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중랑구 소재 N병원에서 응급실로 이송된 환자가 돈이 없어 진료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지난 8일 중랑구에 사는 유모 씨는 극심한 복통과 오한으로 구급차를 타고 인근 N병원 응급실을 찾았지만 접수를 거부당했다. 두 달전 이 병원에서 진료받은 뒤 병원비 1만7000원을 납부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그와 동행했던 지인 오모 씨는 “병원 측은 지난번에 덜 낸 미수금을 내야 접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며 “당시 가진 돈이 1만원뿐이니 이거라도 받고 처리해달라고 했지만 결국 진료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결국 응급실 대기의자에 앉아 5시간 이상 기다리던 유 씨는 구토를 하며 쓰러졌고 3일 뒤 사망했다. 사인은 급성복막염이었다.
병원 측은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라 과거에 진료받을 당시 유 씨가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고 병원 도착 당시 스스로 돌아다닐 정도여서 응급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며 “가족에게 연락을 취하는 데 시간이 오래 지연됐다”고 해명했다.
현재 경찰은 이 병원을 압수수색해 CCTV 화면과 진료기록 등을 분석 중이며, 진료를 못 받은 것과 사망과의 인과관계가 있는지 조사할 계획이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과 같은 의료사건은 조사에 최대 6개월 정도 소요된다”며 “당시 근무했던 의사와 원무과 직원 등을 불러 수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정 서비스를 이용할 땐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는 게 당연하지만 사람의 생명마저 돈 몇푼에 좌지우지되는 현실은 씁쓸함을 자아낸다. 자세한 상황은 경찰 조사결과가 나와야 알겠지만 이번 사건은 ‘의료선진국’을 자처하는 한국에서 ‘의료후진국’의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또 ‘모든 국민은 차별받지 않고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응급의료 종사자는 정당한 사유없이 응급의료를 거부 또는 기피하거나 중단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특히 ‘응급의료비 대지급제도’라는 제도적 틀이 갖춰져 있는데도 이런 비극이 발생한 것은 병원 관계자들의 책임의식 결여, 나아가 해당 제도에 대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정부 부처의 홍보 부족이 원인이다.
응급의료비 대지급제도는 응급진료를 받고 사정상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할 경우 심평원이 이를 지급한 뒤 환자가 국가에 상환하는 것으로 1995년 도입됐다. 상태가 위급해 바로 응급처치를 받아야 된다고 판단되는 42개 질환 및 증상에 해당되며, 적용 기관은 지역병원 응급실부터 대학병원급 의료기관까지 모두 포함된다.
진료 전 원무과에 응급의료비 대지급 제도를 이용하겠다고 밝힌 뒤 응급의료비 미납확인서를 작성하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제도에 대한 홍보 및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이를 알고 있는 환자는 적다. 지난해 중앙응급의료센터 설문조사 결과 이 제도를 알고 있다고 답변한 환자의 비율은 9.8%에 불과했다.
병원은 이 제도를 이용할 경우 각종 행정서류를 구비해 신청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고, 신청 후 진료비를 지급받기까지 최대 5개월 이상 소요되므로 환자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길 꺼려한다. 또 심평원이 진료비 지급을 거부할 경우 이를 받을 방법이 없다. 실제로 지난해 심평원의 응급의료비 지급 거절비율은 16%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심평원 심사과정에서 과잉진료로 판정받아 진료비가 삭감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행법상 응급비 대지급 신청은 병원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 활용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건강세상네트워크 관계자는 “응급의료비 대지급제도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며 “제도가 병원의 미수금보장에 맞춰져 있어 환자의 신청 의사를 병원이 묵살해도 이를 강제할 수단이 없다”고 분석했다.
이를 개선하려면 모든 응급실과 병원 원무과를 대상으로 응급환자가 응급의료비 대지급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행정규칙을 마련해야 한다. 또 환자가 직접 심평원에 응급의료비 대납을 신청할 수 있도록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한다.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진료비를 아예 정부가 대신 내주거나 응급실을 이용한 사람 모두가 혜택을 입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환자도 많다. 그러다보니 제도를 이용한 뒤 진료비를 상환하지 않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한다. 심평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평균 상환율은 8.5%에 불과했으며, 1995년 이후 상환받지 못한 누적금액은 138억원에 달했다.
미수금상환율을 높이려면 기한내 상환하지 않을 경우 소득 및 재산정보 조회를 통해 강제집행절차가 진행될 수 있도록 법적조치를 구체화해야 한다.
명칭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도 있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현행 ‘응급의료비 대지급제도’라는 명칭이 환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 만큼 제도명을 의료기관미수금보장제도로 바꾸는 게 좋다“고 지적했다.
국민권익위원회도 응급의료 미수금 대불제도 활성화를 위해 △대불제도 이용률이 높은 의료기관에 인센티브 제공 △대불 신청절차와 증빙서류 간소화 △소재가 불명한 응급환자에 대한 진료비 지급방안 마련 등을 권고한 바 있다.
국내 대형병원들은 너도나도 외형적인 몸집 부풀리게 여념이 없고, 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는 정책 로드맵 없이 허울뿐인 공공의료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국내 환자들의 생명과 직결된 응급실 개선은 언제나 뒷전이다. 응급실 병상이 부족해 병실 밖 의자나 복도에서 환자가 대기하거나, 전문의가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막연히 기다리거나, 정작 응급처치가 필요한 중증환자가 경증환자보다 진료 순서가 밀리는 등의 폐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올해 초 복지부가 발표한 ‘2013년 전국 430개 응급의료기관 평가 결과’에 따르면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 등 ‘빅5’ 상급종합병원들의 응급실은 1년 내내 포화 상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대학병원을 포함한 대부분 의료기관이 겪고 있는 문제다.
병원의 경영난을 해소하려면 환자의 신뢰도 회복이 우선이고, 이를 위해 응급실 개선은 필수적인 사안이다. 또 응급의료의 질부터 높여야 진정한 의미의 공공의료를 이룰 수 있다. 정부·언론·의료계·시민단체가 힘을 합쳐 응급의료의 질을 향상시키고, 정부는 충분한 예산을 확보해 응급실에서 아까운 생명이 지는 비극을 최소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