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4 16:33:52
강진 백운동 원림
전남 강진군은 ‘남도답사의 1번지’로 꼽힌다. 역사학자이자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가 이렇게 부르며 책의 많은 부분을 강진에 할애한 영향이 크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광역시를 거쳐 나주, 영암으로 남하하면 강진이다. 2000년대 초반 선친과 어머니와 진도에 갔다가 해남을 들러 상경하는 길에 강진의 어느 소담한 마을을 스쳤던 기억이 남아 오래도록 가고 싶었으나 거의 20년이 넘어 지난 2월말에 초등학교 입학을 아둔 아들과 다녀왔다.
사의재 이후 다산은 고성사의 보은산방, 학래 이청(정약용의 제자)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47세이던 1808년 봄에 해남윤씨 윤규로(尹奎魯 1769~1837)의 산정(山亭)이던 귤동(橘洞)의 이 곳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했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였다. 그 시조인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가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다.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다산은 다시 말해 공재의 외증손자였다. 윤규로는 먼 외가 친척이었던 셈이다.
다산은 18년의 강진 유배 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을 저술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학사상의 대표적 산실이니만큼 지식인이라면 한번쯤 가봐야 할 곳이다.
다산은 벗이자 스승인 백련사의 혜장선사(1772~1811)와 남다른 교분을 쌓았다. 다산의 지음(知音)이었던 백련사 주지 혜장을 만나기 위해 오가던 800여m의 산길은 홀로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호젓한 오솔길이다. 둘은 비오는 쓸쓸한 밤이면 불쑥 찾을 정도로 허물없이 지냈으며 다산은 혜장이 찾아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뒀다고 한다.
다산초당의 뒷산은 야생차나무가 많아서 다산(茶山)이라고 불렸다. 정약용의 호이기도 하다. 행여나 동백이 필까 싶어 기대했는데 3월이나 돼야 할 것 같다.
다산의 길고 긴 유배생활에 마음을 달랜 벗은 차였다. 초당 앞마당에는 차 끓이는 부뚜막으로 쓰였던 돌 ‘다조’가 놓여 있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다조를 달궈 찻물을 데웠다고 한다. 다산은 차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말리고, 절구에 빻아 곱게 가루를 내서, 돌샘에서 나는 물로 가루를 반죽한 다음, 작게 떼어 떡으로 굳혀서 ‘떡차’를 만드는 제조법까지 체화할 정도로 다도의 전문가였다.
다산초당의 동쪽인 동암(東庵, 송풍루)에는 다산이 저술을 위해 해남윤씨 가문에서 빌려와 읽은 책 2000여권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동암에서 조금 더 동쪽에는 ‘천일각’(天一閣)이 세워졌다.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임말로, 하늘끝 벼랑에 세워진 정자라는 뜻이다. 해남이 ‘땅끝’(土末)이라면, 강진은 ‘하늘끝’인 셈이다. 임금으로부터 멀고 먼 남쪽 땅에 유배된 이의 심정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천일각은 다산 생전에는 없었다가 1975년에 지어졌는데 발 아래로 강진만이 눈 아래 들어온다. 다산은 강진만 바다를 바라보면서 흑산도로 유배를 간 둘째형 약전(1758~1816)과 고향인 남양주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때로는 세상을 관조했을 것이다.
동암의 반대편인 서암(西庵)은 다산이 강진에서 길러낸 18명의 제자들이 묵었던 숙소다. 1818년 다산이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게 됐다. 떠나는 스승을 위해 18명의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했다. 매년 봄에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스승에게 보내겠다는 약속이었다.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은 보행약자인 동행자가 있어 걷지 못하고 차로 이동했다. 해발 408m의 만덕산(萬德山) 품에 편안하게 자리잡은 백련사(白蓮寺)는 통일신라 말기인 839년(문성왕 1년)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했다. 조선시대에 들어 최초 이름인 만덕사로 불리다 근래에 다시 백련사라 고쳐불렀다.
고려 명종(1170년) 무신정권 시절에 원묘국사 요세(了世)에 의해 중창됐다.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 원묘국사 3세 스님이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불교정화를 앞장서는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했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다.
다산초당과 연결된 관광지로 성전면 월하리의 백운동 별서정원을 꼽을 수 있다. 담양의 소쇄원이나 보길도의 부용동정원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정원으로 불린다. 백운동 정원(원림)은 조선 중기 처사인 원주이씨 이담로(李聃老, 1627∼1701)가 조성했다. 원림(園林)은 담을 치지 않은 개방된 공간에 조성된 자연과 더 어우러진 인공미가 덜한 정원을 말한다.
원림은 <백운첩>에 다산 정약용이 <백운동12승사>의 시를 남기고, 초의선사가 <백운동도>를 그려 더욱 유명하다. 초의선사(1786~1866)는 해남 대흥사의 종사로 제주도로 귀양 간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찾아 바다를 건널 정도로 가깝게 지냈으며, 정약용보다는 24살 연하다. 한국의 다성(茶聖)으로서 다도의 정립과 확산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다산의 제자이자 이담로의 6대손인 자이당(自怡堂)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이 원림의 주인이었다. 다산은 1812년 9월 초의선사와 성인 제자 몇 명과 함께 백운동 원림을 방문하고 절경과 정취에 반했다. 그 때 9살 나이로 손님을 맞은 게 이시헌이다. 이시헌은 평생 스승에게 차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다산의 최애제자라 할 이시헌은 원림 내 옥판봉이 잘 보이는 정선대 앞에 소박하게 묻혀 있다.
이시헌의 증손인 이한영(1868~1956)은 일제강점기 시절까지 다산 집안에 이 차를 보냈다. 그러나 일제가 강진, 보성의 차를 대량으로 수탈해가서 일본차로 둔갑시키자 이한영은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 ‘월산차(月山茶)’라는 한국 최초의 상업화된 차 브랜드를 만들었다. 지금은 이한영의 고손녀인 이현정 이한영전통차문화원 원장이 다산이 즐겨 마시던 ‘백운옥판차’를 제조하고 있다.
이한영이 다산가(家)에 보낸 차의 이름은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 ‘금릉’은 강진의 옛 지명이고, ‘월산’은 월출산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백운옥판차는 백운동, 월출산 옥판봉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옥판봉(玉版峰)은 백운동 원림에서 아주 잘 보이는데 신하가 홀(명패, 玉版)을 치켜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백운동 원림은 월출산을 배경으로 계곡물이 흘러내리며 계단식 화단을 지형을 살려 조성했다. 원내의 연못과 외곽의 대나무숲 등이 경치와 식생을 살렸다. 정약용이 칭송한 12곳의 경치가 지금도 온전히 남아있는 한국 전통원림의 백미로서 부족함이 없다. 사전 정보 없이 찾아간 백운동 원림은 모처럼 만에 건진 마음속의 ‘인생 명소’가 될 것 같다.
백운동 원림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진다원(오설록 월출산 차밭)이 있다. 제주나 전남 보성과는 다른 느낌의 녹색 차나무 물결이 아늑하게 다가온다. 몇 달 있으면 초록잎을 뿜어올리며 올해 첫 우전자(곡우 이전에 수확한 찻잎으로 만든 차)의 간결하고 부드럽고 깊은 차맛을 선사해 줄 것이다.
백운동 원림에서 차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월출산 자락의 무위사(無爲寺)가 있다.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지은 절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진행되면서 이름도 무위사로 바뀌게 되었다.
백운동, 강진다원, 무위사를 3종 세트로 감상하고 나오는 길에 ‘월남사지’(月南寺址)를 들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시대에 진각국사(1178∼1234)가 세운 것으로 되어있지만, 경내 삼층석탑의 규모나 양식으로 보면 그 이전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절이 지금까지 폐사지로 남아 있다. 이곳 삼층석탑(보물 298호, 동탑)은 원래 두 개 탑 중 서탑은 사라지고 홀로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 양식이 백제계라기보다는 신라계에 가깝고 두 양식이 혼재된 특징을 보인다. 월출산의 기암들과 어우러져 자리는 좋아보이는데 왜 폐사지로 남아 있는 것일까. 항상 그렇듯이 폐사지의 평온함과 절의 사세(寺勢)는 따로 노는 것 같아 미스터리다.
가우도 출렁다리는 강진만 서편의 도암면과 동편의 대구면을 이어준다. 가우도 정상에 높이 25m로 조성된 고려청자 모양의 청자타워 전망대에서는 바다 위 973m를 1분 만에 주파하는 짚 트랙이 가설돼 있다. 출렁다리는 사람만 다닐 수 있을 뿐 차량 통행은 불가하다. 가우도는 강진군 8개섬 중 유일한 유인도인데 왜 아직도 차량 다닐 교량을 만들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강진만은 남북으로 길고 그 V자 중심에 강진읍이 있다. 동편에서 서편으로 건너가려면 강진읍을 거쳐야 하는데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결국 기자는 천혜의 미항이라는 동편의 가장 남쪽 끝인 마량항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마량포구는 유서 깊은 만호성터가 남아 있고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 있으며 고금도(완도군)와 약산도(완도군)가 든든하게 풍랑을 막아준다. 강진이 바닷가라지만 생선회를 먹으려면 마량에 가야 한다. 다른 동네엔 없거나 회맛이 별로 나지 않는다고 현지 사람들이 일러줬다.
가우도에서 강진읍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도암면 봉황리, 석문리 일대에는 마치 금강산의 축소판 같은 석문공원이 조성돼 있다. 2016년 석문산은 구름다리, 산책로, 물놀이터를 갖춘 야외공원으로 새출발했다.
강진하면 영랑 김윤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강진읍의 영랑생가는 인근의 시문학파 기념관, 뒷 언덕의 세계모란공원과 함께 잘 조성돼 있다. 세계모란공원은 4계절 세계 각국의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유리온실이 있다는데 미처 둘러보지 못해 아쉽다. 일본, 중국, 독일 등의 50종 2700여 그루의 모란이 식재돼 있다.
시비에 적힌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다시 읊어봤다. 나이가 드니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란 구절보다는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가 더 가슴을 울린다.
강진읍의 동쪽에 면한 군동면의 남미륵사가 자칭 미륵종의 본산이라 하여 찾아가봤으나 역사가 미천하고 인위적이어서 실망스러웠다. 동양 최대의 황동아미타여래좌상이 있는데 별 감흥을 얻지는 못했다. 화순의 운주사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고 갔는데 후회가 컸다. 다만 수만 그루의 철쭉이 봄철에 장관을 이룬다고 하니 때를 맞춰 가볼 수 있을 것이다. 군동면 금곡사 벚꽃길도 봄마다 수 만명이 찾는 예쁘기로 소문난 명소다. 강진군 서쪽의 남쪽 끝인 신전면 주작산 산책로는 진달래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한다.
군동면 북쪽의 병영면에는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과 하멜기념관이 있다. 병영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설치한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휘부이다. 그러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을 맞아 병화로 소실되었고, 1895년 갑오경장에 따른 신제도 도입으로 폐영됐다. 병영성 성곽의 총 길이는 10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만3139㎡로서 현재 사적 397호로 지정돼 있다.
병영성 인근에는 서양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책(하멜표류기, 하멜보고서)으로 소개했던 화란인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이 1656년 강진 병영으로 유배돼 7년 동안 살면서 노역했던 곳이 ‘하멜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이었던 그는 1653년 제주에 표착했지만 한양을 거쳐 13년간의 조선 억류생활 중 7년을 병영에서 지내다 1666년 일본으로 탈출했다.
자고로 병영이 있던 도시는 음식문화가 발달돼 있다. 통영(삼도수군통제영), 여수(전라좌수영), 강진, 해남(전라우수영) 등이다. 이들 지역은 해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한 게 공통점이다. 산과 들, 강과 바다를 모두 갖췄으니 강진은 맛의 고장일 수밖에 없다. 문어와 전복에 한약재를 넣고 끓인 ‘회춘탕’, 연탄불에 구운 ‘병영돼지불고기’, ‘음천 토하젓’, 짱퉁어탕, 바지락회무침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다만 한정식은 강진읍에서만 즐길 수 있고 다른 지역은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으며, 예전과 달리 옛맛이 안 날 수도 있으니 잘 골라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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