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쟁탈의 무대 … ‘남방의 목구멍’ 충주를 만나다
바야흐로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산천이 연갈색으로 타들어가고 사람들 옷차림에서 가을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이즈음이다. 계절의 순환은 이렇듯 어김없다. 충북 충주는 강과 호수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의 한복판에 자리한 도시다.
충주의 옛 이름은 중원(中原). 국토의 한가운데라는 의미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이자 서예가인 정인지는 ‘충주는 남방의 목구멍을 찔러 막은 곳에 자리한다. 지역이 넓고 호구(戶口)가 많으며, 이 때문에 공문서가 구름처럼 쌓이고 빈객(賓客)들이 모여들어서, 밝고 지혜로움이 없으면 다스릴 수 없는 곳’이라 했다. 이는 충주가 한반도의 한가운데이면서 사람과 물자가 빈번하게 왕래하고 전국 어디든 쉽게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임을 말해준다.
중원은 삼국시대부터 뺏고 뺏기는 전략상 중요한 거점이었다. 처음에는 백제가 지배했지만 이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백제를 웅진 지역으로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했다. 이에 질세라 신라는 6세기경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은 뒤 ‘중원소경’을 세우고 대가야(지금의 경북 고령)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우륵의 탄금대와 동천 권태응 선생의 동요
충주 지도를 펼쳐든다. 첫 목적지를 어디로 정하면 좋을까. 그래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언덕에 탄금대가 있구나! 탄금대에 오르니 시원한 강바람이 몸을 휘감는다. 남한강 너머로 펼쳐진 들판에 가을이 소담히 내려앉았다. 누렇게 물든 논과 밭이 올해도 풍년임을 알려준다.
탄금대(彈琴臺)는 신라 진흥왕 시절,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중 하나인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했던 곳이다. 대가야 출신의 우륵은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이곳 바위에 걸터앉아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탄금대는 조선시대의 명장 신립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전을 치른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는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이 있는데 신립 장군은 이 절벽을 12번이나 오르내리며 병사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탄금대 아랫마을은 ‘감자꽃’,‘도토리들’,‘산샘물’,‘달팽이’,‘꽃모종’, ‘고추밭’,‘율무’,‘옹달샘’ 등 주옥같은 동요와 동시로 아동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동천(洞泉) 권태응(權泰應·1918∼1951)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동시집 『감자꽃』 중에서-
선생의 역작 ‘감자꽃’은 언제 읽어도 마음에 새록새록 와 닿는다. 동심이 절로 우러난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자인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음악과 운동도 좋아했다. 충주공립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과에 재학 중 일본인들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고교 동창인 염홍섭 등과 함께 항일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항일운동 중 일본 경찰에게 연행돼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후 재일 유학생들을 규합해 독서회를 조직,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투신했지만 다시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 폐결핵을 얻어 이듬해 풀려났다. 이때가 1939년의 일이다. 그 뒤로 귀국해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악화돼 고향인 충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동요 창작 활동에 매진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렇게 동심으로 돌아가 살던 중 해방의 감격을 맛보기도 했지만 한국전쟁 때 다시 병세가 악화돼 1951년 3월 28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한국문인협회 충주지부에서는 매년 10월 탄금대 감자꽃 노래비 앞에서 권태응을 기리는 ‘감자꽃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앞으로 선생의 생가터를 복원하고 문학관과 체험관도 세울 계획이다.
국토 정중앙에 자리한 눈길 사로잡는 미려한 석탑
탄금대를 보고 조정대회가 열리는 탄금호로 간다. 탄금호 옆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중앙탑(일명 탑평리칠층석탑·국보 6호)이 있다. 중앙탑은 충주가 이 나라의 정 중앙에 있다는 걸 증명하는 유산이다. 2014년 1월 1일부터 본래 가금면이 중앙탑면으로 개칭될 정도로 이 탑의 의미는 각별하고 출중하다. 통일신라시대 원성왕 12년(796년)에 완성됐다. 신라의 석탑 중 7층, 14.5m로 가장 높다. 전설에 의하면 같은 보폭을 가진 두 사람이 통일신라 영토의 남단과 북단에서 동시에 출발해 만난 이곳에 탑을 세워 신라의 중심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중앙탑을 가까이서 바라본다. 미끈하게 솟은 탑은 어디 한 군데 모난 곳 없이 단아하고 결이 곱다. 탑 끝 너머로 걸린 푸른 가을 하늘이 눈부시다.
중앙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충주고구려비(국보 제205호). 대한민국(남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다. 5세기 무렵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개척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사각기둥 형태인 비는 네 면 중 세 면에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심하게 마모돼 판독할 수 있는 건 200여 자에 불과하다. 발견 전 마을 아낙네들이 빨래판으로 오래 썼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건립 연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비문에 보이는 ‘십이월삼일갑인(十二月三日甲寅)’이란 간지와 날짜를 고려해 449년(장수왕 37년)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충주고구려비는 보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옆에 새로 들어선 전시관 안에 옮겨 놓았다. 충주고구려비 전시관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1km 정도 오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군사들의 격전지였던 장미산성(사적 제400호)이 나온다.
장미산(薔薇山·해발 337m)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으로, 보련과 장미라는 남매가 성 쌓기 내기를 했는데, 남동생인 장미가 이기게 되어 그 이름을 따 장미산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한번쯤 올라가 볼 만한데, 산성에 발을 디디면 남한강 줄기가 아스라하게 펼쳐진다.
중앙탑면의 장미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와 앙성면 돈산리의 경계에 있는 보련산(寶蓮山·해발 764m)도 있다. 전설을 훑어보니 삼국시대에 노은면 가마골 부근에 장미와 보련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명산의 정기를 받아 장수의 기질을 타고 났다. 그러나 한 집안에 장수가 둘이 나면 불길하다고 하여 성 쌓기 내기를 해서 진 사람이 죽기로 결정했다. 남매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애착과 장수라는 명예 때문에 치열하게 경쟁했고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는 비통했다. 하지만 성을 쌓는 속도는 보련이 장미보다 빨랐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딸인 보련보다 아들인 장미가 이기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보련에게 떡을 해 가지고 가서는 이 떡을 먹고 천천히 성을 쌓으라고 했다. 때 마침 배가 고팠던 보련은 어머니가 주는 떡을 맛있게 먹고는 다시 성 쌓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 돌 한 개를 가지고 성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장미 쪽에서 축성이 끝났다는 북소리와 함께 기치가 올라갔다. 그때서야 보련은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런 꾀를 낸 줄 알고 노은 땅을 떠났다. 다음날 저녁, 보련의 집을 향해 큰 별이 하나 떨어졌다. 결국 장미가 쌓던 성이 장미산성, 보련이 쌓던 성이 보련산성이 됐다는 전설이다.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발길 닿는 곳마다 유적 유물
충주고구려비를 보고 목계교(원주 방향)를 건넌다. 충주시 엄정면의 남한강 상류에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를 잇는다. 다리 밑으로는 남한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목계교 충주 쪽은 먼 옛날 목계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남한강을 따라 수많은 뗏목과 물산이 오갔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충주 출신 신경림 시인은 시 ‘목계장터’에서 목계나루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읊었다. 세월이 흘러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목계나루 주변은 옛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목계 마을 위쪽 엄정면 괴동리에는 경종대왕 태실비와 태실지가 있다. 숙종 15년(1689년) 경종(장희빈의 아들)이 탄생한 이듬해에 그 동안 보관해 두었던 탯줄을 도자기에 담아 이곳에 안치했다. 예로부터 왕자가 태어나면 경치가 빼어난 장소에 태실지(태실터)를 마련해 탯줄을 항아리에 담아서 보관했다.
엄정면에서 동북 방향(원주 쪽)인 소태면으로 간다. 소태면 청계산 중턱에는 보각국사의 자취가 어린 청룡사터가 있다. 절터에 남아 있는 보각국사 정혜원융탑(定慧圓融塔 국보 제197호)은 보각국사(普覺國師 1320∼1392)의 사리를 모셔놓은 부도다. 8각으로 이루어진 탑은 바닥 돌 위에 3층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 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을 완성했다. 받침돌에 새겨놓은 연꽃무늬 장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조선 태조가 보각이라는 시호와 정혜원융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그 옆에 있는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보물 제656호)도 예사롭지 않다. 1394년(태조 3년)에 세운 보각국사의 공적비로 비문의 글씨는 승려 천택이 썼다고 한다. 보각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출가해 불교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해 높은 명성을 떨쳤으며 말년에 이곳 청룡사로 와서 연회암을 짓고 머무르다 입적했다.
월악산의 정기를 받는 미륵사 절터 … 마의태자의 위안
충주호를 따라가는 길은 언제나 절경이다. 제천시 수산면을 거쳐 36번 국도를 타고 충주 방향으로 쭉 가면 월악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웅장한 월악산을 사이에 두고 가르마처럼 펼쳐진 두 계곡이 있으니 용하구곡(제천시 덕산면)과 송계계곡(제천시 한수면)이다. 돌돌 흘러내리는 계곡 물은 참으로 맑아서 탁해진 심신에 한 줄기 청량제로 다가온다.
송계계곡 안에 있는 자연대, 월광폭포, 학소대, 망폭대, 수경대, 와룡대, 팔랑소 등은 설악산의 한 귀퉁이를 옮겨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송계계곡 남쪽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돌로 쌓은 덕주산성(제천시 한수면)이 있다.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으며 조선 말기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 다툼에 지쳐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했다는 사연이 전한다.
덕주산성에서 597번 지방도를 타면 월악산국립공원(덕산매표소)을 지나 수안보온천(충추 수안보면)으로 이어진다. 송계계곡을 따라가는 이 길 중간쯤에는 신라의 왕자, 마의태자의 전설이 묻혀 있는 미륵사터(수안보면)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의 왕건에게 자리를 빼앗긴 마의태자는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던 중 한동안 월악산에 머물면서 미륵사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은 절의 모습은 간 곳 없고 5층 석탑(보물 제95호), 석불입상(보물 제96호)을 비롯해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 3층석탑(지방문화재 제33호), 그리고 커다란 돌거북만이 남아 있다. 그 중 네 개의 커다란 화강석으로 이루어진 석불입상은 높이가 10.6m에 이르는데, 자비로운 미소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 ‘하늘재’ 문경새재로 이어져
미륵사터는 북동쪽으로는 월악산(충주·제천·단양·문경), 남서쪽으로는 조령산(문경·괴산)이 병풍을 두른 듯 이어져 있는 깊으나 험하지 않은 산중에 있다. 절터 뒤쪽(남쪽)으로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땅으로 이어지는 하늘재(한울재)란 고개가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은 하늘재(해발 525m)는 그다지 높지는 않다. 156년 열린 국내 최초의 고갯길이란 별칭도 갖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추풍령과 죽령 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하늘재란 길을 열었다. 미륵리에서 30~40분(2.3㎞) 정도 걸어 오르면 곧바로 문경땅에 닿는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조붓한 길을 따라 오르노라면 힘겨운 세상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길 중간 중간에 자연관찰로가 꾸며져 있고, 숲의 생태와 부근 유적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학생들의 자연·역사 학습장으로도 제격이다. 그 길을 따라 3~4시간(9㎞) 남서쪽으로 쭉내려가면 새도 쉬어간다는 문경새재(조령길)의 조령제3관문(조령관)에 이른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고갯길은 남쪽의 추풍령(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분기점), 북쪽의 죽령(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 소백산맥), 가운데의 문경새재(경북 문경시 문경읍, 충북 괴산군 연풍면 또는 충주시 수안보면) 등 셋이 있었다.
2019-10-08 11:3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