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의 백록담보다 더 크고 깊은 산굼부리 분화구는 바닥이 입구의 주차장보다 100여m나 더 아래에 있다. 분화구 경사면은 높이에 따라 식물군의 분포가 달라지는 식물원이다. 능선 너머로 멀리 성산일출봉까지 보인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의 ‘산굼부리’는 산에 생긴 구멍(굼)이란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산굼부리가 특별한 이유는 그 깊고 큰 분화구 때문이다. 지름 650m, 둘레 2㎞, 깊이 132m의 분화구는 한라산 백록담보다도 더 넓고 깊다.
산굼부리의 관리사무소에서 제일 높은 곳까지의 높이가 31m인데 반해 이곳에서 분화구 바닥까지의 깊이는 132m다. 분화구 바닥이 주차장 지면보다 100m나 아래에 있다. 지질학자들은 산굼부리가 용암이 분출된 후 마그마의 공급이 갑자기 줄어들었거나, 마그마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지하에 공간이 형성되면서 지반이 가라앉아 만들어진 함몰분화구라고 설명한다.
8월말 산굼부리에서 억새풀 너머로 보이는 한라산이 아련하다.
산굼부리는 오름이라기보다는 잘 정돈된 공원이다. 특히 억새밭이 정성스럽게 잘 가꿔져 10월 중순부터 11월까지 일렁이는 억새꽃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더욱이 모든 산책로가 잘 다듬어진 제주화산석으로 깨끗하게 포장돼 누구든 발에 흙 묻히지 않고 걸으며 제주를 살필 수 있다. 유모차나 휠체어와 함께 둘러보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10월 중순에 접어들면 산굼부리는 온통 억새꽃이 하얗게 일렁인다. 제주 동쪽엔 산굼부리, 서쪽엔 새별오름이 대표적인 억새 장관이다.
산굼부리의 넓은 억새밭이 온통 하얗게 변하면 사람들은 그 샛길을 따라 걸으며 ‘인생 사진’ 찍기에 바쁘다. 산굼부리 위에 서면 한라산 능선이 더욱 예쁘다. 깊은 분화구와 그 주변 경사면의 울창한 숲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여러 오름들 사이로 멀리 얼핏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제주 산굼부리의 상사화(왼쪽)와 무릇꽃. 제주상사화는 5월에 잎이 마르고 8월에 자라난 꽃줄기 끝에 주황색이 짙은 꽃을 피운다. 드물게 밝은 노란색 꽃이 피기도 한다. 8월 구상나무길 잔디밭에는 연보라색 무릇꽃이 지천이다.
산굼부리에서 숲을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볼 필요는 없다. 전망대 왼쪽에 구상나무길로 들어서서 1.2㎞의 길을 천천히 걷다보면 잘 다듬어진 잔디밭엔 무릇꽃이 한들거리고 억새풀 사이에선 야고가 고개 숙여 인사한다. 잔대는 작은 꽃을 흔들고 아직 이름을 모르는 이런저런 꽃들이 알아보아 주기를 바라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구상나무는 한라산에서 발견된 우리 고유종이지만 지적재산권이 미국에 있어 정원수나 크리스마스트리용으로 수입하려면 지재권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구상나무는 1907년 한라산에서 처음 발견돼 1915년 당시 미국 아놀드수목원 소속 연구원이었던 어니스트 헨리 윌슨(Ernest Henry Wilson) 하버드대 교수에 의해 존재가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키 작고 아담한 구상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 용도로 인기를 얻었다. 현재 구상나무의 지적재산권은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이 갖고 있어 우리나라 고유종임에도 정원수 등의 용도로 수입할 때는 지적재산권 사용료를 지불하고 수입해야 한다.
우리나라 고유종인 털개회나무가 미국에서 미스킴라일락이 되어 수입되고 있는 상황과 같다. 산림청은 1997년 털개회나무를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로 지정했다. 구상나무 역시 기후 변화에 따른 생육환경의 변화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구상나무길을 돌아 나와 ‘꽃굼부리’로 불리는 잔디밭을 돌고 보면 산굼부리 출입문까지는 몇 걸음 되지 않는다. 산굼부리 전망대까지 높이가 31m에 불과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10월 중순이면 산굼부리와 함께 제주도 서쪽에서도 새별오름(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이 멋진 억새꽃 소식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