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0 21:52:54
피나스테리드 성분의 오리지널 남성 탈모증 약인 한국오가논의 ‘프로페시아정’(위)과 대표적 동일 성분 제네릭인 JW중외제약의 ‘모나드정’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지난 5일 당사에서 ‘청년 탈모 비상대책위원회’ 주최 간담회까지 열면서 남성탈모 환자에게 건강보험을 적용한 약가로 탈모약을 복용하게 해주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국내 남성 성인 탈모증 환자는 800만명~10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에게 건강보험을 적용해 1인당 10만원씩만 건보 재정이 투입돼도 연간 8000억~1조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오리지널인 한국오가논(옛 한국MSD)의 ‘프로페시아정’(성분명 피나스테리드)는 한 달 분(1㎎짜리 28정) 가격이 5만원~6만원 선이다. 이에 비해 국내 제네릭은 한 달 분이 2만1000원~4만5000원으로 저렴하다.
이 약을 싸게 먹기 위해 피나스테리드가 5㎎씩 들어 있는 동일 성분의 전립선비대증 치료를 비정상적인 경로로 구해서 4등분 또는 5등분해서 먹는 편법이 이뤄지고 있다. 아는 의사를 통해 전립선비대증 진단을 받아 이 약을 받기도 하고, 아는 약사나 의약품 도매업자를 통해 얻어내기도 하며, 해외 직구를 통해 외국 제네릭을 구입하는 방법이 동원된다. 국산 전립선비대증 치료제는 한 알에 700원꼴이어서 5등분하면 하루치 약값이 140원으로 떨어진다.
이재명 후보가 탈모인의 이런 불편에 주목해 공약을 내놓은 것은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이 후보는 “이재명을 뽑는다고요? 노(no) 이재명은 심는 겁니다”라는 선거공약 광고에 출연해 타고난 ‘꾼’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에 막상 이런 것을 생각조차 못했던 야권과 보수언론은 ‘모(毛)퓰리즘’이라며 비판에 나섰다. 항암제 등 보험급여가 안 되는 약도 수두룩한데 건강이 아닌 ‘미용치료’에 건보 재정을 투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론적 비판이 많다. 이재명 후보는 “700억~800억원이 들 것”이라며 “해야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남성탈모 환자 수요도 많은데다가 후보로서 한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지는 못하겠다는 뜻이다.
기자는 곰곰 생각해봤다. 정말 나라에서 작정하고 약을 공급한다면 인도나 중국에서 벌크로 원료의약품을 들여와 찍고, 만약 건강보험공단에서 저가 입찰 경쟁을 부친다면 실제로 800억원 정도의 예산으로 급여가에 남성탈모약을 공급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문재인 케어’를 하느라 자기공명영상(MRI), 컴퓨터단층촬영(CT)를 찍는 데 10배가 넘는 비용이 늘어났다. 필요해서 찍었다고 하지만 사실 두통이나 치매를 MRI로 찍어 확인하는 게 과연 의미있는 진료 행태인지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비판이 많았다. 뇌경색이나 심근경색, 무릎관절염, 중증 어깨질환처럼 원인이 확실한 질환 외에 이들 영상진단은 의미가 반감되는 진단 수단들이다. 문재인 케어 덕분에 정형외과, 신경외과만 덕을 본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남성탈모증 약 급여화는 오히려 문재인 케어보다 더 실효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른바 ‘핀셋공약’으로 ‘소확행’ 표를 싹쓸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거 전략상 탁월하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미용치료에 대한 급여화가 봇물이 터지기 시작하면 건보재정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가뜩이나 문재인 케어로 건강보험료를 상대적으로 많이 내는 30~50대 연령층(시간이 없어 병원 가는 일이 드문), 부유층(건강검진과 꾸준한 자기관리 등으로 아픈 일이 적은)은 날로 올라가는 건강보험료가 불만인데 미용치료까지로 급여가 확대될 경우 더 많은 부담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7일 민주당 선대위 신복지위원회 보건의료분과장인 서울대 의대 김윤 교수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탈모가 중증이면 가발과 모발이식에도 건보를 제한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국회의원과 최근까지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지낸 김용익 서울대 의료관리학 교수와 선후배 사이인 김윤 교수도 대선 승리 후 한자리를 하겠다는 욕심인지 ‘관변학자’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 실망스럽다.
의료시스템의 효율성과 공익성을 추구하는 학문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포퓰리즘이 가미된 정책을 구상하고 입안하려 애쓰는 게 학자의 책무이겠지만 나가도 너무 나갔다.
상투적으로 항암제 급여화에 쓸 돈을 탈모약 급여화에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싶지 않다. 연간 수천만원 대의 첨단 항암제를 써봐야 수명연장 효과는 고작 수 개월이고 살아 있다한들 삶의 질이 좋은 수준도 아니다.
다만 가발, 모발이식까지 운운하면 나중에 점빼기, 얼굴흉터치료까지 끝도 없이 나갈까봐 걱정이 된다. 더욱이 여성들도 탈모 치료에 형평성 있게 급여를 해달라고 하면 효과가 미흡한 미녹시딜 바르는 약이나, 고가이면서 아직은 검증이 덜 된 17-알파에스트라디돌 외용제에도 급여를 주지 않을 수 없다. 한번 무너진 ‘미용치료에 대한 급여 허용’ 둑은 다시 세울 수 없기에 남성탈모약 공약은 신선하면서도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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