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융건릉과 용주사를 꼽을 수 있다. 융릉(隆陵)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합장묘이고, 건릉(健陵)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합쳐서 융건릉이라 부르며 화성시 안녕동과 화산동에 나란히 붙어 있다. 내밀하고 지엄한 왕실 공간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왕릉은 조성부터 관리까지 철저하고 엄격한 규율과 법도에 따라 이뤄져왔다. 지금이야 편안하게 관람하러 다니지만 조선 왕조 500년간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됐다.조선왕릉은 국왕과 왕비 등 왕실의 무덤은 ‘궁궐에서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왕실 규범집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조성됐다. 오늘날 조선왕릉들이 서울의 외곽지역인 고양, 남양주, 구리, 화성 등 경기도 일대에 분포돼 있는 이유다. 다만 폐위돼 유배지에서 죽음을 당한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만 예외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현존하는 조선왕릉은 모두 42기로 태조 이성계의 원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齊陵)과 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인 후릉(厚陵) 2기가 북한 땅 개성에 있고, 나머지 40기는 모두 남한 땅에 있다. 40기는 일괄적으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500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던 덕에 조선왕릉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오랜 세월이 빚은 명품 숲에 둘러싸여 있다. 울창한 숲과 붉은 홍살문과 정자각과 재실 같은 전통적인 목조 건축물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편의 사극에서 으레 보는 풍경을 연출한다. 가을철엔 단풍 여행 코스로 조선왕릉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문화재청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통제되고 있던 왕릉 숲길을 한시적으로 개방하고 있어 조선왕릉의 명품 숲길을 탐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조선왕릉 숲길 9개소가 개방된다. 개방되는 숲에는 화성 융릉과 건릉 숲길도 포함돼 있다.정조의 효심 덕분에 사도묘→수은묘→영우원→현륭원→융릉으로 격상 융건릉 매표소를 지나 능역으로 들어서면 두 개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융릉이고 왼쪽으로 가면 건릉이다. 10월 말 융건릉 숲은 이미 가을빛이 완연하다. 누런빛이 감도는 소나무와 전나무 숲길을 따라 융릉으로 향한다. 숲속에는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이 그대로 수북하게 쌓여 있어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숲속 벤치에서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들의 모습에서도 고즈넉함이 묻어나고 있다.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묻혀 있는 융릉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한 맺힌 그리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는 것도 억울한데, 눈앞에서 뒤주에 갇혀 죽었으니 그 한이 오죽했으랴.영조는 1762년 아들을 추도한다며 사도묘(思悼墓)라고 했다가 자신의 허물을 자인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1764년 수은묘(垂恩墓)로 바꿨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제일 먼저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상하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拜峯山, 현 서울시 동대문구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아버지의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개칭하고 아버지를 모신 사당인 수은묘(垂恩廟)을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했다. 경모궁은 지금의 대학로(연건동) 서울대 의대 교내에 있다. 참고로 묘(墓)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을 모신 무덤을 말한다. 반면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묻힌 곳이다. 또 묘(廟)는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하는데 주로 묘 근처에 비각이나 작은 집처럼 세워져 있다. 廟는 혼(魂)을 모신 사당을, 墓는 백(魄)을 모신 무덤을 뜻한다. 혼은 정신적 에너지이고, 백은 육체적 기본물질을 말한다.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했든지 정조는 즉위 13년 째인 1789년 영우원을 수원부 용복면에 있는 화산(수원부 관아가 있던 곳,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으로 천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했다. 1815년(순조 15년) 혜경궁 홍씨가 사망하자 이듬해인 1816년 합장했다. 1899년(광무 3년)에 장헌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현륭원은 융릉으로 추증됐다. 화산은 원래는 풍수에 능했던 윤선도가 조선 17대 왕인 효종의 묫자리로 추천했던 길지인데다 지명까지 용이 엎드린 형상이란 뜻의 ‘용복’이어서 정조는 주저 없이 이곳을 아버지의 새 안식처로 결정했다고 한다. 양주 배봉산에서 이 장식을 지켜보던 정조는 신하들 앞에서 ‘이제야 제사 음식을 드리고 의장에 필요한 물건을 갖추는 데 성의를 보일 수 있게 됐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조성하기 위해 수원부 관아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행궁을 설치했다. 또 화산 인근에 살던 주민들을 팔달산 자락으로 옮기게 했다. 이주인에게는 10년 동안, 수원부 백성에게는 1년 동안 부역을 면해 줬다고 한다.화산과 관련하여 ‘송충이’에 얽힌 유명한 얘기가 전한다. 아버지 묘역을 조성하고 화산(花山)을 둘러 본 정조는 이름에 걸맞게 꽃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좋겠다 하여 융릉 주변 40리에 걸쳐 대량으로 나무와 꽃을 심게 했다. 그런데 나무가 많다 보니 송충이가 극성이었다. 송충이로 인해 피해가 커지자 나라에서는 송충이를 잡아오는 자에게는 포상금을 주고 잡아 온 송충이들은 화산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서쪽 바다에 있는 빈정포(濱汀浦, 지금의 매송면 야목 4리)에 갖다 버리게 했다고 한다. 그 후로는 ‘빈정포’라고 적힌 부적만 붙여도 송충이가 죽었다고 한다.융릉에 도착하니 홍살문 입구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마침 제향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융릉의 제향일은 4월 둘째 주이지만 올해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연기돼 지난 10월 26일 거행됐다.조선왕릉 융릉 제향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융건릉 봉향회 주관으로 열리는 행사로 이번 제례는 장조의 259주기,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 206주기가 되는 해라고 한다. 뜻밖의 행운에 좋아했던 것도 잠시. 행사 관계자들이 홍살문에서 출입을 제한하는 통에 행사 참관을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제향에 종헌관으로 참석한 화성시 의장의 ‘화성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전통 문화행사가 돼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우리의 귀중한 정신문화인 효를 배우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발언과는 다른 현실에 씁쓸함을 느끼며 건릉으로 향했다. 11월 25일에는 건릉의 제향이 열리며 융릉 제향과 달리 시민들의 참관도 가능하다고 한다.융릉의 동쪽에 있다가 풍수지리 이유로 서쪽에 옮겨진 건릉융릉에서 건릉으로 이르는 길은 완만한 산의 경사를 따라 다양한 모습의 숲 길이 조성돼 있다. 100년 이상 된 향나무, 소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 것.건릉은 정조대왕과 효의왕후가 묻혀 있는 능이다. 살아생전에 ‘내가 죽거든 현륭원 근처에 묻어 달라’고 한 정조의 뜻에 따라 현륭원 근처에 묻혔다. 건릉은 처음에는 현륭원의 동쪽에 조성됐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건릉이 풍수지리 상 불길하다는 설이 제기됐고 순조 21년(1821년)에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처럼 융릉의 서쪽에 이장돼 합장릉으로 조성됐다. 사도세자 위패 모신 원찰, 용주사 … 정조 때 중창융건릉에서 5분 정도 떨어진 화성시 송산동에는 융릉의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가 자리하고 있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염거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병자호란 때 불이 타 폐사가 된 것을 1790년(정조 4년)에 중창불사하고 용주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해서 절 이름이 용주사가 됐다.용주사에도 송충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융릉 참배를 마친 정조가 능역 주변을 거닐다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송충이마저도 아버지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여 송충이를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고 한다. 그 후 송충이 구제 작업을 벌여 용주사 일대의 송충이를 모두 없앴다고 한다.용주사의 특이함은 절집 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천왕문을 지나서 특이하게 홍살문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왕릉이나 서원 또는 관아나 향교에 세우는 홍살문이 용주사에 있는 까닭은 용주사 내에 호성전(護聖殿)을 짓고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재를 올렸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용주사에서는 일 년에 여섯 번의 제를 지냈으나 1907년 이후로 중단됐다고 한다. 2008년 100년 만에 사도세자 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했다. 그러나 호성전은 작년 8월 20일 전소돼 탄 목재만 남아 현재 복원에 난항을 겪고 있다.홍살문을 지나면 삼문이 나온다. 삼문 네 기둥의 상단부는 목재를, 하단부에는 석재를 사용했다. 네 기둥에는 용주사불을 첫 글자로 한 글귀들이 적혀 있다.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근대 서화가 죽농 안순환(竹濃 安淳煥 1871~1942)이 쓴 ‘용주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창건 당시의 것으로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삼문 앞에는 화마를 물리친다는 해태상이 놓여 있다.삼문을 통해 절집 마당에 들어서면 웅장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천보루와 오층석탑, 그리고 마당 한 켠에 종각이 서 있다. 용주사 오층석탑은 1702년 숙종 2년에 고승 성정이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천보루를 지나면 대웅보전이 나온다. 용주사 대웅보전에는 석가여래와 함께 동방 약사여래, 서방아미타여래 등 목조 삼세불 좌상이 모셔져 있으며, 정조가 직접 쓴 현판이 남아 있다. 삼세불의 후불탱화는 한때 일반적인 불화 기법이 아닌 음영법과 원근법 등 서양화법이 적용된 불화로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 했으나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에 의해 민관 등 25인이 그렸다는 게 밝혀졌다. 대웅보전은 현재 보물 제1942호로 지정돼 있다.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은 고려 전기에 제작된 동종으로 신라시대 동종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종신은 하늘로 승천하는 비천상과 결가부좌한 채 두광을 갖추고 합장해 승천하는 3존상으로 장식했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보호각을 세워 자세히 볼 수 없는 점이 아쉽다.용주사 효행박물관에는 정조가 하사한 부모은중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나 현재는 코로나19로 휴관 중이다. 용주사 들머리 길에는 조지훈의 ‘승무’시비가 있다. 10월에 용주사에서는 승무제가 열리는데 조지훈의 시 ‘승무’의 배경이 됐다고 한다.시멘트벽 활용, 범상찮은 문화 재생공간 시립 ‘소다미술관’ 융건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성시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소다미술관이 있다. 오랫동안 방치돼 왔던 찜질방 건물을 리모델링해 디자인 및 건축 미술관으로 문을 연 문화재생공간이다. 회색빛 시멘트 벽을 그대로 드러낸 벽면을 활용한 디자인 감각이 눈에 띈다. 새로운 시도를 담은 작가들의 전시회가 꾸준하게 열린다. 정원사와 조경 전문가들이 정성껏 꾸민 야외 정원 역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정원만을 보러 방문하는 사람도 꽤 많다. 창문처럼 뻥 뚫린 시멘트 벽면과 그 벽면들이 만들어 낸 공간 속에 오롯이 전시돼 있는 예술 작품들, 하늘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그러나 넝쿨과 나무로 뒤덮인 천장이 모두 예사롭지 않다. 미술관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2021-11-04 02:33:37
경기도 화성(華城)은 수도권에 가까이 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저 수원의 위성도시 정도로 취급되고 제부도와 바지락칼국수를 떠올리는 게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구릉지 형태의 농경지와 공장지대가 있고 바다도 끼고 있다. 외지인들이 보기에 농경지로서의 화성보다는 시화방조제와 화옹방조제 건설로 육지가 된 끝 간 데 없는 너른 갯벌이 오히려 강렬할 수도 있다. 화성은 정조대왕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경기도 서남부에 위치한 화성은 북쪽으로는 안산시, 동북쪽으로는 수원시, 동쪽으로는 용인시, 남쪽으로는 오산시와 평택시 등과 맞닿아 있고 서북쪽으로는 시화호를 사이에 두고 시흥시와 접한다. 참고로 대부도는 안산에 속하고 제부도는 화성에 들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당성군이었고, 서신면에는 백제 및 신라의 대외무역항이던 당항성이 있었다. 고려 충선왕 때 남양도호부가 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유지됐다. 도호부는 원래 중국(당나라)의 군정기관이었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 규모가 제법 큰 ‘특례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고종 32년 남양군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영흥면, 대부분이 부평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수원군에 병합됨으로써 남양군이라는 지명은 없어졌다. 이후 1949년 수원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2011년 화성시로 승격됐다. 경기 남부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화성은 광주산맥과 차령산맥 사이에 위치해 있어 동북쪽은 산세가 깊고 서쪽은 완만한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다. 화성 중심부를 관통해 남쪽으로 흐르는 황구지천과 발곡천을 따라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또 바다와 면한 서쪽 해안은 남양만과 군자만을 끼고 있다. 군자만은 시흥과 화성의 경계이며 시화호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왔다. 군자만의 폐염전은 아스라한 향수를 자극한다. 남양만은 남양읍을 중심으로 움푹 들어간 곳이다.화성이 바다를 안고 있음은 전곡항과 궁평항을 통해 새삼 알 수 있다. 궁평항은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국가어항이다. 2008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됐다. 해당지역은 물론 인근 섬의 어선들이 정박하고 하역할 수 있는 필수적인 항구란 말이다. 서신면 궁평리에 있는 궁평항은 제부도, 대부도, 전곡항 등과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바다 끝에 설치된 전망대 데크에서 바다낚시도 즐길 수 있고 대형 수산시장이 있어 각종 해산물을 즐길 수 있다. 모터보트·낚시·갯벌, 오토캠핑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가 들어서 있다. 일몰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서신면 전곡리의 전곡항은 ‘수도권 요트의 천국’으로 불린다. 2009년 요트가 정박할 수 있는 수도권 첫 마리나로 뜨거운 관심 속에 개장했다. 이후 세계 3대 요트대회인 월드매치레이싱투어(WMRT)를 비롯해 경기국제보트쇼, 전국해양스포츠제전 등 굵직한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요트를 체험할 수 있지만 꼭 타지 않더라도 고급 요트 수백 척이 즐비한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러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낡은 고기잡이배가 둥둥 떠 있던 작은 어항이 지금은 서해안을 대표하는 인기 마리나로 변신했다. 원래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은 배가 드나들기에 용이하지 않지만 화성시 서신면과 안산시 대부도를 잇는 방파제 덕분에 전곡항은 일정한 수심을 유지할 수 있다. 요트는 선체 아래 바람에 밀리는 것을 막아주는 센터보드가 있어 수심이 1.5m 이상 확보돼야 하는데, 전곡항은 밀물과 썰물 때 모두 3m 이상이어서 마리나가 들어서기에 적합하다. 전곡항은 궁평항보다 북쪽이어서 섬 둘레를 따라 깎아지른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제부도가 한눈에 보인다. 맞은 편 안산 탄도항의 풍력발전기, 해넘이 명소로 꼽히는 누에섬을 요트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바다 갈라짐 현상으로 유명한 제부도는 석양이 아름다운 해변과 드넓은 갯벌이 매력적이다. 제부도아트파크라는 전시 공간을 시작으로 감각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워터워크, 다양한 벤치 등이 들어섰다. 탑재산을 끼고 제부항까지 돌아보는 제비꼬리길은 웅장한 해안 절벽과 서해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어 꼭 한번 걸어볼 만하다.전곡항에서 서쪽으로 몇 십분 이동하면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천연기념물 414호)가 멀지 않다. 중생대 백악기 퇴적층에서 공룡 알 화석 180여 개가 발견된 곳이다. 공룡 알 화석을 관찰하고, 약 1.5km 산책로 양쪽에 펼쳐진 광활하고 이색적인 염습지를 즐길 수 있다. 시화방조제 건설로 너른 갯벌은 물론 파도를 불러들이던 우음도, 어도, 형도 같은 섬들이 죄다 육지에 갇혀 버렸다. 한때 바다였던 갯벌과 섬들은 이제 송산그린시티 같은 대규모 택지가 되가고 있다. 육지가 돼서 띠풀과 갈대의 초록으로 뒤덮여 가고 있는 중이다. 옛 우음도 섬 한쪽에 우뚝 솟은 송산그린시티전망대에서 우음도와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 시화호 주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화성에는 41개의 섬이 있고 이 중 유유인도는 세 곳에 불과하다. 시화방조제가 놓이기 전에는 유인도가 다섯이었으나, 우음도, 형도가 육지가 되면서 남은 섬은 서신면의 제부도, 우정읍(남양만을 사이에 두고 서신면의 남쪽)의 국화도,입파도 등 3개뿐이다. 국화도와 입파도는 궁평항에서 배를 타고 건너갈 수 있다. 국화도에서 썰물 때마다 열리는 길을 딛고 해안이 온통 흰 굴껍데기로 뒤덮인 무인도로 건너가면 고즈넉한 평화를 느낄 수 있다.
2021-10-29 19:48:57
양평에서 양수리와 세미원을 빼놓고 논한다면 ‘팥 앙금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가을 남한강변은 길가에 올망졸망하게 피어 있는 작은 들꽃 한 송이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고 지난 봄여름에 감사하며 남은 계절의 무사안녕을 넉넉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만든다. 아직은 이른 낙엽이 뒹구는 작은 들꽃 오솔길을 걸으며 여름 내내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옛 시절 ‘황포돛배 영화’ 뒤로하고 그리움과 연꽃세상의 아름다움 펼치는 양수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하나의 물줄기로 되는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의 두물머리 포구는 남한강 최상류인 강원도 정선군과 평창군에서 발원한 물길이 충북 단양과 충주를 거쳐 경기도 여주를 거쳐 닿는 곳이다. 또 강원도 금강군(북한)에서 발원해 화천, 춘천, 가평을 거치는 북한강물이 여기서 합류한다.예부터 강원도나 충청도에서 나오는 목재가 곡식 등이 종착지인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까지 이어질 때 마지막 중간 정착지로 역할을 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1973년 양수리보다 하류인 지점에 팔당댐이 건설되고 일대가 상수원 보호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수로는 육로로 대체되었고 포구를 오가는 길손들도 뜸해졌다. 나루터에 묶여 힘없이 떠 있는 황포 돛배 한 척이 과거의 영화를 기억할 뿐 흐르는 듯 멈춰 선 듯한 고요한 물줄기와 400년 넘은 늙은 느티나무는 인간사에 무심한 듯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다만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정비 공사가 끝난 두물머리 일대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두물머리 둘레길이 조성되었고 느티나무 주변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쉼터와 포토존이 생겨났다. 강가에 사각 프레임 하나 설치했을 뿐인데 프레임을 통해 보는 두물머리는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경기도 두물머리 나루터'라는 표지석과 함께 겸재 정선이 화폭에 남긴 두물머리 풍경도 감상할 수 있다. 강가 카페 루프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이 되어 깊어가는 가을을 느껴볼 수도 있다. 두물머리에서 ‘배다리’를 건너면 세미원(洗美苑)이다.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水洗心 觀花美心)는 의미의 세미원은 경기도로부터 100억원을 지원받아 한강 상류에서 떠밀려 내려온 쓰레기 매립장이나 다름없던 지역을 정비하여 만든 자연정화공원이다.전통적인 정원 양식에 6개의 연못을 조성했다. 한강물의 중금속과 부유물질을 정화해 팔당댐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역할도 한다. 연 50종, 수련 120종 등 270여 종의 수생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2019년 경기도 제1호 지방정원으로 지정됐다. 1만9000평의 이 곳 땅주인은 건설교통부다.연꽃이 피어나는 6~9월 세미원은 온통 수련과 연꽃 세상이 된다. 특히 밤에만 피어난다는 빅토리아 연꽃을 보기 위해 사진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연에 대한 예찬은 예부터 끊이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 자라도 때묻지 않고, 맑은 물에 씻기었어도 요염하지 않다. 속(연꽃대)은 비었어도 곧게 자란다. 연꽃은 일제히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지 않는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번갈아 핀다. 연과 달리 수련(睡蓮)은 잎이 수면에 붙어 있다. 개구리가 추운 물속에 나와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한자 이름도 ‘물 수’가 아니라 ‘졸릴 수’다. 오후 2~4시가 되면 잎을 오므리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수련의 빛깔은 흰색을 기본으로 분홍색, 연분홍, 빨강, 노랑색, 보라색 등 다양하다. 화가 모네는 시간과 물빛에 따라 달라지는 수련의 모습을 담기 위해 평생을 보냈다. 양수리의 상춘원에는 석창포 등 수생식물이 심어져 있는 석창원(石菖園), 수레형 정자인 사륜정(四輪亭), 정조 때 창덕궁 안에 있던 온실, 세종 때 강화도에 설치했던 온실 등이 재현돼 있다. 사륜정은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가 설계만 해 놓고 정작 만들지 못한 것을 문헌에 따라 복원해 놓은 것이라 한다. 상춘원의 세미원의 일부다. 배다리를 건너면 세한정 송백헌(歲寒亭 松柏軒)을 먼저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양서면 용담리에 속하고 유료 입장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과 함께 세한도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세한도의 사람들’에서는 세한도를 그린 추사와 그의 제자 이상적, 일제강점기 때 세한도를 지킨 서예가 손재형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을 오갈 때마다 스승을 위해 신간 서적을 구해와 스승에게 전해 주었다. 책을 갖고 무려 두 번이나 유배지인 제주를 찾았다. 의리를 지키는 제자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표현한 것이 세한도이다. 집 한 채와 소나무 세 그루가 그려져 있고 발문이 적혀 있다. 발문에는 겨울이 와야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해 제자의 신의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손재형은 대표적인 한국 근대 서예가로 ‘서예’라는 용어를 처음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추사를 연구하던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는 인사동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발견하고 구입하게 된다. 후지스카가 1943년에 세한도를 갖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 사실을 안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동경으로 그를 찾아가 끈질긴 설득 끝에 1944년 세한도를 한국으로 되찾아왔다. 세한도의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세한정은 세한도 속 정원을 본 따 만든 것이니만큼 서로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세미원은 세한정 외에도 열대수련연못, 빅토리아연못, 홍련지, 굽이굽이 물길에 찻잔을 띄어 풍류를 즐기는 유상곡수(流觴曲水), 청계천의 수표교의 수표(수위를 재던 돌기둥)를 본 따 만든 분수대, 장독대 모양의 분수대, 창경궁에서 바람의 방향을 살피던 풍기대(風旗臺), 유리온실인 세계수련관, 연꽃박물관, 연꽃빵집, 한반도 모양의 연못에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백수련을 심은 나라를 생각하는 뜰이란 의미의 국사원(國思園), 모네의 수련 그림을 본 따 아치교가 놓인 ‘모네의 정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이처럼 세미원은 왕과 귀족들의 연꽃 또는 식물가꾸기의 취미와 글로벌한 수생식물 정원의 여러 형태를 응축해놨다. 세미원은 연꽃이 한창이 7~8월에 가야 한다. 지금은 늦어서 연꽃을 볼 수 없으니 아쉬운 마음을 내년 여름으로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양평군은 세미원을 발판으로 연을 군의 상징이자 먹거리로 발전시켜 나가려 하고 있다. 연으로 만든 과자, 빵, 술, 차, 레시피 등을 개발 중이다. 연이 양평군을 먹여살리는 효자가 될지 모른다. 토종 야생화 200종, 남한강변과 어우러지는 ‘숨은 보석’ 양평들꽃수목원중앙선 오빈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양평읍 오빈리의 양평들꽃수목원이 있다. 남한강변에 조성된 들꽃이 소박하고 가을 햇살처럼 포근한 수목원이다. 시골 동네 어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들이 이 수목원의 주인이다. 강변의 정취와 꽃들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수목원 구석구석에 설치된 코끼리 상, 그네 타는 오누이, 연주단, 책 읽는 소녀상들이 수목원의 단조로움을 깨고 자잘한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다양하게 수목원을 꾸미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자연생태박물관에는 생태계의 표본과 실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허브 및 야생화 정원에는 멸종돼 가는 토종 야생화 200여 종이 전시돼 있다. 각종 허브 50여 종이 아로마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밖에 수생습지, 관목과 덤불로 기하학적 모양을 내는 토피어리(Topiary)정원, 열대식물원, 야외정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이외에도 사계절 썰매장, 쿠키 체험장, 자전거 대여점 등 체험 공간과 놀이 공간이 많아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에게 좋다. 지금은 코로나19 유행으로 체험장을 유동적으로 운영하니 방문 전에 꼭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수목원과 자전거도로가 연결돼 있어 시원한 가을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려봐도 좋겠다. 성인 기준 8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양평의 별미, 황해도 피란민이 빚은 옥천냉면마을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는 6.25 전쟁 당시 황해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모여 냉면을 만들어 팔면서 형성된 옥천냉면마을이 있다. 현재 20여개소가 성업 중인데 가격은 물냉면이 8000원으로 아직까지는 착한 가격을 받고 있다. 다소 두껍고 쫄깃한 면발, 기름기를 뺀 편육, 큼직한 동그랑땡 모양의 완자가 별미다. 평양냉면에 가깝지만 조금 더 간이 배고 메밀향이 더 진하고 구수하다. 돼지고기로만 육수를 내어 담백한 국물 맛이다. 평양냉면 스타일에 너무 익숙해진 사람은 입에 맛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만족하는 사람이 대체로 많다.
2021-10-01 20:32:34
경기도 양평은 동쪽으로 원주, 횡성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 여주와 붙어 있으며 북으로는 가평, 홍천으로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남양주, 하남, 광주와 연접해 있다. 양평에 관해 이중환의 택리지는 “산이 어지럽게 솟아 있고 골이 깊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되며, 기후도 싸늘하고 시내 또한 메말라 낙토가 아니다”고 적었다. 그러나 강원도 지방과 한양을 오가는 가장 길목에 위치한 남한강변의 양평 양근나루(양평읍 양근리)는 수량이 풍부해 1930년대까지도 강원도에서 서울로 들어가기 전의 가장 큰 포구로 번영을 누렸다.칡미 또는 칙미포구로 불렸던 양근나루를 통해 강원도 일대에서 나는 메밀, 콩, 수수, 감자, 옥수수 같은 밭작물 곡류와 나무그릇, 꿀 등이 남한강을 따라 내려와 서울 마포나루로 실려 나갔다. 그러나 산업철도인 중앙선이 깔리고 신작로가 놓이는 등 육로 교통이 발전하면서 포구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용문산, ‘경기도의 금강산’ ‘양평이 의지하는 산’ 양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용문산(龍門山) 관광단지와 용문사이다. 해발 1157m의 용문산은 웅장한 산세와 기암괴석이 많아 예부터 ‘경기도의 금강산’이라 불리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양평이 용문에 의지한다고 표현했다. 1971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용문산 일대는 거듭된 정비를 통해 잔디광장과 분수대, 야외공연장 등이 들어선 휴식과 문화 공간으로서 연중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용문산은 예나 지금이나 산나물이 유명하다. 봄이면 용문산 일대에서 산나물 축제가 열린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국은 용문의 산나물을 선물 받고 답례로 시를 한 수 지어 보냈다고 한다. 산나물 향기롭고 연하긴 용문이 그만인데그것으로 손님 대접하면 후의 있음을 알리라방장(方丈)의 고량진미를 어찌 부러워하리요한 바구니 속에 부귀영화도 저버리라 하였다. 방장은 절의 살림을 맡는 책임자 승려를 말한다. 산나물이 얼마나 맛있으면 잘 차려진 사찰음식보다 낫고, 부귀영화도 저버린다고 하였을까.용문사 입구에는 용문산 지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한국군 6사단(철원 주둔 청성부대)은 중공군 제63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방어선을 지켜냈다. 이 용문산 전투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가장 큰 성과를 올린 대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발 1000m 넘는 큰 산, 아름다운 용문사 숲길과 천불천탑 탑곡용문사 들머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숲길은 아름답다. 일주문을 지나 주 통행로에서 계곡쪽으로 내려서면 ‘탑곡’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돌탑들이 가득한 계곡의 모습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진심을 담아 하나씩 올려 놓아 쌓은 돌탑이 계곡에 지천이다. 천 가지의 마음이 이룬 천불천탑이다. 자연스럽게 전남 화순의 운주사나 전북 진안 마이산의 돌탑을 떠올리게 된다. 용문사 탑곡의 탑들은 저마다 바라는 것이 다른 듯 탑의 모양도 2층탑, 3층탑, 다층탑, 모전석탑 등 각양각색이다. 사람의 모습을 닮기도 하였고, 석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탑도 보였다. 한 사람이 돌 하나를 올리고 뒤에 오는 이가 탑이 쓰러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또 돌 하나를 얹어 이루어진 탑곡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 오르는 길은 저절로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길이다. 용문사의 자랑, 천년의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30호)탑곡이 끝나면 이번에는 천 년 넘은 은행나무가 기염을 토한다. 한눈에 봐도 높이가 어마어마하다.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 나무 끝가지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이 대단한 은행나무는 높이가 60m, 가슴높이 둘레는 12m에 달하며 수령은 1100~1300년으로 추정된다. 동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용문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돼 있다. 가을날 은행나무가 노랗게 단풍이 들면 일대는 일순 황금산으로 변하고 나무 아래에는 은행나무 열매가 수북하게 쌓인다. 더 이상 무거운 가지를 지탱할 수 없어 여기저기 지지대를 세워 놓았다. 또 벼락이 맞지 않도록 90m 철탑을 세우고 피뢰침을 박아놨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으며 내력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의 고승인 의상대사(625~702)가 지나다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이 스승인 대경대사를 찾아와서 심었다는 설도 전한다. 개경에서 숨을 거둔 경순왕은 시신마저도 고향산천 경주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낯선 임진강변에 묻혀 있다. 일설에는 경순왕의 아들이자 신라 마지막 세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한다. 그 때문일까. 가지마다 이파리마다 멸망한 왕조의 한과 비통함이 서려 있는 듯하다. 나라를 잃고 왕궁에서 쫓겨나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마의태자는 무슨 마음으로 은행나무를 심었을까. 마의태자는 금강산에서 베옷을 입고 초근으로 연명하다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조성 세종 때 정3품 이상 벼슬인 당상 직첩을 하사받아 벼슬을 하기도 했다. 1907년 군대해산에 저항해 일어난 정미년 의병봉기 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울 때에도 은행나무는 화를 면했다고 하여 천왕목(天王木)으로도 불린다. 누군가 나뭇가지를 자르려 하자 나무에서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내리쳤다고 한다. 이외에도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에는 어김없이 ‘윙’하는 소리를 내며 길흉을 알려 주었다. 고종황제가 승하했을 때에는 멀쩡했던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고도 하니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참으로 신묘스러운 나무다. 용문사 스님들이 나무를 대하는 태도도 각별하다. 아침마다 부처님께 문안하듯 은행나무 주변을 쓸고 그 아래에서 기도를 드린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단풍을 보려면 10월 말에서 11월 첫 주 정도에 첫 서리가 내리기 전에 방문해야 한다. 천년산사 용문사, ‘마테호른’ 백운봉 조망이 최고, 용문산 풀코스는 12km에 7시간 용문사는 신라 진덕여왕(647~654) 때 원효대사 창건설, 신라 신덕왕(912~917) 때 대경대사 창건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 창건설 등이 전하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1907년(순종 원년)에 의병의 은거지로 사용되다가 일본군에 의해 전소된 것을 1909년 주지 김취운 스님이 재건했다. 다시 6.25 전쟁으로 크게 소실된 것을 1982년 주지 이선걸 스님이 대웅전, 범종각, 지장전 등을 조성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4세기 제작된 용문사 금동 관음보살좌상이 보물 제1790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본 떠 판각한 것이다. 추사의 또 다른 호인 ‘완당’이란 낙관이 찍혀 있다. 용문사는 은행나무 잎과 나무 모양을 새겨 넣은 종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울리고 있다. 사찰 내 전통찻집과 템플 스테이는 도시인의 휴식공간으로 인기다. 템플스테이에서는 양평의 특산물인 연잎, 연실, 팽이버섯, 도토리가루, 두부 등을 활용한 친환경 자연음식을 만드는 체험행사도 한다. 등산을 위해 용문사 은행나무에서 조금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서쪽)길은 능선을 따라 상원사에 이르는 다소 평탄한 능선길이다. 오른쪽(북쪽)길은 계곡을 올라 마당바위를 지나 용문산 정상(가섭봉)에 이르는 용문사 기준 4.4km 코스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탄다. 마당바위는 스무 명 정도가 편히 쉴 수 있는 평범한 너럭바위다. 마당바위에서 가섭봉까지는 경사가 급해 일부는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 한다. 정상에서 동쪽과 남쪽 전망은 강과 산으로 볼 만하지만 서쪽과 북쪽은 황량하다. 용문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장군봉-함왕산성(함왕봉)-백운봉-백운암을 거쳐 연안마을(용문면 연수리)로 내려오는 코스는 용문사 기준 장장 12.1km에 7시간이나 걸린다. 백운봉에서 세수골(양평읍 백안리)로 직선으로 내려오는 다소 편한 코스도 있다. 또 장군봉에서 상원사, 연안마을로 내려가는 절충적인 코스도 있다. 산행에 욕심을 부리면 몸이 고달프고 자칫 사고도 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백운봉은 양평군 옥천면과 양평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940m로 남쪽 능선에서 가장 높다. 하늘을 향해 솟은 듯한 모습이어서 ‘용문산의 마테호른’으로 불린다. 경치는 가섭봉보다 한길 위다. 남으로는 남한강 줄기, 서쪽으로는 유명산과 청계산(양평군 양서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험악한 용문산 사나사, 조계종 정립한 원증국사 보우스님의 탑과 묘비 용문사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옥천면 용천리 용문산 자락에는 고려시대 사찰 사나사(舍那寺)가 있다. 대한 조계종 제25교구인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서 923년(고려 태조 6년)에 왕건으로부터 국정자문을 받은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 862~929)이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세웠다고 전해진다. 1367년(공민왕 16년)에 태고 보우(太古普愚) 스님에 의해 중건됐으나 임진왜란과 정미년 의병운동, 6.25전쟁으로 인해 모두 불타 없어지고 1990년 이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주문을 지나 석조여래상을 지나면 대적광전과 삼층석탑, 삼성각, 조사전, 석조여래상 등이 일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각들은 최근에 지어졌으나 의외로 고즈넉한 멋을 풍긴다. 곳곳에 한국 전쟁 당시 생긴 총탄 자국이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데 특히 원증국사승탑과 승탑비, 고려시대 삼층석탑에 유난히 총탄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사실 사나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원증국사승탑과 승탑비 등이 있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우 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이 종조로 선종구산(禪宗九山)을 통합하고 고려 후기 타락한 불교의 개혁을 위해 애썼던 고려 말의 승려다. 원증국사(圓證國師)는 보우가 입적한 뒤 고려 우왕이 내린 시호다. 충남 홍성(옛 홍주)에서 태어나 13세 때에 양주 회암사에서 출가한 보우 스님은 1346년(충목왕 2년)에 원나라에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 임제종의 19대 법손이 됐다. 4년 후 귀국하여 충목왕, 우왕 등의 왕사, 국사가 되었으며 사나사를 중건하고 가평군 설악면 설곡리 소설암(小雪庵)에서 입적했다.경기도 유형문화재제 제72호로 지정돼 있는 원증국사탑은 커다란 종 모양의 탑으로 4각 기단 위에 탑신과 탑정을 얹은 모습이며, 탑신의 표면에는 아무런 조각이나 문양도 없이 검박한 모양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石鐘碑, 廟塔碑)는 화강암으로 된 지대석을 파서 비 몸을 끼워 세운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원증국사탑과 석종비는 모두 제자 달심이 세웠다. 사나사는 작고 특별한 문화재는 없지만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인 보우대사의 탑비와 영정이 모셔져 있으니 한번 들러볼 만하다. 중미산과 유명산, 중원계곡 … 천문대, 휴양림, 야영장, 물놀이에 그만 양평에는 용문산 외에 중미산과 유명산이 손꼽히는 산이다. 중미산(仲美山)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서종면과 가평군 설악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용문산이 양평의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면 중미산은 양평의 북서쪽 경계에 있다. 중미산 정상(해발 834m)과 인근의 천문대는 옥천면 신복리에 속한다. 천문대는 1999년 3월에 개관했으며 자연휴양림 안에 있다. 서울 근교에서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중미산 정상은 양수리로 흘러가는 남한강 줄기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며, 울창한 숲과 계곡의 맑은 물이 발길을 이끈다. 주계곡 3단 폭포는 시원함을 더해준다. 번잡한 용문산 관광단지와 달리 상가도 별로 없고 휴양림과 야영장이 조성돼 가족 단위 캠핑에 적합하다. 중미산에서 선어치(서너치) 고개를 사이에 두고 남동쪽에 위치한 게 유명산(有明山 해발 862m)이다. 양평군 옥천면과 가평군 설악면 경계에 있다. 두 산은 차로 10분 거리다. 유명산은 기암괴석과 맑은 계곡물로 우리나라 자연휴양림 1호로 지정됐다. 잣나무와 낙엽송이 빼곡하다. 유명산-중미산-선어치고개-용대산-서종면 정배리-서종면 문호리로 이어지는 북한강변길은 아름다운 드라이브로 코스로 유명하다. 용문면 중원리(中元里), 용문산 동쪽의 중원산(780m)과 도일봉(842m) 사이에 있는 중원계곡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이다. 6㎞에 이르는 계곡 곳곳에 폭포와 소(沼)·담(潭) 등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계곡 입구에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마주하는 첫 번째 폭포가 계곡을 대표하는 중원폭포로서 높이 약 10m의 3단 폭포가 시원하게 떨어진다. 기암절벽에 둘러싸여 경관이 빼어나다. 중원폭포를 지나 울창한 숲길 아래에는 치마폭포가 있다.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생기는 하얀 포말이 치마를 펼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폭포 아래에 맑은 소가 천연 수영장을 이루고 있다. 계곡길을 걷다 보면 매와 독수리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매둥치봉과 수리봉이 나온다. 중원계곡으로 들어가는 용문면 조현리 길목에는 양평군이 운영하는 야영장 겸 휴식처가 있다. 넓은 개울가에서 물놀이하기 좋다.
2021-09-30 20:26:19
수원은 화성과 행궁 말고도 보고 먹고 즐길거리가 많다. 전통시장과 통닭거리는 외지인들도 즐겨찾는 먹자골목이다. 화성행궁에서 팔달문에 이르는 500m정도의 행궁동 공방거리는 수원의 인사동이라 불린다. 공예품점 30여 개소와 맛집, 카페, 갤러리 등 50여 개소가 모여 있다. 수원 팔달문 인근 전통시장들 ‘왕이 만든 시장’ 팔달문 주변에는 팔달문시장, 지동시장, 영동시장, 통닭거리 등 전통시장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 시장은 ‘왕의 시장’으로 불린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팔달문시장은 1796년 처음 문을 열었다. 정조는 화성을 완성하고 “부국강병의의 기초가 상업에 있다”며 팔달문에 시장을 열고 전국의 유명한 상인을 불러 모았다. 정조는 신분계급제로 인해 정체된 조선을 살릴 방법으로 상업을 택한 것이다. 정조는 해남에 터를 잡고 무역업을 하고 있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을 수원으로 불러 들이는가하면, 이들에게 갓과 탕권을 만드는 말총(말의 갈기와 꼬리) 전매권과 인삼 유통권 등을 허가하는 등 상업 번창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폈다. 팔달문을 중심으로 남쪽 넓은 터에 자리잡은 게 팔달문시장이다. 팔달문 오른쪽(동쪽)에 맞닿아 있는 게 영동시장이다. 한복 특화 시장으로 유명하며 포목, 커튼 등의 거래도 활발하다. 수원의 최고 먹거리인 ‘수원갈비’는 1940년대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화춘제과를 경영하던 이귀성씨가 8·15 광복이 되면서 ‘화춘옥’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출발했다. 경기도, 충청도의 우량한 소가 수원에 집결했고 양이 많고 양념을 잘 재워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신문에 소개되고 박정희 대통령도 자주 찾아 더욱 소문이 났다. 지금은 수원 구도심보다는 아주대병원 인근에 더 규모가 큰 맛집들이 모여 있다.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영동시장 건너변에 있는 지동시장은 100여년 전 보부상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발달했다. 야채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고 패션과 먹거리 등도 즐비하다. 1층 순대타운에는 20여 개의 순대 전문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수원화성의 통닭거리는 2019년에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에 등장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1970년대 수원천 남수교 북쪽 일대에 통닭 가게가 하나 둘씩 생기면서 ‘수원통닭거리’로 특화되었다. 팔달로를 따라 100m거리에 융성통닭, 장안통닭, 중앙치킨타운, 남문통닭 등 10여 개의 통닭 전문점이 있다. 이 골목에서 하루 팔리는 통닭의 양이 평균 1500마리라고 한다. 신선한 닭을 대형 가마솥에 튀겨 내어 식감이 바삭하고 양이 많다. 어린 시절 술이 불콰하게 오른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기름 묻은 종이 봉투, 그 안에서 풍기던 고소한 기름 냄새는 지금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소환한다. 그 시절의 아버지가 그립다면 당장 통닭거리로 달려가라. 수원 화성 인근의 상권을 ‘화세권’(화성 역세권)이라 한다. 장안문 근처의 ‘정지영커피로스터스’는 낡은 2층 양옥을 개조한 공간미로 인기다. 화서공원 부근의 ‘카페원모어’는 화성 근처에 높은 건물이 없는 점을 활용해 옥상에 ‘루프탑’ 형태로 꾸며졌다. 성곽길과 야경을 조망하기에 좋다. 행궁이 화성의 가운데라면 여기서 북동쪽으로 수원천변에는 하얀색의 행궁동사진관이 있다. 가족과 커플 사진의 명소로 꼽힌다. 한달에 한번 아날로그 방식의 사진 촬영 및 현상, 인화 이벤트를 한다.수원의 박물관과 미술관, 나혜석 거리 수원을 대표하는 수원화성박물관은 팔달구청과 매향교 사이에 있다. 매향교를 건너면 화성행궁이다. 화성성역의궤 등 문화재와 화성을 담은 멋진 사진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연극 등 각종 공연이 열린다. 이 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화가 나혜석의 대표작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나혜석 기념관도 있다.화성행궁에서 나와 화성어차 매표소를 지나면 신풍초등학교 옛 교문이 남아 있다. 1896년에 세워진 수원 최초의 공립학교이다. 지금은 영통으로 이전하고 옛 교문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초등학교 교문을 따라 화성의 옛 모습을 담은 담벼락 갤러리가 있다. 사진에 담긴 오래 전 화성의 모습과 지금 달라진 화성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 있다. 담벼락 갤러리가 끝나고 화서문로를 걷다보면 나혜석 생가터가 나온다. 화성행궁의 북서쪽 모퉁이다. 이어 오른쪽으로 행궁동 벽화마을이 이어진다. 나혜석(1896~1948)은 여성운동가이자 작가이며 화가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신교육을 받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다. 여성에게만 순결과 정조를 강요하는 조선 남성들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했고, 자신을 옭아맨 식민지 조선의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어머니와 아내도 아닌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삶을 꿈꿨다. 한때는 촉망받는 젊은 여류 화가로서 전도유망한 젊은 외교관 김영우와의 결혼, 국내 최초의 세계일주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그러나 최린과의 불륜이 문제가 돼 이혼했다. 당시 그녀는 여성의 정조만을 문제시하는 남성 중심의 위선적인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여 충격을 던졌다. 그녀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12월 10일 길거리에서 객사했다. 생가터에는 이를 알리는 푯말과 벤치 하나만 덜렁 놓여 있다. 그녀의 죽음만큼이나 쓸쓸한 풍경이다. ‘여자도 사람이다’를 외쳤지만 너무 일찍 외쳤던 나혜석의 삶을 생각해 본다. 북수동성당과 수원성지, 한국전쟁 때 사라진 옛 수원성당행궁 동편의 종로 거리를 걷다보면 북수동성당과 수원성지가 있다. 수원교구는 2000년 화성 전체를 천주교 순교 성지로 선포했다. 정조 사후 천주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받아 수원유수부가 관할하던 한강 이남 지역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천주교 신자 2000여명이 화성으로 끌려와 처형당했다. 북수동성당 일대는 신도들을 처형하던 토포청과 심문을 하던 이아(貳衙, 제2청사)인 화청관(華請館)이 있던 곳으로 당시 사용된 형틀과 고문기구들이 야외와 실내에 전시돼 있다. 북수동성당의 제2 주차장 자리는 수원 최초의 본당인 옛 수원성당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데시데라도 폴리(한국명 심응영, 일명 심뽈리) 신부는 아름다운 고딕식 건물의 수원성당을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심하게 훼손되어 헐렸다. 폴리 신부는 전쟁 중 성당을 지키다가 인민군에 끌려가 순교했다. 최근 복원이 진행 중이다. 북수동성당 옆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은 원래 가톨릭계 소화국민학교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뽈리 화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1934년 문을 연 소화국민학교는 원래는 나무 건물이었으나 불이 나서 타 버렸고, 1952년 현재의 벽돌건물로 다시 지었다. 소화국민학교(소화초등학교)도 신풍초등학교처럼 수원시 영통구로 이사를 갔다. 북수동성당을 지은 프랑스인 뽈리 신부의 이름을 따서 뽈리화랑이라고 부른다. 삐걱거리는 복도를 따라 오래된 나무교실에는 천주교 박해 때 사용되었던 형구와 성당 관련 귀한 사진들이 상시 전시되고 있다. 근현대 한국천주교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물이 풍부한 수원의 수변공원들, 광교산과 백운산 등반코스 수원은 물이 많다보니 아름다운 유원지가 많다. 영통의 광교호수공원은 광교산과 옛 원천저수지 및 신대저수지의 자연미를 살려 아름다운 국내 최대의 도심 속 호수공원으로 조성됐다. 장안구 송죽동의 만석공원과 만석거(萬石渠, 일왕저수지)도 아름다운 수변과 산책로, 무지개빛 음악분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정조 19년에 축조됐으며 지금도 식수원으로 쓰인다.또 화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호로 불려지는 축만제(祝萬堤)는 1799년(정조 23년) 정조대왕이 가뭄을 대비해 축조했다. 호수 남쪽 항미정은 순종황제가 방문한 곳으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풍광은 수원팔경 중 하나인 ‘서호낙조’로 부른다. 만석거와 축만제는 모두 풍요를 기원하는 열망을 담고 있는 이름들이다. 수원 화성을 멋지게 보려 수원시는 기구를 타고 관람하는 ‘플라잉수원’을 만들었다. 최대 20명이 탈 수 있는 헬륨풍선이다. 10분간 70~150m 상공을 유영한다. 화성 동문인 창룡문 부근에서 운영 중이다. 수원의 등산 코스로는 광교산과 백운산이 있다. 백운산은 출발점이 광교공원이지만 광교저수지 서쪽을 차지하고 있다. 그 정상은 의왕에 있고 용인을 포함, 3개 시에 걸쳐 있다. 광교산은 저수지의 동쪽을 차지한다.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과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에 걸쳐 있는 비교적 완만한 코스다. 형제봉(해발 448m)에서 수원시 전경을 조망하기에 좋다. 정상은 시루봉(582m)으로 한남 금북정맥의 주봉이다. 등산 마니아들은 광교산에서 시작해 북서쪽의 백운산을 거쳐 고분재 바라산 우담산 원터마을 국사봉 어수봉 석기봉을 거쳐 서울 청계산의 정상인 망경대(618m)까지 총 26km를 종주하기도 한다.
2021-07-16 01:28:17
전국의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오락가락하던 지난 7월초, 홍살문 하나가 전부인 화성행궁(華城行宮) 앞 광장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다. 간혹 오가는 사람들도 양산 아래 숨거나 연신 팔을 놀려 부채질을 하며 걷고 있었다. 세 시가 넘었지만 한여름의 땡볕은 수그러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관람객들로 늘 북적거리던 행궁 신풍루(新豐樓) 앞도 조용했다. 한 여름 땡볕이 내리 쬐는 날 그늘 한 점 없는 고궁을 관람하는 일은 고문에 가깝다. 그러나 잡다한 소음과 동선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면 뜨거운 햇살의 고문조차도 능히 견딜만하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노거수 세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정조가 처음 행궁을 건립하기 시작한 것은 1789년(정조 13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을 다녀올 때 머물기 위한 궁이 필요해서다.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정식 명칭은 장헌세자 莊獻世子)는 정치적 모략으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정조가 열한 살 때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정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정조는 1752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59년(8살) 때 세손에 책봉됐다. 1762년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했다. 이어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다는 명분 아래 영조의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후에 진종(眞宗)으로 추존)의 양아들로 입적됐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25살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정조의 일성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李祘)이다”였다. 이 한 마디에는 정조의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사랑과 그리움, 죄책감 그리고 회한 등 모든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제일 먼저 경기도 양주(지금은 동대문구)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아버지의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개칭하고 아버지를 모신 사당인 수은묘(垂恩廟)을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했다. 경모궁은 지금의 대학로(연건동) 서울대 의대 교내에 있다. 서울대병원을 별칭 함춘원(含春苑)으로 부른다. 1493년(성종 24년)에 창경궁의 동쪽인 이곳에 풍수지리설을 따라 후원(後苑)을 조성하고 잡인들의 출입을 막은 게 바로 함춘원이다. 함춘원엔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이 들어섰으나 한국전쟁 때 거의 소실됐다. 함춘원의 일부인 함춘문(含春門)과 경모궁의 일부였던 석단(石壇)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정조는 함춘원의 일부에 경모궁을 조성한 것이었다. 영조는 1762년 아들을 추도한다며 사도묘(思悼墓)라고 했다가 자신의 허물을 자인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1764년 수은묘로 바꿨다. 수은은 은혜를 후대에 길이길이 전한다는 의미다. 묘(墓)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을 모신 무덤을 말한다. 반면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묻힌 곳이다. 또 묘(廟)는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하는데 주로 묘 근처에 비각이나 작은 집처럼 세워져 있다. 廟는 혼(魂)을 모신 사당을, 墓는 백(魄)을 모신 무덤을 뜻한다. 혼은 정신적 에너지이고, 백은 육체적 기본물질을 말한다.예컨대 효창원(孝昌園)은 5살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몇 달 후 죽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었으나 나중에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당하며 지금은 효창공원이 됐고 김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 애국지사들이 안장돼 있다. 한편 조치원, 장호원, 이태원 등에 쓰이는 원(院)은 관리들이 지방 출장을 다니거나 서울로 공무를 보러왔을 때 머물던 역원(驛院)으로서 숙박시설이자 교통수단인 말을 갈아타는 곳이었다. 정조는 즉위한 지 13년째인 1789년에 배봉산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관아가 있던 지명)으로 옮겨 새 단장한 후 현륭원으로 이름을 바꿔 격상했다. 1899년 장헌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현륭원은 융릉(隆陵)으로 추증됐다. 이 때문에 당시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팔달산 자락으로 이주해야 했고 수원 화성행궁과 화성의 건설이 시작됐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드리는 동시에 정조의 꿈인 개혁정치를 펼치려는 첫 걸음이었다. 건립 당시 576칸으로 지어진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고 일컬어진다. 정조는 행궁이 완성되자 “이제 화성은 나의 새로운 고향이다. 행궁의 정문은 신풍루라고 하여라”고 교지를 내렸다. 신풍이란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이다. 정조의 수원 화성에 얼마나 애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부 관아로 사용되었고 임금의 원행(園行)이 있을 때에는 왕의 거처로 사용됐다. 그러나 정조의 꿈이 담긴 행궁은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됐다.일제는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 건물에 자혜의원을 열었고 행궁의 정전이자 동헌의 중심인 봉수당(奉壽堂)을 병원 본관으로 사용했다. 1925년에는 봉수당을 허물고 2층짜리 벽돌건물을 세우고 병원 이름도 자혜의원에서 경기도립수원의원으로 고쳤다. 그나마 정조 당시 공식 행사나 연회장으로 쓰였고 이후 수원군청이 들어선 낙남헌(洛南軒)만이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았다.1789년 첫 삽을 뜬 화성행궁은 200년 후인 1989년에 복원이 시작됐다. 복원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토대로 진행됐다. 1단계 복원사업(1995년~2003년) 당시엔 전체 576칸 중 왕의 처소 등 482칸만 복원됐다. 올해 3월부터 2단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관리들이 묵던 우화관(于華館)과 융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물품을 관리하던 별주(別廚) 등 94칸이 건설된다. 2022년에 공사가 마무리되므로 완벽 복원에 무려 33년이 걸린 셈이다.수원시는 2030년까지 도시개발로 끊어진 화성 성곽도 모두 이을 계획이다. 창룡문(동문)에서 동남각루에 이르는 성벽을 복원·정비한다. 2013년에 지정된 지동문화재보호구역(1만3520㎡)와 연계해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축성 당시 지형을 복원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한옥 체험마을도 조성한다. 체험활동이 가능한 공공 한옥과 60여명이 숙박할 수 있는 한옥 13개 동을 지을 계획이다. 한옥 건축·수선 지원사업도 펼친다. 수원화성지구단위계획구역(2.24㎢) 내에 한옥을 신축하는 시민에겐 8000만원, 한옥촉진지역인 신풍동, 장안동 일대에 한옥을 지으면 최대 1억5000만원을 지원한다. 한옥 건축물 전면 수선비용도 최대 1억1000만원을 지원한다. 수원시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22채의 한옥에 보조금을 지원했다. 화성·화성행궁 복원은 수원시의 숙원 사업 중 하나다. 시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행궁 자리에 수원의료원을 지으려다 다른 곳으로 계획을 바꿨고, 116년 전통의 신풍초등학교를 동문과 학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광교신도시로 옮겼으며, 행궁 주변 주민들에 대한 보상도 마쳤다. 2003년에 1차 복원이 끝났으니 복원된 지 20여 년이 지난 행궁에서는 제법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신풍루를 들어서니 차례로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中陽門)이 나온다. 좌익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內三門 궁궐, 읍성, 관아 등의 안쪽에 있는 정면 3칸짜리 출입문)인 중양문을 도와 행궁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좌익문 왼편에는 정조가 행궁에 머물 때 신하들을 접견하던 유여택(維與宅)이 있다. 평소에는 수원 유수가 거처하였으나 임금이 행차하면 신하들을 접견하고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듣는 곳이었다. 중양문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봉수당과 장락당(長樂堂), 복내당(福內堂)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화성행궁의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봉수당은 정조가 수원 행차시 머물렀던 곳이다. 정조는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정궁에 봉수당이란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다. 봉수당에는 회갑상을 받은 어머니에게 절을 올리기 위해 정조와 왕비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재현돼 있다. 비록 모형이지만 늙고 지친 홀어머니와 그 앞에 선 정조 내외를 보니 한 나라의 국왕이기 전에 아들 이산으로서의 삶이 애잔해보인다. 혜경궁 홍씨(1735~1816)는 10세에 세자빈이 되었고 28세에 지아비를 잃었다. 정조는 성대한 회갑연을 베풀어서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을 앞세운 혜경궁 홍씨는 아들마저도 앞세우고(1800년 정조 승하) 한 많은 세월을 마감했다. 홍씨는 고종 때 헌경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됐다. 봉수당에서 화령전으로 가는 길목에 노래당과 낙남헌이 있다. 노래당(老來堂)은 정조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의 당호다. 출입문에는 젊음이 오래 가라는 의미로 난로문(難老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정조는 아들이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 노후 생활을 할 꿈을 꿨으나 1800년 6월 49세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노래당에 잇대어 있는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건물이다. 과거시험(별시)과 같은 공식 행사나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는 61세 이상 수원부 백성들을 위한 양로 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일제의 폭압을 견뎌낸 낙남헌 기둥을 감싸 안으면 좋은 기운을 받게 된다는 속설이 전한다. 낙남헌을 지나면 화령전이 나온다. 순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정조를 위해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고 어진을 봉안했다. 정조의 초상화를 모신 운한각과 이안청, 복도각으로 구성된 국내 유일의 영전(影殿) 건축물이다. 행궁 신풍루 앞마당에는 ‘무예 24기’ 공연이 펼쳐진다. 매주 화요일~일요일, 오전 11시부터 30분간 진행된다. 무예 24기는 조선 전통의 무예와 중국, 일본의 우수한 무예로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돼 있다. 조선의 최정예 부대인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익혔던 24가지의 실전 무예이다. 화성행궁을 지키는 장용영의 수위의식(守衛儀式, 경계병 교대)과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보여주는 공연도 이곳에서 진행된다. 수위의식은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30분간(4~10월)에 펼쳐진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훈련 장면을 보여주는 공연은 저녁 시간에 한 차례만 열린다. 어둠이 내리면 행궁 일대는 어둠과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은은한 불빛을 따라 궁궐 뜰을 사부작사부작 걷는 즐거움은 여름밤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팔달산 중턱에서는 서장대가 빛을 발하며 날렵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득 내가 서 있는 곳이 21세기 수원 한복판인지, 18세기 정조가 살아 있는 세상인지 헷갈린다. 아버지 향한 정조의 효심 그윽한 ‘융릉’ … 그 곁에 묻힌 아들의 ‘건릉’ 조선시대 왕족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사도세자(1735~1762)라 할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효심이 지극했던 왕을 꼽으라면 그 아들이 정조라 할 수 있다.사도세자 부부를 합장한 융릉과 정조대왕(1752~1800)과 효의왕후 김씨가 같이 묻힌 건릉(健陵)은 붙어 있다. 합쳐서 융건릉으로 부르는데 융릉은 오른쪽(동쪽), 건릉은 왼쪽(서쪽)에 있다.왕릉 중 아버지와 아들의 능이 같이 있는 것은 융건릉과 홍유릉(고종과 순종) 두 곳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한 아버지 근처에 묻히길 원했던 것은 그만큼 효심이 극진했기 때문이다.사도세자의 묘는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다시 말해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었다.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돼 아버지 영조의 명에 따라 무더운 여름날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비운의 아버지를 둔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군으로서 자질을 키워나갔다.할아버지 생전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했던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며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혼백을 달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명당이라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왕릉 사방 4㎞에는 큰 건물이 없어야 하는데 당시 이곳에는 수원부 관아와 마을이 있었다. 정조는 관아와 마을을 지금의 수원화성으로 옮겼다. 사도세자 내외의 묘는 정조 때 현륭원이 됐다가 고종 때 이르러 융릉으로 승격됐다. 또 고종 때에 비로소 사도세자는 장조로 추존됐다. 정조는 아버지의 능을 모란과 연꽃 무늬 병풍석과 기와 모양의 와첨석 등을 사용해 정성으로 아름답게 만들었어요. 물론 정조 당대가 문화가 빛나는 시절이기도 했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무덤을 그 어떤 왕의 무덤보다 잘 만들고 싶었던 정조의 효심이 담겨졌다.융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정조는 아버지 능을 꾸미면서 소나무 45만그루를 심었다. 하지만 당시에 소나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사그리 베어 가 지금 자라는 나무들은 이후에 심긴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능을 이곳으로 옮기고 가까운 곳에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를 중창해 하루 6번씩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 절은 신라 말기인 854년에 廉巨和尙(염거화상)이 지었고, 원래 이름은 갈양사(葛陽寺)였다. 고려 때인 10세기에 확장됐다.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과 보물 1754호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 보물 1942호인 용주사 대웅보전이 있다. 건릉은 원래 융릉의 동쪽에 조성됐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건릉이 불길하다는 설이 제기됐고 순조 21년(1821년)에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처럼 융릉의 서쪽에 이장돼 합장릉으로 조성됐다.
2021-07-15 01:32:21
팔방이 트여 옹색함이 없다는 팔달산(八達山)을 중심에 두고 있는 수원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신도시이다. 해발 143m의 팔달산을 둘러싸고 있는 게 수원의 얼굴이자 상징인 화성(華城)이다. 수원 토박이인 소설가 김남일은 ‘수원을 걷는 일은 화성을 걷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지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빼면 수원에 대한 완벽한 묘사라는데 동의한다. 수원 여행은 화성에서 시작해 화성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성은 성곽 문화의 백미로 조선 18대 임금 정조대왕이 축조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이 곳곳에서 묻어나 감회가 남다르다. 수원 화성은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의미가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수원은 과거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었다가 삼국시대에 차례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로 편입됐다. 고구려 때 수원은 매홀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으로 바뀌었다. 매홀에서 매는 물, 홀은 고을을 뜻하니 매홀은 ‘물고을’이란 뜻이다. 수원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원종 12년(1271년)에 수원도호부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수주, 수성, 수성도호부 등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수원시로 굳어졌다.고려시대에 지금의 경기도는 양광도로 불렸다. 그만큼 양주와 광주가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수원이 경기도의 중심이다. 수원은 본래 전라도로 가는 길목(일명 해남로)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 감염이 과거의 경주, 상주, 안동을 전전하다가 서쪽인 대구로 옮기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아우르는 통로가 됐다. 지리적으로나 말투나 정서적으로 수원은 안성문화권에 속하고 충청도와 가깝다. 수원은 서해를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활쏘기에 노력하는 무향(武鄕)이었다. 서울과 평양 다음으로 무과 급제자가 많이 나왔다. 화성 팔달산 서쪽 정상에 서장대를 세우고 동쪽 구릉에 동장대를 지어 사대(射臺 활쏘기 연습장)를 만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팔달산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한남정맥의 주산이자 수원의 진산(鎭山)인 광교산(582m), 백운산(567m), 서쪽에는 칠보산(236m), 여기산(105m)이 포진해 있다. 남쪽은 평야지대를 이룬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수원시를 관통해 오산시와 안산시로 흘러 서해로 빠져 나간다. 정조의 이상국가를 재현한 계획도시 수원은 정조 대왕의 도시다. 200여 년 전 정조가 쌓은 화성이 여전히 도시를 빙 둘러싸고 있고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푼 화성행궁 역시 그때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팔달문과 장안문을 통해 드나들고 있으며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팔달문시장(남문시장), 영동시장, 지동시장 등 이른바 ‘왕의 시장’도 그대로다. 수원만큼 과거의 모습과 정서가 온전하게 재생되고 있는 도시도 드물 것이다. 수원 화성이 복원됐을 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까지 복원해 놓은 셈이다. 마치 천년 고도 경주를 여행하는 듯한 아득한 시간의 아련함이 수원 여행에서도 느껴진다. 특례시 지정을 앞두고 있는 인구 백만이 넘는 거대도시 수원에서 시간여행을 한다는 게 언뜻 어울리지 않지만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다. 1794년 축성 시작 … 1975년 복원 착수, 1997년 완료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8년째인 1794년 1월 화성 축성을 시작했다. 도성을 방어하는 한편 자신이 상왕이 돼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머물기 위한 의도였다. 2년 9개월의 공사를 거쳐 1796년(정조 20년) 9월에 마무리됐다.정조는 화성의 설계를 최고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에게 일임하고 조심태, 정민시, 서유린, 홍원섭 등에게 실무를 담당케 했다. 반계 유형원도 설계 개념을 정립하는 데 관여했다. 정약용은 전통적인 건축기법에 서양의 기법을 활용해 단기간에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성곽 구조를 지닌 아름다운 성을 완성했다. 공사의 총책임자는 채제공이 맡았다. 완공된 화성의 규모는 둘레 약 5.7km, 성곽 높이 4~6m로 4개의 출입문과 41개의 시설물을 갖췄다. 지난 시대에 축적된 기술뿐만 아니라 거중기, 녹로, 유형거, 동차 등 최초로 선보이는 건축기자재 등 조선의 모든 건축 및 축성 기술이 총동원됐다. 이 덕분에 화성은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히며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됐다. 수원 토박이들조차도 오랫동안 풍문으로 성과 궁궐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 진짜로 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다. 마침내 1975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997년 수원 화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성이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조가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이다. 기록을 중시했던 정조는 화성 축성 과정과 비용, 기간, 인부 수 심지어 인부들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성공적인 복원은 1997년 12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이어졌다. 위원회는 등재 결정문에 “성의 가치는 당시 공사 내용을 담은 '화성성역의궤'에 담겨 있다. 돌 무게가 얼마고, 어떤 목재를 사용했고, 심지어 공사비로 얼마를 지출했는지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설계와 시공 부분은 그림과 해설을 따로 붙여 놓았다. 화성성역의궤만 있으면 화성은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다. 화성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과학적이라는 이유다.”라고 적었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당시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해 고도로 발달한 과학적 특징을 골고루 갖춘 근대 초기 군사 건축물의 모범”이라며 “성곽은 이제 겨우 200년에 지나지 않지만 제각각 지닌 예술적 가치를 감안할 때 마땅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려야 한다”고 극찬했다. 화성의 4개 관문 둘러보기 화성을 둘러보는 방법으로는 직접 다리품을 팔아 연필을 꾹꾹 눌러 글씨를 쓰듯 구석구석을 두 발로 꾹꾹 밟아가며 살펴거나, 화성어차를 타고 성곽의 중요 지점을 둘러보는 두 가지다. 2인승 자전거인 ‘벨로택시’와 해설사와 함께 투어하는 5인승택시 ‘행카’가 지난 5월에 운영을 재개했는데 호불호가 갈린다. 어차를 타고 화성의 윤곽을 그린 후에 성곽을 따라 걷기를 추천한다. 화성어차는 순종 황제가 타던 자동차와 조선시대 국왕이 탔던 가마를 모티브로 제작됐다. 화성어차가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데 약 35~40분이 소요된다. 화성행궁에서 출발해 팔달문-전통시장-수원천-통닭거리-수원화성박물관–연무대-화홍문(방화수류정)-장안문-화서문-생태교통마을을 거쳐 다시 화성행궁으로 돌아온다. 수원 화성에는 모두 4개의 관문이 있다. 북문 장안문(長安門), 남문 팔달문(八達門), 서문 화서문(華西門), 동문 창룡문(蒼龍門)이다. 성문들은 모두 아치형의 홍예문이며 2층에는 적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는 누각이 설치돼 있다. 화성 순례는 팔달문에서 출발해 서장대를 거쳐 화서문, 장안문, 동장대(연무대), 창룡문으로 돌아오는 게 일반적인 코스다. 성곽길은 밖에서 보면 6~9m 높이지만 안에서 밖을 보면 어른 키만한 담장 정도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가장 화려하고 장엄하다. 통상 성의 남문이 주 관문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북문인 장안문이 주요 관문이다. 그 이유는 정조가 서울에서 화성으로 행차할 때 가장 먼저 들어올 수 있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장안이란 서울로 통한다,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두 의미를 지닌다. 보물 제 402호인 팔달문은 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을 지니며 수원 사람들은 ‘팔딱문’이라고 불렀다. 팔달문은 정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 지붕으로 전체적으로 수평을 이루다가 양옆에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우아하게 들린 한옥의 전형적인 곡선미를 드러낸다. 장안문, 창룡문, 화서문도 이와 다르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췄다. 팔달문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도로 공사로 인해 성문만 남아 있다. 오직 팔달문 구간만 토지보상 등의 문제로 성곽이 복원되지 않았다. 팔달문 주변에는 수원천을 따라 팔달문시장을 비롯해 지동시장, 영동시장 등 전통시장이 형성돼 있다. 보물 제 403호인 화서문은 서북공심돈과 함께 서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둘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수원 화성 건축의 압권으로 꼽힌다. 이 두 건축물만이 정조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지붕 일부만 파손돼 복원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동쪽의 창룡문 아래로는 수지 풍덕천과 성남으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지난다. 인근에는 동장대(연무대)와 국궁 체험장 등이 있다. 4개 관문 외에도 비밀통로인 암문 5개, 수문 2개, 무기를 보관하거나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적대 4개,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공심돈 4개 등 모두 41개부대시설이 배치돼 있다. 공심돈,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특이한 구조물화성의 시설물들 가운데 가장 특이한 건축물은 공심돈(空心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공심돈은 비상시에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의 일종인데 이름 그대로 건물 안쪽이 텅 비어 있다. 밖에서 보면 단층 같지만 내부는 3층이다. 1층은 뜨거운 물을 부어 적의 접근을 막고 2층은 가까운 거리를 쏠 수 있는 화살과 총을, 3층은 먼거리를 쏘는 총을 배치하고 구멍을 뚫어놨다. 적의 눈에 띄지 않고 망루로 올라가기 위해 안쪽을 비우고 사다리나 계단을 설치했으니 그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로서도 전례가 없었고 지금까지도 공심대는 화성이 유일하다. 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등 3개의 공심돈이 있으며 그 중 서북공심돈이 가장 아름답다. 성이 완공된 이듬해인 1797년 화성을 찾은 정조는 신하들에게 서북공심돈을 가리키며 “보아라. 우리 동국 역사상 최초의 공심돈이다. 마음껏 구경하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서북공동심은 2011년 보물 1710호로 지정되었다. 200년이 지난 지금 서북공심돈 앞쪽에는 화서공원이 조성돼 있다. 평화로운 저녁 나절을 보내고 있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뒤편에 있는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에 무심해 보인다. 화서공원은 서울의 하늘공원처럼 가을엔 억새 명소다. 작가 김남일은 “한참 있다 가도 화서문은 그 자리에 서 있다.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서 서문이다.”라고 썼다. 수원 사람들에게는 이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그저 늘 그 자리에 있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일 뿐이다. 단아하면서도 단단한 공심돈을 마주 하고 서니 나 역시 정조가 그랬듯이 힘껏 외치고 싶다. “맘껏 보아라. 동국 최초의 공심돈이다.”서장대와 동장대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豐樓)에서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던 화령전(華寧殿) 방향으로 가다보면 ‘생태교통마을’ 조형물이 보이고 ‘왕의 도로’ 안내판이 서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행궁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도심 길임을 실감하게 되는데 꼬불꼬불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외국 유명 관광지를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작은 레스토랑, 양품점,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제각각 개성을 풍기는 매장들을 기웃거리다보면 어느새 화서문이다. 화성은 대체로 서쪽은 경사가 심하고 동쪽은 완만하다. 화서문 누각으로 올라 성곽길을 따라 600m 정도 오르면 화성에서 가장 높은 서장대(西將臺)에 당도하게 된다. 화서문과 서장대 중간쯤에 서북각루가 서 있다. 늘씬한 자태를 자랑하는 서북각루에 오르면 수원시의 서쪽 지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누각 사이로 탁트인 대로가 쭉 뻗어나가는 모습이 산자락을 휘돌아 나오는 바람만큼이나 시원하다. 서북각루에서 땀방울도 식힐 겸 풍경에 빠져 한참을 머물렀다. 가을에 서북각루에서 화서공원을 내려다보면 단풍이, 화서공원에서 서북각루를 올려다보면 억세가 물결 친다.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니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세로 날개짓을 하고 있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는 성곽 일대를 한 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군사시설로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답다. 정조는 한낱 군 시설을 어쩌자고 이토록 아름답게 지었단 말인가. 세계의 그 어떤 나라에도 이렇듯 아름다운 지휘소는 없었다. 그것도 이 산꼭대기에 말이다. 서장대 주변의 소나무들도 장엄하다. 서장대 앞에는 첨성대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노대가 서 있다. 노대는 다연발 화살인 쇠뇌를 쏘던 방어시설이다. 그러나 서장대와 노대는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성스러운 장엄함이 있다. 서장대에는 ‘화성장대’라는 정조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장대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아래쪽 행궁에서도 한 눈에 보인다. 서장대에서 더 서남쪽으로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 나중에 융릉으로 승격)을 바라보았던 서남각루(화양루)가 있다. 동장대(東將臺)는 병사들이 무예를 연마한 곳이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부른다. 지형은 높지 않으나 사방이 트여 있어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피기 좋은 장소이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연무대와 일대 풍경이 아름답다. 북수문(화홍문)과 방화수류정 & 남수문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곳에 북수문에 해당하는 화홍문(華虹門)이 세워져 있다. 반대로 흘러나가는 쪽에 남수문이 세워져 있다. 화홍문은 멋진 누각과 7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여름철 7개의 무지개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지는 물보라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으로 꼽는다. 화홍문 뒤편에 높은 언덕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 불리는 동북각루가 세워져 있다. 단 하나의 쇠붙이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만 지은 건물이다. 동북쪽 군사 지휘소로 만들어진 누각이긴 하나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광과 정자와 어우러진 주변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방화수류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의미다.화홍문 일대가 군사들의 휴식처라면 방화수류정은 정조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화양각(서남각루)에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졌다면,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풍류와 함께 왕의 위엄을 내세웠던 포인트다. 방화수류정에는 왕위와 신선을 상징하는 구름 조각 모양의 ‘낙양’ 장식이 기둥 여기저기에 덧대어 있다. ‘’ 방화수류정 아래 인공적으로 조성한 용연(龍淵)이라는 불리는 연못이 있다. 방화수류정에는 4개의 달이 뜬다고 한다. 하늘에 뜬 달, 호수에 비친 달, 술잔에 담긴 달, 그리고 임의 눈동자에 어린 달이다. 방화수류정의 평면지붕 형태는 18세기에는 유례없는 뛰어난 건축기술로 밝혀져 역사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이 외에도 수원 화성은 포를 발사하는 포루 5곳과 치성, 통신시설인 봉돈 등 군사시설을 갖추었다. 화성은 두 발로 걸어야 한다. 걷는 자와 걷지 않는 자가 느끼는 화성은 분명 다른 화성일 것이다. 화성어차 운행 시간: 오전 9시 4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점심시간 휴식, 정오~오후 12시반)요금: 성인 4000원, 군인 및 청소년 2500원, 어린이 1500원문의: 031-228-4683
2021-07-14 04:43:34
1980년 양주시에서 분리된 남양주시는 북쪽으로는 포천시와 의정부시, 동쪽으로는 가평군과 양평군, 서쪽으로는 서울시와 구리시, 남쪽으로는 광주시와 하남시와 맞닿아 있다. 남양주시 한가운데에는 해발 812m의 천마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사냥을 나온 이성계가 ‘이 산은 매우 높아 손이 석자만 더 길었다면 하늘을 만질 수도 있겠다’라고 하여 천마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또 조안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조안면 양수리 북서쪽에 위치한 운길산은 산세가 부드럽고 주변에 팔당호, 서울종합영화촬영소, 금남유원지 등이 있어 주말 가족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밖에 축령산, 백봉산, 예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수려한 산과 계곡 및 이름난 수목원과 휴양림이 많다. 특히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풍경은 남양주시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유적지’ … 고향마을에 편히 잠들다남양주시는 다산 정약용이 얼이 서린 도시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는 ‘정약용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마재마을은 정약용의 생가가 남아 있고 다산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해 75세에 생을 마치기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생가 뒤편 작은 언덕 위엔 다산과 그의 부인 홍씨가 합장묘에 평온하게 안장되어 있다. 여유당(與猶堂) 뒤편 동산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무덤 앞쪽에 조촐한 망부석이 세워져 있다. 당호인 여유당의 여(與)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하다’는, 유(猶)란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는’ 뜻이다. 당호인 여유는 1800년(정조 24년) 관직에서 물러나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것으로 겨울에 냇물을 건너 듯 조심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유배지였던 강진 귤동의 뒷산 이름이다. 조안(鳥安)은 새소리가 듣기 좋고 물이 맑아 편안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정약용 유적지에는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이 복원되어 있다. 또 다산과 부인의 묘역을 비롯해 기념관과 실학박물관 등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남양주 8경 중 1경에 해당된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 6월16일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과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남 윤씨는 송강 정철과 가사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고산 윤선도의 직계 후손이다. 다산은 이미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울 정도로 총명하였고 22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정조의 총애와 신뢰를 받으며 젊은 나이에 여러 관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며 정조를 도와 수원화성을 완공하는데 기여했다. 다산의 정치인생은 천주교와의 인연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청년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벽을 비롯해 다산이 가장 사랑했던 둘째형 약전과 세째형 약종, 매형 이승훈이 모두 천주교 신자로 발각돼 처형되었다. 매형 이승훈은 한국인 최초로 중국에 가서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약용과 약전 형제도 한때 천주교 교리서를 읽으며 천주교 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다가 후에 거리를 두었으나 순조 원년(1801년)에 일어났던 신유박해로 약전과 약용 형제는 신지도(완도군)와 장기현(포항사)으로 유배됐다가 다시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나주 율정점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진 게 약전과 약용 두 형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약전은 흑산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서적인 불후의 명작 ‘자산어보’를 남겼다. 다산은 57세 되던 해 강진에서의 17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리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75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학문과 집필에 전념하며 총 499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다. 그가 남긴 저서는 시문집에서부터 국가 개혁사상이 집대성된 <경세유표>, 토지개혁을 주장한 <여전론>, 치민에 대한 도리를 논한 <목민심서>,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한 책인 <흠흠심서> 등 분야 또한 매우 다양했다. 이 중 44권 15책만이 남아 있다. 그가 모든 저서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실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과 부국강병,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와 자세였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자 개혁가였다.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의 대홍수로 유실됐다가 1986년 복원됐다. 다산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중국 북경에서 복제해 온 것으로 실제로 발포가 가능한 홍이포와 기중기 등이 전시돼 있다.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명저들을 비롯해 우리나라 실학의 태동에서 발전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매년 다산문화제가 개최된다. 유적지 옆에는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조성된 ‘다산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운길산 수종사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 자랑’ 정약용 유적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운길산(雲吉山) 기슭에는 남양주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수종사(水鍾寺)가 있다. 비탈진 산길을 위태롭게 올라야 하지만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사찰이다. 수령이 500년이 넘는 장한 은행나무와 그 뒤편으로 펼쳐지는 두물머리 풍경이 압권이다. 조선 초기 문장가인 서거정은 수종사를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극찬했다. 수종사의 창건 연대는 전하지 않으나 경내에서 1439년에 세워진 태종의 다섯째 딸 정의옹주의 부도가 발견된 점을 보아 그 이전에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종사는 세조 4년에 크게 중창했으며 이때 18나한을 봉안하고 5층 석탑(1459)을 세웠다. 1458년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요양을 하고 돌아오던 중 지금의 수종사 근처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어디선가 은은하게 종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자 세조가 진원지를 찾으니 운길산 바위굴 속에 18나한상이 모셔져 있었다. 또 굴 속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을 알게 된 세조는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 부르게 하였다. 다산 정약용, 초의 선사, 추사 김정희도 이곳을 찾아 차를 마셨다고 한다. 특히 다산은 수종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유사종사기>를 짓기도 하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수종사에 지어진 다실인 삼정헌(三鼎軒)에서는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차를 대접한다. 시(詩), 선(禪), 차(茶)가 하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삼정헌에서의 차 한잔을 음미해 보자. 고요 속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면 무겁게 싸들고 온 마음의 짐이 모두 한강물에 떠내려가는 듯하다. 수종사는 여러 차례의 중창하였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돼 1974년 다시 지었다.540년간 울울창창한 광릉숲과 천하명당 광릉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운악산 자락에는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운악산(雲岳山)은 동쪽에 금강산, 서쪽에 구월산, 남쪽에 지리산, 북쪽에 묘향산을 두고 한가운데 위치한 산으로 예로부터 조선의 5대 명산으로 알려져 왔다. 이 산의 위치와 숲에 반해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묘자리로 찜해 두었다. 광릉 국립수목원은 포천시 소홀읍 직동리에 위치해 있지만 광릉과 광릉숲(유원지)는 남양주에 있다. 세종의 18남 4녀 중 둘째 아들인 세조는 생전에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고 안정적인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주홍글씨가 따라다녔다. 수많은 이들을 피비린내 나는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사람이라면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 때문인지 그의 개인사는 흉사로 뒤덮였으며 평생 불치의 피부병으로 고생해야 했다. 맏아들 의경세자는 왕위에도 올라보지 못하고 19세에 요절하고(후에 성종에 의해 덕종 임금으로 추존된다), 둘째 아들인 예종도 즉위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등진다. 세조의 피부병에 관해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가 꿈에 나타나 세조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었다. 그 후 세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에 걸리게 되었다. 분노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관을 파내 유골을 바닷가에 버렸다고 한다. 야사의 진위 여부를 떠나 세조는 죽을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업장(業障)을 녹이기 위해서일까, 피부병 치료를 위해서였을까. 어쨌거나 세조는 전국의 유명 사찰을 돌며 수많은 야사를 남겼으며 여러 측면에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융성의 치적을 보여준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는 세조와 문수동자의 이야기가 전하며, 충북 보은 법주사에는 세조와 정이품송의 이야기, 보은 복천암과 신미대사(信眉大師)를 통한 피부병 완치 일화 등이 전한다. 이밖에 수종사, 여주 신륵사, 화순 쌍봉사(전남 화순), 해인사, 양주 회암사, 강원도 고성 건봉사, 전남 영암 도갑사, 경기도 양평 용문사 등에 노비와 토지 등을 기증하고, 중수를 도왔으며, 승려들의 노역을 면제해주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세조는 마음이 편해졌을까.광릉(光陵)은 무엇보다는 울창한 숲으로 유명하다. 조선 왕조 54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숲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덕분에 광릉숲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인 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의 효시가 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생물보전권으로 지정되어 있다. 광릉숲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새 크낙새가 살고 있다. 광릉숲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최고의 명당에 조성된 조선 왕릉 중에서도 광릉은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 광릉은 원래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 집안의 선산이었으나 왕릉으로 택지 된 후 정씨 묘는 모두 이장하였다.광릉은 조선 왕릉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선 왕릉 변천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능이다. 즉 인접한 두 개의 언덕에 각각 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하고 하나의 정자각을 세운 왕릉 형식이다. 능제가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경계하여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풍석을 쓰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광릉의 진입로에는 조선 왕릉에 ‘하마비’가 남아 있고, 울울창창한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숲을 가득 메우고 있다. 광릉의 원찰이 된 천년고찰 운악산 봉선사운악산 봉선사(奉先寺)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당시의 이름은 운악사로 작은 절이었으나 예종 1469년 정희왕후가 광릉의 원찰로 지정한 후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로 이름을 바꿨다. 봉선사 입구에는 높이 20m, 둘레 5m가 넘는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정희왕후가 손수 심었다고 전한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됐다. 봉선사는 명종 6년(1551년)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정책으로 교종의 우두머리 사찰이 되어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 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됐다. 명종 17년에는 교종 본산이 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1911년 일제강점기에 반포된 사찰령으로 31본산의 하나가 됐고 교종 대본산으로 지정됐다. 1950년 6.25 전쟁으로 14동 150칸의 전각이 모두 불타 없어졌고, 큰법당 등 대부분의 전각들은 1960년 이후 중창됐다. 봉선사 대웅전에 걸린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은 우리나라 사찰 중 최초의 한글 현판이다. 삼성각, 지장전, 조사당, 관음전, 운하당, 방적당, 범종루 등이 있으며, 삼성각은 한국 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당우이다. 봉선사 대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몇 안 되는 조선 전기 동종으로 보물 397호로 지정돼 있다. 예종 원년에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봉선사 중창 당시 주조된 봉선사 대종은 음통이 없고 종의 입구가 넓어지고 몸통에 두 가닥의 띠를 넣은 점, 조각 수법이 통일 신라 시대 이후의 범종 양식을 따르지 않는 점 등 조선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봉선사 부도전에는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춘원은 해방 이후 그와 친척인 운허 스님의 배려로 봉선사에 머무르면서 집필 활동도 하고 절에서 운영하는 광동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무정>, <유정> 등 한국 문학사에 기록될 만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친일 행각으로 인해 문학작품 자체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봉선사 오채현 석조각 초대전 ‘해피 붓다, 해피 타이거전’봉선사 경내에서는 석가탄신일을 기념해 오채현 석조각 초대전 ‘해피 붓다, 해피 타이거전’이 4월 27일~8월 31일에 열린다. 이번 전시회에는 높이 3.5m의 거대한 사방불과 현묘탑을 비롯해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이 봉선사 연못과 정원 일원에서 선보인다. 우리에게 친근한 호랑이와 산신령 등의 조각들도 다수 전시되고 있다. 신록의 계절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가 가득한 봉선사 도량이야말로 코로나 19로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니 한번쯤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단종비가 묻힌 사릉과 구한말 두 임금 묻힌 홍유릉광릉에서 20km정도 떨어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1440~1521)가 묻힌 사릉(思陵)이 있다. 남편을 죽인 자와 죽어서도 지척에 누워 있는 정순왕후의 사후가 편할 지 걱정이다. 남편 단종은 강원도 영월 장릉(張陵)에 묻혀 있다. 정순왕후는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함께 군부인으로 강등되었고 왕실 여인들이 출가해 살았던 ‘정업원’(淨業院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82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세상을 뜬 정순왕후를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시가인 양주군 묘역에 모셨다. 1698년(숙종 24년)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자 함께 복위되자 사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사릉은 선정릉과 함께 2013년 CNN이 선정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40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사릉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홍유릉(洪裕陵)이 있다. 홍릉은 조선 26대 왕인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이고, 유릉은 조선 마지막 왕인 27대왕 순종과 그의 정비 순명효황후와 계비 순정효황후의 능이다. 또 영친왕과 의친왕,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묻혀 있다. 조선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부르게 되면서 최초의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묘역 역시 명나라 황제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성했다. 홍유릉은 규모도 크고 화려하지만 이전 왕릉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능침의 삼계(상계, 중계, 하계의 3계단)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拜展)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정사각형) 대신 일자형(직사각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향로를 따라 양 옆으로 문인석, 무인석과 말, 양, 사자, 해태, 코끼리, 기린, 낙타 등 그동안 묘역 조성에 등장하지 않았던 동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신흥무관학교 세운 이석영 광장과 REMEMBER 1910홍유릉 앞에는 남양주 역사문화 복합 공간인 ‘이석영 광장과 REMEMBER 1901’이 조성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 서거 111주년을 기념해 지난 3월 26일 개관한 은 남양주 화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李石榮, 1855 ~ 1934)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유공과 넋을 기르고 민족의 아픔을 기억하고 새로운 시대를 다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한일합방이 강행된 1910년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세워졌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등 6형제는 오늘날의 가치로 약 2조원에 달하는 토지와 재산을 처분해 식솔 60여 명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석영은 북경에서 비참한 생활 끝에 생을 마감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이회영은 상하이에서 밀정에게 걸려 고문 끝에 옥사했다. 5형제가 옥사 또는 아사항렸다. 벽돌 하나하나에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적힌 계단을 내려오면 일제강점기의 고통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뤼순(여순)감옥과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받는 모습, 일제강점기 시대의 법정 등이 재현돼 있다. 독립운동 관련 영상이 상영되는 미디어홀과 컨퍼런스룸이 있다. 다만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설계한다는 공간에 입주한 대형 베이커리와 카페는 일제강점기의 고통스런 역사를 되새기려는 기념의 장소에 어울리는지는 의문이었다.
2021-04-30 20:32:15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힘들어지면서 이국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섬 여행이 각광받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2880여 개의 무인도와 470여 개의 유인도를 합쳐 3350여 개가 넘는 섬이 있다. 세계에서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에 이어 네 번째로 섬이 많은 나라이다. 인천시 앞바다에 위치한 옹진군은 백령도를 비롯해 덕적도, 연평도, 승봉도, 소이작도, 자월도 등 전체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 앞바다의 섬 가운데 육지와 가장 가까운 섬은 국제공항이 있는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동의 영종도이다. 여기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옹진군 북도면(北島面)의 신시모도가 오늘 소개할 여행지다. 영종도는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2009년과 2000년도에 완공되어 배를 타지 않아도 되고, 영종도에서 배로 10분이면 닿는 신시모도는 2005년 연도교가 놓이면서 이웃 동네 마실 다녀오듯 당일치기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섬들의 공통점은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것과 섬인 듯 섬이 아닌 듯 묘한 매력이 풍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여섯번째로 큰 섬, 영종도 … 4개섬 간척, 두경승 사당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하는 영종도(永宗島)는 한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이다.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오늘날 대규모 섬이 되었다. 섬 면적의 절반이 인천국제공항 부지다. 간척사업을 벌이기 전에는 영종도, 신불도(薪佛島), 삼목도(三木島), 용유도(龍游島) 등 네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얕은 바다를 간척으로 메워 하나의 섬이 됐다. 인천경제자유구역 사업으로 영종국제도시와 영종신도시가 조성됐다. 영종도는 ‘고려사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서에는 제비가 많다고 해서 ‘자연도’(紫燕島)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 교류하는 거점이었고 사신들을 접대했던 ‘경원정’(慶源亭)이라는 객관이 있었다. 경원정은 1875년(고종 12년) 일본의 군함 운양호의 포격으로 파괴됐다. 영종도는 고려 무신정권 이의민(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에 이어 정권을 잡음)과 대적하던 두경승(杜景升)의 유배지였다. 두경승은 김제 만경현 사람으로 만경두씨의 시조다. 그의 사당과 무덤이 영종도에 남아 있다. 두경승은 학식은 보잘 것 없었으나 양심적이고 용기가 대단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해안 요새인 영종진과 왕의 행궁인 영종 행궁이 있었다. 섬 중앙에 솟은 백운산에는 신라 문무왕이 세웠다는 용궁사가 있으며,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선녀 바위로 이어지는 둘레길과 영종도 하늘정원이 유명하다. 인천국제공항 전망대에서는 세계 각국의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모습을 지척에서 지켜볼 수 있어 코로나19로 막혀 버린 해외 여행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북도면 3개 섬 일컫는 ‘신시모도’ … 강화도와 지척, 신도가 가장 넓어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북도면 장봉도 행 여객선을 타면 신도 선착장까지 10분이면 닿는다. 여름철에는 차량을 싣는데 만도 보통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지만 아직은 한산한 편이다. 승객들은 차 안에 머문 채 하선을 기다리지만 배 여행의 묘미는 역시 갑판에서 맡는 비릿한 바다내음과 갈매기들의 날갯짓을 감상하는 것일 테다. 신시모도는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등 각 섬의 머리글자를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일명 ‘삼형제섬’으로 2005년 건립된 연도교 덕에 도보나, 자전거, 승용차 등을 이용해 하나의 섬처럼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신시도모와 장봉도를 더한 북도면의 전체 면적은 17.64 ㎢이며 2016년 기준으로 약 2300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북도면에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까지 강화도에 속했다. 이후 조선시대엔 경기도 옹진군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이후 인천광역시 옹진군으로 편입됐다. 세 개의 섬 중에서 신도의 면적이 가장 크다. 북도면사무소, 파출소, 보건소, 우체국, 보건소, 농협 등 주요시설은 모두 시도에 있다. 선착장에서 빠져나오면 이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으로 가면 신도 1리, 2리로 빠지게 되고 왼편으로 가면 연도교를 건너 시도리로 가게 된다. 어느 쪽으로 먼저 향하던 신도 선착장으로 회귀하게 되니 마음이 끌리는 대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행정과 관광의 중심은 시도, 수기해변과 시도염전 신시모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시도는 고려 말 장수 최영과 이성계가 강화도 마니산에서 이 섬을 과녁 삼아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해서 살섬 즉, 시도로 불리기 시작했다. 시도의 대표적인 명소로는 수기해변과 시도염전이다. 고운 백사장이 넓게 펼쳐지는 수기해변은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해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이 몰려든다. 해변 뒤쪽으로는 소나무숲과 개질언덕이 있다. 하루에 두 번 썰물이 들 때에는 회색빛 갯벌이 드넓게 펼쳐져 갯벌 체험장으로도 인기가 높으며, 시도 어민들의 전통어업 방식인 ‘독살’이 그대로 드러나서 독특한 풍광을 선사한다. 갯벌에서는 망둥어, 조개 등이 많이 잡힌다. 수기해변은 오래전 방영된 TV드라마 ‘풀하우스’ ‘슬픈연가’ 등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이름값을 높였다. 해변과 개질언덕 입구에 촬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지만 촬영장 세트는 이미 오래전에 철거되었다. 해안가 끝에 놓인 계단을 오르면 수기 전망대와 수기해안 둘레길로 이어진다. 수기 전망대에 오르면 멀리 강화도 마니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수기해변에는 20여 동의 방갈로가 해변을 따라 조성돼 있고 식수대와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차박지나 캠핑장으로도 인기가 높다. 수기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도염전이 있다. 시도 천일염은 풍부한 일조량과 해풍 속에서 생산돼 염도가 낮고 물에 잘 녹으며, 첫 맛은 짜고 뒷맛은 달아 인기가 높다. 바다와 논 사이로 펼쳐지는 염전과 천일염이 가득 쌓여 있는 소금창고는 도시인들에게는 색다른 볼거리이다. 1883년 제물포 개항과 함께 일제 강점기 항만이 건설되면서부터 인천에 천일염전이 조성됐다. 당시 소금 한 가마니 가격이 쌀 한 가마니와 같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 많던 인천의 염전은 거의 사라지고 석모도 삼량염전, 백령도 화동염전, 시도염전 등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모도, 배미꾸미 조각공원과 박주기 해변 모도는 어부가 그물을 쳤는데 고기는 한 마리도 안 잡히고 띠(벼과의 풀, 茅)만 낚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띠섬’(띠염)이라고도 하며 삼형제 섬 중에서 가장 작다. 배미꾸미 조각공원과 박주기 해변이 모도의 필수 코스다. 시도에서 처음으로 마을이 있던 노루메기 해변을 지나 시모도교를 건너 해당화 꽃길을 달리면 박주기 해변과 배미꾸미 해변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5분 정도 달리면 섬 끝자락에 ‘모도와 이일호’라는 커다란 비석과 함께 조각공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변의 모양이 배 밑구멍처럼 생겼다고 해서 배미꾸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각가 이일호 선생이 모도에 여행 왔다가 황량한 섬의 풍경에 반해 개인 작업실 겸 건물을 짓고 앞마당과 해안가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배미꾸미 조각공원’이 됐다. 어림잡아도 70~80점이 넘는 조각 작품들이 늘어서 있는 해변가는 낯설면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배미꾸미 조각공원으로 인해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섬 모도는 아주 특별한 섬이 됐다. 인간의 성과 욕망 등을 표현한 초현실적인 작품들은 하나같이 독창적이다. 독창적이라는 수식어도 부족할 만큼 기괴하거나 보기에 민망한 작품들도 여럿이다. 작품명이 적혀 있지 않으니 느끼는 대로 감상하면 된다.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면 언덕 위 카페에서 작가의 작품해설집을 빌려볼 수 있다. 작품들은 물때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 만조 날 일몰 시간에 바다를 배경으로 했을 때 가장 돋보인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과 ‘버들선생’이다. 손 모양을 형상화 한 작품 ‘천국으로 가는 계단’ 끝에는 애초에 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계단이 없으니 결국 인간은 천국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삶의 문제를 던지는 듯하다. 바닷가로 성큼 나 앉은 큰 너럭 바위 위에는 철제로 만든 가지들을 길게 늘어뜨린 ‘버들선생’이 서 있다. 버들선생은 해신제를 지내는 신녀의 모습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머리를 풀어헤친 무녀를 닮은 듯도 하다. 만조가 들어 바닷물이 높게 차 오르면 물에 둥둥 떠 있는 듯, 물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듯 신비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석양 속에 붉게 물드는 버들선생을 담기 위해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는다. 코로나19로 사망한 김기덕 감독의 2016년도 개봉작 ‘시간’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외국인이 일부러 이곳을 찾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밀물 때에는 또 다른 조각공원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이 빚은 조각들은 사람이 빚은 조각에 비하면 모양도 현란하지 않고 색깔도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한 멋은 이쪽이 한 수 위인 듯하다. 바위에는 인간의 손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시간’이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해안가 끝 계단을 오르면 울창한 소나무 숲과 아찔한 절벽과 해안의 조화가 절묘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절벽 끝에 놓인 벤치에 앉아 배미꾸미 해변 최고의 뷰를 감상할 수 있다. 모도 남쪽 끝뿌리에는 박쥐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박주기’라 불리는 아담한 해변이 있다. 모도 해변의 푸른 바다와 ‘Modo’ 조형물의 빨간색 대비가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모도 제일의 포토존이다. 신시모도의 추억을 가장 선명하게 남길 수 있는 곳이다. 영종도와 강화도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신도 구봉산 신도는 조선 왕조 말엽인 1880년 경부터 이곳에서 진짜 소금을 제조했다 해서 ‘진염’(眞鹽)이라 불리다가 1914년 강화군 제도면에 편입되면서 주민들이 순박하고 성실하여 믿을 만하다 하여 신도라 부르기 시작했다. 신도 구봉산(九峯山)은 해발 179 m로 북도면을 통틀어 가장 높은 산이다. 봉우리가 아홉 개라 구봉산이라 불린다. 봄이면 등산로가 벚꽃으로 뒤덮여 벚꽃산으로도 불린다. 경사가 완만해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서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위치한 구봉정에 오르면 멀리 영종대교와 인천대교까지 내다 보인다. 구봉산으로 오르는 길 양쪽에는 약 4km 에 걸쳐 700여 그루의 벚나무와 진달래가 심어져 4~5월이면 꽃들이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육지보다 봄이 한 달가량 늦어 신시모도에서는 5월까지도 벚꽃을 볼 수 있고 벚꽃이 지고 나면 해당화 물결이 일렁인다. 신도 고남리 해당화 꽃길, 시도 해당화 꽃길, 모도 띠염 해당화 꽃길이 유명하다. 1.4km에 달하는 시도의 해당화 꽃길은 특히 아름답다. 신시모도에는 9.5km에 달하는 대한민국 해안누리길 53번 노선인 인천 삼형제섬 길을 비롯해 수기 해안둘레길과 모도 해안둘레길 등이 조성돼 있다. 선반 운항 시간은 세종해운 삼목매표소 (032)751–2211, 한라해운 삼목매표소 (032)746-8020 등에 문의하면 된다.
2021-03-26 22:38:17
경기도 북단의 정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치우진 파주는 북으로는 임진강, 서로는 한강이 흐른다. 임진강은 공릉천, 문산천, 갈곡천, 비암천 등 크고 작은 지류로 흘러내리다가 오두산성 아래서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두 강의 하류에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진다. 동북쪽으로는 연천군, 동쪽으로 양주시, 남쪽으로 고양시, 남서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김포시와 맞닿아 있다. 파주라는 지명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증보문헌비고’ 다. 고조선 땅이었던 파주는 마한 땅이 되었다가 삼국시대에는 차례로 백제, 고구려(475년), 신라(신라 진흥왕)의 영토가 됐다. 조선시대 원평도호부였던 파주에 세조의 왕비(파평윤씨 정희왕후)의 친정이 있었기에 ‘목’으로 승격됐다. 파주(坡州)란 이름은 파평(坡平)에서 유래됐다. 6.25전쟁 이후 파주는 접경의 군사도시란 이미지가 강했으나 2003년 파주 운정 신도시 개발 이후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해 새로운 도시로 발돋움 중이다. 파주에는 임진강변의 반구정과 화석정을 비롯해 황희 정승 유적지, 율곡 이이 유적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보광사, 파주 삼릉과 등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다. 또 파주 출판단지, 프로방스, 신세계아웃렛, 헤이리예술마을 등 문화쇼핑공간,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과 도라산 전망대 등 안보 관광지, 감악산 흔들다리와 마장호수, 벽초지수목원 같은 대중적인 관광지를 두루 갖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매력적인 도시다. 더욱이 해마다 열리는 파주 북소리축제, 파주 포크페스티벌, 파주 장단콩축제, 파주 개성인삼축제, 파주 평화기원 마라톤대회 등 다양하게 열리는 문화행사와 축제는 파주가 흥의 도시라는 데 토를 달 수 없게 한다. 한마디로 파주는 4계절 언제 어느 때 찾아도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북한의 함경남도에서 덕원군 풍상면 용포리 마식령 산맥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장장 254km를 흘러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서 한강과 만난다. 임진강은 물살이 빠르고 강 절벽의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어 풍광이 유달리 아름답다. 많은 옛 선비들이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강변에 정자를 짓고 시와 학문을 논했다. 황희의 반구정 … 갈매기 한가롭게 날던 얕은 강변, 지금은 철조망에 갇혀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伴鷗亭)은 세종 때의 정승 황희가 지은 정자이다. 황희 선생 유적지 내에 있다. 벼슬길에서 물러나 말년을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겠다는 뜻으로 ‘반구정’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반구정 아래 임진강변에는 철조망이 처져 살벌하기 그지없다. 조선시대 최고의 정승도 훗날 나라가 두 동강 나고 산하가 철조망에 가로막히게 될 지는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희 정승은 조선 시대 최장수 정승이자 성품이 어질고 청백리로 이름 나 있다. 그의 청백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와 활약상이 전해져 온다. 그의 일대기가 궁금하다면 황희 정승 유적지 내에 있는 기념관을 찾아보면 좋겠다.반구정에는 조선 중기 문신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쓴 반구정기가 걸려 있다. 허목의 무덤은 파주에서 멀지 않은 연천군에 있다. 반구정기에 ‘반구정은 파주에서 서쪽으로 15리쯤 떨어진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매일 조수가 나가고 펄이 드러나면 갈매기가 날아드는데 너무도 편편하여 광야도 백사장도 분간할 수 없고 9월이 되면 철새가 날아들고, 서쪽으로 바다의 입구까지 30리가량 된다’고 적혀 있다. 허나 지금은 갈매기도 철새도 보이지 않는다. 반구정 옆에는 앙지대라는 또 하나의 정자가 있는데, 1915년 원래 있던 반구정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지은 정자다. 반구정에서 내려와 비탈길을 내려가면 황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유적지 내에는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영당과 제사를 지내는 경모재(敬慕齋)가 있다. 화석정, 선조의 임진왜란 예견 … 피난길 오른 선조에 불태워져 길 밝힌 忠心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가 관직에서 물러나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화석정은 율곡마을 북쪽의 깎아지른 임진강변 절벽 위,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강 건너로는 장단평야가 넓게 펼쳐지는 곳에 세워져 있다. 화석정이 있는 곳은 한양과 평양 및 개성으로 건너가는 길목으로 명나라의 칙사(사신)였던 황홍헌(黃洪憲), 왕경민(王敬民)이 이이의 학문에 반해 이곳을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밖에 권람(權擥), 정철(鄭澈), 오억령(吳億齡) 등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원래 화석정은 이이의 5대조 이명신이 세종 25년(1443)에 지은 정자로 성종 9년(1478) 이이의 증조부인 이의석이 중수하고 주변을 꽃과 괴석으로 단장하고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 이이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율곡(栗谷)이라는 그의 호도 마을 이름인 율곡리에서 따 온 것이다. 화석정에는 그가 8살 때 화석정에 올라지었다는 ‘팔세부시’가 걸려 있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 드니 /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80년 이상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와 이후방이 현종 14년(1673)에 복원했다. 화석정 아래 임진나루에는 이이와 선조와 관한 일화가 전한다. 왜구가 침입해 올 것을 예견했던 이이는 틈나는 대로 화석정에 기름칠을 해 두었다. 이이가 죽고 난 뒤 8년 후에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 일행이 칠흑같이 깜깜한 밤 임진나루에 도착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수행하던 이항복이 기름 먹인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6.25전쟁 때 다시 파괴된 것을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고 1973년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오늘날 모습으로 정비됐다. 화석정에 오르면 휘돌아나가는 임진강과 너른 장단평야의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율곡 이이를 모신 자운서원, 성수침·성혼 부자는 파주서원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紫雲書院)과 율곡의 가족묘가 있다. 자운서원은 광해군 7년(1615)에 이이의 제자 김장생(金長生)에 의해 설립되었고 효종 원년(1650)에 자운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713년 김장생과 박세채를 추가로 배향했다. 고종 5년(1868년)에 흥선대원권의 사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지방유림 기금과 국비 보조로 17억원을 들여 복원했고 1975~76년에 보수했다. 서원 앞의 50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말없이 이곳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율곡의 가족묘에는 율곡의 부모와 율곡 부부의 묘 등 가족묘 13기가 조성돼 있다. 부모의 묘 위에 자식이나 후손의 묘를 조성하는 역장(逆葬)인 게 특기할 만하다. 자운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 중기 학자인 성수침(成守琛)과 그의 아들 성혼(成渾), 유학자 백인걸(白仁傑)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파산서원(坡山書院)이 있다. 보광사 곳곳에 영조의 흔적 … 생모 숙빈 최씨 사당 ‘어실각’과 영조가 심은 향나무 파주시 광탄면 고령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보광사(普光寺)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파주의 한계령이라 불리는 됫박고개를 넘어야 한다. 보광사는 사계절이 아름답고 고즈넉한 곳이다. 봄에는 주차장부터 대웅보전까지 목련과 벚꽃, 명자꽃이 만발한 꽃대궐로 변신한다. 가을에는 빨간 단풍과 은행나무가 알록달록 산사를 물들인다. 해탈문을 지나 계곡을 5분 정도 오르면 돌로 높게 쌓은 축대와 담장 위로 전각들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축대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 경내로 들어서면 만세루와 높이 20m를 훌쩍 넘는 은행나무와 쌍사자 석등이 먼저 반기고, 곧이어 아담한 마당과 대웅보전과 원통전, 응진전, 지장전, 범종각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광사는 원래 파주와 양주의 경계를 이루는 고령산(高靈山, 高嶺山)의 이름을 따서 고령사(古靈寺)라 불렀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8년(894)에 임금의 명으로 도선국사가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고려 고종 2년(1215)에 원진국사가 중창했고 우왕 14년(1388)에 무학대사가 삼창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돼 광해군 4년(1612)에 설마와 덕인 두 스님이 법당과 승당을 복원했다. 보광사의 마지막 중창은 조선시대 고종 33년(1896)과 고종 38년(1901) 사이에 이뤄졌으며 당시 많은 궁중의 여인들이 불사에 동참했다고 한다. 보광사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와 친모 숙빈 최씨와 깊은 연관이 있는 절이다. 영조는 생모가 무수리라는 이유로 재위 내내 신분적 열등감에 시달렸다. 1724년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과 왕실의 지위 격상을 위해 묘제를 바꾸는 일련을 조치를 취했다. 그는 1753년 고령산 팔일봉에 있는 생모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묘를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시키고 인근에 있던 고령사를 보광사로 개칭하고 소령원의 원찰로 삼고 어실각(御室閣)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어실각 옆에는 자주 찾아올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향나무를 심었다. 대웅보전 오른쪽 뒤편에 사방 한 칸짜리 어실각과 향나무가 서 있다. 영조는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대대적으로 중수했고 대웅보전의 현판을 직접 썼다. 영조가 보광사를 중수할 당시의 건물인 만세루는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상궁이나 부녀자가 불공을 드렸던 곳으로 추정된다. 만세루 툇마루에 걸려 있는 커다란 목어가 시선을 끈다. 몸통은 분명 물고기인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고 머리에 뿔까지 있는 것이 영락없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과 만세루는 6.25전쟁에도 타지 않고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보광사의 대웅보전은 다른 절집 벽들처럼 석회를 바른 회벽이 아닌 나무벽이다. 벽면마다 민화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범종각에는 인조 9년(1631)에 만들어진 범종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58호)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 뒤편 미륵전에는 최근에 조성된 거대한 미륵보살이 고령산과 보광사를 굽어 보고 있다. 가을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또 하나 보광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전나무 숲이다. 입구와 절 뒤편에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푸른 전나무 숲이 웬만한 휴양림 못지않다. 내친 김에 도솔암이나 정상인 앵무봉까지 올라도 좋다.파주 三陵 : 한명회의 셋째딸 넷째딸 묻힌 공릉과 순릉 … 사도세자 형님 부부는 영릉보광사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파주 삼릉이 있다. 보광사 관람 후 영조의 어머니가 묻혀 있는 소령원을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소령원은 허가를 받아야 관람이 가능하다. 파주 삼릉에는 공릉, 영릉, 순릉 등 3기의 왕릉이 있다. 공릉(恭陵)은 조선 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 조씨가 묻혀 있다. 한명회의 세째 딸인 장순왕후는 세조의 차남인 예종(睿宗 1450~1469)의 세자빈이 되었으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원자를 출산하자마자 꽃다운 열 일곱살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세자빈묘로 단출하게 조성됐다. 병풍석과 망주석 등도 모두 생략됐다. 1468 왕위에 올라 1년 만에 승하한 예종은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와 고양 서오릉 창릉에 묻혀 있다.순릉(順陵)은 성종(예종의 첫째형인 의경세자의 차남, 형은 월산대군)의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이다. 열한 살에 세조의 손자인 성종과 가례를 올리고 열세 살에 왕비로 책봉됐다. 성종 5년(1474)에 후사 없이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삼릉 중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순릉에 묻힌 공혜왕후와 공릉에 잠들어 있는 장순왕후와는 자매지간이다. 자매가 지척에 누웠으니 저승에서라도 덜 외로울까. 두 명의 왕을 사위로 맞이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칭호를 받은 한명회(韓明澮)는 어린 두 딸을 잃고 행복했을까. 참고로 한명회는 청주 한씨로 청주시 동부에 있는 상당구가 그의 뿌리다. 말년까지도 부와 권세를 누리다 사망했다. 그러나 이시애(李施愛)의 난 당시에는 반역에 공모했다는 혐의로 사돈인 세조에게 체포돼 신문을 당하기도 했고, 죽은 지 16년 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됐다 하여 부관참시의 형을 받았으니 세상의 권세와 부귀영화도 다 부질없어 보인다. 영릉(永陵)은 추후 진종(眞宗 1719~1728)으로 추존된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와 효순왕후 (孝純王后) 조씨(1715~1751)의 능으로 삼릉 중 유일한 쌍능이다. 효장세자는 사도세자의 형으로 1725년 왕세자로 책봉됐으나 10세 때 사망했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됐다. 서울서 개성 오가는 길목의 미륵불 모신 기도처, 용미리 마애이불입상파주 삼릉에서 7 km쯤 떨어진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 중턱에 고려 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龍尾里磨崖二佛立像)’이 있다. 석불의 크기가 17m에 달하며 얼굴 길이는 2.5m나 된다. 보물 제93호로 지정돼 있다. 용미리는 서울에서 개성을 오가는 길목으로 미륵댕이라 불렸으며, 이 지방 사람들은 이 거대한 석불을 쌍미륵이라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겼다.용암사(龍巖寺) 일주문을 지나 108계단을 오르면 소나무 숲 사이로 불상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거대한 천연 암벽에 새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머리 위에는 돌갓을 쓰고 신체 비율도 맞지 않는 등 그동안 보아왔던 정갈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마애불과는 달리 토속적이고 투박해 보인다. 지방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석상은 남상, 모난 갓의 석상은 여상이라 하는데 불상이 아니라 장지산을 지키는 수문장 같다.이 마애불상에는 고려 선종과 왕자 한산후(漢山候)의 탄생 설화가 전한다. 고려 선종이 후사가 없어 고민 하던 중 부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꿈에 두 스님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장지산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정말로 거대한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도승을 새기고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니 그 해에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이 바위 불상은 득남을 원하는 여자들과 병의 완쾌를 바라는 이들의 효험 있는 기도처로 알려져 오늘날에도 많이 이들이 찾아온다.
2021-03-20 19:35:30
강화도는 수도권에서 가깝고 역사문화 유적지와 즐길 거리가 풍부해 연중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석모도, 무의도, 교동도 등 인근 섬들과 연결되는 연륙교까지 놓이면서 예전보다 풍성한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강화도는 제주, 거제도, 진도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섬이다. 김포반도의 일부였으나 바다와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육지에서 떨어져 나와 섬이 됐다. 주변에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여러 강을 끼고 있는 강 아랫고을이란 뜻으로 ‘강하’(江下) 라고 불리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江華)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경 처음 ‘강화’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1997년 개통된 강화대교와 2002년 건립된 초지대교를 건너는 방법이다. 강화대교는 강화도 갑곶리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사이에 놓인 다리로 강화읍과 강화읍성,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일대를 여행하기에 용이하다. 강화군 초지리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잇는 초지대교를 건너면 마니산과 정족산, 전등사, 초지진 등을 먼저 만나게 된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모든 역사의 전 과정을 백업받아 놓은 파일 저장소 같은 섬이다. 단군 신화에서부터 선사시대와 대몽항전, 신미양요, 개항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증명하는 유적지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섬은 단연 강화도가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난을 피해 쫒겨온 왕조나 몰락한 권력자나 벼슬아치들이 잠시 머무른 피난처 또는 유배지의 역사이고 침략세력을 끝까지 막아내지 못한 수탈의 현장이었기에 슬프고도 쓸쓸하다. 몽고군이 침략하자 고려는 수도를 강화로 옮겨 39년 동안 대몽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원나라에 투항하고 개성으로 환궁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강화도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했다. 화친이라는 명분 아래 이뤄진 치욕스런 항복이었으니 고려왕조와 민중들의 한이 서린 섬이 강화도이다. 한 많은 고려왕조의 네 명의 왕실 사람들의 묘와 고려시대 최고의 문인으로 꼽히는 이규보의 묘가 강화도에 남아 있다. 몽고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민중들의 염원과 불심으로 완성된 위대한 ‘고려 팔만대장경’의 16년에 걸친 판각작업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이뤄졌고 1399년(조선 태조 8년)에 경남 합천 해인사로 옮긴 것이다. 1866년 프랑스 극동함대가 자국 선교사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를 이유로 강화도로 쳐들어왔으나 정족산성에서 막아냈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강화도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이 미국 해군과 격전을 치렀다. 1876년에는 조선과 일본의 강화조약(병자년 조일수호조규)이 체결돼 강제적인 개항이 이뤄졌다. 이런 비운의 역사를 앞서 맞은 게 강화도다. 그런가하면 조선시대에 강화도는 높으신 양반들의 단골 귀양지였다. 25대 철종이 되는 이원범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였고, 연산군은 인근 교동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 묘는 서울 방학동에 있다. 철종을 모신 예릉(睿陵)은 경기도 고양에 있다.강화도 정족산에는 단군의 세 명의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정족산성)이 있다. 마니산에는 단군께 제사를 지낸 참성단이 있으니 강화도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건국 신화에서부터 조선의 멸망까지 우리 민족의 전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강화도에서 일어났고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도를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부를 만한 이유다. 강화 여행은 바다와 산의 풍광을 즐기면서 나무와 풀, 길과 바람이 들려주는 역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답하는 ‘역사와의 대화’에 다름 아니다. 시대별 혹은 주제별로 꼼꼼 여행 강화도 여행은 크게 단군신화가 깃든 마니산과 참성단, 정족산성과 전등사 일대, 강화읍과 강화읍성 및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철종의 잠저 용흥궁, 고려궁지 일대 및 젓갈시장으로 유명한 강화 외포리선착장과 최근 연륙교로 인해 육지가 된 석모도 일대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거리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볼거리가 많아 시간 안배를 잘 해야 한다. 강화도에는 시기를 달리하는 유적들이 섬 전역에 산재해 시대별로 구분해 여행 계획을 짜 볼 수 있다. 또는 성지순례, 근대문화 등 테마별로 짜보는 것도 좋다.고려궁지와 외규장각 의궤 용흥궁공원 일대에는 고려궁지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진무영 순교성지 등이 집중 분포되어 있고 최근 핫한 옛 조양방직 건물을 개조한 카페도 멀지 않다. 용흥궁공원에서 북문로를 따라 언덕 끝까지 가면 고려궁지가 있다. 강화도는 대몽고 항전시기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1232년(고종 19년) 강화도로 천도했고, 1234년 최우는 20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궁궐을 지었다. 규모는 개경의 궁궐보다는 작지만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1270년 고려는 몽고와 화친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 때 몽고의 요구에 따라 강화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했다. 조선시대에 고려궁지에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신 봉선전과 조선 행궁(1631) 및 유수부 동헌, 이방청(1654)과 왕의 영정을 봉안하는 장녕전(1695)과 만녕전(1713), 외규장각 등이 차례로 건립됐다. 정조 때 지어진 외규장각(1781~1782)에는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절차와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해 총 1000여권의 서적이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의궤 191종 297권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해갔고 건물까지 불태웠다. 1964년 고려궁지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1970년대 이후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강화 동종 및 외규장각 건물이 복원됐다. 2011년 프랑스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 290여권이 모두 한국에 반환되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서지학자 고 박병선 박사의 끈질긴 노력과 집념이 이루어 낸 쾌거였다.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박 박사는 1975년 프랑스 도서관 촉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알게 돼, 도서 목록을 한국 정부에 알리는 등 끈질기게 환수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정부에 반환을 요청했다. 마침내 1866년 약탈당한 지 145년, 소재 파악이 된 지 36년, 환수 협상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 300여 권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박병선 박사는 의궤가 반환되던 해 프랑스에서 별세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국적기에 실려 태극기와 함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러나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5년마다 임대하는 방식이라고 하니 여전히 의궤 반환은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03년 복원된 외규장각 안에는 의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영조 임금의 혼례식 행차 등을 재현해놨다. 진무영 순교성지, 대한성공회강화성당 & 용흥궁고려궁지에서 북문로를 따라 내려오면 진무영 순교성지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조금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 강화도에는 갑곶순교지, 제물진두 등 천주교 순교지와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진무영(鎭撫營)은 해안경비를 담당하던 군영이었으나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진무영 순교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 리델(1830~1884)을 중국으로 탈출시켜 준 죄로 진무영에서 처형당한 평신도 두 명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됐다. 그러나 당시 처형이 이루어졌던 정확한 지점을 찾을 수가 없어 진무영과 가까운 천주교 강화성당(성공회 강화성당과 다름) 내에 조성하였다. 진무영에서 처형당한 천주교 신자들은 이들 두 명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화성당에서 용흥궁공원쪽으로 내려오면 1900년 한국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프(John Corfe)가 건립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1896년(고종 33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강화도에서 성공회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건립했다.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으로도 불리며 한국의 건축양식과 서양건축 양식을 절충한 독특한 건물 양식 때문에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다. 성당 건축에 백두산 참나무가 사용됐고 경복궁 복원 공사에 참여했던 목수들이 건축을 맡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한옥성당으로 얼핏 보면 성당이 아니라 작은 궁궐이나 사찰 느낌이 많이 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기독교적 요소들이 묻어난다. 팔작 지붕 꼭대기에는 궁궐 지붕 양식에 쓰였던 잡상(雜像)과 비슷한 조형물이 장식돼 있고 꼭대기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또 중문과 외벽 및 창문 등에 태극 문양과 십자가 문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기독교가 조선민중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이 성당 건축에서도 엿보인다. 이 성당 맞은 편에는 조선 25대 왕인 철종의 잠저(潛邸)인 용흥궁이 있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 즉위 이후 강화유수가 크게 중건했다. ‘용흥궁’(龍興宮)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원범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조선 25대 철종임금이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장조)의 증손으로 헌종과는 7촌간이다. 헌종은 정실(정조의 증손자)이었으나 철종은 사도세자와 후궁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원군의 손자였다. 은언군의 동생 은신군의 손자가 흥선대원군이니 철종과 대원군은 6촌지간이다.철종이 왕이 되지 못했다면 강화도에서 한낱 촌부로 삶을 마감했거나 다른 왕손들처럼 역모에 엮여 처형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긴 했어도 권문세가에 휘둘리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요절했다. 용흥궁에서 나오면 높이 솟은 원통 모양의 굴뚝이 보인다. ‘심도직물터’이다. 1947년 설립된 심도직물은 노동자 1200여명을 거느린 국내 최대 방직공장이었으나 시장에서 도태되면서 2005년도에 문을 닫았는다. 과거 심도직물터에 용흥궁공원이 조성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굴뚝의 일부를 남겨 놓았다. 1968년에 발생한 ‘심도직물 노조 사건’은 천주교의 노동운동 개입 및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천주교 강화성당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 조직을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천주교가 앞장 선 것을 기념하는 ‘노동사목’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가하면 1km 거리에 1933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근대식 방직공장인 조양방직 공장이 있다. 현재는 카페로 개조돼 운영되고 있다. 대로변 비각 안의 비석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대항해 자결한 김상용을 기리는 ‘김상용순절비’이다. 인조 때 문신인 김상용은 강화도가 함락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남문루에 올라 화약을 쌓아 놓고 불을 붙여 자결하였다고 한다. 남문터에 있던 비를 옮기던 중 숙종 때 세워진 구비가 발견되어 신구비 2개를 나란히 세웠다. 국난이 있을 때마다 비석이 눈물을 흘리듯 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용흥궁 일대 여행을 마쳤으면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 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다. 고려 최고의 문인인 이규보 묘 … 무신정권 하에서 ‘어용’ 소리 듣기도 정족산성으로 가는 길목인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는 선원사지와 고려시대 문신이자 문인인 이규보 묘역이 있다. 선원사는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사찰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이규보 묘역에는 묘와 사당인 유영각 및 재실이 나란히 조성돼 있다. 묘역에는 봉분과 상석과 석등 및 망주석 한 쌍이 있고 양 옆으로 석인(石人)과 석양(石羊)이 각각 한 쌍씩 놓여 있다. 석물들의 규모가 무척 아담하다.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쪽으로는 강화의 너른 논들이 펼쳐진다. 참 아늑한 명당자리다. 여주 이씨인 이규보(1168~1241)은 고려 최씨 무신정권 시대의 문신이자 걸출한 문인이다.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오른 이규보는 현실 정치에서는 고려 무신정권에 아첨한 어용지식이라는 비난과 함께 중세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문인이라는 찬사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생선전’ 등 55권의 유작을 남겼다. 이규보 묘 뒤편 소나무 숲 길로 들어서면 강화나들길 3코스 고려왕릉길로 접어들게된다. 고려왕릉인 곤릉, 석릉, 가릉을 차례로 만날 수 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전등사로 향한다. 조선왕조실록 지킨 정족산성과 우리나라 최고(最古) 사찰 전등사 해발 220m 정족산(鼎足山)은 생김새가 세 발 달린 가마솥을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가졌다. 산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이 지금의 정족산성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된 전등사(傳燈寺)는 국내 최고의 사찰로 정족산 기슭에 이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 160여 명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동문 쪽에 이를 기념하는 양현수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산성에는 남문, 동문, 서문, 북문지가 있다. 성 안에 1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문과 1976년 복원된 남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남문에는 ‘종해루’(宗海樓)라는 누각이 세워져 있어 동문보다 훨씬 운치가 있다. 남문으로 들어서서 노거수가 울창한 숲 길을 따라 10여분 정도 오르면 전등사이다. 성벽을 따라 걸을 수도 있다. 이 절엔 특이하게도 일주문과 사천왕이 없다. 마치 남문이 전등사의 일주문 같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지어졌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등사 대웅보전과 약사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물 중 으뜸으로 꼽힌다. 대웅보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고개를 들어 대웅보전의 처마 모서리를 올려다보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부가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나부상’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고 있는 중이다.사연은 이렇다. 대웅보전 중건에 참여한 도편수는 주막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는 여인과 결혼 약속까지 하고 자신이 받은 공사비를 여인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돈을 가지고 다른 남자와 그만 달아나 버린 것이다. 도편수는 배신감에 떨면서 한동안 공사도 중단했다. 겨우 정신은 차렸지만 여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여인을 나부상으로 만들어 영원토록 지붕을 떠받치게 하는 나름대로의 형벌을 내린 것이다. 중생을 계도하고 온 천하에 자비를 베풀기 위해 오신 부처님의 집에 나부상이라니 어쩐지 조금 불경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도편수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는 것 또한 인지상정인가보다. 전등사를 찾는 사람은 모두 한 번씩은 고개를 들어 나부상을 쳐다본다. 여인의 형벌은 무거운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것이 더 큰 형벌일지도 모르겠다. 보물 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은 특이하게도 무쇠로 만들었다. 1097년(고려 숙종 2년)에 중국 송나라에서 제작돼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에 있던 종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중국에서 제작된 유일한 철제종이다. 어떤 사연으로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왔을까.정확한 연유는 파악되지 않지만 일설을 정리하면 세계2차대전 당시 일제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강탈해왔는데 그 와중에 쓸려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무기로 만들어지기 전에 일제가 패망하여 부평 군기창에서 쌓여 있는 것을 불심이 깊은 신자가 전등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용 두 마리가 고리 모양으로 엉켜있고 고리 아래 쪽에 8쾌와 16엽의 연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종의 몸통은 이등분돼 각각 여덟개의 사각형이 그려져 있고 각각의 면에는 명문과 문양을 새겼다. 종의 재질이나 형태가 우리나라의 종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쇠로 만들었는데도 조각 솜씨가 세밀하고, 소리 또한 무척이나 청아하다고 한다. 전등사 명부전 쪽으로 50m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가 복원돼 있다. 조선 왕조 472년의 역사를 기술한 ‘조선왕조실록’은 강화도 정족산 사고에서 지켜졌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심하게 파손돼 방치돼 있던 것을 1998년 복원하고 현판을 새로 달았다. 사고 건물은 꽁꽁 닫혀 있어 담장 너머 눈동냥으로 내부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날씨가 좋으면 사고에서 강화 앞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져 사고는 비어 있지만 역사적 의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기록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었다. 연월일 단위로 그날 있었던 일을 작성하는 편년체 형식의 조선왕조실록을 내사고인 춘추관과 성주, 충주, 전주 등 3개의 외사고 등 모두 네 개의 사고에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분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거나 파손되었다. 선조 39년(1606) 4월 복원작업을 완료해 5부의 실록을 제작했다. 원본인 전주 사고분은 마니산 사고에, 나머진 네 부 중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에는 신인본을, 오대산사고에는 교정본을 봉인했다. 전주 사고본은 묘향산과 마니산으로 옮겨졌다가 현종 1년(1660)에 정족산 사고를 짓고 장사각과 선원각에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로 옮겨졌고 1930년대 일본 경성제국대학 등으로 반출됐다가 1945년 이후 서울대 규장각에 반환되어 보관 중이다. 춘추관본은 불에 타 없어졌으며, 오대산본은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47책만 2006년에 반환돼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강화도에는 이밖에 조선시대에 군사 요지로 쌓은 5진, 7보, 54돈대 가운데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곶돈대 등이 남아 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도 많아 전북 고창, 전남 화순과 함께 강화도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은 고조선 시대인 기원전 51년에 단군왕검이 봄과 가을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으로 알려져 있다. 마니산은 백두산 천지와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의 중간에 위치한 상징성을 갖고 있어 지금도 전국체육대회 성화가 이곳에서 피워지고 있다.
2021-02-26 14:29:48
37번 국도를 따라 포천 내촌을 지나니 하얀 떡줄기 같은 베어스타운 스키장의 활주로가 보인다. 시원하게 활강하는 스키어들의 자유로운 몸놀림을 보니 코로나19로 인한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것 같다. 내촌면을 지나 가평군 조종면(옛 하면)으로 들어섰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가평의 산하는 눈가루를 뿌려 놓은 듯 하얗다. 가평군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에 속하지만 강원도 홍천, 화천, 양구, 춘천 등 강원도 쪽으로 치우친 지리적 위치 때문에 강원도 같은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곳이다. 실제로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특성 역시 강원도권에 가깝다. 게다가 가평군은 화악산, 강씨봉, 운악산, 유명산, 호명산, 연인산, 칼봉산 등 동서남북으로 산들에 에워쌓여 있다. 교통망 역시 북한강 유역(가평읍, 청평면)을 중심으로 동서쪽으로 치우쳐 발달하여 가평군의 북서쪽은 강원도 산간 못지 않은 ‘오지’의 느낌이 강하게 든다. 드는 곳이다. 가평군의 면적이 서울의 1.4배에 달하면서도 인구는 0.6%인 약 7만여 명에 불과하다는 게 이를 다시 한번 입증해준다.그럼에도 많은 이들에게 가평은 풋풋함과 싱그러움이 가득했던 젊은 시절의 한 때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과 낭만의 고장이다. 경춘선 비둘기호를 타고 내린 대성리역에는 첫 대학생 MT의 설레임이 녹아 있고, 청평호의 일렁임에는 첫 데이트의 떨림이 녹아 있다. 가평은 영원한 청춘의 도시이다. 북한강변 따라 청평호반·대성리 감성 여행 소환가평이 ‘낭만과 사랑의 도시’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수 정태춘의 노랫말처럼 ‘산과 새들이 노래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새벽 안개속으로 달려가는 북한강’이 있어서일 것이다. 가평군을 동서로 가르며 달리는 북한강은 북한의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다. 철원, 화천, 춘천까지 쉼없이 달려온 북한강은 가평으로 접어 들어서 잠시 숨을 고른 뒤 가평천, 홍천강과 합류해 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번에는 30km를 달려온 조정천과 합류해 남쪽으로 흘러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난다. 장장 300여 km에 달하는 북한강 물줄기는 때로는 홀로, 때로는 수려한 산들과의 합주하며 멋드러진 풍경을 빚어내는데, 구비구비 물줄기를 따라가면 어김없이 가평의 명소를 만나게 된다. 호명산(虎鳴山)과 어우러진 청평호반에는 일년 내내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고, 가을이면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이 열리는 자라섬 테마파크에 내외국 음악인들이 몰려든다. 수상 스키와 레일바이크, 짚와이어 등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는 북한강변은 분명 ‘가평 감성여행 1번지’라고 할 수 있다. 별, 꽃, 어린왕자를 테마로 꾸며진 ‘쁘띠 프랑스’ 마을(청평면 고성리)과 스위스의 작은 마을들을 모티브로 한 ‘에델바이스 스위스 테마파크’(설악면 이천리)에서는 비행기를 타는 수고로움 없이도 이국적인 유럽 감성을 느껴볼 수 있다. 전통한옥과 돌담으로 꾸며진 취옹예술관(상면 행현리)에서는 천연염색, 다도, 우리탈 만들기, 판소리 등 우리의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남이섬은 최고의 가족 여행지이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다. 아름다운 숲과 공원으로 꾸며져 있어 어린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시원하게 뻗은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은 남이섬 최고의 포토존이다. 각종 드라마와 CF촬영지로 소개되면서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곳이다. 2010년 12월 세계에서 14번째, 한국에서는 최초로 유니세프 어린이 친화공원으로 선정되었다. 가평군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5분 정도 들어가야 한다. 남이섬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빙하리에 속한다. 남이장군의 묘소가 있어 남이섬으로 불리지만 실제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2리 야산에 위치해 있다.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 기 있었는데, 정확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고 다만 그가 이 섬에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전해져왔다. 유자광의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만큼 이 돌을 함부로 가져가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구전돼 왔다. 1971년에 비봉면 묘역 정화작업이 이뤄졌는데 무인인데도 문인석이 마련된 것은 문관 중시의 풍토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이장군의 사당은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 106번지 아파트 촌에 있다. 충무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1983년부터 사당제가 복원돼 당굿이 벌어진다. 예부터 원력이 강한 인물은 당굿을 지냈는데 김유신(흥무대왕) 사당도 용산구 보광동에 있다. 무인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남이는 겸손함을 지키지 못해 비명횡사하고, 유신은 가야를 잃은 후손으로 신라에 충성해 뜻을 이뤘으니 한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축령산, 남이섬엔 남이장군 애닲은 사연 … 화악산, 운악산, 유명산 등 산세 자랑가평은 산악 전문 시민기자를 따로 모집할 정도로 산이 많은 고장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하다. 곳곳에 기암절벽과 폭포와 소, 암벽이 어우러진 수려한 풍광 덕에 사시사철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가평군 북면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의 경계를 이루는 화악산(華岳山)은 한반도의 정중앙을 관통한다. 전남 여수에서 북한 중강진을 잇는 국토 자오선(동경127도 30분)과 위도 38도선이 교차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가평군 상면과 남양주시 수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축령산(祝靈山)은 사냥을 나온 이 성계가 보고 산세가 웅장하고 신령스러워 산신제를 올리고 이름을 축령산이라 했다고 한다. 조선 세조 때 역모를 꾀한다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거열형에 처해진 남이 장군이 국난에 대비하기 위해 동북방 조망이 좋은 축령산에 자주 올라 지형을 익혔다는 ‘남이 바위’가 있다. 가평군 조종면과 포천시 화현면의 경계를 이루는 운악산(雲岳山) 현등사(懸燈寺) 오르는 길에는 ‘민영환’ 세 글자가 새겨진 암각바위가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되자 이어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기 위해 1906년 내시부지사 나세환 등 12명이 새겼다. 세로로 새겨진 암각문의 길이가 민영환의 키와 같다고 한다. 인근에는 민영환과 최익현, 조병세 등 구한말의 우국지사 3인의 충절을 기리는 삼충단(삼충단)이 있다. 1895년에 조종면이 하면과 상면으로 나뉘었다가 2015년 하면이 조종면으로 개칭됐다. 하면은 상면보다 북쪽에 있는데 상면이 서울에 보다 가깝기 때문에 상면이라 지었다하니 예나 지금이나 행정수도 지향적인 관점은 여전하다.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고 세조의 막내 동생 영응대군 모신 원당, 현등사 천하의 절경을 자랑하는 산이 고찰하나 품고 있지 못하다면 향기 없는 꽃처럼 감동이 없다. 명지산은 나한도량 대원사를, 축령산은 백련사를 품었다. 근래에 세워진 두 사찰은 템플스테이로 유명한 단아한 사찰이다. 2006년 전통사찰로 지정된 대원사에는 신라말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비로자나불상’이 있다.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상과 조성 연대가 비슷해 비교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 운악산 중턱에 위치한 현등사는 1772년에 쓰여진 ‘운악산 현등사 사적기’란 책에 따르면 법흥왕 27년 540년에 인도 승려 마라가미(摩羅訶彌)를 위해 지어준 사찰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우리나라 중부지방에 지어진 최초의 적멸보궁이다. 고려 희종 6년(1210년) 보조국사 지눌의 꿈에 등불이 자주 보여 운악산을 방문하니 관음전으로 추정되는 건물 앞 석대에 걸린 옥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에 절을 크게 짓고 등을 내건다는 의미의 현등사라 이름지었다. 그 후 수 백년 동안 폐사지였던 현등사는 조선 태종11년(1411) 함허대사가 중창하고 조선 왕실의 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 李琰, 세종의 8남, 세조의 동생)의 위패를 모신 원당을 지었다. 1823년 승려 취윤과 원빈이 불사를 일으켜 이름난 대목장 축견을 초빙해 1824년에 동·서루, 보광전 등 80여칸을 세웠다. 그러나 현등사는 6.25전쟁으로 완전히 전소되었으니 애석할 뿐이다. 1962년 이후 여러 차례의 불사를 통해 공양간과 종무소(1975), 보광전(1988), 일주문, 불이문(2007), 만월보전, 영산보전, 적멸보궁(2007)이 지어지면서 현재에 이른다. 주전각인 극락전이며 지장전을 갖추고 있다.현등사는 산비탈을 깎고 돌로 축대를 쌓아 터를 평평히 고른 후 절을 앉힌 모양새라 절터가 몹시 협소하고 기본적인 사찰의 전각 배치와도 많이 차이가 난다. 보물 1793호로 지정된 동종을 비롯해 현등사 3층 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 현등사 지진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불상 2점 (아미타좌상, 청동지장보살좌상), 불화 7점 등 경기 지정 문화재 12점을 소장하고 있다. 등산객의 발걸음뿐만 아니라 굴뚝의 연기까지 끊어진 등산로는 썰렁했지만 잔설로 뒤덮힌 겨울 운악의 정취는 그지없이 고요하고 맑다. 운악산 일주문에서 현등사 경내까지는 걸어서 30분은 족히 올라야 한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걷는 눈맛과 발맛을 포기한다면 임도를 통해 10분 이내에 도착할 수도 있다.일주문과 현등사 중간쯤 산비탈에 불이문이 서 있다. 불이문을 통해 108계단을 오르면 선원과 현등사 ‘하판리지진탑’과 먼저 인사를 나누게 된다. 높은 축대 위에 어딘지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진탑은 옥등의 불빛을 따라 운악산에 도착한 보조국사 지눌이 땅의 기운을 진정시키고자 세웠다고 전한다. 파손돼 방치돼 있던 돌을 쌓아 올렸기에 탑의 조형미를 감상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그 대신 보조국사의 향이 남아 있다. 하판리 지진탑의 계단을 오르면 현등사 3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향나무가 3층 석탑의 운치를 더하며, 향나무에 걸린 붉은색 연등은 그 옛날 석대에 걸려 있던 옥등을 떠올리게 한다. 현등사 3층석탑은 1470년(성종1년) 세종대왕의 8남인 영웅대군의 부인 송씨가 고려시대 석탑을 고쳐짓고 부처님의 사리 5과를 넣어 조성한 탑이다. 원통형 사리함의 명문에는 ‘1470년 원당인 현충사 3층석탑을 고쳐 짓고 사리 5매를 봉안했으며 대시주는 대방부인인 송씨와 그의 딸 길안현주 이억천(吉安縣主 李億千), 절충장군 중추부첨지사 구수영(具壽永)이다’라고 적혀 있다. 도난당했다가 2006년 삼성문화재단으로부터 회수해 온 것이다. 이억천은 영응대군의 딸이며, 그의 남편이 구수영이다. 대방부인 송씨는 이염의 부인이자 이억천의 어머니다. 사리함이 발견되면서 ‘보조국사가 고려시대에 조성했을 것’이란 탑설은 말끔히 정리됐다. 탑신에 새겨진 사각 문양과 덮개돌의 연화문양과 위로 올라간 덮개돌 모서리가 아름답다. 3층 석탑 옆에는 극락전과 지장전 보광전 등이 좁은 터에 사이좋게 어울려 있다. 극락전에는 3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와 장엄구가 봉안되어 있다. 법당 한 구석에 보물로 지정된 ‘현등사 동종(보물 1793호)’이 있다. 광해군 11년(1619)에 제작된 현등사 동종은 전체 높이 77cm, 지름 59cm로 일반적인 동종에 비해 작은 편이다. 남양주 봉선사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현등사로 옮겨왔다고 알려져 있다. 범종각이 아닌 극락전에서 의식용으로 사용된다. 또 극락전 마당에는 현등사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옥등이 걸려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석대가 놓여 있다.극락전 건너편 지장전에는 높이 54.5 cm의 자그마한 청동지장보살좌상이 봉안돼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며 머리에 두건을 쓴 피모지장보살은 1790년 지장암 봉안을 위해 제작한 불상으로 당시 뛰어난 조각승이었던 관허당 설훈, 용봉당 경천이 조각했다. 지장전 옆에 현등사 범종이 종루나 종각도 없이 흙바닥에 놓여 있다. 만월보전과 영산보전 옆으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작은 암봉 위에 한 칸 짜리 전각으로 지어진 ‘현등사 적멸보궁’이 있다. 불상 대신 작은 연꽃 모양의 사리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진신사리가 곧 부처님이기 때문에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다. 가평 8경1988년 가평군은 가평군을 홍보할 목적으로 군내 빼어난 절경 가운데 지역민들의 의견을 모아 가평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가평팔경’으로 지정했다. 제1경 청평호반(淸平湖畔) & 제2경 호명호수(虎鳴湖水)해발 800m의 호명산과 어우러진 청평호반과 호명산 정상에 펼쳐진 호명호수가 가평 1, 2경으로 꼽힌다. 1944년 청평댐의 건설로 만들어진 인공호수 청평호수는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호명호수는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양수식 발전소의 상부 저수지이다. 호명산의 수려한 산세와 어우러진 넓은 저수지는 백두산 천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호수의 면적은 4만5000㎡, 둘레는 1.7km에 달한다. 정상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되나 겨울철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경춘선 상천역에서 하차해 등산로로 호명호수까지 오를 수 있다. 수령 30~40년의 잣나무숲 겨울 정취가 그만이다. 제3경 용추구곡(龍湫九谷)해발 900m의 칼봉산에서 발원하여 옥녀봉을 감싸듯이 흐르는 24km구간의 계곡에 펼쳐지는 9개의 절경지를 일컬어 용추구곡이라 한다. 와룡추, 무송암, 고실탄, 일사대, 추월담, 권유연, 농완계 등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풍광은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 오르며 만들어 놓은 듯 아름답다. 용추계곡은 수도권 내에서 유일하게 생태계가 파괴되지 않은 청정계곡이다. 제4경 명지단풍(明智丹楓) 북면과 조종면에 걸쳐 잇는 해발 1267m 명지산(明智山)은 수림과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곳곳에 절경이 펼쳐진다. 가을이면 붉디 붉은 명지산 단풍과 수백년 묵은 고목과 기암괴석, 폭포와 소와 어우러진 모습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도 아름답다. 제5경 적목용소(赤木龍沼)도마치계곡(적목용소)에는 마치 하늘 위를 걷는 듯 천상의 풍경이 물결처럼 펼쳐진다. 환경부가 인정한 경기도내 유일 청정지역으로 1급수에만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열목어가 서식한다. 용소는 승천하는 용이 떨어져서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제6경 운악망경(雲岳望景) 해발 935m의 운악산 정상(서봉)에서 약간 못 미치는 곳이 주봉인 망경대(望景臺)다. 탁 트인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하다.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다. 오르는 길에 운악사와 궁예성터를 들를 수 있다. 제7경 축령백림(祝靈柏林) 해발 879m 미터 축령산 기슭에 조성된 경기도 소유의 잣씨 채종림으로 1960~1970년대에 화전민이 살았던 곳에 조성된 잣나무 숲이다. 4.358㎢ 면적에 30~50년생 아름드리 잣나무 4만6000여 주가 심어져 있다. 우리나라 잣의 40%가 가평에서 생산된다. 제8경 유명농계(有明弄溪)해발 864m 가평군 설악면과 양평군 옥천면의 경계에 있는 유명산(有明山) 계곡을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계류는 수정처럼 맑고 투명하다. 계곡 곳곳에 형성된 박쥐소, 용소, 마당소 등이 절경을 이룬다. 유명산의 원래 이름은 일대에서 말을 기른다 하여 마유산(馬遊山)이었다. 산림청이 1989년 국내 최초로 개장한 유명산 자연휴양림이 운영되고 있다.
2021-02-05 17:49:58
경기도 연천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흐른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곳곳에 철조망과 방호벽이 보이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지뢰’ 표지판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어디서 총을 든 군인들에게 막혀 길을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일부 지역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다.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가 만들어낸 오늘날 연천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연천의 전부가 아니다. 연천의 참모습은 비극적인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걷어내야 비로소 보인다. 연천의 자연은 아름답고 대지는 풍요롭다. 동쪽으로는 고대산, 보개산, 화인봉, 향로봉, 종자산이 펼쳐지고 남쪽은 감악산, 마차산, 종현산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으며, 함경남도 두류산에서 발원한 임진강과 강원도 평강군 장암산에서 발원한 한탄강이 유유히 흐르며 천혜의 비경을 만든다. 고대산 동남쪽이 철원의 금학산, 서쪽이 대광봉이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량, 적절한 일조량으로 쌀농사, 인삼농사가 발달한 연천평야는 철원과 함께 중부지방의 최대 곡창지대였다. 서해로 흘러가는 임진강과 한탄강 줄기를 따라 형성된 포구들 덕에 6.25 이전 한강 이북의 최대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런가하면 연천 지역에는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다수 남아 있다. 한반도 최초의 구석기 인류인 ‘호모에렉투스’의 거주지로 밝혀진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는 기존 뫼비우스 학설(유럽인 사학자가 뫼비우스가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유럽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을 깨는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와 같은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가 발견된 프랑스 아슐성에서 유래) 구석기 유물이 3000여점 이상 출토된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지이다. 또한 연천은 31기의 고인돌과 다수의 돌무지 무덤이 발견되는 등 한반도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줄 단초가 되는 지역이다. 어디 그뿐이랴. 연천의 임진강 유역은 신라, 고구려, 백제가 치열하게 뺏고 빼앗기는 숨막히는 역사의 격전지이자 중세 고려 500년 역사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개성)와 인접한 곳으로 다양한 층위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고고학의 현장이기도 하다. 더욱이 한탄강 유역은 국내 유일의 내륙형 주상절리와 협곡이 발달한 지역으로 그 희귀성과 지질학적 가치가 인정돼 2020년 7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더불어 재인폭포, 아우라지베개용암, 좌상바위 등 연천의 대표적인 지질명소가 한탄강 유역의 26개 지질문화명소로 선정됐다. 연천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역사문화적, 고고학적, 지질학적 유산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럼에도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군사도시라는 선입견 때문에 여전히 다듬어 지지 않은 원석 상태로 남아 있다. 불행일까 아니면 오히려 다행일까. 임진강변 고구려성 ‘호로고루’ … 과거엔 치열한 접전지, 지금은 사계가 아름다운 풍광 1400여 년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고대국가의 유적을 만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남한 지역에서 몇 안 되는 고구려 유적이라 더욱 그렇다. 연천 임진강 유역에는 6세기 중엽 신라군에 밀려 임진강 유역까지 후퇴한 고구려가 임진강을 따라 쌓은 10여 개의 성 가운데 호로고루성를 비롯해 은대리성, 당포성 등 3개의 성이 복원돼 있다. 이들 3개 성은 모두 임진강 북안(北岸) 현무암 절벽 위에 세워진 평지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호로고루가 위치한 연천 장남면은 파주 적성면과 맞닿아 있다. 파주 적성 전통시장을 지나 장남교만 건너면 ‘인삼의 고장 장남면’이라 적힌 기념탑이 위풍당당하게 방문객을 반긴다. 장남면의 또 다른 축은 고려인삼의 원산지격인 북한 황해북도(2003년 6월까지 개성특별시 소속) 장풍군과 맞닿아 있으며 토양과 기후가 같아 역시나 인삼이 유명하다. 장남면 들녘에는 그늘막이 세워진 인삼밭이 끝없이 어어지는데 이 역시 초행길인 여행자에게는 매우 이색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장남면 들녘을 가로지르면 텅빈 논밭 너머로 얕으막한 구릉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호로고루의 첫인상은 성이라기보다는 농한기에 들판에 길게 누워 쉬고 있는 소를 연상시킨다. 고구려군이 당나라군을 맞이해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호로고루는 강가에 위치한 조금 높게 솟은 언덕처럼 보일 뿐 어디서도 과거 치열한 접전지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호로고루란 명칭은 과거 이 지역이 임진강을 뜻하는 ‘호로하(瓠蘆河)’ ‘표하’ 로 불린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을을 의미하는 ‘홀’과 성을 뜻하는 ‘고루’가 합해져서 생겼다는 설이 있다. 호로고루 인근 지역은 육로로 평양과 한양을 잇는 최단 지역으로, 수심이 낮은 여울목이 지나고 있어 걸어서도 강을 건너는 것이 가능했다. 때문에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물자나 대규모 병사들의 이동이 가능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한 삼국의 각축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이 지역에서 삼국이 자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지역은 원래는 백제 땅이었으나 4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군에 밀려 임진강 유역까지 후퇴한 고구려는 임진강을 따라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보루, 덕진산성 등 10여 개의 성을 쌓는 등 최남단 방어선을 구축하고 120여 년간 신라와 대치했다. 나당 연합군에 평양성이 함락된 후 고구려 부활군은 호로고루에 집결해 마지막 항전을 했으나 결국 당나라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고구려 병사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갔다. 더러는 신라군에 투항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구려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산성과 달리 평지성인 호로고루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해 쌓은 성이다. 동쪽을 제외한 3면은 15m 높이의 주상절리와 절벽이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됐고, 동쪽 평지에만 폭 40m, 높이 10 m, 길이 90m 성벽을 쌓았다. 암갈색 현무암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높이 10m의 성벽은 위로 가면서 좁아지면서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양쪽에는 낮게 성을 한 겹 더 쌓은 옹벽이 설치돼 있다. 계단을 밟고 성벽 위에 올라서서 주변 지형을 둘러보면 왜 호로고루가 천혜의 자연요새인지 단박에 이해가 된다. 특히 서쪽인 고랑포구쪽에서 조망한 호로고루는 그야말로 아찔한 임진강 절벽 위에 세워진 철옹성이다. 호로고루는 6.25 전쟁으로 북한군이 포를 설치하는 와중에 방치된 성벽이 드러나면서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1991년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산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고구려 유적으로 확인됐다. 이후 2000년부터 총 네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다양한 문양의 붉은색 고구려 기와를 비롯해 토기와 토제 및 동물뼈와 탄화곡물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호로고루에서는 남한 지역의 고구려 유적들 중 가장 많은 기와가 나와 ‘고구려기와의 보고’로 불린다. 이밖에 주둥이가 뾰족한 호랑이 모양의 휴대용 남성 소변기인 호자(虎子)와 상고(祥鼓)라고 적힌 악기의 일부분으로 보이는 토기조각, 고구려인 모자 형태의 토기 등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수 출토됐다. 호로고루 입구에 설치된 홍보관에 들러 호로고루의 발굴 과정과 출토유물에 대한 설명을 참조하면 관람에 도움이 된다. 호로고루의 사계는 변화무쌍하다. 봄에는 청록색의 청보리가 일렁이고, 9월이면 수 만송이의 해바라기가 일렁이는 ‘통일바라기 축제’가 열린다. 새하얀 눈에 뒤덮힌 겨울 풍경과 호로고루 위에서 바라보는 임진강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 노을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깜깜한 밤 호로고루성 위로 궤적을 그리며 지나는 별들의 향연은 기회가 된다면 꼭 감상해야 할 것이다. 문득 텅 빈 대지 위에서 먼 과거의 시간과 마주하고 싶은 날 이곳 호로고루로 달려오면 된다. 호로고루와 똑닮은 당포성 … ‘폐허미’와 한탄강 수직 주상절리의 공존 호로고루에서 동쪽으로 14km 떨어진 임진강 남안(南岸)에 호로고루와 똑닮은 고구려 당포성이 있다. 당포나루로 흘러 들어오는 당개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절벽 위에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평면 대지에 세워진 당포성은 입지 조건과 평면 형태, 축성 방법 등이 호로고루와 쌍둥이처럼 닮은 전형적인 고구려성이다. 당포성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진입로인 삼화대교 위이다. 삼화대교에 서면 임진강 너머로 주상절리 절벽 위에 서 있는 당포성의 한 눈에 들어온다. 성 아래 길게 펼쳐지는 주상절리와 황톳빛 임진강물, 우거진 수풀에서 전운이 감도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호로고루보다 찾는 이가 적은 당포성은 폐허의 적막감이 감돈다. 성 위에 홀로 선 휘어진 나무 한 그루가 옛 성터의 쓸쓸함을 더하고, 해질녘 나무 위로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당포성은 복원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와 훼손이 심하고 붕괴의 위험까지 있어 흙을 덮고 그 위에 잔디를 식재해 성을 보호하고 있다. 동쪽 귀퉁이에 새로 쌓은 동벽을 통해 성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동쪽 성벽의 길이는 200m, 전체 둘레는 450m, 높이 6m 정도로 추정된다. 성벽은 안쪽에 흙을 먼저 다져 쌓은 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을 다듬어서 얹혔다. 우리가 보는 동벽은 최근에 다시 복원한 것으로 자로 맞춘 듯 돌의 크기도 일정하고 정돈돼 있다. 당포성은 2020년 한탄강 유역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과 함께 지정된 한탄강 지질문화명소 26곳 중 한 곳이다. 당포성 및 임진강변 아래의 주상절리는 수직과 방사상으로 발달했고, 하천의 침식으로 생긴 하식동굴이 많다. 또한 이곳은 화산의 진원지에서 용암이 가장 멀리까지 흘러온 지역으로 현무암층의 두께가 상류에 비해 얇아진 모습을 보인다. 전곡읍 연천군 보건소 뒤의 ‘은대리성’ … 고구려 남진 후방 거점기지 추정 은대리성은 하천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쌓은 성이다. 이곳은 옛부터 서울과 원산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되는 등 육로와 수로 어느 쪽이든 주변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전곡읍의 연천군보건소 뒤편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서면 성 좌측으로 깎아지른 임진강 절벽 북안 안쪽으로 평지의 은대리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성이라기보다는 동네 사람들의 놀이터 같다. 은대리성은 성벽 전면에 펼쳐지는 성곽의 규모가 한눈에 봐도 앞서 두 성과 비교해 가장 크다. 성의 둘레가 약 1km에 달하며 외성과 내성의 이중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탄강과 차탄천이 만나면서 형성된 여울목의 요충지를 통제하는 방어 진지와 고구려 남진 시기 후방의 거점 기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에서 배수 처리를 위한 구(溝) 시설이 확인됐고, 고구려 시대의 토기들이 다량 출토됐었다. 발굴된 토기로 편년(編年)하면 5세기 이후 3개성 가운데 가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계 유물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 폐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변 신라 유적지 … 망국의 ‘경순왕릉’ … ‘이역만리’ 구천을 헤매 호로고루에서 임진강변을 따라 고랑포 역사공원 쪽으로 10여분 정도 달리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이 있다. 연천의 장단면 끝자락 고량포구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구릉에 조성된 경순왕릉 주변에는 곳곳에 ‘지뢰조심’ 푯말이 붙어 있고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어 긴장감이 느껴진다. 견훤에게 시해당한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935년 10월 두 아들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태조에게 국서를 보내 투항했다.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고 경주의 찬란한 문화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이에 반대한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둘째 아들은 화엄사로 들어가 중이 됐다. 경순왕은 개경에 머물며 태조의 첫째 딸과 결혼해 정승공으로 봉해졌으며, 경주로 이름을 바꾼 신라를 식읍으로 받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됐다. 978년 경순왕이 개성에서 생을 마감하자 유족들과 유민들은 그의 능을 경주에 조성하기 위해 운구하하자 유민들의 반란을 우려한 고려는 ‘왕족의 능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개경에서 80리 떨어진 장단면 고랑포리에 묻히게 됐다. 망국의 왕은 죽어서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구천을 헤매고 있다. 경순왕릉은 임진왜란 후 방치됐다가 영조 23년에 재정비됐다. 한국전쟁 후에 다시 소실될 뻔했으나 한 병사에 의해 수풀 속에 쓰러져 있던 묘비가 발견돼 다시 정비됐다. 경순왕릉에는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봉분 앞에 2기의 석물도 세워져 있다. 경순왕과 관련해 어진 5점이 전하며, 강원도 원주에 영정을 모신 경천묘, 충남 보령에 위패를 모신 경모전이 있다. 고려 태조 등 네 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연천군 미산면에는 고려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숭의전(崇義殿)이 있다. 고래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터에 1397년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게 숭의전의 시초가 됐다. 깎아지른 임진강 절벽 위에 세워진 숭의전은 앞쪽으로 임진강 물결이 유유히 흐르고 보호수로 지정된 500년 된 느티나무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자라고 있다. 조선 태조는 1397년(태조 6년) 역성혁명을 통해 건립된 조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당을 건립해 고려 태조의 위패를 봉안했고, 1399년 태조의 맏아들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게 했다. 세종 7년에는 “나라의 종묘에도 다만 5실을 제사하는데, 전조(고려 왕조)의 사당은 8위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위만 봉향하기 시작했다. 1452년(조선 문종 2년)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를 찾아 부사로 삼아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고려 왕 4위와 고려조의 충신 16명을 배향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개성 왕씨 종친회, 숭의전 보존회 주관으로 봄, 가을 두 차례 봉행되고 있다. 숭의전은 조선시대 네다섯 차례에 걸쳐 개수와 중수를 반복하다가 6.25전쟁으로 전소돼 1971년 재건됐다. 고려 4왕과 16공신의 위패가 모셔진 숭의전 및 배신청(陪臣廳)을 비롯해 이안청, 전사청, 앙암재 등 5동의 건물과 내신문, 외신문, 협문 3동, 운조문 등 6개의 문이 있다. 숭의전에서 청정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변에 초대 숭의전사를 지내던 왕순례의 묘가 있다. 오랫동안 실전됐다가 1988년 도로 확장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작은 봉분과 최근에 세워진 망주석 한 쌍이 놓여 있으며, 묘표 앞면과 뒷면에 쓰여진 문자를 통해 이 묘가 1485년에 조성된 왕순례의 묘임이 밝혀졌다. 왕순례는 고려 제8대 현종의 먼 후손으로 본명은 왕우지이다. 그는 고려 멸망 이후 충남 공주에 숨어 살다가 숭의전 제사를 지낼 후손을 찾았을 때 관에 알려졌으며, 왕명에 따라 ‘순례’라는 이름과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고 숭의전사로 임명됐다. 이밖에 고려의 충신으로 알려진 목은(牧隱) 이색(李穡) 영당(影堂, 사당)이 왕징면 노동리에 있고, 조선 초 문신인 운성부원군 박종우와 태종의 딸 정혜옹주의 합장묘가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에 있다. 청산면 궁평리에는 인조와 귀인 조씨 사이의 둘째 아들인 낙선군 이숙(李潚) 묘, 연천읍 상리에는 원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 묘터가 남아 있다. 이밖에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흘러내려 협곡을 이룬 한탄강변의 주상절리에 낙차가 제법 있는 연천읍 고문리의 재인폭포, 일제 강점기에 만든 터널에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바닥에선 겨울에 고드름이 거꾸로 선다는 연서면 신탄리의 역고드름 터널이 유명하다. 연천 가장 북쪽의 고대산에서는 넓은 정상에서 철원 평야지대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볼 수 있다. 신탄리역에서 출발하는 게 일반적인 등산 코스다. 연천군 전곡읍의 고구려 시대 신답리 고분도 짬이 나면 가볼 만한 곳이다.
2021-01-16 03:57:01
코로나19 3차 대유행으로 요즘엔 여행도 민폐인 시기다. 서울 근교에서 하루이틀 다녀올 만한 곳이 경기도 포천(抱川)이다. 2012년에 착공한 세종포천고속도로의 구리-포천 구간이 2017년 6월 30일 개통돼 서울에서 한결 접근하기 쉬워졌다. 포천의 관광 1 번지 산정호수와 명성산 예부터 지명에 천(川)자가 들어가면 물이 많고 맑은 지역으로, 계곡도 많다. 자연히 높은 영봉도 많다. 의정부에서 43번 국도를 따라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닿는 포천에는 가을이면 억새축제로 유명하다. 궁예의 한이 서린 명성산과 지장산, 아름다운 지질 화석으로 이뤄진 백운산과 왕방산, 등산 꽤나 한다는 사람들이 즐겨찾는 한북정맥의 많은 봉우리 등이 포천에 있다. 한북정맥은 북한 강원도 평강군에서 남서로 흘러내려 파주시 교하읍 장명산에서 종지부를 찍는 약 175km의 산줄기다. 추가령에서 백두대간을 빠져나온 정맥은 휴전선 너머 적근산, 대성산(철원군-화천군의 경계, 1175m)에서 남하해 북주산(철원, 1152m), 광덕산(화천-철원-포천의 경계, 1046m), 백운산(화천-포천 경계, 904m), 국망봉(이하 포천-가평 경계, 1168m), 강씨봉(830m), 청계산(849m), 원통산(567m), 운악산(945m), 국사봉(불정산 641m) 죽엽산(주엽산, 포천-남양주 경계 622m)에 이르러야 포천 구간이 끝난다. 이어 한북정맥은 의정부시 사패산, 서울 도봉산과 북한산, 연세대 뒷산인 노고산을 지나 파주 장명산에서 서운한 여정을 마친다. 한북정맥의 포천구간에는 광덕산-백운산-도마봉-신로령-국망봉-개이빨산(견치산)-민둥산-도성고개-강씨봉 구간이 하늘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하이라이트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국망봉-개이빨산-민둥산 3km 구간이 가장 아름다운 하늘길로 호평받고 있다. 국망봉은 한북정맥의 큰 봉우리이면서 화악산(1468m)과 명지산(1267m)에 이어 경기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사계절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지만 겨울에는 눈꽃과 심설을 즐기려는 등산가들이 일부러 찾는다. 더욱이 국망봉의 남북 능선은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해 절개해 놓은 폭 10~20m의 방화선 때문에 눈이 쌓이게 되면 마치 은설의 나라에 온 것처럼 넓디넓은 눈길을 만든다. 겨울 등산은 위험하므로 준비를 철저히 하고 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방대원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자칫 위험에 처하기 십상이다. 포천을 찾아가는 길은 깊고 깊은 산 속을 파고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산 속 깊이, 내륙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포천의 가장 대표적인 여행지를 꼽으라면 단연 명성상 일대와 산정호수이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산정호수는 애초에는 농업용수가 부족한 영북면 지역의 농지개간사업을 위하여 1925년 관개용으로 축조한 인공저수지였다. 저수지 둘레만 3.2km 이고 수심도 23.5m 나 된다. 산정호수는 계절 구분 없이 사계절 내내 관람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따스한 봄날에는 다른 곳보다 늦게까지 벚꽃이 지천에 피어 있고, 여름에는 시원함과 청량감이 그만일 뿐더러 눈 내린 산정호수는 한겨울의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호수를 둘러싼 수변산책길을 거닐다 보면 어느 계절에 가도 후회가 없다. 특히 둘레길은 수상 데크길, 수변 데크길, 숲속 산책로 등 다채롭고 서로 연결돼 어느 길로 시작해도 언젠가 다시 만나도록 구성돼 지겹지 않다. 부지런히 걸으면 한 바퀴를 다 도는데 약 1시간가량 소요된다. 호수 물 위에서 반대편에 병풍처럼 둘러선 명성산의 모습을 통째로 담을 수 있다. 명성산-국망봉-개이빨산이 어깨동무를 한 듯 나란히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감탄을 자아낸다. 물 위를 걷는 맛도 일품이고, 가끔 걸음을 멈추고 수변 절벽에 파도치듯 밀려드는 물결을 바라보면 눈이 시원해진다. 겨울이면 산그늘 짙은 곳에 하얗게 남아 있는 잔설이 북국을 실감케 한다. 숲 속 산책길에는 자태가 당당한 소나무들과 함께 한다. 호수 위로 척척 늘어진 모양이 친근하다. 군데 군데 궁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조형물과 ‘꽃길만 걷게 해줄게’ 같은 글귀가 적힌 표지판이 단조로운 산책에 포인트를 준다. 물론 아무런 것이 없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산정호수는 국민관광지답게 식당가와 놀이동산 및 조각공원이 조성돼 있다. 어쩌면 번잡할 만큼 너무 많은 게 들어서 있다. 조각공원의 작품은 해설과 작품이 따로 노는 듯하고 오히려 풍광을 해치는 측면도 있다. 지난 연말 포천시는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아 예쁘게 산정호수 입구를 단장했다. ‘2021년 새해 건강하이소’라는 표어가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왕건의 흔적이 남아 있는 명성산 자인사 … 드라마 ‘돌담병원’ 촬영지 산정호수 뒤편에는 명성산(鳴聲山) 자인사(慈仁寺) 라는 사찰이 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태조로 재위하자 이 자리에 자신의 시호를 따서 신성암(神聖庵)이란 암자를 짓고 국태민안을 기도했다. 왕건과 궁예 모두 이곳에서 기도를 드렸다는 점이 흥미롭다. 왕건은 궁예의 명을 받아 후백제와의 일전을 앞두고 이곳에서 기도를 드린 후 대승을 거두었다. 나중에 궁예는 왕건의 군사에 쫒겨 지금의 명성산성에 진을 치고 책바위 앞에서 제사를 올리고 기도했으나 끝내 나라를 되찾지 못하고 책바위 아래 동굴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명성산은 우리말로 ‘울음산’이다. 억새가 가을이면 구슬프게 운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고, 궁예가 왕건에 패배하면서 진한 울음을 울어서 그랬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궁예의 부대는 대부분 미륵세상을 꿈꿨던 농민군이었다. 상재(商材)와 현실감각을 갖춘 왕건의 부대와는 달랐다. 패한 궁예가 철원 금학산으로 도주하기 위해 지나갔다는 ‘패주(敗走)골’, 패전한 궁예군사들에게 항서를 받았다는 ‘항서(降書)받골’, 궁예가 흐느끼며 넘었다는 ‘느치고개(눌치)’, 궁예가 은신했다는 ‘궁예왕굴’ 같은 지명이 망국의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강씨봉(康氏蜂)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자신에게 쓴소리를 하던 부인 강씨를 유폐시켰다는 곳이다. 이후 왕건에게 패한 뒤 강씨를 찾아나섰으나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망봉에 올라 도읍(철원)을 바라보며 탄식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신성암은 300여년 후 화재로 전소돼 고려 충렬왕 3년에 중건했다. 왕건의 자호를 따서 약천암이라 했으나 이 역시 이어지는 거란의 침입과 6.25전쟁 등으로 절의 문헌과 기록들은 모두 소실되고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와 절터만 남아 있다. 지금의 자인사는 1964년 김해공 스님이 터만 남은 곳에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중창한 절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웅장한 자인사 극락보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극락보전 뒤편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책바위에 입이 딱 벌어진다. 바위의 형상이 책을 편 모습과 닮았다하여 ‘책바위’라고 불리는데 명성산의 기운이 모두 응집돼 있는 느낌이다. 보고만 있어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지금의 극락보전 건물은 1993년 정영도 스님이 다시 지었다. 절 입구에는 잿터바위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왕건이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기도를 올린 곳이라고 한다.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이 개구리를 낚아채기 직전의 모양이라고 한다. 책바위와 잿터바위는 ‘기도발’이 끝내 줄 것 같다. 산정호수 뒤편 계곡길은 수형이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우거져 호수와 숲의 풍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소나무길을 따라 달리다 반가운 장소가 눈에 띈다. 길 한편 커다란 돌에 적힌 ‘돌담병원’ 표지석이다. 2016년과 2020년 인기리에 방영된 TV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배경이 된 곳이다. 드라마는 무대가 강원도 정선이라고 소개됐지만 실제로는 포천 산정호수 뒤편에서 찍었다. 25%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의 촬영지를 우연히 만나는 것은 여행의 덤이다. 돌담병원은 구 가족호텔이었으나 드라마 촬영을 위해 건물 외부만 개조했다. 드라마 속 병원 내부는 파주의 촬영장이었다. 건물 중앙에 병원 간판과, 하얀색 벽을 타고 올라가는 인조 덩쿨, ‘히포크라테스 선서문’ 등은 모두 소품들인데도 실제 병원보다 더 진짜 같아 보인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즈음 돌담병원 앞 소나무가 기가 막히게 서정적이었다. 돌담병원에서 2km 정도 산길을 더 달리면 자인사에 닿는다. 포천에는 여름철 물놀이터로 영평천, 백운계곡이 쉬기에 편하고 아름답다. 포천국립수목원(광릉숲)은 용인 한택식물원, 태안 천리포수목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수목원으로 꼽힌다. 이밖에 폐채석장으로 방치되던 화강암 절벽에 에메랄드 빛 인공호수를 조성한 포천아트밸리, 야트막한 산자락에 경관농업 차원에서 조성한 2만평 규모의 조그만 식물원인 포천뷰식물원(튤립·양귀비·백합·야생화 등 조성)과 캠핑장, 허브 관련 체험 박물관 겸 테마 식물원인 포천허브아일랜드(옛 포천허브랜드), 명성산과 산정호수 기슭에 고산식물 및 야생화 위주로 조성한 정통 수목원에 평강랜드(옛 평강식물원), 27만년 전 화산 활동으로 주상절리가 드러나는 비둘기낭폭포, 배상면 주가가 운영하는 술 공장 겸 술문화 갤러리인 산사원, 대형 패밀리 온천 리조트인 신북온천 등 사시사철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넘쳐난다. 포천 막걸리와 갈비구이는 익히 모르는 이가 없는 명품 먹거리다.
2021-01-10 00:41:52
경기도 고양은 서울에 인접해 있어 당일 나들이에 딱 좋은 곳이다. 해마다 4월말~5월초면 국제고양꽃박람회가 열려 자유로가 막힌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라는 애칭에 어울리게 자연, 역사, 맛, 놀이, 체험, 문화 등 몸이 즐거운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충분한 볼거리와 먹을 거리를 제공한다. 고양의 초입, 행주산성은 한강을 굽어본다 행주산성(사적 제56호)은 서울과 파주를 잇는 자유로를 따라가다 보면 신행주대교에 못미친 좌측 한강변 덕양산에 위에 자리잡고 있다.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행주산성은 문화유적과 함께 한강의 확트인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포인트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 장군(權慄·1537~1599)년 7월 6일은 이곳에서 병사를 이끌고 왜군 수만 명을 무찔렀다. 당시 성안의 부녀자들은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에 일조했다. 여기서 부엌에서 일할 때 덧두르는 앞치마란 의미의 ‘행주치마’가 이름 붙여졌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 임진왜란 당시 북상했다가 명군에 밀려 퇴각하는 왜군이 벽제관에서 한차례 승리하고 다시 기가 살아 서울로 진입하려 했다. 권율 장군은 방어의 요충지인 행주산성을 관민의 협조 아래 왜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권율의 지략이 제대로 통한 행주대첩은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매표소를 지나 행주산성 정문을 들어서면 권율 장군 동상이 늠름히 서 있다. 비교적 완만한 산책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한강 물줄기가 보인다. 바로 앞에 보이는 게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방화대교이다. 날씨가 좋으면 올림픽대로, 자유로, 난지도, 여의도, 남산, 저 멀리 임진강까지 두루 조망할 수 있다.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와 대첩비각, 행주대첩비 등을 보노라면 아직도 국운이 일본에 휘둘리는 현실에 마음을 저민다. 행주산성 진입로에는 1990년대부터 맛집이 생겼다. 장어, 닭백숙, 오리탕이 대표적이다. 주말은 물론 평일 낮에도 회사원들이, 저녁에는 단합대회·MT·골프시합을 마친 단체 손님이 몰린다. 그러나 가격도 많이 오르고 점차 음식점이 늘면서 10~20년 전의 만족했던 느낌도 흩어져가고 있다. 안보·힐링 여행의 출발점, 고양서 평화누리길 트레킹 시작 행주산성에서 출발해 행주대교, 삼성당마을, 섬말다리, 일산호수공원에 이르는 평화누리길 4코스도 걸어 볼만하다. 이를 비롯해 평화누리길의 1코스는 경기포 김포 대명항에서 문수산성 남문으로 이어진다. 2코스는 문수산성 남문에서 애기봉 입구, 3코스는 애기봉 입구에서 전류리 포구로 이어진다. 김포 문수산성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격퇴한 곳이다. 애기봉은 해병대 2사단이 주둔하는 김포 북단의 요새로 성탄절마다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밝히던 자리다. 5코스는 일산호수공원에서 파주 동패 지하차도까지다. 6코스부터는 파주 구간이다. 6코스(출판도시길)는 동패 지하차도에서 성동사거리, 7코스(헤이리길)는 파주 성동사거리에서 헤이리마을을 거쳐 반구정, 8코스(반구정길)는 황희 정승이 벼슬을 내놓고 은인자중하던 유적지인 반구정(반구정)에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피란할 때 불태워져 야간의 어둠을 밝혔다는 화석정(花石亭)을 경유해 율곡습지공원에 이른다. 9코스(율곡길)는 율곡의 아버지가 태어나고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권문세가인 파평윤씨가 발원한 파주 파평면의 면사무소에서 비룡대교(파주 적성면 주월리~연천 백학면 노곡리를 잇는 다리)까지이다. 10코스부터는 연천 구간이다. 10코스(고랑포길)는 장남교(연천군 장남면~파주군 적성면을 잇는 다리)에서 숭의전지까지 이어진다. 고구려가 주상절리 위에 쌓았다고 백제·신라 연합군에 뺐겼다는 호로고루성, 백학면 학곡리 고인돌, 숭의전지(연천군 마산면·고려 태조 등 7왕을 모신 사당) 등이 생태적 가치를 더한다. 11코스(임진적벽길)는 숭의전지에서 출발해 당포성-임진적벽길-임진교-무등리 보루-고성산 보루-군남홍수조절지로 이어진다. 임진적벽(한탄강 국가지질공원과 연결됨)이 압권으로 국내에서 강변의 웅장한 주상절리 적벽을 볼 수 있는 곳은 화순적벽과 여기가 거의 유일하다. 12코스는 군남홍수조절지부터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글귀가 적혀 있는 신탄리역(현재 경원선 종점)을 거쳐 역고드름에 이르는, 일명 ‘통일이음길’이다. 경기도가 조성한 평화누리길은 파주, 고양, 연천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최북단 걷기 코스로 총 189km에 이른다. 산과 강, 농촌과 도시를 두루 지나면서 안보와 힐링을 생각하게 된다. 고양시가 통일을 향한 전진기지이길 희망해본다. 신석기 벼농사 흔적과 조선 후기 서민농가의 전형 고양은 크게 신도심(일산동구 일산서구)과 구도심(덕양구)으로 나뉘어 있다. 신도시인 일산이 커지면서 동구와 서구로 갈라졌다. 일산동구 정발산 북쪽 기슭에는 밤가시초가(정발산동·경기도 민속문화재 제8호)는 조선 후기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통 농촌 주택의 구조를 원형 그대로 보여준다. 약 150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은 온돌이 있는 ‘ㄱ’자형 안채(안방 사랑방 건넌방 부억)를 중심으로 맞은편에 ‘ㄴ’자형 문간채(변소와 창고)가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ㅁ’자형이다. 집을 구성하고 있는 기둥, 대들보, 중방, 문틀, 마루, 서까래 등의 재목으로 밤나무를 썼다. 근처에 율동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그만큼 밤나무가 많았다는 얘기다. 밤나무는 사실 집을 짓기에는 강도가 약하지만 흔하기에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발산역에서 수도권 3호선 지하철을 타면 원흥역 옆 가시골에 이른다. 고양시농업기술센터 내에 있는 가와지볍씨박물관이 목적지다. 가와지볍씨는 약 5020년 전 신석기 시대의 볍씨로 1991년 일산신도시를 개발하던 중 가와지마을(고양시 대화동)에서 발견됐다. 신석기 시대 때 이미 한반도에 벼농사가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농경사적 증거이다. 박물관엔 가와지볍씨에 대한 자료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의 고양의 농경문화 변천사를 두루 전시해놓고 있다. 조선왕조 왕릉 세계문화유산 중 8개가 고양에 가와지볍씨박물관 주변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서삼릉과 서오릉이 있다. 먼저 고양시 용두동 통일로 옆에 들어선 서오릉(사적 제198호)은 조선 왕후를 모신 5개(창릉, 명릉, 익릉, 홍릉, 경릉)의 능이다. 오릉 외에도 명종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과 영조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의 수경원이 있다.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대빈묘도 한쪽에 자리잡았다. 서오릉 안으로 들어가니 오솔길 가에 늘어선 소나무, 참나무들이 반갑게 인사한다. 서오릉은 서울시 은평구와 맞닿아 있어 흔히 서울로 생각하지만 고양이다. 통일로를 따라가다 농협대학 쪽, 원당 가는 길로 2km쯤 들어가면 조선말기 왕실의 가족 묘지인 서삼릉(사적 제200호)이 나온다. 희릉, 효릉, 예릉 등 3개의 능이 서울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삼릉이라 한다. 인종의 친모 장경왕후 윤씨를 모신 능이 ‘희릉’이고, 중종의 아들 인종과 인종의 비(妃)인 인성왕후를 모신 능이 ‘효릉’, 조선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안동김씨를 모신 능이 ‘예릉’이다. 중종의 대를 이은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승하했다. 철종은 강화도령이란 별명처럼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한많은 임금이다. 불운했던 두 임금과 그 어머니와 아내가 되는 다섯 분이 묻혀 있다. 서삼릉 옆에 들어선 원당종마목장은 사색에 빠지기에 딱 좋다. 탁 트인 초원에 북국에서 내려온 차가운 겨울 바람이 서삼릉의 잔영과 겹쳐져 인생 무상을 생각케하는 요즘이다. 초지 옆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다. 여기저기 말들이 풀을 뜯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 말똥 냄새가 진동한다. 목장을 천천히 돌아보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관리사무소 좌측으로 난 오솔길은 종마장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고려공양왕릉, 최영장군묘, 성녕대군묘 등 놓치기 아까운 포인트 지나치기 아쉬운 곳 중 하나가 원당 화훼단지 부근의 공양왕릉(사적 제191호)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능이다. 쌍릉으로 왕과 왕비를 모셨다. 능 앞엔 비석 1기와 상석이 놓여있고 장명등 1기가 서 있다. 인근에 있는 생태동물원 ‘쥬라리움’도 가볼만하다. 국내에서 가장 큰 실내동물원이면서 야외동물원, 식물원, 체험교실, 카페테리아 등 다양한 시설과 프로그램을 갖췄다. 라마, 캥거루, 악어 등 총 95종 동물 300여 마리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최영(崔瑩, 1316~1388년) 장군 묘도 근방에 있다. 최영 장군은 수차례 홍건적, 왜적, 원나라 잔당, 내란 수괴 등을 물리치고 고려왕실을 보호한 명장으로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로 유명하다. 원래 이 말은 최영이 16세 때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이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라고 한다. 평소 성품이 온건하고 강직했던 최영은 유언을 좌우명으로 삼고 항상 되새기면서 살았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실각하고 귀양길에 올랐다가 개경에서 참수당했다. 사각 양식의 무덤은 뒤편에 부친 최원직의 묘와 함께 있는데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최영 장군의 우국 절개에 한동안 무덤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그래도 제법 풀이 잘 자라 있다. 성령대군(誠寧大君, 1405~1418년) 묘는 태종의 넷째 아들, 다시 말해 세종의 바로 아랫동생인 성녕대군이 묻힌 곳이다. 성령대군은 태종이 3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본 막내아들로 용모가 출중하고 행동거지가 공손하고 우애 깊고 총명하여 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4살 때 홍역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후사가 없었으나 양자를 들여 성령대군파가 이어지고 있다. 그를 모신 사당이 태종이 이름 지은 대자사(大慈祠)이고, 그의 묘가 대자산에 있으며, 모두 행정구역상 덕양구 대자동에 속한다. 신도비의 비문은 변계량(卞季良)이 짓고 글씨는 성개(成槪)가 썼다. 벽제관(碧蹄館)은 조선시대의 역관(驛館) 터다. 중국에서 오던 사절들이 쉬어가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군사와 일본군이 격전을 벌였다. 방심한 명군이 일본군에 일격을 당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헐렸고 지금은 관사의 윤곽과 터만 남아 있다. 벽제관지에서 시작하는 고양관청길도 열려 있다. 고양의 옛 관아 자리인 고읍마을과 고양과 파주를 잇는 관청고개(관청령)를 지나는 길로, 관청고개에 서면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 중남미 각국의 역사와 문화,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남미문화원에도 들러보자. 중남미 지역에서 30여 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던 이복형 선생이 2500여 점의 중남미 문화유산을 모아 놓은 곳이다. 박물관엔 중남미의 3대 문명인 마야, 아즈텍, 잉카 시대 유물이 전시돼 있다. 미술관엔 중남미 12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 등 예술작품을 볼 수 있다.
2019-11-25 10:1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