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4 11:29:45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11일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취임 이후 첫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20일 당선인 시절 대통령 집무실을 기존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긴다고 발표했을 때 국민의 약 3분의 2는 ‘무슨 예산 낭비냐’ ‘정권 이양기 안보가 위협 당한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기자는 ‘웬걸, 신의 한수구나’라고 생각했다. 이후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김인철 교육부 장관 후보자,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 후보자 등 국민의 시각에서 볼 때 흠결이 많은 내각 예정자들로 ‘인사 참사’가 빚어지면서 용산 집무실 이전은 빛이 바래나 싶었는데 최근 나오는 기사들을 보면 집무실 이전 퍼포먼스는 성공한 대통령 제1호 공약 실행으로 평가된다. 여론의 무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번 뱉은 말은 지킨다’는 윤석열의 신뢰를 굳히는 바로미터가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기자는 지난 3월말 주위 지인들에게 “지금은 다들 윤석열 욕해도 청와대 구경 갔다온 사람들이 늘어나면 다들 칭찬할 걸 … 이명박 서울시장도 청계천 정비 밀어붙여 처음에는 욕 먹다가 나중에는 그걸 발판으로 대통령 됐는데”라고 말해줬다. 그 말은 현실이 됐다. 기자 같은 범인(凡人)도 이 정도 예측이 가능한데 용산 이전 때문에 오는 6월 1일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득표에서 크게 손해볼 것이라고 예단한 것은 역시 반대파인 현 야당의 ‘부럽지만 실행할 수 없는 배아픔’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자는 용산에 거주하므로 최근 연일 대통령 집무실 이전 때문에 용산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는 기사의 수혜자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문재인 대통령 집권 시절 아파트 가격이 고공행진했던 게 마뜩잖고, 윤석열 현 정부 덕택에 또 오르는 것도 마땅찮다. 그저 어느 정도 하향 안정세가 돼야 젊은 세대도 집을 살 의욕이 생기고, 부동산 관련 세금도 덜 내지 않겠나 싶다.
필자의 집에서 바라보는 옛 미군용산기지는 벌써 비워준다고 공표한 지가 20년이 되도록 진척된 게 없다. 이젠 그런 기사에 관심이 가지도 않는다. 노무현 집권 당시부터 나온 ‘곧 있으면 미군이 나간다’는 말은 2018년 용산 미군기지의 주력 부대와 시설이 평택으로 이전한 뒤에도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 얘기다. 관리되지 않아 흉물스런 미군기지 시설이 4년째 방치 상태다.
가끔 젊은이들이 미군 부사관이 쓰던 관사(官舍)를 구경한답시고 일부 개방된 용산기지를 찾아오는 데 무슨 궁상맞은 호기심인가 싶다. 그저 한국의 옛 주택공사가 지은 서민적인, 다소 미국 분위기가 나는 1, 2층 소형 서민주택일 뿐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막혀서일까, 그저 막연히 조금이라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누리고 싶어서일까, 미국 문화에 대한 싸구려 동경일까 … 이럴 때 보면 무슨무슨 ‘K신드롬’의 바닥이 일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용산 입성을 반긴 것은 부동산 가격이 오를 것이란 기대 때문은 아니었다. 하루 빨리 용산기지를 국민공원화해서 국민의 품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국민으로서 실지(失地)를 조금이라도 일찍 회복하고 싶은 염원 때문이었다. 미군 기지라 해도 해마다 4월에 올라오는 환상적인 신록을 보면 빨리 기지가 공원화돼 만인에게 공유돼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용산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 관저가 남향으로 들어선다면 기자의 집(북서향)이 마주하게 되는 것도 사소한 영광이라 하겠다.
과거 국무총리를 지낸 고건은 서울 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청을 용산기지의 일부로 이전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6호선 녹사평역의 지하철역이 매우 깊은 것은 당시 서울시청 예정지를 지하철역과 바로 연결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고건의 뒤를 이은 이명박과 오세훈 시장은 지금의 위치에 신청사를 지었다. 유리로 정체성 없이,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면적을 차지하려 지은 신청사는 볼 때마다 답답하다. 차라리 그 공간을 공원화하고 용산으로 서울시청을 옮겼더라면 도심에 녹지공간이 더 생기고 용산도 한층 발전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기자의 사견으로는 서울시청이 청와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어야 서울시장이란 자리가 대통령의 권위에 버금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게 아닌지 ….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은 일종의 ‘천도’(遷都)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진산)으로,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주장하다가 태조가 정도전의 손을 들어줘 지금의 자리에 경복궁이 섰다. 하륜은 무악(지금의 서대문구 안산)을 추천하기도 했다. 조선의 주궁인 경복궁 자리를 놓고 530년 전에도 옥신각신했는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데 당시에는 논란이 컸던 것을 떠올리면 하물며 이번 대통령 집무실 이전도 이런 논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용산은 지리적으로 서울의 중심이다. 조선시대의 서울 영역으로 보면 도성 남쪽의 한강과 가까이하는 변두리였다. 이촌동(二村洞)이란 지명은 한강가에서 고기잡이로 생업을 잇던 강가의 조그마한 두 마을이란 뜻에서 왔다. 강남으로 서울이 퍼지면서 지금은 용산이 서울의 중심이다. 중국 대륙으로 보면 중원(中原)이고, 바둑판으로 보면 천원(天元)이다. 풍수지리가에 따르면 황룡이 물을 마시는 황룡음수형(黃龍飮水形)의 땅이다.
용산에는 서부이촌동, 한남동, 보광동, 주성동, 후암동, 청파동, 동자동 등 도심인데도 1980년대 분위기 나는 낙후된 동네들이 많다. 상대적으로 인구는 적고 교통도 한적하다. 고층빌딩이 마구 들어서 발전하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고 그런 면에서 고밀도화를 억제한 고 박원순 시장의 정책은 상당히 옳았다. 요즘 용산 거리를 보면 고만고만한 소형 오피스텔과 사무실 빌딩만 난립해서 올라간다. 기왕 지으려면 랜드마크 같은 건물도 들어서야 하고, 전원주택에 가까운 수준 높은 주거지도 조성돼야 하는데 중구난방이다.
오는 지방선거 당선이 유력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용산구민들의 반발을 의식해 용산 집무실 이전으로 인한 신축 인허가 억제 등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큰 설계도를 갖고 고밀도화와 그린시티화를 조화시켜야 할 것이다. 용산 리뉴얼에 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기자가 바라는 것은 시끌벅적한 용산이 아니라, 용산 미군기지가 대통령 집무실의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되고 용산민족공원을 아우르는 여전히 한적하면서도 조금은 지금보다 세련되고 정화된 정도의 용산이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들이 산다는 한남동과 이태원동, 동부이촌동과 젊은이들의 용광로인 이태원동을 품고 있는 용산구는 용산미군기지의 뉴욕 센트럴파크 화(化)를 통해 더욱 쾌적하고 아름다운 시티로 거듭날 수 있다. 아울러 용산역 기지창과 서부이촌동 일대가 아파트가 아닌 관광 및 상업지대로 변신해 포트가 서고 유람선과 화물선이 정박하는 글로벌 강해(江海)도시로 탈바꿈하는 것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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