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08 12:16:07
간재 전우를 모신 안양사 요즘 지방자치단체마다 관동팔경, 단양팔경, 강릉팔경 경주남산팔경 같은 것을 만든다. 태안에도 팔경이 선정됐는데 필자 개인적 생각으로는 구색이 잘 갖춰져 있지 못한 것 같다. 필자는 다음 8경 중 만리포와 가의도는 근처에만 갔지 직접 가보진 못했다. 8경을 정한 것은 아쉬움이 있으면 다음에 또 놀러오란 뜻일 터이니 두세 번은 더가야 완전정복이 될 듯하다. 또 태안은 그만큼 몽환적이고 아늑한 휴식을 주는 곳이어서 다시 가도 질리지 않을 고장이다.
태안팔경과 함께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태안군내 주요 유적지 몇 곳을 가본 감흥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1경 백화산(白華山)
백화산은 해발 284m의 낮은 산이지만 태안 군내가 거의 다 보인다. 멀리 몽산포 바닷가도 눈에 들어온다. 백화산 정상 부근 쌍괴대의 괴(槐)자는 원래 회나무(회화나무, 괴화나무)로 선비의 지조를 나타낸다. 나무 목 변에 귀신 귀자가 붙어 예부터 잡귀를 몰아내는 나무로 불렸다. 더러 느티나무도 이 글자로 표현한다. 현재 괴화나무 대신 느티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으나 수령이 어리다. 어느 마차꾼이 이곳에서 마차바퀴를 만들기 위해 느티나무를 베어갔다는 설이 전해진다. 쌍괴대는 1902년 태안군수 이기석이 조성했다.
그의 부친인 이희열은 제염업으로 부를 일으켰다. 장남인 이기석 군수 외에 차남 이기훈은 중추원의관, 삼남 이기상도 군수, 4남인 이기승은 참봉을 지냈다. 이기승은 화림농장을 조성하는 등 농법개량과 조림사업으로 부호가 됐다. 그는 1905년에 화양의숙을 세웠고 이는 1911년 태안초등학교의 전신인 태안공립보통학교가 됐다.
이기석 군수의 장남인 이영진(李寧鎭)은 큐슈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여러 회사 사장을 거쳐 해방 후 초대 충남 도지사(1948.10.18~1951.12.17)와 국회의원(충남 아산, 6대)을 지냈다.
백화산 정상 가까운 곳에 국보 제307호인 태안마애삼존불상이 있다.바위에 돋을새김(양각)한 삼국시대 백제의 대표적 불상이다. 가운데에 키 작은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있고 왼쪽에 석가여래(釋迦如來立像), 오른쪽에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이 배치돼 있다. 불상의 높이는 각각 2.23m, 2.96m, 3.06m. 중앙에 본존불(本尊佛),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불 형태와 달리 가운데에 보살상,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불상 배치를 나타낸다. 강건한 얼굴, 당당한 신체, 묵중한 법의(法衣) 등이 6세기 후반의 백제 불상 양식을 나타낸다.
태안 마애삼존불은 여러 모로 서산 마애삼존불과 비교된다. 만들어진 연대가 백제시대로 둘 모두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되지만 서산 마애불이 조각기법이 더 섬세하고 모양새나 예술성이 더 높고, 보존상태 등이 좋은 것으로 보아 태안 마애불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태아 마애불은 중국 북제(北齊) 불상 양식 계통을 따르고 있고 중국 석굴 바깥벽에 새겨진 불상들과 유사해 중국 문화의 해상교류 및 중국 석굴의 영향이 보이는 최초의 예이다.
큰 바위에 사각형의 감실(龕室)을 마련했다. 가운데 보살상은 양손으로 보주(寶珠)를 받들고 머리에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썼으며 다리에 X자형으로 교차된 옷자락을 표현하였다. 반면 양쪽 불상의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해 중생에게 베푸는 인상) 자세이고, 왼손은 약상자(藥盒)을 들었으며 어깨는 넓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으며 직사각형의 얼굴에 귀가 길어 어깨에 닿았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육계(머리뼈가 저절로 솟아 상투 모양이 된 것)가 표현되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이다.
부처의 코와 귀가 닳아져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부처의 코와 귀가 아들을 낳거나 병을 낮게 한다는 민간의 속설 때문에 그동안 많이 훼손된 탓이다.
태안마애불 인근에 태을암이란 암자와 김해 김씨 세력가가 명당이라고 찜하고 ‘태을동천’이란 새긴 암벽도 있다. 김해 김씨가 세도를 부려 태을암 인근의 땅을 빼앗고 바위에 가락국 기원 연호를 표시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가락국의 부활을 꿈꾸며 왕이 되고 싶은 꿈을 꿨나보다.
제2경 안흥성
조선시대인 1655년(효종 6년)에 축조된 석성(石城)으로 높이 3.5m, 둘레가 1714m이다. 서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았으며 본래 안흥진성(安興鎭城)으로 불렸다가 현재 안흥성으로 통칭된다.
조선 효종 때 김석견(金石堅)이 상소(上疏)해 안흥진성의 축성(築城)을 청원하자 왕은 지경연사(知經筵事)인 이후원(李厚源 1598~1660)에게 안흥진성 축조에 대한 필요성을 물었다. 이후원이 천연의 요새로 군대를 주둔하고 양곡을 저장하면 외적의 방어와 호남과 영남의 제어에 유리할 것이라 답했다. 이에 효종이 충청감사에게 명을 내려 성을 쌓게 했다. 이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어 군사상 중요한 임무를 맡아보게 했고, 중국의 사신을 영접하기도 했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으로 성 안의 건물이 거의 불타 없어졌다. 동문(東門)을 수성루(守城樓), 서문(西門)을 수홍루(垂虹褸), 남문(南門)을 복파루(伏波樓), 북문(北門)을 감성루(坎城樓)라 불렀다. 이 중 서문만 남아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성곽의 외형은 대체로 잘 유지되고 있다.
태안의 고성터로는 안흥성, 태안읍성, 소근진성, 백화산성, 토성산성, 두야리산성, 양잠리산성, 한의산성 등 8곳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안흥성 안에는 20여호의 민가와 태국사(泰國寺) 등이 있다. 태국사는 백제 무왕 34년 국태민안의 염원을 담아 창건됐고 조선 세종 때 중창돼 중국 사신의 무사항해를 빌었다. 국란 시에는 승병을 관할하던 호국불교의 유래가 깊은 역사적 사찰이다. 그후 동학농민운동으로 소멸돼 명맥만 유지하다가 1982년에 개수되고 전통사찰 47호로 지정됐다.
제3경 안면송림
한국의 소나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육송(홍송, 적송)과 해송(곰솔, 흑송)이다. 육송은 송순(어린 솔잎)이 백색이고 나무껍질이 붉다. 해송은 바닷가의 염분에 잘 견디며 송순이 검은 빛이 나고 껍질이 하얗다. 우리나라의 적통 소나무는 아무래도 육송이다.
대표적인 육송 중 하나인 금강송은 울진, 봉화(봉화군 춘양면) 등 경북 북부와 강원도 일부에서 자란다. 울진사람은 금강송을 울진송으로 불러야 맞다고 한다. 금강송의 집산지인 춘양면의 이름을 따 춘양목이라고 한다.
소나무는 종이 같더라도 태어나고 자란 곳에 따라 모양과 빛깔, 목재의 결과 강도 등이 다르다. 금강송은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정기를 받아 국내 최고로 쳐준다. 싱싱한 목재는 껍질은 물론 거죽을 벗겨낸 몸통도 붉다. 그래서 황장목(黃腸木)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송은 오로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간다.
배롱나무처럼 실실 허리를 꼬며 자라는 경주 삼릉의 솔숲과는 견줄 수 없는 품격이 있다. 경주에선 꼿꼿한 소나무를 집을 짓기 위해 남획적으로 벌채하였기 때문에 휘어진 소나무만 남았고 결국 곧은 소나무는 씨가 말랐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조선왕실은 금강송 군락지를 함부로 벌채할 수 없는 봉산(封山)으로 지정하고, 궁궐을 짓거나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만 베어다 쓰도록 했다. ‘억지춘향’이냐 ‘억지춘양’이냐의 어원을 놓고 논란도 많은 데 현재는 억지춘향만 표준어다. 변학도가 억지로 춘향에게 수청을 들도록 강요했다거나 질 좋은 춘양목(별칭 춘향목)이 귀해 가짜 춘양목을 속여 팔았다는 데서 유래된 성어다.
다만 금강송은 줄기가 밋밋하고 곧게 자라며 외형적으로 육송의 형태이나 곰솔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소나무와 곰솔간의 잡종으로 보기도 한다.
안면송림은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자란 천혜의 적송 군락이다. 안면송은 울진송이나 춘양목 못잖게 궁궐을 짓고 배를 만드는 재료로 쓰일 정도로 재질이 우수했다고 한다. 조선 중종 이후 왕실로부터 특별보호를 받았으며 현재 수령 100년 안팎의 안면송 천연림이 430만㎡에 걸쳐 펼쳐져 있다.
안면송림에 들어서는 순간 시원스레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들에서 뿜어 나오는 솔향기와 피톤치드에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숲속의 고요함이 아늑함을 준다. 송림 중심 부에는 목재 생산 과정과 용도, 산림의 효용가치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산림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생태습지원도 조성돼 있다.
원래 안면도는 육지였으나 조선시대에 해운을 위해 수로를 내면서 섬이 됐다고 한다. 서측 해안선을 따라 기지포, 두여, 꽃지, 방포, 샛별, 안면, 밧개, 백사장 등 해수욕장이 널려 있다. 아무데나 가도 다 좋다.
제4경: 만리포
만리포 해수욕장은 부안 변산의 변산해수욕장, 충남 보령의 대천해수욕장에 이어 서해안 3대 해수욕장으로 꼽힌다. 장장 3㎞의 긴 백사장에 저녁 노을이 아름답다.
만리포 입구에는 반야월이 작사하고 김교성이 작곡한 ‘만리포 사랑’ 노래비가 서 있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 /
그립고 안따까워 울던 밤아 안녕히 / 희망의 꽃구름도 둥실둥실 춤춘다 /
KBS 가요무대에서 많이 들어본 곡조인지라 정겹다.
만리포 북쪽으로 천리포, 백리포가 이어져 있다. 푸른 수평선을 배경으로 늘어선 해송 사이를 트레킹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의항해수욕장에서 망산고개를 넘어 백리포를 지나 천리포, 국사봉, 만리포에 이르는 약 9㎞의 코스다. 약 3시간 걸리는 데 국사봉 정상 전망대에서 오른쪽(북쪽)으로 백리포, 바로 앞의 천리포, 왼쪽으로 만리포를 굽어볼 수 있다고 한다. 만리포나 천리포에 갔으면 천리포수목원도 들러봐야 화룡점정이다.
제5경: 신두리 해안사구
고운모래가 사막의 언덕처럼 쌓인 곳이 신두리 사구다. 우리나라 해안에서는 보기 힘든 생태계다. 이곳은 2001년 11월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됐다.
신두리 해안 사구는 모래가 겨울 북서풍에 의해 개펄과 해변에서 육지로 이동돼 사구를 형성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바닷바람이 거셀 때면 모래알이 움직이는 모습이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잔잔하고 태양이 뜨거울 때면 드라이한 사막지역과 비슷해 이국적인 자연경관을 연출한다.
길이 약 3.4㎞, 폭 약 0.5∼1.3㎞의 모래언덕으로 육지과 해안의 완충공간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두웅습지에는 환경부가 멸종위기 종으로 지정한 맹꽁이, 금개구리, 구렁이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황조롱이 등도 관찰된다고 한다. 물이 마르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습지인 두웅습지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
매년 5월말부터 7월초에는 해당화가 핀다. 해당화는 바닷가 모래땅과 산기슭에서 나는 낙엽관목으로 물 빠짐이 좋고 햇볕을 많이 받아야 잘 자란다.
펜션들이 무차별적으로 지어져 사구를 훼손했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지금도 줄지어선 펜션이 흉물스러운 게 사실이다. 인공건축물은 자연스런 모래의 이동을 막아 생태계의 순환을 방해한다. 2012년에 사구 복원사업이 이뤄졌지만 원형 복귀는 어렵다. 학생들의 생태 탐방 학습장과 대학생들의 MT 장소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제6경 가의도
태안 앞바다의 섬들로는 가의도 옹도 난도 단도 궁시도 정족도 격렬비열도(이상 태안군 근흥면 안흥항 출발) 외도(안면읍 샛별해수욕장 앞) 등이 있다. 안흥내항 앞의 신진도 마도 부억도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가의도는 안흥외항(마도)에서 유람선을 타면 40분 안에 갈 수 있다.
가의도는 옹도·돛대바위·독립문바위·사자바위·여자바위 등 기암괴석이 볼만해 유람선 관광이 인기다. 솔숲도 울창하다. 소나무와 소사나무 숲의 탐방로가 아름다워 소솔길이라 명명했다. 날이 좋으면 중국 산둥까지 바라다보인다고 한다. 육쪽마늘의 원산지이며 미역과 홍합이 많이 난다.
해마다 6월 중순에 ‘태안육쪽마늘요리축제’가 열린다. 이 기간에 태안을 방문하면 신선한 우럭과 갑오징어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옹도는 1907년 유인등대가 세워져 그동안 군사용으로 사용됐다. 2013년 6월 106년 만에 최초로 민간인에 개방됐다. 신진도(안흥외항)에서 약 12㎞ 떨어졌으며 충청남도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유인등대라고 한다. 난도엔 괭이갈매기번식지가 있다.
제7경 몽산포
몽산포 해수욕장은 잔잔한 해수면이 특징이다. 달산포, 청포대까지 이어지는 13㎞의 광활하고 탁트인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인근엔 40~50년생 소나무숲과 야영장, 편의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젊은이들의 MT, 가족 단위 야영, 연인과의 데이트에 오붓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조개류를 잡는 서해안 갯벌체험도 해볼 만하다.
인근에 팜카밀레 허브농원과 그린리치팜(옛 청산수목원)이 있다. 전자는 200여종의 허브와 다양한 야생화가 자라며 이를 이용한 천연 비누와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보고 구입할 수 있다. 후자는 1만5000여평의 연못에 국내에서 가장 많고 다양한 종의 수생식물과 야생화가 서식한다. 백련·홍련·노랑어리연·가시연 등 형형색색 200여종의 연꽃과 수련이 은은한 향기를 품으며 해마다 7월 20일께 태안연꽃축제를 개최한다. 또 부처꽃·부레옥잠·물양귀비·소귀나물·꽃창포 등 40여종의 수생식물과 섬말나리·비비추·산부추·홍가시·노각나무 등 300여종의 야생화와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몽산포 부근에는 이밖에도 난 농장인 ‘오키드타운’, ‘백합꽃시험장’이 있어 6~8월이면 아름다운 꽃의 자태를 감상할 자리가 많다. 해마다 6월 하순이면 ‘백합꽃축제’를 연다. 2002년과 2009년 봄에 안면도국제꽃박람회가 성대하게 열렸으며, 2016년에 5월에는 태안세계튤립꽃축제가 대대적으로 준비되고 있다.
제8경 할미·할아비바위낙조(꽃지해수욕장)
태안 안면도 꽃지해변의 낙조는 강화도의 석모도, 변산반도의 채석강, 진도의 세방낙조 등 서해안 4대 낙조 중 하나로 꼽힌다. 꽃지 낙조는 미국 CNN이 선정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50명소 중 두 번째로 선정되기도 했다.
꽃지라는 이름은 한 송이 해당화처럼 활짝 핀 지형이란 데서 유래했다. 이곳을 명소로 만든 것은 할미바위 할아비바위다. 그 사이로 해가 질때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한 공간적인 황금 분할이 감동적이라고 한다.
할미·할아비바위의 전설은 지금도 전해내려온다. 약 1100년 전 신라 42대 흥덕왕 4년 해상왕 장보고가 견승포(지금의 방포)를 기지로 삼고 승언이란 장군이 지키게 했다. 어느날 승언이 적을 치기 위해 먼바다로 출정했는데 수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부인 미도는 바위 위에서 죽고 말았다. 바위는 남편만 돌아오길 기다리며 서 있는 부인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고 ‘할미바위’가 됐다. 그 옆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솟아오르니 사람들은 이를 ‘할아비바위’라 불렀다. 애틋한 천년 전설이다.
꽃지에서 방포해변으로 건너가는 아치형 꽃다리가 놓여 있다. 이들 넘어 방포, 두에기, 밧개, 두여, 기지포, 삼봉, 백사장 해면까지 12㎞이다. 기지포에서 삼봉까지의 약 5㎞ 구간의 해변 경치도 황홀하다. 삼봉전망대로 가는 길은 곰솔이 더 우거져 있다. 2013년 11월 8일 백사장항에서 드르니항까지 바다 위로 개통된 250m의 대하랑 꽃게랑 인도교는 수려한 조형미로 노을길(태안의 둘레길 5코스)의 명물로 부상했다.
읍내 주요 역사 유적
안흥항에서 숙박했다면 북쪽 태안읍내로 올라가면서 몇 군데 유적지를 들를 수 있다. 우선 시간이 충분하다면 안흥항에서 가의도 유람선을 타고 해안관광을 할 수 있다.
다음 대안으로는 안흥성과 태국사를 둘러보는 선택이 있다. 이어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와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의 촬영지로 쓰인 ‘길음이해변’을 찾아볼 만하다. 영화 번지점프에선 이은주와 이병헌이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의 고백으로 빙빙 송림이 우거진 석양 해변가를 돌며 춤을 추고 쇼스타코비치의 ‘재즈모음곡 제2번 중 왈츠2’가 테마곡으로 울려나온다. 이 극적인 장면의 촬영이 여기서 이뤄졌다. 가보니 철이른 해변가에 쓰레기가 수북하고 쌀쌀한 날씨에도 텐트를 친 한 가족이 백사장을 지키고 있다. 해수욕장은 아주 조그만하다. 내 상상으로만 영화의 낭만적인 장면을 떠올리다 돌아왔다.
길음이해변 남쪽 안흥항 주변에는 태안비치CC, 동쪽 해변에는 골든베이골프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이어 안흥항에서 읍내로 들어가는 우측길(남측)에는 연포해변과 채석포해변이 있다. 채석포는 옛날에 이곳에서 금을 캐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조그만 어촌마을로 농어 우럭 붕장어(아나고) 개조개 주꾸미 대하 등의 집산지다. 과거 애국가에 만선으로 어항에 돌아가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인근에 오토캠핑장이 있고, 방파제 낚시터로 유명하며, 나즈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연포다. 사랑할 연의 연포, 웬지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태안에서 1년중 날씨가 가장 맑고 청명해 시야거리가 멀고 수평선이 뚜렷하게 보이는 시기가 늦가을이다. 10월 중순부터 11월말까지 인근 섬들과 어우러져 낙조가 절정을 이룬다. 이 때문에 주말이면 수십명의 사진작가들이 절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촬영경쟁을 벌인다.
안양사(安陽祠)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모신 사당이다. 전우는 24세때 경연에서 보양관(輔養官, 임금을 가르치고 보좌하는 관리)으로 추천됐으나 간신들의 모략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후학을 가르쳤다. 수차에 걸쳐 나라에서 벼슬을 줬으나 사행했다. 노백 최명희(崔命喜)의 주선으로 태안군 근흥면 수창동(현 수룡리)에 와서 수년간 거처하며 이 지역의 유생을 가르쳤다. 후일 제자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근흥면 안기리에 사당을 짓고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간재의 본관은 담양이고 출생지는 전주다. 검색해보니 그를 모신 사당이 부안 계화도의 계양사, 경남 의령의 의산사, 고창의 용암사, 정읍의 태산사 등 다수다. 최후의 말년을 보낸 곳은 계화도다. 본래 계화도(界火島)를 계화도(繼華島)로 고쳐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이이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의 명맥을 이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중화사상에 젖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듯하다.
태안읍내에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남문리5층석탑은 남문리의 탑골에 자리한다. 탑의 받침은 신라, 상단부는 백제의 기법이 가미된 것으로 봐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높이 약 4.4m의 화강석으로 이뤄져 있다. 단층의 받침대 위에 5개의 몸돌이 얹혀져 있다. 최상층의 몸돌이 없어져 지금은 다른 돌로 대체돼 있으며 상단부에는 1매의 보륜(寶輪)과 원형의 복발(覆鉢)이 남아 있다. 태안군내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비교적 손상이 적은 것으로 고려시대 불교유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84년 5월 17일에 문화재자료 제 201호로 지정돼 현재 보호 중에 있다.
읍내 중심에는 경이정, 목애당, 태안향교가 밀집돼 있다. 경이정(憬夷亭)은 태안현 관청건물의 일부로 행정청의 입구에 해당한다. 건립시기는 1399~1400년(정종 원년~2년)으로 추정되며 그 후 여러차례 개수했다. 경이라는 말은 멀리 항해하는 사신의 평안함을 빈다는 뜻이다. 그 이름대로 중국 사신이 안흥항을 통해 육지로 들어올 때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용됐다고 한다. 또 이 곳 해안을 지키는 방어사가 군사명령을 내릴 때에도 이곳을 썼다고 한다. 조선후기에는 정원 보름에 주민들의 안녕을 비는 재우제(宰牛祭)를 지냈으며 오늘날에는 이곳에서 중당대제를 지낸다. 1925~1927년에는 야학당으로 사용됐고 1987~1988년에 전면 보수, 복원했다.
목애당(牧愛堂) 태안향교 앞 태안읍사무소 좌측에 위치하고 있는 옛 태안의 동헌 건물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소실된 후 1904년에 소실되고 남은 목재와 태안 소근진성의 목재를 사용해 신축됐다고 한다. 목애당 앞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수령 300년 이상된 높이 15m, 둘레 4.1m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1982년 11월 보호수 359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목애당 옆에 근민당(近民堂)이 인접해 있다.
태안향교는 1407년(태종 7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처음엔 초가집이었으나 세종 대에 기와집으로 증개축하고 1901년에 다시 고쳤다. 구조는 제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동무·서무와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의 기숙사징 동재와 서재, 삼문 드로 구성돼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5성(聖), 10철(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어서 들른 곳이 백화산(태을암, 태안마애삼존석불)이다. 서울로 바로 올려다 시간이 남아 못내 아쉬워 들른 곳이 몽산포였다. 2007년 2월 25일 당시 여행에선 몽산포를 들렀다 마지막으로 태안마애삼존석불을 보고 상경했다. 몽산포는 이름 그대로 노스탤지어가 있는 곳이다. 너른 백사장이 심신에 지친 현대인을 품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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