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천 … 한양도성 북동쪽 기운 받은 문화예술의 요람, 고관대작의 집터
2019-12-16 12:13:19
과거엔 복숭아꽃 만발 … 한용운 ·이태준·김광섭·염상섭의 집터, 간송미술관·길상사·성락원·최사영고택 등 갈곳 넘쳐
서울 성북구는 이름 그대로 한양 성곽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종로구에서 삼청터널과 혜화로터리를 통해 성북구로 이어진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한북정맥(漢北正脈)으로 이어지고 의정부 북서부 어드메에서 한줄기는 수락산-불암산-아차산으로 흐르고, 다른 줄기는 도봉산-삼각산(백운봉, 인수봉, 만경봉)-북악산-백악산(청와대 뒷산)에 이른다. 또 후자의 일부는 인왕산-안산-노고산 등 서쪽으로 뻗는다. 성북구는 도봉산-삼각산-백악산의 북동쪽 동네다.
삼각산과 북악산을 잇는 잘록한 고개는 기운이 허해서 옛날 세검정 인근 총융청(摠戎廳)에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특별한 날을 잡아 백성을 동원해 일부러 흙을 퍼다 날라 돋워줬는데 ‘흙을 보충한 고개’라는 뜻으로 보토현(補土峴)이라 불렀다. 그런데 1971년 보토현 아래에 북악터널을 뚫어 강한 기운이 서울 장안에 두루 뻗치는 것을 막았다고 풍수학자들은 안타까워 한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인왕산의 살구꽃, 서대문 밖 서지(西池)의 연꽃, 동대문 밖 동지(東池)의 수양버들, 세검정 근처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 성북동천(城北洞天)의 복숭아꽃(桃花) 구경을 으뜸으로 꼽았다. 총융청의 한 주둔지가 성북동천 상류에 있어 이곳을 북둔(北屯)이라 했는데 일대에 복숭아나무가 많았다. 홍도동, 도화동, 복사동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지금의 성북동 일대다. 성북동천은 자하문 밖에서부터 지금의 성북동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성북동천 상류에 자리 잡은 삼청각(三淸閣)과 대원각(大苑閣)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권력자와 기업 총수들이 은밀히 만나 정경유착(政經癒着)과 야합(野合)을 일삼던 요정(料亭)이었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음식점과 예식장으로 바뀌었다. 대원각은 소유주였던 기생 출신 김영한(1916~1999년)이 법정(法頂)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吉祥寺)라는 멋진 도심 속 사찰이 됐다.
김영한은 16살때 조선권번(朝鮮券番)에 들어가 춤과 노래를 배워 기생이 됐다. 월북시인 백석(白石 1912~1995년)과 사랑에 빠져 중국 전설 속 여인의 이름인 자야(子夜)라는 아명(雅名)까지 받았으나 백석 부모님의 극렬한 반대로 끝내 결혼하지 못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가 바로 김영한이었다. 김영한은 1953년에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내 사랑 백석’이란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법정의 ‘무소유’에 감화된 김영한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法名)을 받았고 훗날 절 이름이 길상사가 됐다.
한양도성의 좌청룡(동쪽) 산줄기 언덕에는 승려시인이면서 독립지사였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년)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이 있다. 심우(尋牛)란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심우장 현판은 만해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년)이 썼다.
심우장에서 가파른 골목길을 슬슬 걸어올라가면 북정마을이다. 삼선교역에서 북정마을로 올라가는 마을버스도 있다. 지난 6월 1일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 소개된 곳이라 호기심에 가봤다. 한양도성 성곽 바로 아래에 비교적 평평한 고원 같은 마을이다. 방송에 참나무 장작구이 통닭집과 선잠빵이 소개돼 사람들이 북적거린다는데 정작 몇몇 주민들은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데 소란스러워지니 제발 조용히 다니라고 플랭카드를 붙여놨다. 다행히도 북정마을은 개발에 내몰리지 않고 예스러움을 간직한 채 지자체의 지원으로 예전의 정겨운 모습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심우장서 북정마을 올라가는 길에 비둘기공원이 있다. 1968년 11월에 발표된 김광섭 시인의 시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고 읊고 있다. 산이 주택단지로 바뀌면서 다이너마이트, 불도저와 포크레인에 의해 허물어지고 원주민도 쫓겨나는 아픔을 그렸다.
성곽을 따라 쭉 걷고는 싶었으나 길이 끊어진 데가 있고 시간을 짧게 잡은 탓에 성곽 근처까지만 갔다가 하산했다. 청와대 뒷산의 숙정문(북대문)부터 혜화문(동소문)까지 이어져 있다.
심우장에서 큰 대로변 맞은 편에는 고택과 옛 예술인의 집터가 밀집돼 있다. 선잠단지(先蠶壇址)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던 선잠단(先蠶壇)이 있던 곳이다. 왕이 전농동(典農洞)의 선농단(先農壇)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親耕)을 행했다면, 왕비는 성북동 선잠단에서 누에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친잠(親蠶)을 주관했다. 서울 강남의 잠실, 잠원도 다 양잠을 장려했던 흔적이다.
선잠단 사이로 난 골목 안쪽에 있는 성락원(城樂園)은 철종(哲宗)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으로 알려져 있다. 의친왕 이강(李堈)이 별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됐다가 2008년 명승 제35호로 다시 지정됐다. 궁궐을 제외하고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전통정원이다. 전남 담양 소쇄원(瀟灑園), 전남 보길도 부용동(芙蓉洞)과 함께 ‘국내 3대 전통 정원’으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월간조선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사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내시 황윤명(黃允明·1848~?·평해(平海) 황씨·평해는 경북 울진군 평해읍·호는 춘파(春播) 또는 해생(海生), 춘파유고를 남김)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20세에 내관이 되어, 30세에 종일품(從一品) 명례궁(明禮宮·덕수궁의 옛 이름) 대차지(大次知·재정책임자)를 역임했다. 그가 펴낸 ‘난운관법첩’은 추사 김정희 등 한국과 중국의 명필, 명적을 모아 놓은 것으로 고종이 외교사절에 선물하는 책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도 고종으로부터 이 책을 하사받았다.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황윤명이 지은 쌍괴당(쌍괴실, 쌍괴누옥 등으로 당시에 불림·지금의 성락원)으로 피신했고 감명을 받아 ‘일편단충’(一片丹忠)이란 친필을 내렸다.
앞서 MBC·한겨례신문 등의 보도에 따르면 영벽지와 오래된 수목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1950년 이후 새로 지어졌거나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또 소유자가 큰 빚을 지어 경매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시는 예산을 투입해 매입했고, 문화재청은 복원공사에 재정을 썼다. 더욱이 사적이나 명승 지적에 심사위원에 로비가 들어갔고 막후에 정치권력이 개입했다는 추측이 난무하다. 의친왕은 주로 안동별궁에 기거했고 그나마 성락원 내 거처는 1927년 12월 전소돼 문화재적 가치가 퇴색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연적 지형을 잘 이용한 별장으로 북한산 자락에서 흐르는 계곡물 흐름에 따라 앞뜰, 안뜰, 뒤뜰로 구분했다. 우선 상지(上池)와 그 옆의 송석정(松石亭)이 뒤뜰(後苑)이다. 가장 높은 지형(북쪽)에 있다. 남쪽 입구(山門)에 가까운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앞뜰(前苑)이다. 영벽지(影碧池)와 그 앞에 최근 복원된 사랑채 같은 가옥과 여기에 이어진 본재(本齊)가 안뜰(內苑)이다. 영벽지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서 기가 세어나가지 않게 지맥을 비보(裨補)한 게 용두가산이다.
쌍류동천 주위와 용두가산에는 수령이 200~300년이 되는 엄나무를 비롯해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뤄 내원(內苑)과 외부를 차단하고 있다. 영벽지는 북서쪽 암반에 계류가 고인 고요한 소(沼)다. 2008년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서쪽 암반에서 너비 5m의 거대한 너럭바위가 발견됐는데 장빙가(檣氷家·고드름이 매달려 있는 집)란 음각에 새겨져 있었다. 완당(阮堂)이라는 낙관이 달려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지에서 영벽지로 수로를 파고 물길을 모아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성락원은 올해 들어 지난 4월 23일부터 6월 11일까지 일시 개방됐다. 문화재이긴 하지만 개인 소유다. 복원 공사가 80% 정도 진척돼 내년 가을 쯤이나 정식 개방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자가 방문했을 때에는 징소리, 망치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으니 기약이 없다.
성락원은 첫 주인으로 알려진 심상응의 5대손 고 심상준 제남기업 회장이 1950년 4월 매입해 보존해왔다. 그런데 역사책에는 심상응이란 인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또한 의문이다. 1991년 심 회장이 작고하자 그의 며느리 정미숙 씨(鄭美淑· 정일형 의원과 이태영 변호사의 딸, 정대철 전 의원의 여동생)가 관장으로 있는 한국가구박물관이 성락원을 관리해왔다. 복원사업에는 2017년부터 올해까지 모두 27억원이 투입됐다. 한국가구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성락원은 박물관 안에 없으며 1.5km 떨어져 있으며 현재 성락원 관람은 예약받지 않고 가구박물관 관람만을 예약받는다’는 다소 짜증 섞인 듯한 안내문이 달려 있다. 어찌 보면 백성의 고혈을 짜내 지었을지도 모를 성락원인데 그나마 사유지가 돼 구경조차 어렵다는 게 씁쓸하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비밀의 정원’처럼 얼핏 공개된 성락원의 모습은 아름답다. 서울에도 이런 곳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작위적이면 어떠냐 ‘서정성’은 넘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든다. 한 번 직접 보고 싶다는 게 기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조판서가 아닌 내시가 지었으니 오히려 스토리텔링이 되고 희귀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인근에는 국내 국보와 보물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이 있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이 전 재산을 투척하여 건립한 사설 미술관이다. 시가의 몇 배를 주고, 당시의 기와집 수십~수백 채 값을 주고 일본으로 넘어갈 우리 문화재를 사들였다는 전설 같은 얘기는 유명하다. 이 곳에는 국보 70호인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原本)을 비롯한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무엇보다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겸재(謙齋) 정선(鄭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주옥 같은 그림과 글씨 등 5000여 점의 문화재가 살아 숨쉬고 있다.
간송미술관과 가까운 월북 작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고택은 1933년에 지어진 대지 396㎡, 건평 77㎡ 규모의 서남향 개량한옥이다. 별채 없이 사랑채와 안채가 합쳐져 있다. 이태준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당호(堂號)를 짓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하면서 소설과 수필을 쓰던 곳이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1921년 휘문고보(徽文高普)를 졸업하고, 1927년 11월 일본 상지대학(上智大學)을 중퇴하고 귀국해 문단에 등단했다. 1933년 박태윤ㆍ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조직해 동인활동을 계속했다. 문장강화(文章講話)라는 작문 지침서는 대학 신입생들에게 지금도 필독서로 활용된다. 1946년 6월경 월북해 1953년 임화(林和), 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필의 향기는 간 데 없고 지금은 인기 있는 찻집으로 다향만 넘친다.
서울시가 2007년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한 성북동 9-21 소재 마포 최사영 고택은 여성 의류·뷰티 쇼핑몰 ‘스타일난다’를 세계 최대 프랑스 화장품회사인 로레알그룹에 6000억원에 매각해 화제를 모았던 김소희 전 대표가 지난 5월 96억6800만원에 매입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가옥은 대한제국 시기의 관료이자 광업·금융업·창고업 등에 종사한 재력가로 널리 알려진 최사영이 1906년 마포에 건립한 집의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최사영은 1929년까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성북동으로 이축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성북동천 일대에는 이종석 별장, 김용준·김환기 집터(노시산방), 김환기 집터, 염상섭 집터, 운보 김기창·우향 박래현(부부 화가) 집터, 조지훈 집터, 윤이상 집터, 최순우 옛집, 김광섭 집터, 오원 장승업 집터 등이 있다.
삼선교역에서 삼청터널로 넘어가는 자동차길이 예전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했던 제법 깊은 계곡을 복개한 것이라 한다. 그 남쪽과 북쪽의 마을들은 완연히 다른 생활상을 보여줬다. 한양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대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이었다. 반면 북악스카이웨이에 가깝고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부자와 권력자들의 대저택이 들어섰다. 1970년대 들어 상당수 재벌들이 목멱산(木覓山·남산) 남쪽 기슭인 한남동·이태원동으로 옮겨감에 따라 북쪽 마을 일부에 외국대사관과 대사관저가 들어섰다. 주한 앙골라·호주·네팔 대사관 외에 일본·중국·독일·멕시코·폴란드·카자흐스탄·포르투갈·노르웨이·우크라이나·그리스 등의 주한 대사 관저 등 50여개 공관이 외교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정종호 기자 help@heal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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