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대표적인 여행지하면 하회마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등이다. 익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명소들이다. 이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꼭 가볼 만한 곳을 소개한다. 1516년 후에 조선 성리학의 태두가 되는 열여섯 살 소년 이황이 봉정사(鳳停寺)를 찾았다. 그로부터 50년 후인 1566년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고 7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한 번 봉정사를 들렀다. 1999년 한영 수교 재개 50주년을 기념해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영국 왕실의 상징 엘리자베스 여왕 2세가 봉정사를 방문했다. 영국 왕실 최초의 한국 사찰 방문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곳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바람으로 방문한 곳이 바로 안동 봉정사와 하회마을이었다. 여왕은 하회마을에서 73회 생일을 맞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가 어머니를 대신해 또 한 번 봉정사를 찾았다. 2018년에는 휴가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봉정사를 찾았다. 무엇이 당대 최고 학자와 세계의 지도자들의 발걸음을 봉정사로 이끄는 것일까.참고로 한영은 1884년 영국이 주한영국총영사를 상주시킨 것을 계기로 수교했으며 1906년 을사조약 체결로 명맥이 끊겼다. 1946년 해방 후 총영사관을 재개설했고, 1949년 영국 정부가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함으로써 공식 외교관계가 재개됐다.안동시 서후면 천등산에 자리한 봉정사의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천등산 천등굴에서 수행을 하던 능인대사가 도력으로 종이로 접은 봉 한 마리를 날려 살포시 내려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 천등산의 원래 이름은 대망산이었다. 능인을 시험하려 옥황상제가 보낸 아리따운 여인을 능인이 내치자 능인의 굳은 의지에 감명한 여인은 등불을 선물하였다. 등불의 도움을 받아 수련을 계속한 능인이 마침내 득도를 하였으니 이후로 대망산(大望山)을 천등산(天燈山)이라 고쳐 부르고 능인이 수행한 굴을 천등굴이라 불렀다는 창건 설화가 전한다.봉정사 창건과 역사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몇 차례 중수 사실을 제외하면 봉정사 내력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창건 설화도 상당 부분 허황되다. 그럼에도 봉정사는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지는 사찰이다. 작고 소탈하지만 봉정사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돌은 돌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흙은 흙대로 저마다 생긴 그대로 어우러져 있다. 1700여년을 이어온 순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런 지극함이 있기에 영국의 왕실도 한국의 대통령도 발걸음을 하는 것이 아닐까.봉정사 극락전, 부석사보다 오래된 最古 목조건물 추정 … 후불탱화도 인상적봉정사에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귀한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그 중 몇 가지는 우리나라 최고(最古)로 꼽힌다.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은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72년 극락전 중수 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1363년에 극락전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13년 앞서 중수가 이루어졌음이 밝혀짐으로써 지금은 부석사보다 더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단지 중수 연대 외에도 극락전의 건축양식이 고구려 양식인 점을 들어 전문가들은 봉정사가 고려 양식인 부석사보다 고려시대이긴 하지만 훨씬 이른 시기에 지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봉정사 대웅전 후불탱화(後佛幀畵) 영산회상도(보물 제1614호)도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다. 2000년 대웅전 지붕 수리 공사 때 1428년(조선 세종 10년)에 그렸다는 글귀가 적힌 상량문이 발견돼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던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아미타삼존벽화 및 아미타내영도벽화, 1430년경 추정)보다 앞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조선시대 다포계 목조건축물의 최고봉인 대웅전(국보 제311호)과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보물 제449호) 등은 주저 없이 봉정사를 ‘목조건축의 보고’라 부르게 한다. 목조관세음보살좌상(보물 제1620호), 영산회괘불(보물 제1642호), 고려시대 삼층석탑(경북도 유형문화재 182호) 등이 사찰의 품격을 드높이고 있다.2000년도 발견된 상량문을 근거로 조선 초에 봉정사는 지금과 달리 ‘500여 결(1만여 평)의 논밭을 보유하고 안거스님 100여 명에 달하고 75칸의 팔만대장경까지 보유했던 대찰’임이 밝혀졌다. 이후 사세를 유지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고향집 마당 같은 절, 대웅전 팔작지붕의 봉황의 날개인 듯일주문을 지나 봉정사까지는 아름다운 솔숲이 이어진다. 오래된 소나무와 굴참나무의 진한 향이 숲속에 가득하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만세루 누마루를 굳게 받치고 있는 굵은 원통 기둥과 누마루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천등산 봉정사’ 현판이 당당하다. 비바람에 휘어진 기둥이며 벌어진 틈새며 분칠하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 촌부의 모습이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모아 쌓은 축대와 담벼락은 시골집 담벼락과 다를 바 없다. 오래도록 삭고 견디어 온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문지방을 넘어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탑과 석등이 없는 마당은 사찰보다는 여염집 마당 같은 느낌이다. 대웅전의 날렵한 팔작지붕은 천등굴에서 날아든 종이 봉황의 날개인가 싶다. 수평적 구조가 안정적이다. 대웅전 전각의 앞부분에 툇마루가 있어 마치 일반 가옥을 연상시킨다. 대웅전에는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후불벽화가 유명하다. 대웅전과 마주한 만세루는 무성한 나뭇잎에 파묻혀 마치 초록 물결 위에 떠 있는 섬 같고 목어가 북소리에 맞춰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니는 듯하다.봉정사 가람은 안쪽 깊숙이 극락전과 대웅전을 모시고, 두 전각 사이로 고금당, 화엄강당, 요사채를 배치했다. 화엄강당에 의해 극락전 영역과 대웅전 영역이 독립적인 공간으로 구분된다. 극락전 앞마당의 고려시대 3층석탑과 선방인 고금당의 어울림이 자연스럽다. 맞배지붕의 극락전은 극도의 간결함을 자랑한다. 중앙의 판문과 양옆에 창살이 있을 뿐이다. 영국 여왕도 극락전에 반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 기념사진과 소원탑이 보인다. 극락전 옆에는 못생긴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본래 안정사(安定寺)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봉정사 들머리의 명옥대, 퇴계 이황이 후학 가르쳐봉정사는 퇴계 이황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절이다. 숭유억불을 고집한 조선 시대에 유학의 태두 퇴계와 봉정사의 인연이라니 얼핏 잘 연결이 안 된다.봉정사 들머리에서 살짝 옆으로 비껴 나간 곳에 명옥대(鳴玉臺)라는 아담한 정자가 있다. 열 사람도 거뜬히 앉을 수 있는 너른 바위가 급격하게 기울며 절벽을 이루고, 그 절벽 아래로 계곡을 타고 내려온 물이 힘차게 곤두박질치듯 떨어진다. 진입로에서는 숲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건만 정자 앞으로는 너른 논과 밭이 펼쳐져 놀라움을 선사한다. 깊은 산속에 앉아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형세가 기묘하다. 퇴계 이황은 명옥대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학을 했다고 전한다. 원래 이름은 낙수대였으나 중국 서진의 시인 육기가 쓴 ‘나는 샘에서 명옥을 씻어 내리네’라는 시구에서 글귀를 따 명옥대라 고쳐 불렀다.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우는소리 같다는 의미다. 1665년 안동 유림에서 원래 있던 두 칸짜리 방을 허물고 지금의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했다.퇴계 이황은 16세 때인 1516년 봄부터 가을까지 봉정사에 머물며 독서했다. 와 학문을 하였다. 1566년 1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가던 중 병환을 핑계로 사직소를 올리고 광흥사, 봉정사에 머물며 강학했다. 봉정사에 머무는 동안 퇴계는 제자 금계 황준량의 문집 <금계집>을 교정하고 ‘봉정사 서루’, ‘명옥대’와 같은 시를 남겼다.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 년젊었을 적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함께 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푸른 바위, 맑은 폭포는 예전 그대로인데맑은 물, 푸른 바위 경치는 더욱 기이한데감상하러 오는 사람 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던 때라 대답해 주오.<퇴계의 명옥대 詩>찾는 이 없는 명옥대에는 풀벌레 소리와 물 떨어지는 소리만 요란하다. 퇴계는 일찍이 ‘감상하러 오는 사람 없어 계곡과 숲은 슬퍼하네’라고 노래했다. 젊은 날의 정든 벗들은 떠나고 찾는 이는 없고 홀로 남은 노학자의 회한과 쓸쓸함이 고스란히 명옥대에 쌓여 있다.‘미스터 선샤인’의 무대 만휴정 … 보백당 김계행의 묵계고택, 묵계서원만휴정(晩休亭)은 1986년 경북문화재자료 제173호로 등록되었고 2011년에는 명승 82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곳으로 그동안은 심신계곡의 호젓한 정자로 남아 있었다. 만휴정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은 2018년 절찬리에 종영된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TV 드라마다.만휴정이 위치한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는 계명산, 임봉산, 황학산에 둘러싸여 있고, 앞쪽으로는 길안천이 흐르는 작은 촌동네이다. 이 촌구석에 흙먼지를 날리며 수많은 자동차 행렬이 이어지는 것은 순전히 만휴정이 있어서이다. 너무나 많은 인파가 몰려서 마을 주민들은 불편함을 호소할 정도다.만휴정은 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계곡 쪽으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무성한 숲을 배경으로 나무들 틈으로 폭포의 하얀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하고 이내 외나무다리와 건너편 멋스러운 팔작지붕이 얼핏 보인다. TV에서 본 딱 그 풍경이다.만휴정으로 건너는 외나무다리 위에서는 수많은 드라마 속 유진(이병헌 분)과 애신(김태리 분)이 사진 놀이에 여념이 없다. 한참을 기다려 다리를 건너 정자에 들어선다. 부모를 잃고 추노꾼에 쫓기던 어린 유진이 힘겹게 찾아 들었던 곳이다. 굶주림에 허겁지겁 감자(주먹밥)을 훔쳐 먹다 들킨 어린 유진이 금방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것만 같다. “이 입에 맞아? 그렇게 먹으면 체해. 우물은 저쪽이다”라는 대사와는 다르게 만휴정에는 우물도 가마터도 혹은 영화 촬영지였음을 상기시키는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관람객들은 주로 사진을 찍느라 외나무다리나 계곡 쪽에 몰려 있어 정작 정자 안은 조용하다.만휴정은 조선시대 문신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말년에 낙향해 자연과 벗하며 학문을 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다. 정자라기보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온전한 집에 가깝다. 계곡의 넓은 암반 위에 축대를 쌓고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까지 뒀다. 정면에는 누마루가 있고 그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뒤편에는 산자락과 맞닿은 작은 마당을 두었다. 정자 안에는 김양근의 만휴정 중수기와 김양근, 김굉, 이도원, 김도행 등의 시들이 걸려 있다. 전면의 계곡과 뒤편의 산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을 연출한다.김계행은 5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연산군 4년), 승정원 도승지 등의 관직을 역임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20여 년간 관직생활을 하면서 무려 8명의 임금을 모셨다. 점필재 김종직과 교유한 것과 연산군 생모 윤씨 폐비 당시 승지를 지낸 것을 이유로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돼 투옥됐으나 큰 화를 면하고 무오사화) 이후 고향인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로 내려왔다. 1501년부터 장남(김극인)으로 하여금 미리 터를 잡아 마련케 한 지금의 보백당종택(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정착하고, 말년에는 근처 산속 계곡 폭포 위에 만휴정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며 산수와 더불어 보냈다. 안동 김씨가 일개 향반에서 중앙 정치 무대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김계행의 공로가 크다. 만휴정은 보백당 선생이 죽은 후 25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그의 후손들이 1790년에 고쳐지었다. 만휴정 앞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라고는 없다. 오직 청백만이 보물이다”라는 뜻이다. 보백당이 남긴 유훈이다. 만휴정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오르면 또 다른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만휴정만은 못하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관람객을 피해 잠시 호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만휴정에서 1km가량 떨어진 마을 길안천 건너편에는 묵계종택과 제자들이 세운 묵계서원이 있다. 보백당이 묵계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이래 대대로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묵계리는 안동 김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묵계리(默溪里)의 원래 이름은 ‘거무역’이었으나 정자 앞에 시냇물이 흐른다 하여 ‘묵계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종택에 들어서면 앞마당에서 노거수가 먼저 반긴다. 종택은 정침과 사랑채 및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대부의 가옥답지 않게 소박함이 묻어나 보백당의 청렴함을 엿볼 수 있다. 다만 한옥 숙박 등 여러 체험 행사를 진행해 다소 어수선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독립운동의 성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만휴정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30여 분 정도 달리면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생가이자 고성(경남) 이씨 집안의 종택인 임청각(臨淸閣)에 닿는다. 집 앞으로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35번 국도가 지난다. 도로를 따라 길고 높은 가로막이 흉물스럽게 쳐져 있는데 임청각은 그 흉물스러운 가로막 뒤편에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좁은 골목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법흥사 칠층전탑까지 있어 답답함을 더한다.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임청각은 1519년 조선 중종 때 이명이 건립한 전형적인 조선 시대 반가의 고택으로 건립 당시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을 갖춘 99칸의 전형적인 상류층 가옥이다. 현재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일제 강점기 임청각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훼손됐다. 고성 이씨 가문에서 독립운동가들이 계속 나오자 가문의 정기를 끊겠다며 행랑채와 부속건물 50칸을 철거하고 1942년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부설한 것이다. 그 결과 종택은 반토막이 났으며 얼마 전까지도 흉물스러운 가로막을 사이에 두고 중앙선 기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다. 철도와 종택의 거리는 불과 7m 남짓이었으니 기찻길 옆 오막살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일제가 집까지 훼손해 가며 정기를 끊으려고 했던 안동 고성 이씨 일가에서는 친인척을 모두 합해 5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종택인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성지인 셈이다.석주는 안동의 유학자 집안인 이승목과 부인 권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남학계의 대가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년)을 사사하는 등 전통 유학자로서 학문적 소양을 닦았다.비교적 평온한 청년기를 보냈으나 구한말 일제의 국권 찬탈을 목격하면서 일찍부터 지역의 혁신적 유림들과 더불어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과 의병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11년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전답 등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직전 망한 나라에서 조상을 모시는 것이 부끄럽다며 조상의 신위와 위패까지 모두 땅속에 묻고 나라가 독립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기를 다졌다고 한다. 그는 만주에 신흥무관학교, 자활복리증진 기구인 부민단((扶民團) 등을 조직하는 등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는 등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32년 중국 길림성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1990년 중국 흑룡강성에서 한국으로 봉환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이후 서울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 임정수반 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됐다.그의 집 안에서는 선생과 아들 및 손자 등 3대에 걸쳐 모두 9명의 독립운동가(서훈)가 배출되었다. 2018년 제73주년 광복절에 그의 손부 허은 선생이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이제 종택 임청각은 안동 독립운동가의 산실이자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길이 역사에 남게 되었다.군자정과 아담한 연못이 자리한 임청각은 여느 고택과 다를 바 없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시인들이 독립운동의 결기를 다진 숙연한 곳이다. 군자정 누마루에 올라 안에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그들은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울분을 토하며 조국 독립의 결기를 다졌을 것이다. 꽉 막힌 가림막이 답답할 뿐이다.임청각 위쪽 사당에는 조상의 신주 대신 독립운동에 헌신한 후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뒷동산에는 과거 임청각 선비들이 걸었던 ‘임청각 소담길’이 조성돼 있다. 총 15분 정도 소요된다. 소담길에 서니 비로소 낙동강과 안동시가 한눈에 들어온다.어찌 대장부가 제 한 몸을 아끼랴잘 있거라 고향 동산 슬퍼하지 말아라태평한 그날이 오면 돌아와 머물리라.이상룡 선생이 조국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선생의 유해는 조국에 돌아와 묻혔지만 그가 그리워했을 고향 동산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채로 남아 있다.2010년부터 시작된 도담-영천 145km 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어 지난해 말 마당을 가로지르던 중앙선 열차 운행이 중단되면서 그간 진행되던 복원 사업이 탄력을 받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북도와 안동시는 2025년까지 임청각의 원형을 복원하고 기념관 및 기념공원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현재 임청각에는 한옥민박을 비롯해 음식, 등불, 전통놀이, 한복 체험 프로그램과 나들길 걷기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2021-09-02 00:38:34
경북 경산(慶山)은 하루하루 바삐 사는 사람들에겐 다소 생소한 고장이다. 하지만 여행 좀 한다하는 사람들에겐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고장이다. 서쪽으로는 대구광역시(동구 수성구 달성군), 남쪽으로는 청도군, 북동쪽으로는 영천, 남동쪽으로는 경주에 연접해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돼 교통편도 편리하다. 산천초목이 진갈색으로 탈바꿈한 2019년 초겨울, 가족과 함께 경산으로 떠나보자. 반곡지, 늦가을 저수지의 독특한 매력 경산 하면 먼저 떠오르는 반곡지(盤谷池·남산면 반곡리)는 사철 독특한 서정을 풍기는 곳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사진 찍기 좋은 녹색 명소’로 지정하면서 사철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반곡지는 우리나라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저수지이지만 풍광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저수지 가로 둘러선 아름드리 왕버드나무들이 저수지 물빛과 너무나 잘 어울려 한 장의 그림엽서를 보는 듯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갈색 이파리는 자연 순환의 고귀함을 한껏 보여주니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이곳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강태공들이 붕어를 낚기 위해 심심찮게 찾는 낚시터로 더 유명했지만 경산 지역에 연고를 둔 사진작가들이 반곡지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반곡지를 보면 청송 주왕산 자락의 주산지(注山池)를 떠올리게 된다. 넓은 저수지에 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주산지가 광활한 멋으로 여행자들을 유혹한다면 반곡지는 작지만 동화 같은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반곡지 둑에 일렬로 늘어선 왕버드나무는 수령이 300년을 훌쩍 넘었다. 두 아름이 족히 됨직한 나무둥치는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생업에 바빠 이곳에 처음 와본다는 경산의 한 주민도 감탄사를 터뜨렸다. 반곡지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버드나무 이파리가 돋아나는 4월 하순~5월 초순 경이지만 이파리가 난분분 떨어지는 이즈음도 그에 못지않다. 저수지에 비친 왕버드나무와 쪽빛 하늘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이따금 배경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볼 수 있는데 캔버스에 옮겨 담은 저수지의 모습이 꽤나 사실적이다. 왕버드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린 둑길에서는 수면에 비친 그림자와 저쪽 마을 풍경이 환상의 대비를 이뤄 원근감이 생생하다. 나름대로의 멋을 잡아내는 건 어디까지나 여행자들의 몫이다. 반곡지는 어느 때고 독특한 모습으로 여행자들을 맞는다. 왕버드나무의 잎은 5월부터 제법 무성해지기 시작해 11월부터 점차 시들어간다. 녹색이 갈색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저수지를 향해 길게 팔을 뻗은 가지는 거울처럼 맑은 물에 닿을 듯 말듯한데 물에 비친 잎 그림자의 운치가 그럴 듯하다. 반곡지가 감춰 놓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저만큼 물오리 몇 마리가 동심원을 그리듯 자맥질을 하는 모습도 눈에 잡힌다. 둑길이 짧아 조금 아쉽지만 저수지 전경을 바라보며 걷기엔 안성맞춤이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는 또 얼마나 청아한지 가족들과 소풍 삼아 한나절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행지가 아닌가 싶다. 한 가지 귀띔하면 시간이 허락할 경우 수면 위로 물안개가 어른거리는 이른 아침에 찾아보는 것도 좋다. 어둠이 물러가고 여명이 트면서 저수지는 새옷으로 갈아입는다. 이때부터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신비로움을 드러내는데 자연의 반란이다. 경산에는 반곡지 말고도 자그마한 저수지가 몇 개 있는데 경산시청과 영남대 경산캠퍼스 사이의 남매지(男妹池)도 그 중의 하나다. 저수지를 따라 나무데크가 놓여 있어 산책 삼아 걷기에 좋다. 때는 바야흐로 만물이 시들어가는 소설 (小雪) 절기다. 이번 주말 반곡지와 남매지를 찾아 아름다운 추억 하나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가을 계정숲과 삼한시대 고분군 반곡지에서 자동차로 10여분 거리 자인면 서부리(慈仁面 西部里)에는 계정숲(桂亭林)이 있다. 구릉지에 남아 있는 천연 숲으로 수령 200~300년 된 이팝나무를 비롯해 말채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이 빼곡히 심어져 있어 생태관찰지로 아주 좋다. 이 숲은 계정(桂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 국내서는 보기 드물게 평지에 펼쳐진 천연림이다. 숲 안에는 조선시대의 관아(慈仁縣廳)와 왜적을 물리친 한장군의 묘와 사당이 남아 있다. 한장군(韓將軍)은 자인 지역의 단오놀이에 등장하는 여원무(女圓舞)의 주인공으로, 옛날 여자로 변장해 왜적을 유인, 크게 무찔렀다고 전한다. 계정숲이 끊어지는 곳에는 삼정지(三亭池·새못)가 있으며, 그 가운데 한장군의 말 무덤이라 불리는 봉분이 남아 있다. 삼정지는 세 그루의 정자나무와 세 개의 저수지가 있어 붙은 이름으로 두 그루는 고사하고 현재 한 나무만 살아 있다.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경산에는 고분군도 널려 있다. 금호강 남쪽(남천)과 오목천 사이의 들판으로 주로 동서로 뻗은 구릉 지대다. 임당동 고분군, 조영동 고분군, 부적리 고분군, 신상리 고분군이 그것들이다. 이들 고분군은 과거 경산이 정치 경제적으로 중심을 이뤘음을 의미한다. 그 중 임당동 고분군(사적 제300호)은 경산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1987년 발굴 당시 금동관, 금귀고리, 금동신발 장신구, 은허리띠 등 5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발굴된 유물들은 현재 영남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경부고속도로 경산 휴게소 뒤편에 있는 신상리 고분군은 이 지역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압독국(압량국)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고분공원으로 단장된 이곳에는 유물전시관을 비롯해 미니고분광장, 산책로, 야생화정원 등이 꾸며져 있어 휴게소 이용객들에게 역사·문화 체험의 장소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대구가톨릭대 교정에는 일명 ‘산소바위침대’로 불리는 기이한 암석이 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라고 하는 이 암석은 원시 미생물인 시아노박테리아(남조류)의 생명 활동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흔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아노박테리아는 원시 지구의 단세포 생물로 수심 2~3m의 얕은 바다에서 산소를 만들면서 스스로 유기물층과 무기물층을 생성시킨다. 이 유기물층과 무기물층이 교대로 퇴적돼 나이테 모양의 줄무늬 암석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스트로마톨라이트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는 이 바위를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팔공산 갓바위의 정기와 난포고택의 품격 경산 여행에서 팔공산(八公山) 갓바위 산행은 필수 코스다. 팔공산은 후삼국시대에 견훤의 충복 신숭겸 등 8장군이 견훤의 공격에 밀려 이 곳에서 전사하자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인 비로봉(1193m, 경북 군위군)을 중심으로 서봉(삼성봉 1150m, 대구시 동구)와 동봉(미타봉 1155m 경북 영천시)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웅을 겨루는 형상이다. 경산시에는 갓바위가 유명하고 칠곡군도 팔공산의 한자락을 차지한다. 1980년 5월 13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불교 문화의 중심지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대구시 동구 도학동)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이 산재해 있다 갓바위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경산 쪽 선본사(禪本寺)에서 올라가면 힘도 덜 들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선본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20~30분 정도 올라가면 커다란 불상이 있는 갓바위(관봉) 정상에 닿는다. 갓바위 부처(보물 제431호)는 머리에 1.5m(500㎏) 정도의 평평한 돌을 갓처럼 쓰고 있어 그렇게 부른다. 높이가 5.48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으로 자연 암반 위에 올라앉아 있어 웅장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갓바위 주자창-갓바위-신령재-염불봉-동봉-비로봉-서봉-수태골 휴게소 코스를 타면 6시간 반(13㎞)이 걸린다. 갓바위-노적봉-능성재-삿갓봉-바른재-동화사로 내려오는 짧은 코스도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 사대부가의 멋을 고스란히 간직한 난포고택(蘭圃古宅, 용성면 곡란리, 현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최해근 가옥으로도 불린다)을 보러 간다. 이 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최철견(崔鐵堅 1548~1618) 선생을 기리는 집으로 명종 1년(1546년)에 지어졌다. 그는 난포(蘭圃)·몽은(夢隱)·수은(睡隱) 등의 호를 가졌다. 조선시대 상류층 주택의 전형을 보여준다. 원래는 정침(正寢), 안채, 큰사랑채, 중사랑채, 아랫사랑채, 방아실채, 고방채, 마루, 사당, 행랑채(대문채) 등으로 이뤄져 있었지만 지금은 정침과 안채, 큰사랑채, 사당, 행랑채만 남아 있다. 뒤뜰에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놓여 있어 이채롭다. 집안으로 들어서면 안마당을 마주한 안채와 큰 사랑채가 편안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난포고택은 1809년과 1816년 상량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두 차례 중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동쪽으로 수동산이 우뚝하고 서쪽은 용산인데 남쪽에는 청도 운문산의 줄기인 곱돌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특히 용산(해발 435m) 8부 능선에 걸쳐있는 용산산성(둘레 약 1.6km, 신라시대)은 경사가 완만한 동쪽과 남쪽은 돌로 성을 쌓았고, 경사가 급한 북쪽과 서쪽은 흙으로 성벽을 쌓았다.
2019-11-22 20:05:00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14번째로 등재된 게 전국의 9곳 서원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소수서원, 경상남도 함양군 남계서원, 경상북도 경주시 옥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서원, 전라남도 장성군 필암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도동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병산서원, 전라북도 정읍시 무성서원, 충청남도 논산시 돈암서원 등이다. 서원이나 절, 정자, 고택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심성은 유교적이라기보다는 옛 정취에 묻혀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내고자하는 데 방점이 찍힌다. 핵심 포인트와 그곳을 둘러싼 산수자연을 드론을 띄운 듯 조망하노라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 기자는 9곳 서원 중 남계서원 도동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등 아직도 4곳이나 가보지 못했다. 스탬프 찍기처럼 다 둘러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서원에서 몸과 맘을 정진했던 옛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게 내겐 큰 사명으로 다가온다. 지난해 12월 31일 오전 영주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인근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본 감흥이 지금도 생생하다. 영주는 안동과 함께 ‘선비의 고장’으로 꼽힌다. 최초의 사액사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55호)이 길러낸 숱한 선비와 거기서 비롯된 선비정신이 이후 독립운동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은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2년 후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로 모셨다. 영남 선비들에게 개방돼 막상 현지 선비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해 낡아지기 시작했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은 이듬해 경상관찰사 심통원(沈通源)을 통해 조정에 편액과 토지, 책, 노비를 하사하도록 건의했다. 명종이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친필 편액을 내리니 조선 최초의 사액(賜額) 서원이다. 명종 5년(1550년) 당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은 왕명을 받아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란 기(記)를 적고 ‘소(紹)’자와 ‘수(修)’자를 따와 서원 이름을 지었다. 이미 무너진 교학(敎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이다. 이에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바뀌어 안향, 안축, 안보, 주세붕을 모신다. 주세붕은 어진 목민관으로 칭송받았다. 백성이 산삼 공납으로 힘들어하자 소백산에서 산삼 종자를 채취해 인삼 재배에 성공하기도 했다. 소수서원은 풍광이 빼어난 죽계천 앞에 터를 잡았다. 입학하는 데 자격을 뒀지만, 수업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소수서원 입구와 주위를 둘러싼 300~1000년 정도 되어 보이는 적송은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선비정신을 닦으라고 가르친다. 서원 안에 통일신라시대 절터 숙수사지(宿水寺址)의 당간지주(보물 59호)도 있다. 안향 등 네 성인을 모신 문성공묘(보물 1402호)를 비롯해 강학당(講學堂·보물 1403호)은 보물이다. 모두 숙수사란 옛 절터 안에 위치한다. 절터로도 명당이면 서원으로서도 좋은 터일 것이다. 취한대(翠寒臺), 경렴정(景濂亭)은 각각 서원 경계와 서원 담밖에 있다. 취한대는 연화산의 푸른 기운과 여기서 발원된 죽계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해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다. 경렴정은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해 시연(時宴)을 베풀던 곳이다. 탁청지(濯淸池)는 고려시대 숙수사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연못으로 임진왜란 전후에 2차례에 걸쳐 준설하고 대를 쌓았다. 유생들이 기숙하던 지락재(至樂齎) 담벼락에 탁청지가 조성돼 있다. 영주는 성리학의 본영이라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유교 종합박물관’이라할 소수박물관을 소수서원 인근에 지었다. 국보 111호인 안향 초상을 보관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아보는 귀중한 자료다. 인근에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한국선비문화수련원도 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인성교육, 유생들이 하던 유복배례, 사군자 치기, 다례 등을 가르친다. 역시 인접한 선비촌은 크게 4개 테마로 나눠진다. 영주 일대와 인근의 오래된 초가집 또는 기와집을 옮겨왔거나 복제해 모아놨다. 욕심이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다. 1테마는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도를 닦는 것을 근심할 뿐 가난은 걱정하지 않는다). 이를 실천한 김세기 가, 김뢰진 가, 장휘덕 가, 김구영 가, 김규진 가 등 청빈한 선비들의 고택이다. 2테마 수신제가의 표상으로는 김상진 가, 해우당 고택이 있다. 3테마 거무구안(居無求安)은 명상과 풍류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잘잘못에 대해 기개 있게 비판하는 것으로 김문기 가, 만죽재가 있다. 4테마 입신양명 테마로는 중앙관직에 나가 활약했던 두암고택, 인동장씨 종가가 있다. 여유가 되면 가 볼만한 곳이 현지인들만 겨우 아는 금선정(錦仙亭)이다. 소백산 비로봉(1439m)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와 욱금리, 금계리와 교촌리를 지나 금계천에서 서천과 합류한다. 이 곳 금선계곡에는 기암괴석과 수백 년 된 노송이 들어서 이름 그대로 ‘비단물결에 신선이 노니는’ 선경이 펼쳐진다. 이 일대가 ‘정감록’에 기록된 10승지 중 제1승지다. 금선정은 정조 5년(1781년) 풍기군수이던 이한일이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을 기려 지역 유지와 후손들과 힘을 합쳐 세웠다. 황준량이 금선정 아래 너럭바위를 금선대라 명명한 뒤 음풍농월하던 곳이다. 소수서원에서 북동쪽으로 10㎞ 이동하면 영주시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은 부석사(浮石寺)다. 절 이름은 당나라에서 의상을 흠모하는 여인 ‘선묘’는 용으로 변하여 봉황산까지 날아와 산채에 숨은 도적 500명을 바위를 날려 물리쳤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그 때의 큰 바위가 무량수전 바로 뒤편의 바닥에서 떠 있는 형상의 돌이다. 이를 ‘부석(浮石)’이라 하여 절 이름이 됐다. 그 본전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아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고려 현종 7년(1016년) 원융국사가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우왕 2년(1376년)에도 또한번 중창이 이뤄졌다. 조선 광해군 때 단청(丹靑)을 하였다. 1962년 국보 제18호로 지정됐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八作) 지붕 주심포(柱心包)계 건물이다. 주심포란 공포가 기둥 위에 하나만 있는 목조 건축 양식이다. 공포란 처마를 떠받치는 나무 부재나 장식이다. 팔작 지붕이란 쉽게 말해 사방으로 기와를 경사지게 배치해 8개의 곡선이 보이는 양식이다. 국내 최고(最古) 목조건물은 안동시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이지만 고려시대 중기에 지어져 아직까지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오래된 목조건물 중 최고의 아름다움은 단연 무량수전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무량수전은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하다. 기둥의 중간부가 가장 통통하고 위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태로 기둥머리는 34cm, 중간 배흘림 부분은 49cm, 기둥밑은 44cm의 지름을 이룬다. 고고미술학자이자 미술평론가였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에서 장독처럼 배부른 배흘림 기둥에 대해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고 평했다. 간결하면서 고풍스러우며 강건해보인다.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호)는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빼어난 조각 솜씨와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다. 화려하고도 기품이 있다. 특히 연꽃 조각이 정교해 우리 조각물 문화재의 백미로 꼽힌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을 비롯해 안양루, 선묘각, 조사당(祖師堂, 국보 19호), 취현암, 범종각(梵鍾閣), 선열당 등 많은 당우와 전각이 있지만 관람객은 대체로 무량수전과 안양루만 들렀다 간다. 무량수전을 만나러 들어가는 출입문 역할을 하는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무량수전의 풍경을 극대화하는 조연 역할을 한다. 기자는 무량수전보다 안양루가 오히려 더 좋았는데 안목이 부족한 탓일까. 본래 주연보다 조연을 눈여겨보는 특이한 성격 때문이리라.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동북쪽으로 100m 걸어올라가면 되는데 대부분 찾아보지 않는다. 조사당은 화엄종을 연 의상처럼 불교의 종파를 세운 창시자를 모신 사당이다.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로 미뤄 현재의 무량수전은 이보다 100~15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입적할 때까지 부석사에서 화엄사상을 전파하며 길러냈다. 유명 사찰에 가보면 대부분 의상대사,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씌어 있는데 전부 사실은 아닐 것이다.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 비마라사(毘摩羅寺), 해인사(海印寺), 옥천사(玉泉寺), 범어사(梵魚寺), 화엄사(華嚴寺), 보원사(普願寺), 갑사(岬寺), 국신사(國神寺), 청담사(靑潭寺) 등을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이 중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大刹)로 이름이 높다. 부석사 조사당에 의상대사 진영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봐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당 건물 추녀 밑에 의상대사가 꽃아 놓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라고 있는 선비화(仙扉花)가 있다. 알고 보니 선비화는 콩과 식물인 골담초(骨擔草, 학명 Caragana sinica)였다. 늦봄이나 초여름에 노란 꽃이 키 작은 낙엽 관목이다. 골담초는 이름 그대로 ‘뼈를 책임지는 풀’로 근골격계의 염증, 눈의 피로, 신허(腎虛) 등에 좋다. 엄나무, 생강나무, 느릅나무, 뽕나무와 함께 백숙 끓여 먹을 때 단골처럼 들어가는 생약재다. 그리 귀한 약재는 아니고 필자의 고향에서는 ‘곤달초’라는 사투리인지 이명인지로 불리는데 조사당 앞의 선비화는 수령이 500년을 넘었다는 스토리텔링으로 왕대접을 받고 있다. 부석사 범종각도 오래된 목조건축 양식으로 우뚝선 팔작 지붕이 시원스럽다. 안양루와 함께 일몰이 아름다운 포인트이니 한번 눈요기하고 가야 아쉽지 않을 것이다. 부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사찰이 들어선 자리가 아름다워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으로 여겨진다. 부석사의 안양루나 범종각에 오르면 너울지는 소백산맥의 봉우리들이 아스라하다. 봉황산 중턱의 좁고 가파른 땅에 석축을 높이 쌓고 거기에 어울릴 법한 건물을 짜임새 있게 배치한 공간미가 감탄을 자아낸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한 해를 보내는 일몰을 지켜보았다. 왜 이곳이 일몰 명품 포인트인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굳이 설명하자면 지붕들과 선이 맞닿은 소백의 여러 봉우리들이 아름답다. 특히 석양이 질 때 붉은 구름 속의 산과 들이 눈부시듯 장렬하면서도 어둠이 임박했음을 날개짓한다. 그런 깃털같이 숱한 날들이 쌓여 우리는 죽음에 이르노니…. 일몰 순간 경내에 운집한 수 백명의 관람객은 거의 3분간 숨을 죽였다. 한 해의 회한과 지친 삶에 대한 정화의 시간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멀리서 “나는 지난 한 해 성공적으로 보냈어”라고 말했다. 자위하는 소리겠지만 자기 삶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일까. 정적을 즐기고 있는데 이를 깨는 소리가 거슬렸다. 부석사는 충청남도 서산시와 강원도 평창군에도 있다. 서산 도비산에 자리잡고 있는 부석사도 일몰 명소다. 멀리 서해안으로 침몰하는 석양이 아름답다고 한다. 떠 있는 돌과 태양의 침몰, 왠지 추상화다운 미학이 느껴진다. 이 곳도 제법 오래된 절로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그 뒤 무학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온다.
2019-10-01 12:27:38
어느덧 가을이 깊었다. 천지사방이 가을빛으로 가득한 이즈음이다. 백두대간 동쪽 자락에 안긴 상주는 어딜 가나 산과 골이 앞을 막아선다. 두 가닥 혹은 한 가닥 길은 산과 골을 가로지르며 빼어난 경치를 우리 앞에 안겨준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에서 발원한 낙동강 1300리 물길은 상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유장한 물길의 한가운데인 상주 사벌면 퇴강리는 예천군·문경시와 맞닿아 있다. 삼국시대 초기 사벌국(沙伐國)이 있던 곳으로 잠시 백제에 속하기도 했다.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도 상주 사람이다. 낙동강은 상주땅을 적시면서 숱한 비경을 만들어놓았다. 퇴강리 낙동강변 조암산 자락 아래에 들어선 퇴강성당(退江聖堂)은 63년의 역사를 지닌 경북 북부 지역 천주교 신앙의 산실이다. 상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 교당으로 고딕 양식의 내부 모습이 검소하고 단아하다. 퇴강성당이 있는 곳은 옛날 ‘물미’라 불리던 곳으로, 성당이 세워질 당시 이곳에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낙동강 물이 밀려나는 지역이어서 퇴강 또는 물미라고 부른단다. 북쪽으로 임금바위가 있는 군암산이 감싸고 있어 풍수상으로도 길지(吉地)에 속한다. 낙동강을 굽어보는 비경이 뛰어난 경천대(擎天臺)도 지척에 있다. 경천대로 가기 전, 충의사에 잠시 들러본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 ‘육지의 이순신’으로 불리는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사당 옆에 있는 유물전시관에서 그의 사상과 일생을 더듬어볼 수 있다. 5분 거리에 있는 화달리 3층석탑(보물 제117호)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9세기 통일신라 때 만든 것으로 1972년에 탑 전체를 해체 복원했다. 하층 기단을 생략하고 탑신부에 좌불상이 얹혀 있는 모습이 안정감을 준다. 3층석탑 옆에 있는 전사벌 왕릉은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왕자 8명 중 다섯째 아들인 박언창(朴彦昌)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경명왕은 언창을 사벌대군(沙伐大君)으로 책봉하고 견훤을 격퇴하라고 명했으나 견훤이 합천·고령·영천·선산 등을 점거해 경주가 고립되자 상주를 사벌국이라 칭하고 스스로 왕이 돼 11년간 통치하다가 견훤의 침공을 받아 929년(경순왕 3년)에 패망했다고 한다. 사벌국왕릉 사적비와 신도비는 상산 박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경천대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우거진 노송과 깎아지른 절벽, 기이한 모양의 암석, 그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절경이다. 경천대의 또 다른 이름, 자천대(自天臺)는 하늘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강 건너로 보이는 모래사장이 햇살에 반짝인다.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정기룡 장군이 그의 용마와 함께 뛰놀던 곳이라 한다. 경천대 한쪽에는 정기룡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먹이통(구유통)이 남아 있다. 도보길(일명 MRF 이야기길)도 뚫렸다. 낙동강을 따라가는 이 길은 산길(Mountain Road), 강길(River Road), 들길(Field Road)이 적당히 어우러져 걷는 재미가 아주 좋다. 걷기가 여의치 않은 여행객들을 위해 자전거길도 만들어 놓았다. 낙동강 상주보 쪽에서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지나 비봉산을 끼고 경천대-매협리(낙동강 둑길)-상풍교-퇴강리(퇴강성당)-낙동강 700리 표지석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곳곳에 쉼터가 마련돼 있고 전망대도 갖춰 놓았다. 특히 비봉산 정상의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발 아래로 낙동강이 펼쳐져 풍광이 그만이다. 비봉산 전망대에서 경천대까지는 3~4시간이 걸릴 만큼 짧지 않은 거리지만 우수 어린 가을 경치를 대하노라면 발걸음이 가볍다. 지나치기 아쉬운 곳들 낙동강변에 들어선 도남서원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이다. 서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누각 정허헌(靜虛軒)에 올라서면 낙동강 줄기가 아스라하게 펼쳐진다. 2차에 걸쳐 복원된 서원은 정몽주·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이준·노수신·유성룡·정경세 등 아홉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상주는 이웃한 안동과 함께 유교문화의 전통이 강한 고장이다. 도남서원 외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서원이 무수히 많다. 도남서원과 우산서원 등은 동학운동 당시 민심이 동학으로 쏠리자 이를 조직적으로 배척했다. 유림은 동학을 허무맹랑한 사도(邪道)로 규정하고 전통 신분 질서를 지키지 않는 집단이라고 부정적으로 보았다. 도남서원 근방에는 자전거박물관과 상주보,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이 있다. 자전거는 상주의 명물이다. 상주는 시 전체가 평평한 분지 지형으로 경사가 완만해 자전거 타기에 적격이다. 자전거 보급률과 수송 분담률도 단연 전국 1위다. 자전거를 형상화한 박물관에 들어가면 다양한 자전거가 전시돼 있다. 관람객을 위해 다양한 자전거를 준비해 놓고 무료로 빌려준다.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은 환경부 산하 담수생물 전문 연구기관이다. 유전자원은행 구축, 유용자원 배양기술 확보, 맞춤형 바이오산업 지원, 생물자원의 수장과 연구 등을 수행한다. 생물다양성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가족형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상주보 아래 ‘나각산 숨소리길’도 근사하다. 들길, 강길, 산길을 따라가는 이 길은 나각산(螺角山·해발 250m)과 낙단보, 낙동강 역사 이야기관과 이어진다. 나각산 테라스 전망대에 서면 낙동리 들판이 시원스럽다. 속리산에서 뻗어온 산줄기가 낙동리 마을에 이르러 뾰족한 산을 하나 만드니 나각산이다. 산 형상이 마치 소라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사 짓기 좋은 ‘삼백(三白)’의 고장 충북 보은군과 상주시에 걸쳐 있는 속리산에도 올라보자. 수많은 봉우리가 있지만 장각폭포에서 장각계곡(화북면 상오리)을 지나 천왕봉(해발 1057m)-문장대(1054m)를 잇는 산길은 장쾌한 능선이 압권이다. 장각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6m 높이의 장각폭포는 시원스럽다 못해 오싹하기까지 하다. 절벽을 타고 세차게 흘러내리는데 폭포수가 떨어지는 용소(龍沼)는 금방이라도 용이 나올 것만 같다. 폭포 옆에 단정하게 자리잡은 정자(金蘭亭)는 폭포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장각폭포에서 길을 따라 동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큰 7층석탑 하나가 반긴다. 마을 이름을 딴 오상리7층석탑(보물 제683호)이다. 원래 이곳은 절이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흔적이 묘연하고 석탑만 덩그러니 서 있다. 얼핏 보면 조금 불안정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속리산 들머리의 맥문동 솔숲도 볼만하다. 맥문동은 꽃이 다 져 아쉽지만 푸른 솔향이 코끝에 와 머문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솔숲 산책로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안정된다. 문의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분소 (054)533-3389. 상주는 예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려왔다. 삼백이란 흰 색을 띤 특산물로 쌀과 목화, 누에고치를 일컫는다. 요즘은 목화 대신 이 고장에서 많이 나는 곶감이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국내 곶감의 60%가 상주에서 난다. 중부내륙고속도로 함창 나들목에서 가까운 명주박물관에 가면 친환경 섬유 소재인 명주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누에고치가 실이 되고 명주(비단·실크)가 되는 과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었다. 명주 섬유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단백질이 주성분인데 보습성이 뛰어나 정전기 방지와 세균 번식 억제, 자외선 차단, 피부 보호에 좋은 소재다. 명주 주산지인 함창읍에는 박물관 외에 명주판매장, 명주제품 체험장, 장수직물공장, 홍보전시관을 둔 명주테마파크가 들어서 있다. 보은과 상주를 잇는 25번 국도변에는 남장사(南長寺)란 고찰이 있다. 시내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남장마을 노음산 밑의 이 절집은 비로자나철불좌상과 목각탱이 있는 보광전이 볼만하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서 듣는 풍경 소리가 고즈넉하다. 남장사를 병풍처럼 두른 노음산은 갑장산, 천봉산과 함께 상주3악으로 불린다. 공검면 양정리에 있는 공검지(恭儉池)는 삼한시대(서력기원 전후 추정)에 쌓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 중 하나다. 벽골제(전북 김제시), 수산제(경북 밀양시), 의림지(충북 제천시)와 함께 삼한 또는 조선 4대 수리시설로 꼽힌다. 상주 사람들은 ‘공갈못’으로 부르는데 보존이 아주 잘 돼 ‘람사르 습지’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둑길을 거닐며 연못을 볼 수 있는 것도 이곳만의 매력이다. 여기서 생겨난 ‘공갈못 노래’(일명 공갈못 채련요(採蓮謠)는 변형을 거듭하며 아래 지방까지 전파됐다.
2019-09-26 18:43:20
지난 2월 9일, 경주 여행 이틀째다. 아침 일찍 동해바다의 일출과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돼 신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수중왕릉(대왕암)을 보기 위해 숙소에서 감포 앞바다까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일출 20여분 전에 도착해 송창식의 ‘내나라 내겨레’를 들으면서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렸다. 그러나 흐린 날씨로 해는 수평선에서 한참 올라온 뒤에야 해무 위로 고개를 들어 멋진 일출의 광경은 보지 못했다. 몰려온 전문사진작가들의 아쉬움은 더 컸을 것이다. 문무왕릉은 감포 앞바다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 속에 조성돼 있다. 문무왕(제30대왕, 재위 621~681)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그가 승하하자 유언에 따라 동해에 능이 조성됐다.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불교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그리 크지 않은 자연바위 속에 관을 묻은 듯하다. 무덤 둘레에는 썰물 때에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을 호석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배치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들고 나가게 계획한 듯하다. 가운데는 남북으로 길게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 있어 그 아래에 문무왕의 유골이 보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들른 데가 이견대(利見臺, 사적 159호)이다. 문무왕릉과 감은사지의 중간에 있다. 문무왕은 왜놈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창건했다. 그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제31대왕, 재위 681∼692)이 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라 682년에 공사를 끝냈다. 삼국유사에는 감은사 금당(金堂, 대웅전)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용이 절과 동해를 넘나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나중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고 한다. 682년 5월에는 왕이 이 곳에서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 만파식적은 파도를 잠재우는, 환란을 진압해주는 피리라는 뜻이다. 이견(利見)은 신라 문무왕·신문왕 부자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다가 다시 만나게 됨을 뜻하는 의미를 담았다. 문무왕릉과 이견대를 봤으니 당연히 감은사(感恩寺)도 들러야 할 것이다. 사라진 금당 앞의 양쪽에 서탑과 동탑이 나란히 서 있다. 이 감은사지삼층석탑은 두 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이다. 많은 석재를 이용한 수법이 백제와 같다. 그러나 백제석탑이 목조탑파를 충실히 모방한 데 반해 이 석탑은 독자적으로 기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에 따라 조성됐다고 한다. 감은사가 682년(신라 신문왕 2년)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이다. 하지만 필자가 경주여행을 통틀어 가장 매력을 느낀 석탑은 전날 보았던 나원리오층석탑이다. 모양도 정갈하지만 느낌이 정감있고 놓인 자리가 좋아서였을 것이다. 감은사는 함월산과 토함산의 바람이 모이는 자리인지 몰라도 때마침 한풍이 그칠 줄 몰랐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신문왕이 직접 지은 절인데 지금은 어떤 스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추운 겨울나기가 속세를 떠난 승려들에게도 보통일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어 함월산 자락의 기림사(祇林寺)와 골굴사(骨窟寺)를 찾았다. 선덕여왕 12년(643년) 인도(천축국, 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임정사(林井寺)를 창건했고, 훗날 원효(元曉)가 확장·중수해 기림사로 개칭했다. 조선 철종 14년(1863년)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승려의 숙소) 113칸이 불타 없어졌다.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宋廷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게 현 건물이다.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833호),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 보물 415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三神佛 보물 958호), 복장유물(보물 959호) 등이 있다. 대적광전은 1629년에 5차 중수된 것이 지금에 이르는 아주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대적광전이 사실상 대웅전 역할을 하며 약사전, 응진전, 진남루 등과 대향하여 ‘ㅁ’자형 배치(목탑지)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명부전이 오래된 건물로 나머지는 모두 근래에 건립된 것이다. 골굴사는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인도 승려 광유 일행이 12개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했다. 응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둔황석굴(敦煌石窟)이라 불린다. 하지만 그냥 미니어처 수준이며 그다지 깊은 감흥은 없었다. 여행일정이 촉박한 사람이라면 기림사와 골굴사는 걸러도 될 것이다. 다만 두 절이 인도풍이라는 것, 산의 기운이 센 곳에 위치했다는 것, 기림사의 대적광전이 아주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경주 동부의 휘몰아치는 찬바람을 뒤로 하고 분지인 경주 시내로 들어가면 좀 아늑할까 싶었다. 추령터널 덕동호 보문호를 지날 때에만 해도 날이 좀 따스해질까 기대했는데 경주 분지에 몰아드는 겨울 모랫바람은 오후 일정을 망치게 했다. 햇살은 쟁쟁한데 매서운 삭풍이 옷깃을 스쳐 앞으로 전진하기조차 힘들었다. 이날 시내에서 처음 방문한 곳은 분황사지(芬皇寺址)다.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년)에 창건됐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模塼石塔)을 비롯해, 화쟁국사비 비석대(和諍國師碑 碑石臺)·석정(石井)·석조(石槽)·초석(礎石)·석등(石燈)·대석(臺石)과 사경(寺境) 이외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보존되고 있다. 원효가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쓰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일컬어졌다하니 어드메 흔적이 있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분명 중학교 수학여행 시절에는 담장이 없었는데 그 사이 새로 둘러쳐진 듯하다. 모전석탑은 말 그대로 돌을 벽돌을 닮은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석탑이다. 쌓은 재료는 돌이되 생김새는 벽돌집 같다. 그만큼 신라인의 돌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는 얘기다. 모전석탑은 절대적으로 그 수가 적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초기에 주로 지어졌다가 이후엔 명맥이 끊겼다. 황룡사지는 분황사지와 붙어 있다. 광야의 모랫바람을 뚫고 수 백 미터를 걸어가니 고려시대 몽골군에 훼손됐다는 유허가 보인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절이자 호국 대사찰로서 고신라 불교문화의 정수가 응결된 유서깊은 사찰이었다. 신라 진흥왕 14년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대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 하여 이를 절로 고쳐 짓기로 하고 황룡사라 칭했다. 그 후 16년만인 569년에 완성했다. 이 때 솔거가 절벽에 노송을 그렸다. 명실공히 신라 제일의 국찰로 자장, 원효 등 신라 최고의 고승들이 설법하고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헌강왕, 진성왕 등이 이를 경청했다. 584년에는 금당을 지었다. 그 뒤 당나라에 유학갔던 자장율사가 귀국해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해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하며, 탑을 세운 뒤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신라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선덕여왕에 청해 구층탑을 짓게 됐다. 자장은 부처사리 100과를 탑 속에 봉안해 645년에 탑을 완성했다.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가 신라장인과 힘을 모아 목탑을 건립했다. 백제 명공 아비지가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백제가 망하는 현상을 보고 주저했다. 아비지는 돈도 벌고 불교정토와 삼국평화를 위해 목탑 축조에 나섰을 것이나 모국의 멸망에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국 땅에서 느꼈을 향수와 번민이 처연하다. 어쨌든 선덕여왕이 이 탑을 세운지 23년만에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뤄 이 탑의 영험함이 길이 전해져왔다. 신라의 3보배라 하는 장육존상·구층탑·진평왕 옥대(2개)와 신라 최대의 동종이 황룡사에 있었으나 고려 고종 25년(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없어졌다. 발굴된 터에서 나타난 사찰의 면적은 8800평해 달해 불국사의 8배나 된다. 가보니 주춧돌이 어마어마하다. 몽골에 유린된 신라불교 유적이 어떤 원형이었을지 아득히 그리워진다. 황룡사 대종은 몽골군이, 감은사 대종은 일본군이 각각 가져가려다 경주 앞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어 향한 곳이 월성(신라궁궐지), 석빙고, 첨성대, 대릉원(경주오릉), 계림 등이 밀집한 고궁지다. 전날 밤 가보았던 안압지는 월성의 동궁(임해전) 앞의 연못(월지)을 일컫는 것이다. 동궁은 왕자의 거처이면서 외국 사신을 맞는 경연장이었다. 경복궁의 경회루도 외국 사신을 영접한 곳으로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다. 삼국통일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 못의 북쪽과 동쪽에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다. 인공연못과 인공산을 사람의 힘으로 만든 현대적 조경과 다름없다.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월성(반월성)은 신라 궁궐지다. 신라의 달밤이라는 유행가요를 흥얼거리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에 짓눌려 있을 때의 달빛과 삼국통일 전후 기세가 등등했던 시절의 달빛이 어떠했을까 상상해본다. 월성 옛 궁궐터에 대한 발굴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그 지난하고 지루한 일이 언제 끝날지 기약할 길 없는 듯하다. 월성 한켠에는 지하를 파서 얼음을 묻어두는 석빙고가 있다. 필자가 사는 서울의 서빙고처럼 겨울에 강에서 얼음을 채취했다가 저장해 여름에 썼던 창고다. 서빙고나 동빙고는 목조라서 흔적 없이 사라진 반면 석빙고는 전국 여러곳에 남아 있다. 거의 대부분 경상도지역으로 경주석빙고(慶州石氷庫, 보물 66호)를 비롯해 안동석빙고(安東石氷庫, 보물 305호)·창녕석빙고(昌寧石氷庫, 보물 310호,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청도석빙고(淸道石氷庫, 보물 323호)·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 보물 673호)·영산석빙고(靈山石氷庫, 보물 1739호, 창녕군 영산면 교리) 등이 있다. 경주 석빙고가 신라시대에 지어진 줄 알았더니 1738년(영조 14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한다. 월성에서 300여m를 걸어가니 중학교 수학여행 때에는 보았던 첨성대다. 당시엔 버스에서 내리지도 않고 저기가 첨성대야 하던 관광버스 안내양의 간단한 설명만을 들으며 지나갔을 뿐이다. 지금은 사람과 자전거만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통제하고 있다. 워낙 유명해 설명이 무색할 것이다. 첨성대 기준으로 북서쪽 방향으로 조금 멀리 대릉원이 보이고 그 남쪽으로 계림, 그 서쪽으로 내물왕릉과 경주향교가 이어져 있다. 대릉원은 미추왕릉, 수학여행 필수코스인 천마총, 황남대총(황남리 고분군)을 아우른다. 황남빵으로 잘 알려진 황남리가 대릉원의 메인이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따온 것이다. 천마총에서 대로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있는 게 경주 노서리(路西里) 고분군, 동쪽에 있는 게 노동리(路東里) 고분군이다. 대릉원지구 또는 대릉원일원이라 칭할 때에는 노서리, 노동리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1921년 신라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은 노서리 고분군에 있다. 오릉은 신라 시조왕인 박혁거세왕(거서간)과 왕비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차차웅), 제3대 유리왕(이후 16대까지 이사금), 제5대 파사왕 등 신라초기 경주박씨 왕 네 명과 왕비 한 명을 한 자리에 모신 곳이다. 오릉 동편에는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덕전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알영부인이 탄생한 알영정이 잘 보존돼 있다. 오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신라왕릉 답사에서 대릉원과 오릉이 필수 코스다. 이번 여행에서는 미처 가보지 못했다. 이밖에 가봐야 할 왕릉으로 진평왕릉, 괘릉(원성왕릉 추정), 선덕여왕릉, 경애왕릉, 경덕왕릉, 헌강왕릉, 신무왕릉 등을 꼽을 수 있겠다. 필자는 첨성대 바로 앞의 인왕동고분군의 무덤 5기를 오릉으로 착각했는데 아니었다. 계림으로 발길을 돌리니 신라 천년의 탯줄이 느껴진다. 계림(鷄林)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경주 석씨(昔氏) 출신인 4대 탈해왕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김알지라 이름지었다.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부르다 계림으로 고쳤다. 계림은 신라의 국호로도 쓰였다. 겨울이어서 앙상한 가지만 보였지만 펑퍼짐한 숲에는 느티나무와 왕버들나무 등 옛나무들이 울창하다. 북쪽에서 서쪽으로 작은 실개천이 돌아흐른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박씨 왕족인 파사왕에게 왕위가 계승돼 왕이 되지 못했고, 후대 내물왕대부터 경주 김씨가 왕족이 되었다. 계림 옆에 내물왕릉이 있는 연유였다. 경내의 계림비각은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신라 왕성 가까이 있는 신성한 숲으로 신라 김씨 왕족 탄생지로 신성시되고 있다. 대릉원-계림-반월성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운치가 있다. 내물왕릉은 초기의 왕릉으로서 비교적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미추왕이 경주 김씨로는 처음으로 13대왕(재위 262∼ 284)에 올랐고 내물왕(17대왕, 재위 356~402) 때부터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다. 신라는 초기에 박·석·김이 돌아가며 왕을 하다가 석씨인 홀해왕(16대왕, 재위 310~356)을 끝으로 김씨가 계속 왕을 독식했다. 석씨는 경주 김씨와 경주 박씨의 견제를 받아 사실상 몰락했고, 박씨는 김씨의 외척이 됐다. 석씨는 지금 희성에 불과한 수준이다. 내물왕은 이런 면에서 경주 김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도 할 수 있다. 내물왕은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처음 사용했고, 낙동강 동부를 신라가 거의 차지했다. 내물왕릉에서 천마총 담벼락에 늘어선 황남동 쌈밥지구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다지 감동적인 맛은 아니지만 경상도 음식치고는 준수한 편이었다. 이어 마지막으로 찾은 게 경주향교와 경주최씨고택이다. 경주항교는 여느 지역의 향교보다 규모가 크면서도 고즈넉했다. 경주 최씨는 최치원을 시조로 한다. 경주 교동에 자리잡은 최씨고택은 12대 만석지기, 10대 진사 집안이면서 이른바 육훈(六訓)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부호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을 대기도 했다고 한다. 육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만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등이다. 최씨고택에 거주한 최부잣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000석이었는데 1000석은 사용하고, 1000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000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이같은 육훈 실천은 ‘부자 몸사리기’로도 보이지만 주위사람으로부터 미움받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지혜라 생각된다. 경주최씨고택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진다. 요석공주는 무열왕과 김보희(김유신의 여동생)의 딸로 원효의 아내이자 설총(薛聰)의 어머니다. 경주 교동 최부잣집에서 나온 유명한 술이 경주교동법주다.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사옹원(司饔院)의 참봉을 지낸 최국준이 처음 빚었다 한다. 법주를 만들 때에는 최씨 집안 마당의 우물물을 쓰는데, 물의 양과 온도가 사계절 내내 거의 일정하며 옛부터 물맛이 좋다고 한다. 대량생산되는 시중의 경주법주와 다른 가양주로 꽤 비싼 가격에 팔리는 데도 찾는 이가 많았다. 향교 앞에서 월정교 공사가 한창이다. 원효대사가 월정교를 건너 요석공주를 만났다고 한다. 이렇게 생긴 아들이 설총이다. 원효가 파계하지 않고 설총을 방치했다면, 설총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60.57m의 다리 위에 누각과 지붕을 얹혔다하니 당시엔 웅대함이 비할 데 없었을 것이다. 고대 교량의 축조법과 토목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작이라고 한다. 올 하반기에 완공될 전망이다. 경주여행은 알면 알수록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에 느꼈던 감회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깊이가 요구된다. 언제나 그많은 왕궁과 유적지를 답파할 수 있을까. 다 마치지 않은 숙제를 제출하는 학생처럼 서울로 돌아왔다. 아직 봄이 먼 2월인데도 여행 성수기를 피한다면 또다시 늦겨울이나 초봄에 와도 좋지 않을까. 역사유물에서 느낀 신라인의 고집불통 정신에 탄복하며, 지친 몸을 KTX에 실으니 눈 한번 뜨지 않고 어느새 서울이다.
2015-05-10 14:09:51
경주 사람들은 한참 목에 힘이 들어가 있고 기개가 있어 굽히길 싫어한다. 폼을 꽤 잡는다고나 할까.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경주를 지난 2월 8~9일 다시 찾아와보니 신라 천년왕국의 역사를 간직한 왕릉과 석탑, 절 등을 다니면서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아침 일찍 경부고속KTX를 타고 신경주역(서경주)에 내려 가장 가까운 율동마애여래삼존입상을 찾았다. 보물 122호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이번 여행의 무사안녕을 빌고 법흥왕릉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라왕릉은 56왕 중 37왕의 능묘가 확인됐거나 추정되며, 19왕의 능묘만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오직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만이 경기도 연천군에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경주시에 집중 분포돼 있다. 승리한 자의 역사만 기록된다고 했다. 백제, 고구려의 왕릉은 거의 남아 있는 게 없는 반면 신라의 왕릉은 이렇게 많이 보존돼 있다. 경주 시내를 중심으로 서쪽에 모여있는 게 법흥왕릉 진흥왕릉 무열왕릉 서악리고분군이다. 법흥왕릉에 가보니 구부러진 소나무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법흥왕은 신라 제23대왕(재위 514~540)으로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며 나라의 틀을 세웠다. 고구려 소수림왕이 유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워 나라의 기둥이 될 젊은이를 키우려 했다면, 법흥왕은 화랑을 내세웠다. 화랑은 신라 고유의 종교에 바탕을 둔다. 신라는 중국의 유교를 가르치지 않고 신라 고유의 정신으로 화랑을 무장시켰다. 다음은 무열왕릉(제29대왕, 재위 654~661)이다.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경내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다. 문무왕 원년(661년)에 세워졌으나 비신(碑身)이 없다. 도굴된 것인지, 일제에 의해 파괴된 것인지 알길이 없다. 비신의 파편 하나가 1935년 4월2일 무열왕릉 앞에서 발견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김춘추(金春秋)는 외교의 달인으로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뤘다. 비문은 무열왕의 둘째아들 김인문(金仁問)이 짓고 쓴 것으로 전해진다. 김인문의 묘는 신작로(20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놓여 있다. 당나라에 인질외교의 볼모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은 충효의 정신이 갸륵하고 서글프다. 신라 31대 신문왕 12년(692)에 당의 중종은 사신을 보내 김춘추의 묘호(廟號)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라고 쓴 데 대해 시비를 걸었다. 이 때 신문왕은 “생각컨대 우리 선왕(先王)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생전에 양신(良臣) 김유신을 얻어 동심위정(同心爲政)으로 삼국통일(一統三韓)을 이뤘으니 그 공적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고 대응했다. 당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끝내 김춘추의 묘호를 고치지 않았다. 여기서 동심위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공로가 대등하고 김유신을 왕의 반열에 준해 높였다는 뜻이니 의미심장하다. 태종무열왕릉비는 당대 최고 수준의 예술품이다. 비신을 받치는 귀부(龜趺)는 높이 1.3m, 길이 3.8m, 폭 2.49m 규모이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신라의 씩씩한 기상이 나타난다. 비석의 갓머리인 이수(螭首) 전면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양이다. 전면·가운데·후면 등 이수는 3겹이며, 각기 두마리씩 용이 그려져 있다. 이수와 귀부는 동양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수는 뿔이 없는 용의 머리이고, 귀부는 거북을 뜻하니 무한한 영원성을 의미한다. 무열왕릉 인근에 있는 게 서악리고분군과 서악서원이다. 선도산(仙桃山)의 서남 자락에 있다. 신라에서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 부르던 시기에는 묘가 평지에 있고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형식이었다. 그러나 정식 왕호가 붙여진 법흥왕 이후엔 경주 분지의 좌우에 펼쳐진 산지의 말단부 구릉에 왕릉이 조성되면서 묘 양식도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변화의 스타트가 서악리고분군이다. 서악리고분군의 5기묘는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으나 무열왕릉 뒤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열왕과 가까운 왕이나 왕족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분 높이는 15m에 불과하지만 밑둘레가 110~140m로 엄청나다. 이런 규모는 오히려 조선왕조 왕릉보다도 크면 컸지 작지 않다. 더욱이 국가에서 경주 왕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1990년대 이전까지 경주의 많은 왕릉 또는 관련 고분군들을 시민들의 힘으로 유지 보존했다니 대단하다는 탄성이 나온다. 예초기도 없던 시절, 풀만 깎는 일도 대역사였을 것이다. 서악리고분군에서 북북서쪽으로 서악리삼층석탑과 도봉서당을 지나 더 올라가면 진흥왕(眞興王), 진지왕(眞智王), 문성왕(文聖王), 헌안왕(憲安王) 등 4개의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서악동 마애여래삼존불상도 근처다. 바로 옆에 있는 서악서원은 조선 명종 16년(1561년) 경주부윤을 지낸 이정(李楨, 1512∼1571)이 김유신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세운 사당에서 비롯됐다. 당시 경주 유림들이 신라 학자인 최치원, 설총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해 이정이 퇴계 이황과 의논해 이를 받아들였다. 퇴계가 ‘서악정사’라 이름짓고 손수 현판도 섰으나 임진왜란 때에 서원이 모두 불에 타 지금의 자리에 1602년 묘우(위패를 모신 곳), 1610년 강당(시습당)과 동·서재(숙식 장소)를 다시 지었다. 영귀루라는 누각도 조성되어 있다. 인조 원년(1623)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지금의 현판은 당시 명필인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무열왕릉에서 차로 10여분 떨어진 김유신 장군묘에는 ‘신라태대각간(太大角干)김유신묘’라고 씌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왕릉에 못지 않은 위용을 자랑한다. 문무왕(무열왕의 장남, 제30대왕, 재위 661-681)은 무공을 세운 김유신에게 태대각간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직을 부여했고, 뒷날 흥덕왕은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했다.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에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돼 있다. 머리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다. 경주 왕릉에는 몇 군데에 지신상이 조각돼 있으나 그 우수함이나 규모에 있어선 김유신 장군을 따를 수 없다. 또 묘를 지탱하는 호석과 난간석 사이에 박석을 깔아 단단하게 지탱하게 한 것도 특징이다. 무열왕릉이나 김유신장군묘는 각각 문무왕 원년과 14년에 조성됐다. 문무왕에게 김유신은 외삼촌이 된다. 모두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위치해 있다. 김유신장군묘를 보고 양동마을에 가기 전에 들른 곳이 나원리오층석탑(국보 39호)이다. 세월이 가도 탑의 흰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감은사삼층석탑(국보 112호), 고선사삼층석탑(국립경주박물관 소재, 국보 38호),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 국보 21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석탑을 대표한다. 나원사는 오래된 절이 아니고 근래에 들어선 절이다. 옛 절의 금당(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본존불)을 모시는 곳으로 전당에 금칠을 했다해서 금당이라 함) 자리 뒤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양산 통도사와 같은 경우지만 이례적이라고 한다. 보통 석탑은 금당의 앞쪽에 놓여져 있게 돼 있다. 탑 전체의 높이가 9.76m(8세기경 축조)로 경주 지역에서는 감은사탑(682년, 13.4m), 고선사탑(686년, 9m)와 함께 톱3로 꼽힌다. 석가탑의 높이는 8.2m에 그친다. 낙수면의 합각이 예리하고 네 귀퉁이도 하늘 높이 올라 경쾌하다. 각 전각부에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있고 상륜부에는 파손된 노반만이 남아 있다. 순백의 오층석탑에서 바람이 스치고 갈 때마다 적요함을 깨고 울려퍼졌을 풍경소리의 영롱함을 상상하게 된다. 단조로우면서도 위엄이 있어 숭고함이 느껴진다. 지붕돌이 기와골로 돼 있어 황룡사터 구층목탑의 형태를 본떠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탑은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다. 탑이 있는 절터 바로 뒤쪽에는 산이 있으며 앞쪽으로 비교적 넓은 들과 형산강 줄기(서천)이 펼쳐져 아늑한 느낌을 준다. 무릇 풍수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지형이다. 여행 첫날 오후 양동마을을 둘러보고 저녁에 들른 게 안압지(동궁과 월지)다. 야경이 아름답다. 안압지, 포석정, 보문호, 덕동호 등 경주의 호변 관광지는 차후에 모아 소개해야 할 듯 깊다.
2015-04-24 22:11:21
2010년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후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한옥 자체의 멋과 양반가의 기품 등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양동마을은 월성(경주)손씨와 여강(여주)이씨가 함께 살며 550년 동안 전통을 이어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하회리, 풍산 류씨, 서애 유성룡), 경북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천전리,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경북 봉화군 봉화읍 닭실마을(유곡리, 안동 권씨, 충재 권벌)과 함께 영남의 4대 길지 중 하나로 꼽힌다. 여강 이씨로 처음 양동에 거주했던 인물은 고려 말의 이광호. 그의 손자사위인 류복하가 이 마을에 장가들어 정착했다. 그 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월성 손씨 손소가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해 양동마을에 눌러 살면서 일가를 이뤘다. 이어 이광호의 5대 종손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양동마을로 옮겨와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으로 불리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이 태어나면서 오늘날 손씨와 이씨가 더불어 살게 됐다. 손 씨는 류 씨의 외손이고, 이 씨는 손 씨의 외손이다보니 양동마을을 ‘외손마을’로 부르고 있다. 조선 초기만해도 남자가 처가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음을 입증해준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포항 방면으로 16㎞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동마을은 하회마을과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하회마을이 물굽이가 돌아가는 S라인에 면한 강마을인데 비해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雪蒼山)의 문장봉에서 뻗어 내린 네 줄기의 산등성이와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룬 산마을이다. 하회마을은 비교적 평지로 양반과 상민이 처마를 맞대고 한데 어울려 살았다면, 양동마을은 종가는 높은 곳에 살고 상민은 낮은 곳에 집을 짓는 등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두 마을 중에는 10년 전에 가본 하회마을이 더 고적하고 옛스러우며 마음이 편하게 느껴졌다. 양동마을이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의 전란을 피해 옛 모습을 보존해왔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특이한 지형 덕분이다. 양동마을회관과 매표소를 지나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좌측(서편)엔 한옥 2개동으로 지어놓은 양동초등학교가 우람하다. 여기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저절로 유생이 될 듯하다. 하지만 몰려오는 관광객 때문에 면학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아닐지….양동마을은 △서백당, 수졸당, 낙선당, 사호당·상춘헌·근암 고택 등이 있는 내곡(內谷) △무첨당을 중심으로 한 물봉골(勿峰谷) △마을 북동쪽의 거림(居林) △마을 입구 동편의 하촌(下村) △물봉동산을 중심으로 한 향단과 관가정 △물봉골 끝 북서쪽 자락의 갈구덕(渴求德) 등 크게 6개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지난 7일 오후 2시 넘어 늦게 양동마을에 도착한 터라 우측(동편)의 안락정과 이향정, 강학당을 건너 뛰고 심수정을 첫 방문했다.이어 거림 초입을 스쳐 내곡(안골)으로 향했다. 상춘헌·사호당·근암 고택을 둘러보고 서백당과 창은정사를 들렀다. ‘사호당(沙湖堂)’ 편액의 의미는 호숫가의 넓다란 백사장. 왜 산속마을에서 이런 당호를 정했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한다. 산중에 칩거하면서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는 ‘유취헌(幽趣軒)’의 편액 역시 사호당 주인의 삶과 철학을 담은 듯하다. 사호당과 유취헌은 건립자인 이능승(李能升)의 호다. 회화나무 등 고목에 둘러싸인 심수정(心水亭)은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이언적의 아우 농재 이언괄(聾齋 李彦适 1494~1553)을 추모해 건립한 정자로 양동마을에는 모두 10개의 정자가 전해온다.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을 연기한 최민식 씨가 술병을 들고 심수정의 지붕 위에 걸터 앉은 명장면을 연출했다. 서백당(書百堂)은 종부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쓴다는 뜻으로 근래에 굳어진 당호. 경주 손씨의 종가로 입향조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가 세조 5년(1459)에 지은 집이다. 아들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서백당은 사실상 월성 손씨의 종택이나 다름없다. 500년쯤 돼 보이는 향나무가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서백당 옆이 낙선당(樂善堂)이다.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망재(忘齋) 손숙돈(孫叔暾)이 분가할 때 지은 것이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낙선당 손종로(孫宗老 1598~1636)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손종로는 광해군 10년(1618) 무과해 급제해 남포현감(현 보령시 남포면)을 지냈으며 이천의 쌍령전투에서 그의 충성스런 노비 억부(億夫)와 함께 전사했다. 시체를 찾지 못해 옷과 관으로 제사를 지냈다. 손종로와 억부의 충절을 기리는 정충비각(旌忠碑閣)이 정조 7년(1783) 관가정 밑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낙선당은 양반가로는 기단이 낮다. 이 집의 주인은 대대로 집안에 디딜방아를 놓을 정도로 천석꾼이었다. 부자로서 순국한 ‘노블리스 오블리지’라고 칭송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많은 곡식을 양반으로서 거두었으니…. 낙선당엔 사유청문(四維淸門) 세독충효(世篤忠孝)란 현액이 걸려 있다. 사유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예·의·염·치(禮義廉恥) 등 4가지 수칙이요, 세독충효란 대를 이어 충효를 두텁게 하자는 의미다. 낙선당 뒤편엔 손씨 사당이 있다. 낙선당을 내려와 무첨당으로 향하려 하니 푯말이 보이지 않는다. 집주인들이 여기저기 비닐줄로 묶어 통행을 자제해달라는 사인을 보낸다. 통상 오후 4시가 넘으면 이런 일이 빚어진 다고 한다. 사유지이니깐 침범하지 말라는 주문이렸다. 하지만 낸 입장료도 적잖은데 까칠한 양반가의 행태 같기도 하다. 헤매다 우연히 들린 곳이 경산서당이다. 경산서당(景山書堂)은 무첨당(無忝堂) 이의윤(李宜潤 1564~1597)을 모시면서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본관에 해당하는 이선당(二善唐)과 ‘ㄱ’자로 꺾인 동편에 학진재(學眞齋) 서지재(西止齋)로 나뉘는 양재(兩齋, 별채)가 있다. 이의윤은 이언적의 손자로 명종 19년(1564)에 양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가까스로 찾아낸 물봉골의 무첨당은 알고 보니 지도상 양동마을의 중심이었다. 양동마을의 형국인 ‘물(勿)’자의 가운데 줄기 정남향에 자리잡고 있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처음 터를 정하고 살던 집이다. 양동마을 가운데서도 서백당과 함께 풍수지리학적으로 가장 길지로 여겨지는 터에 지어져 있으며, 여강 이씨 종가댁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 역할을 하는 무첨당은 세련된 별채의 기능을 하고 있다. 무첨가물 식품처럼 맑고 곧게 살자는 다짐이겠다. 마루에는 ‘창산세거(蒼山世居)’라고 써붙여놨다. 설창산에 대대로 살아오는 집이라는 뜻이다. 또 무첨당을 찾았던 대원군이 써 준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현액도 걸려 있다. 좌해는 영남지방을, 금서는 풍류와 학문을 일컫는 말로 이곳의 품격을 높게 쳐준 것이다. 무첨당에서 마을 서편 조금 내리막길에 영귀정과 설천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영귀정(詠歸亭)은 이언적이 젊은 시절에 학문을 수학했던 곳으로 대문채인 이호문(二呼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영귀정이라는 편액이 걸린 본채가 있다.영귀정 앞쪽 동편길로 내려오다보면 고색창연한 관가정(觀稼亭)이 눈에 띈다. 조선 중종 때 명신인 우재 손중돈이 손소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 안채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 막아 집의 앞쪽만 트이게 해 형산강과 안강평야가 나지막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풍수사상에 입각한 배치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 관가정에서 향단으로 향하니 해는 이미 서산에 지고 있다. 무첨당이 여강이씨의 종택이라면, 향단은 이씨가 제사를 지내는 보다 공적인 공간으로 보면 된다. 보물 제412호인 향단은 이언적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던 1543년에 지은 집으로 본래 99칸이었으나 6.25 전쟁 중에 일부가 불타 없어져 지금은 56칸으로 줄어들었다. 기와집의 일반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편리성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게 특색이다. 영화 ‘음란서생’의 촬영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양동마을은 4~6월이 관광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이 때엔 반가와 초가, 골목할 것 없이 어디를 가나 수백년된 향나무와 산수유, 매화, 목련, 개나리 등으로 꽃동산을 이룬다. 마을 문화재로는 국보 1개(283호 통감속편(通鑑續編) 월성손씨)에 보물만도 4개(411호 무첨당 여강이씨, 412호 향단 여강이씨, 442호 관가정 월성손씨, 1216호 손소 초상 월성손씨)나 된다. 아무리 일정이 촉박해도 무첨당 향단 관가정과 서백당(중요민속문화재 23호)은 꼭 둘러봐야 한다. 이밖에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문화재 73호), 사호당고택(沙湖堂古宅 74호), 상춘헌고택(賞春軒古宅 75호), 근암고택(謹庵古宅 76호), 두곡고택(杜谷古宅 77호), 수졸당(守拙堂 78호), 이향정(二香亭 79호), 수운정(水雲亭 80호), 심수정(心水亭, 81호), 안락정(安樂亭, 82호), 강학당(講學堂, 83호) 등이 빼놓지 않고 볼 필요가 있는 문화재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양동마을은 주변의 문화재인 옥산서원(사적 제154호), 독락당(보물 제413호), 동강서원(경상북도기념물 제114호)도 포함하고 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의 안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서원으로 1572년(선조 5년)에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과 도내 유림들이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1574년(선조 7년)에 ‘옥산(玉山)’이라 사액(賜額)돼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경내의 건물로는 체인묘(體仁廟)로 현액된 묘우가 있다.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했다. 구인당(求仁堂)은 강당으로 서원내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 토론 장소로 사용됐다. 독락당(獨樂堂)은 옥산서원에서 1㎞가량 떨어진 이언적의 고택 사랑채이다. 맑은 계곡물에 비친 고택이 깊은 운치를 나타낸다. 옥산서원에 도착하니 도처가 깜깜하고 독락당은 후일은 기약하며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2015-02-12 11:5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