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숲길은 단연 사려니숲길이다. 본래 사려니숲길은 제주시 조천읍 봉개동의 비자림로에 있는 숲길 입구(북서쪽)에서 출발해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의 사려니오름까지의 15㎞ 숲길을 말한다. 최근에는 비자림로의 숲길 입구에서 물찻오름(조천읍 교래리)과 붉은오름(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을 거쳐 남조로의 사려니 입구(가시리·남동쪽)까지 약 10㎞의 길을 통상 사려니숲길로 부른다.
사려니의 뜻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사려니’가 ‘실 따위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동그랗게 포개어 감는다’는 의미의 제주어인 ‘ㅅ·려니’로 보는데 사려니오름 정상에 거대한 바윗돌이 돌아가며 사려 있기에 ‘사려니오름’이라 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사려니’가 ‘살안이’ 혹은 ‘솔안이’에서 왔으며 ‘살’ 혹은 ‘솔’은 신성한 곳이라는 신역(神域)의 산명에 쓰이는 말이므로 ‘사려니’는 ‘신성한 곳’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제주의 오름 이름은 그 뜻을 풀 수 없는 경우가 꽤 있으므로 ‘사려니오름’의 정확한 뜻풀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사려니숲길의 가장 큰 장점은 어느 곳에서 출발하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길이 잘 정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급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 위치와 길 안내 및 숲 해설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안전하다.
서귀포시 남조로의 붉은오름 사려니숲길 입구 주차장엔 연중 계절과 요일을 가리지 않고 늘 렌트카와 관광버스가 북적인다. 넥타이를 매고 고급 구두를 신은 복장으로도 단 몇 걸음만 걸어 들어가면 울창한 삼나무 숲이 호위하며 짙은 그늘을 드리울 뿐 아니라 길은 시멘트 또는 다른 재질로 포장되어 있으니 세상 어디를 가도 이렇게 편하게 깊은 숲속을 걸을 수는 없다.
이곳 붉은오름 사려니숲길 입구에서 걷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개 삼나무 조림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의 길을 걷는데 멀어야 왕복 1.5㎞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사려니숲길을 가 본 적이 있다며 울창한 삼나무숲길을 이야기 하는 이유다. 그러나 편도 10㎞터의 길을 다 걸으면 그들이 본 삼나무숲길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길인지 알게 된다.
가끔은 사려니숲길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보고 나선 사려니를 밟아봤다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있다. 좁고 구불구불한 숲속 오솔길로 인기척이라곤 없는 호젓한 길이라는데 알고 보니 절물오름 입구 근처의 사려니숲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안내도에 따라 사려니숲길 입구까지 2.5㎞의 조릿대숲길을 걸은 경우였다.
사려니숲길 걷기의 참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제주시 봉개동 남조로의 사려니숲길 입구에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좋다. 이곳은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걸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 중산간지대의 자연림을 먼저 만나면서 제주 숲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삼나무 숲과 자연림이 혼재된 입구에서 걷기 시작해 150m쯤 가면 좌우에 자연림이 나타나면서 ‘새왓내 숲길 순환로’ 안내표지가 보인다. 무시하고 그대로 직진하기엔 1.5km의 순환로가 너무 매력적이다. 좌로 돌든 우로 돌든 야자매트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면 누구든 걷기에만 집중할 수는 없다.
숲 속 깊은 곳을 바라보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살피기도 하며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처음 보는 작은 풀에 잠시 정신을 빼앗기기도 한다. 보라색 투구꽃, 옛 왕관의 깃을 닮은 포자낭을 키운 고사리삼, 한여름에 꽃을 피웠던 붉은사철란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숲에서 이들을 만나면 모르는 새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붉은오름 사려니숲길 입구까지 10㎞를 다 걸어도 이렇게 아름다운 오솔길은 없다.
가슴벅찬 오솔길을 돌아 다시 원래 서 있던 곳에서 넓은 신작로 길을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 장승처럼 우뚝 멈추었다. 저 앞에서 노루가 펄쩍 뛰어 나와 길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얼떨결에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노루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숲으로 들어갔지만 멀리 가지는 않고 그저 태평스럽게 나뭇잎을 뜯고 있었다. 이 숲의 주인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물찻오름 입구까지는 4.5㎞를 걷는다. 물찻오름의 정상까지는 채 1.5㎞가 되지 않지만 10여년째 탐방로 자연회복을 위한 자연휴식년제가 시행되고 있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개방되지 않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2008년부터 11년간 폐쇄됐고 올해 1년이 더 연장돼 내년 2021년 1월 1일 이후에 개방될 것이라 하지면 산림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또 연장될 가능성도 있다. 현재는 성판악으로 가는 길과 사려니오름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모두 막혀 있어서 생각 없이 걸어도 붉은오름 사려니숲길 입구까지는 길을 잃을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물찻오름 입구를 지나 2㎞쯤 가면 월든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삼나무숲이 이어진다. 한여름이라면 길가의 수국이 삼나무 숲보다 훨씬 아름다운 길이다. 삼나무 숲 사이를 지나는 넓은 길을 비록 수국이 수를 놓고 있지만 단조롭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숲속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타난다.
미로처럼 보이는 컴컴한 이 길이 있어 사려니숲길이 덜 지루하다. 삼나무 숲 속엔 눈에 띠는 풀과 꽃이 거의 없다. 떨어진 작은 삼나무가지들이 표면을 두툼하게 덮어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걷다보니 조금의 휘어짐도 없이 수직으로 쭉쭉 뻗어 오른 삼나무도 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려니숲길은 크고 넓은 길만 걸어서는 숲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없다. 새왓내 숲길 순환로와 삼나무 숲속의 미로숲길 등의 샛길에서 숲의 평화와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햇빛 한 줄기 들지 못하는 숲 속에서도 풀과 나무는 새로 싹을 틔우며 숲의 주인이 될 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