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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신륵사, 명성황후생가로 빛나는 여주의 고색창연
입력일 2019-09-19 15:53:21 l 수정일 2019-09-19 17:48:58
고려시대까지 수백명 비구 살던 고달사지 … 신라때 축조된 파사산성의 장쾌한 남한강 풍경

팔각원당형 부도 가운데 거작으로 손꼽히는 여주 고달사지 부도(국보4호·고려시대 초기)
양평 양수리(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한다.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주 시내를 관통하게 되고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오랜 세월 생명수로 대접받아왔던 남한강은 일찍이 곡창지대로 이름을 날린 여주 들판에 생기를 불어넣어왔다. 여주가 간직한 문화유산은 거의 대부분 남한강 주변에 흩어져 있다. 여주는 국보와 보물 수만 15개에 달해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중추적인 몫을 담당하고 있다.   
 
명성황후의 파란만장한 삶

여주 답사는 먼저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에서 가까운 명성황후 생가(기념관)에서 시작한다. 뮤지컬로, 텔레비전 드라마로, 또는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잘 알려진 명성황후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가지런히 단장된 생가는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황후(부인)였던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으로 애초에 안채만 남아있던 것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을 복원했다.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조선 중기 중부지방의 살림집 양식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명성황후(1851~1895)는 민치록(閔致祿) 딸로 철종 2년(1851)에 이 곳에서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생가 앞 기념관에는 생전 고종의 모습과 유품, 당시의 의복 같은 민속자료들을 자세하게 둘러볼 수 있다. 

명성황후가 왕비 책봉 직전 잠시 살았던 감고당(서울 안국동 한옥을 현 위치로 이전) ©헬스오
생가 옆에 있는 감고당(感古堂)은 명성황후가 왕비로서의 삶을 살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집인데, 원래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다가 2006년 유적 성역화사업에 따라 명성황후 생가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왔다. 감고당은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閔維重, 민치록의 5대조)이 살았으며,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 이곳에서 거처했다. 이후 대대로 민씨가 살았으며, 1866년(고종 3)에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됐다. 매년 10월에는 명성황후의 시해에 즈음해 그 넋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세종대왕과 효종대왕이 잠든 곳

세종대왕릉에서 효종대왕릉으로 이르는 솔숲길은 그윽한 풍치를 자아낸다. ©헬스오
명성황후 생가에서 10분 거리에는 영릉이 있다.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잠들어 있는 두 기의 능(陵)은 왼쪽(매표소 기준 남서쪽)이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1397-1450)과 그 왕비인 소헌왕후(1395-1446) 심씨를 합장한 영릉(英陵)이다. 오른쪽(북동쪽)이 조선의 17대 임금인 효종과 비 인선왕후가 잠들어 있는 영릉(寧陵)이다.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책길로 연결돼 있다. 

조선 왕릉의 이름은 왕의 업적과 인품을 고려해 사후에 지었다고 한다. 세종과 효종 능의 한자 이름이 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종은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점을 높이 기려 ‘꽃부리 영(英)’자를 붙였고, 대동법과 화폐개혁 등으로 나라 살림을 잘 꾸렸던 효종에게는 ‘편안할 영(寧)’자를 써서 그 공적을 기렸다.  

영릉(英陵)은 원래 태종이 잠들어 있는 헌릉(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의 언덕에 있었으나 예종 원년(1469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세종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은 그의 아들 문종이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또다시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돼 목숨을 잃는 등 불상사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조정 일부 대신이 풍수지리를 내세워 헌인릉과 함께 있었던 영릉(당시엔 수릉·壽陵) 터가 나쁜 탓이라 주장하자 세조를 이은 예종이 즉위하면서 이런저런 반대로 못 옮기던 능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 ©헬스오
영릉은 주변에 노송이 우거져 있고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어 역사기행 겸 쉼터로도 좋다. 능 입구에는 용비어천가, 훈민정음언해 등 세종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전시관(세종전)이 있고, 전시관 앞 잔디 마당에는 세종 때 발명한 자격루(물시계), 앙부일귀(해시계), 측우기, 풍기대, 혼천의 등 과학기기 모형이 전시돼 있다.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을 모두 둘러보는데 2시간 정도 걸린다. 

남한강을 앞에 두고 들어선 천년고찰

여주시내를 가로지르는 여주대교를 건넌다. 다리 밑으로 남한강이 흘러간다. 여주 사람들은 남한강을 신성한 강으로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철 마르지 않는 강물은 오랜 세월 그들의 생활터전이자 쉼터였다.

여강(남한강의 옛 이름)이 바라보이는, 경치 아름다운 곳에 들어선 신륵사(神勒寺)는 마당 앞으로 강이 흐르는 드문 절집이다. 여주를 대표하는 천년고찰로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경내에는 극락전, 다층석탑, 조사당, 명부전, 보제존자석종, 대장각비 같은 국보급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극락보전 앞에 나란히 서 있는 향나무는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하며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의 지팡이가 싹터 자랐다는 6백 년 된 커다란 은행나무는 이 절의 역사를 헤아려보게 해준다. 태조 이성계가 스승 무학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는 팔작지붕집인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이다. 또 절 앞 강가 절벽에 있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에 오르면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신륵사의 경치 중 으뜸으로 꼽힌다. 

고려시대의 여주 신륵사 다층(보물 제226호) ©헬스오
신륵사에 남아있는 여러 문화재 중 특히 탑이 눈길을 끈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조선 전기의 다층석탑(보물 제225호)과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아 세운 고려시대의 다층전탑(보물 제226호)은 깊은 멋과 함께 올곧은 기품을 보여준다.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는 여주팔경 중 첫 번째이며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여강의 모습도 아름답다. 

신륵사 앞 조포나루는 옛날 한강과 남한강을 오가던 황포돛배들로 장관을 이뤘던 곳이다. 황포돛배들은 한강의 마포나루와 광나루, 이곳 남한강의 조포나루와 이포나루를 바삐 오가며 소금, 새우젓, 곡식, 땔감 같은 생활 용품을 실어 날랐다. 여주 사람들은 삶을 살찌우는 이런 강줄기를 ‘여강 백리길’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70년대 팔당댐 건설로 뱃길이 끊겼고 다리가 놓이고 길이 뚫리면서 나루터도 함께 사라졌다. 여강에는 한 때 이포나루와 조포나루를 비롯해 총 17개의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여주대교 쪽 맞은 편 강변에는 마암(馬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마암 언덕에 자리잡은 영월루(迎月樓, 영월근린공원)에서 바라보는 남한강 경치도 아주 좋다. 

옛 절터와 풍치 빼어난 산성

여주시내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양평 쪽으로 가면 옛 절터인 ‘고달사지(高達寺址)’를 만나게 된다. 고달사는 764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돼 고려시대까지 존속했다. 한때 사방 30리가 모두 절땅이었고, 수백 명의 비구들이 도량을 지켰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하는데, 지금은 덩그렇게 절터와 유물 몇 점만 남아있다. 

절터를 지키고 있는 유물은 그 가치가 아주 뛰어나 보물과 국보로 지정됐다. 혜목산(慧目山)이 병풍처럼 둘러선 절터엔 석불대좌(보물 제8호)를 비롯해 현재 남아 있는 부도 가운데 가장 크고 높은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가 우뚝 서 있다. 두 유적은 단아함과 웅장함이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달사의 여러 유물들은 고달이란 석공의 넋이 스민 작품이라고 한다. 불사에만 몰두한 나머지 가족이 굶어죽은 줄도 몰랐던 고달은 어느 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고, 훗날 큰 도인이 되었으니 절 이름도 고달사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여주와 이천의 경계역에 위치한 파사산성(신라 파사왕때 축조) ©헬스오
고달사지에서 여주와 양평을 잇는 37번 국도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더 올라가면 금사면 이포리와 대신면 천서리를 잇는 이포대교를 만나게 된다. 일제 때 여주 일대의 곡물이 이곳 이포대교 밑 나루에서 실려 한강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서글픈 역사가 있었다. 이포대교 옆 천서리 마을 뒤에 있는 파사산은 해발 200미터 남짓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남한강과 이포대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경치가 아주 좋다. 산 정상부엔 900여m의 성이 둘러서 있는데 신라 5대 파사왕 때 쌓은 파사산성(婆娑山城)이다. 복원된 산성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은 무척 장쾌해 막힌 가슴이 탁 트인다. 파사성 일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군사 요충지였던 곳으로, 지금도 해마다 육·해·공군이 합동으로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성의 서북쪽 아래에는 높이 5m에 이르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부르는데 이는 마애불이 산성을 쌓은 장군의 초상이라는 설화에서 비롯됐다.

김초록 여행작가 rimpyung74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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