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7대 숲] ⑥교래자연휴양림 … 큰지그리오름까지 왕복 7km
2020-04-21 00:51:05
8월 매미울음 속 간간히 풍기는 누리장나무꽃향 … 우연히 발견한 제주홍단딱정벌레의 즐거움
한여름엔 더위와 습기 때문에 숲길 걷기도 그리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늘이 있어서 잠시 쉬기에 불편함이 없을 뿐 아니라 체력에 맞춰 쉬엄쉬엄 걸어도 대개 4시간 이내에 숲을 나올 수 있으니 그나마 자연휴양림의 숲길은 걸을 만하다. 제주도 내 자연휴양림의 길들은 잘 정비돼 낯선 방문자도 편하고 안전하며 숲을 즐길 수 있어 체력이 충분하지 않으면서도 걷기를 원하는 이들에겐 제격이다.
제주시 조천읍 함덕에서 멀지 않은 중산간 지역엔 좋은 숲길이 여럿 마련돼 있다. 교래자연휴양림, 절물자연휴양림, 한라생태숲, 사려니숲길, 삼다수옛길, 동백동산 산책로까지 모두 차로 10~20분 내외의 거리에 있다. 절물자연휴양림은 인공조림지인 삼나무숲이 울창하고 동백동산은 다듬어지지 않은 숲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나무들의 모습이 압도적이다.
교래자연휴양림의 숲 역시 용암 돌무더기 위에 형성된 나무와 덩굴의 곶자왈이다. 숲이 울창해 숲길은 컴컴하지만 그늘을 만드는 나무들의 햇빛 경쟁은 그리 치열해보이지 않는다. 이미 곳곳에서 경쟁이 끝나 커다란 나무들이 충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크지 않은 빈 공간을 두고 작은 나무들이 다투고 있다. 숲속의 습도 역시 절물자연휴양림이나 동백동산보다는 높지 않아 걷기에 훨씬 편했다. 교래자연휴양림 내의 숲길은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걷기에 큰 부담은 없지만 돌투성이 길이 계속되기 때문에 긴장하고 걸어야 한다.
교래자연휴양림은 오름을 둘 포함하고 있다. 입구의 늪서리오름은 야영장과 산책길로 이용되고, 조금 멀리 떨어진 큰지그리오름까지는 산책로가 정비돼 있다. 마치 ‘비밀의 정원’으로 향하는 느낌의 휴양림 입구에 들어가면 초가지붕을 인 제주 전통가옥 형태의 관리사무소가 색다르다. 여기서 40분 정도 소요되는 생태관찰로를 가볍게 걸어도 되고, 왕복 7㎞의 오름산책로를 걸어 큰지그리오름 정상의 전망대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볼 수도 있다.
숲길로 들어서니 요란한 매미 울음소리가 모든 소리를 삼키고 있다. 새소리가 인상적이었던 절물자연휴양림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8월에 접어들면서 오랫동안 땅속 생활을 하던 매미들이 한꺼번에 숲을 덮친 듯하다. 도심에서 요란한 매미소리에 새벽잠을 설친 기억이 있다면 8월의 제주 휴양림 걷기가 불쾌할 수도 있겠다.
두리번거리며 숲길을 걷는데 꽃향기가 스친다. 근처 어딘가에 틀림없이 누리장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을 것이다. 산책로 입구 관리사무소 옆에서 본 꽃이다. 잠시 서서 돌아보는데 꽃향이 다시 보답한다. 누리장나무가 그리 자주 보이는 게 아닌데도 이 숲에서는 잊지 않을 만큼의 시간을 두고 꽃향이 찾아왔다.
길 옆으로 ‘숯가마터’ 또는 ‘움막터’라는 안내표지가 서 있지만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데다가 온통 풀과 나무와 덩굴로 덮여 있어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만히 서서 자세히 봐야 돌로 쌓은 담장이 풀잎 사이로 겨우 보인다. 한 때는 사람들이 머물렀던 흔적이지만 이젠 그냥 돌무더기로 돌아가고 있다. 자연의 복원력은 느리지만 위대하다. 전북 고창의 람사르습지인 운곡습지에 가면 사람이 떠난 논과 밭, 그리고 마을이 어떻게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7월과 8월의 제주 숲길은 온통 초록뿐이다. 노랑과 분홍색 혹은 흰 꽃이 드문드문 보인다면 훨씬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아쉽게도 눈에 보이는 꽃은 거의 없고 온통 발에 밟히는 돌이 불편감만 전한다. 그래도 길 가장자리를 살피며 혹시 그동안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해본다.
문득 어두운 그늘 속에서 1cm 남짓한 크기의 흰 꽃송이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들고 있던 카메라로 밝게 찍어 확대해 보니 틀림없이 야생란의 한 종류였다. 이제껏 책에서도, 실제로도 본 적이 없는 꽃이다. 휴대전화로 검색해보니 ‘붉은사철란’이다. 다른 꽃들까지 촬영해 확대했다. 꽃잎 끝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붉은 물이 들었다.
몇 년 전 비자림을 걷다가 산책로 옆 풀 사이에서 마치 아래 단이 넓은 치마를 입고 나풀나풀 춤을 추는 모양의 새우란꽃을 보았을 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치악산 정상 길옆에서 감자란꽃을 보았을 때도 지금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즐거워했다.
붉은사철란 꽃 위에 엎드리다시피 해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데 마주오던 아주머니들이 멈추어 서서는 나를 살핀다. 낙엽 위에 피어 있는 ‘숲속의 요정’을 보고는 저마다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는다. 잠시 숲이 왁자지껄해졌다. 그들도 처음 본 꽃이었다. 나도 그들도 운수 좋은 날이었다.
마음이 들떠 설렁설렁 보며 숲길을 걸었다. 길 위에 엎드린 딱정벌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또 사진을 찍었지만 이 벌레 이름을 알아볼 방법은 막막했다. 그런데 며칠 뒤 제주 시내의 자연사박물관에 갔다가 우연히 이 벌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제주홍단딱정벌레가 엊그제 본 그 벌레의 이름이었다.
1843년 영국인 의사 아담스 (A. Adams)가 우리나라를 탐사하던 중 제주에서 이 딱정벌레를 채집해 본국의 곤충학자인 테이텀(T. Tatum)에게 보냈다. 1847년 테이텀은 이 벌레를 Carabus smaragdinus monilifer Tatum이란 학명으로 전문 학술지에 발표했다. 이렇게 제주홍단딱정벌레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린네식 근대 학명으로 발표된 곤충이 됐다.
붉은사철란도 제주홍단딱정벌레도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해서 내 삶을 바꿀 만큼의 의미는 아니다. 다만 교래 휴양림에서 잠시 내게 큰 즐거움을 주었으니 뭘 더 바랄 것인가. 언젠가 이맘때쯤 다시 제주 숲길에 들면 또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걷게 될 것이다. 치악산을 오를 때마다 감자란을, 비자림을 갈 때마다 새우란을 생각하듯이.
오근식 여행작가 ohdant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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