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의 국시 거부, 선택과 책임의 무거움을 감당할 나이
2020-09-10 20:33:50
단호한 정부 앞에 결정 못 내린 의대생 단체 … 애타는 스승과 선배의 후방지원보다 중요한 건 자기결정권
10일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을 거부한 의과대학생을 구제할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의료인력 공백 등을 이유로 의대생 구제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의대생 스스로가 두 번의 국시를 거부한 만큼 다시 구제안이 나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가장 애가 단 것은 스승들이다. 10일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는 성명문을 내고 “의·정 합의에 따라 정부는 온전한 추가시험을 시행해야 한다”며 “국시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는 장·단기적으로 매우 크다”고 호소했다. 이어 “향후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강조했다.
앞서 의료계 파업을 주도했던 대한의사협회도 7일 성명문을 발표했다. 의협은 “의대생의 국가시험 응시 거부는 일방적인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정당한 항의이므로 마땅히 구제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의협은 이들이 정상적으로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해 대응할 것”이라고 강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정부는 국시 거부 의대생을 구제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10일 손영래 중앙사고수습본부 방역총괄반장은 정례브리핑에서 “의대생이 자유 의지로 국시를 거부한 만큼 추가시험 검토는 불가능하다”며 “추가적 기회 부여는 공정성과 형평성의 문제인 만큼 국민적 양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의협과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의대생들이 국시에 응시하지 못해 피해를 본다면 총궐기대회 등 단체행동을 불사하겠다고 나서 애써 봉합한 의료파업이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 문제의 주인공인 의대생들의 태도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지난 8일 서울대 의대 학생회가 올해 의사 국시를 치러야 하는 본과 4학년 1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1%가 국시를 거부하는 데 반대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10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 향후 방침에 대한 마라톤 논의에서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도리어 강경파의 목소리만 커지는 모양새다. 이화여대, 성균관대, 순천향대, 울산대 본과 4학년 학생들은 국시에 추가 접수하지 않겠다는 성명서를 SNS에 게시했다.
당초 의사 국시 실기시험은 9월 1일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의료파업으로 정부는 8일로 연기했다. 현재 응시대상자 3172명 중 446명이 접수를 마쳤고 나머지 약 85%는 현재 시험을 거부한 상태다. 첫날 8일 시험을 치른 사람은 6명에 불과했다.
시험은 9월 8일부터 오는 11월 20일까지 43일간 병원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보게 됐다. 예년의 경우 많은 응시생들로 인해 하루에 3차례로 나눠 100명 단위로 시험을 진행해왔으며, 평균 합격률은 90% 안팎이었다.
올해는 의료파업으로 3차례로 나눠 진행하던 관행이 사라지게 됐다. 응시자 부족으로 그럴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난달 접수했던 국시 원서를 의료파업으로 의대생들이 거의 전부 철회했고, 4일 의협과 정부가 의료파업 철회에 합의하면서 당시 예고된 국시 재접수 마감시점이었던 4일 24시가 6일 24시로 한번 더 연기했음에도 의대생들이 요지부동으로 접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의대생들은 “4일 나온 정부‧의협 간 합의안이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의 백지화가 아니라 원점에서 재검토로 설정된 것은 투쟁의 취지와 목표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거부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전공의와 의대생의 생각이 협상에서 반영되지 않은 소외감과 분노도 이면의 거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스승과 선배 의사들은 원활한 학사 운영 및 의사 수급을 위해 하루빨리 의대생들이 학업에 복귀하길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당초 9월 1일 시작할 예정이었던 의사 국시 실기시험 일정을 8일로 한 차례 연기한 바 있고, 의협의 요청과 짧은 신청기간을 감안해 접수 기간과 시험 일자를 한 번 더 연장하는 조치를 취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본인들의 자유 의지로 이를 거부했고, 스스로 시험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에 추가 시험을 검토하라고 하는 의료계 요구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다시 말씀드린다”고 10일 손영래 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스승과 선배의 입장으로서 잘 가르친 제자이자, 같은 길을 가게 될 후배가 의료파업 투쟁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큰 고통일 수밖에 없다. 머잖아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에 배치돼야 할 이들이 국시에 발이 묶어 졸업이 늦어지면 그만큼 의료공백이 커지고, 의료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는 점도 현실적인 걱정이다.
그럼에도 얽힌 매듭은 결국 의대생이 풀어야 한다. 정부의 공권력이란 사실 매섭다. 1980년대에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었다가 해임된 교사, 또는 끝내 교사로 임용되지 않는 전국의 국립 사범대 출신 졸업생 등 수천명은 그 여파로 장기간 지금도 큰 피해를 입고 있다.
냉정한 게 현실이어서 이미 성인인 의대생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투쟁을 위해 단체를 만들고, 협의해서, 결정한 행동의 결과는 의료파업이었고 이로 인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파업 과정에서 일어난 학업과 경제의 손실은 자력으로 회복해나가야만 한다. 공부할 기회가 손실된 것을 더 열심히 공부해 메워야 한다.
교수와 의협, 선배 의사들이 의대생의 편에 서서 불이익을 막아주거나 줄여줄 수는 있다. 선후배 간에 서로 힘이 되어 주는 모습은 어떤 집단에서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스스로 시험을 칠지 말지 결정하지 않은 의대생들을 두고 의료계가 정부에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모양새는 자기 결정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성인에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종국엔 다시 한번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응석을 부리는 모습으로 비쳐지고 투쟁의 명분마저 약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8일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국시 거부 의대생을 구제할 필요가 없다고 답한 국민이 52.4%나 됐다.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김성주 더불어 민주당 의원(보건복지위)은 “지금까지 의료계의 목소리는 충분히 국민들에게 전달됐고 국민과 국회가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의 주장에 힘을 실었던 의대생들의 목소리는 어른의 것이었다. 그들이 어른스럽게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승과 선배들이 기다려주시길 부탁한다. 다시 한번 의사 없는 응급실과 진료실을 찾아 여러 병원을 뛰어다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는 국민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김지예 기자 jiye200@heal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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