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7 18:39:25
지난 3월 28일과 29일 아내와 충남 태안에 다녀왔다. 옛 수첩을 뒤져보니 2007년 2월 23~25일 서천, 서산, 태안 여행을 부모님과 함께 간 기록이 남아 있다. 거의 8년 여만의 재방문이다. 2007년 12월 7일 태안 소원면 모항으로부터 원북면 태안화력발전에 이르는 수십 ㎞의 해안가가 최악의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가 났지만 130만 명의 자원봉사자와 주민의 노력으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태안은 반도다. 서산에서 코끼리 코처럼 길게 돌출된 모양이다. 해안국립공원으로서 태안반도는 만곡이 심한 아름다운 리아스식 해안과 독특한 생태계로 시선을 끌고 있다.
서산과 가장 가까운 태안읍이 북쪽 지역의 중심지로 시계방향으로(북쪽으로) 근흥면, 소원면, 원북면, 이원면이 자리잡고 있다. 태안의 중부라 할 수 있는 남면 아래에는 안면도(안면읍, 고남면)이 이어져 있다.
2007년에 안면도와 태안읍 위주로 관광했고, 이번에는 몽산포 해수욕장을 제외하고는 태안 북부 위주로 돌았다. 올레길, 둘레길의 유행으로 그 사이 태안에도 해변길(7개 코스), 솔향기길(5개 코스), 태배길(단일 코스) 등이 조성됐다.
지난 3월 28일 첫 방문지는 포천 국립수목원, 용인 한택식물원과 함께 국내 3대 식물원으로 꼽히는 천리포수목원이다. 벼르고 벼르던 이곳을 마지막으로 찾으니 기어코 3대 식물원을 다 보게 됐다.
이 식물원은 고 민병갈(미국명, Carl Ferris Miller, 1921~2002) 박사가 일궜다.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 피츠턴에서 태어난 그는 전투병으로 징병되는 것을 면하려 일본어와 한자를 배웠다. 덕분에 1945년 4월 일본 오키나와섬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배치됐고 1946년 한국에 연합군 중위로 처음 오게 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다시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953년 한국은행에 취직해 자리잡을 때까지 6.25 전쟁 당시 일본과 미국, 한국을 왔다갔다 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했다. 1962년 사재를 털어 매입한 천리포 해변의 2만㎡ 부지를 기반으로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목을 식재했다. 이후 연차적으로 부지를 넓혀 충남 태안의 헐벗은 모래땅 59만4000㎡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식물이 자라는 국내 최초의 민간수목원을 건립하게 됐다.
그는 1979년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귀화했다. 서울의 증권사에서 일하면서 수목원 조성과 한국 및 식물 공부에 힘을 쏟았다. 1978년 남해안 답사여행에서 감탕나무(Ilex)와 호랑가시나무의 자연교잡(交雜)으로 생긴 신종 식물을 발견했다. 전세계적으로 한국의 완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으로 검증돼 국제규약에 따라 발견자와 서식지 이름을 넣은 학명 ‘Ilex Wandoensis C. F. Miller’을 국제학회에 등록했고 한국이름은 ‘완도호랑가시’로 정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배양된 완도호랑가시는 종자목록(Index Seminum) 발행 및 다국간 종자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퍼져나갔다. 덕분에 천리포수목원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1978년부터 1998년까지 36개국 140개 기관과 교류 관계를 맺어 다양한 품종의 나무를 들여왔다.
고 민병갈 박사는 1997년 4월 국제목련학회 연차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1998년 5월에는 미국 수목원이 주축을 이룬 범세계적 학술친목 단체인 HSA의 총회를 천리포수목원에서 여는 성과를 거뒀다. 2000년엔 천리포수목원이 아시아 최초로 국제수목학회(IDS, International Dendrology Society)가 지정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Arboritum Distinguished for Merit)’, 미국 호랑가시학회(HSA, Holly Society of America)가 선정한 ‘공인 호랑가시 수목원(Official Holly Arboritum)’이 됐다.
그가 평생을 땀과 열정으로 일군 천리포수목원을 공익법인으로 전환, 사회에 환원하고 2002년 4월 8일 태안에서 한국생활 57년을 마감했다.
천리포수목원에는 60개국에서 들여온 1만400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집중 수집된 것은 목련과 호랑가시나무를 비롯해 단풍나무, 동백, 무궁화, 수국, 수련 등이다. 이외에 봄에는 수선화, 만병초, 마취목, 작약이 볼 만하다. 여름에는 가시연꽃, 상사화, 태산목, 나포피아가 아름답다. 가을엔 가을벚나무, 석산, 화살나무, 목서, 억새가 매혹적인 빛깔과 향기로 관람객을 유혹한다. 겨울엔 호랑가시나무와 소나무가 푸른잎을 감추지 않은 채 납매, 설강화, 풍년화, 복수초가 인동의 세월을 보내며 꽃을 내민다.
필자가 간 3월 말엔 목련이 꽃봉오리를 맺고 길가엔 곳곳에 노란 수선화가 무리지어 피고 있었다. 동백은 이미 절정을 지났고, 매화는 만개했고 산수유꽃은 이제 막 피었다. 호랑가시나무도 빨간 열매가 대조적이다.
‘겨울장미’란 별칭을 가진 사순절장미(Helleborus orientalis)도 연보라 꽃잎이 수줍은 듯 독한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실제로 이 꽃은 장미과가 아닌 미나리아재비과로 약간의 독성이 있다고 한다. 부활절은 춘분(春分, 3월 21일경) 후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째 일요일이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40일간 육식을 금하고 채소와 생선 달걀로만 식사하는 경건하게 보내는 것이다. 사육제는 사순절 직전에 최대한 육식과 성적 욕망을 채우는 기간으로 인식돼 있다. 주로 5~6월에 피는 장미와 달리 사순절장미는 3월 중하순에 피어 이런 이름을 갖게 됐다.
두어 시간 아름다운 식물원 구경을 마치고 모항에서 횟감을 떠다가 인근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시장해서 길가에 파는 새우튀김을 식사 전에 먹으니 그것만으로도 벌써 배가 찼다. 모항이 그나마 태안에서 가장 해산물이 싸다. 안흥항, 몽산포, 꽃지, 영목항 등은 상대적으로 비싸니 참고할 일이다. 모항에선 장미수산 아줌마가 제일 친절하고 인정많다고 이름이 나있다. 서비스로 조개를 반 봉다리 담아줬는데 식당 주인이 정작 내놓지 않고 약간 시들한 조개를 서더리탕에 넣어줘 기분이 상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소근진성을 경유해 원북면 신두리 해안사구로 향했다. 정작 천리포를 중심으로 북쪽의 백리포와 남쪽의 만리포는 가지 못했다. 긴 백사장과 깊은 솔향기의 향연이 있는 곳이다. 푸른 수평선을 배경으로 늘어선 해송 사이를 트레킹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의항해수욕장에서 망산고개를 넘어 백리포를 지나 천리포, 국사봉, 만리포에 이르는 약 9㎞의 코스다. 약 3시간 걸리는 데 국사봉 정상 전망대에서 오른쪽(북쪽)으로 백리포, 바로 앞의 천리포, 왼쪽으로 만리포를 굽어볼 수 있다고 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기상이 좋은 날에는 은은하지만 나쁜 날에는 설악산 못잖게 거칠다고 한다.
소근진성(所斤鎭城)은 왜구를 막기 위해 조선 중종 9년(1514년)에 축조한 방어형 읍성이다. 평지에 지어 진성이라 부른다. 성 둘레는 650㎝, 높이는 330㎝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날로 심해 태안군수가 막았지만 역부족이자, 1373년(공민왕 22년)에 태안군을 폐군했다. 절대왕권 시대에 임금의 마음을 거스르면 행정단위의 위상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39년(세종 21년)에 김흔지가 군수로 부임해 새 객사를 지었고 1514년 폐군된 지 141년 만에 비로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축성이 이뤄졌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점령해 성이 폐쇄된 후 관리가 이뤄지지 않자 성벽의 일부와 동문지 부근 110m 정도만 남았다. 원래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 성벽 밖으로 너비 6m, 깊이 2.1m의 도랑(垓字)을 파 방어를 도왔다. 이 성은 충청도의 좌도수군첨절제사영으로 이용됐고, 서해 방비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군첨절제사는 종3품인 일명 첨사(僉使)이며 각도 수군절도사의 영을 받아 큰 진을 관리하게 돼 있다. 성 내벽은 서해에 면하여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고 벽 외측은 가팔라 방어하기에 유리한 요새다. 성 안에는 우물 1곳이 있다. 진성 안에는 방졸(防卒) 41명, 전선(戰船) 1척, 방선(防船) 1척, 사후선(伺候船, 水營에 딸린 戰船) 3척이 있으며 서문 밖에는 선창(船倉)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신두리해안사구는 태안반도 북서쪽, 원북면 신두리에 있는 길이 약 3.4㎞, 너비 500~1300m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해안사구이다. 썰물 때면 넓은 모래 개펄과 사빈(sand beach, 砂濱, 해수욕장)이 노출된다. 이 곳은 사빈이 겨울철 강력한 북서계절풍과 직각으로 만나기 때문에, 대규모 사구가 형성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사구 주변에는 높은 곳이 없는 그저 낮은 구릉이요, 사막 같기도 하다. 강한 바람이 불 때 모래알들이 너울을 이루며 움직이는 모습은 살아 숨쉼을 느끼게 한다.
해안사구는 육지와 바다 사이의 생태적 완충지대다. 바다의 짠물이 더 이상 육지로 올라가지 못하게 막고, 육지의 자양분을 바다로 공급한다. 폭풍, 해일로부터 해안선과 농경지를 보호한다. 사구에 포함된 지하수는 해안가의 식수를 담는 스펀지 구실을 한다. 습지의 식물이나 해당화, 넓은 백사장, 소나무 등으로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관이 연출된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수년전부터 진행된 펜션, 골프장 건설 등 난개발로 원형이 상당히 파괴돼 있다. 주변에 사구습지인 두웅습지와 학암포 옆 태안화력발전소가 있다. 28일 신두리 해수욕장엔 MT를 온 대학 신입생들이 짓궂게 동기생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장난을 치며 소란스럽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하자 옥파(沃波) 이종일(李鍾一, 1858~1925) 생가를 들렀다가 저녁식사 자리로 정한 정산포를 거쳤다. 숙소는 정산포에서 가까운 안흥항으로 잡았다. 이종일은 성주 이씨의 양반가 출신으로 1873년 과거에 급제하기도 했으나 천도교에 합류했고 개화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국권회복과 민중계몽을 위해 헌신했다. 1894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한 이래 경향 각지의 7개 학교장을 지내면서 교육사업에 전념하였고 1898년에는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했다.
또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직접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했다가 2년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 뒤 대한협회ㆍ자강회ㆍ조선국문연구회 등 구국단체를 조직하여 정신개조를 주장하고,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했다. 그의 생가는 1986년에 복원된 ‘ㄴ자형’ 초가집이다. 초가집 서편에는 1990년 그의 사당이 지어졌다.
정산포에 7~8년전 음식 장사를 시작했다는 정산포바닷가의 여 사장님은 남편이 초등학교 교사로 태안 도서지역에 발령나 따라왔다가 골프장이 들어서자 사업에 눈을 떠 아예 정착했다고 한다. 갈낙정식, 박속낙지연포탕 등이 많이 찾는 메뉴로 음식맛이 정갈한 편이다.
안흥항은 밤이 되자 유흥가처럼 술렁였다. 도저히 잠잘 분위기가 잡히지 않아 더 조용한 곳을 찾으로 다리 건너 신진도(안흥외항)로 넘어갔다. 가보니 웬걸 오래된 폐자재 속에 음산한 분위기다. 그나마 깔끔한 모텔에 쩔쩔 끓는 방이 있어 따스한 물로 샤워하고 누우니 그나마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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