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11 11:18:14
산 크리스토발 언덕에서 바라본 산티아고 신도심
칠레는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뜨거운 사막부터 꽁꽁 언 빙하까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먹거리가 풍부하고 무엇보다 와인의 신흥강자로 떠오르고 있어 부푼 기대를 안고 칠레의 중심 ‘산티아고’에 발을 내디뎠다.
산티아고 도심 입구에 있는 모네다궁전(La Moneda Palace)과 헌법광장(Plaza de la Constitucion)에 도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모네다 궁전, 이를 둘러싼 높게 솟은 칠레 국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모네다’는 스페인어로 화폐나 통화 등을 뜻한다. 본래 조폐국으로 사용되다가 칠레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모네다 궁전이라고 불린다.
궁전 앞 헌법광장을 중심으로 각 정부 부처가 밀집해 있다. 모네다궁전 주변에는 높은 고층 건물들이 빼곡히 서 있는데, 특히 칠레 증권거래소가 있는 ‘뉴에바요크’(Nueva York) 거리는 이름처럼 뉴욕 증권거래소가 있는 월스트리트와 닮았다.
모네다궁전을 지나 아르마스광장에 도착했다. 중남미 도시들을 여행하면 같은 이름의 아르마스광장들을 만날 수 있는데, 도시별로 특색을 살린 광장의 모습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광장을 중심으로 대성당과 시청, 국립역사박물관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광장 중심에는 분수대와 독립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광장은 열대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부터 여행객, 상인 등으로 북적북적하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지나가는 여행객의 발길을 잡고, 마술이나 노래 등 길거리 공연은 서로 경쟁하듯 실력을 뽐내고 있다.
아르마스광장 한쪽 편에 위치한 쇼핑가와 고급 레스토랑들은 현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더한다. 광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한 사람이 와서 말을 건다. 내용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사용하지 않을 땐 가방에 넣고 다니라는 것이다. 산티아고의 화려한 모습에 남미에 왔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다시 경각심을 갖고 급히 소지품을 추슬렀다. 특히 아르마스광장에는 소매치기가 많은 편이니 소지품에 유의해야 한다.
산티아고 북쪽에 있는 산 크리스토발 언덕으로 향했다. 마푸초강을 지나 ‘산티아고의 홍대’로 볼 수 있는 벨라비스타거리(Barrio Bellavista)에는 세련된 식당과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직접 손으로 만든 공예품이 즐비하고, 고급 레스토랑엔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로 가득하다.
젊음의 거리를 지나 조금만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산 크리스토발 언덕으로 올라가는 푸니쿨라 탑승장이 나온다. 평일 이른 시간이지만 산티아고를 찾은 관광객들에게는 필수 코스여서 사람들이 줄지어 탑승 순서를 기다린다. 푸니쿨라는 가파른 언덕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데, 많은 사람이 탑승할 수 있도록 계단식으로 층이 나눠져 있다. 탑승장을 떠난 푸니쿨라는 천천히 이동해 전망대에 도착했다. 파란 하늘 끝에 눈 덮인 안데스산맥이 보이고, 그 아래 빽빽하게 서 있는 빌딩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 꼭대기에는 성모마리아상이 산티아고를 굽어 살펴보고 있다. 꼭대기 벤치에 앉아 잠깐 쉬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식혜처럼 흰 쌀로 가득 찬 음료를 마시고 있다. 이 음료는 ‘모떼 콘 우에시오’(Mote con Huesillo)라는 칠레 전통음료다. 복숭아와 설탕, 계피를 함께 넣고 끓여 차갑게 식힌 물에 밀쌀을 넣어 만들었다. 한잔 마셔보니 진한 복숭아 향과 달달함이 목 끝까지 전해진다. 칠레 산티아고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 앉아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인 후 언덕을 내려왔다.
칠레하면 빠질 수 없는 ‘와인’을 만나기 위해 와이너리 투어를 예약했다. 산티아고 인근에 있는 마이푸 밸리에는 유명한 와이너리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칠레 대표 와이너리인 ‘콘차이토로’를 방문하기로 했다. 콘차이토로 와이너리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와이너리 TOP 10’에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다.
콘차이토로 입구에 도착하니, 견고해 보이는 베이지색 정문과 근사한 저택이 눈에 띈다. 입구에서 받은 스티커를 옷에 부착한 뒤 잠시 기다리니 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스티커는 투어에 참석하는 그룹을 식별하기 위해 배부된다. 이를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이너리에 방문하는지 알 수 있다. 투어는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으로 나눠지는데, 온라인으로 신청할 때 해당 언어를 선택할 수 있다.
와이너리 투어는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콘차이토로 가문의 저택을 시작으로 다양한 품종의 포도를 만날 수 있는 와이너리와 숙성고를 들르고 콘차이토로 브랜드 와인을 시음하게 된다.
우거진 나무 사이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콘차이토로 가문의 저택과 정원을 만날 수 있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세워진 저택은 꼭 언덕 위에 지어진 신전을 보는 것 같다. 저택을 등지고 정원을 바라보면, 넓게 펼쳐진 푸른 초원은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정원을 가볍게 산책한 후 옆에 위치한 와이너리로 이동했다. 콘차이토로 와이너리의 모습은 상상한 그대로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평야에 가지런히 정렬된 포도나무와 싱그러운 포도향. 가까이 있는 말벡 품종으로 다가갔다. “한번 먹어봐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으니 가이드는 웃으며 먹을 수 있지만 아직 익지 않았고, 우리가 먹는 포도의 맛과는 달라 바로 뱉을 거라며 겁을 준다. 맛이 궁금했지만 곧 있을 와인 시음을 위해 입안을 깨끗이 해두기로 했다.
와인 숙성고는 은은한 조명에 고전적인 실내 장식이 고급스런 분위기를 내고 있다. 일렬로 누워있는 오크통 끝에 뿔이 달린 그림자가 보인다. 저게 뭐지? 하는 순간 불이 꺼지고 사방의 벽에서 애니메이션과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악마의 와인, ‘디아블로’의 스토리를 입힌 것이다. 조용한 숙성고를 재밌는 장소로 바꾼 콘텐츠 창조력에 감탄했다.
하이라이트인 시음에 나섰다. 정돈된 테이블 위에 콘차이토로 와인과 깨끗하게 닦인 와인 잔들이 늠름하게 놓여 있었다. 가이드의 간단한 와인 설명과 함께 시음이 시작됐다. 콘차이토로에서 유명한 돈 멜초와 프리미엄 와인인 마르께스 데 까사 콘차가 보였다.
돈 멜초 와인은 설립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와인으로 와인 스펙테이터 TOP100에 무려 8번이나 선정돼 국내에서도 명성이 높다. 코로 와인의 향을 음미한 다음 한 모금 삼켰다. 레드와인 특유의 깊은 묵직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와인의 부드러움은 입 안 가득 맴돌았고, 긴 여운과 함께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투어가 끝나고 돌아오는 내내 입맛을 다시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숙소 앞에 있는 마켓을 들렀다. 한 쪽 진열장을 가득 채운 와인들 중 하나를 집어 담고, 함께 먹을 체리와 치즈를 구입했다. 과실의 싱그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화이트와인과 고소한 치즈, 입 안을 상큼하게 만들어주는 달달한 체리까지.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이만한 게 또 있을까.
노윤수 여행칼럼니스트 roh_y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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