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는 인간에게 질병을 초래하는 가장 강력한 위험 요소다. 그러나 노화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세포, 조직, 생리적 기능의 점진적 저하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현상이다. 현재까지 노화를 완전히 예방할 수는 없지만, 세포 기능을 최적의 상태로 되돌리는 전략을 통해 노화를 지연시키고 수명을 연장하려는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이고 최근 부각되는 트렌드가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epigenetic reprogramming)이다. 타고난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후성유전 정보를 재설정해 노화된 세포를 젊은 상태로 되돌리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노화된 세포를 ‘초기화’하는 것으로, 후성유전학적 시계를 거꾸로 돌려 세포의 건강과 기능을 회복시키고, 노화로 인한 퇴행성질환을 치료하는 데 중점을 둔다.
박봉현 한국바이오협회 산업정책본부 정책분석팀 과장과 정상용 차의과학대 교수의 도움말로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의 개념과 연구개발 방향, 관련 주요기업의 활동상을 알아본다.
후성유전학은 선천적인 DNA가 아닌 인간이 생장하면서 변화되는 후성적(후천적) DNA 변화로 인해 질병 또는 노화가 초래되거나 그 반대로 건강에 유익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연구하는 분야다. 예컨대 DNA에 메틸기가 붙는 DNA 메틸화와 히스톤 단백질의 변형 등 후성학적 변화가 인류의 건강을 악화 또는 개선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CRISPR-Cas9 기반의 유전자편집 기술과 DNA 메틸전이효소 및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를 표적하는(억제하는) 소분자 억제제 등을 활용해 후성유전적 상태를 조절하고 세포 재생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은 크게 완전한 리프로그래밍과 부분적 리프로그래밍의 두 가지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완전 리프로그래밍
완전 리프로그래밍은 체세포를 유도만능줄기세포(iPSCs)로 변환하는 과정으로 유도만능줄기세포는 자기 재생과 다양한 세포 유형으로 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줄기세포의 만능성은 Oct4, Sox2, Nanog 등의 전사인자에 의해 유지되며, 이는 줄기세포의 특성을 조절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만능성을 갖춘 줄기세포로 통째로 리뉴얼하여 항노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또는 줄기세포에 특정 후성유전적 상태가 확립되게 해 환자맞춤형 유도만능줄기세포의 생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배아줄기세포(ESCs)를 분리할 때 배아를 파괴해야 한다는 윤리적 문제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 논란이 적다.
완전한 세포 리프로그래밍을 촉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결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노화 관련 마이크로RNA(microRNA-195) 및 비암호화 RNA인 Zeb2-NAT를 억제하면 유도만능줄기세포로의 리프로그래밍이 더 쉬워질 수 있다.
하지만 노화와 세포 분화는 상호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즉, 세포의 완전한 탈분화를 달성해야만 후성유전적 초기화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후 (항노화) 세포가 다시 분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술적, 윤리적 어려움이 뒤따른다. 탈분화는 정상적으로 기능하던 분화된 세포가 분화 이전의 원시세포로 돌아가는 것으로 세포의 암화(癌化)도 탈분화의 일종이다.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의 분류. 한국바이오협회 제공
부분 리프로그래밍
줄기세포를 활용해 세포의 만능성을 추구하는 완전 리프로그래밍과 달리 부분 리프로그래밍은 만능성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세포 표현형을 유지하면서 ‘후성유전적 젊음’을 달성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이 유형은 ‘리프로그래밍이 유도한 젊음’(Reprogramming-Induced Rejuvenation, RIR)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 수 있다.
RIR은 세포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노화 과정을 되돌릴 수 있는 안전한 항노화 치료법으로 평가된다. 현재 주목받고 있는 RIR 기술로는 전사인자 기반의 리프로그래밍과 저분자 기반의
약리학적 개입 등 크게 2가지가 있다.
전사인자에 의한 유전자 리프로그래밍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으며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리프로그래밍 전략이다. 전사인자의 비정상적인 발현이 노화와 질병을 초래한다는 가정 아래 야마나카 인자로 알려진 네 가지 리프로그래밍 인자(Oct4, Sox2, Klf4, cMyc)를 새롭게 세팅함으로써 DNA 메틸화 같은 세포의 후성유전적 환경을 재설정하여 세포를 젊어지게 하고 조직을 재생시키는 데 목표를 둔다.
이 과정에서 세포가 완전한 만능분화능을 갖지 않도록 조절되므로 세포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고, 탈분화에 따른 종양 발생 위험이 최소화된다. 부분적 리프로그래밍을 통해 오토파지 및 미토콘드리아 기능과 같은 노화의 주요 특징도 개선될 수 있다.
포유류 세포 및 설치류 모델을 활용한 연구에서 성공적으로 노화 관련 표현형을 역전시킨 연구가 보고됐다. 예컨대 망막 신경절 세포(RGC) 및 시력 회복 연구에서 포유류 조직이 젊은 시절의 후성유전적 정보를 보존하고 있으며, 이를 활성화하면 조직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즉 Oct4, Sox2, Klf4 등의 전사인자를 발현하여 망막 신경절 세포에서 DNA 메틸화를 되돌린(제거한) 결과 시력 손실이 역전됐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야마나카 인자(Oct4, Sox2, Klf4, Myc)에 Lin28과 Nanog를 추가하여 리프로그래밍을 진행하여 인간 내피세포의 생물학적 나이를 약 5년 젊게 되돌렸다.
최근에는 부분적 리프로그래밍 기작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단일주기로 야마나카 인자를 발현시켰고 췌장, 간, 비장, 혈액에서 부분적으로 젊어지는 효과를 확인했다.
또 리프로그래밍된 세포가 분비하는 물질이 주변에 리프로그래밍 되지 않은 세포에도 젊음의 효과를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연구자들은 야마나카 인자 발현 후 회복기간이 매우 중요하며 많은 회춘 효과가 치료 종료 후 수 주 동안 서서히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야마나카 인자 외에도 세포 나이 리프로그래밍을 위한 후보물질들이 연구되고 있다. FOXM1, Tet 단백질 등이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에 관여하는 표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야마나카 인자 외의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 관련 전사인자와 주요 연구결과
MSX1: 노화된 근육생성세포(근원세포)에서 일시적으로 발현될 때 젊은 유전자 발현 회복
FOXM1: 주기적인 발현이 자연적인 노화를 지연시키고 쥐의 수명을 연장
Tet1, Tet2: 망막을 재생하기 위한 체내 리프로그래밍은 쥐에서 Tet 의존적으로 후성유전학적
시계를 재설정
ATOH1, Gf1: 두 인자의 공동 발현이 성숙한 포유류의 달팽이관 유모세포를 재생
Top2a: Topoisomerase2는 시험관 내 및 생체 내에서 부분 리프로그래밍에 필요하며, 쥐의
간 가소성과 재생을 향상
Ascl1, Brn2, Myt1l(BAM factors): 섬유아세포의 전사체를 신경세포 전사체로 빠르게 변화시켜 성공적인 리프로그래밍을 가능케 함
bHLH: 리프로그래밍 후 신경세포를 생성하며, 쥐의 허혈성 손상 회복에 성공적으로 사용
저분자 매개 화학적 리프로그래밍
저분자 화합물을 이용한 리프로그래밍은 비용 효율적이고 조절이 용이하며, 경구 투여가 가능해 대규모 생산에 이상적이다. 이러한 화합물들은 보통 500Da 이하의 크기를 가지며 효소, 수용체, 신호전달 경로 등 분자의 어떤 부분이든 표적할 수 있다.
대부분의 저분자는 메틸기전이효소 또는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일부는 이중 또는 복합 활성을 갖는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저분자 조합들이 세포 재프로그래밍에서 평가받았으며 5-azacitidine, trichostatin A, valproic acid 등을 포함하여 최소 10개의 저분자물질이 이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줄기세포 관련 전사인자의 형질전환 없이 부분적인 세포 리프로그래밍을 유도하여 세포의 정체성을 변경하지 않고 세포를 젊게 만드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유전적 조작방법(전사인자 발현)에 비해 더 안전하다.
DNA 메틸기전이효소 억제제
DNA 메틸화는 시토신 잔기의 C-5 위치에 메틸기를 추가하여 5-메틸시토신(5mC)을 형성하는 후성유전적 변형이다. DNA 메틸화 패턴의 이상과 노화의 연관성은 널리 보고돼 있다.
실제로 노화에 따른 DNA 메틸화 변화, 특히 특정 부위에서의 고메틸화(hypermethylation)는 암, 당뇨병, 신경퇴행성질환, 심혈관질환 등 여러 노화 관련 질환과 연관돼 있다. 따라서 DNA 메틸기전이효소 억제제를 이용하여 이러한 질환을 지연시키거나 되돌리는 것이 잠재적인 항노화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
임상 및 비임상 연구에서 5-azacitidine(Vidaza®), decitabine(Dacogen®), RG108 등의 메틸화 억제제가 노화 관련 질환 예방을 위한 치료후보로 확인되었다. 5-azacitidine과 decitabine는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 항암제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 약은 DNA 염기서열에 삽입된 후 DNA 메틸기전이효소와 불가역적 결합을 형성하여 메틸화를 억제한다.
5-azacitidine은 인간 지방유래 줄기세포의 노화된 표현형을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decitabine은 인간 중간엽 줄기세포의 인슐린 분비 세포로의 분화를 촉진해 당뇨병 환자를 위한 재생의학적 치료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보여주ᅟᅠᆻ다. RG108은 DNA 메틸기전이효소1을 선택적으로 억제하여 안전성과 효과성이 뛰어나며 산화 스트레스로 인한 세포손상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
물론 DNA의 저메틸화(hypomethylation)도 특정한 경우에 노화를 초래하므로 이를 억제하는 전략이 나올 수 있으나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하다.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억제제
노화가 진행되면서 히스톤 아세틸화의 변화가 발생한다. 특히 특정 히스톤 마커와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의 발현이 달라진다. 히스톤 아세틸화는 히스톤 아세틸전이효소(HATs)와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HDACs)의 균형에 의해 조절된다. 즉 유전자 발현 활성화(아세틸화)
및 억제(탈아세틸화)가 서로 견제하며 고온한다.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억제제는 히스톤 탈아세틸화효소 활성을 차단하여 히스톤 아세틸화를 증가시키고, 이를 통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 노화와 관련된 다양한 생물학적 변화를 완화할 가능성이 있어 으며, 항노화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
Sodium butyrate, Valproic acid, Phenylbutyrate 등이 대표적인 히스톤 탈아세틸화 억제제로 연구되고 있다. 이미 대사질환, 심혈관질환, 신경퇴행성질환, 암, 면역노화 등의 예방 및 치료제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