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0 14:09:51
지난 2월 9일, 경주 여행 이틀째다. 아침 일찍 동해바다의 일출과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돼 신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수중왕릉(대왕암)을 보기 위해 숙소에서 감포 앞바다까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일출 20여분 전에 도착해 송창식의 ‘내나라 내겨레’를 들으면서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기다렸다. 그러나 흐린 날씨로 해는 수평선에서 한참 올라온 뒤에야 해무 위로 고개를 들어 멋진 일출의 광경은 보지 못했다. 몰려온 전문사진작가들의 아쉬움은 더 컸을 것이다.
문무왕릉은 감포 앞바다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 속에 조성돼 있다. 문무왕(제30대왕, 재위 621~681)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그가 승하하자 유언에 따라 동해에 능이 조성됐다.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불교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그리 크지 않은 자연바위 속에 관을 묻은 듯하다. 무덤 둘레에는 썰물 때에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을 호석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배치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들고 나가게 계획한 듯하다. 가운데는 남북으로 길게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 있어 그 아래에 문무왕의 유골이 보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들른 데가 이견대(利見臺, 사적 159호)이다. 문무왕릉과 감은사지의 중간에 있다. 문무왕은 왜놈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창건했다. 그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제31대왕, 재위 681∼692)이 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라 682년에 공사를 끝냈다.
삼국유사에는 감은사 금당(金堂, 대웅전)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용이 절과 동해를 넘나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나중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고 한다. 682년 5월에는 왕이 이 곳에서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 만파식적은 파도를 잠재우는, 환란을 진압해주는 피리라는 뜻이다. 이견(利見)은 신라 문무왕·신문왕 부자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다가 다시 만나게 됨을 뜻하는 의미를 담았다.
문무왕릉과 이견대를 봤으니 당연히 감은사(感恩寺)도 들러야 할 것이다. 사라진 금당 앞의 양쪽에 서탑과 동탑이 나란히 서 있다. 이 감은사지삼층석탑은 두 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이다. 많은 석재를 이용한 수법이 백제와 같다. 그러나 백제석탑이 목조탑파를 충실히 모방한 데 반해 이 석탑은 독자적으로 기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에 따라 조성됐다고 한다. 감은사가 682년(신라 신문왕 2년)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이다.
하지만 필자가 경주여행을 통틀어 가장 매력을 느낀 석탑은 전날 보았던 나원리오층석탑이다. 모양도 정갈하지만 느낌이 정감있고 놓인 자리가 좋아서였을 것이다.
감은사는 함월산과 토함산의 바람이 모이는 자리인지 몰라도 때마침 한풍이 그칠 줄 몰랐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신문왕이 직접 지은 절인데 지금은 어떤 스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추운 겨울나기가 속세를 떠난 승려들에게도 보통일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어 함월산 자락의 기림사(祇林寺)와 골굴사(骨窟寺)를 찾았다. 선덕여왕 12년(643년) 인도(천축국, 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임정사(林井寺)를 창건했고, 훗날 원효(元曉)가 확장·중수해 기림사로 개칭했다.
조선 철종 14년(1863년)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승려의 숙소) 113칸이 불타 없어졌다.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宋廷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게 현 건물이다.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833호),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 보물 415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三神佛 보물 958호), 복장유물(보물 959호) 등이 있다.
대적광전은 1629년에 5차 중수된 것이 지금에 이르는 아주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대적광전이 사실상 대웅전 역할을 하며 약사전, 응진전, 진남루 등과 대향하여 ‘ㅁ’자형 배치(목탑지)를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명부전이 오래된 건물로 나머지는 모두 근래에 건립된 것이다.
골굴사는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인도 승려 광유 일행이 12개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했다. 응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둔황석굴(敦煌石窟)이라 불린다. 하지만 그냥 미니어처 수준이며 그다지 깊은 감흥은 없었다. 여행일정이 촉박한 사람이라면 기림사와 골굴사는 걸러도 될 것이다. 다만 두 절이 인도풍이라는 것, 산의 기운이 센 곳에 위치했다는 것, 기림사의 대적광전이 아주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경주 동부의 휘몰아치는 찬바람을 뒤로 하고 분지인 경주 시내로 들어가면 좀 아늑할까 싶었다. 추령터널 덕동호 보문호를 지날 때에만 해도 날이 좀 따스해질까 기대했는데 경주 분지에 몰아드는 겨울 모랫바람은 오후 일정을 망치게 했다. 햇살은 쟁쟁한데 매서운 삭풍이 옷깃을 스쳐 앞으로 전진하기조차 힘들었다.
이날 시내에서 처음 방문한 곳은 분황사지(芬皇寺址)다.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년)에 창건됐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模塼石塔)을 비롯해, 화쟁국사비 비석대(和諍國師碑 碑石臺)·석정(石井)·석조(石槽)·초석(礎石)·석등(石燈)·대석(臺石)과 사경(寺境) 이외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보존되고 있다. 원효가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쓰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일컬어졌다하니 어드메 흔적이 있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분명 중학교 수학여행 시절에는 담장이 없었는데 그 사이 새로 둘러쳐진 듯하다. 모전석탑은 말 그대로 돌을 벽돌을 닮은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석탑이다. 쌓은 재료는 돌이되 생김새는 벽돌집 같다. 그만큼 신라인의 돌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는 얘기다. 모전석탑은 절대적으로 그 수가 적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초기에 주로 지어졌다가 이후엔 명맥이 끊겼다.
황룡사지는 분황사지와 붙어 있다. 광야의 모랫바람을 뚫고 수 백 미터를 걸어가니 고려시대 몽골군에 훼손됐다는 유허가 보인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절이자 호국 대사찰로서 고신라 불교문화의 정수가 응결된 유서깊은 사찰이었다. 신라 진흥왕 14년 (553년)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대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 하여 이를 절로 고쳐 짓기로 하고 황룡사라 칭했다. 그 후 16년만인 569년에 완성했다. 이 때 솔거가 절벽에 노송을 그렸다. 명실공히 신라 제일의 국찰로 자장, 원효 등 신라 최고의 고승들이 설법하고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헌강왕, 진성왕 등이 이를 경청했다.
584년에는 금당을 지었다. 그 뒤 당나라에 유학갔던 자장율사가 귀국해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해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태평하며, 탑을 세운 뒤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신라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선덕여왕에 청해 구층탑을 짓게 됐다. 자장은 부처사리 100과를 탑 속에 봉안해 645년에 탑을 완성했다.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가 신라장인과 힘을 모아 목탑을 건립했다. 백제 명공 아비지가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백제가 망하는 현상을 보고 주저했다. 아비지는 돈도 벌고 불교정토와 삼국평화를 위해 목탑 축조에 나섰을 것이나 모국의 멸망에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국 땅에서 느꼈을 향수와 번민이 처연하다. 어쨌든 선덕여왕이 이 탑을 세운지 23년만에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뤄 이 탑의 영험함이 길이 전해져왔다. 신라의 3보배라 하는 장육존상·구층탑·진평왕 옥대(2개)와 신라 최대의 동종이 황룡사에 있었으나 고려 고종 25년(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없어졌다.
발굴된 터에서 나타난 사찰의 면적은 8800평해 달해 불국사의 8배나 된다. 가보니 주춧돌이 어마어마하다. 몽골에 유린된 신라불교 유적이 어떤 원형이었을지 아득히 그리워진다. 황룡사 대종은 몽골군이, 감은사 대종은 일본군이 각각 가져가려다 경주 앞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어 향한 곳이 월성(신라궁궐지), 석빙고, 첨성대, 대릉원(경주오릉), 계림 등이 밀집한 고궁지다. 전날 밤 가보았던 안압지는 월성의 동궁(임해전) 앞의 연못(월지)을 일컫는 것이다. 동궁은 왕자의 거처이면서 외국 사신을 맞는 경연장이었다. 경복궁의 경회루도 외국 사신을 영접한 곳으로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다.
삼국통일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 못의 북쪽과 동쪽에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다. 인공연못과 인공산을 사람의 힘으로 만든 현대적 조경과 다름없다.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월성(반월성)은 신라 궁궐지다. 신라의 달밤이라는 유행가요를 흥얼거리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에 짓눌려 있을 때의 달빛과 삼국통일 전후 기세가 등등했던 시절의 달빛이 어떠했을까 상상해본다. 월성 옛 궁궐터에 대한 발굴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그 지난하고 지루한 일이 언제 끝날지 기약할 길 없는 듯하다.
월성 한켠에는 지하를 파서 얼음을 묻어두는 석빙고가 있다. 필자가 사는 서울의 서빙고처럼 겨울에 강에서 얼음을 채취했다가 저장해 여름에 썼던 창고다. 서빙고나 동빙고는 목조라서 흔적 없이 사라진 반면 석빙고는 전국 여러곳에 남아 있다. 거의 대부분 경상도지역으로 경주석빙고(慶州石氷庫, 보물 66호)를 비롯해 안동석빙고(安東石氷庫, 보물 305호)·창녕석빙고(昌寧石氷庫, 보물 310호,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청도석빙고(淸道石氷庫, 보물 323호)·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 보물 673호)·영산석빙고(靈山石氷庫, 보물 1739호, 창녕군 영산면 교리) 등이 있다. 경주 석빙고가 신라시대에 지어진 줄 알았더니 1738년(영조 14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한다.
월성에서 300여m를 걸어가니 중학교 수학여행 때에는 보았던 첨성대다. 당시엔 버스에서 내리지도 않고 저기가 첨성대야 하던 관광버스 안내양의 간단한 설명만을 들으며 지나갔을 뿐이다. 지금은 사람과 자전거만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통제하고 있다. 워낙 유명해 설명이 무색할 것이다.
첨성대 기준으로 북서쪽 방향으로 조금 멀리 대릉원이 보이고 그 남쪽으로 계림, 그 서쪽으로 내물왕릉과 경주향교가 이어져 있다.
대릉원은 미추왕릉, 수학여행 필수코스인 천마총, 황남대총(황남리 고분군)을 아우른다. 황남빵으로 잘 알려진 황남리가 대릉원의 메인이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따온 것이다. 천마총에서 대로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있는 게 경주 노서리(路西里) 고분군, 동쪽에 있는 게 노동리(路東里) 고분군이다. 대릉원지구 또는 대릉원일원이라 칭할 때에는 노서리, 노동리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1921년 신라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은 노서리 고분군에 있다.
오릉은 신라 시조왕인 박혁거세왕(거서간)과 왕비 알영부인, 제2대 남해왕(차차웅), 제3대 유리왕(이후 16대까지 이사금), 제5대 파사왕 등 신라초기 경주박씨 왕 네 명과 왕비 한 명을 한 자리에 모신 곳이다. 오릉 동편에는 시조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덕전이 있으며, 그 뒤에는 알영부인이 탄생한 알영정이 잘 보존돼 있다. 오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신라왕릉 답사에서 대릉원과 오릉이 필수 코스다. 이번 여행에서는 미처 가보지 못했다. 이밖에 가봐야 할 왕릉으로 진평왕릉, 괘릉(원성왕릉 추정), 선덕여왕릉, 경애왕릉, 경덕왕릉, 헌강왕릉, 신무왕릉 등을 꼽을 수 있겠다.
필자는 첨성대 바로 앞의 인왕동고분군의 무덤 5기를 오릉으로 착각했는데 아니었다. 계림으로 발길을 돌리니 신라 천년의 탯줄이 느껴진다.
계림(鷄林)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경주 석씨(昔氏) 출신인 4대 탈해왕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김알지라 이름지었다.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부르다 계림으로 고쳤다. 계림은 신라의 국호로도 쓰였다.
겨울이어서 앙상한 가지만 보였지만 펑퍼짐한 숲에는 느티나무와 왕버들나무 등 옛나무들이 울창하다. 북쪽에서 서쪽으로 작은 실개천이 돌아흐른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박씨 왕족인 파사왕에게 왕위가 계승돼 왕이 되지 못했고, 후대 내물왕대부터 경주 김씨가 왕족이 되었다.
계림 옆에 내물왕릉이 있는 연유였다. 경내의 계림비각은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신라 왕성 가까이 있는 신성한 숲으로 신라 김씨 왕족 탄생지로 신성시되고 있다. 대릉원-계림-반월성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운치가 있다.
내물왕릉은 초기의 왕릉으로서 비교적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미추왕이 경주 김씨로는 처음으로 13대왕(재위 262∼ 284)에 올랐고 내물왕(17대왕, 재위 356~402) 때부터 김씨가 왕위를 세습했다. 신라는 초기에 박·석·김이 돌아가며 왕을 하다가 석씨인 홀해왕(16대왕, 재위 310~356)을 끝으로 김씨가 계속 왕을 독식했다. 석씨는 경주 김씨와 경주 박씨의 견제를 받아 사실상 몰락했고, 박씨는 김씨의 외척이 됐다. 석씨는 지금 희성에 불과한 수준이다. 내물왕은 이런 면에서 경주 김씨의 실질적인 시조라고도 할 수 있다. 내물왕은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처음 사용했고, 낙동강 동부를 신라가 거의 차지했다.
내물왕릉에서 천마총 담벼락에 늘어선 황남동 쌈밥지구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다지 감동적인 맛은 아니지만 경상도 음식치고는 준수한 편이었다.
이어 마지막으로 찾은 게 경주향교와 경주최씨고택이다. 경주항교는 여느 지역의 향교보다 규모가 크면서도 고즈넉했다.
경주 최씨는 최치원을 시조로 한다. 경주 교동에 자리잡은 최씨고택은 12대 만석지기, 10대 진사 집안이면서 이른바 육훈(六訓)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부호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을 대기도 했다고 한다.
육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마라 △만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등이다.
최씨고택에 거주한 최부잣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000석이었는데 1000석은 사용하고, 1000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000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이같은 육훈 실천은 ‘부자 몸사리기’로도 보이지만 주위사람으로부터 미움받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지혜라 생각된다.
경주최씨고택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진다. 요석공주는 무열왕과 김보희(김유신의 여동생)의 딸로 원효의 아내이자 설총(薛聰)의 어머니다.
경주 교동 최부잣집에서 나온 유명한 술이 경주교동법주다.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사옹원(司饔院)의 참봉을 지낸 최국준이 처음 빚었다 한다. 법주를 만들 때에는 최씨 집안 마당의 우물물을 쓰는데, 물의 양과 온도가 사계절 내내 거의 일정하며 옛부터 물맛이 좋다고 한다. 대량생산되는 시중의 경주법주와 다른 가양주로 꽤 비싼 가격에 팔리는 데도 찾는 이가 많았다.
향교 앞에서 월정교 공사가 한창이다. 원효대사가 월정교를 건너 요석공주를 만났다고 한다. 이렇게 생긴 아들이 설총이다. 원효가 파계하지 않고 설총을 방치했다면, 설총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60.57m의 다리 위에 누각과 지붕을 얹혔다하니 당시엔 웅대함이 비할 데 없었을 것이다. 고대 교량의 축조법과 토목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작이라고 한다. 올 하반기에 완공될 전망이다.
경주여행은 알면 알수록 학창시절 수학여행 때에 느꼈던 감회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깊이가 요구된다. 언제나 그많은 왕궁과 유적지를 답파할 수 있을까. 다 마치지 않은 숙제를 제출하는 학생처럼 서울로 돌아왔다. 아직 봄이 먼 2월인데도 여행 성수기를 피한다면 또다시 늦겨울이나 초봄에 와도 좋지 않을까. 역사유물에서 느낀 신라인의 고집불통 정신에 탄복하며, 지친 몸을 KTX에 실으니 눈 한번 뜨지 않고 어느새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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