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3 12:11:07
이탈리아 로마에서 가장 크고 예술적인 트레비 분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로마는 그 위에 지어졌다. 혀가 있는 자는(말 잘하는 자는) 로마에 가도 좋다 등 로마와 관련된 격언이나 명구는 많다.
모두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과 유구한 역사를 상징하는 말들이다. 실제로 로마제국 시절엔 모든 길이 로마를 향하도록 닦였고 각 도시와 제후국들을 연결하는 곁길은 없었다. 모든 정보와 물자가 로마에 집중됐고, 주변국들이 모반을 일삼는 것을 억눌렀다.
모든 해외여행의 종착지도 로마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고대 로마제국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지금까지 쌓아온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유산에 여행객들은 탄식하게 된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로맨틱한 공간에서 묘한 상상력을 갖게 하는 게 로마의 매력이다.
로마는 사실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다. S자로 흐르는 테베레강을 중심으로 동쪽 구시가지에 유명한 유적지가 모여 있고, 강 서편엔 바티칸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주요 명소 대부분이 판테온 반경 1.5㎞ 이내에 위치해 도보로 다녀도 된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계획없이 그냥 가깝고 발길 닿는대로 들러보면 된다.
‘분수의 도시’에 흐르는 로만시티즘과 예술가의 비사
하지만 가이드의 권고로 시간절약을 위해 택시를 이용한 시내 투어에 나섰다. 1인당 60유로이니 다리가 성하고 시간이 충분하면 이용할 필요가 없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이 트레비분수(Fontana di Trevi)이다. 분수의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중 가장 유명하다. 폴리 대공의 궁전(Palazzo Poli) 앞에 설치된 이 분수는 로마의 거장 건축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원안을 따라 니콜라 살비(Nicola Salvi 1697~1751)가 설계했다.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명을 받아 1732년 건축에 들어가 그의 사후인 1762년에 완성됐다.
로마에 현존하는 분수 중 가장 큰 규모여서 높이는 25.9m, 너비는 19.8m이다. 바로크양식으로 예술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마는 바로크양식의 중심지다. 뒤로 돌아서 등 너머로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뤄진다거나, 언젠가 다시 로마에 오게 된다고 믿음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동전을 던지고 간다. 국내외 주요 관광지 분수마다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홍보해 인기를 얻고 있지만 실은 다 트레비분수의 패러디요 짝퉁이다. 매일 3000유로 정도가 트레비 분수대 바닥에 쌓이는데 로마시는 매일 밤 동전을 수거해 문화재 복원과 보호에 사용한다. 동전을 훔치는 것은 불법이다.
흰 대리석에 개선문을 본 딴 벽면을 배경으로 분수 가운데 우뚝 선 동상이 대양(大洋)의 신 오케아노스(Oceanus, 포세이돈이 등장하기 전 바다를 지배, 그리스신화의 포세이돈이 로마신화의 넵투누스 또는 넵튠과 동격)가 거대한 조개전차 위에 서 있다. 그 밑 좌우에 반인반수 해신인 트리톤(Triton, 포세이돈의 아들)이 소라껍질 나팔을 불며 오케아노스의 전차를 이끄는 날개달린 해마를 길들이고 있다. 왼쪽은 격동의 바다를, 오른쪽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한다.
트레비분수는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지친 로마 병사들에게 물을 제공해준 처녀 설화가 존재하는 ‘처녀의 샘(아쿠아 베르지네, Acqua Vergine)’을 수원으로 하고 있다. 오케아노스 상 뒤편 벽면 상부 좌우에는 목이 타는 로마 병사에게 샘이 있는 곳을 알려준 설화를 새긴 조각(일명 ‘여자의 샘’), 뒤편 벽면 하부 좌우엔 각각 풍요와 건강을 상징하는 여신상이 있다.
트레비분수는 우리말로 ‘삼거리 분수’ 또는 ‘세갈래길 분수’ 정도가 된다. 기원전 19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자 아그리파장군이 판테온 부근에 만든 공동 목욕탕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20㎞나 떨어진 ‘아쿠아 베르지네’로부터 수로로 물을 끌어들여 트레비분수와 스페인광장과 나보나광장의 분수에 사용됐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이 트레비광장에 세 곳으로 통하는 길이 나 이렇게 불리었다는 설도 있다.
이탈리아 작곡가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1879~1936)는 그의 출세작 교향시 <로마의 분수>에서 ‘새벽의 줄리아골짜기의 분수’(La fontana di Valle Giulia all’alba, 로마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너편 돌계단 위 피르두시 레페나광장의 샴페인잔 모양 분수, 1악장), ‘아침의 트레토네 분수’(La fontana del Tritone al mattino, 로마 바르베리니광장·Piazza Barberini의 트레토네분수, 2악장), ‘한낮의 트레비분수’(La fontana di Trevi al merrigio, 3악장), ‘해질녘의 메디치빌라(궁전)의 분수’(La fontana di Villa Medici al tramonto, 4악장) 등을 묘사했다.
이와 함께 나보나광장(Piazza Navona)의 피우미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i), 스페인광장(Piazza di Spagna) 인근 트리니타 데이몬티교회(Chiesa della Trinita dei Monti) 앞 바르카차분수(Fontana della Barcaccia)가 유명하다. 포폴로광장(Piazza del Popolo)에선 검은색 오벨리스크를 볼 수 있다.
나보나광장엔 바로크풍의 분수가 셋 있다.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광장 가운데, 산타그네제 인 아고네성당(Chiesa di Sant‘Agnese in Agone) 바로 앞에 자리잡은 일명 ‘4대강 분수’인 피우미분수다. 오벨리스크형 분수를 4개 대륙을 대표하는 나일강(이집트), 갠지스강(아시아), 다뉴브강(유럽), 라플라타강(아메리카)의 신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둘러싸고 있다.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59~1667)는 당대의 라이벌 건축가였다. 40대 초반까지 출세가도를 달리던 베르니니는 성베드로사원의 종탑 건설에 실수를 저질러 일시에 교황의 신망을 잃고 예술가로서의 명예가 실추됐다. 하중을 무시하고 거대한 종탑을 건설하다 건물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보로미니는 한 때 베르니니의 조수로 지내기도 했지만 1634년에 독립해서 산카를로 알레콰트로 폰타네 성당(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 1638~1641), 산 필립포 네리 승원(Oratory of Saint Phillip Neri, 1637~1650), 산티보 성당(Sant’Ivo alla Sapienza 1642~1650), 산타그네제 인 아고네성당(1652~1657), 프로파간다 피데(The Re Magi Chapel of the Propaganda Fide, 1648~1665), 팔라초 파르코니에리 파사드(Facade of Palazzo Falconieri) 증축(1638~1641) 등에서 독창적 건축을 창조했다. 탁월한 설계와 정밀한 시공, 특히 파사드의 요철(凹凸) 공법 도입은 오스트리아·남독일·브라질 등의 후기 바로크 건축에 큰 영향을 줬다.
절치부심하던 베르니니는 피우미분수를 성공적으로 완성해 교황의 신임을 되찾았다. 밋밋하던 나보나광장에 멋지게 분수로 포인트를 준 것이다. 그러자 보로미니는 산타그네제 인 아고네성당의 파사드를 분수에 어울리게 단장해 베르니니에게 아름다운 복수를 했다. 30대에 두 건축 천재는 성베드로성당 건축에서 자웅을 겨뤘다. 로마의 많은 건축유산에 이 두 거장의 손길이 닿아 있다. 다만 정치적이었던 베르니니에 비해 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타인에게 강압적이고 신경질적이었던 보로미니는 베르니니의 명성에 눌리고 실의에 빠져 1667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 베르니니는 당대 최고의 미인과 결혼해 11명의 자녀를 얻었고 82세까지 장수했다.
17세기에 스페인대사관이 있었던 자리의 앞마당에 해당하는 스페인광장과 여기서 트리니타 데이몬티교회로 올라가는 일명 ‘스폐인계단’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쪼그려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장소로 로마 최고 명소가 됐다. 많은 여성 관광객들이 자기가 헵번이라도 되고 싶은 듯 바로 그 장소에서 기념 컷을 남기기 위해 줄을 선다.
로마의 역사를 지켜본 판테온·콜로세움·포로로마노·개선문
돔 가운데는 지름 9.1m의 구멍이 뻥 뚫려 있는데 돔의 지름이나 돔의 높이가 43.3m로 동일해 공 모양이나 다름없다. 돌기둥이 단 하나의 화강암 돌로 이뤄졌고, 돔은 4535t의 하중을 견딘다. 누가 설계했고 그 어마어마한 무게의 돌을 당시에 어떤 공법으로 세우고 올렸는지 감탄할 따름이다. 구멍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고, 돔 천장에는 움푹 패인 소란반자가 박혀 있어 하중을 지탱해주고 음향을 모으는 효과가 있다. 1436년에 완공된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지름이 42m인 것을 감안하면 과연 인류의 역작이다. 판테온에는 역대 교황, 이탈리아왕, 예술가의 무덤이 조성돼 있고 7세기 이후 가톨릭 성당으로 쓰이고 있다.
다음으로 간 곳이 조국의 제단(Altare della Patria)이 보이는 베네치아광장(Piazza Venezia)이다. ‘로마의 배꼽’이라 불리는 곳에 광장이 있고 남쪽에 국군묘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동상 및 기념관(Vittorio Emanuele II Monument), 조국의 제단 등이 층층이 조성돼 있다. 제단 뒤편으로는 누오보궁전과 캄피돌리오 광장,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 등이 이어진다.
베네치아광장은 1871년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16세기 베네치아공국의 로마대사관 역할을 하던 베네치아궁전이 자리잡고 있어 이런 광장 이름이 붙었다. 베네치아궁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재자 무솔리니가 집무실로 사용한 곳으로 유명하다. 무솔리니는 궁전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여든 군중에게 연설하거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선포를 하기도 했다. 현재 르네상스 예술품을 모아놓은 국립베네치아궁전박물관(Museo Nazionale del Palazzo di Venezia)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장 중앙에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념상이 서 있다.
통일박물관 또는 승리박물관으로 명명되기도 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동상 및 기념관(Vittorio Emanuele II Monument)과 조국의 제단은 ‘영원한 도시’인 로마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게 서둘러 짓는 바람에 로마에서 가장 흉한 유적지 건물로 낙인찍혀 있다.
콜로세움 옆엔 개선문의 원조가 있다.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외곽에서 벌어진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312)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해 건축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o di Constantino)이다. 이 승리로 황제는 서로마 제국의 단일한 지배자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력이 성장하는 기점이 마련됐다. 높이 21m, 너비 25.7m, 두께 7.4m이다.
로마엔 이 개선문과 더불어 티투스 개선문(Arco di Tito)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 등 3대 고대 개선문이 있다.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살아남았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파리로 떼어가고 싶었으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보다 엄청나게 큰 세계 최대의 개선문을 파리에 지었다. 파리 개선문은 높이가 50m, 폭이 약 45m에 달한다.
포로 로마노 전경을 맞은 편에서 볼 수 있는 포인트로 옮겼다. 필라티노언덕 아래 남측엔 건조한 하상(河床)엔 로마시대의 전차경기창(치르코 마시모, Circo Massimo)이 보인다. 로마시는 6년 여의 작업 끝에 파묻혀 있던 전차경기장의 원형을 복원해 공개했다. 당시 평민들은 사실 검투사시합보다 전차경기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길이 600m, 너비 140m의 이 공간은 황량한 공터로 전락해 복원 이전에는 가끔 대형 콘서트가 열리거나 시민들이 산책 또는 조깅하는 용도로 쓰였다.
밸런타인과 헵번의 사랑이 빚은 향기는 영원하다
이어 찾아간 곳이 인근의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ta)이다.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Cosmedin)의 입구의 벽면에 있는 해신 트리톤의 얼굴을 새긴 대리석 가면이다. 지름은 1.5m 정도. 기원전 4세기전에 만들어졌으며 원래 가축시장의 하수구 뚜껑으로 쓰였다는 설이 있다. 중세 때부터 심문을 받는 사람의 손을 이 가면의 입 안에 넣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잘릴 것을 서약하게 했다. 진실을 말하더라도 심문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이 잘리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미국 기자 그레고리 펙이 시키는 대로 ‘진실의 입’에 손을 넣었다가 펙이 헵번의 손을 덥석 잡자 헵번이 마치 손이 잘리는 줄 알고 깜짝 놀라며 펙의 가슴팍에 안기는 실감나는 장면이 이곳을 뭇 관광객을 이끄는 명소로 만들었다.
코스메딘 성당은 밸런타인데이의 유래가 된 성 밸런타인 주교의 유골이 안장돼 있어서도 유명하다. 발렌티노 성인은 남자들을 더 많이 입대시키기 위해 결혼을 금지하던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의 명령을 어기고 군인들의 혼인성사를 집전했다. 그가 순교한 날인 2월 14일을 기념하는 축일이 밸런타인데이가 됐다.
성당 성구보관실(sacristy)은 8세기에 만들어진 옛 베드로성당의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다. 또 18세기에 복원된 십자가 예배당과 세례당을 지금도 온전하게 볼 수 있다.
로마의 종교·정치적 구심점 캄피돌리오광장
광장은 중앙에 로마 시청사(Roma Capitale, 옛 원로원 청사), 그 오른편으로 카피톨리노박물관(Musei Capitolini), 왼편으로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dei Conservatori del Campidoglio, 누오보궁전 Palazzo Nuovo과 연결돼 있음) 등 3개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광장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원래 산지오반니 인 라테라노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에 있던 기마상을 광장을 조성하며 이곳으로 옮겨놨다. ‘명상록’의 저자인 이 황제는 학자적 품성의 ‘현제(賢帝)’로 게르만의 민족 대이동을 막아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기마상을 중심으로 꽃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면 12각형의 별인 듯 꽃인 듯한 흑백의 모자이크 보도블럭이 아름답게 깔려 있다.
시청 왼편에는 암 이리(암 늑대)상이 있다. 로마의 시조인 로물루스·레무스 형제가 늑대 젖을 먹으며 자랐다는 신화에 따른 것이다. 시청사 앞면 좌우에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제우스 조각상이 있다. 왼쪽은 제우스신이 스핑크스를 누르고 있고, 오른쪽은 제우스가 뱀의 머리를 잡고 그의 쌍둥이 아들(카스트로와 풀록스)과 휴식하는 모습이다.
미켈란젤로는 광장이 협소해보이는 것을 커버하기 위해 올라가는 계단 앞쪽과 광장 앞쪽을 계단 위쪽과 광장 뒤쪽보다 상대적으로 적게 한 역사다리꼴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원근감을 없애 착시현상으로 광장이 넓어보기게 한 것이다. 이 코르도나타(cordonata)계단은 미켈란젤로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로마 입성을 기념해서 만든 것이라 한다.
계단 끝 광장 입구에는 우람한 말을 이끄는 기사상이 있다. ‘카스토레’와 ‘폴루체’ 형제의 동상이다. 이 쌍둥이 형제는 로마가 라틴족과 싸워 이긴 것을 가장 먼저 전한 공로가 있다고 한다. 이 동상도 일부러 머리를 크게 만들어 광장이 넓어보이게 했다니 감탄스럽다. 이탈리아가 라틴족으로 알고 있으나 여기서 라틴족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살다가 남하해 기원전 1000년경에 로마 북쪽의 라티움(Latium) 지역에 정착한 부족을 의미한다.
여기서 보는 동상이나 건출물에 대부분 SPQR이 새겨져 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로마의 원로원 시민’이다. 이탈리아어로 Senatus PopulusQue Romanus, 영어로 The Senate and People of Rome의 약어다. 왕이나 황제 같은 절대권력자가 다스리는 게 아니라 원로원(국회)와 시민이 참여하던 고대 공화정(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을 말한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수였던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총리로 재임하던 1922~1943년에 SPQR을 수많은 공공 건축물은 물론 심지어 하수구 맨홀 뚜껑에도 새겼다. 새로운 로마제국을 지배하는 자신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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