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8 00:50:19
지난 2월 5일 이정희 당시 유한양행 대표가 국산 신약 31호인 EGFR T790M 저항성 변이 고선택성 3세대 티로신 인산화효소 억제제인 ‘렉라자정’ 출시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각종 보도를 보면 한국이 제약바이오 강국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같은 기대를 갖게 한다. 해외에 거액의 기술수출도 하고,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관련 백신 및 치료제도 우리 힘으로 상품화했거나 개발 중이다.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을 통해 종래와 다른 접근을 해야 한다면서 소기의 성과를 홍보한다.
하지만 중국의 많은 제약사들이 굴기(崛起)하면서 매분기에 한두 건 정도로 거액의 로열티를 받고 미국에 판권을 넘기거나 미국 식품의약국(FDA)로부터 (가속)승인, 희귀의약품, 패스트트랙 등으로 지정되는 기사를 접하다보면 우리나라의 자만이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우선 전국민이 관심을 갖는 코로나19 백신만 해도 지난달 중순에야 3상에 들어갔다. 첨단 백신이라는 mRNA백신은 꿈도 꾸지 못한다. 닦아 놓은 기초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5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 성과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모더나로부터 수억 도스의 모더나 코로나19백신의 완제품을 위탁생산하는 계약을 수주했으나 어디까지나 무균충전, 라벨링, 포장에 이르는 공정을 맡을 뿐이다. 핵심인 원액생산 기술엔 접근하지도 못한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달 25일부터 인천 송도공장에서 시생산에 들어가 품질 검증을 받고 있으며 이르면 오는 10월초부터 출하를 위한 본생산을 시작한다. 국내서 생산하니 아무래도 국내에 더 많이 공급돼 백신난이 풀릴까 기대하는 게 바람의 전부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미국 노바백스와 합성항원 형태의 백신인 NVX-CoV2373 기술을 이전받았으나 이 백신의 3상 임상은 이르면 가을이나 완료돼 연말이나 승인 신청에 들어갈 전망이다. 노바백스는 당초 올 5월에 FDA 승인신청을 내려다가 7월로 연기했으며 다시 올 4분기로 미뤘다. 그나마 예방효과는 89.7%로 기존 허가 백신보다 다소 떨어지고 합성항원 형태라 SK가 갖고 있는 기술보다 별반 차별화될 게 없다.
업계 관계자는 “신종코로나 유행을 계기로 백신은 종래의 합성항원이나 바이러스벡터에서 mRNA로 플랫폼이 급속하게 변화됐다”며 “우리나라 실력으로는 3년간 집중해도 미국 수준을 따라갈까 말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미리 축적해둔 기초기술이 빈약하다는 반증이다. mRNA 입자 원액을 양산하는 기술, 이것이 손상되지 않도록 특수 지방으로 감싸는 기술 등 배워야 할 게 너무 많다.
첨단백신의 마무리를 예쁘게 해주면서 ‘물량떼기’로 박리다매하는 한국의 백신 관련 바이오산업 경쟁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스트라제네카백신은 개당 4달러, 존슨앤드존슨백신은 10달러, 화이자는 23달러, 모더나는 25달러 수준으로 후자의 두 가지 mRNA백신은 급행료를 받으면 거의 30달러에 육박하거나 초과하는 고부가가치를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바이오가 언젠가는 모더나로로부터 원액 생산기술을 이전받아 고부가가치의 토대를 닦을 것이란 기대 섞인 기사가 많지만 한국에 핵심기술을 넘겨줬다 역화(逆火)를 입을까 우려하는 선진국들이 쉽게 응할지 궁금하다. 노바백스나 SK가 자체 개발한 중저가 백신을 초저온 냉동보관이 필요 없고 저렴한 백신을 요구하는 개도국에 집중 출하하면 승산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지만 바이오산업의 핵심은 공산품처럼 ‘박리다매’에 있지 않고 ‘첨단 고부가가치 창출’에 있다. 그런 기대 때문에 국민의 관심이나 주가가 지대한 것이다.
제넥신 창업주이자 포스텍 교수인 성영철 회장은 지난 7월 14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DNA 코로나19 백신인 ‘GX-19N’ 개발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다. CEO가 아닌 최고기술책임자(CTO)로서 차세대 먹거리인 코로나19 백신과 유전자 예방백신 개발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백신개발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며 “초심으로 돌아가 연구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바람직하고 용기 있는 결단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 제약바이오에는 독보적인 원천기술이 없는 게 가장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넥신은 미국 머크(MSD)와 자궁경부암 치료 DNA백신을 공동 개발 중이며, 지난 7월 7일 인도네시아에서 코로나19백신 2/3상을 승인받았다(국내선 2a상을 진행 중).
없는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가 몇 년 전부터 내놓은 화두가 ‘오픈 이노베이션’이다. 내부 자원을 외부에 공개·공유하고 또 개방적으로 다른 회사의 기술을 도입해 중복투자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신약후보물질을 발굴 또는 진척시키자는 게 핵심 정의다.
오픈 이노베이션을 위해 유한양행과 GC녹십자을 필두로 최근 대웅제약, 한미약품, 팜캐드(인공지능 신약개발 전문기업), 웰트(디지털치료제 개발기업),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등이 미국의 대표적 바이오클러스터로 꼽히는 보스턴 캠브리지이노베이션센터(CIC)에 입주했다.
보건산업진흥원은 국내 진출 업체를 돕겠다며 지난달 미국 지사를 개설했다. 주미한국대사관 등에 협업하겠다는 입장인데 보산진이 그럴 역량이나 적극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저 ‘예산쓰기’ ‘생색내기’ 등을 위해 해외에 나간 느낌 밖에 안 든다. 기자가 보기에 보건산업진흥원의 보스턴 지사 설립은 다들 전쟁터로 나가는데 혼자 널널하게 소풍 나온 느낌이다. 미국 현지 기업 및 기관과의 글로벌 네트워킹은 필요하지만 당사자도 아닌 관찰자가 거기 가서 무슨 역할이 있겠냐는 생각이다.
삼양바이오팜은 2018년 8월 삼양바이오팜USA를 설립했고, LG화학은 2019년 6월 4일 글로벌 이노베이션센터를 각각 보스턴에 열었다. LG는 지난 7월 14일 혁신신약 개발에만 1조원을 쏟아붓겠다며 미국 현지에 연구법인을 설립, 임상·허가 전문인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2030년까지 글로벌 혁신신약 2개 이상을 보유한 회사로 도약하고, 미국·유럽 등 선진시장에 진출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해외에 사무소나 연구소를 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오픈 이노베이션이 이뤄지려면 스스로 기초기술에 대한 상당한 자체 역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과 교환할 비교우위의 강점이 하나둘은 있어야 한다. 자기역량이 부족한 ‘오픈 이노베이션’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
물론 자기 역량이 부족해도 자금력이 막강하면 어느 정도 보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엄청난 현금 실탄을 확보했다 하더라고 좋은 기술을 읽어내 베팅할(위험을 걸고 투자할) 안목과 배짱이 있어야 한다. 우리기업이 이를 감당해내려면 적잖은 수업료를 감당해야 하고 한두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는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많은 국내 바이오벤처들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기에는 턱없이 투자받은 금액이 유치하다고 하소연한다. 미국, 중국의 유망한 바이오업체는 시리즈A(시장공개 전 첫 투자유치)에서만 수천만달러를 유지한다. 상장 과정에서는 수억 달러를 유치하는 게 대단한 축에도 못 든다. 모더나의 경우 2018년말 당시 사상 최고치인 6억4000만달러를 IPO(나스닥 상장)를 통해 긁었다. 그 자금으로 풍족하게 쓰다보니 코로나19 백신을 단기간에 개발해 올해 매출만 190억달러를 기대하는 대히트를 쳤다.
그러나 국내서는 벤처캐피털이 바이오벤처 창업자에게 주는 돈이 적다. 수십억원 정도를 투자하고 지분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는 게 허다하다. 몇 번의 증자가 끝나면 창업주 지분은 20% 이하로 떨어져 창업자들은 의욕을 잃고 주식 내다팔아 ‘소액’을 챙기는 데 안주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한 바이오벤처 임원은 “서너 번 증자 받으면 창업자 지분율이 20% 이하로 떨어진다”며 “상장도 하기 전에 지분이 이렇게 낮아지면 열심히 연구개발할 창업자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수십억원이 많아 보여도 리스크가 큰 기초기술 연구에 투입하면 금세 동이 난다”며 “미국, 중국처럼 자본시장이 커서 풍부하게 밀어대는 시쳇말로 ‘눈먼 돈’이 넘쳐나야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고 그야말로 ‘대박’도 터지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지난 5일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국내 299개 제약·바이오 기업 회원사 중 193개사가 1477개의 신약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8년(100개사 573개) 조사 대비 157.8% 증가한 수치다.
매출 1000억원을 기준으로 구분한 대·중견기업(55개사)과 중소·벤처사(138개사)의 파이프라인은 각각 641개(43.4%)와 836개(56.6%)로 비중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제약기업과 바이오벤처, 글로벌제약사 간 라이선스 이전은 2019년 36건에서 2020년 105건, 올해 1분기까지 85건 등으로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였다.
대·중견기업의 경우 다국적 제약사에 대한 라이선스 아웃(2019년 이후 3년간 전체 81건 중 17건) 비중이 높았고, 중소·벤처사는 전체 250건 중 △국내 중소벤처(64건) △다국적 제약사(50건) △대·중견기업(35건) 등 고른 분포를 보였다. 바이오벤처-제약기업-다국적 제약사로 연결되는 선순환 형태의 개방형 혁신(오픈 이노베이션)이 활기를 띠는 것으로 협회는 풀이했다.
협회는 단순히 기업 간 라이선스 거래를 오픈 이노베이션이라고 보는 것 같다. 양적 지표로만 따지고 질적 평가는 감안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개발하다가 기술이 막히거나 시간이 없어, 또는 더 낮은 리스크로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때 협업하는 게 오픈 이노베이션의 본질이다. 정말 절실한 목적으로, 최적의 매칭으로 라이선스 거래가 이뤄졌는지 질적 평가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과거 LG, SK, CJ, 한화 등 대기업이 제약바이오를 쉽게 봤다가 후자의 두 대기업을 철수했다. 코오롱도 평범한 제약사 중 하나일 뿐이고 이웅열 회장은 ‘인보사 파동’으로 구속 직전까지 갔다. 삼양사도 열심히는 하지만 ‘화끈한 한방’이 부족하다.
LG는 인내심을 갖고 쭉 버티고 있으나 아직도 빅히트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SK바이오팜은 2019년 3월 미국 FDA로부터 기면증 치료제 ‘수노시정’(Sunosi, 성분명 솔리암페톨, Solriamfetol, 국내 미허가), 같은 해 11월 뇌전증(간질) 치료제 ‘엑스코프리’(Xcopri 성분명 세노바메이트 Cenobamate, 국내 미허가)를 허가받았다. SK바이오팜의 26년 신약개발 노력의 성과를 축하하지만 미국 시장에서 먹힐지 궁금하다. SK그룹이 이동통신과 정유화학말고는 끈질기게 밀어붙이는 힘이 부족했던 것을 감안하면 일시적 자축에 그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2019년 가을부터 해외 제약바이오기업의 연구개발, 신약승인, 인수합병 기사를 번역 보도하면서 느낀 게 있다. 성공한 바이오벤처 기업은 연구원이 30~50명으로 단출하고 오직 한두 가지 분야에만 매진한다. 대박 신약이 나올 때까지 적게는 3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고생길’을 걷지만 히트작이 나오면 ‘팔자’가 핀다. 자본금 수천만 달러 회사가 수십억, 수백억 달러 매출을 일으키는 회사가 되면 창업자의 지분이 10% 이상만 돼도 ‘대 기적’을 연출할 것이나 다름없다.
반면 국내 제약기업은 수천 억원 내지 1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안정적으로 기업을 운영한다. 일반약은 물론 마스크부터 첨단신약(대부분 라이선스 도입)까지 다 취급한다. 당연히 신약개발에 대한 집중력은 떨어진다. 그러면 이를 뒷받침해야 할 바이오벤처라도 연구능력이 왕성해야 하는데 진정한 자기기술을 갖고 있는 곳은 10곳 중 하나나 될까 싶다. 그저 정부가 주는 수십억원 연구개발 과제 몇 개를 따서 연명하는 곳이 다수다. 풍족하지 않더라도 소정의 정부 연구과제를 나름 원천기술 개발 및 축적해야 하는데 전략이나 성실성에서 부족한 업체가 많다.
또 미국 기준으로 보자면 한미약품, 유한양행 정도 되는 회사가 원천기술을 확보해 다국적 제약사와 유망 파이프라인을 넘기는 ‘빅딜’을 해야 원칙인데 우리 중견 및 대형 제약사는 ‘종합선물 세트’로 특징은 없고 몸집만 가분수다.
익히 업계에서 알고 있듯이 유한의 비소세포폐암 치료 31호 국산신약인 ‘렉라자정’은 오코스텍이 개발해 유한에 라이선스를 넘긴 신약이다. 셀트리온의 33호 국산신약 코로나19 치료제인 ‘렉키로나주’도 사실상 하청을 받은 업체가 개발했는데 그나마도 미흡한 약효 때문에 사용 범위가 제한돼 있다. 렉키로나는 그저 셀트리온의 주가 부양에만 혁혁한 공헌을 했다.
렉키로나주는 폐렴의 임상적 증상이 있거나 폐렴이 영상학적으로 관찰된 ‘고위험군 중등증’ 환자 또는 60세 이상이거나 심혈관질환, 만성호흡기질환, 당뇨병, 고혈압 중 하나 이상을 가진 ‘고위험군 경증’ 환자에게만 조건부 처방할 수 있도록 허가돼 있다. 이래저래 처방 범위가 좁아 매출을 일으키기 어려운 구조다.
요컨대 직접 약을 개발해야 할 유한양행 정도의 회사도 바이오벤처에 의지하고 있다. 그나마 유한양행은 임자를 잘 만나 웃고 있지만 오코스텍에 지급해야 할 로열티도 만만찮은 경상비용이 될 것이다. 유한 규모라면 직접 개발해 그 부가가치를 다 누려서 다음 신약개발로 이어가는 게 맞다고 본다.
우리 기업에게 필요한 것은 ‘닥치고 연구’뿐인 것 같다. 분기별로 한두 건의 중국발 신약이 FDA 리스트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우수한 인력’으로 한국이 이만큼이나 먹고 산다는 ‘자위’마저도 언젠가는 흘러간 옛이야기가 될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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