며 느린 걸음으로 30여분 정도를 오르면 용산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구불구불한 물길과 낙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가을이면 금빛과 은빛으로 넘실대는 순천만의 노래가 더욱 감동적이다. 안개가 부려놓은 갈색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57개 정원의 집합체 ‘순천만 국가정원’ … 호수정원과 경전철도 한몫순천시 풍덕동에 위치한 순천만 국가정원은 순천만과 함께 동천-봉화산 둘레길로 이어져 순천시 전체가 마치 하나의 큰 정원을 이루고 있다. 2013년 4월 20일 <순천만 국제 정원박람회>에 맞춰 문을 연 순천만 국가정원은 ‘정원 문화의 정수’라고 할 만큼 다양한 식물종과 특색있는 세계 각국의 정원이 펼쳐지는 곳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국가정원 내에는 13개의 세계 정원과 참여 정원 30곳, 테마별 정원 14곳 등 57개 정원이 있다. 수목원, 생태 습지센터 등 다양한 산림 휴양 체험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영국의 정원 디자이너 찰스 젱스가 그의 딸과 함께 일주일 동안 순천시에 머물며 순천시의 풍경과 순천만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는 호수 정원도 놓치지 말자. 호수정원 중심부의 봉화언덕은 봉화산을 나타내며, 호수는 도심을, 호수를 가로지르는 나무데크는 동천을 상징한다. 국가정원은 작약과 장미 등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초록이 무성한 이맘 때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룬다. 워낙에 넓어서 하루에 다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사부작사부작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즐기는 게 좋다. 정원 곳곳을 운행하는 ‘꼬마열차’(경전철)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경전철인 스카이큐브는 2014년부터 운행을 시작했으나 적자에 시달려 법적으로 운행사와 순천시가 다투다가 올해 3월에에 재개통됐다. 통합권을 끊으면 순천만국가정원, 순천만습지, 스카이큐브를 1만4000원에 이용할 수 있다. 순천만 국가정원 홈페이지에 8경이 안내돼 있어 동선 짜는 데 참고하면 좋다. 순천(順天)이란 지명은 하늘의 명을 따른다는 뜻이다. 고어에 ‘순천자흥 역천자망’이 있다. 하늘을 따르면 흥하고 거스르면 망한다는 뜻이다. 순천은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지만 가운데에는 봉화산과 삼산 등 아늑한 산이 자리잡고 있다. 험한 산이 중심에는 없다. 그리고 강안과 갯벌은 풍요로움을 안는다. 먹고 살기에 충분한 들판과 여수, 광양에서 올라오는 해산물이 풍성하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허균은 순천을 ‘조선의 강남’이라고 칭했다. 중국의 강남처럼 따뜻하고 먹을 게 많고 풍요로운 곳이었다는 의미다. 이를 상징하는 게 순천만과 이를 둘러싼 자연과 인조물이지만 우리나라의 자랑이 된 국가정원이 아닐까 싶다.
2021-06-16 01:01:58
남도여행에서 송광사(松廣寺)는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순천 선암사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송광사로 넘어가는 굴목재가 있다. 송광사는 16국사를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고승을 배출한 사찰로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로 꼽힌다. 국보 네 점, 보물 19점, 지방 문화재 9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사적 5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광사 일주문을 지나 느슨한 산길을 오르다면 능허교(凌虛橋)라는 무지개다리를 만나게 된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불국(佛國)을 향하는 선승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위의 문루 형식의 우화각(羽化閣)이 있다. 송나라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가(赤壁歌)에 나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에서 나온 뜻이다. 깨달음을 얻어 몸과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신선이 된다는 것으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열망을 담은 누각의 이름이다. 능허교와 우화각은 ‘우화청풍’(羽化淸風)이라 하여 송광사 팔경 중 하나로 꼽힌다. 우화각은 정면 1칸, 측면 4칸 규모에 입구 쪽은 팔작지붕, 출구쪽은 맞배지붕을 조합한 특이한 양식이다. 공포는 간결한 주심포(柱心包) 양식이다. 기록에 의하면 1707~1711년에 건립한 후 1774년에 중수한 것으로 18세기 누교 건축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능허교 아래 한가운데엔 용머리 석상이 있다. 용은 계곡물의 나쁜 기운을 차단하기 위한 조형물이다. 수호신 역할을 하는 용두의 입 부분에 옆전 세닢이 철사줄에 매달려 있다. 옆전은 둥그렇지만 그 안의 구멍은 사각형이다. 안으로는 반듯하게 밖으로는 둥글게 살라는 의미다. 둥근 것(圓)은 하늘이며 모난 것(方)은 땅이니 우주를 품고 있다고 하겠다.옆전 세닢이 달린 것에는 공사를 감독하던 스님이 다리를 완공하고 남은 엽전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지 않고 다리 아래에 매달아 놓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탐욕을 부리지 않고 반듯하게 수행하려는 무욕의 마음이 담겨 있다.송광사는 절의 건축미와 문화재도 좋지만 훈훈한 분위기와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어 누구나 찾고 싶은 절집이다. 이 절에는 빼놓을 수 없는 3대 명물이 있다. 쌀 7가마인 4000명분의 밥을 담을 수 있다는 ‘비사리구시’와 어느 순서로 포개어도 포개어지는 수공예품 그릇인 ‘능견난사’, 천연기념물 88호로 높이가 무려 12m에 달하는 800년 된 두 그루의 향나무 ‘쌍향수’가 바로 그것이다.쌍향수는 송광사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천자암의 뒷산에 있다. 20분 정도 가파른 산길을 오르명 두 마리 용이 또아리를 틀 듯 꼬이며 자란 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묘한 모습이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폐사지에서 살아난 금둔사 … 야생차밭과 납월매 유명 선암사에서 상사호를 끼고 오도재를 넘으면 낙안면 금둔사(金芚寺)에 닿는다. 오공재 정상(오공치) 전망대에 오르면 낙안읍성과 낙안면 일대의 너른 들판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만개한 꽃잎처럼 펼쳐진다. 오공치는 손오금처럼 오그라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혹자는 금둔사 계곡에 지네가 많이 살아서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오공치는 지네를, 진계제는 닭을 말하는데 서로 앙숙지간인 지네가 닭을 헤치려고 하여 지네의 허리를 자르기 위해 오공치에 길을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오공치를 넘으면 거대한 암석들이 불쑥불쑥 솟아 있는 금전산(金錢山 해발 667.9m)이 나온다. 그 모양이 마치 500나한이 선정에 든 모습을 연상시킨다. 산 이름은 석가세존의 500나한 중 금전 비구의 이름을 따 온 것이라고 한다. 금전산 기슭에 자리한 금둔사는 백제 위덕왕 30년(583년)에 담혜화상이 일본에 처음으로 승려 10여 명을 양성하고 귀국해 창건했다. 금둔사의 ‘금’은 부처님을, ‘둔’은 싹이 돋아난다는 뜻으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수행을 통해 부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금둔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손을 보았고,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자산문의 창시자인 철감국사가 이 자리에 동림선원을 개원했으며, 그의 제자 징효대사와 중창했다. 그 후 정유재란(1597년)으로 전소됐다가 18세기 후반까지 가까스로 유지됐으나 결국 폐사지가 돼 개인 소유의 전답이 되었다. 지금의 금둔사는 1983년 지허스님이 태고선원을 개설하고 대웅전과 일주문 선원, 약사전, 요사채, 홍교 등을 차츰 복원했으며 지금도 중창 중이다. 경내에는 9세기 때 철감국사와 징효대사 때 조성된 보물 945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946호 석불입상이 있다. 삼층석탑은 완전 도굴돼 흩어져 있는 탑 조각을 모아 1979년 7월 10일에 복원한 것이다. 금둔사는 선암사와 마찬가지로 한국 자생 전통차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신라 때부터 두 곳의 선원을 유지해 온 금둔사는 자연히 차의 수요가 많았다. 현재도 절 주변에 500여 평의 자생차 밭이 남아 있다.금둔사는 1990년 이후 직근성(直根性, 물을 찾아 뿌리가 수직으로 뻗는) 한국 전통 차나무 밭을 운영 관리하며, 9증 9포 방식의 수공업으로 전통차를 생산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일시 중단됐으나 한국 자생차를 맛볼 수 있는 다원이 운영되고 있다. 금둔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납월매로 유명하다. 음력 12월(납월, 臘月, 섣달)에 핀다하여 납월매로 불리는데 번식이 어려워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매화이다. 금둔사에는 지허스님이 아랫마을인 낙안읍성의 부호의 뜰에서 오래된 매화나무의 종자를 어렵게 얻어 살린 6그루의 납월매가 자라고 있다.납월매는 다른 매화와 달리 한꺼번에 꽃을 피우지 않고 간격을 두고 꽃이 핀다. 진한 꽃향기를 풍기는 것도 색다르다.매화로는 순천시 북쪽의 월등면 계월리도 20만평이나 되는 넓은 매화마을로 유명하다. 날이 추운 산골이라 광양보다 무려 보름이나 늦게 매화꽃이 핀다. 계월리는 앞뒤로 바랑산(620m), 문유산(688m), 병풍산(499.8m)을 껴안고 있다.계월리에서 매화를 심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55여 년 전. 일제 때 일본으로 건너간 이 동네 주민 고(故) 이택종씨가 매화나무 등 과수 묘목을 가지고 1960년대 중반에 영구 귀국하면서다. 매화나무 밭 아래에 심은 보랏빛 자운영도 4월 중순 이후에는 장관을 이룬다.CNN이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낙안읍성’ 금둔사에서 10여 분 거리에는 조선 태조 때 축성된 낙안읍성(樂安邑城))이 자리하고 있다. 해미읍성, 고창읍성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꼽힌다. 낙안읍성은 남쪽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세종 6년에 석성으로 개축됐다.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인 객사 1동, 민속문화재 가옥 9동, 노거수 14주, 임경업 장군 비각 1동, 동헌, 낙민루, 내아, 옥사, 우물 등이 복원돼 있다.낙안읍성이 다른 곳과 다른 점은 지금도 120세대, 300여 명의 주민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가정집 외에도 염색이나 목공예, 악기 공방, 민박 등이 운영돼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낙안읍성에는 삽살개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순천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험준한 기운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한 마리는 오봉산을, 또 한 마리는 제석산과 거석봉을, 또 한 마리는 금전산과 우산, 고동산의 기운을 막기 위한 것으로 원래는 3구였으나 현재는 2구만이 남아 있다. CNN이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18위로 선정된 낙안읍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2021-06-12 05:13:20
전라남도 남동쪽의 작은 도시 순천은 동쪽으로는 광양시, 서쪽으로는 보성군과 화순군, 남쪽으로는 순천만을 끼고 보성군과 여수시, 북쪽으로는 곡성군과 맞닿아 있다. 시 면적의 70%가 산지로 산에 둘러싸여 있는 순천시는 전라남도에서 산이 가장 많은 도시이다. 순천시에서 느껴지는 아늑함은 소백산맥의 지맥들인 조계산, 고동산, 백이산, 오동산 등 높지 않은 산들에 둘러싸인 덕분일 것이다. 게다가 전국에서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동천(東川)이 도시를 관통하며 흐르고 생태도시의 조건을 갖췄다.순천의 아름다움은 누가 뭐래도 갯벌과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순천만이다. 저녁 햇살에 하얗게 부서지는 갈대숲과 용산전망대에서 순천만의 요염한 물살의 흐름을 보지 않고서는 순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없다. 39.8km의 해안선과 21.6km의 개펄, 5.4km의 갈대밭으로 구성된 순천만은 국제 람사르 습지협약에서도 인정한 세계 5대 연안 습지이다. 아름다운 일몰을 자랑하는 와온해변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불교 태고종의 총림인 조계산 선암사와 조계종 승보사찰인 조계사인 송광사라는 천년 사찰과 숨은 보석 같은 절 금둔사를 품고 있는 한국 불교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600년 전 마을 모습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낙안읍성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태고종의 본산 선암사 … 석등, 협시불, 어간문 없는 3無의 절 … 화재 트라우마로 석등도 없어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자락에 자리한 선암사(仙巖寺)는 백제 성왕 6년(526)에 아도화상이 현재의 비로암자에 처음 세웠고, 이창주(二刱主)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현재의 선암사 자리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 3창주 의천대각국사에 이르러 대중창이 이루어지고 천태종을 널리 전파해 호남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정유재란 때 전소되다시피 한 선암사를 1660년 경준, 경잠, 문정 세 스님이 8년에 걸쳐 중수했다. 호암 스님에 와서 원통전, 불조전, 승선교 등을 지으며 중창 불사가 마무리됐다.종무소 보살에게 선암사 자랑을 해달라고 하니 대뜸 ‘선암사는 3무(無)의 절’이라고 대답했다. 사천왕문, 협시보살, 어간문이 없다는 것이다. 선암사에 사천왕문이 없는 것은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이 선암사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에 협시불(夾侍佛 석가모니불 좌우의 불상, 본존물과 협시불을 합쳐 삼존불이라고 함)이 없는 이유는 주존불인 석가모니불이 삼독(탐욕(貪慾), 진애(嗔恚 성냄), 우치(愚癡 어리석음) 등을 일컬음)을 물리치고 마구니(魔仇尼, Maguni 귀신)에게 항복을 받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자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어간문(御間門)을 통과할 수 있기에 어간문을 두지 않았다.선암사의 3무는 곧 자긍심이다. ‘잡다한’ 것은 필요 없고 홀로 스스로 당당한 부처님을 섬기겠다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샛별이 사라지기 직전의 새벽녘 혹은 어둠이 깔리는 해질 무렵 선암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서 온 세상을 굽어보는 듯한 석가모니불을 바라보노라면 선암사가 왜 3무의 절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선암사에는 이밖에 석등과 원통전의 대들보, 대웅전 기둥의 주련 등이 없다고 한다. 선암사에 석등이 없는 것은 선암사의 빈번한 화재와 관련이 있다. 영조 35년의 큰 화재 이후에는 절 이름을 ‘청량산 해천사’로 바꾸어 화 기운을 누르려했다. 일주문 안쪽 현판에 남아 있는 옛 이름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다. 그러나 순조 23년 또다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탔다. 해붕, 눌암, 익종 스님 등이 중창하면서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려놓았다. 선암사는 석등을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내에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화재에 대비했다. 모두 6개의 연못이 있었으나 2개의 연못은 적묵당과 성보박물관을 지으면서 메꾸어졌다. 현재는 원통전과 장경각 옆에 연못, 설선당 서쪽의 쌍지, 뒷간과 일주문 사이에 연못,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의 타원형의 삼인당이 있다. 심검당(尋劍堂) 환기창에 ‘水’와 ‘海’ 글자가 투각돼 있는 것도 화재 예방을 위한 것이라니 선암사가 얼마나 화재에 트라우마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긴 타원형의 연못 삼인당(三印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으로 꼽힌다. 삼인은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교리 즉,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새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삼나무들이 불법을 수호하듯 연못을 둘러싸고 있고 연못 가운데 알 모양의 섬에는 전나무와 배롱나무가 한 그루씩 심어져 있다.작은 한옥마을을 닮은 선암사선암사는 절집보다는 마당과 연못을 갖춘 고풍스러운 가옥이 빼곡히 들어선 운치 있는 마을을 연상시킨다. 전각들은 마치 잘 지어진 정자나 지조 높은 양반가옥 같다. 전각 둘레에 돌담을 쌓고 작은 나무문을 달았다. 돌담들은 이어져서 돌담길이 되었다. 돌담을 따라서는 500년 넘은 매화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작은 정원에는 온갖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4월이면 수양벚꽃(홍매의 일종)이 길게 늘어진 연못 속을 유유자적 헤엄치며 노니는 잉어들이 운치를 더한다. 돌담길과 석단을 사이에 두고 선암사는 몇 개의 커다란 영역으로 나뉜다. 대웅전 영역, 원통전 영역, 응진전 영역 등이다. 대웅전 영역은 대웅전과 맞은편의 만세루, 좌우의 선불당과 심검당, 중정에 세워진 통일신라 때 조성된 탑 2기, 지장전과 응향각 등을 일컫는다. 대웅전 뒤편으로 돌담길을 사이에 두고 팔상전, 불조전, 조사전 등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팔상전에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와 정조 4년에 제작된 화엄경 설법 모습을 그린 ‘화엄경변상도’ 등이 있다. ‘화엄경변상도’는 우리나라에 3폭이 남아 있는데 나머지 2폭은 순천 송광사와 하동 쌍계사에 있다. 불조전에는 과거 7불과 미래 천불(千佛)의 53불을 모셨다. 조사전에는 선암사의 개창자와 중창자, 중수자 등 역대 주지들이 영정이 모셔져 있다.팔상전과 불조전 사이에 좁은 계단을 오르면 날갯짓을 하는 듯한 모습의 원통전을 만나게 된다. 원통전은 1689년 호암대사가 중창했다. 조계산 배바위에서 관세음보살 친견을 위해 백일기도를 드린 호암대사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바위에서 떨어져 죽으려 했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호암대사를 구하였는데 그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원통전을 중창하고 친견한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였다. 정조가 후사를 이을 자손이 없자 눌암대사가 원통전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후 순조가 태어났다는 일화가 전한다. 후에 순조가 내린 ‘대복전’이란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호암대사가 지은 원통전은 1759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현재의 원통전은 1824년 눌암스님의 중수를 거쳐 1923년 재중수한 것이다. 원통전 옆에는 원통전을 관리하는 스님을 위한 요사채 ‘첨성각’이 있다. 절 들머리 아름다움의 최고 포인트 ‘승선교’ 선암사는 무엇보다 들머리가 아름다운 절이다. 선암사 들머리의 아름다움은 숲길 중간 쯤에 모습을 드러내는 승선교(昇仙橋)에 이르러 극대화된다. 보물 400호로 지정된 아치 모양의 홍교(虹橋)인 승선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라고 할 수 있다. 승선교의 아름다움은 계곡 아래로 내려가 아치 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강선루(降仙樓)와 함께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무지개다리와 강선루가 푸른 계곡물 위로 떠오르는 반영(反影)은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루며 천상의 풍경을 만든다. 무지개 다리도 두 개요, 강선루도 두 개가 되는 것이다. 하얀 옷을 차려입은 선녀들은 금방이라도 다리 위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그러나 선녀는 없고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빌 틈이 없다. 승선교는 호암스님이 숙종 때인 1713년에 완공했다. 호암은 승선교 외에도 벌교의 홍교와 북한산성을 쌓았다. 청빈하기 이를 데 없는 스님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봄의 전령사 ‘선암매’ … 원통전 뒤편 백매와 무우전 돌담길 홍매선암사 하면 선암매를 빼놓을 수 없다. 매화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그 향이 천리만리까지 뻗어가는데 선암사에는 수백 년 된 노매 20여 그루가 향을 뿜어내고 있어 봄날엔 선암사로 달려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선암매는 고려시대 대각국사가 중창할 때 삼성각 앞의 ‘와송’과 함께 처음 심었다고 상량문에 전한다. 긴 시간 풍파 속에서 기이하게 구부러지고 뒤틀린 가지에서 피어나는 선암사 매화의 자태는 아리도록 곱다. 그 향은 육당 최남선의 말처럼 ‘코가 에어져 나가는 듯한’ 내음이다. 2007년 선암사 ‘무우전매’, 정확히 원통전 뒤편의 600년 된 백매와 무우전(無憂殿) 돌담길의 홍매 두 그루가 천연기념물 488호로 지정됐다.선암매는 꽃이 없는 겨울철에도 봄날 매화 못지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이리 굽고 저리 휜 메마른 굵은 가지들을 온전하게 드러낸 모습은 겨울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관이다. 매화가 지고 난 4월 중순이 되면 겹벚꽃이 화려하게 선암사를 장식한다. 화려함은 매화보다 겹벚꽃이 한 수 위다. 커다란 카네이션 꽃송이 같기도 한 왕벚꽃이 필 무렵이면 천상의 화원이 따로 없다. 선암사 겹벚꽃에 대한 내력은 선암사 스님들도 잘 모른다. 대략 일제강점기 편백나무와 같은 시기에 식재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시인 정호승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읊어선암사의 뒷간(해우소)은 맞배지붕을 한 고풍스러운 목조건물로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전남문화재자료 214호). ‘뒤깐’라는 안내판이 없다면 누가 이 건물을 뒷간이라 여길까 싶을 만큼 멋스러울 뿐만 아니라 통풍이 잘 돼 화장실 냄새도 나지 않는다. 시인 정호승은 ‘선암사’ 라는 시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선암사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라고 노래한 바 있다. 이 시를 이해하려면 해우소로 들어가 앉아 나무 창살 틈으로 선암사를 무념무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다 문득 평생 꽃과 바람을 찾아 허공을 헤매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득도의 기쁨을 누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선암사 편백나무숲과 삼나무숲선암사는 졸참나무, 서어나무, 상수리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 등 활엽수들이 어우러진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겨울에도 초록의 싱그러움을 자랑하며 쭉쭉 뻗어있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들 덕에 선암사 숲은 사시사철 생동감이 넘친다. 선암사 삼나무와 편백나무들은 일제강점기 때 심어진 것으로 종묘의 원산지는 일본이다. 따뜻하고 습한 기후에서 잘 자라고 단단하고 변형이 적어 쓰임새가 많아 일제는 주로 남부지방에 삼나무와 편백을 심었다. 남부지방에 잘 자란 편백나무 숲이 많은 이유 중 하나이다. 삼인당과 일주문 근처와 운수암(雲水庵) 가는 길에 삼나무숲을 볼 수 있다. 편백나무 숲은 조금 더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대각암(大覺庵) 올라가는 길 옆쪽에 ‘편백나무 숲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을 따라 송광사로 넘어가는 큰굴목재쪽으로 시원한 편백나무 숲이 펼쳐진다. 선암사 야생차 밭과 달마전 수각일주문 근처와 칠전선원(七殿禪院, 응진당, 진영당, 미타전, 벽안당, 달마전, 수각, 산신각 등 7개 건물을 일컬음) 뒤편으로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선암사 야생 자생차 밭이 펼쳐진다. 삼인당과 일주문 사이에 약 1000평, 칠전선원 뒤 약 5000평, 대승암 옆에서부터 송광사 가는 길목의 산밭에 약 1만평 등에 이른다. 삼인당 차밭은 도선국사가 처음 조성했고, 칠전선원 뒤 차밭은 중흥조 대각국사가, 산밭의 차밭은 선암사 주지스님을 지내신 지허스님이 1996년에 조성했다. 우리나라 자생차의 역사는 유구하다. 혹자는 828년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나무 열매를 가져와서 지리산 남쪽에 심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차의 유래라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차 문화가 시작됐다. 2세기 인도의 허황옥이 금관가야의 왕비로 시집올 때 차씨와 차를 가져왔다고 하며, 4세기에 인도의 승려 행사존자가 백제에 불교를 전할 때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본사기’에는 7세기 초 백제 스님 행기보살이 일본에 차를 처음 전했다고 기록돼 있다. 선암사의 야생차밭은 오랜 세월 우리 풍토에 맞게 가꾸어지고 뿌리를 내려, 외래종이 섞이지 않은 자생차나무밭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기에 더욱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 숭유억불과 일제강점기, 근현대의 고단한 시기를 지나면서도 선암사 야생차밭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선암사 스님들의 각별한 노력 덕분이다. 한국 자생차는 선암사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한겨울에도 선암사 차밭은 온통 초록빛으로 넘실댄다. 차 밭 너머 쭉뻗은 나무들과 선암사 전각의 지붕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비경임이 분명하다.차나무 꽃은 서리가 내리는 10월에서 12월 사이에 핀다. 곡우 무렵에 첫 찻잎을 따기 시작한다. 찻잎은 몇 차례의 찌고 덖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차가 되는데 아홉 번 덖아낸 차를 최고급으로 친다.찻잎을 따는 시기가 되면 선암사는 분주해진다. 5월에는 손이 부족해 마을사람들까지 동원한다고 한다. 작고 여린 잎을 상처 없이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따는 일은 숙련된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차나무는 땅 속에 깊게 뿌리를 내려 혼신의 힘으로 성장해 가지에 균등하게 생명을 나눠준다. 자라서 차꽃을 피우고, 차씨를 맺게 한다. 그 차씨는 다시 차 나무가 되어 또다시 생명을 나눠주는 윤회의 삶을 사니 스님들의 명상과 수행생활에 빠지지 않았다.선암사 칠전선원 달마전은 이러한 선암사의 다맥을 이어가는 다각으로, 달마전 부엌 뒤편에는 돌을 깍아 만든 아름다운 ‘수각’(水閣)이 있다. 수각은 모양과 크기가 모두 다른데 통나무와 대롱을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끔 설치되었다. 조계산 선암사 계곡에서 발원한 물은 야생차밭을 거쳐 통나무를 타고 수각으로 흘러드는 물이니 얼마나 귀하겠는가. 그중에서도 첫 번째 네모난 수각에 담긴 물은 부처님께 바치는 청수나 차를 다릴 때 사용된다. 두번째 타원형 수각 물은 먹는 물이다. 세 번째 큰 둥근 수각의 물로는 쌀이나 과일을 씻는다. 마지막 수각의 물은 허드렛일에 사용한다. 칠전선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수행 공간이라 달마전 수각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스님께 부탁하면 잠시 출입을 허용해 줄지도 모르겠다. 달마전에서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면 무우전과 각황전에 닿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무우전 툇마루에 앉아 느릿한 조계산의 능선을 바라봐야 비로소 선암사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이 떠올라 잠시 툇마루에 앉아본다. 조계산의 꾸물꾸물 느릿한 능선이 눈 앞에 펼쳐지는 모습이 가히 일품이다.무우전 뒤편에 자리잡은 각황전에는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철불이 봉안돼 있다. 도선국사가 남긴 3대 유산 중 하나인 이 철불은 발견 당시 마당에 묻혀 있었으나 지금은 금칠로 새롭게 단장했다.
2021-06-04 21:2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