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소수서원과 부석사, ‘마음속 찌든 때’ 세척 힐링
2019-10-01 12:27:38
아스라한 소백의 봉우리와 절집 지붕 곡선이 연출하는 질식할 듯 아름다운 부석사 일몰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14번째로 등재된 게 전국의 9곳 서원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소수서원, 경상남도 함양군 남계서원, 경상북도 경주시 옥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서원, 전라남도 장성군 필암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도동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병산서원, 전라북도 정읍시 무성서원, 충청남도 논산시 돈암서원 등이다.
서원이나 절, 정자, 고택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심성은 유교적이라기보다는 옛 정취에 묻혀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내고자하는 데 방점이 찍힌다. 핵심 포인트와 그곳을 둘러싼 산수자연을 드론을 띄운 듯 조망하노라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 기자는 9곳 서원 중 남계서원 도동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등 아직도 4곳이나 가보지 못했다. 스탬프 찍기처럼 다 둘러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서원에서 몸과 맘을 정진했던 옛사람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게 내겐 큰 사명으로 다가온다.
지난해 12월 31일 오전 영주 소수서원을 둘러보고 인근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본 감흥이 지금도 생생하다.
영주는 안동과 함께 ‘선비의 고장’으로 꼽힌다. 최초의 사액사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55호)이 길러낸 숱한 선비와 거기서 비롯된 선비정신이 이후 독립운동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은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2년 후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로 모셨다. 영남 선비들에게 개방돼 막상 현지 선비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해 낡아지기 시작했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은 이듬해 경상관찰사 심통원(沈通源)을 통해 조정에 편액과 토지, 책, 노비를 하사하도록 건의했다. 명종이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친필 편액을 내리니 조선 최초의 사액(賜額) 서원이다. 명종 5년(1550년) 당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은 왕명을 받아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란 기(記)를 적고 ‘소(紹)’자와 ‘수(修)’자를 따와 서원 이름을 지었다. 이미 무너진 교학(敎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이다.
이에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바뀌어 안향, 안축, 안보, 주세붕을 모신다. 주세붕은 어진 목민관으로 칭송받았다. 백성이 산삼 공납으로 힘들어하자 소백산에서 산삼 종자를 채취해 인삼 재배에 성공하기도 했다. 소수서원은 풍광이 빼어난 죽계천 앞에 터를 잡았다. 입학하는 데 자격을 뒀지만, 수업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소수서원 입구와 주위를 둘러싼 300~1000년 정도 되어 보이는 적송은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선비정신을 닦으라고 가르친다. 서원 안에 통일신라시대 절터 숙수사지(宿水寺址)의 당간지주(보물 59호)도 있다. 안향 등 네 성인을 모신 문성공묘(보물 1402호)를 비롯해 강학당(講學堂·보물 1403호)은 보물이다. 모두 숙수사란 옛 절터 안에 위치한다. 절터로도 명당이면 서원으로서도 좋은 터일 것이다.
취한대(翠寒臺), 경렴정(景濂亭)은 각각 서원 경계와 서원 담밖에 있다. 취한대는 연화산의 푸른 기운과 여기서 발원된 죽계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해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다. 경렴정은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해 시연(時宴)을 베풀던 곳이다. 탁청지(濯淸池)는 고려시대 숙수사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연못으로 임진왜란 전후에 2차례에 걸쳐 준설하고 대를 쌓았다. 유생들이 기숙하던 지락재(至樂齎) 담벼락에 탁청지가 조성돼 있다.
영주는 성리학의 본영이라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유교 종합박물관’이라할 소수박물관을 소수서원 인근에 지었다. 국보 111호인 안향 초상을 보관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아보는 귀중한 자료다.
인근에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한국선비문화수련원도 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인성교육, 유생들이 하던 유복배례, 사군자 치기, 다례 등을 가르친다.
역시 인접한 선비촌은 크게 4개 테마로 나눠진다. 영주 일대와 인근의 오래된 초가집 또는 기와집을 옮겨왔거나 복제해 모아놨다. 욕심이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다. 1테마는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도를 닦는 것을 근심할 뿐 가난은 걱정하지 않는다). 이를 실천한 김세기 가, 김뢰진 가, 장휘덕 가, 김구영 가, 김규진 가 등 청빈한 선비들의 고택이다.
2테마 수신제가의 표상으로는 김상진 가, 해우당 고택이 있다. 3테마 거무구안(居無求安)은 명상과 풍류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잘잘못에 대해 기개 있게 비판하는 것으로 김문기 가, 만죽재가 있다. 4테마 입신양명 테마로는 중앙관직에 나가 활약했던 두암고택, 인동장씨 종가가 있다.
여유가 되면 가 볼만한 곳이 현지인들만 겨우 아는 금선정(錦仙亭)이다. 소백산 비로봉(1439m)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와 욱금리, 금계리와 교촌리를 지나 금계천에서 서천과 합류한다. 이 곳 금선계곡에는 기암괴석과 수백 년 된 노송이 들어서 이름 그대로 ‘비단물결에 신선이 노니는’ 선경이 펼쳐진다. 이 일대가 ‘정감록’에 기록된 10승지 중 제1승지다. 금선정은 정조 5년(1781년) 풍기군수이던 이한일이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을 기려 지역 유지와 후손들과 힘을 합쳐 세웠다. 황준량이 금선정 아래 너럭바위를 금선대라 명명한 뒤 음풍농월하던 곳이다.
소수서원에서 북동쪽으로 10㎞ 이동하면 영주시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은 부석사(浮石寺)다. 절 이름은 당나라에서 의상을 흠모하는 여인 ‘선묘’는 용으로 변하여 봉황산까지 날아와 산채에 숨은 도적 500명을 바위를 날려 물리쳤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그 때의 큰 바위가 무량수전 바로 뒤편의 바닥에서 떠 있는 형상의 돌이다. 이를 ‘부석(浮石)’이라 하여 절 이름이 됐다.
그 본전인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을 받아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고려 현종 7년(1016년) 원융국사가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우왕 2년(1376년)에도 또한번 중창이 이뤄졌다. 조선 광해군 때 단청(丹靑)을 하였다. 1962년 국보 제18호로 지정됐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八作) 지붕 주심포(柱心包)계 건물이다. 주심포란 공포가 기둥 위에 하나만 있는 목조 건축 양식이다. 공포란 처마를 떠받치는 나무 부재나 장식이다. 팔작 지붕이란 쉽게 말해 사방으로 기와를 경사지게 배치해 8개의 곡선이 보이는 양식이다.
국내 최고(最古) 목조건물은 안동시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이지만 고려시대 중기에 지어져 아직까지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오래된 목조건물 중 최고의 아름다움은 단연 무량수전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건물이 남향(南向)인데 불상만 동향(東向)인 점이 특이하다.
무량수전은 배흘림 기둥으로 유명하다. 기둥의 중간부가 가장 통통하고 위 아래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태로 기둥머리는 34cm, 중간 배흘림 부분은 49cm, 기둥밑은 44cm의 지름을 이룬다. 고고미술학자이자 미술평론가였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에서 장독처럼 배부른 배흘림 기둥에 대해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고 평했다. 간결하면서 고풍스러우며 강건해보인다.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호)는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빼어난 조각 솜씨와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다. 화려하고도 기품이 있다. 특히 연꽃 조각이 정교해 우리 조각물 문화재의 백미로 꼽힌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을 비롯해 안양루, 선묘각, 조사당(祖師堂, 국보 19호), 취현암, 범종각(梵鍾閣), 선열당 등 많은 당우와 전각이 있지만 관람객은 대체로 무량수전과 안양루만 들렀다 간다.
무량수전을 만나러 들어가는 출입문 역할을 하는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무량수전의 풍경을 극대화하는 조연 역할을 한다. 기자는 무량수전보다 안양루가 오히려 더 좋았는데 안목이 부족한 탓일까. 본래 주연보다 조연을 눈여겨보는 특이한 성격 때문이리라.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동북쪽으로 100m 걸어올라가면 되는데 대부분 찾아보지 않는다. 조사당은 화엄종을 연 의상처럼 불교의 종파를 세운 창시자를 모신 사당이다.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로 미뤄 현재의 무량수전은 이보다 100~15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입적할 때까지 부석사에서 화엄사상을 전파하며 길러냈다. 유명 사찰에 가보면 대부분 의상대사,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씌어 있는데 전부 사실은 아닐 것이다.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 비마라사(毘摩羅寺), 해인사(海印寺), 옥천사(玉泉寺), 범어사(梵魚寺), 화엄사(華嚴寺), 보원사(普願寺), 갑사(岬寺), 국신사(國神寺), 청담사(靑潭寺) 등을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이 중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大刹)로 이름이 높다.
부석사 조사당에 의상대사 진영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봐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당 건물 추녀 밑에 의상대사가 꽃아 놓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 자라고 있는 선비화(仙扉花)가 있다. 알고 보니 선비화는 콩과 식물인 골담초(骨擔草, 학명 Caragana sinica)였다. 늦봄이나 초여름에 노란 꽃이 키 작은 낙엽 관목이다. 골담초는 이름 그대로 ‘뼈를 책임지는 풀’로 근골격계의 염증, 눈의 피로, 신허(腎虛) 등에 좋다. 엄나무, 생강나무, 느릅나무, 뽕나무와 함께 백숙 끓여 먹을 때 단골처럼 들어가는 생약재다. 그리 귀한 약재는 아니고 필자의 고향에서는 ‘곤달초’라는 사투리인지 이명인지로 불리는데 조사당 앞의 선비화는 수령이 500년을 넘었다는 스토리텔링으로 왕대접을 받고 있다.
부석사 범종각도 오래된 목조건축 양식으로 우뚝선 팔작 지붕이 시원스럽다. 안양루와 함께 일몰이 아름다운 포인트이니 한번 눈요기하고 가야 아쉽지 않을 것이다.
부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사찰이 들어선 자리가 아름다워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으로 여겨진다. 부석사의 안양루나 범종각에 오르면 너울지는 소백산맥의 봉우리들이 아스라하다. 봉황산 중턱의 좁고 가파른 땅에 석축을 높이 쌓고 거기에 어울릴 법한 건물을 짜임새 있게 배치한 공간미가 감탄을 자아낸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한 해를 보내는 일몰을 지켜보았다. 왜 이곳이 일몰 명품 포인트인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굳이 설명하자면 지붕들과 선이 맞닿은 소백의 여러 봉우리들이 아름답다. 특히 석양이 질 때 붉은 구름 속의 산과 들이 눈부시듯 장렬하면서도 어둠이 임박했음을 날개짓한다. 그런 깃털같이 숱한 날들이 쌓여 우리는 죽음에 이르노니….
일몰 순간 경내에 운집한 수 백명의 관람객은 거의 3분간 숨을 죽였다. 한 해의 회한과 지친 삶에 대한 정화의 시간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이 멀리서 “나는 지난 한 해 성공적으로 보냈어”라고 말했다. 자위하는 소리겠지만 자기 삶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일까. 정적을 즐기고 있는데 이를 깨는 소리가 거슬렸다.
부석사는 충청남도 서산시와 강원도 평창군에도 있다. 서산 도비산에 자리잡고 있는 부석사도 일몰 명소다. 멀리 서해안으로 침몰하는 석양이 아름답다고 한다. 떠 있는 돌과 태양의 침몰, 왠지 추상화다운 미학이 느껴진다. 이 곳도 제법 오래된 절로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그 뒤 무학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온다.
정종호 기자·약학박사 help@heal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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